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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배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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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배달 천운영 - 손경숙 배우의 목소리로 듣는 김숨 소설가의 「벌」
봄을 세 번 나는 동안 벌통들에서 차례로 벌들이 부활했다. 벌들로 들끓는 벌통들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죽은 아버지가 되살아난 것만 같은 흥분에 몸을 떨었다. 아카시아꽃이 지고 온갖 여름 꽃들이 피어날 때, 마씨와 나는 벌통과 함께 산에 들었다. 마씨는 벌들이 날아가지 못하게 벌통을 흰 모기장으로 감싸고 지게에 져 날랐다. 마씨의 뒤를 따르는 내 손에는 해숙이 싸준 김밥 도시락이 들려 있었다. 그날따라 너무 깊이 드는 것 같아 주저하는 내게 그가 재촉했다. “꽃밭을 찾아가는 거야. 조금 더 가면 꽃밭이 있지.” 정말로 조금 더 가자 꽃이 지천이었다. 토끼풀, 개망초꽃, 어성초꽃, 싸리나무꽃··· 홍자색 꽃이 흐드러지게 핀 싸리 나무 아래에 그는 벌통을 부렸다. 벌통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마씨와 내가 알몸으로 나뒹구는 동안 벌들은 꿀을 따 날랐다. 고슴도치 같은 그의 머리 위로 벌들이 날아다니는 것을 나는 꿈을 꾸듯 바라보았다. “당신 아내가 그러데, 나비를 기르면 좋을 거라고. 나는 나비가 벌보다 무서워. 우리 할머니가 나비 때문에 눈이 멀었거든. 도라지밭을 날아다니던 흰나비의 날개에서 떨어진 인분이 눈에 들어가서···” “해숙은 착한 여자야.” “착한 여자는 세상에 저 벌들만큼 널렸어!” “널렸지만 착한 여자와 사는 남자는 드물지.” 여름내 마씨와 내가 벌통을 들고 산속을 헤매는 동안 해숙은 아들과 집을 보았다. 우리가 돌아오면 그녀는 서둘러 저녁 밥상을 차려내왔다. 먹성이 좋은 마씨를 위해 그녀는 돼지고기와 김치를 잔뜩 넣고 찌개를 끓였다. 그녀에게 나는 산속에 꽃밭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벌과 나비가 어울려 날아다니는 꽃밭이. “우리도 데려가면 안 돼?” 그녀는 꽃밭을 보고 싶어 했다. “꽃밭까지 가는 길이 험해서 안 돼. 가는 길에 무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무덤들 중에는 내 아버지 무덤도 있지.” “근데 읍내 정육점 여자가 내게 묻더라.” “뭘?” “사내 하나에 계집 둘이 어떻게 붙어사느냐고.” “미친년!” “정말 미친년이야. 내가 살코기하고 비계하고 반반씩 섞어 달라고 했는데, 순 비계로만 줬 지 뭐야.” 눈치챘던 걸까. 아니면 벌과 나비가 어울려 날아다니는 꽃밭을 보고 싶었던 걸까. 그날도 마씨와 나는 벌통과 함께 산에 들었다. 해숙이 우리를 몰래 뒤따르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나는 모르는 척했다. 해숙은 산벚나무 뒤에 숨어 마씨와 내가 토끼풀밭 위에서 알몸으로 나뒹구는 것을 지켜보았다. 날이 어두워져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들은 마당에서 혼자 울고 있었다. 부엌 도마 위에는 해숙이 정육점에서 끊어온 돼지고기가
작성일 2024-06-27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141상세보기 -
문장배달 이승우 - 최윤, 『사막아, 사슴아』를 배달하며작성일 2023-12-2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318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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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배달 이승우 - 방현석, 『범도』를 배달하며작성일 2023-12-07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340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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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배달 이승우 - 서영처, 『가만히 듣는다』를 배달하며작성일 2023-11-23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227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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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배달 이승우 - 구병모, 「노커」를 배달하며작성일 2023-11-09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015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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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배달 이승우 - 김은, 「스매싱의 완성」을 배달하며작성일 2023-10-26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097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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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배달 이승우 - 이경은, 『카프카와 함께 빵을 먹는 오후』를 배달하며작성일 2023-10-12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1 댓글수 0 조회수 920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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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배달 이승우 - 백수린, 『눈부신 안부』를 배달하며작성일 2023-09-28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290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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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배달 이승우 - 민병일, 『바오밥나무와 달팽이』를 배달하며작성일 2023-09-14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171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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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배달 이승우 - 이광호, 『너는 우연한 고양이』를 배달하며
너는 없는 것이 많다. 한쪽 귀가 조금 잘려나갔고, 생년월일과 부모가 없으며, 이름도 없었다. 너의 ‘없음’ 중의 일부는 가령 이름처럼 채워질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채워지지 않는 결핍도 많다. 네가 그 결핍을 의식하는지는 알 수 없다. 우발적으로 너와 마주했을 때부터 너의 결핍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 너의 결핍은 중요한 상징이 된다. (…) 조금 잘려나간 너의 오른쪽 귀는 결핍에 해당하지만, 그런 귀를 가진 고양이는 거의 없기 때문에 그것은 너의 ‘있음’이다. 조금 잘려나간 너의 귀가 잘 보이지 않을 때 오히려 너의 고유한 아름다움은 감추어진다. 너의 ‘없음’들이 너의 ‘있음’이다. (이광호, 『너는 우연한 고양이』, 문학과지성사, 2019, 57-58쪽)
작성일 2023-08-3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1043상세보기 -
문장배달 이승우 - 한수영, 「파이」를 배달하며
미현은 『퀴즈백과』와 『일반상식대사전』을 반복해 보았다. 깊이 생각할 것 없이 단답형의 답을 외우고 확인하는 일에 기쁨을 느꼈다. 기다리는 일이 생겼다는 사실이 미현을 달라지게 했다. 식욕이 살아났고, 거실을 난장판으로 만들며 노는 아이들이 사랑스러워 울컥했다. 저녁 무렵 부엌 창가에서 서성거리는 일이 사라졌고, 남편의 벨 소리에 현관문을 활짝 열었다. 프라이팬을 꺼내다 그 뒤쪽에 감춰둔 술병을 발견했지만 조금도 마음이 가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윗집 여자는 눈에 띄게 달라진 미현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한수영, 「파이」, 『바질 정원에서』, 도서출판 강, 2023, 75쪽)
작성일 2023-08-17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203상세보기 -
문장배달 이승우 - 구자명, 「오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을 배달하며
나는 진눈깨비가 좋다. 눈도 비도 아닌 그것. 눈이 될 수도 비가 될 수도 있는 그것. 그때그때 대기의 상태를 봐서 자기 정체성을 결정하는 그것. 그 선택이 있을 때까지 한껏 머뭇거리며 기다리는 그것. 그래서 그 기다림 안에서 자기 시간을 숙성시켜 가는 그것. (구자명, 「오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건달바 지대평』, 나무와 숲, 2023, 259쪽)
작성일 2023-08-03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056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