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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vol.249

2026년 1월호
2026년 1월호
문장웹진

소설

문장에서
만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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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2026.01.01
늦은 오후의 일

늦은 오후의 일 신연선 1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집에 가려는데 병원 주차장 한쪽에 서 있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생전 땡볕 아래에서 맨얼굴 내보인 적 없던 듯 희디흰 얼굴이었다. 떨고 있는 모습이 사뭇 눈길을 끌었다. 낯선 땅에 홀로 떨어진 모습 같기도 했다. 나의 멍한 눈과 그 사람의 흔들리는 눈이 흐린 하늘 아래 잠깐 마주쳤다. 추운데 얼른 타요, 차 안에서 동생들이 소리쳤고 나는 그야말로 쓰러지듯 차에 올랐다. 차는 순식간에 주차장을 빠져나와 앞으로 나아갔다. 차의 속도만큼 빠르게 창밖 풍경이 뒤로 달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 너무나 피곤했다. 누님, 다 왔소. 일어나쇼. 막내 목소리가 꿈결의 경계를 지나 점차 선명하게 들려왔다. 다른 동생들을 내려 주고 또 이동하는 내내 잠에 빠진 모양이었다. 바윗덩이가 짓누르는 듯한 어깨의 피로는 여전했다. 습관처럼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차에서 내리자 막내가 뒷자석에 있던 남편의 유골함을 조심히 꺼내 내게 안기고는 돌아섰다. 막내는 장례를 치르는 내내 살뜰했다. 하염없이 넋 놓고 있는 나를 대신해 번거로운 장례 절차를 세심하게 따져 가며 봐주었다. 큰소리 한 번 나지 않게 해 준 것이 고마웠으나 저녁 먹고 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누가 밥을 차린단 말인가. 대충 한 상 차리는 것이야 일도 아니지만. 나는 그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눈치가 어땠는지 막내도 아무 내색을 하지 않았다. 걷는 뒷모습이 이십오 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꼭 닮아 있었다. 많이 늙었구나. 내가 쟤를 업어 키웠는데. 작기도 작았고, 울기는 또 얼마나 울었는지 녀석이 잠시 숨을 고르느라 울음을 멈추면 귀가 멍할 정도였다. 시간은 어째서 쏘아 놓은 화살일까. 그 까칠한 아기가 늙은 아버지 뒷모습을 하고 구부정 걸어갈 때까지 나는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기분이었다. 집으로 들어서자 묵은 공기 냄새가 났다. 그 경황 중에 습관대로 개켜 둔 남편의 이부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현관 한쪽에 유골함을 소리 나지 않게 내려놓았다. 자리를 찾아 줘야 할 것이었지만, 일단 그대로 두자. 집이 적막하다. 남편과 있을 때도 소란한 적은 거의 없던 곳이다. 남편은 말하는 것을 귀찮아했다. 귀찮아하다가 잘 못하게 된 사람. 질문을 하면 행동으로 답하던 사람. 술을 마시면 말이 다소 늘었지만 곧 잠이 들어 버렸으므로 그러는 시간도 짧았다. 그런대로 산 지 사십 년이 훌쩍이었다. 든든하지도 믿음직스럽지도 않은 반려자였는데 빈자리가 이렇게 나나. 신발을 벗고 집에 올라서서 TV부터 켰다. 흘러나오는 말소리를 들으니 어느 정도 평상을 찾은 기분이 들었다. 집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가운데가 꺼진 소파, 색이 바랜 커튼, 구석구석이 들뜬 장판, 시간에 닳은 채 집의 일부가 된 것들. 이곳도 반짝이던 때가 있었다. 연년생 칭얼대는 두 애들을 데리고 이사하면서도 그때는 힘든 줄을 몰랐다. 평생 처음 가져 보는 내 집이었고, 창틀이니 화장실이니 구석구석 묵은 때를 닦느라 한동안 근육통을 달고 살면서

소설 2026.01.01
태양에서 멀리

태양에서 멀리 김채원 지금부터 아침이 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히 주어질 것이었으며 당연하게도 솔지에게도 주어질 것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시간을 어떠한 저항도 없이 온전히 받아들이고 나름의 궤적을 그리며 부지런히 그 시간을 사는 일. 솔지에게 그것은 꽤나 쉬운 일이었다. 그치만 어려운 일인데? 솔지는 생각했다. 꽤나 쉽고, 그치만 어려운 일이라고. 알겠습니다, 솔지는 늦저녁에 창문을 열어 두고 혼자 책 읽기를 좋아했는데 선과 악이 정해져 있는 이야기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잘못 걸렸다, 하면서도 끝까지 읽기는 다 읽었다. 치워 없애야만 하는 악이 존재하고 그 악에 맞서 싸우는 선이 있다는 게 이해가 잘 안됐다. 누가 보아도 선한 (그런 게 가능하다면 말이다?) 인물들이 고통받는 이야기. 고통 속에서 발견하는 반짝이는 우정이나 사랑 같은 것들. 에구, 눈부셔라. 에구, 싫어라. 솔지는 이 모든 것에 필요 이상의 적의를 가졌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솔지의 약점을 건드리기 때문이었다. 솔지가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의 약점이라는 것은 대개 이런 거였다. 솔지는 배신하기를 잘했다. 그러니까 배신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정도의 배신을 참 잘했다. 최근에 솔지는 세 사람의 친구를 배신했다. 세 사람의 친구에게 차례차례 합성 마약을 권하였다. 세 사람의 친구 민지, 차은이, 가영이가 고등학교 건물 5층 화장실 맨 끝 칸에 모여 차례차례 그것을 받아 보았다. 처음이니까 그냥 줄게. 이게 뭔데? 알지만 한번 물어볼래. 그럼 알려 줄게. 몸에 좋은 약이야. 약의 이름은 해마야. 네가 지었어? 응, 내가. 이름이 영 징그럽고 별로다. 거절해도 돼? 왜? 귀여운데···. 원래 이름은 뭔데? 나도 몰라. 요즘 입시 준비하느라 머리가 아프다며. 생리통도 심하다며. 그런데 나 지금 진짜 돈이 없어···. 괜찮아, 내가 돈이 많아! 내 지갑을 보여 줄게! 솔지의 암호 화폐 지갑은 영단어로 된 열두 개의 암호를 입력해야만 열어 볼 수 있었다. 지갑의 암호는 솔지가 좋아하는 영단어의 단순한 나열이었다. 첫 번째 단어는 window였고 두 번째 단어는 forest 그리고 마지막 단어는 mountain, 산이었다. 겨울 산을 잘게 부순 듯한 흰 알갱이들을 솔지는 차분하게 소분해 가지고 다녔다. 합성이라는 게 둘 이상의 것을 합쳐서 하나를 이루는 것인데··· 정확히 무엇과 무엇과 무엇이 기타 등등 합쳐져 마침내 하나를 이루게 된 것인지는 제조하는 역할이 아니라서 몰랐다. 예전에는 약의 성분이 비교적 단순했는데 이제는 좀 복잡해졌다고들 했다. 단속에 걸리지 않으려면 약의 성분이 계속해서 복잡해져야만 한다고들 했다··· ···전부 주워들은 이야기였다. 솔지의 역할은 제조된 물건을 가져다가 주변에 판매한다고 해야 하나 일

소설 2026.01.01
잊고 있고 잇는

잊고 있고 잇는 진연주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방에서 지냈다. 한 칸짜리 방. 침대가 있고 책상이 있고 책장과··· 새 둥지가 있는. 2년 전의 새는 죽었다. 좁은 방범창 안에서. 이틀을 울다가. 구구 쿼쿼. 소리가 줄어들면서. 약해지면서. 나는 소리가 완전히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러고도 며칠을 더. 안전해질 때까지. 며칠 더 기다렸다가. 숨이 죽을 때까지. 숨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당황하면 안 되니까. 당황이 수습을 곤란하게 만드는 일은 그야말로 곤란한 일이니까. 며칠 더 기다렸다가. 딱딱해진 새를 치우고. 나뭇가지와 지푸라기를 거둬 내고. 방범창의 패널을 깨고. 다시는 새가 갇혀 죽는 일이 없도록. 패널을 깨고. 새는 왜 나가지 못했을까. 들어왔는데 왜 나가지는 못한 것일까. 날개를 펴서 도움닫기를 할 만큼. 공간이 충분히 넓지 않았기 때문일까. 창문의 반을 가릴 만큼. 충분히 높았기 때문일까. 방범창이. 폴리카보네이트 방범창. 폴리카보네이트. 폴리카. 나는 꿈을 꾸고 새가 죽고. 꿈에서 매번 새가 죽고. 구구 쿼쿼. 소리가 줄어들고. 약해지고. 꿈을 꾸고 새가 죽고. 매번. 나는 그 새가 알을 밴 상태였고 새가 죽으면서 알도 함께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더 슬퍼졌지만 그러한 조금 더의 슬픔이 죽은 새에게는 약간의 좋은 일이겠거니 했다. 그렇더라도 내게 그 새의 죽음은 시간의 궤도 바깥에서부터 시작된 파열음처럼 당혹스럽고 얼떨떨했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예기치 않은 곳에서 마주한 삶의 필연적 결말. 그런데 왜 하필 지금, 왜 하필 여기였을까. 처음부터 죽음을 예견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그 새가 마침내 남은 삶을 향해 날아오를 것이라고, 구구 쿼쿼 우는 소리가 그러한 안간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켜보거나 지켜보지 않는 일만이 나의 것이었으나 그렇더라도 어느 순간에는, 그 새의 삶에 또는 죽음에 개입했어야 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랬어야 하나. 나는 한동안 가장 익숙한 골목에서 길을 잃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허둥대고 우물쭈물하고 두려워하고. 새로운 새가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두 해가 지난 여름이었다. 지독하게 습하고 더운 여름의 어느 날, 어느 시간에. 반쯤은 정신이 나간 듯 갈팡질팡하며. 나는 새가 나뭇가지와 나뭇잎과 비닐 같은 것을 부지런히 실어 나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새는 한동안 가만히 앉았다가 황급히 목을 빼 주변을 둘러봤고 부리로 털을 고르거나 몸을 움직여 자리를 고르기도 했다. 가만히 앉아 떠나지 않다가 돌연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멈추고 날아오르는 일도 눈에 띄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그곳에서 작은 알 두 개를 발견했다. 덧문 밖의 햇살처럼 뽀얗고 눈부신 데다 아주 정교하게 빚어진 도자기처럼 매끈한 것, 완벽한 형태의 생명이 그야말로 덜컥, 거기 있었던 것이다. 철골조와 앙상한 밑바닥만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방범창의 한구석에 말이다. 하나의 존재와 하나의 장소, 그 둘의 대비가 너무도 강렬해서 섬뜩하게 느껴질

소설 2026.01.01
겨울 산을 오르고

겨울 산을 오르고 박현옥 기제와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함께한 일은 산에 다녀오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차로 두 시간 반 거리에 기제의 아버지가 살았다. 거기서 차로 삼십 분을 더 가면 기제의 아버지가 소유한 선산이 나왔다. 12월 중순, 눈이 내리기 전에 다녀오자며 기제의 아버지가 기제에게 말했고, 이어 기제가 내게 주말에 같이 아버지 댁에 내려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따로 챙길 건 없으나 다만 밑창이 튼튼한 신발을 신으라고 했다. 신발장엔 바닥이 얇고 발목이 드러나는 단화나 굽이 높은 구두뿐이었으므로 나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트래킹화를 하나 주문했다. 이튿날 저녁에 택배로 받아 본 신발은 정말로 단단했다. 뒤축이 특히 단단해서 기제가 차를 세워 둔 집 앞의 큰길까지 걸어가는 동안에 벌써 뒤꿈치가 쓸렸다. 선산엔 산주였던 기제 고모의 산소가 있었다. 기제를 몇 년 동안 만났는데 고모 이야기는 그때 처음으로 들었다. 해도 뜨기 전인 새벽에 뻥 뚫린 중부고속도로를 달리며 기제는 조잘조잘 떠들었다. 십수 년 전에 남의 집 선산이었던 걸 고모가 7억을 주고 샀다고. 시장에서 방앗간을 하던 고모는 인근 광역시의 국제공항이 그 산으로 이전한다는 소문을 듣고서 평생 모은 목돈을 죄다 털었다. 산주의 처가 쪽 친척이 도시개발과 과장으로 일한다는 말에 홀린 듯 산을 사 버린 것이다. 그러나 뜬소문이 으레 그렇듯 이전이 거의 확정이라던 공항은 여러 번의 공청회 끝에 무산됐으며, 선산 역시 원래의 값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원래는 얼마였는데?” “6천만 원.” “세상에.” 누군가는 기제의 고모에게 선산에서 송이라도 나면 일 년에 한 달만 일해도 평생 먹고 살 수 있겠다며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기제의 고모는 혹시나 하나는 마음에 몇 날 며칠 산을 헤집고 돌아다녔으나 산에는 소나무는커녕 상수리나무만 잔뜩 심겨 있었다. 상수리나무는 참나무와 달리 속이 물러 목재로도 쓸 수 없고 숯으로도 못 만든다고, 기제가 말했다. 고모가 그 산에서 발견한 건 송이도 아니고 산삼도 아니라 지천에 떨어진 도토리뿐이었다. “근데 고모도 방앗간에서 도토리 가루를 팔았거든.” 앙금을 말려 가루 낸 것으로 킬로에 만 원을 받았다. 묵으로도 쒀 먹고 전으로도 부쳐 먹고, 효능도 모르는 채 매일 티스푼으로 한 숟갈씩 퍼먹는 사람도 있었다. 기제는 그러니까 고모가 도토리를 8억 원어치 산 것이나 다름없다며 웃었다. 한바탕 웃고 난 다음엔 그 이듬해 고모가 산 중턱에서 제초제를 먹었다고 말했고 그때는 웃지 않았다. 히터를 세게 틀어 놓아 겨드랑이와 등과 발가락에서 땀이 났다. 뒤꿈치가 쓸린 곳에 땀이 닿아 한층 더 따가웠다. 내가 자꾸 발을 꿈질거리자 기제가 발이 시리냐고 물었고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런데도 기제는 진작 말을 하지 그랬느냐며 히터를 더 올려 버렸다. 나중에는 엉덩이와 오금에도 땀이 났다. 짧게 깎은 기제의 옆머리에도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소설 2025.12.01
달빛

달빛 현호정 너울로 나란히 더 갈 수 없는 데까지 아마도 내가 머무를 물가에 닿아 숨 쉬듯 우릴 어르고 달래 줄 땅 (이제) 영원할 이 이름이 기를 하얀 바깥이지 놓을 수 있어 볼 수 있었네 ‘땅에서 죽어 하늘로 내리는 이’ ‘이 땅에서 죽어 저 하늘로 내린 이’ 믿을 수 없는 신비로 가득한 믿어야 하는 앞길로 아득한 믿지 않아도 저절로 문득 환하던 ···별 ···별 ···별 달 빛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구름 속에서 들었다. 우리는 그리고 냄새였는데 푸른 우유의 냄새 같았다. 푸른 우유가 있다면, (여기) 푸른 염소가 있어 푸른 새끼를 낳는다면, 아니 (여기서는) 염소가 아니라 양이라도 상관없었다. 카라칼이나 바위너구리, 알을 낳는 새들까지 푸른빛을 가정할 수 있었고 새끼에게 원하는 걸 먹일 수 있었다. 새뽀얀 물. 우리에게 마지막까지 필요했던 것. 향료가 되는 풀들처럼 자연의 법칙을 배반하면서, 그것은 마지막까지 싱싱하고 그 후에 더 생생하고, 푸르고 계속 풍부할 거고, 우리는 계속 올라가면서 하늘을 떠다니는 이 냄새였고 그게 아니라면 이 냄새와 함께 떠다니는 하늘이 바로 우리였다. 이제는 그런 게 우리였다. 이제는 그렇게 우리인 거였다. 나는 혼자서도 꽤 아래로 내려가 보았는데 여전히 붐볐고 공중이었다. 속삭임으로 가득 찬 구름들은 제각기 몇 군데 뜯어진 채로 자신의 깃털을 바람에 그냥 날려 보냈고, 그건 살짝 뭉치면 붙는 작은 문제였다. 하지만 우리는 고치고 치유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내가 생각하건대 우리는 아주 많아.” 누군가 말했고 그는 어른이었다. 나는 어른이 아니어서 알 수 있었다. “아저씨, 제 발을 밟으셨어요.” 또 어른이 아닌 누군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발이 없는데···.” “전 있어요! 전 살아 있을 때 발이 없었거든요. 그러니 지금은 있어야지요.” “네 말이 맞다. 발을 밟아서 미안하구나.” 그때 나는 우리가 춤을 추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넓지만 둥글고 우리는 움직일 때 돌아야 했으므로. 그래서 우리는 마주칠 수 있었다. 그러면 아직은 우리 중 하나를 하나의 몸으로 만나 말할 수 있었다. 말하고 만지고 끌어안기. 그리고 싸우기. 그건 사는 일의 거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물론 우리는 싸움에 대해 생각했다. 심지어 지금도! 그러니까 아직도 그랬다. 만약 여기서도 뭔가 나빠진다면, 결국 우리는 전부 나쁘게 변해 버릴지 몰랐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게 세상 전체에 꼭 나쁜 일만은 아닐지도 몰랐다. 그

소설 2025.12.01
조망

조망 손원평 도시는 언제나 빛났다. 낮이면 유리창마다 반사된 햇빛이 먼 산자락까지 닿았고, 밤이면 네온사인이 어둠을 밀어내며 깜박였다. 하나의 거대한 발광체처럼 도시는 스스로를 밝혔다. 여름의 열기와 겨울의 혹한 속에서도 사람들은 꿋꿋했다. 더위와 추위가 무자비하게 덮쳐도 그들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곳에 산다는 것은 무언가를 증명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도 성공하지 못할 거라 여긴 허허벌판에 세워진 도시. 도시의 이름은 명함이었고 긍지의 상징이었다. 도시 한복판의 호수는 절반은 자연, 절반은 인공의 산물이었다. 여름에는 해수욕장을 방불케 할 만큼 많은 인파가 몰려 태양을 즐기고, 겨울엔 얼어붙은 호수 위로 스케이트 날이 반짝였다. 애초에 이 분지는 물을 품도록 생긴 땅이었다. 오래된 지도를 펼쳐 보면 파란 선과 옅은 음영이 겹쳐져 있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른 척했다. 하천 자리에 도로가 뚫리고, 논과 습지가 메워진 자리에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모두가 품은 희망도 높게 쌓여 갔기 때문이다. 누구나 알고 있었다. 이 도시는 단단한 땅이 아니라, 한때 분지였던 곳을 억지로 길들여 그 위에 세운 도시라는 걸. 그럼에도 사람들은 더 높이, 더 거대하게 쌓아 올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물 위에 도시를, 도시 위에 또 다른 미래를 약속하는 이름들을 붙여 가며. 도시로 향하는 길에는 경계가 하나 있었다. 도시로 들어가는 자와 빠져나가는 자를 가르는 협소한 목구멍 같은 톨게이트였다. 낮이면 끝없이 이어진 차량이 통로를 밀고 들어오다가 밤이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곳에 유리로 둘러싸인 작은 부스가 있었다. 작은 창문을 통해 하루 종일 팔이 뻗었다가 돌아왔다. 팔을 뻗고, 카드를 거두고, 결제한 카드를 다시 내민다. 끊임없이 그 과정을 반복하는 것. 그것이 수하의 일이었다. 차들이 일정한 리듬으로 브레이크를 밟는 동안 창문 너머로 무표정한 얼굴들이 흘러갔다. 남는 것은 팔의 무게와 몸을 짓누르는 피로뿐이었다. 수하의 하루는 새벽에서 낮까지, 낮에서 밤까지, 밤에서 다시 새벽까지 세 토막으로 이어졌다. 화려한 도시의 입구에 앉아 그녀는 빛을 향해 몰려드는 차들을 감정 없이 맞이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날카로운 배기음이 더 이상 소음으로 느껴지지 않은 것도 오래였다. 그곳에서 수하는 여름의 열기와 겨울의 냉기를 고스란히 느꼈다. 몇 안 되던 근처 자리 동료들은 차츰 사라졌고, 먼 곳에서 근무하는 동료들과는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교대인과의 짧은 접촉, 오가는 차 안의 사람들 외에 사람을 대면할 일은 거의 없었다. 드물게 차가 한 대도 보이지 않을 때, 텅 빈 차도에 사람이라곤 자기 혼자라는 걸 섬뜩하게 자각할 때조차도 수하는 자신이 유일하게 이곳에서 버텨 낸 사람이라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특별히 잘한 것도, 못한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놀랍도록 단조로운 직업생활을 영위하는 게 전적으로 운의 작용이라고 누군가 말해 줬다면 수하는 누구보다 빨리 수긍할 수 있었을 것이다. 행운과

소설 2025.12.01
우리는

우리는 심윤경 “남양주에 가셨다고요?” 전화기 속에서 딸이 물었다. “아버지 내가 정말! (딸깍딸깍) 오늘 영하로 떨어진다고 하는데, 못 들으셨어요? (딸깍딸깍) 환절기에 가장 많이 쓰러지는데 (딸깍딸깍) 하라는 것도 아니고. 제가 지금 (딸깍딸깍) 하는 거예요?” 전화가 걸려 오고 있다는 신호음이 겹쳐 딸의 목소리는 자꾸 뚝뚝 끊어졌다. 마음이 급해지면 종종 그러듯 눈앞이 하얗게 아득해졌다. 친구들이 전화하고 있을 것이다. 딸이 전화를 끊어야 걸려 오는 전화를 받을 텐데, 딸은 거센 잔소리를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래, 알았어. 일찍 들어갈 거야. 조심할게. 걱정 말아라.”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딸의 전화를 끊어 버렸다. 전에는 이런 적이 없었다. 딸의 전화를 중간에 끊어 버린 것은, 그의 기억에는 한 번도 없었다. 딸이 마음 상하지 않고 이해해 주기를 바랐다. 친구들이 도착할 시간이었다. 하나하나 무사히 모여서 택시를 타야 한다. 이전에 와 본 적이 없는 낯선 곳에서 여기저기 부실한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다면, 누구라도 마음이 조급해질 것이다. 구십 세가 되는 것이 어떤 기분이냐고, 구순 생일에 찾아온 조카들이 물었다. 딸이 예약해 놓은 한정식집은 유명세가 있는 곳이었지만 시장바닥처럼 번잡하고 시끄러웠다. 오래 담아 놓은 나물 윗부분이 말라 가고 있었다. 그의 자식들은 예약했던 것과 메뉴가 다르고 방도 원하던 곳이 아니었다고 한정식집에 항의했다. 자식들의 밝지 않은 얼굴을 보다가 마음이 무거워져서, 그는 여태까지 살아도 알 수가 없는 게 인생이라고 답하고 말았다. 모두 모인 자리에서 더 화창하게 대답을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딸이 화를 내고 있지만 (큰소리로 “제발 자식 말 좀 들으세요!”라고 했다) 하필 모이기로 한 날의 기온이 갑자기 영하로 내려갈 줄을 미처 몰랐을 뿐이었다. 옥희는 골반이 아팠고 신성이는 방향감각이 깜빡깜빡했다. 옥희보다는 신성이가 좀 더 걱정이라서, 딸의 전화를 끊고 신성이의 전화를 받았을 때 드디어 안도했다. 신성이는 오십 대 남자의 도움을 받아 나타났고 옥희는 누구의 도움 없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옥희와 신성이는 지팡이를 짚었고 성훈은 아직 두 발로 다닐 만했다. 세 친구 모두 한 대뿐인 엘리베이터를 잘 찾아 고생 없이 나타났으니, 일단 모험의 첫 단계는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지하철로 오니까 참 쉽다. 여기까지 지하철이 닿는구나.” 요새는 그들이 생각지도 못한 곳까지 지하철이 닿았다. 지하철 4호선이 진접역까지 닿는 걸 알았을 때 그는 만세를 외치고 싶었다. 안양, 용인, 일산에 사는 구십 대의 세 친구가 누구 도움 없이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남양주 은혜와 평화 요양원에 찾아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요양원에서 가장 가까운 역은 사릉역이었지만 친구들이 경춘선을 갈아타기는 힘들 것 같았다. 멀어도 익숙한 지하철이 좋았다. 어차피 택시를 탈

소설 2025.12.01
내일의 국화

내일의 국화 임솔아 씨발년이었나, 썅년이었나. 그때도 화가 나지는 않았다. 마냥 당황스러웠다. 잠시 후에는 내가 잘못한 것은 없는지 기억을 되짚어 봤다. 그러고는 그랬구나 했다. 국화가 처음으로 전한 진심이었다. 몇 번인가 궁금한 적은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나를 씨발년이나 썅년 같은 거라고 여겨 온 것은. 비로소 진심을 전하기로 한 계기가 뭐였을까. 굳이 대답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내게 정말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지금 나는 왜 굳이 국화를 만나러 가는가. 오후 두 시에 기차에서 내렸다. 약속은 내일 오후 세 시였다. 내가 기차를 타고 여기까지 오는 게 덜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국화만을 위해 이 먼 거리를 이동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이것이 여행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겸사겸사 국화도 만나는 것이어야 했다. 기차역을 빠져나오자 막상 갈 곳이 마땅히 없었다. 이 도시에서 유명한 건 빵집뿐이었다. 이 도시는 볼 것 없고 놀 것 없는 곳으로 유명했다. 어린 시절에 살았던 주공아파트나 지금은 없는 개와 함께 산책을 다녔던 초등학교 운동장, 삥을 뜯기는 것으로 유명했던 팬시용품점 뒷골목 같은 장소를 다시 찾아가기는 싫었다. 이미 다 가 봤으니까. 이 도시를 떠난 지 십 년째가 되었던 일월 일일이었다. 내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분주히 존재하던 나의 동네가 실재하는지 아닌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기억을 가볍게 만들고서 다시 기차를 타고 내 원룸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그래야지만 앞으로 조금이라도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굣길마다 찾아갔던 비닐 천막 떡볶이집이 거기 계속 있다는 것과 조금도 변하지 않은 아주머니가 여전히 떡볶이를 푸짐하게 퍼서 접시에 담고 있었다는 것에 나는 반가워했다. 그러나 내부에 들어섰을 때 한눈에도 위생 상태가 처참해 보였다는 것에 나는 적잖이 놀랐다. 천막 안에 기름 쩐 내가 떠다녔다. 떡볶이 맛도 형편없었다. 씹자마자 어떤 냄새가 코끝을 쏘았다. 옆에서 아이들이 컵떡볶이를 냠냠 먹고 있었다. 남아 있는 국물을 먹기 위해 종이컵 속에 혓바닥을 밀어 넣고 있었다. 이토록 맛이 없는 떡볶이를 그토록 맛있게 먹었던 건지, 시간이 지나 떡볶이의 맛이 변해 버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입안에 있는 것만 삼키고 천막을 나왔다. 간판이 유난히 깨끗한 국숫집이 눈에 띄었다. 개업을 축하하는 화분들이 가게 입구에 쪼르륵 놓여 있었다. 어느 동네에나 있는 프랜차이즈였다. 그 국숫집에서 국수를 먹는 동안 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방 카운터에 앉아 있는 주인 할머니, 주방 안쪽에서 식재료를 다듬고 있는 젊은 여자, 그리고 카운터와 주방을 오가며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드는 아이. 창가에 다육이를 놓는 건 어때. 깔끔한 게 낫지 않니. 할머니 나 이 다육이가 뭔지 알아. 같은 말이 오갔다. 어른들의 대화는 아이 때문에 자주 끊겼다. 질문과 대답 사이에 아이의 말이 끼어들면 어른들은 대꾸를 하느라 대화가 띄엄띄엄 흘러갔다. 그 점이 나는 편안했다. 국수를 거의 다 먹었을 즈음 주방에 있던 여자가 나왔다.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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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컬처와 한국이라는 스토리텔링 3] 오늘의 한국문학과 문학 시장에 대하여

류수연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5년 11월부터 2026년 1월까지 으로 3회 연재됩니다. K-컬처와 한국이라는 스토리텔링 3 -오늘의 한국문학과 문학 시장에 대하여 류수연 1. 노벨문학상의 낙수효과? 2020년대 미디어믹스의 원천IP로 주목받는 것은 웹소설이나 웹툰 같은 웹 콘텐츠이다. 다양한 디지털 기기가 일상화되면서 그러한 매체 안에서 즐길 수 있는 더 많은 콘텐츠가 요구되었고, 웹상의 스토리텔링은 매우 유용한 자원으로 활용되었다. 그 결과 현재 웹 스토리텔링은 그 자체로 콘텐츠인 동시에 또 다른 콘텐츠의 원천IP로 활용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활자로 된 스토리텔링이 영상미디어로 2차 가공되는 일은 비단 최근에 나타난 현상만은 아니다. OSMU나 미디어믹스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이전에도, 사실 이러한 방식의 콘텐츠 확장은 일상적으로 있었다. 무엇보다 문학, 그중에서도 소설은 가장 오랫동안 원천IP로 각광받았던 이야기 그 자체였다. 하나의 소설이 극이 되고, 또 다른 소설의 영감이 되고 패러디 되는 것은 너무나 익숙한 과정이다. 트랜스미디어 환경이 이러한 상호텍스트성을 더욱 가속화하고 확대하였을 뿐이다. 돌이켜 보면 이야기의 구전이라는 것도 결국 인간의 신체라는 미디어를 활용한 확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 과정에서 발생된 2차 가공은 오늘날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로 인해 편집과 각색이 더 시시각각 이루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스토리텔링의 확장은 애초에 이야기의 고유 속성이라 할 만큼 아주 익숙한 방식에 가깝다. 문자에서 이미지와 극으로, 다시 영상과 미디어를 넘나드는 스토리텔링의 확장은, 그 무엇보다 문학이 가장 잘 해 왔던 일이니 말이다. 문학의 영상화는 영화산업의 초창기부터 시작되었지만, 오늘날의 미디어믹스에 더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것은 1960년대 문예영화일 것이다. 영화산업이 부흥하면서, 당시 많은 문학작품이 영화의 원천 텍스트로 자리매김했다. 1970년대부터는 TV 단막극을 통해 많은 문학 텍스트가 영상화되었고, 이러한 시도는 2020년대 현재까지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김금희 원작의 (2018), 장류진 원작의 (2020)과 (2025) 등의 드라마가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트랜스미디어 환경 속에서 예측되는 문학의 미래는 암울한 전망으로 가득하다. 1990년대부터 본격화된 문학의 위기론은 40년 가까이 논의되는 동안 이제는 잊을 만하면 꺼내는 해묵은 불편함이 되었지만, 웹 콘텐츠의 등장 이후에는 위기론 자체도 언급되지 않을 만큼 공공연한 사실이 되어 버렸다. 이처럼 미디어 환경이 ‘읽기’의 위기를 기정사실화했다면, 생성형 AI의 등장 이후에는 ‘쓰기’의 위기까지 대두되는 실정이다. 생성형 AI가 문해력까지 대체하는 마당이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돌이켜 보면 근현대문학사의 여러 굴절마다 제기되었던 문학의 위기론은, 어쩌면 그래도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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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돌린 김은자의 이미지와 무등산

등 돌린 김은자의 이미지와 무등산 김서라 1. 등 돌린 김은자의 사진 이미지는 그것을 표현하는 사물이나 사건 자체보다는 사물이나 사건들이 어떻게 보이는지, 어떻게 표출되고 있는지에 더 가깝다. 하지만 그 두 가지는 쉽게 분리되기 어렵기 때문에 동일시되기가 쉽다. 이 문제에 맞닥뜨린 근대 철학자들은 판단을 유보하기도 하고 인간의 지각 방식 자체를 문제시하기도 했다. 그들의 이론과는 별개로, 우리는 일상적인 경험의 방식으로 이미지가 그 사물, 사건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간 때문이다. 이미지는 그 사물이나 사건과 마주한 시간을 보존한다. 어렸을 때 그렇게 커 보였던 뒷산이 야트막한 산에 불과 깨닫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미지의 역사는 사실이나 이념이 아니라 ‘낙차’나 ‘문턱’처럼 감각되곤 한다. 적어도 발터 벤야민은 낙차나 문턱의 감각으로 이미지 속의 역사를 파악한 바 있다. 지금도 그 방법은 유효하다. 어떤 사진이 주어진다면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의 의도나 피사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보나 분석보다, 그 사진이 어떻게 보이는지 그리고 사람들은 그 사진에 어떤 이름을 붙이는지가 더 중요할 수 있다. 그것이 ‘그때’나 ‘지금’을 사진보다 더 또렷하게 이미지화하기 때문이다. 1964년 4월 17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사진 한 장이 있다. 흰 천을 쓰고 한복을 입은 듯한 여성의 뒷모습이 타원형 프레임 속에 있다. 마치 옛 초상 사진의 프레임 속에 수수한 차림의 여성의 모습이 담겼지만, 이 여성의 뒷모습만 가지고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 수 없다. 사진 아래에는 작은 활자로 “무명옷을 입은 「어머니」 김 여사는 사진 찍기 마다고 흰 수건 쓴 머리를 돌려댔다.”고 쓰여져 있다. 이 사진이 함께 실린 기사는 그를 ‘어머니’로 소개하면서 등 돌린 뒷모습을 포착한다. 기사의 제목으로는 ‘숨은 나이팅게일’, 부제로는 ‘삼밭실의 무등원, 죽음을 이긴 새마을의 어머니’라고 달았다. 이 사진과 관련한 기사 내용은 이 무등원과 ‘김 여사’를 다음처럼 소개한다. “광주 무등산 중턱 삼밭실 일대에는 사회에서 버림받은 2백30명에 달하는 폐결핵환자, 앉은뱅이, 간질병환자, 정신병자 등 불구자들이 이곳저곳에 흩어진 38동의 집에서 원시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이 마을의 영도자는 연약한 한 사람의 중년부인, 의지할 곳 없는 환자들에게는 어머니이자 누나요, 구세주이기도 하다. ···(중략)··· 「가톨릭」 재단의 손으로 운영되는 제중병원은 가난한 결핵환자를 무료로 치료해왔으나 나을 수 없는 환자를 언제까지나 입원시킬 수는 없어 이들에게는 부득이 퇴원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병 때문에 패가망신이 된 환자들에게는 유리걸식밖에 할 길이 없었다. 이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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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無名)의 상품, 번역의 연쇄

무명(無名)의 상품, 번역의 연쇄 : 네트워크 시대의 시와 저자성 이성주 1. 저자성의 균열 생성형 인공지능의 등장 이후, 시 비평의 장에서 가장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개념 가운데 하나는 저자성(authorship)일 것이다. 이와 관련해, 시 쓰기에 인공지능을 포함한 다중 행위자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며 저자성의 해체를 주장하는 관점이 있는가 하면 여전히 인간만이 쓸 수 있는 시의 고유성을 강조하는 입장 역시 강하게 존재한다. 두 입장 사이에는 유보적이거나 비판적인 태도들이 넓은 스펙트럼을 이루며 공존하고 있고, 그에 따라 저자-시-독자의 관계나 독창성(고유성)을 둘러싼 논의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다. 물론 이 글에서 관련 논의를 모두 정리하거나 판별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저자성 비판이 오늘날 어떤 형식과 논리로 전개되고 있는지를 가늠하기 위해, 최근의 평문 가운데 하나인 박상수의 「영원한 베타 테스트로서의 여름」(『문학동네』, 2025 가을호)을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이 비평은 2010년대 이후 한국 시에 만연해진 ‘납작함’의 감각을 핵심 문제로 진단하며, 저자성 해체 담론이 간과하기 쉬운 지점을 예리하게 짚어 낸다는 점에서 중요한 참조가 된다. 박상수가 말하는 ‘납작함’이란 최근 시에 나타나는 시적 주체의 무력함, 대상에 대한 비관여성(非關與性), 타자와의 상호작용 약화, 그리고 ‘메타적 인식의 과정’만이 부각되는 경향 등을 아울러 지칭하는 것이다. 특히 박상수는 최다영의 비평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시의 생산 주체를 비인간 행위자와 기술 장치까지 포함하는 연합적 모델로 긍정하는 최다영의 논리가 결과적으로는 주체의 저항과 행위 가능성 혹은 내면의 복잡한 역학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 본 글의 맥락에 맞춰 간단하게 말하자면, ‘저자성 해체’를 동시대의 불가피한 조건으로 승인할 때 타자성이나 윤리적 긴장이 소거된 ‘납작함’ 역시 쉽게 수용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최다영의 입장에 서면 다른 이야기가 가능하겠지만, 우선 박상수의 글이 지닌 문제의식에 많든 적든 공감하지 않기란 어렵지 않을까. 확실히 최근 시에서 ‘타자와의 접촉면’이 얕아지고 있음은 박상수만 느끼는 것은 아닐 것 같다. 그리고 이는 어쩌면 인터넷상에서 실수나 실언 하나로 누군가에 대한 평가를 쉽게 뒤집고 때로 그것을 근거 삼아 혐오를 정당화하는 오늘날의 문화적 현상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여기서 제기하고 싶은 문제는, 박상수가 ‘무엇’을 주장하는가에 있다기보다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에 있다. 그의 글은 맥락이 다른 다양한 이론과 담론을 빠르게 호출하고 병치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가령 한병철과 마크 피셔가 별다른 매개 없이 나란히 놓이고, 현대 신학 담론의 어휘들은 그것이 형성된 맥락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은 채 문학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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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컬처와 한국이라는 스토리텔링 2] 웹소설이라는 가능성

류수연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5년 11월부터 2026년 1월까지 으로 3회 연재됩니다. k-컬처와 한국이라는 스토리텔링 2 -웹소설이라는 가능성 류수연 1. 지금은 웹소설의 시대 번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외국어 능력일까, 모국어 능력일까? 물론 어느 하나도 포기할 수 없는 요소지만 부득이 한 쪽을 골라야 한다면? 수년 전이라면 당연하게도 ‘외국어’라는 답변이 압도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생성형 AI를 활용한 초벌 번역이 보편화된 오늘의 관점에서라면, 그 답은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다. 실제로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아주 결정적인 장면을 이미 경험한 바 있다. 바로 2022 한국문학 번역신인상에서 말이다. 웹툰 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40대 일본인의 한국어 실력이 초급 수준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논란이 시작되었다. 당선자는 AI를 활용해서 초벌 번역을 진행했고, 그 뒤 자신이 일본어 표현을 가다듬었다는 것이었다. 당락을 결정한 것은 만화적 표현과 리듬에 익숙한 당선자의 표현력이었겠지만 번역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언어능력 없이 AI로 번역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논란이 거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뒤로 채 2년도 되지 않아 생성형 AI가 전 세계적으로 보급되었으니, 어쩌면 그 혼란은 이러한 기술 변화에 대한 예고였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웹 서사의 달라진 위상을 공공연하게 보여 주는 사건이기도 했다. AI 번역만큼이나 문학번역의 부문에 웹툰이 있다는 점도 큰 이슈가 되었기 때문이다. 웹 콘텐츠에 부여되었던 수많은 평가절하를 떠올린다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웹-이라는 접두어를 붙인 여러 콘텐츠가 등장한 지 불과 20여 년, 그 확장된 영향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오늘날 웹을 기반으로 한 콘텐츠 시장은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선발 주자인 웹툰과 후발 주자인 웹소설 모두 대중문화의 절대적 강자로 부각되었다. 거기엔 이들 콘텐츠 자체의 매력도 있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이들 콘텐츠가 다양한 미디어믹스 과정에서 원천IP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 역시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웹 기반 서사가 트랜스미디어의 확실한 강자로 부각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 웹소설의 경우에는 선발 주자인 웹툰의 원천IP로도 활용되고 있으니, 웹 콘텐츠 전체의 근간을 이루는 기초가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지난 회차에 살펴보았던 케이팝 스토리텔링 역시 이러한 웹 콘텐츠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는바, 오늘날 한국 대중문화를 이끄는 콘텐츠로서 웹 기반 서사를 살펴보는 것은 한국이라는 스토리텔링의 한 정점으로 다가가는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그 중심에는 또다시 이야기가 있다. 이 글에서는 가장 매력적인 이야기들이 각축을 벌이는 웹 플랫폼이라는 가상공간, 그리고 그곳을 종횡무진하고 있는 웹소설의 의미를 추적해 보고자 한다. 2. 취향의 타파스? 일반 문학과 함께 웹소설을 비평적 연구 대상으로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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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컬처의 그림자, 혐중이라는 문화정치

K-컬처의 그림자, 혐중이라는 문화정치 : 2020년대 한국 사회의 문화적 자부심은 어떻게 배타적 혐오가 되었나 허희 1. 정동적 역설의 면면 2020년대 한국 사회는 기묘한 정동적 역설 가운데 작동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K-팝‧K-드라마‧K-웹툰‧K-게임 산업까지 확장된, 이른바 K-컬처 복합체가 가시적 성취를 축적하면서 한국의 상징체계를 재편 중이다. 이것은 국가 정체성을 구성하는 정동적 보상이 작동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문화적 자부심은 경제 양극화를 포괄하는 저성장 국면‧불안정 노동‧청년 세대의 좌절과 같은 내부 불안을 상쇄하는 역할로 작용하였다. 그러한 면에서 K-컬처는 문화 산업만으로 간주하기 어렵다. 국가 정동을 생산‧관리하는 체제로서, 문화적 자부심은 일종의 집단 감정 자본으로 사회적 정당성을 획득하였다.1) 동시에 한국 사회는 ‘혐중(Sinophobia)’으로 대표되는 조직화된 집단 감정의 분출을 목도하고 있다. 이 글은 그것을 병렬적으로 공존하는 동시대 현상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자부심이 혐오로 전이되는 정동 형성의 정치적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그러니까 혐중은 자부심의 어두운 파생물, 정동의 이동과 변조가 빚어낸 적대의 결과라는 논점이다. 여기에서 비판과 혐오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비판은 특정 행위나 정책, 제도적 불투명성이나 권력 작동 방식과 같은 대상을 향한다. 이는 사실 검증과 토론 가능성을 전제한다. 예컨대 중국 정부의 신장 위구르 지역 내 강제 수용 의혹, 홍콩 보안법의 인권 침해 문제, 동북공정의 역사 왜곡 등은 어떨까. 이상의 논란은 분석과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고, 국제사회가 공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사안이다. 반면 혐오는 문제를 특정한 정치·사회 행위에서 찾지 않는다. 증오의 대상을 일반화하고 전체화함으로써 제거의 정동을 발생시킨다. 이때 중국(인)은 특정 행위의 주체로서가 아니라, 문명적으로 열등하고 비도덕적이며 반인권적인 타자로 폄하된다. 이 같은 혐오의 메커니즘은 정동의 순환—감정이 사회적으로 이동하며 타자를 구성하는 과정과 유사하게 작동한다. 더불어 그들을 향한 정서가 실체적 검증 없이 사실처럼 굳어지는 탈지성적 담론 구조를 형성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2020년대 한국 사회 내 반중—혐중 세력은 합리적 비판과 비합리적 망상의 경계가 붕괴된 상태에서 광적으로 결집하고 있다. 이에 대한 제재가 대증 요법에 그치지 않으려면 면밀한 분석이 요청된다. 오늘날 혐중은 SNS·커뮤니티·유튜브 생태계의 유통망에서 집단 감정의 양극화를 선동한다. 김치·한복 공정 논란처럼 국가 정체성을 둘러싼 문화 투쟁은 팩트에 근거한 학술 논쟁이나 국제문화 비교 연구의 영역이 아니라, 무분별한 감정 투쟁의 장으로 격화되었다. K-팝 아이돌에게 요구되는 이른바 사상 검증(중국 시장을 겨냥한 발언을 했는가, 홍콩·대만 문제에 침묵했는가)의 사례는 집단 감시된 순응주의가 디지털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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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고도 불친절한 미래에 대한 단상

낯익고도 불친절한 미래에 대한 단상 임지훈 세상의 속도를 점점 감당할 수가 없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빠르게 변해 간다. 변화하는 속도에 편승하지 못하는 자는 자신이 이방인이 된 기분을 느낀다. 스팅의 노래 〈Englishman in New York〉의 화자는 자신을 “legal alien”, 합법적인 이방인이라고 말한다. ‘신사다움’이 철 지난 농담이 되어 버린 세계에서 여전히 “Manners maketh man”이라 말하고, “Be yourself, no matter what they say”, ‘당신답게, 누가 뭐라고 하든’이라 말하는 사람. 그 노래 속에서, 이 합법적인 이방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Modesty, propriety Can lead to notoriety You could end up as the only one Gentleness, sobriety are rare in this society at night a candle’s brighter than the sun - Sting, 〈Englishman in New York〉 겸손과 예의범절이 악평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온화함과 침착함은 흔치 않은 감정이 된 세계.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이고, 우리는 그 속에서 스스로를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이미 스스로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직 자기 자신을 잃지 않았다’는 건 단지 착각에 불과하고. 그렇다면 어쩌면 그 또한 자신의 착각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미치광이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이건 아마 이중의 의미로 ‘그렇다’고 할 수 있을 텐데, 그가 정말 착각에 빠진 채로 살아가고 있는 거라는 의미에서도 그렇겠지만 모두가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세상 속에서 그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 또한 미친 것이기는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에서, 겸손과 예의범절이 더 큰 이익을 위한 술책이 되고 온화함과 침착함은 철 지난 농담이 되어 버린 세상에서 그것들의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은 이제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으니까. 그런 세상 속에서 ‘매너가 사람을 만들고요, 당신은 당신답게 살아야 해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분명 광인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종종 이방인으로 느낀다는 점에서 그와 같지만 사실은 전혀 다르다. 그와 달리 우리는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를뿐더러, 현실 속에서 무엇이 사라지고 있는지조차 헤아리지 못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와 그는 전적으로 다른 존재처럼 보이는데, 기술적 환경의 변화에 휩쓸려 떠밀리듯 살아가는 우리와 달리, 그는 마치 좌표계의 원점에 선 것처럼 세계를 바라보며, 그 변화의 속도를 측정하고, 그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야 할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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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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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2026.01.01
동그라미 그리기

동그라미 그리기 최은영 얼마 전, 김창환 님이 쓴 글을 읽었다. 책 제목이기도 한 글의 제목은 「찌그러져도 동그라미입니다」. “세상살이라는 게 그렇게 자로 잰 듯 떨어지지 않습니다. 좀 여유롭게 생각하세요. 제가 지금부터 동그라미를 여백이 되는대로 그려 보겠습니다. 마흔일곱 개를 그렸군요. 이 가운데 V를 표시한 두 개의 동그라미만 그럴듯합니다. 회사 생활이라는 것도 47일 근무 중에 이틀이 동그라면 동그란 것입니다. 너무 매일매일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위에 그린 동그라미를 네모라고 하겠습니까, 세모라고 하겠습니까? 그저 다 찌그러진 동그라미들입니다. 우리의 일상도.” 1) 매일매일에 집착하지 말라는 그의 말에 위로받았고, 하루를 원으로 표현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하루하루가 동그랗게 완성되며, 시간은 마냥 직선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순환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시간은 여러 개의 원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일 초, 일 분, 한 시간, 하루, 일주일,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일 년··· 한 해를 사는 것을 동그라미 하나 그리기라고 생각한다면 지금까지 나는 마흔두 개의 동그라미를 그린 셈이다. 앞으로 이 동그라미를 몇 개나 더 그릴 수 있을까. 끝의 끝이 되었을 때 새로운 시작이 돌아온다는 걸 연말이 오면 매번 깨닫는다. 만족하며 살았든 그렇지 않았든 새해는 거저 주어진다.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듯이. ‘새로운 동그라미를 그려 봐’ 하면서. 그러면 마흔셋이 된 나는 다시 손에 연필을 잡고서 새로운 페이지에 동그라미를 그리기 시작한다. 마흔두 개의 동그라미를 그렸지만 여전히 동그라미 그리기는 막막하고 어렵다. 언제부터 동그라미 그리기가 이렇게 어려워졌을까. 새 시간, 다시 주어진 기회, 새로운 삶···. 이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새해가 시작되면 언제나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산다는 것이 버겁다는 생각을 떨쳐 내기가 어렵다. 그러면서도 지금의 삶이 그래도 내가 지금까지 살았던 시간 중에서는 가장 덜 힘든 시기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이 정도면 견딜 만하다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십 대와 이십 대의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고 싶다. 나는 마흔셋이 되었는데, 사는 일이 극적으로 쉬워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 너의 삶보다는 훨씬 더 평온하다고. 마흔세 번째의 새해를 맞이하여 지난 시간을 되돌아본다. 예전에는 회한도 많고 아쉬움도 많아서 ‘시간을 되돌린다면’이라는 가정을 자주하곤 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러지 않는다. 한때는 바보 같은 선택을 거듭한 어린 나를 용서하지 못하기도 했다. 너무 바보 같아서 미워질 정도의 어린 나를. 하지만 그게 그 아이의 최선이었다는 것을 가슴 깊이 받아들이고 나니 더는 그런 내가 미워지지도 않았고, ‘시간을 되돌린다면’ 같은 가정을 하지 않게 됐다. 내

기획 2026.01.01
한 해의 뒷면

한 해의 뒷면 최현진 첫 눈이 내린다. 나의 글쓰기 방에 난 창문으로 흰 원들이 신호등과 선로 위에 앉는 걸 본다. 눈과 바람을 피하지 못한 사람들이 외투를 되살리며 종종종 걸어간다. 눈이 쌓인 지면은 세상으로부터 떠 있는 것 같다. 사물의 형체를 지우며 공백에 가까워진다.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는 공백(空白)에서 찾아온다. 이 글은 지난겨울에서 다시 첫눈이 내리는 동안의 이야기다. 아홉 살 때 ‘단감’이라는 시를 써 본 것을 시작으로 오랫동안 내 꿈은 작가였다. 2025년은 꿈을 이루며 시작했다. 나의 첫 책이 나온 것이다. 출간 이후의 삶이 책의 질량만큼 가벼운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연초 문학상 시상식을 하루 앞두고 아버지가 바터팽대부암이라는 희귀암 진단을 받으셨다. 시상식 가는 길이 앞으로 펼쳐질 투병과 간병의 길처럼 더디고 어려웠다. 이른 봄, 나는 희미한 감각으로 수상과 첫 책의 기쁨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최종 교정지를 만지는 날에 아버지가 누워 있는 고층 병동에서 쏟아지는 폭설을 보다가 그만 커피를 쏟고 말았다. 얼룩이 책에 인쇄되어 나올 것도 아닌데 참을 새 없이 눈물이 푹신 떨어졌다. 나는 서운했다. 내 삶에. 작가는 어떻게 가족구성원 내에서 돌봄이라는 균형을 지키며 자신의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는가. 휠체어를 끌다가 메모를 하고 병실에 불이 꺼지면 노트북을 켜 타닥타닥 불씨를 지피기도 하지만 일순간에 불과하다. ‘작업을 이어 나가고 싶다’는 마음과 ‘중지해야 한다’는 갈등은 겉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병원에 도착했지만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서성거린다거나, 환자에게 무뚝뚝하게 군다 거나. 간병 일수를 줄여 보자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그러기에 내 직업은 출퇴근이 따로 없는 작가이고 또한 애매한 태도가 걸림돌이었다. 수상과 첫 책의 행운이 함께 왔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쉽사리 힘들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모두가 나를 축하해 줄 때였다. 병원 앞에 뜬 부드러운 점선의 구름을 보며 사진을 찍어 두는 것이 기쁨의 전부였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문학이 전부인 것처럼 보이고 싶었다. 작가가 무엇인지 충분히 숙고하지 않은 탓인지 모른다. 나는 빠져나갈 출구를 찾고 있었다. 첫 강연은 부산이었다. 책을 내고 공식적으로 들어온 첫 번째 일이었다. 식구들에게 떳떳하게 통보하고 짐을 쌌다. 얼마나 걸리냐는 아버지의 질문에 하루가 걸린다고 했다. 강연은 두 시간이었지만 부산까지 가는 데 오고 가는 시간이 있으니까. 그런데 왜 짐을 싸냐고 물어보셔서 간 김에 글을 쓰고 오겠다고 말했다. 여기서도 글을 쓸 수 있지 않느냐고 생각하시는 게 아버지 입장에서는 당연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글을 쓸 수 없었다.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 내가 초청받은 곳은 시외에 위치한 고등학교였다. 따뜻한 땅에서 올라온 연둣빛 들판을 거쳐 봄 멸치를 잡던 배가 묶여 있는 작은 항구와 벽돌로 쌓은 젓갈 공장을 지나서 달려간 곳에 아늑한

기획 2026.01.01
소망, 반성, 시작

소망, 반성, 시작 김상규 1. 소망 여러분은 언제부터 새해라고 생각하시나요? 어떤 분은 1월 1일을 새해로 생각하실 것이며, 또 어떤 분은 설 명절을 생각하는 분도 있으실 겁니다. 또 어떤 분은 해가 다시 길어지는 동지를 새해의 시점으로 잡으실 수도 있겠군요. 저는 새해의 시작을 정월대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가 과학적으로 분명하거나 이론적으로 거창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어릴 적 할머니와의 기억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할머니는 늘 정월대보름이 되면 가족 수에 맞게 하얀 종이를 준비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소지(燒紙)라고 불렀습니다. 준비된 소지를 앞이 두껍고 기다란 직사각형으로 접고 나면 우리 집 정월대보름 준비는 끝마친 것입니다. 저녁이 되면 할머니는 나를 부르시곤 그 소지에 가족의 나이와 이름을 적게 하셨습니다. 할머니는 소학교도 나오지 않으셨기에 글을 더듬더듬 읽을 줄 아나 쓸 줄은 모르셨습니다. 그래서 나를 불러 이 일을 시키신 것이지요. 잘 정리된 소지와 초 하나를 들고 할머니는 마당 구석으로 향했습니다. 불을 태우는 방향을 해마다 바뀌었는데 아마 동네 용한 무당 할머니의 말씀을 듣고 그리했다고 짐작할 뿐입니다. 남쪽이 흉하면 남쪽으로 소지를 태우고 북쪽이 흉하면 북쪽으로 소지를 태우는 것입니다. 준비가 다 되면 할머니는 이름이 적힌 소지를 순서대로 가슴에 품고 무언가를 기도하셨습니다. 저는 그 소원이 무엇인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습니다. 서서히 몰락해 가는 집안에서 할머니가 할 수 있는 기도는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는 기도가 다 끝나면 가슴에 품었던 소지를 촛불에 태워 하늘로 올려 보냈습니다. 쪼그리고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더 멀리 소지의 불꽃이 퍼지기를 바라며 손바닥으로 부채질을 했습니다. 제주 중간산 마을의 거친 겨울바람을 타고 훨훨 오르는 종잇장을 지켜보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저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할머니 제 소지는 제가 가슴에 품고 불을 붙일게요.” 할머니는 흔쾌히 제 말을 따르셨습니다. 그것은 제가 우리 집안 종손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잔병치레가 많아 유난히 병약했던 나에게 할머니는 무엇이든 다 주고 싶은 그런 존재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어떤 소원을 빌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습니다. 날 버리고 떠난 엄마가 빨리 돌아오길 바란다는 소원을 빌었을까요? 교도소에 들어간 아버지와 삼촌이 빨리 돌아오길 바란다는 소원을 빌었을까요? 그게 아니면 빨리 어른이 되어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소원을 빌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찌 되었든 가슴에 품었던 하얀 종이를 촛불에 붙여 하늘로 올려보냈던 기억과, 제 소원이 담긴 소지의 불꽃이 더 멀리 퍼지기를 바라며 손바닥을 휘저었던 기억만은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2. 반성 소지를 태우며 빌었던 소망은 이루어졌을까요? 불행하게도 그 기도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집안은 철저하게 몰락했으며 저 역시 혈족의 굴레 속에 벗어나지 못했으니까요. 어디부터 잘못되었는지

기획 2026.01.01
시작을 위한 커튼콜

시작을 위한 커튼콜 송희지 ❋ 2025년은 내게 변화와 도전의 해였다. 짧지 않은 학부 생활을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했으며, 두 번째 시집을 펴내면서 지난 이삼 년간 차곡차곡 쌓아온 작업물과 사유들을 털어 냈다. 문화센터 등에서 시 창작 수업을 하며 학생들을 만났고, 창작촌에 입주하며 잠깐의 서울살이를 해 보기도 했다. 또 그 변화와 도전의 한 축에는 극(劇)이 있었다. 새해 첫날, 신문을 통해 첫 희곡 「탐조기」를 발표하게 되었는데, 그 직전까지도 연극에 대한 지식이라곤 소나기 오는 날 도로변에 생기는 웅덩이만큼이나 얕았던 내겐 그 일이 어떤 사건처럼, 무척 고되고 생경한 모험의 시작처럼 느껴졌다. 희곡이 무엇인지, 연극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한 해 동안 고군분투했었다. 많은 희곡을 읽었고 많은 연극을 보았다. 한 명의 독자이자 관객으로서, 손꼽기도 어려울 만큼 많은 수의 좋은 작품들을 만났다. 특히 와즈디 무아와드의 작품들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음이 틀림없다(나는 『화염』을 각기 다른 극단의 낭독 공연과 무대 공연으로 한 번씩 봤고, 희곡을 여러 번 반복해 읽었다). 또 한 차례의 무대 공연과 한 번의 낭독 공연에 작가로 참여하면서, 연극이라는 무대예술이 가진 힘과 가치를 몸소 익혔다. 시나 소설은 작가의 머리에서 태어나, 그의 손으로 옮겨지고, 그의 품 안에서 완결된다. 희곡은 그와 다르다. 희곡의 완성은 실연(實演)을 위한 하나의 단계이며, 그것은 연출과 배우, 드라마터그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의 조력을 바탕으로 비로소 몸과 숨을 얻는다. 두 번의 공연 연습에 참여하면서, 나는 배우들의 호흡과 몸짓이 어떤 위력을 가지는지, 연출의 창의적인 시선이 어떻게 무대를 빛나게 하는지, 드라마터그의 예리한 질문이 어떻게 희곡의 골간을 드러내도록 이끌어주는지를 보고 배웠다. 공연으로 다시 만난 나의 희곡은 내가 생각지 못한 에너지를 갖고 있었다. 나를 작가가 아닌 한 명의 관객으로서 감동하고 환호하게끔 만드는, 기분 좋은 낯섦의 생기였다. 처음 신년 에세이 청탁을 받고, ‘반성, 시작, 소망’이라는 주제를 접하고 나서 자연히 지난 2025년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때 나는 지나간 일상에 관해 떠올리기보다는, 내 ‘씀’이 한 해 동안 어떻게 몸을 바꾸어 왔는지를 주로 되짚은 듯하다. 이를테면 이전까지는 거의 시만 쓰고 발표해 왔던 내가, 희곡이라는 장르를 접하고 익히게 되면서 겪은 생각·언어·감각의 변화에 대해서, 또 그것이 내 시의 지형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가에 대해서. ‘반성, 시작, 소망’이라는 키워드 아래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의 초점도 분명 그곳을 향해 있을 것이다. 이 에세이는 지난 1년간 내 변화한 내 ‘씀’에 관한 내밀한 살핌, 일종의 고백에 다름 아닐 것이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기에 앞서, 가장 중요한 기억 하나를 먼저 꺼내 본다. 지난가을 나는 연희동의 단란하고 아름다운 창작촌 작업실

기획 2025.12.01
한없이 축축한 이야기

한없이 축축한 이야기 - 김경욱 『스프레이』 (문장웹진 2011년 5월호 수록) 읽기 김미월(소설가,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2011년 5월 에 게재되었던 김경욱의 단편소설 「스프레이」는 709호에 사는 어느 남성 화자의 이야기이다. 그의 실수에 대한 이야기이자 그의 강박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설은 화자가 실수로 다른 사람의 택배를 집에 가져오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렇다. 처음에 그것은 단순한 실수였다. 그러나 문자 메시지 하나도 퇴고를 거듭해서 보낼 만큼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인 그는 평소의 자신답지 않은 실수에 당혹감과 불쾌감을 느낀다. 그의 손이 곧 땀으로 축축해진다. 화자에게 ‘축축한 손’은 일종의 재앙과도 같다. 축축한 손으로 첫사랑의 손을 잡았다가 차인 바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다. 화자는 실연보다 실수에 더 신경 쓰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첫사랑에게 차였다는 사실보다 앞으로 다시는 그런 불상사를 겪지 않기 위해 타인과 실수로라도 손이 닿는 일을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는 것, 한 번의 실수는 넘어갈 수 있지만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일은 용납할 수 없다는 명제가 더 중요하다. 물론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실수할 때가 있고 그때마다 긴장으로 손이 축축해진다. 그럴 때면 그는 늘 자신에게 고함치던 아버지를 떠올린다. 넌 대체 뭐하는 놈이냐! 축축한 놈……. 왜 손이 축축해졌을까. 그는 원인을 하나씩 분석해본다. 손이 축축해진 것은 실수로 남의 집 택배를 들고 왔기 때문이다. 남의 집 택배를 들고 온 것은 집중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집중력이 떨어진 것은 피로감 때문이다. 피로감은 밤잠을 설쳤기 때문이다. 밤잠을 설친 것은 옆집 고양이의 울음소리 때문이다. 정리하면 옆집 고양이가 울었기 때문에 그의 손이 축축해진 것이다. 실수의 원인을 알았으니 실수를 반복할 확률도 줄어들 것이라며 그는 안도한다. 공교로운 상황들이 겹치면서 택배를 제자리에 돌려놓으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다. 화자는 별수 없이 집으로 다시 가져온 택배를 충동적으로 개봉한다. 묘한 쾌감과 해방감을 느끼는 가운데 잡다한 물건들 속 스프레이가 눈에 띈다. 그의 손을 땀으로 축축하게 만들었던 원흉인 택배의 정체가 알고 보니 땀 냄새 제거용 스프레이였다니. 그는 스프레이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버린다. 그날 이후 화자가 다른 사람의 택배를 집으로 가지고 오는 일이 반복된다. 실수라면 용납할 수 없지만 고의니까 괜찮다. 그에게는 행위 자체의 윤리성보다 그것이 실수인지 고의인지 의도 유무를 따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어느 날 마침내 옆집 여자의 택배를 집으로 가져오기에 이른다. 그는 자신의 밤잠을 설치게 했던 옆집 고양이의 울음소리, 그리고 자신의 항의를 번번이 묵살했던 무례한 옆집 여자에게 타격을 주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상자를 연다. 이 대목이 이 소설의 미드 포인트이다. 상자 안에 든 것은 옆집 고양이의 사체였다.

기획 2025.12.01
텅 비어 있는 ‘나’들의 우주(적 연대)

텅 비어 있는 ‘나’들의 우주(적 연대) 김수이 1. ‘자아의 무화’와 ‘무위의 주체’에 대한 열망 과거로 회귀하는 일은 늘 가능하다. 기억과 글 속에서는 더욱더. 십여 년 전 우리 사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격한 열망을 뿜어내는 말들로 즐겁게 소란했다. 미친 듯이 질주하는 세상에서 피로와 불안에 찌들어 있었지만, 찌들어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나는 아무 생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1) 기획된 광고가 먼저였는지, 대중 사이에서 싹튼 유행어가 먼저였는지는 확실히 기억나지 않지만, 2015년에 한 신용카드사가 내세운 이 문구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일상의 곳곳에서 이 말들은 가볍게, 그러나 강력하게 번져나가면서 아무 행동과 생각을 하지 않는 ‘나’에 대한 개인적이며 사회적인 열망을 공론장에 풀어놓았다. 대중이 열광한 ‘아무것도 안 함’의 의사 표명은 ‘주체성의 반납/포기/해체의 의지’나 ‘무위(無爲)의 주체성’이라고 부를 만한 새로운 시대의 정신적 편향성의 사태를 한껏 부추겼다. 동시에, 경제와 사회 발전을 위협할 수 있는 ‘무위’의 사태를 광고와 유행어라는 공식적이거나 비공식적인 언어 유통 장치를 통해 무마하는 이중의 역할을 했다. 무한 경쟁의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개인이 자신을 착취하는 ‘성과 주체’로 광적으로 변신해 가는 비극을 파헤친 한병철의 명저 『피로사회』(문지, 2012)가 출간되어 널리 읽히던 무렵이었다. 아무것도 안 하는 ‘나’에 대한 사회적 열망의 기원을 찾아 조금 더 회귀해 보자. “난 누구? 여긴 어디?” ‘멘(탈)붕(괴)’의 비명을 대신하는 이 말이 처음 유행한 것은 1990년대였다. 역시 유행어가 먼저였는지 히트곡이 먼저였는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인기 힙합 듀오 ‘듀스’가 부른 「우리는」(1993년 발표)의 후렴에 유사한 문장이 들어 있다.2)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지금 저 멀리서 누가 날 부르고 있어./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이젠 우린 앞을 향해서만 나가겠어.” 정체성과 처소를 상실했으나 “누가 날 부르고 있”기에 “앞을 향해서만 나가겠”다는 외침은, 희망에 차 있으면서도 무모하게 다가온다. 앞으로만 무한히 질주하라는 파시즘적 자본주의의 명령을 따르겠다는 다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이 곡의 제목이 ‘나’가 실종된 세상의 ‘우리는’인 것도 의미심장하다. 이 ‘우리’는 사회의 문제점과 위험한 방향성이 그대로

기획 2025.12.01
화이자와 셀트리온

화이자와 셀트리온 -김사과 혹은 21세기 한국-소설의 한 표정 윤재민 1. 비물질 도시공간 김화진의 소설 「새 이야기」는 오늘날 서울에 홀로 거주하는 도시적 존재의 일상과 욕망에 대한 낭만적인 우화이다. 소설의 일인칭 화자인 진아는 아직은 자리 잡지 못한 웹툰 작가다. 그녀는 어렵게 연재를 따내고 독자들의 실시간 반응을 살피면서 하루하루를 버텨 낸다. 매 순간 극도의 스트레스 속에서도 자신의 일상을 놓치지 않는, 이 고단한 일인가구 여성 창작자의 낙은 소소하다. 성수동이나 불광천같이 서울 시내 한강 북쪽의 정비된 수변 일대를 산책하거나 썸남 천희가 선물한 대파를 잘라 자취방에서 떡볶이나 닭발 같은 매운 음식을 해 먹는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이 거주하는 공간에서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지루하고 불안정한 시간을 견뎌 내는 중이다. 어느 날 진아의 일상에 기이한 환상이 찾아온다. 그것은 갑자기 천희가 선물한 대파가 진아에게 말을 건네면서 시작된다. 대파는 대뜸 썸남 천희가 오래전부터 진아를 짝사랑해 온 청둥오리임을 폭로한다. 대학 시절의 진아를 보고 첫눈에 반한 청둥오리가 어렵사리 인간이 되어 그녀 곁을 맴돌고 있다는 것이다. 진아는 살아남기 위한 지극히 ‘인간적인’ 시절을 통과하는 서울에서의 모든 순간이 맹목적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존재와 함께한 시절이었음을 느끼며 잠시 위로받는다. 그리고 이러한 믿기 어려운 사적 환상을 웹툰의 소재로 사용하며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도시인 진아의 환상 체험 그리고 이를 소재로 한 창작의 욕망은 흥미롭다. 도시에서의 ‘인간적인’ 삶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수많은 익명적 존재의 삶의 양태와 그들에 의해 생성되는 도시의 비물질적(immaterial) 공간 양식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도시공간은 막강한 위정자나 위대한 건축가의 기획을 한참 초과한다. 인간적인 양태의 모든 것을 한곳에 집중시키는 각양각색의 과밀함으로 끓어오르는 공간이다. 그 안으로 수많은 익명적 존재들이 각자의 욕망과 꿈을 안고 모여든다. 그들의 비전은 실현되기 전까지 어느 정도 망상적 성격을 띨 터이다. 하나 실은 바로 그 망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욕망이야말로 그들을 도시에 현전하게 하는 비물질적인 역량이다. 도시는 무차별적으로 이들을 일단 받아들이고 그들의 적합성을 매 순간 시험한다. 모두에게 365일/24시간이 ‘평등하게’ 주어지는 가운데, 각자가 점유하고 있는 위치에서 자신의 삶을 요령껏 살아 내야 한다. 그렇게 극도의 혼잡과 과밀함 속에서 척도 없이 흘러가는 존재들이 그저 자신에게 귀속되는 욕망 혹은 망상과 관련된 공간을 스스로 창안하며 밀집한다. 「새 이야기」는 성수동이나 마포·은평구 일대 수변 지역을 불안하게 점유하며 살아가는 도시적 존재 양태를 비물질적 공간 양식과 결부시켜 포착해 낸다. 척도 없이 증식하는 인간적인 욕망을 담지한 비물질 공간은 20세기 후반기 소설의 도시적 사유와 글쓰기에 첨가된 가장 흥미로운 스타일이

기획 2025.11.01
우리의 고백

우리의 고백 - 진은영 『고백』 (문장웹진 2010년 11월호 수록) 읽기 이영주(시인,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시 쓰기는 재미있다. 인간의 언어란 흥미로운 것이니까. 인간의 언어란 오염과 환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그것을 이상한 쾌락으로 즐기게 해 주는 수수께끼의 세계. 시는 이런 언어의 가장 예민한 촉수이다. 우리에게서 가장 멀리 가고 우리 곁에 가장 가까이에 있으며 우리 내부에 가장 깊이 침투해 있다. 시를 향유하는 사람들은 이런 멀고, 가깝고, 깊은 주름들을 잔뜩 가지고 있는 존재들. 시인들은 주름을 펼쳐 보이고 때로 섬세하게 접기 위해 늘 몸이 열려 있다. 열린 몸이란, 복잡하고 구불구불하고 황폐하고 어지럽고 축축하고 미끌거리고 우수수 돋는‧‧‧ 아무런 규정도 할 수 없는 무정형의 상태. 시인들이 몸을 열고 받아 적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고백 진은영 내 죄를 대신 저지르는 사람들에 대해 내 병을 대신 앓고 있는 병자들에 대해 한없이 맑은 날 나 대신 창문에서 뛰어내리거나 알약 한 통을 모두 삼켜 버린 사람들에 대해 나의 가득한 입맞춤을 대신하는 가을 벤치의 연인들 나 대신 식물원 화단의 빨간 석류를 따고 있는 아이의 불안한 기쁨과, 나 대신 구불구불한 동물내장을 가르는 칼처럼 강, 거리, 언덕을 불어 가는 핏빛 바람에 대해 할 말이 있다 달콤한 술 향기의 전언을 빈틈없이 틀어막는 코르크 마개의 단호함과 확신에 대해 수음처럼 또다시 은밀해지려는 나의 슬픔에 대해 할 말이‧‧‧ 나 대신 이 세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희망하는 이들과 나 대신 어두워지려는 저녁 하늘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검은 묘비들 나 대신 울고 있는 어머니에 대하여 잠깐 딴 이야기를 해야겠다. 시인인데 시인이 아닌 채로 살아야 하는 순간들에 대하여. 내가 생활의 우악스러움을 드러내면 누군가 내게 시인 아니에요? 라고 미묘한 공격성을 띠고 물어볼 때, 그러니까 시인은 삶에 대해 초연해야 하고, 가난도 자랑스러워해야 하며, 슬픔도 웃어넘기는, 여유로운 포즈로 뭐든지 받아안고 가는 존재여야 한다고 암묵적으로 강요할 때, 그러니까 시인이 (과장해서) 영양실조에 걸려도 역시 시인이란 그런 존재지‧‧‧ 하고 동정의 포즈를 보낼 수 있는 존재여야만 할 때(전근대적인 낭만성이 아직도 있긴 하다‧‧‧), 나는 시인 아니에요? 라는 질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깊은 함정에 빠진다. 시인은 원고료나 특강비 등 돈 이야기를 하면 안 되고, 세속적 삶에서 벗어나,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나 일종의 허상에 가까운 삶을 유지해야 한다는 여러 시선에 대하여‧‧‧ 나는 종종 공중누각에 던져져 온몸이 찢겨 가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럼 ‘나’는 어떻게 살지? 시를 쓰지 않는 순간들이 더 많은 ‘나’의 생활과 삶은 어떻게 하지? 그 생활과 삶의 세부들이 모여 하나의 시를 탄생시키는데, 결국 시를 쓰지 않는 순간에도 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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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서포터즈] 문장은 어디에나 있다 - 중국 천진(天津, Tiānjīn) 책기행 문장서포터즈 2기 박소희 세계 어느 곳을 가든 서점이 있다. 서점이 없다면 책 한 권이라도, 책 한 권도 없다면 문장 한 줄이라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어디를 가든 서점이 있다면 꼭 가보는 사람에 속한다. 비록 그곳이 해외일지라도 말이다. 나는 현재 중국 천진에 위치한 남개대학교(南开大学) 어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다.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서다. 지난 몇 년간 배워왔음에도 곳곳의 한자들은 낯설었다. 낯선 언어, 낯선 사람들, 낯선 생활 방식까지. 나를 지칭하는 수많은 이름들은 모두 사라지고 그곳에는 이방인, 외국인이라는 이름만 남아있었다. 천천히 생활에 적응하며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서점이었다. 이곳에도 책방이나 서점이 있을 텐데 어디에 있을까? 어떤 모습일까? 나는 지도를 켜서 서점들을 하나씩 찾았다. 그렇게 소소하게 시작된 이틀간의 천진 책기행을 적어본다. 사진1. 무명서점 무인도 서점과 무명서점 책기행의 시작은 늘 가는 학교 근처부터다. 학교의 서남문으로 가면 작은 책방이 두 곳 있다. 하나는 무인도 서점이며 하나는 무명서점이다. 중국의 몇몇 장소들은 건물 내부에 있어 이곳이 맞나 헷갈리기도 하다. 처음 간 무명서점도 그랬다. 또 두 서점 모두 벨을 누르거나 노크를 해야 들어갈 수 있는 방식이라 처음에는 운영하지 않나 싶기도 했다. 그러니 중국의 작은 책방을 방문할 때면 의심하지 말고 문을 두드리면 된다. 분명 안에서 누군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들어간 서점 내부는 아늑하고, 따뜻해서 마치 가정집에 초대된 손님이 된 것 같았다. 고양이들이 있었고, 곳곳에 책이 있었다. 책방지기는 “여긴 앉아서 차를 마실 수 있으며 이곳에는 오래된 책들만 있다”고 말했다. 역사‧법‧소설 등 여러 종류의 책이 있었으나 주로 경영 도서가 있었고, 중국 문학이나 한국 문학은 비교적 적었다. 비치된 도서 중 비교적 문학의 비율은 적다는 말에 조금 더 구경을 하고 서점을 나섰다. 책을 읽고 싶을 때나 공부를 하고 싶을 때 찾으면 좋을 것 같은 공간이었다. 사진2. 무인도 서점 그리고 바로 건너편에 위치한 무인도 서점으로 향했다. 이곳도 벨을 누르니 책방지기가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 어쩐지 조금 더 환영받는 느낌도 들었다. 이곳은 무명서점과 달리 카페를 함께 운영하는 곳은 아니었다. 다만 이런저런 소품들이 있었고, 무명서점보다 문학, 과학 등 각 분야와 관련한 책이 여러 권 있었다. 한일문학 코너에서는 한강 작가와 김애란 작가 등의 작품과 김혜진 작가의 『딸에 대하여』가 있었다. 다만 한국 문학은 일본 문학에 비해 비교적 수가 적었다. 내가 아쉬움을 표하자 책방지기는 원한다면 직접 서점에서 책을 주문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김애란 작가가 유명하며, 손원평 작가의 『아몬드』란 작품을 추천해 주었다. 한편 무인도 서점은 대출카드를 만들어 책을 빌릴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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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의 길이 무한히 확장되는 순간 - [문학주간 2025] 도움―닿기

[문장서포터즈] 가능성의 길이 무한히 확장되는 순간 - [문학주간 2025] 도움―닿기 문장서포터즈 2기 김이성 1 안녕하세요. 어느덧 마지막 시간이 다가왔네요. 개인적으로는 문장서포터즈 2기 ‘쓰담’으로 활동하며 다양한 문학 콘텐츠를 여러분들께 소개할 수 있어서 정말 기뻤어요. 문학을 매개로 서로 연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게 된 계기였던 것 같아 무척 보람찬 시간이었죠. 아마 이 글을 보고 계실 때쯤이면 새해가 밝아있을 텐데요. 저는 이번 원고를 구상하면서 파일 제목을 ‘세밑에서 새해로’라고 붙여놓았대요. 마지막 원고를 작성하며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고 싶었기 때문이죠. 과연 새해에는 또 어떤 시간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새해에도 역시 모든 게 계획대로 흘러가지는 않겠지만, ‘쓰담’으로 활동하면서 느낀 것처럼 무엇보다 가능성을 믿는 한 해가 된다면 좋겠네요. 최근에 읽은 소설에서는 이런 대사가 나오더라고요. “엄마, 나 소설 안 쓸래. 일하고 사랑하고 그렇게 살래.”1) (엄마는 이렇게 답하죠. “쓸 거면서 또 저런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한참 동안 앞의 문장을 반복해서 읊조렸어요. 일하고 사랑하고, 일하고 사랑하고…… 그렇게 살겠다고 말하는 인물의 태도가 미래의 가능성을 무한히 확장하는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어쩌면 때로는 이렇게 작고 사소한 다짐이 우리를 가능성이라는 희망의 길로 나아가게 만드는 건 아닐까요? 저도 이제 새해라는 가능성을 향해 첫발을 내디뎌보려 하는데요. 그전에 마지막으로 여러분들께 공유하고 싶은 순간이 있어요. 새 출발을 앞두고 있던 제가 문학의 도움을 받아 용기를 얻었던 순간이죠. 새해로 도약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준비 중인 분들에게 세밑에서 전하는 저의 후기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때 그 순간을 전해보아요. 2 지난 2025년 가을, 일상을 지속시키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며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던 저는 문학주간 행사가 열린다는 얘기를 듣고 관련 소식을 찾아보았어요. 몸도 마음도 지쳐 물리적으로 문학과 멀어져 있던 시기였기에 문학의 힘을 빌려 조각난 일상을 수선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홈페이지에서 문학주간과 관련된 글을 찾아 읽고, 저는 단번에 마음을 빼앗겼어요. : 기획의도 우리가 만약 어떤 트랙을 달리고 있다면 그리 머지않은 곳에 구름판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견고하고 상상할 수 있지만 막상 상상한 대로는 닿지 않는, 그곳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은 몹시 중요합니다. 높이 뛰어오르려면 적당한 타이밍을 생각하고 안정적인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그러면 전속력으로 달리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죠. 문학은 쉬이 상상할 수 없는 구름판을 감각하게 해줍니다. 내가 아닌 삶과 삶으로 이루어졌기에 분명 나인 세계 같은 것들이요. 문학은 자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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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치는 문학, 배우는 문학, 자라나는 문학

[문장서포터즈] 가르치는 문학, 배우는 문학, 자라나는 문학 (인터뷰이: 조인혜, 고등학교 국어교사) 문장서포터즈 2기 김성호 문학은 단순히 독자와 작가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독자와 작가가 되기 위한 그 과정, 여로를 봐야 한다. 그 여로엔 다양한 존재가 있지만, 나는 그중 학교 현장에서의 교사와 학생 간의 공간에 주목했다. 2025년 10월 23일, 합정역의 한 카페에서 조인혜 선생님을 만났다. 9년 전 모교의 국어 교사였던 조인혜 선생님은 인터뷰 내내 진지하고 활기차게, 자신의 독서론과 더불어 서포터즈 질문에 답해 주었다.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 안녕하세요.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조인혜입니다. 배우는 경험을 좋아합니다. (사진1. 조인혜 선생님의 오브제인 뉴욕도서관 에코백) Q. 평소에 문학을 즐겨 접하시나요? 특히 즐기시는 장르나 분야가 있다면요? - 음, 소설을 제일 많이 읽어요. 제일 좋아하는 장르이고요. 책 대화 모임을 4년째 하고 있기도 합니다. 잡지 독서평설과 출판사 사계절 콘텐츠에서 청소년 소설을 읽고 소개하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문학을 접하고 읽고 소개하고 가르친다는 건, 일적으로도 내가 좋아하는 일이에요. 물론 시도 좋아해요(웃음). 쉽지 않지만 시창작 모임을 동료 교사들과 함께 하고 있는데,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치고 시 창작 활동을 같이 하기 전에 먼저 저 스스로 배우고 체득하려고 그래요. 그래서 소소하게 문집도 내고요. 시가 어렵지만 즐길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희곡은 상대적으로 적게 읽는 편이에요. 최근에는 SF 소설을 많이 읽었고요. 딱히 가리는 건 없고, 그때마다 빠지는 장르나 분야가 있어요. 무엇보다 학생들과 함께 읽으면 아무래도 좋은 작품을 더 좋아합니다. Q. 최근에 그런 작품이 있었는지요? - 박지리 작가의 작품입니다. 다만 어두워서 아이들에게 쉽게 풀어서 얘기하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최진영, 김애란 작가의 작품도 좋았어요. Q. 국어교사로서 문학작품을 접할 때와 개인 독자로서 접할 때의 다른 점이 있나요? - 정체성을 나누고 있진 않습니다. 불쑥불쑥 나와요. 그런 게 혼재되어 있죠. Q. 수업 시간에 학생들과 어떻게 문학적인 활동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 작품을 다 읽고 대화하게 하려고 합니다. 어떤 활동을 하든 반드시 하도록 했던 게 있는데, 그게 바로 ‘책 대화’와 ‘글쓰기’입니다. 같은 소설을 원하는 아이들끼리 묶은 다음, 질문하고 대화하는 활동을 해요. 그 이후 개인 서평을 쓰게 하고요. 사회적 독서인데(정의가 모호하긴 하지만 같이 공유하면서 읽기가 필요합니다. 먼저 선생님들과 경험해보니 그렇다는 깨달음을 얻었어요), 그게 참 중요하다고 여러 번 느껴요. 그런 활동을 하고 나면, 혼자 개인적으로 읽었을 때와 사회적 독서 활동 후의 감상의 결과 차이가 커요. 일단 혼자 읽을 때 몰랐던 점들을 알게 돼서 좋은 점이 있고, 내가 잘 몰랐던 같은 반 아이가 저런 생각을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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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소리가 울리는 교실

[문장서포터즈] 푸른 소리가 울리는 교실 -안양예술고등학교 문예창작과 방문기 문장서포터즈 2기 카페라떼 요즘 청소년들 사이에서 문학에 대한 관심이 많아요. 하루에도 수십 편씩 올라오는 청소년 작품, 백일장에 참여하는 열정적인 친구들, 그중에는 문학을 진로로 삼고 싶은 학생들도 있죠. 그렇다면 이 친구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배우며 성장하고 있을까요? 이번 취재에서는 안양예술고등학교 문예창작과(이하 안양예고 문창과)를 직접 찾아가 그 현장을 들여다봤습니다. 국내 예술고등학교 중 문예창작과가 있는 학교는 단 두 곳뿐이에요. 고양예술고등학교와 안양예술고등학교죠. 안양예고는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고이고, 연극영화과·음악과·미술과·무용과·문예창작과 총 다섯 학과가 있어요. 학교가 자리한 언덕은 ‘한라산보다 가파르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유명합니다. 사진1,2. 안양예술고등학교 본건물과 문예창작학과 실기실 문예창작과는 한 학년당 40명으로 구성돼 있어요(총 3반). 재작년부터 지원자 수가 늘기 시작해 올해 경쟁률이 2.98 대 1로 점점 문학에 관심을 갖는 학생들이 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최근 몇 년 사이, 안양예고 문창과 학생들이 다양한 청소년 문학상에서 이름을 올리며 학교의 문학적 저력이 조금씩 알려지고 있어요. 그 덕분에 문예창작과에 관심을 두는 학생들도 점점 늘고 있습니다. 사진3. 올해 안양예고 학생들의 수상을 축하하는 현수막 문예창작학과라는 특성 덕분에 글쓰기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모여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곳이죠. 시 창작 실기, 소설 창작, 문학 이론 등 전공 수업 외에도 문학 감상이나 독서 토론 수업을 통해 사고력을 넓혀 갑니다. 작가 선생님 특강과 합평 수업이 활발히 이어지는, ‘문학의 공기’가 가득한 교실이에요. 예고의 장점인 학과 전시회, 안양예고 문창과는 ‘눈시울전’이라는 학생들의 작품 전시회를 매년 5월에 진행하고 있습니다. 주로 2학년생들이 참여하며 가끔 3학년 학생들도 조금씩 참여하고 있습니다. 주로 안양아트센터 갤러리 미담에서 전체 전시 후, 서울 교보문고에서 지원하는 학생들 중 일부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어요. 이런 공간에서 매일같이 글을 쓰는 학생들은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을까요? 그 이야기를 직접 들어봤습니다. 사진4,5. 안양예고 눈시울전 작품 사진(이현교, 최아원 학생 작품) 2학년 학생들의 이야기, 교실에서 들려오는 연필 소리 2학년 이현교(시 전공), 최아원(소설 전공) 학생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Q: 문창과에 진학하게 된 계기가 무엇일까요? 처음 마음을 먹게 된 이유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이현교: 중학교 3학년 때, 학교 행사로 시를 써서 우수 작품으로 선정 받은 적이 있었는데요, 그때 경험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 같습니다. 최아원: 어렸을 때부터 책을 많이 읽어 왔는데요, 초등학교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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