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틴10대 감성쟁이
감상&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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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공지]월 장원 선정은 [공지사항] 게시판에서 안내됩니다.작성일 2024-06-05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52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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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공지]'쓰면서 뒹글' 운영 규정(2024.01.02)작성일 2023-10-23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078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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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공지]'감상&비평'에는 형식을 갖춘 비평문만 올려야하나요?작성일 2023-07-25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742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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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비평 잿빛 도시 속으로 드리운 인간의 욕망이라는 그림자 - 희곡 <카포네 트릴로지>를 읽고
제이미 윌크스의 희곡 <카포네 트릴로지>는 고전적인 느와르 장르의 전통을 완벽하게 이어간다. 등장인물들의 유형은 어딘가 낯이 익고 그들의 이어질 행동은 쉽사리 예측이 가능하다. 느와르라는 커다란 틀 안에서 코미디, 서스펜스, 하드보일드라는 세 가지 장르가 요구하는 바를 충족시키며 하나의 장르가 지닌 고유적 특징의 재현을 선보인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 작품은 단지 클리셰의 반복적 양산에 그치지는 않는다. 절묘하게 배치된 이미지들은 작품의 배경인 20세기 초중반 시카고의 어둡고 냉혹한 이미지를 촉발하며 대사 속의 함축된 의미는 배신과 복수, 관음과 비밀, 사랑과 죽음이라는 무거운 관념의 장으로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카포네 트릴로지>는 로키, 루시퍼, 빈디치의 총 세 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세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은 각각 다르나 공간적 배경은 모두 시카고의 렉싱턴 호텔 661호로 동일하다. 첫 번째 이야기인 코미디 장르의 로키는 쇼걸 롤라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결혼을 앞둔 롤라는 어느 날 꿈에서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을 듣게 되는데, 이때부터 롤라의 현실과 거짓의 경계는 불분명해진다. 그 과정에서 롤라는 의도치 않은 살인을 몇 건 저지르고, 후반부 시점에 극의 흐름은 다시 처음의 장면으로 되돌아와 앞으로 이 이야기가 끊임없이 반복될 것이라는 암시를 건넨다. 두 번째 이야기인 서스펜스 장르의 루시퍼는 알 카포네 조직의 2인자인 닉과 그의 아내 말린, 말린의 사촌이자 카포네 조직과 경쟁 관계에 있는 또 다른 마피아 조직의 우두머리인 조조의 아들인 경찰 마이클의 이야기를 다룬다. 닉은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조조가 계속해서 위협을 가해오자 결국 조조가 타고 있던 차를 폭파해 버리는데, 사실 이 차에는 조조뿐만이 아닌 마이클의 아이들까지도 타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마이클은 결국 닉과 몸싸움을 벌이고, 끝내 둘은 함께 창밖으로 추락한다. 마지막 이야기인 하드보일드 장르의 빈디치는 제목 그대로 빈디치라는 이름을 지닌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빈디치는 과거에 경찰이었지만 지금은 자신의 아내 그레이스를 죽게 만든 경찰청장 두스에게 복수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 중이다. 복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두스의 딸인 루시가 어째서인지 빈디치를 도와주겠다는 의사를 표하고, 둘은 두스에게 고문을 가하는 데에 성공한다. 하지만 빈디치는 두스의 말을 통해 그레이스의 죽음에 루시가 얽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곤 분노에 차 루시를 살해하고, 마지막엔 자신 역시 독을 마시고 죽음을 맞이한다.<카포네 트릴로지>의 여타 다른 느와르 작품들과 가장 대비되는 지점은 ‘트릴로지’, 즉 삼부작이라는 이야기 구성 방식에 있다. 세 이야기는 각각 독립되어 있으며 어느 한 편을 보지 않는다고 해도 내용 이해에 전혀 문제가 생기지 않지만, 시카고의 렉싱턴 호텔 661호라는 단 하나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 세 개의 서사는 작품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특정한 요소를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다. 바로 공간의 상징성이다. 렉싱턴 호텔 661호는 단지 평범한 객실로써 머
작성일 2024-06-28 작성자 파르페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55상세보기 -
감상&비평 기억하고 슬퍼해야 대물림을 멈춘다-영화:생일이 게시글은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니 주의를 요합니다. (폭력, 자살, 자해 등)
2014년 4월 16일을 기억하는가? 여기 글틴에 있는 사람들 중 이 날의 일을 지웠거나 모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잊쳐지지 않는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하여 많은 학생들이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 당시 나이가 7살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바다라고 하면 세월호 사건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그 당시 뉴스에서 배가 침몰하고 있는 장면을 저녁을 먹으면서 뉴스를 통해 봤다. 처음에는 공포, 두려움 나이가 들면서 안타까움 동생이 태어나면서 슬픔 등의 감정까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양하게 감정이 피어올랐다. 지금은 이 사건을 기억하면 나와 같은 또래가 죽은 일이라 그런지 마음 한 편이 시려온다. 그래서 세월호 참사 10주기인 이번년도 경건한 마음으로 생활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날 나는 디저트를 소개하는 유튜버의 장난삼은 농담과 댓글에 이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분노가 올라왔다. 그 이유는 유튜버가 "오늘이 무슨 날일까요? 기출 문제"라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이를 본 나는 처음에 당황을 했다. 내가 잘보는 유튜버가 이리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을 한 것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실수라 생각하고 댓글 창을 봤다. 내 예상은 사람들이 유튜버에게 항의하는 글이 많이 있었을 것이라 예측을 했지만 그 사람을 비판하는 사람이 반 비판하는 사람을 욕하는 사람 반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나는 이를 보고 세월호라는 아주 큰 사회적 참사가 세상에서 지워지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나는 머리를 식히며 황주현의 시 를 떠올렸다.이 한 덩어리의 잔해들은 견고한 주택일까무너진 태양은 나보다 위쪽에 있을까 부서진 낮달은나보다 아래쪽에 있을지 몰락 공전과 자전의 약속은 과연 지금은 유효할까?왁자지껄한 말소리들이 하나둘 치워지고 엉킨 시간을 걷어내고 고요 밖으로 걸어 나가고 싶은데{황주현:솟아오른 지하 中} 위 시는 재난의 현장을 바라보는 시다. 바라보는 시선은 각각 다르겠지만 여기서 나온 시선은 사회적 문제를 잠깐 관심 있게 봤다가 다시 일상으로 무덤덤하게 걸어가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특히 사회적 재난을 기억 속에서 너무 빨리 잊고 있으며 똑같은 재해들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세월호 참사도 마찬가지다 옛날 1993년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가 일어나고 약 20년만에 비슷한 참사가 대풀이 된 것이다. 그만큼 우리의 기억은 금방 잊쳐지고 지워진다. 그래서 다시 이런 참사가 일어난 것이다.이 참사를 그리는 작품들의 주 목적은 또 다시 같은 참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기억하기 위해 만든 작품이 많다. 그 중 세월호 사건을 다룬 이종언 감독의 이 생각났다. 은 세월호 참사로 아들 수호를 잃은 한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이 작품의 시작은 정일이 베트남에서 대한민국으로 들어오는 것으로부터 시작됬다. 그러나 가족들은 정일을 반길 수 없었다. 정일 대신 아내 순남에 든든한 힘이 되어준 수호가 갑작스러운 참사로 죽었기 때문이다. 예솔 또한 오랜 시간 떨어져
작성일 2024-06-23 작성자 송희찬 좋아요 1 댓글수 3 조회수 185상세보기 -
감상&비평 사랑의 값: 레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01. 사랑, 톨스토이, 그리고 러시아 이 세상에서 가장 추상적이면서도 우리를 마법처럼 홀리는 단어는 무엇일까? 아마 우리가 하루에 한번쯤 되뇌이지 않고는 일상의 지루함을 버틸 수 없다 느끼는 단어, 바로 사랑일 것이다. 이제까지 인간은 사랑을 질려 한 적이 없으며 사랑은 우리의 노래, 설교, 정치, 예능, 그리고 우리가 사람들과 교제하는 모든 만남의 장을 매체삼아 우리를 마주한다. 그 각양각색으로 자주 우리에게 새 옷을 입고 찾아오는 “사랑”이라는 개념에 대해 과연 누가 전부 깨달았다 말할 수 있겠는가. 러시아를 뛰어넘어 세계문학을 대표하는 명성을 받은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통해 나는 적어도 사랑에 대해 더 심층적인 탐구와 고민을 할 수 있었다. 우선 이 장편소설에 대한 나의 본격적인 견해를 나누기 앞서 이 소설이 쓰여진 배경을 다룰 필요가 있다. 안나 카레니나는 1877에 완성이 되었는데, 이 시기 러시아는 말 그대로 격동의 시기를 통과하고 있었다. 산업화를 비롯한 서구문명을 향한 동경과 그에 맞서는 러시아 전통으로 귀환하려는 시도들, 전제 정치와 그에 맞서는 농민들의 반란, 마치 복잡한 실들이 불길한 징조를 나타내며 엉킨듯 19세기 러시아는 흥분과 혼동이라는 온탕과 냉탕을 번갈아가는 질풍노도를 통과했다. 이러한 시대적 정황속 많은 소설가들에겐 지식인들의 혁명이나 소외계층의 고난에 초점을 두고 서사를 펼치는 것이 당시의 제한된 정치적 목소리를 보다 확대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정확히 동일한 시점에 한 러시아 귀족 여성인 안나 카레니나의 외도와 또 다른 러시아 귀족인 레빈의 사랑과 결혼, 좌충우돌 부딪히며 펑안과 안정을 찾아가는 그의 가정으로 시선을 주목시킨다. 톨스토이는 물론 지식인으로서 러시아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톨스토이는 그의 소설을 통해 더 거시적인 정치적 불안정 너머에 점차 영향력을 얻어가는 폐미니즘, 결혼과 이혼, 가정에 대한 새로운 관점 등이 러시아 기존 가부장적 가치관과 충돌하고 있음을, 즉,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원이라 할 수 있는 가정의 위기를 간파하고 보다 근본적인 사회의 문제를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02. 개인, 가정과 사회의 불협화음 여러 고전들을 읽어보았지만 이만큼 치밀하게 개인과 가정과 그 모두를 포함하는 사회와의 긴밀한 관계를 표현한 작품이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귀족 안나 카레니나의 전남편인 카레닌은 러시아 정부의 고위관직으로서 많은 인정과 보상을 얻고 끊임없이 자신의 커리어를 개척해나간다. 그는 자신의 아들인 세료자와 안나 카레니나에 대한 정서적 공급을 제공하기 보다는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 더 몰두하지만 안나 카레니나와 브론스키간의 관계를 알고 나서는 안나 카레니나에게 엄마와 아내의 자리로 돌아올 것을 촉구한다. 반면, 안나 카레니나는 자신이 속한 귀족사회가 요구하는 가정상과 여성상에 갇히기를 거부하고 젋은 미혼 남자 브론스키와의 사랑을 선택한다. 그 결과로 안나 카레니나와 브론스키, 그리고 그 둘 사이의 딸을 포함한 새로운 ‘가정’은 사회에서
작성일 2024-06-21 작성자 위다윗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114상세보기 -
감상&비평 세상의 형태를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들과 그러고 싶은 아이들을 위해"'지금부터 맑아질꺼야'"날씨의 아이"에 나왔던 히나가 했던 대사이다. 작중 히나는 맑음소녀로 비가 계속 내리는 도쿄에 비를 멈추게 하고 날을 맑게 하는 능력을 지니게된 그녀에게 '맑음소녀'라는 역할이 주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런 역할이 주어지기 전까지 호다카를 만나게된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었다. 그리고 동생을 책임지게된다. 그래서 그녀는 빨리 어른이 되어야만 했다. 아직 서툴고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홀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비를 벌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호다카는 작중 부모님께 학대를 받은 묘사가 있었다. 그리고 고향에 대한 답답함과 도쿄에 대한 동경심으로 계획도 없이 막연한 여행을 떠난 것이다. 그리고 케이스케씨와 나츠미씨를 만나며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찾은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호다카는 히나와는 달리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하는 아이였다. 이러한 등장인물들의 서사를 통해 나는 날씨의 아이의 주제를 '어른이 되기엔 아직은 서툰 아이들의 성장 '이라고 해석하였다. 작품을 통해 보여준 히나의 필요성과 희생에 관해 많은 사람들이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 이라고 해석한다. 이러한 해석에 덧붙여 말하자면 나는 '아직 어른이 되기 이른 히나가 어른이 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어른들은)이를 강요한다' 라고 해석 하였다.작중 등장인물인 케이스케는 어른이 되면 소중한 것의 순위를 바꾸기 어려워진다고 말하였다.그리고 세상의 맑은날씨를 위해서라면 맑음소녀 하나쯤은 희생해도 된다고 생각한다.하지만 이를 나츠미가 비판한다.케이스케는 딸의 양육권 문제로 현실적인 문제를 가지고 이를 해결하려 하기 때문에 이러한 부분은 작중 어른과 아이들의 가치관을 선명하게 비춰준다.하지만 나츠미 또한 어른이지만 날씨를 위해 제물로 바춰질 히나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마지막에 호다카를 히나와 만날 수 있게 도와주며 히나가 제물이 되는 것을 막는다.이러한점은 케이스케와 대비된다. 하지만 그녀는 순수한 호기심으로 맑음소녀에 관해 궁금해하며 케이스케보단 어림과 동시에 사회생활 경험 또한 그보다 적다. 이러한 면모는 작중 아이들 즉 주인공인 호다카와 히나의 관점을 대신해 비추어 주고있다.작중 마지막에서 호다카는 맑은날씨보단 히나씨가 있는 세상이 좋다고 그녀를 위해 구하는 장면 이그들의 진심을 잘 전해주었다고 생각한다.어른이 되기엔 아직 이르고 서툰 아이들이 빨리 어른이 되는것을 어른들은 자신이 편하다는 이유만으로 묵인하고 외면한다.그리고 그것을 당연시 여기며 생기는 문제들을 정당성의 의문을갖고 스스로 부딪히고 직면하여 해결하는것을 호다카와 히나를 통해서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어른의 도움없이는 올바른 어른이 될수없다. 먼저 쌓이고 쌓인 경험과 조언으로 아이들은 성장하며 진정한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다.
작성일 2024-06-21 작성자 hyeseong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103상세보기 -
감상&비평 창작은 어떻게 대항하는가-연극 「웃음의 대학」을 보고.
연극 「웃음의 대학」을 보고. 연극에 대한 연극, 소위 말해 극중극이다. 이 연극의 재밌는 점은 다루고 있는 연극조차 극중극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연극 배우가 아닌 연극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시대적 배경에 맞서는 한 약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침울하기는커녕 관객들은 약 2시간의 긴 시간 동안 배우들의 호흡을 따라가며 그들과 함께 웃게 되고 좋은 에너지를 얻는다. 하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메시지는 가볍기만 한 것도 아니라 그들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고 분명한 위로가 담겨있다. 나는 극장을 나오며 감탄을 멈출 수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좋은 연극이 있을까. 이 극은 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한 명은 극단 ‘웃음의 대학’의 작가이고, 다른 한 명은 그들의 공연을 저지하려는 목적을 지닌 검열관이다. 철저히 대립 관계에 있는 그들은 한 극본이 무대에 설 수 있는가를 두고 일주일을 다투게 된다. 검열관은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작가는 그것이 무엇이든 극본을 더욱 우습게 만든다. 시간이 지날수록 검열관은 그런 작가에게 감화되어 진심으로 크게 웃으며 함께 대본을 만들어 간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에 놓인 그들은 그야말로 ‘웃음의 힘’으로써 서로를 마주하게 된다. 첫날, 찾아온 작가에게 검열관은 허가를 내려줄 수 없다며 말한다. “나는 당신의 극본을 읽으면서 한 번도 웃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작가는 말한다. “이것은 극본입니다. 배우가 읽지 않으면 그 참맛을 알 수 없습니다.” 나는 이 부분에서 드러나는 연극의 성격에 매료당했다. 연극 극본은 정말 재미가 없다. 묘사는 상황에 대해 이해하기엔 모자라고, 성격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인물들의 대사들로 가득 찬 대사들은 도무지 그것 자체로는 매력을 느끼기 어렵다. 아무리 거장이라 불리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일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그 밋밋한 대본에 배우라는 아주 약간의 상상력을 더해보는 것이다. 그들의 표정과 어투, 행동들을 상상하는 순간, 그러자 대본은 하나의 이야기로서 재미있어진다. 무대와 조명, 배우의 연기, 그리고 시간의 흐름. 너무나 매력적이지 않은가. 이렇게나 살아있는 이야기라니. 일주일이 지나고 작가는 수많은 수정을 거친 끝에 허가를 받아낸다. 살면서 농담을 즐기기는커녕 크게 웃어본 적조차 없는 검열관은 그의 극본을 검열하는 일주일 동안 몇 번이고 웃었다. 허가 도장을 찍어주며 검열관은 말한다. “당신이 결국 이겼습니다”라고. 극 중에서 작가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인물이다. 늘 웃고 당하는 사람처럼 보이며, 심지어는 우습게까지 보이는 인물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본인이 해야 할 일을 분명히 알고 자신만의 싸움이라 자부하는 사람이다. 누군가에게 웃음을 주는 일에 보람을 느끼고, 좋아하는 일에 매진하고 몰두하는 사람이다. 반면 검열관은 전혀 그렇지 않다. 분명 나이도 훨씬 많고 권력적으로도 작가를 위협할 수 있는 인물이지만, 그에게는 신념도, 열정도 없다. 그가 본인을 묘사하듯이 권력의 끝자락에 서 있을 뿐인 인물이다. 좋고 나쁜 건 그가 결정하
작성일 2024-06-18 작성자 자적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109상세보기 -
감상&비평 '우리'만의 세계에서 성장은 유예된다-드라마 '하이라키'를 보고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하이라키' 비평으로, 다수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감상시 유의해주세요. '하이라키'의 줄거리를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하고 싶으시다면 유튜브에서 하이라키 몰아보기 영상 등을 감상하는 것도 권장드립니다 :)작년 이맘때 ‘청담국제고등학교’라는 드라마를 봤었다. 사실 나는 계급과 학교를 결합한 종류의 드라마를 싫어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 레드벨벳의 멤버 예리가 주연으로 나온다기에 ‘정주행’을 시도해봤던 거다. 드라마의 줄거리는 정말 내 예상대로 뻔했고, 자극적이었으며 소위 말하는 ‘상류계급’ 캐릭터들에게선 오만과 독선이 분 단위로 뚝뚝 묻어나왔다. ‘시대가 어느 때인데 저런 대사를 치지…’ 소리가 절로 나오는 손발 오그라드는 대사를 남발함은 물론이었고. 그런데도 예리 연기는 너무 보고 싶어 친한 친구에게 실시간으로 징징거리면서 결국 끝까지 봤다(친구야 미안하다!). 그런데 한날은 그 친구가 이렇게 물었다. “너는 예전부터 이런 드라마 싫어하더라. 근데 왜 싫어해?” 그 말을 듣고 내가 여태껏 ‘이런 드라마’를 싫어하면서도, 그 이유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당시에는 곰곰이 생각을 해 봐도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어서 “그냥” 이라고 얼버무렸다. 그렇지만 친구의 질문은 꽤 오랫동안 내 머릿속의 물음표로 남았고 ‘피라미드 게임’, ‘지금 우리 학교는’처럼 학교와 계급 갈등(을 곁들인 학교폭력)을 결합한 류의 작품을 볼 때마다 떠올랐다. 올해 6월에 노정의와 이채민이 주연이라는 말을 듣고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하이라키’를 보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사회문화니, 매체 윤리니, 학교에서 뭔가를 배우기는 했어서 그런 지식을 토대로 물음을 해소하려 해봤지만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이런 류의 작품들 중 몇몇 작품을 보며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했는데, 왜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애초에 어떤 건지 대답할 수가 없었다. 답답했다. 단순히 ‘윤리적이지 못해서’, ‘자극적인 소재로 수익만을 추구하니까’라고 답을 내기에는 꼬리 질문이 계속해서 쌓였다. 사람마다 윤리의 기준은 다르지 않나? 비도덕적이라는 이유로 이런 작품을 비판하면, 윤리적인 작품만 칭찬받아야 하나? 그냥 사회 통념적으로 그러니까, 라기에는 근거가 너무 빈약하지 않나? 너는 항상 작가와 감독이 수익성을 위해 자극적인 소재를 이용할 뿐이라고 비판하지만, 진짜로 사회비판을 목적으로 만들었을 수도 있지 않나? 나를 완전히 질리게 만든 질문은 ‘그리고, 시험이 3주 남은 마당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였고, 이 생각이 들었을 때는 그냥 집어치우고 공부나 해야지, 하는 삐쭉한 마음이 들었다.그러다 사회문화 수행평가 준비를 위해 김창남 교수님이 쓰신 「대중문화의 이해」의 마지막 챕터를 읽던 중 조금이나마 해답을 찾게 되었다. 내가 무릎을 탁 치게 만들었던 부분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문화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이어야하며, 우리가 문화를 이해하고 그 문화를 긍정적인
작성일 2024-06-17 작성자 사즈 좋아요 0 댓글수 2 조회수 293상세보기 -
감상&비평 타인과 살아가는 삶(알베르 카뮈-이방인)
책을 다 읽고 난 뒤 왜 책 제목이 '이방인'인지 의문이 들었었다. 뫼르소가 사제에게 자신의 생각을 쏟아붓는 장면에서 이 책이 전하고자하는 주제가 직접적으로 나타난 것 같다. 이유를 만들어내고, 의미 가 중요한 사회에서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뫼르소는 이방인이었던 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일반적인 주인공과는 다른 뫼르소가 어머니를 잃은 슬픔으로 인생이 무감각해졌구나하고 이유를 갖다붙였었다. 이러한 나의 무의식적인 의미 부여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뫼르소의 재판 장면이 인상 깊었다. 검사는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울지 않았다고 그를 도덕적으로 기형적인 인물이라 칭했다. 이 글을 읽고, 재판이 뫼르소의 죄가 아니라 뫼르소라는 사람 자체를 벌하기 위해 연 것 같다고 느꼈다. 정당방위로 볼 수 있는 상황에서 뫼르소는 사형선고를 받았는 데, 나는 그 이유가 그가 이방인이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뫼르소가 수동적인 사람으로 보이도록 표현되었지만 사실은 굉장히 본능적인 사람인 것 같다. 그의 본능이 나타나는 장면이 몇 개 있는데 그곳엔 항상 태양이 등장한다. 살인을 저지르기 직전과, 감옥에서 마리를 떠올릴 때를 생각하면 태양은 뫼르소의 충동과 욕구를 의미하는 것 같다.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상징적인 요소이다. 가장 인상 깊은 구절은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외로움을 덜 느낄 수 있도록, 내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 었다.'이다. 처음엔 사형을 앞두고 행복해하는 결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여러번 읽어보면서 인간 관계에 있어 서로의 친밀함을 원하는 동시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싶어하는 심리상태인 '고슴도치 딜레마'가 생각났다. 뫼르소는 일반적인 사람들과 다르게 친밀한 관계를 맺기 원하지 않았고, 그런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 속에서 그는 이방인이었다. 죽음을 앞두고 마음을 연 뫼르소는 세상과 가까워짐을 원하게되면서 이방인을 벗어났다는 기쁨을 느꼈던 것 같다. 이 책과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라는 애니메이션이 전하려는 주제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결말도 둘다 주인공이 직접 타인과 함께하는 세상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는 것이라는 게 흥미로웠다. 나는 뫼르소가 살인을 할 줄 모르고 책을 읽었기에 거부감 없이 그에게 동질감을 느꼈었다. 그가 감정이 결여되었다면서 이해가 안 된다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실 나는 그가 현실적이고 대부분의 사람들과 닮아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 뫼르소와 똑같이 세상의 부조리함을 느꼈었지만, 익숙해져 원래 그런 것이라 넘겨버리던 것을 카뮈는 극단적인 뫼르소의 삶을 통해 그것을 상기시켜주려던 것 같다. 책을 많이 읽지 않는 나에겐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지만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타인에 대한 두려움과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 속에서 혼란을 겪고 괴로워하는 게 당연한 것이라고 느꼈다. 뫼르소가 세상에 마음을 열고 한 층 성장한 자아를 가지게 된 것이 본 받을 점이라고 생각 한다. 나도 타인과 주고받는 상처를
작성일 2024-06-14 작성자 여기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139상세보기 -
감상&비평 [크툴루의 부름]과 오이디푸스 설화에서의 운명애
니체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무한긍정의 운명애를 통해 생명력이 뿜어져 나오는 상태를 주문한다. 운명애는 자신의 지나간, 진행중인, 그리고 지나올 것인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니체 본인도 말했듯이 운명애를 지니기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운명애가 나타난 구체적인 사례를 원했는데, 이미 제시해 놨었다. [비극의 탄생]에서는 운명애의 왕성한 생명력이 만들어낸 작품인 비극의 배경, 그리스 신화, 그 중에서도 영웅 설화를 제시한다. 비극에서 나타나는 영웅들의 고군분투에서 그들의 생명력이 나타나고 종장에서 상승하는 삶의 종지부가 찍힌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어떤 상태가 오는지는 니체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는데, 생명력이라는 것이 삶을 유지하는데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고귀해지기 위한 활기에 가까운 것이라고 파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신화라는 이름표가 붙은 크툴루 신화라는 것이 나타났다. 그러나 크툴루 신화는 공포라는 장르로 묶이는 만큼 영웅 설화와는 다른 듯 보인다. 현대의 설화이지만 영웅 설화와는 결이 다른 크툴루 신화에서도 영웅 설화에서와 같은 운명애가 나타나는 것 같았다. 그정도로 희망이 없어보이는 세계에서도 운명애가 가능하다면 나도 가능하리라 믿을 수 있을 듯했다. 그리스 영웅 설화를 거칠게 정형화해 보자면 영웅의 운명에 대한 신탁이 내려오고 영웅은 그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 분투하다 실패한 채 늙어가거나 죽는다. 운명이 다가오는 것을 거부해 분투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정말 운명을 거부하고자 했다면 도피를 택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영웅들은 분투를 택한다. 그리고 절정의 순간 상승하는 삶의 기울기는 꺾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삶에서 도피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한다. 예를 들어보면, 오이디푸스는 신탁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도피했다고 보기 쉽다. 그러나 그 운명에 절망했다면 그같은 성품에 바로 신들 곁으로 간다고 했을 것이다. 묘사는 그렇지 않을 지 몰라도 오이디푸스는 운명을 기꺼이 용인한다. 스스로 실명하는 것이 영웅 파멸의 상징적인 시작인데, 절망적인 면이 강하지만 결국 자신의 말을 지켜 자신이 높아지기 위함이며, 실명에도 절망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한다는 긍지의 발현이다. 심지어 죽는 순간마저도 올림푸스의 영광적인 신이 부른다며 기꺼이 나아간다. 크툴루 신화는 러브크래프트와 후대의 작가들이 공유하는 세계관을 말한다. 기본적으로는 태양계의 외부를 우주 이면의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무언가로 설정한 채 그 너머에서 들어오는 존재들로 인한 혼란을 묘사하는데, 그 존재들의 접촉에 인간들은 전혀 대응하지 못하거나 대응했다고 착각한 채 미치거나 죽는다. 이런 세계를 만들어 냈으니 소설적 재미를 얻기 위해서 인간의 관점에서 소설이 쓰여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겠다. 소설 속 외부의 존재들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서, 크툴루의 부름에서는 잠들어 있던 크툴루가 깨어나는데, 그 잠들어 있던 장소인 르뤼에만 하더라도 인간이 파악한 기하학으로는
작성일 2024-06-05 작성자 데카당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197상세보기 -
감상&비평 피투성 또는 피투성이 존재들을 위한 시 – 정재율의 『몸과 마음을 산뜻하게』를 읽고 (퇴고)
만약 한 아이가 넘어져 무르팍이 깨졌다고 하자. 새빨개진 무릎에서는 피와 흙이 뒤섞이고, 통증이 밀려온다. 아이는 당연히 울음을 터뜨릴 테다. 이때 보호자는 아이에게 왜 우느냐는 질책은 하지 않되 과장된 반응을 보여서도 안 된다. 다만 아이의 감정을 알아주고 곁으로 다가오는 것이 상책이다.* 넘어지고 말았을 때 밀려오는 부끄러움, 다쳤을 때의 아픔과 두려움, 그리고 누군가 이 고통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아이의 몸속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게. 너무 크게 부풀어 올라 흘러넘치거나 딱딱하게 굳어 그 자리에 남아 있지 않게. 적지도 많지도 않은 반응으로 아이를 바라보아야 한다. 이러한 태도는 비단 아이를 돌볼 때만이 아니라 타인을 대할 때에도 필요하다. 타인이 지닌 고유한 감각을 함께 알아가려고 하되 너무 깊이 빠져들거나 겉돌지 않을 것. 우리의 ‘몸과 마음을 산뜻하게’하기 위한 철칙일지도 모른다. 정재율 시인의 첫 시집 『몸과 마음을 산뜻하게』는 넘어진 이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말하고자 한다. 시인만의 단단하고 확고한 시선이 아름답다. 그런데 이때‘넘어진 이들’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표현의 명료함과 아름다움의 골조를 찾아보기 위하여 하이데거의 저서 『존재와 시간』을 파고들어 보자. 피투성(被投性), 피가 범벅이 된 피-투성이가 아니다. 한자 그대로 피被라는 접두사에 던질 투投가 합쳐진 단어, 하이데거가 제시한 표현이자 하나의 개념으로 우리는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라는 뜻을 내포한다.‘그곳에-있는''현존재', 그러니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가지게 되는 성질이 바로 피투성이다. 우리는 자의와 관계 없이 이 세계에 탄생했으므로‘던져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때론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더 어렵다는 결론’(『몸과 마음을 산뜻하게』,「부표」)에 도달해 그냥 살아가기로 한다. 시집 속 「초판본 시집」에서 화자에게 ‘친한 선생님’이 ‘선택당한 거 아니에요? 별 수 없죠 계속 쓸 수 밖에 없겠다고’ 말한 것과 같이. 그런데 하이데거의 피투성과 정재율의 시는 무슨 관련이 있을까. 피투성은 기분 중에서도 불안을 통해 자각된다는 점에 집중해 보자. 특정 대상에 대해 느끼는 공포가 아닌, 막연한 불안 말이다. 이를테면 ‘친한 선생님’에게 ‘도대체 왜 저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요?’묻는 것처럼, 우리는 살아가며 생의 순간 하나하나에 의미를 찾아가게 된다. 이렇게 의문을 던지고 한없이 헤매는 과정은 필연적인데, 하이데거는 이 과정에서 인간은 불안을 얻으며 자신의 피투성을 강하게 인식한다고 한다. 던져진 세계로부터 도망갈 수 없다는 사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언젠가 ‘그곳’을, 우리가 머물고 있는 곳을 떠나야 한다는 또 하나의 사실. 실 가닥이 복잡하게 꼬이듯 사고가 전개되며 우리는 죽음에 대한 불안까지 가닿게 된다. 우리가 마주한 아주 무거운 과제이자 언젠가 마주하게 될 현실, 죽음. 자신의 죽음을 예리하게 의식하는 행위를 하이데거는 죽음에 대한 ‘선구적 각오성’이라고 일컬었다. 이렇게 세계에 내던져진, 한 마디로 낳아지고
작성일 2024-05-30 작성자 모모코 좋아요 0 댓글수 2 조회수 455상세보기 -
감상&비평 피투성 또는 피투성이 존재들을 위하여 – 정재율의 『몸과 마음을 산뜻하게』를 읽고이 게시글은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니 주의를 요합니다. (폭력, 자살, 자해 등)
만약 한 아이가 넘어져 무르팍이 깨졌다고 하자. 새빨개진 무릎에서는 피와 흙이 뒤섞이고, 통증이 밀려온다. 아이는 당연히 울음을 터뜨릴 테다. 이때 보호자는 아이에게 왜 우느냐는 질책은 하지 않되 과장된 반응을 보여서도 안 된다. 다만 아이의 감정을 알아주고 곁으로 다가오는 것이 상책이다.* 넘어지고 말았을 때 밀려오는 부끄러움, 다쳤을 때의 아픔과 두려움, 그리고 누군가 이 고통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아이의 몸속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게. 너무 크게 부풀어 올라 흘러넘치거나 딱딱하게 굳어 그 자리에 남아 있지 않게. 적지도 많지도 않은 반응으로 아이를 바라보아야 한다. 이러한 태도는 비단 아이를 돌볼 때만이 아니라 타인을 대할 때에도 필요하다. 타인이 지닌 고유한 감각을 함께 알아가려고 하되 너무 깊이 빠져들거나 겉돌지 않을 것. 우리의 ‘몸과 마음을 산뜻하게’하기 위한 철칙일지도 모른다.정재율 시인의 첫 시집 『몸과 마음을 산뜻하게』는 넘어진 이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말하고자 한다. 민음사 시집 특유의 간결한 만듦새와 옅은 초록빛 포인트,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산뜻하게’하겠다는 시집의 첫인상은 마냥 밝아 보일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웃기만 하는 아이처럼. 아직은 어떤 바람도 맞아본 적 없는 유목처럼. 그러나 얇지 않은 두께의 시집을 모두 읽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다. 이 책은 겹겹의 나이테를 둘러싼 나무와 같다고. 세월과 세월을 조심스레 겹치며 몸집을 불려 온 것만 같다고. 그러한 감상으로 아슬아슬하게 쌓은 상처 사이를 거닐어 본다. 보통 나이테라는 단어를 제시하였을 때 사람들은 나무가 훈장처럼 견뎌온 시절을 떠올리고, 이는 자연스레 좋은 이미지로 이어진다. 그러나 정재율의 시가 껴입은 나이테는 상처와도 같다. 계절마다 다른 속도로, 이따금 느리게 어쩌면 빠르게 자라나며 세포들이 분열한 흔적, 마음에 새겨진 상처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살아오며 어딘가 ‘터지는 소리’부터 ‘사람 떨어지는 소리’를 들어가며 (「물탱크」) 넘어졌을 때 얻은 상처. 그리고 그 곁으로 살이 ‘산뜻하게’돋아나기 위해, 정재율의 시가 존재한다.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존재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몸과 마음을 산뜻하게』에서 죽음을 아주 특별한 것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죽음이 시적 화자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아이를 위해 과장된 반응을 보이지 않는 보호자의 마음처럼, 지금 화자가 있는 곳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오래도록 살아갈 수 있도록 일종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된 시이자 시집의 첫 시 「물탱크」에서는 도입부부터 누군가의 자살을 암시하는 구절이 등장한다. 자는데 사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꿈속에서 나는 장례식장에 들러상주와 대화를 나누고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사람들이 땅바닥을 하도 쳐서쿵쿵 울리는 소리에몸이 살짝 떠오르기도 했는데 나는 그들의 손이 빨갛게 달아오는 것을 보았다그 손으로 악수를 나눈 것까지 다음 날 알고 보니 그 소리는 물탱크가 터지는 소리였다그
작성일 2024-05-28 작성자 모모코 좋아요 0 댓글수 2 조회수 408상세보기 -
감상&비평 영화 <외계+인>에 대한 뒤늦은 소고
최동훈 감독의 영화 은, SF물과 무협, 판타지 등의 모든 장르를 뒤섞은 만큼 방대한 서사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1부와 2부라는 연작 구성으로 나누어져 개봉되었다. 이 영화의 2부가 개봉한 것은 올해 1월 초였고,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건 5월이기에 조금 늦은 감이 없잖아있지만, 언젠가는 꺼내야할 이야기라고 생각해왔다. 개인적으로 나는 최동훈 감독의 영화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한껏 어깨에 힘들어간 인물들, 장난기로 가득찬 대사, 의미없는 카메라 워킹 등. 그의 영화들은 대게 눈을 땔 수 없을 정도로 신나는 리듬감을 보유했으나 ‘재미’라는 유흥으로 지나치게 일관된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지껏 충무로에서 보기힘든 흥행불패라는 타이틀과 총합 3000만 관객이라는 어마무시한 전적을 석권하고 있었고, 이란 영화는 그의 흥행신화를 거의 맹신하다시피하는 투자자들로 인해 역대 최대규모의 제작비를 들여 만든 영화였다. 그리고 1부는 비평과 흥행 모두 아쉬운 성적을 이루었다. 2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중들은 최동훈이라는 이름에 더 이상 다가가지 않았고, 투자자들은 실망했다. 그러나 나는 을 통해 최동훈이란 감독을 다시 보았다 (이 영화를 보고난 후, 올 타임 한국 영화 베스트 탑 8에 올리려고도 했다. 1위 - 휴일 / 이만희. 2위 - 헤어질 결심/ 박찬욱. 3위 - 남매의 여름밤 / 윤단비). 은, 최동훈 감독의 가장 세련되고 훌륭한 영화이자 2024년 최고의 한국영화인 것이다. 그건 이 영화를 보며 여전히 그가 멋부리는 인물들과 장난기로 가득찬 대사, 유치한 유머를 고수하고 있지만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쌓아올린 작품의 완성도 측면 때문이다. 이 영화는 전적으로 시지프스 신화를 따르며 인간의 운명론과 존재를 사유하는, 매우 아름답고도 희망차지만 끝내 비극적인 영화다. 극 중에는 크게 3가지로 분류되는 타임라인이 존재한다. 그 중 첫번째는 주인공 이안(김태리)의 유년시절이다. 이 유년시절에 이안은 자신의 아빠 ‘가드(김우빈)’가 사이보그라는 것을 알고 그 증거를 찾아내기 위해, 병원으로 잠입했다가, 한바탕 소동에 휘말리게 된다.두번째는 이안이 살아가는 고려시대다. 이안은 가드와 그의 조수 썬더, 그리고 탈옥한 외계 죄수들과 함께 고려시대에 떨어지고, 가드는 죽는다. 외계죄수들은 도망치고, 썬더는 행방불명되었다. 이안의 청년시절이 담겨진 고려시대는, 1부의 주무대가 바로 이 두번째 타임라인이다.세번째는 고려시대에 살고있던 이안에 의해 뒤바뀐 현재다. 또는, 이안이 고려시대를 벗어난 이 후의 현재이기도하다. 이 시간선에서 이안은 어른인 채로 놓여져있다. 이 것은 2부의 메인배경이다. 정리해보자면 이렇다.1. 이안의 유년시절(현재)2. 이안의 유년기 - 성장기 - 성인 / 고려시대 (과거)3. 이안의 성인 (현재)이 타임라인이 흥미로운 것은, 1번과 3번에 있다. 이안은 어린시절 고려시대로 빨려들어가서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홀로 버텼다. 그러나, 정작 10년이라는 인고의 시간 이후 현재(3번)로 돌아왔을 때, 세상은 전혀 바
작성일 2024-05-28 작성자 화자 좋아요 1 댓글수 2 조회수 399상세보기 -
감상&비평 인간은 본질의 꿈을 꾸는가? <굿바이 레닌>
어쩌다보니 사회주의와 관련된 작품에 대한 글을 연달아 쓰고 있다. 그만큼 사회주의는 한 시대를 풍미한 사상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듯이, 현실 사회주의는 실패했다. 영원할 것 같았던 베를린 장벽은 허무하게도 말실수로 붕괴했고, 소련은 산산조각났다. 사회주의가 지금까지도 회고되는 이유는 아마 그 시절 사람들의 희망을 담고 었기 때문일거다. 산업혁명 이후 인류의 빈부격차는 더욱 심해진다. 가진 자들은 호화롭고 풍요롭게 살아가는 반면, 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끼니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일해야했다. 하지만 사회주의는 사람들에게 대안을 선물해줬다. 노동자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 모두가 평등한 세상은 노동자들에게 정말 달콤하게 들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은 이러한 요구를 반영하지 못했다. 그렇게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실험은 실패했다. 은 동독이 흡수 통일된 후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알렉스의 어머니는 열렬한 공산당원이었다. 그녀는 알렉스가 반정부 시위 중 동독 경찰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쓰러진다. 어머니는 혼수 상태에서 깨어나지만 그 사이 독일은 통일이 되어있었고, 그녀가 목숨 바치던 당은 없어졌다. 알렉스는 충격을 받으면 어머니가 사망 할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아직 통일이 되지 않은 것처럼 거짓말을 하기로 결심한다. 거짓말을 하는 알렉스의 노력은 정말 눈물겹다. 알렉스는 더 이상 판매되지 않는 동독제 물품들을 구하러 다니고, 서기장과 닮은 사람까지 찾아가며 가짜 뉴스를 만든다. 나는 이 과정을 보며 이상하게도 올더스 헉슬리의 가 떠올랐다. 이 소설에서 사람들은 정성스럽게 행복을 강요받는다. 소설의 사람들은 세계정부의 지배를 받으며 불행하지도, 늙지도 않으며 살아간다. 나는 소설 속 사람들을 알렉스의 어머니에, 세계정부를 알렉스로 비추어 봤던 것일지도 모른다. 진실을 모르지만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진실을 알고 그냥 살아가는 것이 나을까? 적어도 실존주의에서는 후자라고 말할 것이다. 사회주의자가 아니더라도 극중 레닌의 동상이 철거되는 장면을 본다면 어딘가 가슴이 저릴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신념이 부정당할 때 슬픔을 느끼는 건 인류 공통이기 때문이다. 당장 자신이 자라왔던 나라가 망하고 아예 다른 체제의 국가가 세워진다고 상상해보라. 괜히 뒤르켐의 아노미 이론에서 이런 상황을 상정하는게 아니다. 신념은 본질과도 관련있다. 사르트르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한지 수십 년이 넘었다. 그럼에도 인간은 여전히 자신의 본질을 찾으려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항상 실패한다. 본질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며, 원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거짓 본질을 세운다. 국가, 인종, 종교가 자신의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고 오해한다. 알렉스의 어머니와 알렉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자신의 본질이 사회주의라고, 당에 충성하며 슬픔을 잊을 수 있을 거라 착각한다. 그러나 이념은 사람에 우선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눈을 돌리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작성일 2024-05-26 작성자 버틴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310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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