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vol.249
시
문장의 시선 더보기류수연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5년 11월부터 2026년 1월까지 으로 3회 연재됩니다. K-컬처와 한국이라는 스토리텔링 3 -오늘의 한국문학과 문학 시장에 대하여 류수연 1. 노벨문학상의 낙수효과? 2020년대 미디어믹스의 원천IP로 주목받는 것은 웹소설이나 웹툰 같은 웹 콘텐츠이다. 다양한 디지털 기기가 일상화되면서 그러한 매체 안에서 즐길 수 있는 더 많은 콘텐츠가 요구되었고, 웹상의 스토리텔링은 매우 유용한 자원으로 활용되었다. 그 결과 현재 웹 스토리텔링은 그 자체로 콘텐츠인 동시에 또 다른 콘텐츠의 원천IP로 활용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활자로 된 스토리텔링이 영상미디어로 2차 가공되는 일은 비단 최근에 나타난 현상만은 아니다. OSMU나 미디어믹스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이전에도, 사실 이러한 방식의 콘텐츠 확장은 일상적으로 있었다. 무엇보다 문학, 그중에서도 소설은 가장 오랫동안 원천IP로 각광받았던 이야기 그 자체였다. 하나의 소설이 극이 되고, 또 다른 소설의 영감이 되고 패러디 되는 것은 너무나 익숙한 과정이다. 트랜스미디어 환경이 이러한 상호텍스트성을 더욱 가속화하고 확대하였을 뿐이다. 돌이켜 보면 이야기의 구전이라는 것도 결국 인간의 신체라는 미디어를 활용한 확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 과정에서 발생된 2차 가공은 오늘날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로 인해 편집과 각색이 더 시시각각 이루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스토리텔링의 확장은 애초에 이야기의 고유 속성이라 할 만큼 아주 익숙한 방식에 가깝다. 문자에서 이미지와 극으로, 다시 영상과 미디어를 넘나드는 스토리텔링의 확장은, 그 무엇보다 문학이 가장 잘 해 왔던 일이니 말이다. 문학의 영상화는 영화산업의 초창기부터 시작되었지만, 오늘날의 미디어믹스에 더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것은 1960년대 문예영화일 것이다. 영화산업이 부흥하면서, 당시 많은 문학작품이 영화의 원천 텍스트로 자리매김했다. 1970년대부터는 TV 단막극을 통해 많은 문학 텍스트가 영상화되었고, 이러한 시도는 2020년대 현재까지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김금희 원작의 (2018), 장류진 원작의 (2020)과 (2025) 등의 드라마가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트랜스미디어 환경 속에서 예측되는 문학의 미래는 암울한 전망으로 가득하다. 1990년대부터 본격화된 문학의 위기론은 40년 가까이 논의되는 동안 이제는 잊을 만하면 꺼내는 해묵은 불편함이 되었지만, 웹 콘텐츠의 등장 이후에는 위기론 자체도 언급되지 않을 만큼 공공연한 사실이 되어 버렸다. 이처럼 미디어 환경이 ‘읽기’의 위기를 기정사실화했다면, 생성형 AI의 등장 이후에는 ‘쓰기’의 위기까지 대두되는 실정이다. 생성형 AI가 문해력까지 대체하는 마당이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돌이켜 보면 근현대문학사의 여러 굴절마다 제기되었던 문학의 위기론은, 어쩌면 그래도 배
등 돌린 김은자의 이미지와 무등산 김서라 1. 등 돌린 김은자의 사진 이미지는 그것을 표현하는 사물이나 사건 자체보다는 사물이나 사건들이 어떻게 보이는지, 어떻게 표출되고 있는지에 더 가깝다. 하지만 그 두 가지는 쉽게 분리되기 어렵기 때문에 동일시되기가 쉽다. 이 문제에 맞닥뜨린 근대 철학자들은 판단을 유보하기도 하고 인간의 지각 방식 자체를 문제시하기도 했다. 그들의 이론과는 별개로, 우리는 일상적인 경험의 방식으로 이미지가 그 사물, 사건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간 때문이다. 이미지는 그 사물이나 사건과 마주한 시간을 보존한다. 어렸을 때 그렇게 커 보였던 뒷산이 야트막한 산에 불과 깨닫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미지의 역사는 사실이나 이념이 아니라 ‘낙차’나 ‘문턱’처럼 감각되곤 한다. 적어도 발터 벤야민은 낙차나 문턱의 감각으로 이미지 속의 역사를 파악한 바 있다. 지금도 그 방법은 유효하다. 어떤 사진이 주어진다면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의 의도나 피사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보나 분석보다, 그 사진이 어떻게 보이는지 그리고 사람들은 그 사진에 어떤 이름을 붙이는지가 더 중요할 수 있다. 그것이 ‘그때’나 ‘지금’을 사진보다 더 또렷하게 이미지화하기 때문이다. 1964년 4월 17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사진 한 장이 있다. 흰 천을 쓰고 한복을 입은 듯한 여성의 뒷모습이 타원형 프레임 속에 있다. 마치 옛 초상 사진의 프레임 속에 수수한 차림의 여성의 모습이 담겼지만, 이 여성의 뒷모습만 가지고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 수 없다. 사진 아래에는 작은 활자로 “무명옷을 입은 「어머니」 김 여사는 사진 찍기 마다고 흰 수건 쓴 머리를 돌려댔다.”고 쓰여져 있다. 이 사진이 함께 실린 기사는 그를 ‘어머니’로 소개하면서 등 돌린 뒷모습을 포착한다. 기사의 제목으로는 ‘숨은 나이팅게일’, 부제로는 ‘삼밭실의 무등원, 죽음을 이긴 새마을의 어머니’라고 달았다. 이 사진과 관련한 기사 내용은 이 무등원과 ‘김 여사’를 다음처럼 소개한다. “광주 무등산 중턱 삼밭실 일대에는 사회에서 버림받은 2백30명에 달하는 폐결핵환자, 앉은뱅이, 간질병환자, 정신병자 등 불구자들이 이곳저곳에 흩어진 38동의 집에서 원시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이 마을의 영도자는 연약한 한 사람의 중년부인, 의지할 곳 없는 환자들에게는 어머니이자 누나요, 구세주이기도 하다. ···(중략)··· 「가톨릭」 재단의 손으로 운영되는 제중병원은 가난한 결핵환자를 무료로 치료해왔으나 나을 수 없는 환자를 언제까지나 입원시킬 수는 없어 이들에게는 부득이 퇴원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병 때문에 패가망신이 된 환자들에게는 유리걸식밖에 할 길이 없었다. 이금
무명(無名)의 상품, 번역의 연쇄 : 네트워크 시대의 시와 저자성 이성주 1. 저자성의 균열 생성형 인공지능의 등장 이후, 시 비평의 장에서 가장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개념 가운데 하나는 저자성(authorship)일 것이다. 이와 관련해, 시 쓰기에 인공지능을 포함한 다중 행위자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며 저자성의 해체를 주장하는 관점이 있는가 하면 여전히 인간만이 쓸 수 있는 시의 고유성을 강조하는 입장 역시 강하게 존재한다. 두 입장 사이에는 유보적이거나 비판적인 태도들이 넓은 스펙트럼을 이루며 공존하고 있고, 그에 따라 저자-시-독자의 관계나 독창성(고유성)을 둘러싼 논의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다. 물론 이 글에서 관련 논의를 모두 정리하거나 판별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저자성 비판이 오늘날 어떤 형식과 논리로 전개되고 있는지를 가늠하기 위해, 최근의 평문 가운데 하나인 박상수의 「영원한 베타 테스트로서의 여름」(『문학동네』, 2025 가을호)을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이 비평은 2010년대 이후 한국 시에 만연해진 ‘납작함’의 감각을 핵심 문제로 진단하며, 저자성 해체 담론이 간과하기 쉬운 지점을 예리하게 짚어 낸다는 점에서 중요한 참조가 된다. 박상수가 말하는 ‘납작함’이란 최근 시에 나타나는 시적 주체의 무력함, 대상에 대한 비관여성(非關與性), 타자와의 상호작용 약화, 그리고 ‘메타적 인식의 과정’만이 부각되는 경향 등을 아울러 지칭하는 것이다. 특히 박상수는 최다영의 비평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시의 생산 주체를 비인간 행위자와 기술 장치까지 포함하는 연합적 모델로 긍정하는 최다영의 논리가 결과적으로는 주체의 저항과 행위 가능성 혹은 내면의 복잡한 역학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 본 글의 맥락에 맞춰 간단하게 말하자면, ‘저자성 해체’를 동시대의 불가피한 조건으로 승인할 때 타자성이나 윤리적 긴장이 소거된 ‘납작함’ 역시 쉽게 수용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최다영의 입장에 서면 다른 이야기가 가능하겠지만, 우선 박상수의 글이 지닌 문제의식에 많든 적든 공감하지 않기란 어렵지 않을까. 확실히 최근 시에서 ‘타자와의 접촉면’이 얕아지고 있음은 박상수만 느끼는 것은 아닐 것 같다. 그리고 이는 어쩌면 인터넷상에서 실수나 실언 하나로 누군가에 대한 평가를 쉽게 뒤집고 때로 그것을 근거 삼아 혐오를 정당화하는 오늘날의 문화적 현상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여기서 제기하고 싶은 문제는, 박상수가 ‘무엇’을 주장하는가에 있다기보다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에 있다. 그의 글은 맥락이 다른 다양한 이론과 담론을 빠르게 호출하고 병치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가령 한병철과 마크 피셔가 별다른 매개 없이 나란히 놓이고, 현대 신학 담론의 어휘들은 그것이 형성된 맥락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은 채 문학 비
류수연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5년 11월부터 2026년 1월까지 으로 3회 연재됩니다. k-컬처와 한국이라는 스토리텔링 2 -웹소설이라는 가능성 류수연 1. 지금은 웹소설의 시대 번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외국어 능력일까, 모국어 능력일까? 물론 어느 하나도 포기할 수 없는 요소지만 부득이 한 쪽을 골라야 한다면? 수년 전이라면 당연하게도 ‘외국어’라는 답변이 압도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생성형 AI를 활용한 초벌 번역이 보편화된 오늘의 관점에서라면, 그 답은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다. 실제로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아주 결정적인 장면을 이미 경험한 바 있다. 바로 2022 한국문학 번역신인상에서 말이다. 웹툰 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40대 일본인의 한국어 실력이 초급 수준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논란이 시작되었다. 당선자는 AI를 활용해서 초벌 번역을 진행했고, 그 뒤 자신이 일본어 표현을 가다듬었다는 것이었다. 당락을 결정한 것은 만화적 표현과 리듬에 익숙한 당선자의 표현력이었겠지만 번역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언어능력 없이 AI로 번역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논란이 거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뒤로 채 2년도 되지 않아 생성형 AI가 전 세계적으로 보급되었으니, 어쩌면 그 혼란은 이러한 기술 변화에 대한 예고였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웹 서사의 달라진 위상을 공공연하게 보여 주는 사건이기도 했다. AI 번역만큼이나 문학번역의 부문에 웹툰이 있다는 점도 큰 이슈가 되었기 때문이다. 웹 콘텐츠에 부여되었던 수많은 평가절하를 떠올린다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웹-이라는 접두어를 붙인 여러 콘텐츠가 등장한 지 불과 20여 년, 그 확장된 영향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오늘날 웹을 기반으로 한 콘텐츠 시장은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선발 주자인 웹툰과 후발 주자인 웹소설 모두 대중문화의 절대적 강자로 부각되었다. 거기엔 이들 콘텐츠 자체의 매력도 있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이들 콘텐츠가 다양한 미디어믹스 과정에서 원천IP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 역시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웹 기반 서사가 트랜스미디어의 확실한 강자로 부각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 웹소설의 경우에는 선발 주자인 웹툰의 원천IP로도 활용되고 있으니, 웹 콘텐츠 전체의 근간을 이루는 기초가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지난 회차에 살펴보았던 케이팝 스토리텔링 역시 이러한 웹 콘텐츠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는바, 오늘날 한국 대중문화를 이끄는 콘텐츠로서 웹 기반 서사를 살펴보는 것은 한국이라는 스토리텔링의 한 정점으로 다가가는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그 중심에는 또다시 이야기가 있다. 이 글에서는 가장 매력적인 이야기들이 각축을 벌이는 웹 플랫폼이라는 가상공간, 그리고 그곳을 종횡무진하고 있는 웹소설의 의미를 추적해 보고자 한다. 2. 취향의 타파스? 일반 문학과 함께 웹소설을 비평적 연구 대상으로 삼
K-컬처의 그림자, 혐중이라는 문화정치 : 2020년대 한국 사회의 문화적 자부심은 어떻게 배타적 혐오가 되었나 허희 1. 정동적 역설의 면면 2020년대 한국 사회는 기묘한 정동적 역설 가운데 작동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K-팝‧K-드라마‧K-웹툰‧K-게임 산업까지 확장된, 이른바 K-컬처 복합체가 가시적 성취를 축적하면서 한국의 상징체계를 재편 중이다. 이것은 국가 정체성을 구성하는 정동적 보상이 작동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문화적 자부심은 경제 양극화를 포괄하는 저성장 국면‧불안정 노동‧청년 세대의 좌절과 같은 내부 불안을 상쇄하는 역할로 작용하였다. 그러한 면에서 K-컬처는 문화 산업만으로 간주하기 어렵다. 국가 정동을 생산‧관리하는 체제로서, 문화적 자부심은 일종의 집단 감정 자본으로 사회적 정당성을 획득하였다.1) 동시에 한국 사회는 ‘혐중(Sinophobia)’으로 대표되는 조직화된 집단 감정의 분출을 목도하고 있다. 이 글은 그것을 병렬적으로 공존하는 동시대 현상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자부심이 혐오로 전이되는 정동 형성의 정치적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그러니까 혐중은 자부심의 어두운 파생물, 정동의 이동과 변조가 빚어낸 적대의 결과라는 논점이다. 여기에서 비판과 혐오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비판은 특정 행위나 정책, 제도적 불투명성이나 권력 작동 방식과 같은 대상을 향한다. 이는 사실 검증과 토론 가능성을 전제한다. 예컨대 중국 정부의 신장 위구르 지역 내 강제 수용 의혹, 홍콩 보안법의 인권 침해 문제, 동북공정의 역사 왜곡 등은 어떨까. 이상의 논란은 분석과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고, 국제사회가 공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사안이다. 반면 혐오는 문제를 특정한 정치·사회 행위에서 찾지 않는다. 증오의 대상을 일반화하고 전체화함으로써 제거의 정동을 발생시킨다. 이때 중국(인)은 특정 행위의 주체로서가 아니라, 문명적으로 열등하고 비도덕적이며 반인권적인 타자로 폄하된다. 이 같은 혐오의 메커니즘은 정동의 순환—감정이 사회적으로 이동하며 타자를 구성하는 과정과 유사하게 작동한다. 더불어 그들을 향한 정서가 실체적 검증 없이 사실처럼 굳어지는 탈지성적 담론 구조를 형성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2020년대 한국 사회 내 반중—혐중 세력은 합리적 비판과 비합리적 망상의 경계가 붕괴된 상태에서 광적으로 결집하고 있다. 이에 대한 제재가 대증 요법에 그치지 않으려면 면밀한 분석이 요청된다. 오늘날 혐중은 SNS·커뮤니티·유튜브 생태계의 유통망에서 집단 감정의 양극화를 선동한다. 김치·한복 공정 논란처럼 국가 정체성을 둘러싼 문화 투쟁은 팩트에 근거한 학술 논쟁이나 국제문화 비교 연구의 영역이 아니라, 무분별한 감정 투쟁의 장으로 격화되었다. K-팝 아이돌에게 요구되는 이른바 사상 검증(중국 시장을 겨냥한 발언을 했는가, 홍콩·대만 문제에 침묵했는가)의 사례는 집단 감시된 순응주의가 디지털 민
낯익고도 불친절한 미래에 대한 단상 임지훈 세상의 속도를 점점 감당할 수가 없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빠르게 변해 간다. 변화하는 속도에 편승하지 못하는 자는 자신이 이방인이 된 기분을 느낀다. 스팅의 노래 〈Englishman in New York〉의 화자는 자신을 “legal alien”, 합법적인 이방인이라고 말한다. ‘신사다움’이 철 지난 농담이 되어 버린 세계에서 여전히 “Manners maketh man”이라 말하고, “Be yourself, no matter what they say”, ‘당신답게, 누가 뭐라고 하든’이라 말하는 사람. 그 노래 속에서, 이 합법적인 이방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Modesty, propriety Can lead to notoriety You could end up as the only one Gentleness, sobriety are rare in this society at night a candle’s brighter than the sun - Sting, 〈Englishman in New York〉 겸손과 예의범절이 악평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온화함과 침착함은 흔치 않은 감정이 된 세계.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이고, 우리는 그 속에서 스스로를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이미 스스로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직 자기 자신을 잃지 않았다’는 건 단지 착각에 불과하고. 그렇다면 어쩌면 그 또한 자신의 착각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미치광이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이건 아마 이중의 의미로 ‘그렇다’고 할 수 있을 텐데, 그가 정말 착각에 빠진 채로 살아가고 있는 거라는 의미에서도 그렇겠지만 모두가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세상 속에서 그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 또한 미친 것이기는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에서, 겸손과 예의범절이 더 큰 이익을 위한 술책이 되고 온화함과 침착함은 철 지난 농담이 되어 버린 세상에서 그것들의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은 이제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으니까. 그런 세상 속에서 ‘매너가 사람을 만들고요, 당신은 당신답게 살아야 해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분명 광인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종종 이방인으로 느낀다는 점에서 그와 같지만 사실은 전혀 다르다. 그와 달리 우리는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를뿐더러, 현실 속에서 무엇이 사라지고 있는지조차 헤아리지 못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와 그는 전적으로 다른 존재처럼 보이는데, 기술적 환경의 변화에 휩쓸려 떠밀리듯 살아가는 우리와 달리, 그는 마치 좌표계의 원점에 선 것처럼 세계를 바라보며, 그 변화의 속도를 측정하고, 그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야 할 길
[문장서포터즈] 문장은 어디에나 있다 - 중국 천진(天津, Tiānjīn) 책기행 문장서포터즈 2기 박소희 세계 어느 곳을 가든 서점이 있다. 서점이 없다면 책 한 권이라도, 책 한 권도 없다면 문장 한 줄이라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어디를 가든 서점이 있다면 꼭 가보는 사람에 속한다. 비록 그곳이 해외일지라도 말이다. 나는 현재 중국 천진에 위치한 남개대학교(南开大学) 어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다.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서다. 지난 몇 년간 배워왔음에도 곳곳의 한자들은 낯설었다. 낯선 언어, 낯선 사람들, 낯선 생활 방식까지. 나를 지칭하는 수많은 이름들은 모두 사라지고 그곳에는 이방인, 외국인이라는 이름만 남아있었다. 천천히 생활에 적응하며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서점이었다. 이곳에도 책방이나 서점이 있을 텐데 어디에 있을까? 어떤 모습일까? 나는 지도를 켜서 서점들을 하나씩 찾았다. 그렇게 소소하게 시작된 이틀간의 천진 책기행을 적어본다. 사진1. 무명서점 무인도 서점과 무명서점 책기행의 시작은 늘 가는 학교 근처부터다. 학교의 서남문으로 가면 작은 책방이 두 곳 있다. 하나는 무인도 서점이며 하나는 무명서점이다. 중국의 몇몇 장소들은 건물 내부에 있어 이곳이 맞나 헷갈리기도 하다. 처음 간 무명서점도 그랬다. 또 두 서점 모두 벨을 누르거나 노크를 해야 들어갈 수 있는 방식이라 처음에는 운영하지 않나 싶기도 했다. 그러니 중국의 작은 책방을 방문할 때면 의심하지 말고 문을 두드리면 된다. 분명 안에서 누군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들어간 서점 내부는 아늑하고, 따뜻해서 마치 가정집에 초대된 손님이 된 것 같았다. 고양이들이 있었고, 곳곳에 책이 있었다. 책방지기는 “여긴 앉아서 차를 마실 수 있으며 이곳에는 오래된 책들만 있다”고 말했다. 역사‧법‧소설 등 여러 종류의 책이 있었으나 주로 경영 도서가 있었고, 중국 문학이나 한국 문학은 비교적 적었다. 비치된 도서 중 비교적 문학의 비율은 적다는 말에 조금 더 구경을 하고 서점을 나섰다. 책을 읽고 싶을 때나 공부를 하고 싶을 때 찾으면 좋을 것 같은 공간이었다. 사진2. 무인도 서점 그리고 바로 건너편에 위치한 무인도 서점으로 향했다. 이곳도 벨을 누르니 책방지기가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 어쩐지 조금 더 환영받는 느낌도 들었다. 이곳은 무명서점과 달리 카페를 함께 운영하는 곳은 아니었다. 다만 이런저런 소품들이 있었고, 무명서점보다 문학, 과학 등 각 분야와 관련한 책이 여러 권 있었다. 한일문학 코너에서는 한강 작가와 김애란 작가 등의 작품과 김혜진 작가의 『딸에 대하여』가 있었다. 다만 한국 문학은 일본 문학에 비해 비교적 수가 적었다. 내가 아쉬움을 표하자 책방지기는 원한다면 직접 서점에서 책을 주문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김애란 작가가 유명하며, 손원평 작가의 『아몬드』란 작품을 추천해 주었다. 한편 무인도 서점은 대출카드를 만들어 책을 빌릴 수도
[문장서포터즈] 가능성의 길이 무한히 확장되는 순간 - [문학주간 2025] 도움―닿기 문장서포터즈 2기 김이성 1 안녕하세요. 어느덧 마지막 시간이 다가왔네요. 개인적으로는 문장서포터즈 2기 ‘쓰담’으로 활동하며 다양한 문학 콘텐츠를 여러분들께 소개할 수 있어서 정말 기뻤어요. 문학을 매개로 서로 연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게 된 계기였던 것 같아 무척 보람찬 시간이었죠. 아마 이 글을 보고 계실 때쯤이면 새해가 밝아있을 텐데요. 저는 이번 원고를 구상하면서 파일 제목을 ‘세밑에서 새해로’라고 붙여놓았대요. 마지막 원고를 작성하며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고 싶었기 때문이죠. 과연 새해에는 또 어떤 시간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새해에도 역시 모든 게 계획대로 흘러가지는 않겠지만, ‘쓰담’으로 활동하면서 느낀 것처럼 무엇보다 가능성을 믿는 한 해가 된다면 좋겠네요. 최근에 읽은 소설에서는 이런 대사가 나오더라고요. “엄마, 나 소설 안 쓸래. 일하고 사랑하고 그렇게 살래.”1) (엄마는 이렇게 답하죠. “쓸 거면서 또 저런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한참 동안 앞의 문장을 반복해서 읊조렸어요. 일하고 사랑하고, 일하고 사랑하고…… 그렇게 살겠다고 말하는 인물의 태도가 미래의 가능성을 무한히 확장하는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어쩌면 때로는 이렇게 작고 사소한 다짐이 우리를 가능성이라는 희망의 길로 나아가게 만드는 건 아닐까요? 저도 이제 새해라는 가능성을 향해 첫발을 내디뎌보려 하는데요. 그전에 마지막으로 여러분들께 공유하고 싶은 순간이 있어요. 새 출발을 앞두고 있던 제가 문학의 도움을 받아 용기를 얻었던 순간이죠. 새해로 도약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준비 중인 분들에게 세밑에서 전하는 저의 후기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때 그 순간을 전해보아요. 2 지난 2025년 가을, 일상을 지속시키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며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던 저는 문학주간 행사가 열린다는 얘기를 듣고 관련 소식을 찾아보았어요. 몸도 마음도 지쳐 물리적으로 문학과 멀어져 있던 시기였기에 문학의 힘을 빌려 조각난 일상을 수선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홈페이지에서 문학주간과 관련된 글을 찾아 읽고, 저는 단번에 마음을 빼앗겼어요. : 기획의도 우리가 만약 어떤 트랙을 달리고 있다면 그리 머지않은 곳에 구름판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견고하고 상상할 수 있지만 막상 상상한 대로는 닿지 않는, 그곳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은 몹시 중요합니다. 높이 뛰어오르려면 적당한 타이밍을 생각하고 안정적인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그러면 전속력으로 달리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죠. 문학은 쉬이 상상할 수 없는 구름판을 감각하게 해줍니다. 내가 아닌 삶과 삶으로 이루어졌기에 분명 나인 세계 같은 것들이요. 문학은 자그
[문장서포터즈] 가르치는 문학, 배우는 문학, 자라나는 문학 (인터뷰이: 조인혜, 고등학교 국어교사) 문장서포터즈 2기 김성호 문학은 단순히 독자와 작가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독자와 작가가 되기 위한 그 과정, 여로를 봐야 한다. 그 여로엔 다양한 존재가 있지만, 나는 그중 학교 현장에서의 교사와 학생 간의 공간에 주목했다. 2025년 10월 23일, 합정역의 한 카페에서 조인혜 선생님을 만났다. 9년 전 모교의 국어 교사였던 조인혜 선생님은 인터뷰 내내 진지하고 활기차게, 자신의 독서론과 더불어 서포터즈 질문에 답해 주었다.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 안녕하세요.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조인혜입니다. 배우는 경험을 좋아합니다. (사진1. 조인혜 선생님의 오브제인 뉴욕도서관 에코백) Q. 평소에 문학을 즐겨 접하시나요? 특히 즐기시는 장르나 분야가 있다면요? - 음, 소설을 제일 많이 읽어요. 제일 좋아하는 장르이고요. 책 대화 모임을 4년째 하고 있기도 합니다. 잡지 독서평설과 출판사 사계절 콘텐츠에서 청소년 소설을 읽고 소개하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문학을 접하고 읽고 소개하고 가르친다는 건, 일적으로도 내가 좋아하는 일이에요. 물론 시도 좋아해요(웃음). 쉽지 않지만 시창작 모임을 동료 교사들과 함께 하고 있는데,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치고 시 창작 활동을 같이 하기 전에 먼저 저 스스로 배우고 체득하려고 그래요. 그래서 소소하게 문집도 내고요. 시가 어렵지만 즐길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희곡은 상대적으로 적게 읽는 편이에요. 최근에는 SF 소설을 많이 읽었고요. 딱히 가리는 건 없고, 그때마다 빠지는 장르나 분야가 있어요. 무엇보다 학생들과 함께 읽으면 아무래도 좋은 작품을 더 좋아합니다. Q. 최근에 그런 작품이 있었는지요? - 박지리 작가의 작품입니다. 다만 어두워서 아이들에게 쉽게 풀어서 얘기하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최진영, 김애란 작가의 작품도 좋았어요. Q. 국어교사로서 문학작품을 접할 때와 개인 독자로서 접할 때의 다른 점이 있나요? - 정체성을 나누고 있진 않습니다. 불쑥불쑥 나와요. 그런 게 혼재되어 있죠. Q. 수업 시간에 학생들과 어떻게 문학적인 활동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 작품을 다 읽고 대화하게 하려고 합니다. 어떤 활동을 하든 반드시 하도록 했던 게 있는데, 그게 바로 ‘책 대화’와 ‘글쓰기’입니다. 같은 소설을 원하는 아이들끼리 묶은 다음, 질문하고 대화하는 활동을 해요. 그 이후 개인 서평을 쓰게 하고요. 사회적 독서인데(정의가 모호하긴 하지만 같이 공유하면서 읽기가 필요합니다. 먼저 선생님들과 경험해보니 그렇다는 깨달음을 얻었어요), 그게 참 중요하다고 여러 번 느껴요. 그런 활동을 하고 나면, 혼자 개인적으로 읽었을 때와 사회적 독서 활동 후의 감상의 결과 차이가 커요. 일단 혼자 읽을 때 몰랐던 점들을 알게 돼서 좋은 점이 있고, 내가 잘 몰랐던 같은 반 아이가 저런 생각을 가지고
[문장서포터즈] 푸른 소리가 울리는 교실 -안양예술고등학교 문예창작과 방문기 문장서포터즈 2기 카페라떼 요즘 청소년들 사이에서 문학에 대한 관심이 많아요. 하루에도 수십 편씩 올라오는 청소년 작품, 백일장에 참여하는 열정적인 친구들, 그중에는 문학을 진로로 삼고 싶은 학생들도 있죠. 그렇다면 이 친구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배우며 성장하고 있을까요? 이번 취재에서는 안양예술고등학교 문예창작과(이하 안양예고 문창과)를 직접 찾아가 그 현장을 들여다봤습니다. 국내 예술고등학교 중 문예창작과가 있는 학교는 단 두 곳뿐이에요. 고양예술고등학교와 안양예술고등학교죠. 안양예고는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고이고, 연극영화과·음악과·미술과·무용과·문예창작과 총 다섯 학과가 있어요. 학교가 자리한 언덕은 ‘한라산보다 가파르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유명합니다. 사진1,2. 안양예술고등학교 본건물과 문예창작학과 실기실 문예창작과는 한 학년당 40명으로 구성돼 있어요(총 3반). 재작년부터 지원자 수가 늘기 시작해 올해 경쟁률이 2.98 대 1로 점점 문학에 관심을 갖는 학생들이 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최근 몇 년 사이, 안양예고 문창과 학생들이 다양한 청소년 문학상에서 이름을 올리며 학교의 문학적 저력이 조금씩 알려지고 있어요. 그 덕분에 문예창작과에 관심을 두는 학생들도 점점 늘고 있습니다. 사진3. 올해 안양예고 학생들의 수상을 축하하는 현수막 문예창작학과라는 특성 덕분에 글쓰기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모여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곳이죠. 시 창작 실기, 소설 창작, 문학 이론 등 전공 수업 외에도 문학 감상이나 독서 토론 수업을 통해 사고력을 넓혀 갑니다. 작가 선생님 특강과 합평 수업이 활발히 이어지는, ‘문학의 공기’가 가득한 교실이에요. 예고의 장점인 학과 전시회, 안양예고 문창과는 ‘눈시울전’이라는 학생들의 작품 전시회를 매년 5월에 진행하고 있습니다. 주로 2학년생들이 참여하며 가끔 3학년 학생들도 조금씩 참여하고 있습니다. 주로 안양아트센터 갤러리 미담에서 전체 전시 후, 서울 교보문고에서 지원하는 학생들 중 일부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어요. 이런 공간에서 매일같이 글을 쓰는 학생들은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을까요? 그 이야기를 직접 들어봤습니다. 사진4,5. 안양예고 눈시울전 작품 사진(이현교, 최아원 학생 작품) 2학년 학생들의 이야기, 교실에서 들려오는 연필 소리 2학년 이현교(시 전공), 최아원(소설 전공) 학생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Q: 문창과에 진학하게 된 계기가 무엇일까요? 처음 마음을 먹게 된 이유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이현교: 중학교 3학년 때, 학교 행사로 시를 써서 우수 작품으로 선정 받은 적이 있었는데요, 그때 경험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 같습니다. 최아원: 어렸을 때부터 책을 많이 읽어 왔는데요, 초등학교 4학년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