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재미나요
시
문장의 시선-
시 전영관 - 생일
생일 전영관 아버지는 청양 출신 삼류 투수였다 쓰리볼 카운트에서 직구로 강판을 면했다 지명타자는 종신직이더라도 허탈함은 피할 수 없었다 한 번 더 던졌는데 볼이었다 볼넷이 된 아버지는 1남 4녀라는 성적을 만회하느라 손가락 물집이 그치지 않았다 스트라이크는 아들 볼은 딸이라는 가부장적 편견도 만담(漫談)이 되었다 투수는 자신이 던진 공을 자식처럼 여겨야 한다는 스포츠 정신도 포함되었다 던진 투수보다 받아낸 포수가 죄인이 되는 시절이었다 빈곤, 실직 같은 백네임 붙인 강타자들이 아버지를 괴롭혔다 선수는 관중이 자신만 보는 것 같아서 자신을 잃고 그들은 자신의 맥주와 치킨을 즐길 뿐이다 홈런볼을 받으면 행운이 온다고 하지만 호되게 맞아 멀리 날려간 공인 것이다 개중 불행한 주인공을 받은 셈인데 사람들은 부러워한다 현자는 선수에게 돌려준다 불행은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것 같아도 그럴 만한 곳에 찾아오는 불청객이었다 수비수 전체를 관장해야 하는 어머니 슬픈 포수, 어머니와 처음 만난 날이다
작성일 2024-06-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1 댓글수 0 조회수 458상세보기 -
시 전영관 - 백로 무렵
백로 무렵 전영관 카페 화단의 칸나가 뭉그러지고 코스모스가 피었으니 꽃이 꽃을 지우는구나 삼복 지나 완경(完經)을 겪은 칸나는 검붉었다 걸그룹처럼 허리를 흔드는 코스모스들을 힐끗거렸다 꽃은 천년 고목에서 피어도 어린 요괴다 철지난 능소화가 망하고 컴백한 가수인 양 어린 척했다 천수국이 교복 차림의 여고생으로 모여 있었다 교실은 크고 긴 플라스틱 화분이다 골목 끝 공원으로 가을 마중 나갔다 손사래치고 버둥거려도 올 것은 오더라 검버섯 피어서 눌은밥 같은 노인들이 앉아 있었다 어머니 생각에 마음도 눌은밥처럼 흥건해졌다 노인정 앞에 푸르게 힘찬 잣나무를 심어 드리고 싶었다 청설모도 재롱 피울 것이다 목련 만발했던 봄날에 “내가 몇 번 못 본다고 쟤가 저렇게 애쓰나 봐” 하는 소리를 들었다 주머니에 손 넣는 습성도 줄이기로 했다 자폐를 느끼기 때문이다 올가을엔 갈색 재킷이 어떨까 하며 들춰 보니 태반이 검은색이고 빨강이 몇몇이었다 감정의 극단을 왕복했던 것이다 오늘 처음 가을 옷을 골랐는지 지나는 사람에게서 나프탈렌 냄새가 났다 그이의 외출이 즐겁기를 고민 끝에 고른 옷일 테니 만족했기를 바랐다 그 집 드레스 룸에서는 옷이 옷을 지웠겠다
작성일 2024-06-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468상세보기 -
시 박형준 - 세상이 칠판이 될 때
세상이 칠판이 될 때 박형준 비 오는 밤에 고가도로 난간에 기대어 차들이 남기는 불빛을 바라본다 도로의 빗물에 반사되는 모습을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나는 차들이 달리며 빗물에 휘갈겨 쓴 불빛들을 읽으려고 하지만 도로에 흐르는 빗물은 빠른 속도로 불빛들을 싣고 고가도로 아래로 쏟아진다 빗물받이 홈통 주변에 흙더미가 가득하고 간신히 피어난 풀꽃 하나가 그 아래로 휩쓸려 들어가지 않으려고 버티고 또 버틴다 나는 비 내리는 고가도로에 올라서서 가장 낮은 자리에 버려진 칠판을 떠올린다 번져서 하나도 읽지 못하더라도 빗물에 쓰여진 글자들을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차들이 남긴 불빛들과 함께 저 아래 빗물받이 홈통으로 떨어질지라도 꿋꿋하게 버티는 풀꽃의 결의를 생각한다 고가도로 밑 물이 불어나는 강물을 거슬러 상류로 올라가는 물고기의 지느러미가 강물에 팔딱이며 쓰고 있을 글자들을 마음 어딘가에 품고서 나는 비 내리는 고가도로(생략해주세요) 난간에 기대어 서 있다
작성일 2024-06-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482상세보기 -
시 박형준 - 페이지
페이지 박형준 다 튿어진 책 한 권이 툇마루에 펼쳐진 채 놓여 있다 책주인은 어디까지 페이지를 넘기다가 자리를 떠났을까, 백 년이 흘러도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아 바람이 빛바랜 종이에 스며들 때 페이지는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하다 그러다 거세고 거침없는 돌풍, 순식간에 툇마루를 쓸어버리고 잊힌 말처럼 춤추는 먼지를 일으킨다 페이지들이 혼란에 사로잡혀 펄럭이다가 그중 하나가 떠다니는 법을 배우듯이 서서히 공중으로 떠오른다 페이지는 잠시 툇마루를 빙글빙글 돌다가 다시 잔잔해진 바람을 타고 천천히 뜰로 날아간다 누군가의 발밑에 떨어질 편지, 알 수 없는 여행을 떠난다 바람의 힘에 의해 책에서 튿어져 나왔지만 이제 바람과 맞서며 창공으로 떠올라야 한다 그러나 페이지는 겨우 뜰의 가장자리에 닿을 듯하고 거기엔 한 무더기 재가 쌓여 있다 글자들의 무덤에 허공으로 조금 날아갔던 새가 다시 돌아와 앉아 있다
작성일 2024-06-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381상세보기 -
시 백은선 - 침묵의 書서
침묵의 書서 백은선 태어나기 전부터 줄곧 봐왔던 것. 나의 출처. 어둠에 몸을 담그고 비좁게 나는 떨고 있었죠. 검은 엄마가 검은 쌀을 검은 손으로 씻어 검은 밥을 지어 주었어요. 밤 냄새가 났고 피맛이 났어요. 내 살을 씹는 맛.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들은 상상할 수도 없어, 온통 어둠뿐인 불속에서 나 흐르는 꿈을 꾸었죠. 세계의 모든 검정이 흐느끼며 반짝이는. 거울 심장 가위 모자가 한데 어울려 춤을 추면 노래가 시작되고 나는 웃고 또 웃느라 시간이 멈춘 줄도 몰랐죠. 엄마와 옷장 속에 누워 잠들 때마다 심장을 움켜쥐던 검정의 귓속말을 어떻게 내가 잊겠어. 깨어나 그림자를 꺼내 입을 때, 앞도 뒤도 없는 양면 종이 같은 이 납작한 어둠. 매일이 같아서 새로워지는 세계에 대해 어떻게 증언할 수 있겠어. 비스듬히 쌓인 돌탑의 끈질긴 균형을 누가 다 알 수 있나요. 엄마, 엄마 하면 생겨나는 흙냄새 밤이 타는 하늘의 냄새 속에 있었던 사람만 아는 질서. 비밀의 무게에 복무한다는 게 얼마나 무거운지. 두 손이 빨갛게 부풀어 펑 터질 것 같은 단단한 침묵. 결국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건 첫 문장인데, 아무도 기억하지 못해서 발목까지 환해지는 간지러움. 언젠가 돌아갈 거라고 믿어서 삶이 전부 기다림이었다고 하면 믿을래요? 말도 안 되는 절망을 내내 노려보고 있었다고. 그걸 다 보느라 평생이 지나갔다고. 지금도 거느리고 다녀요. 등 뒤에 매달린 그림자. 시간의 입구이자 영원의 출구. 가리키면 투명하게 사라지는. 난 그걸 뭐라고 부를까 골몰하다가 문득 검은 손을 빨며 놀던 밤이 생각나면 사무치게 그리운 게 있어요. 나조차 믿을 수 없는 마음, 그 지옥이 사람을 내내 세워 놓을 수 있다는 게 믿겨요? 엄마?
작성일 2024-06-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367상세보기 -
시 백은선 - 말 없는 애인
말 없는 애인 백은선 창틀에 앉은 새 몰랐던 것을 사랑하기에 사위가 어둠으로 뒤덮이고 물은 아래부터 솟아오른다 찌극찌극 우는 작고 노란 새 숲은 너무나 먼데 종지에 물과 쌀을 담아 베란다로 나가자 날아갔다 이젠 아무도 필요치 않은 것을 둘 자리가 필요해서 광화문 언덕을 지나 카페에 들어가면 잠깐 숲을 오해하기 좋았다 그게 자꾸만 나를 이끌었고 언젠가는 모든 날이 비로 채워지리라 그럼 새들은 어디에서 안식을 찾을까 벽들이 벽의 단호함으로 세계를 구성하기 시작한 뒤부터 나는 점점 많은 말을 하게 되었다 이기려고 무엇을? 이름이 있었다 불리기 전부터 노래가 시작된 곳이 그 작은 몸속 몇 미리 심장이라는 게 너무 이상해서 나는 눈물을 흘렸다 한쪽 눈은 달콤한 눈물 한쪽 눈은 검은 눈물이 흐른다면 좋을 텐데 계절 속에서 부풀어 오르는 차가운 손들이 일시에 흔들릴 때 말을 잃고 기절한다면 어떨까 이름 모를 소녀, 너는 잠깐 새가 되어 꿈을 꾸었다 초록초록초록 하고 섬을 비행하는 꿈 나는 집에 돌아오면 곧장 베란다로 가 물과 쌀을 살피는 게 일과가 되었다 가끔 콕콕 찍힌 자국이 있을 때마다 세상은 거울처럼 1초씩 빛났다
작성일 2024-06-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1 댓글수 0 조회수 371상세보기 -
시 조온윤 - 사람책
사람책 조온윤 이 책을 보면 내가 생각날 거야 책을 선물해 준 사람이 말했다 그는 두꺼운 양장본을 닮지는 않았지만 이 책을 볼 때면 생각나는 사람이 됐다 책을 펼칠 때마다 그 사람 속마음을 여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함부로 귀퉁이를 접지도 밑줄을 긋지도 않았다 새 책같이 그 사람을 아꼈다 아껴 읽은 이 책을 전부 읽고 난 뒤에 알았다 그가 내게 준 건 두꺼운 책의 물성이 아니라 종이에 쓴 가볍고 단순한 이야기였구나 흐르는 문장과 멈추는 행간, 단순한 반복이 포개진 세계가 선물이었구나 그래, 이 책을 보면 네가 생각날 거야 책을 선물해 준 사람에게 말했다 그 사람은 그 대답을 듣지 못하고 떠났지만 두꺼운 책 속 어딘가에 투명한 문장 숨 쉬는 쉼표가 되어 내게 말을 걸고 있을 거였다
작성일 2024-06-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1 댓글수 0 조회수 393상세보기 -
시 조온윤 - 눈의 여행
눈의 여행 조온윤 커다랗고 광활한 너의 정면 가까이 마주한 네 정면은 펼쳐진 초원 같아 내 시선은 양떼처럼 그 위를 뛰어가 코의 산으로부터 이마의 능선까지 뺨의 비탈에서 미끄러져 턱 끝 낭떠러지로 귀의 동굴을 지나 어둑한 심부로 향하는 눈의 여행은 유구하고 눈의 여행은 지난하지 그 속에서 세상의 모든 미움을 끌어안고 잠든 뱀처럼 웅크려 있는 네가 보여 그 모든 거침을 견디고 있는 너의 차고 미끈한 민낯이 보여 나는 그저 바라봐 손댈 수 없이 벌벌 떠는 너의 추위와 외로움 벌벌 떠는 너의 분노를 관망할 뿐 눈의 여행은 무력하고 눈의 여행은 초연하지 가까이 마주한 네 고통은 아득한 초원 같아 내 시선은 길 잃은 양떼가 되어 그 위를 방황하다가 흰 눈썹을 펜스처럼 두른 안전한 밤으로 돌아와 그때에야 눈 속에 담은 것들을 쏟아내지 양치기의 가위질에 양털이 우수수 떨어지듯이 삼킨 눈물 쏟아내듯이 손댈 수 없는 너를 위해 너무 커다랗고 광활한 너를 위해
작성일 2024-06-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403상세보기 -
시 강지수 - 공배
공배 강지수 한 다큐멘터리의 보조 취재원으로 일했을 때였다. 다큐멘터리 주제는 노인 고독사였다. 피디를 꿈꾸던 나는 버스 요금도 충당할 수 없는 활동비를 받고 그해 여름 동안 바쁘게 돌아다녔다. 쪽방이나 낡은 빌라촌을 기웃거리며 이야기를 주워 담는 게 나의 일이었다. 빈방에서는 식은 라면 냄새가 났고 비어 있지 않은 방에서는 뜨거운 라면 냄새가 났다. 메모를 하고 녹화 버튼을 누를 때마다 나는 이 고된 작업이 나의 미래에 어떤 식으로든 보상을 해주리라고, 이야기들이 모이면 더 큰 이야기가 되는 법이라고, 연신 땀에 전 티셔츠를 펄럭이며 생각하곤 했다. 그날은 며칠째 이어지던 무더위가 절정에 이른 날이었다. 나는 다음 취재지로 이동하고 있었다. 동네를 가로지르는 하천 옆의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우연히 다리 아래 그늘에서 바둑 두는 노인들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낡은 가정용 식탁을 사이에 두고 옥색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척 보기에도 몇 알 안 되는 바둑알들을 주먹 사이로 굴리며 아무 말 없이 바둑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멈춰 섰다. 몇 가지 행동만을 느릿느릿 반복하는 근대 자동인형 같은 그들의 모습은, 잿빛 다리마저 순백으로 만드는 여름 햇볕과 대비를 이루어 나의 눈길을 끌었다. 혹은 그늘이 시원해서, 아니면 그저 이 모든 게 지겨워서, 나는 그들이 기개라고는 전혀 없는 사뿐한 손짓으로 바둑알을 내려놓는 장면을 줄곧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해가 질 때까지 노인들은 내가 누구인지, 왜 자신들이 바둑 두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는지 묻지 않았다. 다음날 취재 약속을 취소하고 그 다리 밑을 다시 찾았을 때, 역시나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조악한 나무 스툴 하나가 식탁 옆에 놓여 있었을 뿐이다. 도르륵 도르륵. 이미 몇 수 놓인 바둑판과 졸음을 참고 있는 듯한 노인들의 따분한 얼굴과 손바닥 안에서 부딪는 바둑알 소리. 바둑을 배운 적 없는 나는 누가 이기고 누가 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흰색 옆에 검은색 또는 흰색 옆에 흰색, 검은색 옆에 흰색 또는 검은색 옆에 검은색이 놓이는 일련의 결정과 단순한 조합이 마음에 들었다. 그건 내 내면에 뿌리 없는 안정감을 심어 주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노인들이 비닐봉지에 한가득 담아와 간간이 부숴 먹는 땅콩들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들은 나를 막거나 노려보지 않았다. 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고 가는 사람들, 그중에서도 아주 느리게 오고 가는 사람들, 그중에서도 나처럼 가까이 다가와 우둔하고 지독하게 흐르는 시간에 잠깐 발을 담가 보려는 사람을 전에도 겪어 본 적 있다는 듯 관대했다. 나는 매일 다리 아래로 기어드는 행동을 멈출 수 없었다. 피디와 작가에게서 걸려 오는 전화들을 무시했다. 수첩과 카메라도 더는 들고 나오지 않았다. 가족이나 친구와 연을 끊고 방에서 홀로 죽은 이들의 흔적을 좇는 것보다는 항상 나보다 일찍 와서 바싹 마른 땅콩이나 까먹으며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바둑을 두는 이 노인들을 지켜보는 게 더 중요한 일로 여겨졌
작성일 2024-06-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1 댓글수 0 조회수 688상세보기 -
시 강지수 - 조우
조우 강지수 앉은키가 작은 사람. 그는 돌무덤에 기대어 앉아 있다. 멀리서 보면 그도 하나의 돌멩이 같다. 뒷산 언저리에서 비에 젖은 나무 냄새가 넘어온다. 앉은키가 작은 사람. 그는 지난 밤 꿈을 떠올리고 있다. 꿈에서 그는 영원히 죽지 않는 까마귀를 보았다. 까마귀는 나무의 정수리에 앉아 있다가 바람이 불어오면 날숨이 물길을 뚫고 흐르듯 바람을 타고 하늘을 날았다. 그렇게 마을을, 도시를, 나라를, 대륙을 넘어 털 색깔이 다른 까마귀와 날갯죽지를 맞닿았다. 앉은키가 작은 사람. 그는 생경한 촉감을 느끼며 몸통을 부르르 떨었다. 지리학을 전공한 금발의 까마귀는 그가 나고 자란 고장의 역사를 들려주었다. 전통 의복과 제철 요리를 소개해 주었고, 어설프게 브이를 그리는 그를 카메라로 찍어 주었고, 그가 떠나갈 때 손바닥과 손바닥을 맞닿았다. 앉은키가 작은 사람. 그는 꿈에서도 자기가 우는 것을 알았다. 돌무덤 맨 꼭대기에 있는 돌멩이는 누가 올려 둔 것이지. 어떤 소원이 그 안에 담겨 있지. 이별을 원치 않는 사람의 수와 이별을 원하는 사람의 수가 같았다. 앉은키가 작은 사람. 그는 등을 뒤로 젖혔고, 앉은키가 작은 사람. 돌무덤이 알알이 스러졌다.
작성일 2024-06-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464상세보기 -
시 김은주 - 도서관에서 빌려온
도서관에서 빌려온 김은주 한 권의 책 속에 살았다 귀퉁이에 접힌 삼각형들을 폴짝폴짝 오가며 누군가의 지문이 나이테처럼 선명한 갈피 갈피 가름끈을 타고 오르내리면서 올록볼록 이어진 밑줄을 따라나설 때 나를 대신할 등장인물은 누구인가 내가 축낼 그늘은 어느 페이지에 담겼나 숨 한 번 걸음 한 번 해찰하는 햇빛 무리를 불러들이며 숨 한 번 수만 번 책장 사이를 쉴 새 없이 걷고 걷고 또 걷는 것이다
작성일 2024-06-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2 댓글수 0 조회수 312상세보기 -
시 김은주 - 에버6
에버6* 김은주 로봇이 지휘하는 음악회에 갔다 지금 흔들리는 건 팔이 아니야 기억을 쥐고 흔들면서 너도 인간이냐고 묻는다 앞좌석의 관람객은 하임리히 시행 환자처럼 허리를 꺾으며 구동되고 지휘봉 끝에서 풀려나오는 박수소리 잘 조율된 공기와 서먹하게 군다 인간에게 더는 깍듯할 수 없다는 듯이 공연장 밖에는 거동이 불편해 보이는 사물들 마지막 인간이 기증한 구름처럼 굳어서 유리창에 비친 몸통만으로 신뢰를 담보한다 초면의 비둘기가 잘 세공한 공중 계단을 오선지로 바꾸며 웅장해질 때 햇빛을 부러 굶기며 주억거리는 얼굴 한 점 너는 인간이니? * 한국 최초 로봇 지휘자. 2023년 국립국악관현악단의 무대를 통해 데뷔했다.
작성일 2024-06-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1 댓글수 0 조회수 396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