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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침입자

  • 작성일 2007-06-27
  • 조회수 619

< SF 단편소설 >

 

 

                                           침입자

 

                                                                                         화이트울프

 

 

                               1.


 황금물결이 출렁였다. 알알이 박힌 낟알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가 밀과 벼를 교배해서 만든 개량 작물이었다. 이 작물의 원래 색깔은 황금색이었지만 때로는 오렌지색으로 변했다. 과일밭도 풍성한 수확을 예고하고 있었다. 체리는 그의 주먹만 했고 토마토는 그의 머리통만 했다. 농장 전체가 계절과 무관한 거대한 온실이었다. 이 미니 행성엔 겨울이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만물의 창조자였다. 물이 있으라 하면 물이 퐁퐁 솟아나고, 햇빛이 있으라 하면 구름 사이로 빛줄기가 비쳤다. 숲을 통째로 뒤엎고, 폭로를 거꾸로 흐르게 할 수도 있었다. 그의 전지전능함은 미니 행성에 입주하면서 부여받은 특혜였다.

 창밖의 풍경은 액자의 그림처럼 고정되어 있었다. 푸른 하늘에 점점이 떠있는 흰 구름조차 인공적이었다. 지평선 너머를 응시하는 그의 눈은 꿈을 꾸듯 몽롱했다. 미니 행성 전체가 그를 위한 왕국이었다. 타인이라는 존재는 애초부터 배제되어 있었다. 그는 이 불멸의 왕국을 혼자 힘으로 세웠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의 발치에 누워있던 스파이크는 따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코커스패니얼과 닥스훈트를 적절히 교배한 수컷 성견이었다. 스파이크의 눈빛은 영리하고 쾌활했다. 스파이크가 앞발을 들었다 내렸다. 심심하니까 놀아달라는 몸짓이었다. 그는 손을 뻗어 녀석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스파이크가 다시 앞발을 들었다 내렸다. 

 그는 눈을 깜박였다. 스파이크는 같은 동작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되풀이하고 있었다. 동일한 영상이 반복 재생되는 것처럼. 착각이겠지.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마시던 머그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유백색의 도자기 재질에 화려한 꽃무늬가 프린트된 머그잔이었다. 머그잔에는 그가 블렌딩한 허브차가 담겨있었다.

 돌연 머그잔이 부르르 진동했다. 그의 손에서 미끄러진 머그잔은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났다. 그는 흠칫 놀랐다. 일순간 머그잔이 공중에 붕 떠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오늘 티타임은 망쳤군. 그는 인상을 쓰며 테이블 위의 벨을 눌렀다. 가사도우미 로봇을 호출하는 벨이었다. 불손하게도 가사도우미 로봇은 응답이 없었다. 깨진 머그잔이나 쏟아진 허브차를 처리하는 것은 가사도우미 로봇의 일이었다. 그로서는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했다.

 급한 마음에 그는 주머니를 뒤져 손수건을 꺼냈다. 손수건으로 바닥을 훔치다 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의 시야에 빨간 카드 봉투가 들어왔다. 빨간 카드 봉투는 머그잔의 파편 사이에 놓여있었다. 축하카드가 들어있을 법한 고급스런 재질의 봉투였다. 봉투의 표면에는 금박을 입힌 글씨가 새겨져있었다. 오네이로스(Oneiros)라고.

 그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다 흘린 것 같았다. 처음 보는 카드 봉투가 왜 주머니에 들어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다른 미니 행성의 입주자가 그에게 보내는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오네이로스가 누구든 간에 그는 카드 봉투를 열어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조용한 삶을 위해 이 미니 행성에 입주했고, 스파이크 외의 말벗을 원하지 않았다. 그의 과거도 망각의 안개에 묻혀 잊혀진지 오래였다.

 그는 빨간 카드 봉투를 머그잔 조각과 함께 쓰레기 분쇄기에 버렸다. 쓰레기 분쇄기는 몸속에 들어온 쓰레기를 맛나게 먹어치웠다. 창문으로 들어온 미풍이 그의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미풍에 실려온 향긋한 꽃향기가 집안으로 퍼졌다. 집안 내부는 그의 취향에 맞춰 고풍스러우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의 집은 견고한 성채였다. 이 성채 안에서는 상처받는 일이 없으며, 그의 자아는 안전하게 보존되리라. 깨진 머그잔도, 빨간 카드 봉투도 그의 뇌리에서 지워졌다. 그는 평소의 습간을 회복했다.

 “스파이크!”

 그의 부름에 스파이크가 벌떡 일어나 꼬리를 짧고 빠르게 흔들었다.

 “산책가자.”

 그가 문을 열자마자 스파이크는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2.


 정원사 로봇도 행방불명이었다. 정원사 로봇이 게으름을 피운 탓에 화초들의 잎은 누렇게 시들어있었다. 그 놈이 돌아오면 낱낱이 분해해서 쓰레기 분쇄기에 집어던져야지. 그는 씩씩거리며 원예가위로 누런 잎을 잘라냈다.

 피라밋 모양의 태양열 온실은 그의 자랑이었다. 진귀한 야채는 물론 식용꽃과 각종 허브가 생육되고 있었다. 자동관리 시스템이 구축된 온실에선 병충해의 발생이 없었다.

 처음 이 미니 행성을 분양받았을 때가 생각났다. 물 한 방울 없는 사막 행성이었다. 그는 가이드북을 꼼꼼히 읽었기 때문에 의욕이 충천했다. 생물 생성 장치를 설치하고 물줄기를 끌어오고 땅을 경작하고...... 농장을 돌보는 일은 작업용 로봇들이 도맡았으므로 그는 시간이 남아돌았다. 여유시간에는 온실을 거닐며 허브 향을 음미하곤 했다.

 가사도우미 로봇, 정원사 로봇, 작업용 로봇은 모두 그의 작품이었다. 그는 인간 모양의 로봇들을 개발하면서 인간에 가까운 표정도 가미했다. 로봇들은 유순했으며 이제껏 명령을 어긴 적이 없었다. 가사도우미 로봇과 정원사 로봇도 부품의 고장으로 어디선가 뒹굴고 있는 게 아닐까?

 “스파이크, 돌아가자.”

 그와 스파이크는 온실을 나와 집으로 향했다. 그는 즉흥적으로 곡조에 맞춰 휘파람을 불었다. 그의 왕국은 건재했다. 사소한 일로 마음을 끓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집 앞에 멈춰선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고성을 모방하여 건축한 그의 집은 왕궁의 위풍을 지니고 있었다. 왕궁의 주인으로서 그는 집의 평화가 침해받는 일이 없도록 노력할 것이다.

 서재로 들어가던 그는 충격으로 얼어붙었다. 쓰레기 분쇄기에 버렸던 빨간 카드 봉투가 컴퓨터 앞에 놓여있었다.‘오네이로스’라는 금박 글씨가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흡사 카드 봉투 안에 발광체가 살고 있는 듯 했다.

 누가 이런 장난을 치는 걸까? 그는 불쾌함으로 속이 느글거렸다. 그가 이 미니 행성에 사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입주를 서두른 것도 사람들과의 교제를 피해서였다.

 서재에도 쓰레기 분쇄기가 있었다. 그가 버린 빨간 카드 봉투는 쓰레기 분쇄기 안에서 요란한 소음을 내며 사라졌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 불길한 카드 봉투가 그의 일상을 위협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으리라.

 컴퓨터의 네트워크에 접속해 식물영양제의 제조법을 배우고, 서재 옆의 실험실에서 식물영양제를 제조하고. 그도 나름대로 바빴다. 식물영양제를 만들어라 명령만 하면 실행이 될 테지만, 너무 쉽다보니 재미가 없었다. 가끔은 초월적 능력을 접어둔 채 직접 손을 써서 하는 편이 나았다. 그동안 스파이크는 옆에서 장난감을 갖고 놀았다.

 날이 저물어도 가사도우미 로봇은 종적이 묘연했다. 로봇들이 파업이라도 한단 말인가. 그는 저녁식사를 위해 자동 요리기의 힘을 빌렸다. 다양한 채식 메뉴를 입력하자 빌트인 오븐렌지처럼 생긴 자동 요리기가 가동됐다. 냉장고의 재료가 자동 요리기에 들어간 지 몇 분 만에 요리가 완성되었다. 

 그와 스파이크는 단둘이 저녁식사를 했다. 스파이크는 인간처럼 식사 중에 수다를 떠는 일이 없었다. 그는 만족스러웠다. 앞으로도 미니 행성이 방문자를 허용하는 일은 없으리라.

 식사 후 그는 스파이크와 카드놀이를 했다. 스파이크는 카드놀이를 할 수 있도록 훈련된 개였다. 스파이크가 같은 카드를 연속해서 내는 바람에 그는 야단을 쳤다. 스파이크의 지능이 쇠퇴하는 게 아닌가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다.

 세 번째 빨간 카드 봉투는 침대 머리맡의 베개 위에서 발견되었다. 그는 스파이크를 애견 침대에 재운 후 자신도 잠옷으로 갈아입던 중이었다. 번번이 출현하는 카드 봉투에 대해 그는 싫증이 났고 흥미를 잃어버렸다. 오네이로스 따위 엿이나 먹으라지.

 그는 빨간 카드 봉투를 베개 밑에 쑤셔 넣은 채 잠을 청했다. 달콤한 잠이었다. 꿈속에서 그는 자신의 왕국을 순시했다. 미니 행성은 토성처럼 아름다운 고리를 두르고 있었다. 고리에서 흐르는 얼음조각이 충돌하며 환상적인 음악을 연주했다.

 그는 결코 늙지 않는 왕이었다. 그의 나이가 몇 살인지, 오늘이 몇 월 몇 일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침실에는 달력이 없었다. 이 미니 행성에서 살다보면 시간 개념이 흐려졌다. 몇 년이 흐른 것같기도 하고, 영겁 속에 머무는 것같기도 했다.


                                       3.


 그는 바짝 긴장했다. 온실의 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누군가 침입한 흔적이 역력했다.

 ‘미니 행성은 철통같은 보안 시스템으로 입주자의 사생활을 완벽하게 보호합니

 다.’

 가이드북의 그 문장은 뻔뻔한 거짓말이었다. 그는 분통을 터뜨렸다. 사기꾼들 같으니. 철통같은 보안 시스템 좋아하시네. 얼마나 허술했으면 이렇게 손쉽게 뚫린단 말이야?

 정원사 로봇은 아예 온실을 내팽개치고 노는 모양이었다. 침입자는 온실에 출입하는데 아무 제재도 받지 않았다. 온실 안으로 들어가며 그는 몸을 떨었다. 한기가 몰려왔다. 재앙이 닥쳐온 느낌이었다.

 그의 예감이 들어맞았다. 처참한 광경에 그는 할 말을 잃었다. 온실의 모든 식물이 얼어죽어 있었다. 얼어죽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온실의 벽에 부착된 디지털 온도계를 확인해보았다. 영하 5도까지 내려간 온도였다. 침입자가 온실 자동관리 시스템을 고의로 훼손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는 오랜만에 자신의 초월적 능력을 과시하기로 했다.

 온실의 온도를 예전으로 돌려놓아라.

 명령을 내린 후 그는 잠자코 기다렸다. 그러나 온도계의 온도는 변동이 없었다. 그의 초월적 능력이 사라진 것이다! 그러자 가슴이 벌렁거리며 호흡이 가빠졌다.

 침착해야 돼. 그는 심호흡을 했다. 몸의 컨디션이 나빠서 초월적 능력이 일시적으로 약해진 것뿐이야. 그러다 원인을 알게 됐다. 침입자가 그의 초월적 능력이 발휘되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주머니에 넣어온 식물영양제를 꺼내 던져버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침입자에 대한 대처방법은 가이드북에 나오지 않았다. 처음으로 그는 이 미니 행성에 입주한 일을 후회했다. 그의 왕국은 무방비 상태였다. 그는 유능한 통치자가 아니라 고독한 은둔자에 불과했다. 그는 자신의 무력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어떡하면 그 가증스런 침입자를 물리칠 수 있을까. 한참 머리를 굴리다가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는 온실을 나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스파이크는 그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그는 신이 나서 계획을 구상했다. 작업용 로봇을 재프로그래밍해서 경비용 로봇으로 개조하면 된다. 경비용 로봇 군단이 수색에 나선다면 쥐새끼 같은 침입자는 금방 잡을 수 있을 테지.

 그는 무빙로드에 올라탔다. 스파이크도 무빙로드에 얌전하게 앉았다. 무빙로드는 농장을 가로질러 전진했다. 황금물결이 그의 주위로 스쳐지나갔다.

 스파이크가 날카롭게 짖었다. 그는 눈을 의심했다. 작물들의 줄기가 부러지고 잎은 찢어져있었다. 과일밭도 유사한 피해를 당했다. 터진 과일의 과즙이 사방에 튀어 얼룩이 져있었다. 태풍의 강타가 아니고선 이토록 쑥대밭이 될 리 없었다. 태풍이라니 어불성설이다. 미니 행성의 기후는 임의로 설정할 수 있었다. 당연히 그는 자연재해의 요인을 배제한 이상적인 기후를 설정값으로 저장했다. 설마 침입자가...... 그는 외계 행성에서 온 괴물이 농장을 짓밟는 광경을 그려보았다. 등골이 오싹했다. 괴물이 매복하고 있다가 불쑥 나타나 그에게 덤벼들 수도 있다. 초조해진 그는 자신의 초월적 능력을 한 번 더 시험해보기로 했다.

 농장을 원상태로 복구하라.

 역시 반응이 없었다. 그의 초월적 능력이 완전히 소실된 것이다. 그는 무빙로드에 주저앉아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창고에 도착했는데도 스파이크는 내릴 생각을 안했다. 할 수 없이 그는 스파이크를 품에 안은 채 무빙로드에서 내렸다. 창고 안은 텅 비어있었다. 황당했다. 침입자는 창고를 털어 작업용 로봇들을 깡그리 훔쳐간 것이다. 대담무쌍한 절도행위에 기가 막힌 그는 허허 웃음이 나왔다. 가사도우미 로봇과 정원사 로봇의 행방도 알 것 같았다. 침입자가 목표로 노린 대상은 로봇이었다. 이 로봇들을 다른 용도로 개조해서 판매한다면 수입이 짭짤하리라.

 날벌레가 윙윙거리며 눈앞에서 춤을 췄다. 날벌레는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날벌레들은 구름처럼 몰려왔다. 날벌레들을 쫓으며 그는 무빙로드에 발을 디뎠다. 섬광이 번득였다. 현기증이 일었다. 그의 몸이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스파이크가 낑낑거리는 소리에 그는 정신을 차렸다. 그의 목구멍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는 침실에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 침실로 공간이동을 하다니! 그가 미쳤거나 세상이 뒤집혔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스파이크는 그의 품에서 깡총 뛰어내렸다. 녀석은 경계하듯 으르렁거렸다. 그의 침실은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로봇 도둑의 행보는 신속했다. 그가 밖에서 어정거리는 동안 집에 잠입해서 침실부터 뒤진 것이다. 로봇 도둑은 옷장과 이불장과 협탁의 서랍까지 빼서 뒤집었다. 침대 밑에 떨어져있던 베개가 그의 발에 걸렸다. 그제야 그는 어젯밤 베개 밑에 넣어둔 빨간 카드 봉투가 없어졌음을 알아차렸다. 왜 침입자가 빨간 카드 봉투를 원하는 거지? 그는 의아했다.

 “스파이크, 따라와.”

 그는 스파이크를 끌고 서재로 갔다. 컴퓨터의 네트워크로 빨간 카드 봉투를 검색하면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리라. 잠깐, 그 봉투의 표면에 적힌 이름이 뭐였더라?

 컴퓨터는 한낱 고철덩어리로 전락해있었다. 로봇 도둑은 컴퓨터 시스템까지 망가뜨렸다. 컴퓨터는 부팅조차 되지 않았다. 컴퓨터 옆에 놓아둔 가이드북도 없어졌다. 로봇 도둑의 소행이 분명했다.

 꺼져있던 모니터가 켜지고 푸른 화면이 나타났다. 낯익은 영어 단어가 반복되며 화면을 수놓았다. 오네이로스, 오네이로스, 오네이로스, 오네이로스, 오네이로스.

 공포가 그의 혈관을 타고 흘렀다. 손끝이 차갑게 식는 듯했다.

 “스파이크, 이제야 알겠어. 오네이로스는 바로......”

 그 순간 모니터의 전원이 꺼졌다. 자가발전기가 고장난 걸까? 그는 밖으로 나가려다 멈칫했다. 서재의 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침입자는 교활했다. 그가 서재에 들어가도록 유인한 뒤 함정에 빠뜨린 것이다.

                                       4.


 엘리베이터 안은 후덥지근했다. 그를 포함한 여섯 명의 사람들이 갇혀있었다. 그들은 웅성거리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구조대는 왜 안오지? 그는 사람들과 떨어져 구석에 있었다. 한 남자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은 폐쇄공포증이 있나요?

 남자의 심문하는 말투에 그는 화가 났다.

 아뇨.

 그런데 왜 식은땀을 흘리죠?

 남자는 히죽거렸다. 그는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냈다. 구조대를 기다리는 동안 남자에 대한 증오와 자신에 대한 수치심이 그의 속을 태웠다.

 안개가 걷히듯 기억이 되살아났다. 혼란스러웠다. 이 미니 행성에 입주하면서 그는 과거와 절연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과거는 망령처럼 도사리며 그의 목을 옥죄고 있었다. 미니 행성에 오기 전 그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엘리베이터 안의 그는 다른 차원의 우주에 존재하는 그 자신일까?

 문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궁지에 몰린 그는 머리를 잡아 뜯으며 외쳤다.

 “스파이크, 네가 무서운 경비견으로 변해 저 놈을 물어뜯으면 좋겠다!”

 이 때 예상치도 못한 응답이 왔다. 젊고 청아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스파이크의 업그레이드를 원하십니까?”

 그 목소리는 친숙했다. 그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넌 누구지? 내가 설계한 로봇이니? 어디 숨어있는 거야?”

 여자는 그의 질문을 못들은 척 기계적으로 반복했다.

 “스파이크의 업그레이드를 원하십니까?”

 문을 살며시 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

 스파이크의 몸이 쑥쑥 자라듯 커졌다. 그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스파이크는 핏불테리어와 도베르만을 교배한 경비견으로 변했다. 침입자가 들어오자마자 스파이크가 달려들었다. 침입자는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스파이크는 침입자의 다리를 물고 늘어졌다. 침입자는 곱상한 외모의 20대 청년이었다. 남의 미니 행성에 침입해서 도둑질을 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청년은 그의 옷을 그대로 베낀 듯 어깨에 견장이 달린 은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어째서 이 도둑놈이 나랑 옷차림이 같지?”

 그는 스파이크의 업그레이드를 실행한 여자에게 질문했다. 여자는 묵묵부답이었다. 청년이 주먹으로 갈기자 스파이크는 나가떨어졌다. 청년의 오른쪽 소매가 올라가면서 손목에 찬 은색 금속 팔찌가 드러났다. 그 팔찌는 그의 눈에 익었다. 그는 왼쪽 소매를 걷어보았다. 그의 손목에도 청년과 똑같은 은색 금속 팔찌가 있었다. 팔찌의 액정화면은 켜진 상태였다.

 “이 팔찌는 뭐야?”

 이번에도 여자는 대답이 없었다. 청년이 자신의 팔찌에 대고 뭐라고 얘기했다. 그의 귓전에 여자의 목소리가 쟁쟁히 울렸다.

 “종료합니다.”

 뭐라고? 종료라고? 지직거리는 잡음을 내며 여자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스파이크는 재공격을 시도했다. 녀석은 펄쩍 뛰어올라 청년의 팔을 물려고 했다. 청년은 스파이크의 입을 틀어막은 채 데굴데굴 굴렀다. 저러다 스파이크가 다치면 어떡하지? 그는 조마조마하여 가슴을 졸였다. 스파이크는 여태껏 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자라왔다. 왜냐하면...... 실타래처럼 엉킨 그의 머릿속이 한 올씩 풀려갔다.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그는 몇 번이고 도리질을 했다.

 청년이 스파이크의 목을 졸랐다. 스파이크는 눈을 감고 꿈쩍도 않았다. 청년이 스파이크를 걷어찬 뒤 일어났다. 그는 자신의 심장이 정지한 듯 숨이 막혔다.

 “나쁜 자식! 내 개를 죽이다니......스파이크는 내 소중한......”

 그는 청년의 멱살을 잡아채며 악을 썼다. 청년은 담담했다. 청년의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 앞에서 그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스파이크는 예방접종을 맞았던가? 동물병원에 갔던가? 아니, 그런 일은 없었다. 스파이크는 단지 그의...... 손에서 힘이 스르르 빠진 그는 청년의 멱살을 놓아버렸다. 청년은 차분한 태도로 말했다.

 “스파이크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닙니다.”

 청년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가상현실 게임 속의 아이템이니까요.”


                                       5.


  청년은 가슴께의 속주머니에서 꺼낸 빨간 카드 봉투를 그의 눈앞에 들이댔다.‘오네이로스’라는 금박 글씨가 형형하게 빛났다.

 “우리가 보낸 메시지를 왜 읽지 않았죠?”

  청년의 책망을 받자 그는 벌 받는 아이인 양 기가 죽었다. 청년이 빨간 카드 봉투를 열고 그 안의 메시지 카드를 꺼내 또박또박 읽었다.

 “시스템의 오류로 인해 게임을 진행할 수 없습니다. 사용자는 즉시 로그아웃을

 해주기 바랍니다.”

 청년의 목소리는 수만 광년 떨어진 별에서 오는 소리처럼 아득했다.

 “미니 행성 분양 게임은 뒤죽박죽 엉망이 됐어요. 장면의 반복 재생, 아이템의

 파손과 소멸, 배경의 변경이나 파괴 등의 오류가 빈발했죠?”

 청년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그는 맥이 빠졌다. 동작을 반복하는 스파이크. 박살이 난 머그잔. 사라진 로봇들. 얼어죽은 화초. 짓밟힌 작물. 침실까지의 공간이동. 미니 행성을 통제하는 주체는 그의 의지가 아니라 프로그램 시스템이었다.

 “내 초월적 능력이 고갈된 것도 시스템 오류인가요?”

 그의 질문에 청년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건 오류가 아닙니다. 오네이로스는 뇌파로 조정하는 가상현실 게임이라는

 걸 잊어선 안됩니다. 가상현실 게임을 과다사용하면 뇌를 혹사해서 뇌파가 과다

 방출되고 집중력이 떨어집니다. 그 결과 아이템의 수정 및 보완이 불가능해집니

 다.”

 초월적 능력의 실체가 뇌파의 활동력에 지나지 않다니, 그는 망연자실했다.

 “난 당신이 온실과 농장을 훼손하고 로봇들을 훔쳐갔다고 오해했어요.”

 그의 말에 청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게임에 침투한 후 오류가 어느 정도인지 살펴본 것뿐입니다.”

 청년의 해명은 명쾌했지만 그의 의혹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다.

 “게임을 강제종료하면 되지 않나요? 굳이 당신을 보내지 않아도 됐을 텐

 데......”

 청년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오네이로스를 강제종료하면 시스템이 손상될 위험이 높아집니다. 시스템 복원

 비용은 만만치 않습니다. 그리고......”

 청년은 비밀을 털어놓듯 눈을 찡긋하며 낮게 속삭였다.

 “사용자의 뇌 기능이 손상되는 부작용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심한 경우 간질

 이나 치매를 초래할 수도 있어요.”

 갑작스런 두통이 그를 엄습했다. 뇌세포가 죽어가는 광경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스파이크를 경비견으로 바꾼 여자는 누구죠?”

 그가 뜬금없이 묻자 청년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죠?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요? 가상현실 게임도우미를......”

 점점 기억이 또렷해졌다. 가상현실 게임도우미가 아니었다면 그는 이 미니 행성을 건설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상현실 게임도우미는 그가 요구하는 아이템을 세밀하게 창조했다. 시간이 흐르자 아이템은 포화상태에 이르고 미니 행성의 삶은 정상궤도에 진입했다. 그는 더 이상 가상현실 게임도우미를 찾지 않았다.

 “뇌파 조절이 미숙한 초보자를 위해 우리는 가상현실 게임도우미를 제공합니

 다. 당신처럼 뇌파 활동이 불안정할 때도 가상현실 게임도우미가 개입하게 됩니

 다.”

 청년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 여자가, 게임도우미가 갑자기 사라진 이유는 뭐죠?”

 청년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오류 때문에 가상현실 게임도우미도 비정상이에요. 난 중앙 통제실의 동료에

 게 가상현실 게임도우미를 꺼달라고 했어요. 그러지 않았으면 사고가 생겼을 거

 예요.”

 “그렇지만 스파이크를 죽인 것은 잔인했어요.”

 그의 원망 섞인 말에 청년은 답답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게임과 현실을 구별 못하는 사용자가 의외로 많군요.”

 그는 입을 다물었다. 왕국은 멸망해버렸고, 그는 추방된 왕이었다. 모든 것을 잃고 빈손이 된 왕에게도 체면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와 청년은 집을 나와 천천히 걸었다. 농장은 황량한 폐허로 변해있었다.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불었다. 쓰러진 작물들이 서로 부대끼며 흐느꼈다. 그는 귀를 막고 싶었다. 청년이 지껄이는 소리도 시끄럽기만 했다.

 “미니 행성 분양 게임의 프로그래머는 휴가 중이에요. 그래서 내가 대신 출동

 했어요. 바벨탑 리모델링 게임 알죠? 난 그 게임의 프로그래머입니다.”

 청년은 입을 비쭉이며 못마땅한 듯 덧붙였다.

 “오네이로스 게임 중에선 미니 행성 분양 게임이 제일 인기랍니다.”

 청년의 말을 무심코 듣다가 그는 문득 생각났다.

 “내 가이드북은 왜 가져갔죠?”

 “아, 이거 말인가요?”

 청년은 옆구리의 주머니에서 가이드북을 꺼내 표지를 톡톡 두드렸다. 홀로그램 표지에 삽입된 미니 행성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미니 행성의 고리에서 점멸하는 광고 문안이 그의 눈길을 끌었다.

 ‘미니 행성은 당신의 꿈을 실현해드립니다.’

 그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배신감으로 가슴이 뻐근했다. 그의 지상낙원은 순식간에 실락원이 돼버렸다. 청년은 가이드북을 뒤적이며 대답했다.

 “내가 만든 게임이 아니라서 익숙하지 않았어요. 이 가이드북이 없었다면 나는

 길을 잃고 헤맸을 거예요. 컴퓨터의 전원을 끄고 당신을 서재에 가두지 못했을

 테죠.”

 작물밭에 이르자 청년이 걸음을 멈췄다. 청년은 황금색 작물의 찢어진 잎 조각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훅 입김을 불었다. 잎 조각이 날리며 공중으로 흩어졌다.

 “색상이 이게 뭐야, 촌스러움의 극치네요.”

 청년의 비평에 그는 마음이 상했다. 미니 행성 분양 게임의 프로그래머에 대한 질투심 때문일까. 청년은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투였다. 입고 있는 은색 제복의 깃을 잡아당기며 얼굴을 찡그리기도 했다.

 “사용자의 의상을 선택할 수 없고, 이런 고리타분한 옷뿐이라니......”

 청년의 은색 금속 팔찌에서 신호음이 울렸다. 청년은 팔찌에 대고 말했다.

 “끝났어. 고객도 나도 둘 다 무사해. 곧 돌아갈게.”

 그도 청년처럼 금속 팔찌로 통신한 적이 있었다. 항상 같은 내용의 메시지를 수신했다. 중앙 통제실에서 알려드립니다. 박 성준 씨는 게임의 하루 사용한도를 초과했습니다. 뇌파의 안정을 위하여 게임을 중지해주십시오.

 그의 기억의 물꼬가 터지며 흘러넘쳤다. 액정 화면이 있는 금속 팔찌는 오네이로스 게임기였다. 그는 자신의 손목에 찬 게임기를 들여다보았다. 액정 화면은‘게임 모드 진행 중’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중앙 통제실에서 사용자에게 메시지를 보낼 때는 게임기 오른쪽의 버튼에 빨간 불이 들어온다. 사용자가 중앙 통제실에 문의할 일이 있을 때도 이 버튼을 누르면 된다. 그는 버튼을 눌러봤지만 불은 들어오지 않았다. 청년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현재 통신 기능이 작동하지 않아요. 수정하려면 시간이 꽤 걸리죠. 우리가 왜

 그런 우스꽝스러운 빨간 봉투를 보냈는지 알만하죠?”

 통신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했다면 어떠했을까? 청년이 침입자로 오인되는 일도, 스파이크가 희생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의 마음은 허탈함으로 가득 찼다.

 “내가 게임에 접속한지 얼마나 됐나요?”

 “게임 사용기록에 의하면 세 시간이 지났습니다.”

 미니 행성의 시간은 무한대로 팽창했고, 그로 하여금 신기루 같은 삶을 누리게 해줬다.

 “왜 난 게임 중이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거죠? 당신이 오지 않았으면

 난......”

 “글쎄요. 게임하느라 긴장한 뇌의 혈류가 감소되면 일어나는 일시적 기억장애

 일 거예요. 체질에 따라선 기억장애가 오래 지속되는 사람도 있대요.”

 건성으로 대답하던 청년은 자신의 손목에 찬 게임기를 만지작거렸다.

 “로그아웃하는 법은 잊지 않았겠죠?”

 청년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정신을 집중하자 눈앞에 게임 종료 메뉴가 나타났다. 주위의 풍경은 서서히 흑백사진처럼 퇴색되었다. 그는 자신의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속으로 읊었다. 곧이어 메시지가 떴다.

 ‘로그아웃 하시겠습니까?’

 그는 잠시 망설였다. 현실로 귀환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차라리 가상현실 속에서 영원히 깨지 않는 꿈을 꾸고 싶었다. 오류투성이의 꿈일망정 현실보다는 덜 고달플 테니까.

 “서둘러요.”

 청년이 그를 재촉했다. 그는 뇌세포를 쥐어짜듯 억지로 뱉어냈다. 로그아웃.

                                       

                                       6.


 홀로그램 벽지로 장식된 좁은 방 안이었다. 등과 어깨에 닿는 감촉이 푹신했다. 그가 앉아있는 1인용 소파는 가죽소재였다. 1인용 소파 옆에는 등받이 보조의자가 있었다. 바벨탑 리모델링 게임의 프로그래머로 자신을 소개한 청년은 그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는 참이었다.

 청년은 능숙한 동작으로 무선 헤드셋과 고글 모양의 H M D (Head Mounted Display)를 벗었다. 그는 청년의 흰 가운과 가슴에 단 ID 카드를 눈여겨봤다. 그 카드에 찍힌‘오네이로스’라는 로고가 선명했다.

 그도 무선 헤드셋과 H M D 를 벗었다. 무선 헤드셋과 H M D 의 전원이 자동으로 꺼졌다. 헤드셋에는 수백 개의 센서가 장착되어 있었다. 이 센서들이 사용자의 뇌파 신호를 읽고 분석한 후 그 정보를 게임기에 송신하는 것이다. 그의 왼쪽 손목에 찬 게임기는 청년의 오른쪽 손목에 찬 게임기와 케이블로 연결돼있었다. 청년이 미니행성에 침입한 수법은 터무니없이 단순했다.

 벽의 모니터를 통해 한 여자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청년처럼 흰 가운을 입고 ID 카드를 단 20대 여자였다. 그가 게임의 사용한도를 초과할 때마다 경고 메시지를 보내던 중앙 통제실의 직원이리라. 여자는 청년에게 핀잔을 줬다.

 “왜 이리 오래 걸렸어?”

 청년은 투덜거리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내 탓이 아냐. 미니 행성 분양 게임의 버그가 많아서 그래.”

 그는 속이 메슥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청년이 케이블을 뽑고 게임기를 푸는 모습이 흐릿했다. 그의 기억은 여전히 미니 행성을 표류하고 있었다. 온실, 농장, 그리고 충실한 애견인 스파이크. 그에 비하면 이 방 안의 광경은 마치 꿈속의 장면처럼 아련했다.

 그가 게임기를 풀자 게임기의 액정화면이 저절로 꺼졌다. 그의 손목에는 게임기를 찼던 자국이 짙게 남아있었다. 의자에서 일어나던 그는 다리가 후들거려 몸의 균형을 잡을 수 없었다. 청년이 그의 팔을 붙잡아 부축했다. 모니터의 여자가 사무적인 음성으로 말했다.

 “박 성준 씨, 소장님이 면담을 요청하십니다.”

 비틀거리며 방을 나가는 그의 등 뒤에서 청년이 중얼거렸다.

 “영락없는 가상현실 게임 중독증 증세군.”


                                       7.


 소장은 차가운 눈매의 40대 여자였다. 그의 이혼한 아내가 좀 더 나이를 먹으면 저렇게 변하겠지. 그는 착잡한 심정으로 소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박 성준 씨가 서명한 동의서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이 조항을 주목해주세요.”

 소장은 목청을 돋워 큰소리로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고객의 부주의로 인한 피해는 게임센터에서 책임지지 않습니다. 사용자가 권고를 무시하

 고 게임을 과다사용했거나 경고 메시지를 수신하지 않았을 경우엔......”

 그는 피곤했다. 구태여 소장과 언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게임센터를 고소하지 않을 테니 안심하세요.”

 그의 말에 소장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소장의 말투가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게임 중독증 치료를 받아보시겠어요? 게임센터 소속 전문상담사와의 상담을 마련해드릴

 수 있습니다만......”

 그는 말없이 소장실을 나왔다. 기나긴 복도 양켠으로 닭장처럼 방이 줄지어 있었다. 방마다 고객들이 헤드셋을 쓰고 가상현실 게임에 몰입하는 장면이 눈에 선했다.

 입구의 거울에 그의 모습이 비쳤다. 평범한 용모의 30대 남자. 눈은 생기가 없었고 표정은 노인 같았다. 안내데스크의 로봇이 다가왔다.

 “애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결제하시겠습니까?”

 외모 못지않게 로봇의 목소리도 중성적이었다. 닭살 돋우는 그 목소리에 적응하기란 힘들었다. 그는 로봇이 내민 무선 결제 장치의 액정화면에 서명했다. 그의 결제내역을 확인하던 로봇이 호들갑스럽게 떠들었다.

 “축하합니다. 박 성준 고객님은 우수고객으로 선정되어 10% 할인쿠폰이 발급되

 었습니다. 이 할인쿠폰의 유효기간은 발급일로부터 1년간입니다.”

 닥쳐. 깡통아, 그 입을 닥치지 않으면 쓰레기 분쇄기에 처넣을 테다. 그는 입이 근질거렸지만 꾹 참았다. 가상현실 게임에 길들여진 그로서는 게임센터에 발을 끊을 자신이 없었다. 유전공학 연구소에서의 업무는 지겨웠다. 연구실 동료들과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주말과 휴일에 가상현실 게임을 즐기는 것이 그의 유일한 낙이었다. 미니 행성 분양 게임의 오류가 복구될 때까지 바벨탑 리모델링 게임 속에서 새로운 낙원을 꿈꾸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그는 게임센터를 나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다 중간에 멈췄다. 문이 열리고 그와 비슷한 연배의 남자가 탔다. 왠지 낯설지 않은 남자였다. 그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남자가 돌아봤다. 남자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우리가 만난 적이 있나요?”

 “그건 아니지만, 내가 아는 사람과 닮아서요.”

 그는 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 남자는 미니 행성의 정원사 로봇과 얼굴, 체격, 걸음걸이가 똑같았다. 현실과 가상현실 사이에는 어딘가 교차점이 있다. 그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토요일 오후의 거리는 번잡했다. 그는 인파를 헤치며 터벅터벅 걸었다. 빌딩 옥상에 설치된 대형 전광판에‘오네이로스’의 홀로그램 광고가 출력되고 있었다.

 ‘당신을 뇌파 가상현실 게임으로 초대합니다. 지금 당장 오네이로스를 만나보

 세요.’

 오네이로스. 꿈의 신. 거짓을 보여주는 신. 오네이로스는 위대하다. 그 누가 오네이로스의 위력에 저항할 수 있으랴. 그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