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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vol.235

2024년 11월호
2024년 11월호
문장웹진

소설

문장에서
만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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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2024.11.01
모로

모로 김영은 개수대의 뚜껑 아래에 언제 생긴 것인지 모를 초파리 알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 틈에 손톱만 한 자두 조각이 껴 있었다. 규민이 엊그제 저녁에 마트에서 특가 세일로 산 것이었다. 나는 고무장갑을 끼고 알을 제거한 후 과탄산소다를 섞은 뜨거운 물을 부었다. 초파리가 생긴 것은 무더위와 습기, 자두 조각 때문이었지만 관리를 소홀히 한 내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규민에게 초파리 알이 가득한 개수대 사진을 보내려다 그만두었다. 이런 모습까지 공유하고 싶진 않았다. 내친김에 흐트러진 이불과 베개를 정리하고 아무렇게나 널린 옷가지들을 고이 개켜 두었다. 밀린 빨래를 하고 분리수거를 한 다음, 창틀 먼지를 닦고 화장실 청소까지 했다. 오 평 남짓한 원룸은 금방 깨끗해졌다.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로 분주히 움직였건만 고작 두 시간이 지나 있었다. 선풍기를 켜고 창문을 열었다. 후텁지근한 바람이 불었다. 책상 서랍에 넣어 두었던 전자 담배를 꺼냈다. 인위적인 복숭아 향이 콧속을 간질였다. 거리의 소녀, 사회의 품으로. 워드 파일 속 굵은 글씨체로 적힌 글귀가 떠올랐다. 정 선생님께서 전달해 준 것이었다. 그는 가출 청소년을 심층 취재하고자 쉼터를 드나드는 기자에게 내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했다. 나는 가출 청소년 중에서도 우수한 사례에 속했다. 유년기의 상처와 중학교 시절부터 지속된 방황, 쉼터의 도움을 받아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치르고 재수 끝에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하기까지의 과정은 사회에서 소외된 청소년이 기관의 관심과 도움으로 자기 삶을 개척할 수 있게 된 훌륭한 결과였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은 쉼터의 사정을 모르지 않는 터라 외면하기 어려웠다. 가출 청소년 ‘이후’의 스토리가 담긴 긍정적인 기사가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었다. 적어도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세금이 적절하게 활용되고 있음을 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어쩐지 손이 잘 가지 않았다. 파일을 받은 지 이 주가 지났음에도 간단한 답변 하나 작성하지 못했다. 이런 나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규민은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되지 않을까, 라고 말하다가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라고 덧붙였다. 방송 PD를 꿈꾸며 프리랜서로 영상 편집 일을 하는 규민은 솔직함, 날것, 진정성 같은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그런 것이 있기나 할까. 나는 선풍기의 바람 세기를 더 높였다. 복숭아 향이 빠르게 흩어졌다. 인터뷰에 응하기로 했으니 무슨 말이라도 답변을 해야 했다.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 화면에 띄운 워드 파일 속 커서를 응시했다. 커서가 점멸등처럼 깜빡였다. 질문은 열두 개였다. 간단한 자기소개부터 가출하게 된 계기, 가출하는 동안 겪었던 사건이나 어려웠던 점, 기억에 남는 일화, 가출을 후회했던 적, 지금 상태에 대한 만족도, 대학 졸업 후 구체적인 진로 계획, 쉼터에서 받은 도움 등등이었다. 그러나 거리의 소녀, 그 문장이 가시처럼 목에 걸렸다. 안녕하세요, 저는·····&mi

소설 2024.11.01
불안을 모르는 마누엘

불안을 모르는 마누엘 임택수 마누엘은 이면도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열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호수에 손을 넣으면 금방이라도 화상을 입을 것 같은 폭염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는 자동차 트렁크에서 시클라멘 화분과 청소 도구를 챙겨 공동묘지 후문 쪽으로 걸어가면서 더위에 지쳐 가는 온몸의 감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실눈을 뜨자 통행로에 깔린 흰 자갈이 잔설처럼 보였다. 알록달록한 조화와 반듯한 형태의 무덤들이 대낮의 정적에 갇혀 있었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한번 쓱 둘러보았다. 전과 달리 어딘가 훤해진 느낌이었다. 저 멀리 반대편에 있는 북문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마누엘은 묘지의 청청했던 나무들이 대부분 잘려 나간 것을 알아차렸다. 이 주 전 이곳에 들렀을 때 해충 때문에 골치가 쑤신다고 불평하던 관리인이 떠올랐다. 외래종 날벌레라며 여기서 성장한 해충이 지역의 포도밭까지 퍼져 심각한 피해를 준다며 구시렁거렸다. 마누엘은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서쪽 구역으로 걸음을 떼었다. 수돗가 나무 그늘에 있던 벤치도 보이지 않았다. 마누엘은 그 벤치에 앉아 아버지의 무덤에 닿은 가죽나무 그림자가 시계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을 지켜보곤 했었다. 문짝만 한 자주색 평석 위에 놓인 화분들은 바싹 말라 있었다. 마누엘은 애도의 문장이 새겨진 책 모양의 석판과 시든 화분들을 바닥에 내려놓고 평석을 솔질했다. 여기저기 굳어 있는 새똥을 손톱으로 긁어낸 뒤 페트병을 열어 물을 뿌렸다. 이마에서 땀방울이 토도독 떨어졌다. 마누엘은 평석에 새겨진 아버지의 이름 주위로 석판과 시클라멘 화분을 올려놓았다. 아버지가 만족할지는 알 수 없지만, 모든 게 제자리에 놓인 것 같았다. “아버지, 저 가요.” 그는 빈 페트병과 솔을 챙기고는 사인을 보내듯 발끝으로 평석 옆면을 툭툭 건드렸다. 묘지의 나무가 사라지자 묘지의 그늘도 사라졌다. 햇빛이 정수리를 달구고, 등과 겨드랑이가 끈적거렸다. 지붕을 얹은 석실 안 조각상들은 눈을 내리깐 채 만돌린을 뜯고 있었다. 마누엘은 버릇처럼 망자들의 이름을 읽어 나가다 한 무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매번 처음 발견했던 때처럼 발길이 멈춰졌다. 평석 없는 무덤은 미처 장례를 다 끝내지 못하고 서둘러 묻은 것처럼 맨땅을 허술히 드러내 보였다. 색 바랜 조화가 땅바닥에 그대로 놓여 있고, 그 뒤로 달걀만 한 흑백 사진을 박은 묘비가 기우뚱 세워져 있었다. 사진 속 얼굴은 동양 남자였다. 망자의 가운데 이름은 Chang, 이었다. ‘창’은 푸르거나, 창문이거나, 무기가 아니면 노래일 거라고 언젠가 문규가 알려주었다. 꽃다발을 든 초로의 여인이 중앙 구역까지 와서는 중얼대더니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 묘지 분위기가 달라져 헷갈리는 모양이었다. “마중을 나올 수도 없을 텐데.” 마누엘이 혼잣말하고는 피식 웃었다. 길을 헤매던 여인은 정문 앞 키오스크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경비실에서 관리인이 나와 그녀에게 뭐라 묻더니 팔을 뻗어 북쪽

소설 2024.11.01
숲 바깥쪽으로

숲 바깥쪽으로 김선재 1. 선을리가 서쪽 산의 중턱 어림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건 출발한 지 40분 남짓 되었을 무렵이다. 섬 서쪽은 산세가 험해 동쪽보다 개발이 덜 된 지역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덕분에 우리가 지금 거길 가는 거라고 소영은 말한다. 나는 그 말을 흘려들으며 스마트폰 화면을 확대해 선을리 근방을 훑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낯선 동리나 동산의 지명뿐이다. 선을은 식당이나 카페는커녕 편의점조차 없는, 그야말로 첩첩산중에 위치한 모양이다. 도착하면 투어가 시작되기 전까지 고작 30여 분의 시간이 남는다는 걸 확인한 나는 맥이 빠진다. 30여 분 동안 먹을 수 있는 게 뭘까.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검색했던 여러 메뉴를 떠올린다. 블로그에서 본 해물찜은 재료가 실해서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고 한치도 한창이라고 했다. 또 해풍에 말린 해초를 주재료로 한 수타 우동은 너도나도 후기를 남길 만큼 유행이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입에 침이 고이지만 30분은 그런 걸 먹기에는 어림도 없는 시간일 거다. 홀쭉해진 배를 문지르며 생각한다. 메뉴를 고르는 건 고사하고 뭘 먹을 수 있기는 할까. 늦은 아침을 먹은 후로 뭘 먹은 기억이 없다. 몇 달 만에 만난 소영과 회포를 푸느라 평상시보다 늦게 잠들었다가 느지막한 시간에야 일어났다. 산책 시간도 여느 때보다 길었다. 날씨 때문이었다. 오늘은 정말 온종일 보기 드물게 시야가 좋고 바람도 잔잔한 날이다. 큰 귀를 펄럭거리며 공을 물고 해변을 뛰어다니는 마이가 너무 즐거워 보여 좀처럼 돌아오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배를 좀 채워야 할 텐데. 나는 운전 중인 소영이 들을 수 있도록 전방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린다. 늦어도 30분 전까지는 입장해야 한다고 했던 거, 잊어버린 거 아니지? 소영이 상기시킨 건 리플릿에 적혀 있던 세 가지 주의사항 중 첫 번째다. 아. 나는 짧은 탄식을 터트린다. 뭘 물으면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게 그 애의 말버릇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소영의 질문은 자주 비난이나 빈정거리는 것처럼 들려서 크고 작은 말다툼으로 이어지곤 했다. 네가 삐뚤어져서 그런 거라는 생각은 안 들어? 소영은 종종 그렇게 물었다. 기우는 햇빛이 차 안으로 쏟아진다. 상반신과 무릎 언저리가 뜨겁다. 나는 달려오는 일몰을 선바이저로 가리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해안선에 늘어선 나지막한 건물들 사이로 수평선이 빠르게 흘러간다. 과감한 디자인의 알록달록한 옷을 걸친 사람들이 자주 눈에 띈다. 거주민과 관광객은 대개 옷차림으로 구별된다는 걸 이제 안다. 당분간 저 풍경 속에 내가 낄 일은 없을 거다. 오늘의 끼니를 고민하고 마켓에 올라오는 구인 목록을 살펴보다가 해가 질 무렵에는 마이와 함께 동쪽 해안가를 쏘다니는 게 요즘 내 일과의 대부분이다. 생존과 생활. 요즘 나는 밥그릇 앞의 마이가 그런 것처럼 무섭도록 그 단어들에 집중하며 지낸다. 투어가 끝날 즈음에는 문을 연 식당이 없을 텐데. 불안을 삼키며 소영을 흘깃거린다. 흰색 테두리의 검정 선글

소설 2024.11.01
구하고 원하는 자에게

구하고 원하는 자에게 윤치규 조사실 안에서 윤구민은 호주에 관해 생각했다. 호주에 있는 아버지를 떠올린 것은 아니었고 정확히 말하면 호주가 섬인지 대륙인지 고민했다. 만약 아버지였다면 이런 질문을 들었을 때 너무나도 간단히 호주는 섬이면서 동시에 대륙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윤구민은 그것이 이치에 맞는 말일지라도 정답이 될 수 없다고 여겼다. 마찬가지로 호주가 자체적인 지각판 위에 있다거나 독자적인 생태계를 갖고 있기에 대륙이라는 주장도 마땅히 받아들일 수는 있으나 정답이 될 수 없었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아시아와 유럽은 하나의 대륙이었고 마다가스카르도 섬이 아니라 얼마든지 대륙이 될 수 있었다. 18세기 영국의 제임스 쿡 선장이 호주 동쪽 해안에 처음 도착했을 때 호주는 섬이 아니라 대륙이어야만 했다. 스페인의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처럼 영국의 왕립학회도 미지의 남방대륙 테라 아우스트랄리스를 찾아내야만 했다. 영국이 호주를 신대륙이라고 선언했을 때 다른 나라는 인정하지 않았다. 영국은 호주가 섬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대륙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했다. 그중 윤구민이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그린란드보다 큰 섬은 앞으로 대륙이라는 것이었다. 그건 정답을 찾은 것이라기보다는 만들어낸 것에 가까웠다. 그리고 어쩌면 그런 방식이야말로 정답이라는 것의 본질과 가장 가까운 형태인지도 몰랐다. 호주의 원주민이었던 애보리진에게 호주는 섬도 아니고 대륙도 아니었으며 그저 완벽하고 절대적인 단 하나의 세계일 뿐이었다. 영국이 호주를 침략하고 호주는 대륙이 되었고 애보리진은 현생 인류 중 가장 진화하지 못한 열등한 종족이 되었다. 생김새가 오랑우탄과 흡사하고 뇌 용량이 다른 호모 사피엔스보다 작다는 게 이유였는데 윤구민은 궁금했다. 호주에 정착한 영국인이 그토록 수많은 애보리진을 죽인 이유는 그들이 도저히 같은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죽여 놓고 보니 너무할 정도로 많이 죽여 버려서 애보리진을 인류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스스로 속이게 된 것일까? 1996년 전두환에게 사형이 구형된 뒤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다음 해 사면되는 과정을 뉴스로 지켜보면서 윤구민은 거짓말이라는 것도 뻔뻔하게 반복하다 보면 정답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윤구민에게도 너무 오랫동안 반복한 거짓말이 하나 있었다. 아버지가 호주에서 사업을 한다는 것. 학교에서 가정환경조사서를 작성하거나 친구 부모님이 아버지 직업을 물어 볼 때마다 윤구민은 그렇게 대답했다. 왜 하필 호주였을까? 아마도 미국이나 중국처럼 너무 뻔한 나라보다는 다소 생소한 지명이 더 그럴듯해 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 무렵 캥거루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봤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유년 시절 윤구민이 나쁜 길로 어긋나지 않게 보살펴 준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거짓말이었다. 거짓말이 들통 나지 않도록 유복한 집안에서 사랑받으며 자란 듯 누구에게나 친절했고 예의 바르게 굴었으며 옷차림에도 신경 썼다. 윤구민은 비싼 브랜드 옷을 입을 수 없어도 가난을

소설 2024.11.01
속으로 하는 말

속으로 하는 말 권희진 1 “무슨 생각해?” 승언의 질문에 나는 원숭이 우리에 갇혔던 남자를 떠올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여자가 갇힌 게 아니고?”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니,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어,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눈을 보면서 그 안에 갇혔던 건 남자가 아니고 여자였던가, 라고 생각했어요. 이번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나는 그게 이상했습니다. 내 생각을 읽었나? 아니, 그것보다 승언도 그 영화를 아는구나, 그런데 어떤 영화였지? 또 그런 걸 생각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강변에 앉아 휴대전화로 음악을 듣는 중이었습니다. 밤에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갑자기 승언이 둘만 있을 수 조용한 곳을 가고 싶다고 했고 나는 지금은 너무 늦었어, 라고 말했습니다. 그녀가 실망하기에 나는 택시를 불러 그녀와 함께 뚝섬으로 갔습니다. 우리 둘만 갈 수 있는 곳은 아니었지만 그 시간이라면 다른 사람은 없으니 조용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택시에서 내리자 승언은 다시 기분이 풀어진 것 같았습니다. 새벽 2시에 거기에 갈 생각을 한 걸 보면 아마도 주말이었을 겁니다. 그곳엔 음악을 듣고 있는 우리 말고도 산책하는 커플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있지 않았는데도 커플처럼 보였습니다. “새벽은 좀 이상한 시간인 거 같아.” 승언은 그들을 보면서 말했고 나는 이건 누구 노래야? 라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가수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영국 그룹이고 두 사람은 커플이라고도 했었는데, 지금은 그 가수도 노래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누군가 그 노래를 다시 들려준다면 난 아마도 이건 누구 노래죠? 라고 물어볼지도 모릅니다. 그게 누구 노래건 별로 중요하진 않지만 어쨌든 우리는 그들의 노래를 계속해서 들었습니다. 노래를 들으면서 드문드문 대화도 나눴습니다. 원숭이 우리에 갇힌 게 누구였을까 하는 것 같은 엉뚱한 주제들이었죠. 손을 잡은 채로 말입니다. 손을 잡지 않아도 우리는 커플이었지만 새벽은 좀 이상한 시간이었기 때문에 손을 잡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문득 승언은 한강에서 잡은 물고기는 먹을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글쎄, 먹으려고 잡는 거 아닐까? 라고 하자 그녀는 “난 못 먹을 거 같아.”라고 했습니다. 나는 말했습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물고기는 물고기였다가 잡히는 순간 생선이 된다는 거야. 그녀는 내 말을 듣고 가만히 있다가 어항에 햄스터를 키우는 남자에 관한 얘기를 들려줬습니다. 어항에는 수초와 모래가 있고 조명과 여과기도 설치돼있지만, 물고기는 없고 낚시하는 햄스터 인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믿는 남자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물고기가 없어? 라고 물었더니 물고기를 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서라고 했습니다. 그 대신 영원히 썩지 않는 플라스틱 햄스터 인형을 두었다는 거죠. “그 햄스터 인형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마치

소설 2024.10.01
청의 자리

청의 자리 이준아 윤의 기침소리가 아침부터 요란했다. 목을 억지로 긁어 가며 끌어내는 기침이라 답답함이 해소되기는커녕 옆에 있는 사람까지도 침을 꼴깍 삼키고 싶게 만드는 소리였다. 상담이 잡힌 날이면 윤은 꼭 그런 식으로 불필요한 소음을 일으키며 단을 불편하게 했다. 그러다 목쉬겠어, 그만 좀 하지, 단이 타박이라도 할라치면 윤의 눈썹은 단박에 가파른 산등성이가 되었다. 단은 그 성질 사나워 보이는 눈을 흘기며 티가 나게 중얼거리곤 했다. 방구석 호랑이 주제에. 하지만 그날의 단은 윤에게 단 한 마디의 반기도 들 수 없었다. 윤의 상담이 시작된 이래 최초로 윤이 아닌 단이 환자인 날이었다. 그러니까 윤의 불안이 단에게서 기인한 날이었다. 하다 하다 이런 날도 오는구나, 단은 헛웃음이 다 나왔다. “이런 일이 종종 있나요?” “글쎄요, 흔한 케이스라고 말할 순 없겠네요.” “이유가 뭘 까요?” 의사는 그건 앞으로 차근차근 알아보자며 그날의 상담을 마무리 지었다. 차근차근, 이라니,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입장 차이가 이처럼 분명하게 갈릴 말도 없을 거라고 단은 생각했다. 사무직에 종사하는 오늘날의 20대에게 모니터를 거부하는 증상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배울 만큼 배운 저 의사 놈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단은 의사씩이나 되면서도 충분히 젊기까지 한 그 태평한 얼굴을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마지막 질문이 우선이었다. “저 혹시, 지인 추천 할인 같은 건 없나요?” 의사는 키보드 위로 손가락을 빠르게 놀리며 처방전을 써내려가는 중이었다. “음, 죄송해요. 그런 건 없어요.” 단이 진료실 문을 나서려는데 여전히 모니터에 고개를 박은 그가 인심 쓴다는 듯 말을 보탰다. “두 분이 자매시니까, 설윤 환자 분 세션 예약해 놓은 거 설단 환자 분이랑 서로 양도는 할 수 있게 해드릴게요.” 처음 증상을 느꼈던 곳이 하필이면 출근길의 만원 지하철이었다.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욕지기를 느낀 단은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고 출입문을 향해 내달려야 했다.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하게 들어찬 객차에서 의지대로 방향을 바꾸기란 대개 쉬운 일이 아니지만, 당장이라도 전부 게워낼 것 같은 얼굴로 주변을 밀치는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승객들은 짜증과 두려움이 섞인 표정으로 서로에게 몸을 더 밀착시켰다. 그렇게 가까스로 생긴 공간으로 단은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다른 쪽 손바닥에 들린 단의 휴대폰에선 알고리즘이 충실하게 골라 준 30초 내외의 짧은 영상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플랫폼 자판기에서 물 한 병을 결제해 해갈하며 숨을 돌리자 메스꺼움은 곧 가라앉았다. 역시 마지막 하이볼은 마시는 게 아니었어, 단은 지난밤의 객기를 후회하며 남은 다섯 정거장은 도보로 이동하기로 마음먹었다. 물에 젖은 솜 같은 몸뚱이를 겨우 일으켜 긴 계단을 올랐건만 손이 허전했다. 자판기 옆

소설 2024.10.01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전하영 R과 나는 바닷가의 한 도시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었다. 우리는 그 도시에 있는 어느 서점의 초청으로 북토크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처음에는 서점이라고 해서 작은 가게인 줄 알았는데 꽤 규모가 있었고 로컬에서는 인지도도 높은 곳이었다. 사례비가 두둑해서 나는 바쁜 R을 설득해 초청 인사로 함께 행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이럴 때는 그가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불려 다니는 일을 한다는 게 도움이 됐다. 주말에 집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를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북토크는 공식적으로도 그의 일의 연장이었다. 북토크에서 이야기할 책은 내가 이십 년 전에 쓴 소설로 처음에 출간됐을 때만 해도 거의 팔리지 않았는데, 영화화되면서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R은 그 영화의 제작자였다. 그가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책을 발견했고 영화화를 제의해 왔다. 안 될 게 뭐람? 그 책은 세상에서 잊힌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나는 반갑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적지 않은 이차 저작권료에 더 관심이 많이 갔는데 알고 보니 그쪽에서는 내가 당연히 그보다 큰 금액을 부르리라 예상하고 미리 낮춰서 제시한 금액이라고 했다. 그런 사정을 파악하게 된 것은 R과의 관계가 좀 더 사적인 성격으로 진전된 이후의 일이었다. 그 후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책이 영화화되자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처럼 책에 쓰인 시절도 내게 함께 돌아왔다. 이십 년 정도가 지나면 당시의 나를 더 이상 나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상황과 감정이 바뀐다. 인간의 몸은 7년마다 세포 전체를 모조리 갈아치운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책이 처음 출간된 이후 대략 세 번쯤은 완전히 다른 나로 거듭나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잘 아는 타인을 덕질하듯이 나는 과거의 나에게 향수를 느끼며 그때 그 시절의 장소를 방문하며 추억에 잠기곤 했고, 그때마다 함께하는 상대에게는 숨은 의도를 밝히지 않고 다른 볼일이 있는 것처럼 둘러댔다. 그것은 최근 들어 생긴 나만의 비밀이자 즐거움이었다. 북토크를 위해 우리가 방문하는 도시는 한때 유명한 관광지였지만 오랫동안 쇠락의 길을 걷다가 최근 들어 다시 각광 받기 시작한 지역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 비싸고 조밀한 서울에 진력이 난 젊은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었고 사람들이 모이니 인터넷 매체들이 관심을 보였다. 이제 조만간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 물망에 오를 테고 그렇다면 이 도시도 많은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프랜차이즈 카페와 플라스틱 상징물로 가득 찬 어느 평범한 한국의 소도시 중 하나로 거듭날 것이었다. 다름 아닌 영화제작자를 데려가는 셈이니 어쩌면 내가 그 도시를 망가뜨리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망상에 불과하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온 세상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 내가 하는 작은 행동이 불러일으키는 더 큰 효과에 대한 전망. 책이 영화화된 뒤로 줄곧 내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기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R에게 그 도시에 가본 적이

소설 2024.10.01
이것은 사랑 없이는 깰 수 없는 유일한 꿈이었다.

이것은 사랑 없이는 깰 수 없는 유일한 꿈이었다. - 춤추는 무당 당골 이심과 춤추지 않는 무당 오키나와 영매 유타의 사진에 대하여 한정현 기생 아니고 무녀예요. 무당이라고요, 아저씨. 이 여자한테 그랬다간 저주받는다고요. 어쩌려고요? 팔아먹게? 그런 말을 했던 이는 곧 어흥, 하는 표정을 짓는다. 얼굴을 잔뜩 구기면서 말하는데도 생생한 눈빛이 빛난다. 사내는 입을 반쯤 벌리고 그이의 얼굴을 바라보다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되레 큰소리다. 내, 내가 억지로 잡아끌었나! 누가 이 얼굴에 돈을 내겠어! 그 말을 하면서도 사내는 손목이 잡힌 이심이 아니라 그이의 얼굴을 힐끗거린다. 나도 그냥 기생은 아니죠. 아저씨 그렇게 내 얼굴 빤히 보면 돈 내야 돼. 알죠? 아닌 게 아니라 그이가 입고 있던 소맷자락이 그것을 알려준다. 잘 다린 소맷자락에 수가 놓여 있다. 초량권번. 사내는 돈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아까보다도 낮은 자세로 어느새 이심의 손목을 놓고 슬그머니 물러선다. 사내가 놓아 준 이심의 손목은 줄이 그어진 듯 붉다. 공창제도는 한참 전에 없어졌지만, 부산이든 서울이든 이젠 사창제도가 판을 쳐요. 미군들에게 매매 놓아 주는 곳도 많고요. 몰랐나요? 어느 누가 꿀이라도 한가득 따라 놓은 걸까. 남북이 서로 총을 겨누며 싸운 지 1년이 넘고 보니 거리마다 향기는커녕 악취가 진동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향을 품고 있구나. 이심은 공창이 뭔지도 사창이 뭔지도 몰랐다. 이 부산이라는 곳에 오기 전까지. 다만 저건 알았다. 그이가 들고 있는 소매 끝에 달린 초량권번이라는 이름. 이 사람은 북쪽이 밀고 내려올 때 군예대로 온 최승희의 제자일까, 아니면 호남 제일 이매방의 제자일까. 이심은 문득 건너의 그이가 자신과 비슷한 또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심은 아마 저이가 권번에 들어갈 무렵 시집을 갔을 거다. 세습무라는 것은 보면 희한했다. 부모가 전라도 세습무인 당골이라 한들 그 자식이 당골이 될 수는 없었다. 신과 인간을 잇는 것이 그들의 업, 인간사 그 모든 번뇌 속에서 자신의 삶은 없는 한 맺힌 자리라 그런 것일까. 기이하게도 당골은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로 이어지는 거였다. 그렇다면 이심은? 남원 가재골 3대 당골 이심은 어떠한가. 이심은 제 발로 그 집에 들어갔다. 이심은 신이 아닌 한 인간에게 모든 걸 걸고자 했다. 한여름 빨래터에서 땡볕을 지고 일하는 이심에게 다가와 부채로 가만히 빛을 막아 주던 그 소년에게 모든 것을 걸고자. 사라진 것이 네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처음 해변에서 홀로 하얀 천을 두르고 기녀들이나 추던 입춤을 휘날리듯 추던 그 누군가. 어느 집 기녀가 저리 고울까. 종일 마른 볕에 앉아 빨래를 하던 이심에게는 꿈같은 광경이었다. 어지러움에 잠시 이심이 감았던 눈을 뜨고 보니 어느새 그 꿈이, 아니 그가 웃으며 부채로 빛을 가려 주고 있었다. 뜻하지 않게 빛나던 그것은, 윤슬이 아니었다. 그의 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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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는 사람

기억하는 사람 ―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최의진 1. 기억 당신이 나의 일상에서 멀고, 당신의 고통을 내가 곁에서 함께 겪을 만큼 가깝지 않다면, 당신이 기억난다는 말은 이런 것이다. 당신을 떠올리게 하는 계절이 지나면 어느덧 제삼자가 된 것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 먼발치에서 살아왔다는 것. 잊으려 애쓴 적 없고, 오히려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으나, 그럼에도 그 기억 곁에 항상 머물러 살지는 않았다는 것. 물론 이는 분명 망각과 구별되며, 머릿속 어딘가에 당신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기억함’과 닮았으므로 우리는 때로 외부 요인에 의해 촉발되는 ‘기억남’이나 ‘떠올림’을 다른 누군가 없이도 당신을 계속해서 내 안에 간직하는 ‘기억함’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4·3, 5·18, 4·16··· 혹은 제주, 광주, 팽목항···처럼 뭉툭한 날짜와 지명으로 적히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살아 있는 당신을 마주하게 되면 내가 ‘기억함’이라 믿어 왔던 모든 순간은 다시 의심에 넘겨진다. 어디선가 당신의 이름을 마주치거나, 때가 되면 당신이 기억났지만, 그 이상으로 지속되지 않았던 기억의 공백들은 당신을 계속해서 기억하려는 의지가 내게 없었음을 짚고, ‘기억남’과 ‘기억함’의 사뭇 다른 무게를 증명한다. 매해 봄이 오면 세월호가 기억나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을 넌지시 ‘기억함’으로 여겨 왔으나, 10년을 상실에 꿰뚫린 채 진실을 밝히기 위해 살아온 사람, 그리고 그들의 가장 가까운 곳에 서기 위해 삶을 바쳐왔던 사람과 실제로 마주 앉자, 나는 당신들을 기억한다고 차마 말할 수 없었던 것처럼. 익숙하게 기억한다 말하던 자리가 낯설고 무거워지는 것이 ‘나’1)와 당신의 끝이 되지 않도록, 문학은 ‘기억남’에서 ‘기억함’에 이르는 길을 놓는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작별하지 않는 ‘기억함’을 단지 당위와 윤리로 여기는 대신, 끊임없이 질문하며, ‘기억남’이 몰고 오는 고통과 ‘기억함’이 품은 의지가 심장에 불을 켜는 삶 사이를 횡단한다. ‘기억남’은 어떻게 해야 ‘기억함’이 되는지, ‘나’가 ‘기억함’의 무게를 견딜 수 있을지, ‘나’에게 정말 이 길만이 유일한지. 2. 밀물과 썰물 소설의 1부를 이루는 축은 “그 도시의 학살”2)에 대한 책을 집필한 후, 그리고 친구, 인선의 부탁을 받아 오로지 새 한 마리를 살리기 위해 제주의 중산간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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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에서 젠더를 끄집어낼 때 : 2024년 무대에 오른 셰익스피어 연극과 ‘칼 든 여자들’

셰익스피어에서 젠더를 끄집어낼 때 : 2024년 무대에 오른 셰익스피어 연극과 ‘칼 든 여자들’1) 전지니 (한경국립대학교 교수, University of California, Irvine Visiting Scholar) ‘여성혐오적’ 셰익스피어의 텍스트를 소환하는 것 몇 차례 언론에서 보도될 만큼 올해 눈에 띌 만큼 빈번하게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무대화됐다. 이 같은 흐름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데,2) 국내에서는 셰익스피어의 희극보다는 비극이 선호되는 편이다. 이에 대해 관계자들은 사회 불안과 관련한 대중의 심리, 한동안 현장성이 강한 작품이 선호되면서 부차화되었던 ‘이야기성’의 복원, 중장년층 관객의 유입 등을 꼽았다.3) 복잡한 내면을 가진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 셰익스피어의 소위 ‘성격 비극’은 주로 매체에서 활동하는 스타들의 연극 출연을 독려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배우 황정민이 셰익스피어의 사극 와 에 연이어 출연했고, 조승우가 오랜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오는 이 공연될 예정이다. 브로드웨이에서는 2025년 봄 오랜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오는 덴젤 워싱턴과 제이크 질렌할의 가 관객과 만난다. 이 글은 2024년 셰익스피어를 재해석한 연극, 그중에서도 ‘젠더’ 문제를 전경화한 국내외 작품 3편에 대해 논의한다. 물론 셰익스피어 연극의 ‘여성혐오’가 논의된 것이 비단 최근의 일은 아니다. 희비극을 가리지 않고 16세기 후반~17세기 초반의 보수적 분위기와 조응한 가부장적 정서나 주제 의식에 대해서는 국내에서도 2000년대를 전후하여 몇 편의 논문에서 지적한 바 있다.4) 의 구성을 해체하여 그의 아내인 ‘레이디 맥베스’ 중심으로 재구성한 한태숙 연출의 심리극 (1998년 초연) 역시 일정 부분 원작에 대한 비판의식과 맞닿아 있다. 물론 오늘날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공연할 때 원작을 그대로 가져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셰익스피어 연극은 저작권이 진작에 소멸된 만큼 창작진의 초점과 문제의식에 따라 자유로운 각색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편성이 있는 문제를 다루며, 극장을 잘 찾지 않은 관객이 진입하기에 용이한 데다 얼마든지 재해석이 가능한 셰익스피어의 연극, 그중에서도 국내 관객이 선호하는 극적 파토스를 조성하기에 적절한 비극이 빈번히 공연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처럼 보인다. 이 지면에서 다루고자 하는 작품은 국립극장 제작 (김미란 각색·연출_국립극장 달오름극장, 2024.6.13.~16.), 국립극단 제작 (정진새 각색·부새롬 연출_명동예술극장, 2024. 7.5.~29.), 그리고 어바인 대학(UC Irvine) 뉴스완 셰익스피어 센터(New Swan Shakespeare Center_이하 뉴스완 센터)5) 제작 Measure for Measure(adapted and directed by Beth Lopes_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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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음악을 듣는다

시는 음악을 듣는다 —허연,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2020)를 톺아보며, 정원 1. 시를 읽고 때로 달라지는 경험을 한다. 허연의 경우, 그것은 감각의 왈츠와 같아 때론 휘몰아치고 때론 내리누르고 멈추게 하고 가만히 걷게 하는, 어떤 리듬을 통과하는 느낌이다. 허연이 빚어내는 각양각색의 파토스는 대개 화려한 색채를 지니고 있어 독자는 그 색채와 무늬에 매료되기 쉽다. 그러나 사실 허연의 시의 마력은, 감각의 형식을 재현하는 파토스가 리듬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죽었다 살았다 하는 깜박이는 보안등 아래서 얼굴 반쪽이 있다가 없기를 반복한다”(「이별은 선한 의식이다」)는 문장은 ‘죽었다’와 ‘살았다’의 상반된 감각을 ‘교차’하고, 그와 비슷한 모양의 보안등이 ‘깜박’거리는 이미지와 불빛에 의해 ‘있다, 없다’ 하는 얼굴 반쪽의 이미지를 ‘중첩’하면서 감각을 몇 배로 증폭시킨다. 말하자면 감각을 ‘교차’하고, 이미지를 ‘중첩’시키면서 시의 음악성-리듬과 그 의미를 ‘증폭’하는 이 감각의 형식으로 하여금 허연의 시는 그 파토스를 분화(噴火)하고, 독자는 그러한 시의 리듬과 시집의 멜로디 라인에 자연스레 몸을 맡긴다. ‘자유시’ 개념이 들어온 이후로 이처럼 현대시는 나름의 개성적인 방식으로 음악성을 실현한다. 2009년 월간 『현대시』에서 기획한 ‘한국시의 리듬이 탈옥할 순간이 왔다’라는 제목의 특집은 현대시의 음악성-리듬에 관한 연구의 한 대목을 보여주는데, 이는 이전의 자유시 개념을 한층 증폭시키는 것이었다. 김춘수는 “자유시에서의 자유란 이러한 운율로부터의 자유”1)라고 지적하면서 리듬론을 제시한 바 있다. 이렇듯 운율과 같은 외연적인 음향 요소로부터 해방된 자유시는 대개 내연적인 방면에 핀트를 주는 건축적인 구조를 지향하면서 형식으로부터 자유를 추구해 왔다. 중요한 점은 형식으로부터 자유롭다는 말을 형식이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기존의 정형적인 틀로부터 해방된다는 의미에서이지, 형식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한 편의 시가 지어지면 하나의 형식이 탄생한다. 그러니까 운율에서 벗어난 현대 자유시는 개척의 재평에서 생각보다 많은 잠재적 원동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잠재성의 근거로 허연의 시가 의미심장한 이유는 그의 시가 가지는 특별한 음악성 때문이다. 그것은 음악의 음악성을 타진하면서 시의 음악적 효과를 강화한다. 음악의 음악성이란 곧 리듬이다. 멜로디나 하모니를 가지지 않는 음악은 있어도 리듬이 없는 음악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 음악성을 타진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리듬이다. 리듬은 ‘음의 장단이나 강약 따위가 반복될 때의 그 규칙적인 음의 흐름’이다.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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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문화의 초국적 접점과 ‘마주침’의 서사학

한일 문화의 초국적 접점과 ‘마주침’의 서사학 : 동시대 한국 소설 속 ‘일본’이라는 물음 정창훈 올해 상반기 일본 방송가는 ‘한일 로맨스’로 뜨거웠다. 한국인 배우 채종협(작중 윤태오 역)과 일본인 배우 니카이도 후미(모토미야 유리 역)가 공동 주연을 맡은 드라마 가 그것이다.1) 이 드라마는 채종협을 단숨에 한류 톱스타로 만들며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은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여러 OTT 플랫폼이나 케이블 TV채널을 통해 방영되며 화제가 되고 있다. 나 역시 이 드라마를 매회 빠짐없이 챙겨보았는데, 기대 이상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다고 생각한다. 이 두 인물의 연인 관계에 시련이나 위기를 가져오는 여러 갈등의 요인들이 있었으나, 그 가운데서 국가적, 역사적 문제와 연관되는 요인을 끝내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오히려 신선했다. 국적(내셔널리티)과 언어, 생활관습의 차이는 둘 사이의 장벽이 되기는커녕 상대에 대한 관심을 극적으로 심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가족이나 주변인들도 이 둘이 한국인,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둘 사이를 반대하진 않는다. 이것은 종래의 한일 서사물에서 양국 인물의 연애사를 그려 온 방식과는 차별화되는 것인데, 이를 통해 ‘이례적인’ 해피엔딩의 결말이 주어진다. ‘한일 로맨스’ 자체가 이례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른 아시아 이웃들의 경우와 비교했을 때, 한일 양국 인물의 만남을 그린 서사적 재현이 여러 차례 반복되어 온 점, 나아가 오늘날 그 재현의 양상이 현저히 다양화되고 있다는 점은 주목을 요하는 현상이다.2) 물론 나쁘게 말하자면 이 드라마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정치적, 역사적 이슈를 정교하게 회피함으로써 구축된 가상의 이야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는 한국과 일본이라는 이웃이 서로를 감각하는 방식에 새로운 무언가가 ‘첨가’되고 있음을 예시하는 것이 아닐까. 돌이켜보면 지난 몇 년 동안 한국 소설은 이러한 변화에 한 발 앞서 민감하게 대응해 온 것으로 보인다. 여러 가지 껄끄러운 문제를 공유한 ‘오랜 이웃’과의 ‘새로운 관계’를 상상하는 시도가 동시대 소설 속에서 계승되어 온 점, 이 글은 거기에 새삼스레 주목하려 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움직임이 가져온 의미를 통시적 관점에서 살펴보기 위해, 잠시 과거로 돌아가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현해탄 서사’ 이후, 한일을 넘나드는 월경의 서사 근대 이래 한일 관계에서 ‘현해탄’은 상징적 의미를 지녀 왔다. 특히 식민지-제국 체제의 해체 이후 그것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의 바닷길(대한해협)’이라는 외시적 의미만이 아니라 역사적, 정치적 문제 등으로 인한 한국과 일본의 ‘가깝고도 먼 관계’(심리적 거리감, 국가적 입장의 차이 등)를 가리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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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들의 소화불량, 비인간-사물의 매혹

휴먼들의 소화불량, 비인간-사물의 매혹 황녹록 밖에선 바퀴벌레의 신음소리 아버지가 숨겨 둔 약을 먹은 것입니다 어머니 내 책상 위에 아버지가 피운 모기향 좀 치우세요 시집 위에 몸 약한 날벌레들 다 떨어지잖아 동생 문 열고 들어옵니다 나는 문밖으로 재빨리 나가려고······ 동생이 소리 질렀습니다 여기 또 있어 진은영, 중1) 오래된 사물, 거슬리는 존재감 이제 우리는 반려인, 반려동물, 반려식물, 반려미생물, 반려사물 등 반려종의 경계를 구분 짓지 않기로 한다. 반려종이란 서로의 밥을 나누고 몸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는 관계를 뜻하는 말로 어떤 물질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를 의미한다. 반려들은 나눔의 상호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못지않게 서로를 위태롭게 하고, 서로 먹다가 소화불량이 되기도 하고, 때로 죽고 죽이는 유해성의 성분도 가지고 있다.2) 그리하여 누군가의, 무엇인가의 반려가 된다는 것은 결코 무구할 수 없는 관계 속으로 이끌려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과 비인간 반려들의 낯선 이물감으로 시작되는 관계맺음은 애초에 구역감과 체기(滯氣)를 동반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관계맺음은 일상 속에서 예기치 못한 만남으로 강제될 테고, 그로부터 서로를 향한 진지한 응시의 요구가 시작된다. 그 응시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물음과 응답의 이야기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새로운 관계맺음에 대하여 ‘영원한 동반자’라는 환상을 기대하거나, 우정 어린 돌봄으로 윤리적 책임을 지우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다른 존재들의 있음을 감각하고 그 감각에 감응하는 관계로서 반려를 말하려는 것이다. 김초엽의 소설 『지구 끝 온실』3)은 SF적 상상력을 통해 인간 지수와 사이보그 레이첼, 레이첼과 희귀식물 모스바나, 그리고 모스바나와 이희수의 혼종적 관계맺음에 대한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종의 경계를 넘어선 존재들의 반려-되기는 멸망해 가는 지구 끝에서 찾아내는 희망의 메시지로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나아가 구원의 식물(푸른빛)이자 악마(생태계의 위협적인)의 식물인 ‘세발갈고리덩굴’의 이중적 존재감은 반려들의 관계로부터 인류의 재건과 구원의 (불)가능성에 대한 적극적인 타진으로 읽어 볼 수도 있다. 꽤 오래전 카프카는 그의 단편에서 규정할 수 없는 것들, 식별 불가능한 반려들의 존재감을 감지한 바 있다. 카프카의 작은 존재들은 경직된 습관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다양한 실험과 그 과정에서 예기치 않게 발생된 감염의 산물이다. 카프카의 비인간-사물들은 서로를 반려종으로 여기기에는 아직 미심쩍고 불안한 상태로 존재한다. 오드라데크(Odradek)4)는 낡은 실타래 조각처럼 묘사할 수 없는 형태를 띠고,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듯한 웃음소리를 낸다.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 분명하지만, 가장(家長)은 자신이 죽은 후에도 오드라데크가 계속 살아 있는 것이 근심스럽다고 고백한다. 또 있다. 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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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속 부동산과 젠더 정치학

대중문화 속 부동산과 젠더 정치학 전지니(한경국립대 교수) * 이 글에는 종결되지 않은 웹툰과 올해 공연된 연극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투기와 여성 이 글은 한국의 부동산 현실, 그중에서도 전세 사기로 집약되는 부동산 범죄를 다룬 웹툰과 연극을 겹쳐 보려 한다. 이를 통해 동시대 대중문화 텍스트 안에서 자산 증식에 대한 소시민적 욕망이 어떻게 젠더화되어 형상화되는지를 살피고, 여성을 범죄의 가해자 혹은 피해자로 배치하는 작품 속 시도가 갖는 양면성에 대해 조망한다. 논의할 작품은 표제에 부동산을 내세워 비슷한 시기 독자, 그리고 관객과 만난 (유기 글/그림, 2024.1.13.~연재 중), (김수정 작/연출, 2023.10.14.~22.(초연), 2024.6.1.~9(재연)) 등 두 편이다. 부동산과 여성을 관련지어 논의하는 경우는 본격적인 강남 개발 이후인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다. 부동산 가격 상승과 서민의 박탈감, 중산층 진입의 욕망 등의 문제는 박완서의 강남 아파트를 산 교수 부인의 이야기인 「낙토의 아이들」(1978)에서부터 시작해 재개발을 둘러싼 부녀회의 욕망을 다룬 웹툰 (스토리 매미/작화 희세, 2019.05.05.~2020.09.27.)까지 꾸준히 반복되었다. 염두에 둘 점은 (유하 작/연출, 2015), (연상호 작/연출, 2018)의 경우처럼 대중문화 속에서 개발·재개발의 역학관계를 다룰 때는 남성 인물이 이야기의 중심에 놓이지만, 개발의 수혜를 입고자 하는 소시민의 욕망을 다룰 때 그 중심에는 여성이 자리한다는 점이다. 관련하여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불안한 경제상황 속에서 반복되었던 투기는 여성의 것으로 전유되는 일이 빈번했다. 전쟁 이후 사회 혼란의 주범으로 간주되었던 ‘사설계’를 주도하는 부인들이나 1970년대 후반부터 매체에 오르내린 부동산 투기의 주범 ‘복부인’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은 근현대사 속 뿌리 깊은 여성 혐오와 직결되어 있다. 정치·사회적 불안으로 발생한 투기 심리를 여성의 전유물로 간주하며 문제의 핵심을 피해 가고 비판의 대상을 국가와 체제가 아닌 여성으로 지목한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여성이 투기에 몰두하는 이유를 심리학적,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기사도 있었다. 한 언론은 “복부인의 욕구 단계는 생리 욕구와 안전 욕구의 원시적인 단계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며 여성이 상대적으로 안전 욕구가 강하고 사회 진출이 부진한 것을 복부인이 생기는 이유로 분석하기도 했다.1) 이 와중에 투기를 여성의 것으로 지정하는 데 대한 자성의 목소리도 있었다. 1984년 한 신문 독자는 신문 기고를 통해 ‘복부인’은 여성 천시 단어로 공공매체에서 이 같은 유행어를 쓰면 안 된다고 역설한다. 그는 “이는 여성 학대의 사회적 악습에서 오는 콤플렉스를 여성의 사회 유린이라는 감정으로 희석시키려는 ‘투사’ 심리요, 또한 일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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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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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2024.11.01
바다는 요약이 없다

[에세이] 바다는 요약이 없다 이서안 “샘, 꼭 전문 다 읽어야 해요? 수능에 안 나올 수도 있잖아요.” 매 수업마다 이런 대사를 읊는 학생들은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간다. “전문 줄거리 요약한 건 없나요?” ‘요약한 것?’ 가슴 언저리를 뭔가 콕콕 찌른다. 시간이 부족해 그것도 걷기 중에 영화 줄거리와 결말을 보는 내 모습이 돌연 떠오른다. 나에게 꼭 집어달란다, 수능에 나올 작품들만. 중편 분량에도 못 미치는 소설을 혹 가다가 추천하거나 충분한 시간을 주어 과제를 내면 “이걸 언제 다 읽어요?”라며 지겹다는 낯빛을 단번에 드러낸다. 현대소설은 너무 길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든 데다 주제가 애매해 문제 풀기 어렵다나······ 고전소설은 글자가 아니라 기호 같다고······ 지겹지 않도록 강약을 조절하며 한껏 신나 가르침에도 괴로운 표정으로 시간을 견디는 학생들에게 나도 조금씩 지쳐 간다. 비단 소설 외에 다른 장르라고 다르지 않다. 조선시대의 이야기꾼 전기수들은 낭독의 귀재들이었나. 그들은 얼마나 맛깔나게 지은이의 숨은 의도까지 찾아내 상상력을 더 보태 구연했을까? 소설책을 구하기 힘든 열악한 환경에서도 그 시대의 애독자들은 세책점에서 신간이 나오기를 학수고대하며 가슴 저민 스토리에 같이 공감하고 감동 어린 몸짓으로 전기수들에게 반응했다. 장터나 마당에 앉아 전기수에게 귀 기울이는 애독자들이 있는 현장으로 마구 달려가고 싶어진다. “영웅소설의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게 놀랍지 않나요? 옛날에는 남성 중심 사회였잖아요. 그러나 여러분이 만난 홍계월전에서는 무엇보다 오랑캐와 싸우는 계월, 평국의 활약이 두드러지죠······.” 오늘 읽은 고전 소설은 그렇게 재미없는 소설이 아니었다. 그 시대를 앞서가는 근대적 가치를 담을 줄 아는, 진보적 소설인 동시에 핫한 소설이었다. 도적 때문에 강에 버려진 계월이 조력자의 도움으로 천신만고 끝에 구출되고, 신분을 감추기 위해 남장한 긴장 모티브도 있었고, 여성이 중심인물이 되어 나라를 구한 박진감 넘치는 활약의 절정과 사이사이 평국과 보국의 쿵쿵 로맨스와 독자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해피 엔드까지······. 하나 내 생각과 달리 나는 다른 색깔의 언어로 학생들을 간곡하게 유혹해야 했다. “얘들아, 홍계월전 만화책으로 나온 것도 있으니 그걸 보면 좀 쉽게 이해가 될 거야.” 학생들에게 제시한 유혹 계책에 씁쓰레하면서 ‘지금의 학생들은 영상세대들이잖아. 난 합리적 제안이라고 봐’ 스스로 마음을 다독이다가도 잠깐이나마

기획 2024.11.01
애도편지

[에세이] 애도편지 - 내 것이 아닌 모든 것들에게, 그리고 모든 것으로부터의 나를 김종연 1 믿음의 가장 큰 일은 믿음이다. 2 누리의 없음을 지체 없이 받아들였다, 라고 쓰고 그날은 무엇도 더 적지 않았다. 무용함의 유용함, 그 얇은 가지를 누군가 뚝, 뚝 부러뜨려 주고 있어서, 그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하고 싶었다. 그러나 정작 나는 가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잃고 있었다. 무관심을 잃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는 말은 가능성으로 비어 있다는 말과 같다. 다만 위로가 되는 건 불가능성 또한 그와 같다는 것이다. 3 알고리즘은 상실을 알지 못한다. 까치발을 들고 불 꺼진 거실로 나가 물을 따라 마실 때, 나는 이것이 어디에서 연원했는지 알지 못한다. 오랜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는 어머니와 언제나 쉬이 잠드는 아버지 그 사이에, 눈과 귀를 잃은 누리가 누워 있곤 했는데. 가장 나중에 떠나는 것은 목소리일까 생각했다. 안락사를 하는 사람은 마지막까지 귀가 살아서 모든 소리를 듣고 간다는데, 들었으니 해야 하는 말은, 이 모든 것을 거부해서라도 토해 내야 하는 그 마지막 말은. 불을 켜면 그 목소리가 들릴까 두렵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누워 듣는다. 밤의 혼곤 속에서 들려오는 낑낑거림을. 무언가 마음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그 소리를. 4 시(의) 구조는 무수한 병렬의 직렬로 존재한다. 불이 켜진 A가 불이 꺼진 B를 마주하여 밝게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B의 밝음은 아니다. 그때 보이는 것은 B의 어두움이며, 동시에 B에게서 어두움이 발견될 만큼 충분히 밝지 못한 A의 어두움이다. 그 순간 둘 사이에서 C가 나타난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그렇기에 존재를 주장할 권리를 가장 강력하게 획득하게 되는 그것. 그것은 몸 없이 보는 자다. 기관도 없이 기능하는 자다. 지워진 자는 무(無)가 아니다. 그것의 시선은 그것을 보려는 자의 시계에서 존재한다. 5 네가 기뻐할 수 있다면 나는 무엇이든 하겠지만, 네가 다시 돌아올 수 있다면 나는 무엇도 하지 않을 것이다. 6 우리가 관찰하려는 것이 공기와의 접촉에서 시작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조건을 마련할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0%를 시작할 수 있는가? 0이라는 것의 공간을 어떻게 완벽히 비워낼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보여주기를 그만두고 비유가 되어 비유를 중단할 수 있는가. 7 누리를 보기 위해 카메라 앨범을 되감는다. 그리고 그것에 도달하기 전에 끈다. 선언의 힘은 실패에 있다. 탑은, 사람이 아니라 탑에 의해 쌓이기 때문이다. 누리는 개의 나이로 백 년을 살았지만, 사람의 나이로 이십 년을 살았다. 나는 누리의 나이로 백칠십 년을 살았다. 너무 긴 시간은 종종 너무 짧게 축약된다. 누리가 있었고 지금은 없다. 가능성과 불가능성은 모두 삶으로 이어진다. 불가능이 있어서 죽는 사람은 없다. 가능성이 없어서 죽는 사람만이 있다. 꿈을 읽는 방법을 배운 뒤로 꿈은 내게 지나치게 직설적인 장면만을 보

기획 2024.11.01
더 이상 부끄럽지 않은 로맨스

[에세이] 더 이상 부끄럽지 않은 로맨스 손진원 “로맨스 소설을 쓴다고? 그러면 지금 너의 연애 이야기를 쓰고 있는 거야?” 오랜만에 대학 동기들을 만난, 2017년 가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학 신입생 시절부터 소설을 쓰고 싶다고 했던 내가, 드디어 장르문학과 웹소설을 펴내는 출판사와 계약해 원고 작업을 하게 되었다는 근황을 전한 것이다. 이를 전해 들은 친구들이 축하의 말을 건네던 중에 나온 말이었다. 마침 나는 한창 연애 중이었으며, 막 결혼 이야기가 오가던 참이었다. 생각해 보면 꽤 괜찮은 농담이었다. 내 일상과 내가 쓰고 있는 글의 장르가 이렇게 적절하게 맞아떨어질 줄이야. 누구든 던질 법한 농담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저 농담에 가볍게 대꾸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소설 내용을 듣고 싶어 하는 동기들의 기대를 애써 외면하면서, “설마, 내 연애사에 관심 있어 할 사람이 있을까?”라는 소심한 대답으로 일축했다. 내 이야기가 아니라고 반박하면서도, 정작 내가 쓰고 있는 작품의 내용을 설명하지는 못했다. 필명은 비밀이라고 덧붙이면서. 동기들의 행동이나 발화의 내용이 불쾌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놀라움이 더 컸다고 해야 할까. 웹소설과 로맨스라는 말을 듣고도 저 농담을 했다는 사실을 미루어볼 때, 동기들은 내가 알고 있는 세계를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그것이 무척 놀라웠다. 우리는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고 여러 수업을 같이 들었다. 수업에서 다룬 소설과 시를 읽으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동시대 대중문화 콘텐츠를 즐기며 잡담하던 기억이 더 많았다. K팝 아이돌 가수에 대해서나 마블의 영화 시리즈, 혹은 최신 일본 연재만화까지. 꽤 폭넓은 관심사를 공유했던 우리는 그 어느 곳에서도 심도 깊이 읽어낼 필요를 느끼지 못할 많은 텍스트에 열광했고, 그 콘텐츠의 팬을 자처하며 진지하게 그것들을 읽었다. 우스갯소리를 남발하는 것 같았지만 대중적이거나 마니악한 텍스트에 대한 나름의 ‘리스펙’을 가지고 진지하게 토론하곤 했다. 그렇지만 동기들은 내가 알고 있는 웹소설, 로맨스라는 영역만큼은 문외한이었다. 뭐, 잘 모를 수도 있다. 그러면 내 글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이 장르가 어떤 것인지 잘 설명하면 되는 일이니까. 문제는, 그걸 설명하려는 것이 부끄러워서 입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로맨스 팬이면서, 심지어 창작까지 시작한 내가 이걸 부끄러워한다고?’ 순간적으로 느낀 감정에 반발심마저 들었다. 그렇지만 머릿속에 튀어 오르던 반박의 말은 금방 흐지부지되었다. 사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로맨스라는 장르를 진짜 부끄럽다고 생각했다는 것보다,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것이 더 부끄러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로맨스를 공들여 설명하는 것을 새삼스러운 일처럼 여겨야 할 것만 같았다. 오랜 시간, 소위 B급 텍스트들에 대한 ‘리스펙’을 공유했던 동기들 앞에서조차 말이다. 부끄러움에 대한

기획 2024.10.01
과거를 보는 미래 SF

[에세이] 과거를 보는 미래 SF 곽재식 며칠 전 나는 한 행사에서 SF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소개하는 발표를 하나 맡게 되었다. 발표가 다 끝나고 질문 답변 시간이 되었는데 청중 중 한 분이 “SF라면 미래를 생각해 봐야 하는데, 왜 옛날 SF를 소개했느냐?”라고 질문했다. 그날 행사 중에는 답변을 짧게 드렸지만 이 내용은 한번 깊게 따져 볼 만한 재미난 주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한번 해보려고 한다. 명작 SF로 자주 손꼽히는 1970년대 영화로 이라는 할리우드 영화가 있다. 찰턴 헤스턴이 주연을 맡아 대형 영화사에서 배급한 그야말로 정통 할리우드 영화인데 그러면서도 비참한 미래의 모습을 예상해서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 결말도 뻔한 할리우드 영화의 행복한 결말이라고 말하기는 매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가기에 눈에 뜨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맨 마지막에 주인공이 외치는 대사는 SF 영화사에서 유명한 대사 순위를 꼽으면 상위권에 자주 오를 만큼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미래는 인구가 너무나 빠르게 늘어났기 때문에 멸망해 가고 있는 세상이다. 인구가 너무나 많은 데 비해 식량과 자원은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굶주리고 모든 물자가 부족해 다들 비참하게 살고 있다. 영화 제목인 “소일렌트 그린”이란 식량이 부족한 세상에서 특별히 개발해 보급 중인 신형 인공 식품을 말한다. 그러므로 은 19세기 맬서스의 등장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미래 인류의 멸망 시나리오라고 철석같이 밀었던, 맬서스 함정을 정통으로 다룬 영화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성장한다.”라는 말은 어지간하면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지구는 망한다, 그러니 사람이 많은 것은 해악이다,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은 곧 “사람이 곧 모든 파괴의 근원이며, 사람이 없어져야 지구가 살아난다.”는 생각으로도 자주 이어지기도 한다. 재미난 사실은 이 영화에서 다루는 멸망해 가는 미래가 2022년이라는 점이다. 은 1973년에 개봉된 영화이므로 이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이란 영화가 제작되던 1972년으로부터 50년 후를 말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이 SF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의 미래라는 시간은, 2024년을 사는 현대의 우리에게는 2년 전의 과거가 되었다. 나는 영화를 보는 과정에서 이렇게 시간의 꼬임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신비롭다. 게다가 요즘 이 영화의 내용을 보다 보면 더욱 중요한 사실도 깨달을 수 있다. 실제 2022년이 인구가 너무 많아 식량 부족으로 멸망하는 시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2020년대는 인구가 너무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구 감소와 초고령화가 문제인 시대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 겪고 있는 문제도 아니다. 한국에서 인구 문제가 워낙 극심하게 나타나

기획 2024.10.01
다시 서정을 위해

[에세이] 다시 서정을 위해 권상진 스무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서른이 되기 전에 시인이 되겠다고 주변에 떠들고 다녔던 기억이 아슴하다. 「홀로서기」를 외웠고 「지란지교를 꿈꾸며」를 외웠다. 이생진을 읽고 백창우를 읽고 박노해를 읽었다. 잔잔하게 때로는 웅장하게 가슴을 밀고 들어오는 시편들이 심장을 가로세로로 뛰게 만들었다. 백석과 김수영과 기형도의 이름은 몰랐지만 굳이 그들이 아니어도 충만한 시간들이었다. 시집이 이천 원에서 삼천 원 정도 할 때여서 큰 부담 없이 고를 수 있었고 외출할 때 시집 한 권을 들고 밖을 나서도 아무도 이상하게 쳐다보는 이도 없었다. 오히려 뭇 여성들의 시선이 슬쩍슬쩍 내 턱선을 지나 책장에 닿는 기분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생일이나 기념일에는 으레 서점에 들러 시집을 골랐다.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원태연),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류시화), 『친구가 화장실에 갔을 때』(신진호) 같은 시집을 골라 슬쩍 건네던 날들이 아련하다. 스물이라는, 가라앉을 것 하나 없는 맑은 감정에서 속살거리는 말들을 시인들은 대신 말해 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십 대는 가고 이십 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하고 대학을 쫓겨나 군대를 다녀오고 나니 어느새 아무데도 기댈 수 없는 성인이 되어 있었다. 오래된 가난이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그때부터 가난은 나를 가만히 두지를 않았다. 공장 일을 시작했는데 처음 해보는 노동이란 게 미치도록 좋았다. 종일 몸을 쓰고 땀을 흘리는 일이 알 수 없는 쾌감을 안겨 주었고 월급이라는 보상까지 덤으로 안겨 주었다. 시를 읽고 쓰는 일만큼 일이 재미있었고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도 살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더없이 좋았다. 지쳐 잠들기 전 문득 돌아본 시의 한때는 짧은 여행지의 추억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나의 스물은 급류처럼 흘러갔고 시는 둑 너머에 있어 쉽게 손이 닿지 않았다. 하지만 일과 돈, 그리고 자립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노동은 즐겁고 땀은 향기로웠지만 갑자기 내가 꿈꾸던 삶이 이런 것이었던가 하는 질문이 나를 툭 한 번 치고 갔다. 해지는 풍경만 봐도 맥박이 난동을 부리고 꽃과 낙엽의 표정을 살피면 왠지 모를 눈물이 맺히던 한 시절의 기억이 불현듯 피곤에 지친 등을 흔들어 깨웠다. 시인이 되겠다던 꿈을 무참히 짓밟고 나를 공장 노동자로 내몰았던 대학교 재단 이사장의 말이 떠올랐다. ‘약속은 지키면 좋은 것이고 못 지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던 그의 말. 그가 지키지 않은 약속 때문에 학교에서 쫓겨난 나는 궤도를 이탈해 버린 행성처럼 어둠 속으로 무작정 떠밀려가고 있었다. 막막한 혼돈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던 약속이란 단어가 다시 나를 수습하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서른을 지나갔고 아무도 내게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물어 보는 이는 없었지만 스스로와의 약속은 끝내 지켜주고 싶었다. 그렇게 시가 다시 내게로 왔다. 세월도 변했고 시도 변해

기획 2024.10.01
산책과 가을의 일

[에세이] 산책과 가을의 일 박주영 오랜만에 동네 산책을 했다. 여름이 시작되고는 햇빛이 사라진 밤 산책을 하다가 그나마도 열대야 때문에 멈춘 지 오래되었다. 오늘은 해가 뜨기 전 일어났고 스탠드를 켠 책상에 앉아 소설을 썼다. 어느새 창밖이 밝아지는 걸 보다가 해가 완전히 뜨기 전에 바깥으로 나가 걷기로 했다. 산책은 어슬렁거리며 그냥 걷는 것이지만 소설가의 산책에는 생각이 없을 수 없다.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목적이었다면 달리기를 했을 것이다. 나는 산책과 걷기를 구분해서 다이어리에 기록한다. 산책이 바라보고 생각하며 이동하는 것이라면 걷기는 건강이라는 목적을 가장 염두에 둔 움직임이다. 여름이 아니라면 산책은 주로 오후나 해질 무렵에 한다. 늦게 자고 오전에만 일어나도 뿌듯한 사람이라 일어나자마자 소설을 쓰고 쉴 즈음이 대개 그 시간이기 때문이다. 산책을 하면서 내가 지금까지 쓴 것을 생각하다가 빈틈을 메울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고 다음 장면을 생각하기도 하고 이 소설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고심하기도 한다. 여름 해가 뜨기 전 오래간만에 소설을 생각하며 산책을 한다. 나는 문학 전공도 아니고 소설 쓰기를 배운 적도 없고 주변에 글 쓰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소설가가 된 후 소설가를 만날 기회가 생기면 알고 싶은 것들을 질문하곤 했다. 글쓰기가 잘 안 될 때는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2개의 대답을 기억한다. 한 분은 그냥 걷는다, 라고 답했고 한 분은 안 되어도 앉아서 써야지 어떡해, 라고 했다. 두 분 다 그때 20년 가까이 소설을 거뜬히 써온 분이었다. 나는 2개의 답을 지금껏 생각하고 있고 그게 지금의 나에게는 정답이 되었다. 하지만 정답을 안다고 정답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는 자주 책상 앞에서 벗어나고 걷는 것이 아니라 누워 있는다. 그냥 진짜 누워만 있는데, 요즘은 소설 쓰는 일에 자주 지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또 한 분의 조언이 생각난다. 건강을 챙기고 운동을 해라, 그러지 않으면 장편소설을 쓸 수 없다. 여기의 조건은 ‘나이 들수록’이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등단했고 처음부터 장편소설을 썼던 나는 그 조언이 그때는 크게 와 닿지 않았다. 나는 이미 젊지도 않고 약해 빠졌는데 장편소설을 쓰는 데 그리 힘이 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조언의 참 의미는 어떤 고비마다 왔다. 나이는 한 살씩 먹는 게 아니라 쌓여 있다가 한꺼번에 온다는 걸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부터 손목이 아프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허리가 아프기 시작하고 이제 어깨가 아프다. 남들은 여름휴가를 가는 시기 나는 병원을 다녔다. 의사는 어깨 인대가 손상되었다고 했다. 특정 자세를 취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자세는 하필 내가 반평생을 취해 온 자세이다. 지금도 나는 그 자세이다. 자판을 치고 노트에 글을 쓰려면 취할 수밖에 없는 자세. 그리고 의사는 옆으로 눕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나는 그렇게 누운 자세로 책을 읽었다. 너무 크고 두껍고 무거운 책만 그 자세로 읽을

기획 2024.09.01
소설의 피로

[에세이] 소설의 피로 양지예 노엘 갤러거의 무대를 보며 음악가가 부럽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 그의 젊은 시절 방황하던 경험과 더불어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한 여인에 대한 곡이다. 노래는 발표한 지 삼십 년 가까이 되어 가고 무대 위 머리 희끗희끗한 노엘 갤러거에게서는 이제 방황 따윈 느껴지지 않는다. 연주자와 합을 맞추는 모습이 흥겨울 정도다. 아련한 원곡의 분위기 역시 세월을 따라 경쾌하고 리드미컬한 편곡을 입었다. 음악은 어떻게 나에게 올까. 일단 누군가 곡을 쓰고 발표해야 한다. 청자인 나는 플랫폼을 통해 음원을 감상하거나 드물게 전통적인 방법으로 앨범을 사기도 한다. 음악가에게는 다른 홍보 방법도 있다. 대중음악가라면 뮤직비디오를 찍어 유튜브에 업로드하거나 음악방송에 출연하기도 한다. 때로는 음악과 관계없는 방송이나 행사에도 출연하는데, 이런저런 이해관계가 얽혀 있겠지만 역시 주는 새 노래 홍보를 위해서다. 그 과정에서 신곡은 끊임없이 피로(披露)된다. 나는 가끔 궁금해진다. 가수들은 자신의 노래를 좋아할까. 속속들이 알고 있으며 또한 수만 번은 반복하여 들었을 그 노래를 정말 좋아할 수 있는 걸까. 음악가는 본인 노래의 첫 청자다. 작곡에 참여하지 않는 가수라 하더라도 비슷하다. 곡이 만들어지는 영감의 그 순간부터 완성 후 녹음 과정까지 좋은 기억도 싫은 기억도 낱낱이 알게 될 수밖에 없다. 내면의 갈등뿐이 아니다. 요즘 세상에 창작자 홀로 만드는 음악이란 없다시피 하다. 사람이 여럿 모였는데 과정이 언제나 매끄러울 수는 없다. 드물게 하늘이 내려 준 노래가 어려움 없이 착착 완성된다 한들 매끈한 표면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울퉁불퉁 제멋대로이기 마련이다. 음악이든 소설이든 아름답기만 한 창작의 과정은 나로선 상상하기 힘들다. 겉보기를 아름답고 멋지게 만드는 일이란 사실 어렵지 않다. 그저 포장 기술이다. 세상에는 정말 엄청난 포장 기술이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내실 다지기보다는 포장 기술을 익히는 쪽이 빠르다. 포장이 어렵다면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만 보여주는 방법도 있다. 피땀눈물을 삭제해 버린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말처럼. 바라기만 하면 매끈한 성취가 이뤄질 듯한 환상을 듣는 이에게 심어 주는 요령을 수많은 표어와 마케팅 서적이 알려주고 있다. 이런 요령을 활용하면 가수도 어렵지 않게 싫어하는 노래를 즐거운 듯 피로해 보일 수 있을 터다. 삼사 분 정도 꾹 참아내면 그만이다. 케이팝 아이돌들의 화려한 메이크업과 현란한 조명은 혹시 드러날지 모르는 굴곡을 감추는 역할을 남몰래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감정은 가라앉기 마련이다. 설령 마이크를 집어던지고 싶을 정도로 격렬했다 해도 반드시 그렇다. 싫어하던 노래를 부르던 중에 즐거운 추억이 생기기도 한다. 기억은 뒤섞이면서 새로운 인상을 만들어낸다. 날것이던 감상은 무뎌지고 희미해진다. 뜨거울 만치 처절하던 열정도 냉정하게 식는다. 이 변화는 눈에 띈다. 음악에는 피로될 때마다

기획 2024.09.01
내가 좋아하는 게 부끄러운지

[에세이] 내가 좋아하는 게 부끄러운지 심완선 ‘제일 좋아하는’ 하나를 꼽아 보라는 질문을 종종 듣는다. 작가님은 제일 좋아하는 SF 소설, 작가, 영화, 게임이 뭐예요? 하나만 골라 본다면? 그럼 나는 시야의 한쪽 구석을 노려보며(사람이 고민에 빠질 때 흔히 나오는 얼굴이라고 들었다) 고심하는 표정을 짓곤 한다. 답변은 대체로 이렇게 흐른다. 너무 어려운데요. 어떻게 하나만 고를 수가 있죠. 이건 이래서 좋고 저건 저래서 좋은데. 조건을 조금 바꿔서 대답할게요. ‘제일 처음 읽은’이나 ‘제일 여러 번 본’ 아니면 ‘최근 접한 것 중에서’라면 말할 수 있어요. ‘최애’(최고로 애정을 쏟는 대상)가 확고한 분야가 아닌 이상 나의 1순위가 무엇이라고 내세우기는 정말 어렵다. 적어도 나는 적잖이 갈팡질팡하는 편이다. 게다가 솔직히, 남들이 듣기에 그럴싸한 이름을 대고 싶다는 욕망도 약간은 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말할 때는 체면을 차리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나를 너무나 쉽게 대변한다. 예를 들어 제일 좋아하는 영화를 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인셀’(비자발적 독신의 약어로, 주로 인터넷 하위문화와 여성혐오 및 적개심을 공유하는 집단)이라는 혐의를 산다. 은 상당히 대중적이긴 하지만 동시에 레즈비언 영화의 고전 명작이 되어 가는 중이다. 영화사를 말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라고 말하는 건 꽤 젠 체하는 발언 같다. 아니면 평범한 씨네필의 발언이거나. 만약 누가 를 말하면 나는 ‘흠······’ 하며 잠시 의심을 품을 테고, 를 말하면 슬쩍 거리를 둘 것이며, 을 말하면 고개를 끄덕이고 여상하게 넘어갈 것이다. 아, 히치콕, 취향을 적당히 가릴 만한 무난하고 점잖은 대답이죠. 물론 진심으로 히치콕을 좋아할 가능성을 부정하는 건 아니고요. 나는 영화를 매우 드물게 보는 사람이지만 무난하고 점잖게 주워섬길 만한 레퍼토리를 갖고 있기는 하다. 저는 개인적으로 를 봤을 때가 기억에 남아요. 상영시간 내내 커피와 담배가 줄창 나오거든요. 전 비흡연자고 그때는 커피도 거의 안 마셨는데 스크린을 보고 있으니 덩달아 중독되는 기분이 드는 거예요. 내용은 특별할 게 없는데 촬영 방식이나 분위기가 여러모로 인상적이었죠. 아, 을 뒤늦게 봤는데 말이죠. 거기 나오는 대사들이 따로 떼놓고 보면 유치하도록 낭만적인 게 많잖아요. 그런데 상영관에서 실물을 마주하니 영화가 뿜는 그 분위기에 빨려들더라고요. 제가 몰랐던 세기말의 조각을 그제야 확인한 느낌이었어요. 좋아하는 감독이라면, 저는 기회가 된다면 아이다 루피노가 찍은 영화를 모두 섭렵하고 싶어요. 좋아하는 배우는 버스터 키튼이 아닐까 싶네요. SF 영화 중에서 좋아하는 걸 고르라면, 글쎄요, 는 분명 정교하게 만든 영화지만 아무래도 에 정이 갑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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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2024.11.05
‘모르는 여성’에서 ‘아는 여성’으로 : 강화길론

‘모르는 여성’에서 ‘아는 여성’으로 : 강화길론 하혁진 소설로 충분하다 2020년 여름, 강화길의 두 번째 소설집이 우리 곁에 도착했다. 화이트 호스(White Horse), 백마(白馬)를 타고. 자신이 공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소설 속 그녀들은 더 이상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지 않는다. 때마침 동명의 노래인 Taylor Swift의 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I`m not princess, this ain`t fairy tale. (···…) Now it`s too late for you and your white horse to come around.” 강화길은 표제작인 「화이트 호스」에서 스위프트의 가사를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나는 공주가 아니고, 이건 동화도 아니란다. 나는 너의 화이트 호스가 필요 없단다.” 이렇듯 변화를 경험한 그녀들은 왕자 대신 백마 위에 올라타 고삐를 쥐고 속도와 방향을 직접 ‘선택’한다. 요컨대 그녀들은 선택이라는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행위 주체라는 지위를 회복한다. 누군가를 기다리지도, 무엇인가를 기대하지도 않으면서 그녀들은 동화 바깥의 현실을 ‘살아간다’. 두 번째 소설집에서 수록된 소설만큼이나 눈여겨볼 만한 것은 작가의 말이다. 강화길은 마지막 두 문장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다시는 작가의 말을 이렇게 길게 쓰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내게는 소설로 충분하다.”(작가의 말 297쪽). 이 의미심장한 선언 뒤에 감춰진 진의는 무엇일까. 두 페이지 앞으로 가 보자. “당시 나는 이름을 걸고 일을 하는 것에, 그러니까 나를 향한 일부 비평에 대해 상당한 피로와 염증을 느꼈다. 신인 작가 입장에서 꽤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글도 있었고, 그간 내가 여성으로서 받아 온 어떤 평판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지는 글도 있었다,”(작가의 말 293쪽). 이쯤 되면 ‘소설로 충분하다.’는 비장한 선언 뒤에는 모른 척 지나치기 어려운, 혹은 모른 채 지나쳐서는 안 되는, 숨겨진 내막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도대체 어떤 평판들이 그녀로 하여금 ‘작가’로서의 ‘나’와 ‘여성’으로서의 ‘나’가 겹치는 경험을 하게 한 것일까. 다른 인터뷰도 함께 살펴보자. 실제로 이 소설을 쓸 때 이런저런 비평에 시달릴 때라서 여러 가지 감정이 혼재된 상태였어요. 평가를 받는 일에 계속 시달리는 게 부당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비평적 언어와 내가 가진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제가 쓴 소설을 보호하고 싶기도 했고요. 개인적인 경험에서 쓰기 시작한 소설이지만 쓰는 과정에 깨달은 건, 저만 겪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어요. 여성 작가들이 여성 문제를

소설 2024.11.05
콩코르드

콩코르드 김아나 2022년 12월 19일에 열린 카타르 월드컵 결승전 연장전 118분에 킬리언 음바페가 페널티 킥에 성공했다. 아르헨티나와 프랑스의 스코어가 공식적으로 동점으로 바뀌는 순간 나는 바람막이 안주머니에 있는 유리병을 떠올렸다. 나는 반포동 지하 작업실 일 인용 소파에 앉아 손잡이를 꽉 잡았다. 작업실에 모인 민수 형과 친구들은 질서정연하게 대마초 가루와 펜타닐 패치가 담긴 지퍼 백을 정리했다. 민수형의 친구 중 하나가 내게 물었다. -너 슛돌이 출신이지? 초등학생 때 프랑스로 축구 유학 갔다고 하지 않았냐? 음바페 봤어? -내가 거기서 걜 어떻게 봐? 민수가 감자 칩을 씹으며 불편한 내 왼쪽 다리를 쳐다보았다. 그가 악의 없이 말했다. -우리 슛돌이 우진이는 프랑스에서 유학원에 사기도 당했고 다리까지 다쳤대. 나는 음바페 때문에 돈을 잃을까 봐 초조했다. 음바페는 메시와 호날두가 늙어 가는 시대에 운 좋게 태어난 놈이었다. 너는 파리 생제르맹 FC의 유명 인사지만 나는 인터넷 악플러 레전드야. 인스타그램에서 보자. 지하 작업실에는 나와 민수 형까지 총 여섯 명이 모여 월드컵 우승 팀 맞추기 도박 겸 비즈니스 중이었다. 아르헨티나 승리에 돈을 건 건 나밖에 없었다. 이제 막 연장전이 끝났다. 각국 선수들이 승부차기 대기 중이었다. 경기가 끝난 것도 아닌데 민수 형이 친구들에게, 친구라기보다는 따까리에 가까운 아이들에게 지퍼 백에 관해 이것저것 지시했다. 아마 민수 형의 친구들은 아닌 것 같았다. 2학년 형 중에 저런 애들을 본 적이 없다. 어쩌면 나 같은 고1일 수도 있었다. 민수 형이 나와 친구들에게 바람 좀 쐬자며 작업실 바깥으로 나가자고 했다. 나는 계단을 오르며 형의 거대한 등을 뚫어지게 보았다. 형이 입은 디올 후드 티가 멋졌다. 삼두근과 광배근도, 190cm에 가까운 큰 키도 존나 멋졌다. 형은 슬리브를 따라 내려오는 오블리크 패턴 후드 티를 입었다. 음바페도 디올 앰베서더라 민수와 같은 후드를 입었다. 아르헨티나가 이긴다면 나 역시 민수형 과 음바페가 입은 후드 티를 살 수 있을 텐데. 민수 형과 친구들은 나보다 먼저 작업실 건물 바깥으로 나갔다. 나는 불편한 왼쪽 다리 탓에 다소 느린 걸음으로 형과 친구들을 따라갔다. 민수 형을 제외한 따까리들은 이자카야 가게 정문 앞에서 담배를 태우는 중이었다. 민수 형은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전담도, 술도 하지 않았다. 막 학원 수업을 끝마친 애들 몇이 이자카야를 지나쳤다. 나는 걔네가 들으라고 일부러 크게 소리쳤다. -형은 왜 마약 안 해? 하지만 그 누구도 내게 집중하지 않았다. 민수가 어깨를 으쓱인 뒤 대답했다. -원래 마약왕은 약 안 해. 슛돌이는 넷플에서 나르코스 봤어? 내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비즈니스맨이니까. 사업가는 약을 안 해. 민수 형은 아직 승부차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아이들에게 지퍼 백을 배달하러 가라고 지시했다. 나는 걔네가 사라져서 아쉬워 바닥만 바라보았다. 그래도 같이 축구를 봐서

소설 2024.11.05
자살심판관

자살심판관 양혜영 [예비심판관 김안의 면접 녹취록] 질문자: 오르디나토르 외 6인 장소: 스위스그랜드 호텔 613호 오르디나토르: 먼저, 예비심판관 면접에 오른 걸 축하합니다. 지난 한 달 동안 예비심판관님의 경력을 조사한 결과 최종 후보에 올랐고, 이제 여기 모인 여섯 심사관이 심층 면접을 통해 최종 선택을 결정하려 합니다. 예비심판관님은 심사관의 질문에 진실만을 답해야 합니다. 답변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거짓말탐지기가 부착되며, 예비심판관님의 답변은 모두 녹취되어 향후 법적 분쟁이 발생할 경우 증거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김안: 네, 알겠습니다. 오르디나토르: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여섯 심사관의 이름과 신상은 블라인드 처리되어 현재 착석한 자리에서 시곗바늘 방향으로 모노, 디, 트리, 테트라, 헥사, 펜타로 지칭될 겁니다. 지금까지 제가 한 말에 대한 질문이나 이의가 있습니까? 김안: 아니오, 없습니다. 오르디나토르: 그럼, 현재 2046년 6월 6일 오후 2시 13분. 자살허용심판관 선정을위한 최종 면접을 시작하겠습니다. 모노님, 질문을 시작해 주세요. 모노: 대한민국 최초의 자살허용예비심판관 후보 1번, 김안. 1986년 경기도 파주 출생. 2010년에 사법고시 수석 합격 이후 2040년 재판관 역임. 2043년 대한민국에서 가장 청렴한 재판관으로 선정되어 대통령 표창 수상. 그런데 돌연 2044년에 판사를 그만두고 자살고위험군을 보호하는 생명존중연구소에 소장으로 취임해 현재까지 2년 가까이 생명존중연구소를 총괄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본인의 공적 경력이 맞나요? 김안: 네 맞습니다. 디: 본격적인 면접 질의에 앞서, 자살허용심판관에 대해 아는 대로 설명해 주세요. 김안: 2033년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최악의 경제공황 이후 자살하는 인원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들은 홀로 혹은 집단으로 뭉쳐 다니다 숲과 강, 빈집에서 예고 없이 자살을 시도했고, 미처 수습하지 못하고 방치된 시신들 때문에 시민들은 공포와 전염병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정부는 2046년 1월 세계에서 최초로 자살허용법을 제정했고, 자살 허용 여부를 판단할 자살허용심판관을 뽑고 있습니다. 저는 모든 생명은 아름답게 죽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아름다울 때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는 권리. 그것을 부여하는 자리가 자살허용심판관이라 생각합니다. 트리: 예비심판관님께서 자살허용심판관에 지원하게 된 동기는요? 김안: 저는 법조계에서 36년간 근무하면서 선과 악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반평생을 오롯이 선과 악을 판별하는 데 전력을 다해 왔던 만큼 죽음에 대해서도 올바르게 판단할 자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현재 소장으로 근무하는 생명존중연구소만 봐도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이 가득 차 더 이상 자살고위험군을 수용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전국 각지에 있는 다른 지역의 생명존중연구소의 상황도 같습니다. 이렇듯 자살고위험군을 보호하지 못하면 앞으로 자살자가

소설 2024.11.05
영거, 젊어진 사람들

영거, 젊어진 사람들 최정화 한나 거리는 온통 젊은 사람 천지다. 정확하게 말하면 ‘젊은’ 사람이 아니라 ‘젊어진’ 사람들이다. 내가 반백의 머리칼을 휘날리며 걸어갈 때면 사람들은 저희들끼리 수군거리며 손가락질을 했다. “노인이야. 요즘 세상에 스타핑 안 한 사람 있다는 얘긴 들었지만 진짜로 얼굴 본 건 처음이야.” “아, 징그러워. 물에 불은 시체 떠올라서 구역질 날 것 같아. 껌처럼 들러붙은 검은 점은 또 뭐야. 제대로 걷는 것도 어려워 보이는데 왜 나와서 돌아다니는 거지?”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못 들은 척하고 지나가야 하는 건 참을 수 있었지만, 정작 견디기 어려운 건 친구들이 모두 시술을 받고 20대로 돌아가는 바람에 혼자가 된 외로움이었다. 사람들은 이제 주름진 피부, 검버섯이 올라온 얼굴, 굽은 허리 같은 것들이 뭔지 몰랐다. 다양한 방법은 다들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노인이 되는 게 두렵거나 싫은 게 아니었다. 다만 함께 나이 들어갈 친구가 필요했다. 육신이 쇠퇴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다음 세대에게 세상을 넘겨주고, 또 언젠가 닥쳐올 죽음을 함께 준비할 동료가. 하지만 내 친구들 누구도 더 이상 늙지 않았다. 그들은 시술을 받아 젊음을 유지하는 쪽을 택했다. 나는 혼자서 폐경을 맞고, 머리가 백발이 되는 것, 얼굴이 내려앉고 다리가 벌어지는 일에 침착하게 대처해야 했다. 나는 몸이 늙어 간다는 것이 자연이 준 유예 기간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죽음을 준비하라는 계시 같은 것 말이다. 떠난다는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그것이 신의 시선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없어진 이후에도 내 아이들이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조금씩 내 자리를 비워 가는 것은 성숙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 일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 같았다. 그들은 그저 계속 살고 싶어 했고, 그것도 젊은 몸으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친구들은 호르몬 체인지 시술을 받고 나이를 바꾼 다음에 이름을 바꿨다. 그다음에는 이사를 갔고, 가족과 친구들과 일체의 연락을 끊었다. 그들은 그렇게 새 삶을 시작했다. 나는 꿈에도 젊어지고 싶은 생각이 없었지만, 모든 이들이 노인을 혐오하는 시대에 혼자서 그 짐을 감당할 수 없었다. 또 친구 하나 없이 단독자로 세상을 살아갈 용기 또한 없었다. 주변의 날카로운 눈초리와 대화 나눌 친구 하나 없는 고독감을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한 채 2045년 1월, 나는 백기를 들었다. 나는 지금 입원실 침대에 누워 한 달 뒤로 잡혀 있는 호르몬 체인징을 기다리는 중이다. ‘호르몬 리버스’는 스타핑 시술 전문병원이다. 입원해 있는 환자들은 모두 나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는 노인이다. 나이는 서른 살에서 백 살까지 다양하지만 이곳의 사람들은 모정의 동질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게 어떤 이유에서든 노년기의 성찰을 포기하고 활

수필 2024.11.04
나무에게 땅 사 준 여자

나무에게 땅 사 준 여자 이혜숙 마당을 제 집 삼아 사는 길고양이가 여덟 마리나 된다. 현관 앞에서 밥 줄 때만 기다리거나, 잔디밭을 축구장 삼아 뛰어노는 것밖엔 할 줄 아는 게 없는 녀석들이다. 가끔 늘어져 있는 모습이 눈에 거슬리면 한마디 한다. 신체 건강한 놈들이 놀고먹기만 하냐는 잔소리가 그것이다. 녀석들이 알아듣기라도 한 듯 하루 종일 안 보일 때가 있다. 녀석들이 무위도식하는 걸 보이지 않으려고 공사다망한 척한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기껏 멀리 갔다는 것이 주차장 위란다. 그곳은 남편이 목공 작업을 하는 장소인데, 지붕이 있어서 비 맞을 일이 없으니 고양이들이 잔소리와 비아냥을 피해서 몇 걸음 옮긴 것에 불과했다. 남편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 바로 튀어나온 말, “얼씨구. 지난봄에 데크 깔더니 고양이 좋은 일 했구려.” 길에서 훤히 보이는 곳이라 작업장밖엔 쓸 일이 없는 공간에 돈을 들인 게 못마땅해서 나온 소리였다. 남편은 오월 황금연휴 동안 방부목을 사들인다, 오일페인트를 칠한다 하면서 혼자 공사를 마쳤다. 공사를 밀어붙인 이유가 나중에 집 팔 때를 대비한 속셈임을 알기 때문에, 그가 일하는 내내 부루퉁했다. 나로선 집을 팔 생각이 조금도 없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우리 손으로 지은 집에 대한 애착이 어느 정도인지 남편은 알지 못한다. 20년 전, 오랜 전세 생활을 접고 아파트를 사려고 마음먹었을 때였다. 친구가 그 금액이면 땅을 사서 집을 짓는 게 어떠냐고 했다. 집 짓는다는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었으면서도 친구 말에 솔깃해서 주말에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시골로 나섰다. 때는 봄, 연두색 붓질이 지나간 어디라도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었다. 백화점에서 아이쇼핑하는 티를 안 내려고 살 것도 아니면서 걸쳐 보는 진상 손님처럼 몇 군데 전원주택 단지를 돌아보며 땅값을 알아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우연히 들른 동네에서 가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꽃구름을 이고 있는 벚나무가 몇 그루 있는 땅을 보곤 그만 눈이 멀고 말았다. ‘이곳에 집을 지으면 주목도 옮겨 심겠네.’ 그 순간 아파트 16층 베란다에서 노랗게 말라 가고 있는 주목이 생각났다. 지난가을 엉겁결에 주워 온 나무였다. 남편의 직장을 따라서 용인으로 이사를 할 때 전세로 구한 집은 마당이 넓은 시골집이었다.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열 그루도 넘었고, 단풍나무, 감나무, 주목도 있었다. 텃밭과 앞마당이 넓어서 그때도 한눈에 반해 이사를 했다. 서까래에 6·25 전쟁 때 총 맞은 자리가 남아 있는 구옥이었지만, 유치원생 딸과 돌 지난 아들이 흙을 밟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조건은 완벽했다. 그 집에서 산 것은 일 년 남짓. 몇 년 동안 지방 발령으로 이사를 했다가 다시 그 동네로 돌아와서 가까운 아파트에 살게 되었다. 어느 날 지나다 보니 그 집 대문이 활짝 열려 있고, 여기저기 나무들이 뽑혀 있는 것이 보였다. 땅을 분할해서 경매했다더니 마당을 정리하는가 싶었다. 그때 한구석에

수필 2024.11.04
튤립 축제, 그 후

튤립 축제, 그 후 이혜숙 봄은 해방군처럼 온다. 차갑고 무거운 겨울의 압박 아래 숨죽여 기다린 끝에 머지않아 그들이 당도할 거라는 은밀한 전갈이 바람결에 퍼지기 시작한다. 남쪽부터 입성했다더라, 하루에 몇 킬로미터씩 좁혀 올라온다더라, 여기저기서 승전고가 날아온다. 봄 여왕을 호위하는 꽃 부대의 군화 소리는 얼마나 당당하고 경쾌한가. 무혈입성! 동토에서 해방을 맞은 사람들은 밖으로 뛰어나와 팔 벌려 환영한다.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고 무엇이라도 해낼 것 같은 의욕이 넘친다. 꽃 부대의 행렬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사람들은 먼저 마중 가기도 한다. 꽃구경이 그것이다. 도시의 가로수가 새순을 틔어 봄이 왔음을 알리지만 성에 차지 않는 사람들은 더 강한 꽃 세력에 끌려 길을 나선다. 꽃도 많이 모여 있어야 더 빛나고 눈길을 끌기 때문에 군락을 이룬 꽃들을 ‘꽃 세력’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열 평보다는 백 평에, 백 평보다는 천 평에, 아니 만 평에 세력을 부린다 한들 그 정복을 마다할까. 우리가 꽃을 보면 저절로 허리를 굽히게 되는 것도 자발적 항복이 아닐까. 내가 꽃 세력에 압도되어 무릎을 꿇은 것은 재작년 ‘튤립 축제’에서였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유채꽃을 놓치지 않으려고 4월 초에 제주도로 날아갔다. 가시리의 녹산로에 끝없이 이어진 유채꽃과 그 위에 넘실대는 벚꽃 구름을 보았고, 마침 ‘튤립 축제’를 한다는 곳이 있어서 찾아갔다. 이른 시간에 도착하니 축제 기간은 전날까지였단다. 수만 평의 정원에서 만난 튤립 군락, 과연 대단한 위세였다. 튤립은 봄 여왕으로 가장 어울리는 꽃이었다. 꽃송이 왕관에 잎사귀 검을 찬, 더구나 황금 주머니는 뿌리에 묻어 두었으니 부(富)까지 겸비한 막강한 군주일 터. 그 넓은 정원을 유유자적 걷자니 기분이 꽤 좋았다. 그 시간만큼은 내가 네덜란드 귀족이었다. 300여 년 전의 귀족들은 튤립 구근 하나에 집 한 채 값도 아끼지 않았다는데, 나는 수만 평을 채운 튤립에 둘리어 있으니, 집 한 채가 대수인가. 도시를 넘어 나라 하나를 통째 살 수도 있을 게다. 가늠할 수 없는 화폐를 세면서 거만한 걸음으로 걷고 있을 때였다. 아주머니 몇이 부지런히 튤립을 뽑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축제는 끝났지만 아직 한창인 꽃을 잡초 뽑듯 걷어 내는 것이었다. 한껏 들떠 있던 감상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아주머니, 멀쩡한 꽃을 왜 뽑아요?” “다음 주부터 다른 꽃 축제가 있어서 치워야 한답니다.” “어디다 보관하나요?” “웬걸, 다 버리는 거지.” “이 많은 걸 다요?” “그러게 말이요. 이게 다 돈지랄들이지.” 빨강, 노랑의 원색뿐 아니라 분홍, 보라, 흰색, 흑자색의 각가지 색 튤립들이 무참히 쓰러져 있는 현장을 보니 처참한 기분마저 들었다. &ldq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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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작가의 방 한 칸 : 안미옥 시인, 고민실 소설가

[문장서포터즈] 문장서포터즈 1기 '몽글' 6명은 만 18세 이상 미등단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몽글'은 직접 작성한 활동계획서를 기반으로 문학 관련 콘텐츠를 취재하며 다양한 형식으로 재생산하는 기획자로서 문학을 탐구합니다. 2024년 8월부터 2025년 1월까지 6개월간 문장웹진 '모색'에서 문장서포터즈의 다양한 기획을 만나보세요. *몽글 : 문장서포터즈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에 몽글몽글 뭉치어 있게 해주겠다는 포부를 담은 이름 젊은 작가의 방 한 칸 : 안미옥 시인, 고민실 소설가 ― EP2. 문학창작지원사업 문장서포터즈 이형초 ― 본 원고는 ‘2024 문학창작실이용지원사업’과 ‘소설가의 방(호텔프린스)’을 이용하는 안미옥 시인, 고민실 소설가와 함께 ‘젊은 작가의 방 한 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글입니다. ― ※ 전 에피소드가 궁금한 분은 큐알코드 또는 아래 링크를 확인해 주세요. 문장의 방 한 칸 ― EP1. 창작촌 탐방기 편 : https://url.kr/bq9mfx 문똑이들 오랜만이야! 예버덩문학의집에 입주한 후, 건강한 기운을 받아 문장 웹진에서 등단했어. 문장이는 어느덧 청년 신인 작가가 되었지. 생업에 종사하면서 창작 활동을 겸업하는 젊은 작가들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는 고민이지. 일상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창작 활동을 이어 갈 수 있는 공간, 창작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공간, 창작실 입주가 어려운 작가들에게 출퇴근이 가능한 집필 공간이 필요해. 그래서 202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새롭게 선보인 ‘문학창작실이용지원사업’에 대해 알아보려고 해. 문학창작실이용지원사업은 문학 인구 절반이 넘는 작가가 직업과 창작 활동을 겸업한다는 것을 고려해 현업에 종사하면서도 창작 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작가에게 집필 공간을 제공하는 사업이야. 서울·경기 및 광역지자체에 작가들이 집필실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지. 작가들이 좋은 문학 작품을 창작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게 이 사업의 목표야. 자세한 내용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누리집을 살펴봐. 난 당장 찾아가 봐야 하니까! 서울 은평구에 있는 문학창작실이야. 개인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공유 라운지지. 1. 안미옥 작가님 공유오피스텔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문장이를 만나기 전까지 이곳에서 무얼 하고 계셨나요? 안미옥 작가님 : 안녕하세요.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는 문장이를 기다리며 오늘 해야 할 일 목록을 정리하고, 마감해야 하는 산문 원고를 쓰고 있었어요. 2. 2024년 상반기가 끝났는데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근황과 함께 하반기 소식도 귀띔해 주세요. 안미옥 작가님 : 상반기에는 첫 산문집 『조금 더 사랑하는 쪽으로』 출간 작업을 하고, 4월에 책이 나왔어요. 책이 나온 이후론 독자들과 만나는 자리가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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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 맞이, 어떻게들 하고 계세요?

[문장서포터즈] 문장서포터즈 1기 '몽글' 6명은 만 18세 이상 미등단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몽글'은 직접 작성한 활동계획서를 기반으로 문학 관련 콘텐츠를 취재하며 다양한 형식으로 재생산하는 기획자로서 문학을 탐구합니다. 2024년 8월부터 2025년 1월까지 6개월간 문장웹진 '모색'에서 문장서포터즈의 다양한 기획을 만나보세요. *몽글 : 문장서포터즈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에 몽글몽글 뭉치어 있게 해주겠다는 포부를 담은 이름 계절 맞이, 어떻게들 하고 계세요? - , 와 함께 여름을 마무리하며 문장서포터즈 주은 한 계절이 끝나고 다시 새로운 계절이 시작되는 무렵에는 각자 나름대로 분주해진다. 새 계절을 맞아 새 옷을 마련하고, 서랍 속에 넣어 둔 옷을 꺼내어 거는 동시에 잘 입던 옷들은 다음 연도를 기약하며 개켜 넣는다. 침구를 계절에 맞는 얇거나 두꺼운 것으로 바꾸기도 하고, 카페나 음식점에서는 철에 맞는 재료로 꾸린 시즌 메뉴를 하나둘 메뉴판에 올린다. 작고 사소한 일상의 변화를 통해 천천히 다가올 계절을 맞이하고 준비하며 시간의 흐름을 실감하는 과정이다. 나의 이번 여름 맞이는 특별히 두 권의 문예지가 함께했다. 한여름의 와 와 는 각각 은행나무와 민음사에서 출간하는 격월간 문학잡지다. 올해에는 7월에 출간된 55호와 8월에 출간된 49호와 함께 여름의 절정과 끝을 보내게 되었다. 아예 계절마다 출간되는 계간지의 여름호를 고를 수도 있었겠지만, 굳이 이 두 권의 격월간지를 고른 것은 사실 내가 문예지와 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 읽는 것 좋아하세요? 문학 좋아하세요? 라는 질문에는 늘 큰 고민 없이 그렇다고 대답해 왔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대답하고 난 후에는 마음 한구석에 찝찝함이 남곤 했다. 내 머릿속에서 좋아하는 만큼 내 일상과 가까운지는 스스로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한자리에서 진득하게 책을 읽어 나가는 시간이 적어진 만큼 책이 가진 힘에 쭉 휩쓸려 몰입하는 경험을 하기 어려워졌다. 흐름이 끊기는 횟수가 늘수록 다시 책장 열기도 쉽지 않은 탓에 요즘에는 한 달에 제대로 읽는 책이 쉽게 손에 꼽힌다. 게다가 나는 편독을 꽤 하는 편이고, 지금껏 문예지를 접할 기회가 있어도 뒤쪽에 실린 단편소설이나 시 면을 훑어보는 게 다였던 터라 진득하게 읽어 볼 첫 문예지는 볼륨이 크지 않고, 너무 무겁지 않은 산뜻한 것으로 고르고 싶었다. 잡지의 형태를 표방하고 있는 신생 문예지 와 를 선택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 악스트 는 2015년 7월에 창간된 은행나무의 격월간 문학잡지다.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라는 프란츠 카프카의 유명한 문장에서 라는 제목이 탄생했다. Art와 text, 즉 예술과 텍스트를 아우른다는 의미와 함께 독자들의 얼어붙은 마음을 깨는 도끼라는 의미를 담았다. 55호의 주제는 ‘선 긋기’다. 커버 사진은 콘셉트에 맞는 홍기웅 작가의 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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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너의 동료가 될게!

[문장서포터즈] 문장서포터즈 1기 '몽글' 6명은 만 18세 이상 미등단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몽글'은 직접 작성한 활동계획서를 기반으로 문학 관련 콘텐츠를 취재하며 다양한 형식으로 재생산하는 기획자로서 문학을 탐구합니다. 2024년 8월부터 2025년 1월까지 6개월간 문장웹진 '모색'에서 문장서포터즈의 다양한 기획을 만나보세요. *몽글 : 문장서포터즈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에 몽글몽글 뭉치어 있게 해주겠다는 포부를 담은 이름 나, 너의 동료가 될게! - ‘너, 내 동료가 돼라’ 코너 현장 방문 및 연출 유계영 시인 인터뷰 문장서포터즈 이유빈 2005년 시작된 문학 라디오 프로그램인 문학광장 녹음 현장에 직접 방문했습니다. 동인, 포럼 등 작가들 간의 교류를 기반으로 전개된 활동에 대해 이야기 하는 코너인 1부 녹음이 한창이었는데요, 작은 녹음 부스를 가득 채우는 우다영 소설가의 조곤조곤한 목소리, 같은 대목에서 동시에 웃음을 터뜨릴 때 서로 마주치던 눈동자, 웃음소리에 맞춰 박수치는 손바닥 같은 것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너, 내 동료가 돼라’라는 코너명처럼, 현장의 즐거움을 직접 느낀 이후 저는 기꺼이 의 동료가 되고 싶어졌어요. 연출 유계영 시인과 진행 우다영 소설가, 구성작가 문은강 소설가로 구성된 는 연출부터 진행, 구성작가에 이르기까지 모두 현직 작가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여타 문학 라디오 프로그램과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연출을 담당하는 유계영 작가와 ‘문장의소리 연출가’로서의 정체성을 중심으로 인터뷰를 진행했어요.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시 쓰는 유계영입니다. 네 권의 시집과 한 권의 산문집을 썼고요. 782회부터 문장의소리 연출을 맡고 있어요. 가장 먼저 를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알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문예창작과를 졸업해서 대학 시절부터 현역 작가들의 수업을 많이 들었어요. 특강이나 합평회에 초청된 작가들을 만나볼 기회도 많았죠. 특강에 와주셨던 분 중 조연호 시인을 참 좋아했는데요. 시인이 연출을 맡고 계시다는 사실을 통해 처음 의 존재를 알게 됐습니다. 조연호 시인이 진행자는 아니었지만 음악 선곡이 참 인상적이었어요. 시인의 문학과 예술에 대한 사유와 음악 취향 같은 것들을 은밀히 엿보는 느낌으로 방송을 들었던 것 같아요.(웃음) 연출을 담당하시던 조연호 시인 덕분에 를 알게 되셨는데, 이제는 작가님께서 연출을 담당하시는 거네요. 신기한 것 같아요. 그렇다면 연출을 담당하시게 되기까지의 과정도 궁금합니다. 그냥 섭외 전화를 받게 됐어요.(웃음) 제 작품을 제외한 다른 것에 대해 ‘연출’이라는 역할을 맡아본 경험이 없어서 걱정이었죠. 연출이 뭘까요? 아직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웃음)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한 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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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자와 파동이 공존하는 세상 : 제13회 서울국제작가축제 개막식

[문장서포터즈] 문장서포터즈 1기 '몽글' 6명은 만 18세 이상 미등단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몽글'은 직접 작성한 활동계획서를 기반으로 문학 관련 콘텐츠를 취재하며 다양한 형식으로 재생산하는 기획자로서 문학을 탐구합니다. 2024년 8월부터 2025년 1월까지 6개월간 문장웹진 '모색'에서 문장서포터즈의 다양한 기획을 만나보세요. *몽글 : 문장서포터즈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에 몽글몽글 뭉치어 있게 해주겠다는 포부를 담은 이름 입자와 파동이 공존하는 세상 > : 제13회 서울국제작가축제 개막식 문장서포터즈 이형초 입자 : 국내 독자들이 문학을 누릴 기회를 제공하고, 한국 문학과 세계문학이 서울을 중심으로 쌍방향 교류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고자 2006년부터 개최했던 글로벌 문학축제지! 파동이 : 2023년까지 총 61개국 361명의 국내외 작가를 초청했군. 입자 : 맞아. 내가 아주 재밌는 곳에 데려왔지? 파동이 : 빛은 ‘입자성’과 ‘파동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거 알고 있니? 입자 : 알아. 이 두 가지 성질은 서로 모순되지만, 어느 한쪽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 각자 고유의 형태로 공존하고 있는 거야. 파동이 : 맞아. 인간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관점으로만 설명할 수 없어. 세상은 모순적인 모습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이야기를 포착하는 것이 바로 ‘문학’의 일이지. 입자 : 응! 문학은 인종, 젠더, 세대 등 다양한 층위에서 발발하는 모순적인 대립 문제를 아우르고, 그 관계성을 사유하게 하면서 어두운 곳을 비추어 줘. 이번 서울국제작가축제도 문학의 입자성과 파동성을 함께 체험하는 장으로 준비하였으니 같이 즐겨 보자! 파동이 : 귀찮게 하는군. 입자 : 두 작가는 고전 물리학에서 크게 논란이 되었던 ‘빛은 입자인가 파동인가’에 대한 학설을 되짚으면서 발제를 발표했어. 그들은 ‘어떤 실험 기기를 사용하는지’, ‘관찰자의 관점이 무엇인지’에 따라서 빛은 입자가 될 수도 있고 파동이 될 수 있다는 학설을 설명하면서 ‘인간의 세계도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라는 강연 주제를 밝혔지. 이 발제문에 대해 파동이는 어떻게 생각해? 파동이 : 남성과 여성, 백인과 흑인, 좌파와 우파, 찬성과 반대 등 사회는 온통 이분법적인 사고로 이루어져 있고, 이러한 가치 판단 때문에 우리는 늘 옳고 그름에 대한 문제의식 속에 갇혀 사는 것 같아. 입자 : 맞아. 나의 상황이나 입장에 따라서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달라지니까. 세상의 모든 논의는 주관적인 영역에 놓여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되지. 파동이 : 정보라 작가가 말하기를, 인간이 서사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야기의 결말’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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