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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는 우리

  • 작성일 2021-11-01
  • 조회수 2,270

아무도 없는 우리

서윤후

“겨울의 연인에겐 간단한 언어가 있다.”

― 베이다오, 「겨우 한 순간」


그렇다고 빈 괄호는 아닙니다
우리는 겨울에 대해 말하려는 것입니다


침묵은 빈손이면서 언제나 즐거워
폭설입니다
흰 광목천을 두른 울창한 숲속에서
우리는 빛이 다 청산하지 못한 어둠
아마도 밤새 다 태우지 못해 젖은 장작들


다시 태어나는 꿈을 반으로 접고
적설량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실컷 서로에게 쏟아지다가
기꺼이 무너져 버리다가
더는 우리가 등장하지 않는 영화를 봅니다
나른하고 편안한 갈등 속에서


다친 적도 없이 아프게 되었으니
우리는 서로의 줄거리를 간호했습니다
더는 간략해지지 않도록
머물던 대피소엔 외풍이 있었는데
열려 있는 곳 하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뒷면의 안간힘일까
인적 드문 풍경이 되어 가는 것 나쁘지 않아요
겨울 화가가 난로 옆에서 잠깐 졸다가


그려 넣지 않은 아궁이 불이 있었는데
우리는 벼랑에서 서로의 어디를 붙잡을지 생각하다가
종일 매달려 있기도 했었는데
침묵이 간지러운 숨바꼭질 중이었는데


빈 괄호 안에 누워 눈을 맞다가 동시에 빠져나올 때
자국과 실존을 동시에 떠올릴 때
잠든 채로 서로를 잃어버릴 때


겨울에 대해 정의 내릴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서로 괄호 하나씩 나눠 갖고
간밤의 기도를 냉동실에 넣어 두고는
침묵을 파괴하며 사는 것입니다
겨울을 대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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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10-01
외출

외출 김동균 양우산을 쓴 사람. 얼굴이 보이진 않지만 얼굴이 있을 거야. 양우산을 접어도 있을 거야. 초콜릿도 먹고 초콜릿을 너무 많이 먹으면 입꼬리에도 묻을 거야. 가방에서 티슈를 찾을 땐 한쪽 어깨를 올리고 목과 어깨 사이에 우산대를 끼우고 있을 거야. 티슈가 없다면 창피한 모습을 가리는 데도 양우산이 쓰일 거야. 아무튼 있을 거야. 없다면 찾을 때까지 양우산을 쓰고 얼굴을 붙인 다음 양우산을 접을 거야. 결국에는 집에 들어갈 거야. 방에서는 드러날 거야. 양우산을 쓴 사람. 한밤에 불을 끄고 잠에 드는 사람. 잠들기 전에 얼굴을 떠올려 볼 거야. 전원이 꺼진 모니터에 검은 얼굴이 비칠 거야. 거울 앞에선 적나라하게, 냉장고 문을 닫을 때마다 얼핏얼핏. 그러나 모르는 사람의 이마와 눈과 귀를 어디서부터 조립하고 어떻게 떠올려야 될지 모르겠다. 그래서 양우산을 쓴 사람은 양우산을 쓴 사람으로 깜깜하게 있을 거야. 양우산이 있는 사람은 모두 양우산을 쓴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거야. 죄다 얼굴이 있을 거야. 없다면 찾을 때까지 양우산을 쓰고 있을 거고. 얼굴이 생기지 않는다면 가마솥더위에 밖으로 나오지는 않을 거야.

  • 관리자
  • 2024-10-01
예체능

예체능 김중일 망친 도화지를 찢었어. 물통에서 그만 잠이 넘쳤거든. 잠이 넘쳐서 흘러나온 그림자를 과자부스러기처럼 빨아들이는 여진들. 그걸 목격한 동공 지진. 붓을 든 채 깜빡 졸던 중에, 그만 졸음을 스케치한 여진들. 찢긴 도화지에 난 여진들. 여태 최적의 비율을 찾으려 바람과 바다는 서로 섞이며 물타기 하는 중. 수평선에 줄타기하는, 바다를 찾은 뭍사람들의 상념들. 하루에 한 장씩 찢겨 나가는 실패한 그림들. 무슨 소리, 찰나의 한 장이라는 말. 여태 지구를 그리고 있는 삼색 볼펜은 알다시피 해와 달과 그리고 그림자를 그리는 발. 기본적으로 그림자를 잘 그리는 것이 그림의 성패를 결정한다고 그림자 선생님이 말했어. 명보다는 암이나 잠을 잘 그려야 하듯. 잘 써야 하는 색깔은 엷은 투명, 짙은 투명, 흰 투명, 검은 투명 등등. 오늘의 주제처럼 주어진 오늘의 물감. 해를 쥐어짜자 발끝에서 흘러나오는 엷은 밤. 확인 불가능한 찰나 떠오르며 대기 중에 녹아버린 러닝 타임이 담긴 숫자. 미술 시간 끝난 건가요 묻지도 못하고 일단 달렸어, 내가 아니라 미술 시간에 내가 열심히 그리던, 머리 팔 팔 다리 다리 의도치 않게 온몸이 손의 형상을 한 그림자가 나를 바통처럼 꼭 쥐고 이어달리기. 그림자가 낀 장갑처럼 젖은 내 옷. 미술 시간의 여진인지 한여름의 초록이 짙어지며 갈빛을 띰. 검정은 가장 짙은 초록. 그려진 궤적을 따라 하루 한 바퀴 도는 트랙. 밤의 건물 안을 통과하는 찰나의 하룻밤. 나를 나에게 건네다가 그만 떨어뜨림. 떨어져 뒹구는, 바통처럼 꼭 쥐고 있던 기억. 실수도 루틴. 건물 안에 침대를 들이고, 떨어진 바통처럼 침대에 뒹굴며 황망히 관중석에 빼곡히 놓인 잠을 열어 보지만, 열리지 않는 잠. 잠을 청해 보지만, 응하지 않는 잠. 이루지 못한 잠. 높이 쌓지 못한 잠. 반듯이 세우지 못한 잠. 그것은 당장은 달리기를 멈추는 것처럼, 불가능. 함성처럼 흩어진 잠이, 일으켜 세우지 못한 잠이 대신 그림자가 되어, 잠시 넘어졌지만 포기하지 않고 일어서 나를 줍고 다시 꼭 쥐고 건물 밖으로 내달리기 시작. 그림자의 손에 매달려 나뭇가지의 참새처럼 종일 재잘거린 나. 여름 나무의 이파리들이 뜬눈의 눈꺼풀처럼 깜박이고 있어. 그 눈꺼풀 안에 얼음 눈동자들은 폭염과 여름 때문인지 녹아 사라졌어. 내 눈동자를 나무 이파리 안에 넣어 주겠다는 마음으로 계속 뚫어져라 보고 있으면 그림자가 초록색인 걸 알 수 있어. 오늘의 기록은 단축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 수 있어, 그것이 상관없다는 걸. 열심히 그려도 잠도 그림자도 늘 미완성, 그래서 손가락이 겨우 다섯 개뿐이라 자꾸 불면의 나를 밤중에 떨어뜨리는 것도. 초록 옷의 그림자야 널 탓하는 건 아니야. 그저 달리는 네 손에 매달려 살짝 멀미가 나는데, 검은 눈동자 같은 나무 그늘 속에 빠진 눈썹 한 올처럼 붙어 잠깐 찌르고 싶어. 거슬리게 하고 싶어. 아무라도 눈물 나게 하고 싶어.

  • 관리자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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