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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저항적인 돼지가 좋아 (제1회)

  • 작성일 2014-06-01
  • 조회수 2,426

 

 

굉장히 저항적인 돼지가 좋아(제1회)

 

 

 

박금산

 

 


 

 

    낮에는수영하고 저녁에는농구하고 밤에는연애편지쓰고. 그렇다고 학교에 안간것은아니고. 주중에는 등교하고 레슨받고. 주말에는 돼지를먹고 닭을먹고 소를먹고. 그렇다고 생선을 안먹은것은아니고. 닭과 소를 합하면 돼지가 되고. 육류소비량의 통계표에 의하면 그렇고. 겨울에는 농구보고 봄이되면 야구보고. 물가낮은나라에서 보냈던 십대. 대학생이되어돌아왔다.

 

    그런데. 나는더이상학생이아닐수도있다. 그래도. 과제는해야한다. 학점을따야 한다. 법원에서결정해주면 계속학생일수있다. 재판이열릴 때까지학교에는나가지않는다. 당분간. 잡녀르색희. 아버지입에서나오는 이 말은 무슨외국어같다. 색희. 기집애 이름같다. 그런데 누나는……. 집을 나갔다. 어머니는운다. 하루에몇차례. 나는말한다. 엄마 그런다고해결될문제가아냐. 아버지가말한다. 저 자식은 집도 안 나가고. 뒷말은줄인다. 집도 안나가고어쩐다ㄴ`ㄴ 말쌈? 나는 가출하지 않겠다. 가출해서해결될 문제는 따로있다.

 

    중학교를졸업한후 아버지가일하고있던 나라로 날아가서 고등학교에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서온 김현승입니다. 국제학교입학이 안되어서현지학교에들어갔다. 한국이름을그대로사용했다. 아이들은나를헌쏭이라고불렀다. 현승이, 인데, 헌쏭이, 라고. 그나라발음이었다. 훤쏭이라고 부르는 녀석도 있었다. 담임교사 숀은 발음이 정확했다. 현승! 가끔은 현성!
    현지어를알지못해 겉돌았다. 교과서는 교실에 두고 다녔다. 결석을 해도 무방했다. 그런데. 혼자노는것도 하루이틀이었다. 아침에는학교에 갔다. 교실에서죽을쳤다. 교과목선생님들은나를 투명인간으로다루었다. 출석을안불렀다. 숙제검사를하지 않았다. 국제학교학급에 결원이 생기면 즉시떠날 학생이었던 나. 그래서. 교복을 안 샀다. 곧 전학갈것이므로. 아버지 회사 사람 중에 한국말을 잘하는 현지인이 통역해주었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양해를 받았다. 평상복을단정하게입는것으로.

 

    농구 유니폼을 입고 학교에 다녔다.

 

    수업에방해가되었다. 농구 유니폼이 선생님들의 시선을 끌었다. 도대체국제학교로 언제 전학하는거야. 나도그랬고 선생님들도그랬다. 아이들과는 농구를하면서 친해졌다. 이름들은 기억속에서 희미하다. 포이라는 애가 있었던 것 같다.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팀을 짤 때 그 애가 주도했다. 포지션 배정도 그 애가 주로 했다. 나는 말귀를 못 알아듣는 척 포워드를 잽싸게 낚아챘다. 초기에 몇 번 그렇게 하자 파워포워드로 고정되었다. YMCA 청소년농구단에서 레슨을 받은 실력이었다. 초등학교때는센터였다.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먹고 농구코트에 나갔다. 말은 쉬웠다. 여기! 야! 받아! 뛰어! 하면 통했다. 가장 많이 썼던 영단어는 ‘헤이’, ‘쏘리’, ‘굿’이었다. 공을 달라고 할 때는 헤이, 실수 뒤에는 쏘리, 득점 이후에는 굿 베리굿. 생각난다. 포이 말고 톰, 제이, 이런 이름. 같은 편을 자주 먹었던 친구들이다. 걔들은축구도잘했다. 대학교 가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주말에 어머니와 쇼핑센터에 가면 스포츠용품 코너에서 시간을 보냈다. 농구볼이 몇 종류 눈에 들어왔다. 브랜드를 바꿔 가며 하나씩 샀다. 한국에서는 인터넷 쇼핑으로 농구화를 모았다. 거기에서는 어머니가 거절했다. 신용카드를 쓰기 겁난다고 했다. 해외배송요금은 별도였다. 국내 인터넷 쇼핑몰에서 물건을 산다는 건 난센스였다. 그 나라에도 사이버몰이 있었다. 하지만. 언어가 안 통했다. 인터넷에도 국경이 있다. 백화점 나이키 매장에는 신상품이 잘 들어왔다. 더운 나라였다. 나는 농구화를 신고 다녔다. 비가 오면 가방에서 샌들을 꺼내어 갈아 신었다.
    2개월이 흘렀다. 시간의 절벽. 교실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면서 지냈는지 가히 2개월을 버텨낸 나의 과거는 존경스럽다. 나의 장기는 아무래도 참는 것인가 보다. 참고 참고 또 참았다. 중간고사 비슷한 시험을 치렀다. 수학 몇 문제. 영어 몇 문제. 알 만한 문제가, 있을 턱이 있나. 에라 모르겠다. 이름도 안 쓰고 답안지도 안 냈다. 숀이 내게 손짓했다. 따라오라는 뜻이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따라 걸었다. 숀이 문을 열었다. 아마도 과학 자료실이었던 듯. 숀은 휴대용 번역기를 꺼내어 어렵게 문장을 만들었다. ‘공부하기 힘들면 여기서 지내다.’ 어색했다. 그런데. 문법에 좀 안 맞으면 뭐 어떤가. 뜻이 통했으면 됐지. 내가 물었다. “수업시간에 여기 있어도 된다는 거예요?” 숀이 대답했다. “오께이 오께이.” 과학 자료실에 실험도구는 별로 없었다. 책상이 널찍했다. 거실에서데리고놀던알씨카가 생각났다. 이튿날 배터리를 충분히 챙겼다. 자동차와 리모컨을 넣으니 가방이 꽉 찼다. 교실로 가지 않았다. 과학 자료실로 출근했다. 책상을 경주장으로 바꾸었다. 책으로 장애물을 배치했다. 분필로 금을 그어 곡선 트랙을 만들었다. 자동차를 운전했다. 책상 위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조정하는 것이 처음에는 벅찼다. 나중에는 코스에 익숙해졌다. 코스에 익숙해지니 심심했다. 심심해질 때마다 커브의 각도와 위치를 바꾸었다. 스톱워치로 주행시간을 점검했다. 자유. 별도공간을주어 격리시키기로한 것이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순응했고 우리는상생했다.

 

    숀이 말하길,
    안녕하십니까.
    내가 대답하길,
    안녕하세요 선생님.
    숀이 말하길,
    강남역은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대답하길,
    2호선입니다.
    이성계는 누구입니까.
    이방원의 아버지입니다. 사람을 많이 죽였습니다.
    혁명에는 피가 따릅니다. 큭, 큭.
    숀과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수업이비는시간에 찾아와 문을두드렸다. 나는 숀에게 한국어회화 선생님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선생님이었다. 숀은 한국에 관심이 많았다. 나는 조퇴에 관심이 많았다.
    오늘 배가 아픕니다. 집에 일찍 가도 됩니까?
    물론입니다. 자유입니다. 돼지 먹기 좋아하십니까?
    돼지요?
    응 돼지.
    한국 사람들은 삼겹살을 좋아합니다.
    저는 돼지 안 먹습니다.
    왜요?
    돼지가 뱀을 먹습니다.
    그랬거나말았거나 다. 진짜로 돼지가 뱀을 먹는다면 돼지고기를 안 먹을 수도 있겠다. 나는 숀이 들고 다니던 한국어 회화책을 펼치고 네이티브스피커의 발음으로 읽어 주었다. 돼지가 뱀을 먹는다니. 괜히 그런 문장을 찾아서 읽고 싶었다. 그러나. 회화교재에 나오는 글이 아니었다. 숀이 그런 말을 했을 때는 의도가 있었을 텐데. 그랬거나말았거나.

 

    9월이 되었다. 벌써 한 학기. 지긋지긋했다. 어마어마하게. 하지만. 국제학교에 자리가 나지 않았다. 부모님을 조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쯤 나도 알았다. 어머니 아버지가 국제학교 학급 인원을 어떻게 줄였다 늘렸다 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저항은 필요했다.
    “엄마, 나랑 한국에 들어가자 그냥. 미치겠어.”
    “누나는 어떡하고.”
    “아빠랑 여기 있으라고 하면 되잖아.”
    “아빠가 새로 사업 시작할 건데, 엄마가 옆에 있어야지.”
    “새 사업 한다고? 회사 그만둘 거야?”
    “아직 결정 못 하셨대. 구상 중이셔.”
    “그럼 나 혼자 들어갈게. 지겨워 죽겠단 말야.”
    “학교는 어떻게 다니려고?”
    “하숙 하면 되지. 대학교 근처에서.”
    “그건 대학생이나 하는 거고.”
    “고모네 집에서 살까?”
    “어린애들 키우느라고 정신없어, 그 집.”
    “아, 정말, 어쩌라는 거야. 그럼 누나를 빼내고 그 자리에 나를 심어 주든가.”
    “그만 해 그 말은. 네가 양보했잖아.”
    “그때는 금방 자리가 날 줄 알았지.”
    “자리가 나도 그게 네 자리라는 보장도 없다 얘. 무슨 수가 있겠지.”
    “미치겠네. 어쩌라는 거야. 학교를 때려치워?”
    아버지가 퇴근해서 들어왔다. 아버지는 우리가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지 빤히 안다는 눈치였다. 아버지는 골프에 빠져 있었다. 밥상에 앉으면 골프 얘기였다. 몇 개를 쳤는데 누구를 이겼다는. 내게도 가르쳐준다고 해놓고서 차일피일 이차저차. 더 말하고 싶지 않다. 어머니가 에어컨을 틀었다. 아버지가 불렀다.
    “현승아.”
    “예.”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
    “누나랑, 너랑, 둘 중에 누가 더 좋은 대학교 갈지는 두고 봐야 알아. 누나를 너처럼 여기 고등학교에 넣으면 네 맘이 편하겠니?”
    누나가 들어왔다. 녹색 줄무늬가 들어간 교복을 보자 마음이 약해졌다. 별로 안 입고 싶은 디자인이었다. 어머니 말처럼 자리가 하나 난다고 하더라도 내 차지라는 보장이 없었다. 인터뷰를 생각하면 영어가 딸렸다. 누나는 다시 1학년이었다. 재외국민특별전형 자격을 얻기 위해. 외국학교에서 3년을 채워야 하니까. 2학년으로 들어가면 2년밖에 안 되니까. 나와 연년생이었다. 동생과 같은 학년이 되는 걸 꺼리지 않았다. 조금만큼도. 우리는 말도 잘 안 섞었다. 남매라는 게 원래 그런 거다. 나한테 맞기 싫어서 누나는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런데. 누나가 그날은 특이하게도 말을 했다.
    “우리 학교는 뭐 다 좋은 줄 아나?”
    툭 던져 놓고 방으로 들어갔다.
    “너 지금 나 들으라고 한 말이야?”
    나는 농구공을 던졌다. 방문이 꽝. 아버지가 말했다.
    “성질 좀 죽여라. 네가 더 좋은 학교에 갈 수도 있어. 국제학교는 평범하잖아. 현지학교 다녔다고 그러면 독특하잖아. 어때. 여기 말 좀 배워 볼 생각은 없어? 유리한 스펙이 될 건데.”
    아버지는 좋은 자기소개서를 쓰려면 좋은 인생이 필요하다고 했다. 여가활동, 봉사활동, 학습활동, 교내활동, 대외활동, 기타 등등. 기타로 내 머리통을 때리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낙타. 웬 낙타? 나도 모른다. 왜 낙타인지. 타락을 떠올렸을까? 자기소개서를 잘 쓰기 위해 인생을 자기소개서 포맷에 맞춰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아버지. 뭔가 잘못됐다. 내가 인생에서 뭔가 잘못된 장비에 올라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낙타 등에 안장 없이 타면 얼마나 아플까를 생각. 그랬거나말았거나. 대학교 입시 때 냈던 자기소개서는 학원에서 대필해 줬다. 열 몇 대학교에 원서를 넣었다. 백 퍼센트 서류전형을 통과했다. 학원 선생님들이 코치를 잘해서 그랬을 것이다. 학과도 참 다양했다. 국제학부가 만만했다. 결국은 꾸역꾸역 버텨낸 현지학교 3년 생활이 자기소개서를 스펙터클하게 만들었다. 인터뷰도 연습을 많이 했다. 3년 가까이 사니까 놀랍게도 그 나라 말이 내 입에 조금 붙었다. 인터뷰할 때 그것을 활용했다. 일곱 개 대학교로부터 합격통보를 받았다. 한 군데를 정해야 했다. 농구를 가장 잘하는 학교를 선택했다. 농구한테 그 정도로는 보답해야 또 농구가 나한테 도움을 줄 것이니까.

 

    담임선생님 숀은 마음 터놓고 지낼 만한 최고의 친구였다. 몇 개월 사이에 한국말이 많이 늘었다. 존댓말과 반말을 섞을 줄 알았다. 아이큐가 높은 사람이었다.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안내실 아저씨가 현관에 와서 손님이 오셨다고 얘기했다. 나는 짐작할 수 없었다. 한국 사람이면 그냥 호수를 가르쳐주면서 들여보냈을 텐데. 어머니는 마트에 가고, 누나는 학원에 가고, 아버지는 골프 치러 가고 집에 나 혼자였다. 나가 보니, 숀이었다.
    “어? 선생님. 그거 뭐예요?”
    “이걸 한국말로 뭐라고 해요?”
    “총. 엽총. 그런데 웬일이세요?”
    “사냥 가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현승!”
    “내가 언제?”
    “지난번에요.”
    “내가요?”
    “아버지는 어디 가셨습니까?”
    “왜요?”
    “인사하겠습니다.”
    “없어요, 집에.”
    나는 골프 스윙을 해보였다. 숀이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냥 갑니다.”
    “함께 가자는 뜻이에요? 저랑요?”
    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나는 숀의 뒷자리에 앉았다. 스쿠터는 털털거렸다. 도시에서 벗어나자 논이 나타났다. 숀은 목적지를 정해 둔 상태였다. 머리카락이 날렸다. 숀의 어깨에서 엽총이 흘러내렸다. 멜빵을 당겨 바로잡아 주었다. 숀이 노래를 불렀다. 총이 또 흘러내렸다. 숀의 등과 내 가슴 사이에 총을 끼웠다. 총은 흘러내리지 않았다. 가슴이 아팠다.
    총을 쏘고 싶었다.
    숀의 취미는 사냥이었다.
    산의 초입에서 스쿠터를 세웠다. 총소리가 들려왔다. 메아리가 굉장히 분명했다. 장검으로 휙 일격을 가하는 모습이 눈에 그려지는 소리였다. 숀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나는 콜라 캔을 열었다. 우리는 걸었다. 마을의 집 밑에는 돼지가 살았다. 지주가 서 있는 빈 공간이 울이었다. 숀이 돼지를 향해 빈 총을 겨누었다. 총을 만져 보고 싶었다.
    “숀 선생님. 돼지 얘기 왜 하셨어요?”
    “무슨 말입니까?”
    “돼지가 뱀을 먹는다면서요. 그래서 돼지고기 안 먹는다 그랬잖아요.”
    숀이 산속을 걸으면서 띄엄띄엄 얘기했다. 나는 멋대로 숀의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사냥을 다닐 때 겪었던 실화. 멧돼지가 동굴로 들어가기에 입구에서 기다렸다. 동굴은 어두웠다. 총을 쏘면 총알이 튕겨서 자기에게 돌아올까 봐 나오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지났다. 긴장이 느슨해졌다. 그래도 기다렸다. 저녁이 왔다. 숀은 어둠이 산을 잡아먹기 전에 멧돼지를 들쳐 업고 내려가기로 했다. 랜턴을 켜고 동굴로 들어갔다. 끄악. 뱀이 우글거렸다. 그런데. 멧돼지는? 숀은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멧돼지가 보이지 않았다. 옛날 설화라면 그 속에서 처녀가 돼지에게 무릎베개를 내어주고 앉아 있었다고 뻥칠 수 있을……. 숀은 뱀들이 스멀스멀 움직이는 것을 보고 백스텝을 밟았다. 멧돼지가 끄어엉 울었다. 숀은 총을 떨어뜨렸다. 헤드랜턴 빛이 멧돼지를 비추었다. 멧돼지는 입에 뱀을 물고 있었다. 서너 마리가 꿈틀거렸다. 숀은 구토가 나왔다. 그는 내게 사냥을 함께 가자고 말하기 위해서 돼지 얘기를 꺼냈던 것이었다.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디서 뭐 하냐? 집에 왜 아무도 없어?”
    “사냥 왔어요.”
    “사냥? 그게 무슨 소리야?”
    “내일 말씀 드릴게요. 주무시고 오실 거죠?”
    “농구 코치 섭외해 놨다. 다음 주부터 스케줄 잡아서 해. 괜찮지?”
    “선수 출신이에요?”
    “그래.”
    “여기 사람이에요?”
    “미국 애. 너 영어도 좀 늘라고. 근데 사냥이라니, 뭔 소리냐?”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상황을 조곤조곤 설명했다. 동영상을 보고 연습하는 것보다 백 배 나을 것이다. 당장 코치를 만나고 싶었다. 아버지는 골프를 치다가 누군가의 조언을 들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농구 클럽을 알고 있었기에 코치 운운했을 것이다.
    새 학기에 숀은 전근발령을 받았다. 숀을 따라가서 총을 쏴본 것이 뭐 별거라고. 그 나라에서 있었던 일 중에서 기억에 남는 걸 얘기해 보라기에 주절거렸던 건데 자기소개서를 써준 선생님은 “그거야 그거!” 하면서 환호했다. 현지에서 겉돌지 않고 그 나라 속으로 쏙 들어갔다는 결정적 증거라면서. 그렇게 이용해 먹을 대상이 아닌데 숀은. 나한테 잘해 준 사람인데.

 

    끈적끈적한 날씨였다. 부모님과 누나는 호숫가 수상가옥으로 놀러갔다. 나는 점심을 먹으러 한국 식당에 나갔다. 한국인 골프 관광객이 많은 게 싫어서 정말 먹고 싶을 때만 가는 식당이었다. 국화를 만났다. 된장찌개와 제육볶음. 식당이 분주했다. 뷔페 접시를 들고 옥외 식탁으로 나갔다. 원탁에 빈 자리가 있었다. 한 사람은 백인이었다. 국화는 딱 보기에 한국인이었다. 묵묵히 밥을 먹다가 내가 말문을 열었다.
    “학교 어디 다녀요?”
    “…….”
    “일본 사람인 척하지 말고, 말해요. 학교 어디 다녀요?”
    “여기 아니에요.”
    “여행 왔어요?”
    “아니.”
    “에어포트 플라자 가봤어요?”
    “…….”
    “가봤느냐고요.”
    “세일할 때.”
    “거기 씨즐러 샐러드바 좋은데…….”
    “가봤어요.”
    국화는 숀보다 한국어에 서툰 것처럼 단답형으로 말했다. 괜히 말을 걸었다. 고등학생이 여행을 혼자 왔을 리는 없었다. 척보면 척. 부모님 따라와서 학교에 다니는 중.
    “한국 집은 어디예요?”
    “서울.”
    “서울 어디?”
    “강남.”
    툭. 툭. 빗방울이었다. 우리는 음식 접시를 들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빈 자리로 가서 앉았다. 국화가 먼저 앉고 내가 따라 앉았다. 스콜이 내렸다. 소리가 요란했다. 국화가 물었다.
    “농구복을 입고 다니시네? 농구 좋아해요?”
    “그렇죠.”
    “잘해요?”
    “파워포워드예요. 슬램덩크 알죠? 강백호 포지션이 거기예요.”
    “잘하냐고.”
    나는 전화기를 꺼냈다. 내가 뛰는 장면을 재생시켰다. 국화는 관심 없는 척하더니 동영상이 끝날 때까지 눈길을 떼지 않았다. 케빈한테서 집중적으로 받은 레슨은 스텝, 몸에서 힘 빼기, 공을 끝까지 보기 등이었다. 케빈은 레슨 전에 줄넘기를 1천 회씩 시켰다. 국화가 말했다.
    “같이 농구하는 애들, 여기 애들 같은데? 친하네요? 어떻게 사귀게 된 거예요? 많아요?”
    사람의 눈이란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게 돼 있다. 국화는 나의 경쾌한 스텝에는 관심이 없었고 함께 시합하는 아이들의 국적이 중요했다.
    “미치겠어요, 정말!”
    나는 학교 얘기를 풀어 놓았다. 국화는 접시에 떡볶이를 담아왔다. 내가 물었다.
    “국제학교 다녀요?”
    “아니에요.”
    “그럼?”
    국화도 나처럼 학교 얘기를 주르륵 풀어 놓았다. 한국 아이들만 다니는 학교가 있었다. 그 나라 북부 지역에 있는 아이들이었다. 몇 개 도시를 합하니까 한 학년에 한 반 이상은 된다고 했다. 모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졸업생 선배들이 대학을 다 잘 갔다고 했다. 한국 애들만 모여 있으니까 짜증난다는 국화의 말. 짜증이 난다 해도. 영어를 못 하니 국제학교 들어가기도 어렵다는, 어쩔 수 없다는 국화의 말.
    “과학실에서는 주로 뭐 해? 좋겠다.”
    “놀지 뭐.”
    “뭐 하고?”
    “게임도 하고, 음악도 듣고, 뭐 그렇지 뭐. 정말 끝장이야. 심심해.”
    “완전 천국이구나?”
    “천국이 아니라 변태야 변태. 근데 너희 학교 들어가려면 복잡해? 나도 그 학교로 갈까? 국제학교보다 그쪽이 당기는데?”
    “들어가는 건 안 복잡한데, 좀 비싸. 교장이 좀 밝힌대.”

 

    국화를 만난 뒤 라이프 사이클에 수영이 추가되었다. ‘낮에는수영하고 저녁에는농구하고 밤에는 연애편지 쓰고’에서 연애편지쓰는밤은 다음 단계. 국화네 아파트 수영장이 좋았다. 외부인한테서는 사용료를 받았다. 식당도 있었다. 국화는 움직이는 걸 싫어했다. 자기를 만나고 싶으면 수영장에 와서 전화 하라고 했다. 나는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전화를 걸었다. 국화가 나올 만한 시각에 맞춰 근육을 펌핑했다.
    11월이 되자 다시 학기가 시작되었다. 국화를 생각하면 그 학교로 전학하고 싶었다. 그런데. 승용차로 두 시간. 기숙사 생활. 한국 학생들이 대입학원생들처럼 공부를 한다는 것. 그럴 거면 차라리 그대로 있자. 연애편지나 쓰자. 열심히.

 

    부모님은 그 나라에 남고 나와 누나는 대학생이 되어 돌아왔다. 1학년 2학기 때 어머니가 돌아왔다. 아버지보다 우리가 더 신경이 쓰인 것이었다. 나는 1학년 때 학과 대표를 했다. 동아리는 당연히 농구. 1학년 때는 선배에게 밀려 대회에 출전하지 못했다. 그 선배가 졸업했다. 나는 주전이 되었다. 대학별 동아리 대회가 코앞이었다. 학과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다.
    “김현승 학생이시죠?”
    “네.”
    “저기…… 학과사무실로 잠깐 올 수 있나요?”
    “왜요?”
    “전달해 드릴 사항이 있어서요.”
    “전화로는 안 되나요? 지금 바쁜데.”
    “저기…… 확인할 것도 좀 있고. 학교 본부에서 하는 일이라……. 언제 바쁜 일 끝나요?”
    “농구 연습 끝나고 갈게요. 그래도 되나요?”
    “네. 그럼 몇 시?”
    아. 이런 짜증 폭발. 물론 그때는 그랬었지. 조교가 왜 그렇게 더듬 더듬 더듬 더듬 …… 더듬! 나라도 그랬을 거야. 너학교에서잘릴것같은데 내가말해줘야하는데. 근데 그건 사실이니? 너희 아버지가 회사 그만두고 자영업 한 거? 조교는 그런 대화를 열어야 할 처지였으니까. 그래도. 나는 몰랐으니까. 농구 끝나고 샤워까지 하고 여유 있게 학과 사무실 문을 열었다.

 

 

 

 

   《문장웹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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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음 없이 김지연 안지는 이른 결혼을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아니, 그걸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이혼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안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그때 이혼한 일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늘 그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여러 말들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은 안지의 비밀은 아니었지만 먼저 나서서 밝히지도 않았다. 어릴 때 안지는 무척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그런 표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속해야 하는 집단에서 튀지 않는 사람, 아주 평균적인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 찬반투표를 할 때면 눈치를 보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서 좋아하고 친구의 것과 비슷한 브랜드의 신발을 사서 신었다. 친구들이 싫어하는 선생을 따라서 싫어했다. 사실 안지는 그 선생에게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다가 술술 흘러나온 그 선생에 대한 욕을 듣고 재빨리 노선을 바꿔 함께 욕을 했다. 한동안 안지는 수학 시간마다 왜 애들은 저 선생을 싫어할까? 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더 열심히 선생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수학을 가르친다는 점만 빼면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쉽게 답할 수 없는 내용을 골리듯 물어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생들한테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뭔가 잘못 알고 섣불리 화를 냈을 때, 그러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선생들은 그러게 헷갈릴 만한 짓을 왜 하고 다니느냐고 도리어 짜증을 부렸는데 그 선생은 재빨리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알았어. 미안해. 가끔 안지는 머릿속으로 그 목소리를 재생해 보곤 했다. 그 때문에 선생이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싫어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나?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안지는 대학에 갔고 연애를 했고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 결혼도 했다. 아주 평균적인 삶이었다. 조금씩 빠르기도 했다. 조바심이 나 있었으므로. 자신도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식도 올리기 전 임신을 해 낳은 아이가 막 돌을 지난 참이었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계속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낙태를 밀어붙이지 않은 것을, 시간을 끌다가 영영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을, 어떤 결단력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새로운 여자가 생겼을 때는 안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겨우 육 개월을 만났을 뿐

  • 관리자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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