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감상 소설

  • 작성일 2017-07-01
  • 조회수 4,051

[단편소설]



감상 소설



양선형





1927년(30세) ― 눈부심을 두려워한 나머지 태양이라는 것이 귀두처럼 역겨운 장밋빛이며 요도처럼 열려 오줌이 나온다는 사실을 결코 알지 못했다면, 의문으로 가득 찬 눈을 자연 한가운데서 뜨는 것은 아마도 쓸데없는 일이리라. 1)

1) 조르주 바타유, <연보>


그는 어느 날 홀연히 석방되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날짜를 가늠하는 일을 포기한 상태였다. 외롭고 지루했다. 그가 기거하는 옥사 앞에 우두커니 멈춰선 교도관이 그를 향해 세 번 박수를 쳤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그, 일생의 대부분을 퇴락한 교도소의 비좁은 닭장에서 소일한 그의 형량이 만기에 다다랐다는 뜻이었다. 교도관이 그의 어깨를 조심스레 붙잡았다. 교도관은 야위고 수척했다. 악력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교도관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바깥을 향한 철문이 덜컹거리며 열릴 때 그는 홀가분한 기분보다는 눈앞이 아득해지는 당혹감을 느꼈다. 눈부신 햇빛은 교도소 안뜰로 비쳐들던 햇빛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달랐던 것은 기분이었다. 그의 나이, 그의 얼굴, 그의 복장이었다. 그는 석방 절차에 필요한 몇 가지 서류를 작성했다. 볼펜을 쥔 손이 달달 떨렸다.
그는 교도소 직원에게 대필을 부탁했다. 어디로 가십니까. 직원이 물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술이 석회반죽이라도 되는 것처럼 끈적거렸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말하지 않겠다. 행적을 노출하지 않겠다. 나의 흔적과 관계하는 집요한 추적이며 부주의한 단서들을 궁벽한 언어의 독방에 억류하겠다. 침을 질질 흘리거나 껌을 씹거나 부르튼 입술의 상처를 겸연쩍게 보여주거나 아니면 거짓말만 하겠다. 죗값을 저울질하는 도살장의 무감한 행정을 향해 내가 사육한 기름진 거짓말을 보여주겠다. 이러한 다짐이란 그가 형무소에서부터 끈질기게 실천했던 고집이었다. 그는 입을 다물었다. 교도소 직원이 서류 공란에 인접한 여인숙의 주소를 적었다. 킥킥 웃었다. 그는 직원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직원이 얼른 고개를 떨어트렸다.
화창한 날씨였다. 그는 교도소 앞 버스정류장에 붙은 대자보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모르게 낯익은 문체였다. 계속 눈으로 따라 읽으니 언젠가 그가 한 잡지에 발표했던 소설의 한 단락을 제멋대로 잘라낸 파본이었다. 그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는 많은 일들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정류장 뒤편의 풀숲에 들어가 오줌을 쌌다. 오줌발이 튀어 바지 밑단이 축축해졌다. 풋풋한 냄새가 났다. 그는 음경을 세차게 털었다. 그는 갈 곳이 없었다. 아니면 당장이라도 향할 장소를 마련해야만 하는 처지였다. 교도소에 들어가기 전엔 정신없이 글을 써댔다. 지금은 아무것도 쓰지 않는다. 쓰기를 그만두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쓰는 행위 자체를 어찌할 수 없어서 아무렇게나 문장을 휘갈기는 사람들 또한 있다. 글을 쓰면 된다. 쓰고 있다는 자각이, 구태여 마음을 담아 전하고 싶은 진의가 없어도 된다. 그것은 생긴다. 한 문장씩, 아니면 가능한 대로 한 페이지씩. 그는 다시금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는 버스를 기다렸다. 지평선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쨌든 삶의 입장에서 글을 쓰는 행위란 대체로 생활의 중심에 땅굴을 짓는 일에 가깝다. 과거의 그가 그러한 땅굴에 유기된 채 대책 없는 홀로를 타진하는 인간이었다면, 지금 그는 지하의 땅굴을 삶의 출구로 오인하며 고갈된 역량의 바깥을 향해 나아가고자 한다. 그러나 삶은 형무소가 아니다. 그것은 착각이다. 그는 영원한 범인이 될 수 있을지언정 영원한 죄인이 되지는 못한다. 그 증거로 그는 이렇게 자유의 몸이 되었지 않은가. 그는 자신을 감금하던 온갖 내적 유산들을 깡그리 잃어버린 기분이다. 어쩌면 그에게도 다시 시작할 용기가 있을 것이다. 외람된 구석이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쥐구멍에 틀어박힌 들쥐처럼 넙죽 엎드린 채 제 몫의 치즈를 갉아먹는다. 그가 사랑하는 선량한 딸이 그가 거주하는 구멍 입구에 먹다 남은 치즈를 놓아 둔 것이다. 쥐를 신기하게 바라보던 딸은 곧 쥐를 포획하는 사냥꾼이 된다. 징그러움을 학습하는 것이다. 딸은 그가 쏘다니는 길목에 쥐덫을 설치하고 그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그는 그러한 덫을 향해 머리를 들이밀어야 한다는 압력을 느낀다. 빚을 갚기 위해. 마치 변덕스러운 어린아이의 욕망에 헌신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는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편지봉투 한 장이 가지런하게 접혀 있었다. 봉투 안에는 형무소에서 종사한 노역의 대가로 지급된 얼마의 푼돈이 있었다. 세어 보니 스무 장도 채 되지 않았다. 버스가 다가왔다. 먼지구름이 자욱했다. 버스가 제자리에 정차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제 면전을 휑하니 스쳐가는 버스를 향해 손사래를 쳐야 했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기사가 물었다. 그는 자신이 막 출소했으며 가까운 소읍의 여인숙에 짐을 풀 예정이라고 말했다. 못 가요! 기사가 말했다. 썩 꺼져요! 기사가 혓바닥을 널름거렸다. 그는 짊어진 크로스백에서 늘씬한 산탄총을 꺼내 버스기사의 관자놀이에 들이댔다. 물론 얼떨떨하게 버스 좌석에 앉아 머릿속으로. 어림없는 상상이었다. 후덥지근한 날씨 때문에 제복을 입은 기사의 등짝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기사가 노래를 흥얼거렸다. 상상은 곧 순경들이 하품을 하고 얼치기 농담을 주고받는 교도소의 정문을 향해 버스를 전진시키는 장면으로, 굉음과 함께 바리케이드가 파열하는 장면으로, 억울함에 사로잡혀 있던 친구들이 배를 붙잡고 꽃을 토하며 그를 환영하는 장면으로, 죄수들이 열을 맞춰 버스 안으로 승차하는 장면으로 이어졌다. 장면들은 마치 스냅사진 같았다. 한 가닥의 빨랫줄에 걸려 휘청거리는 스냅사진들의 단속적인 드라마처럼 말이다. 죄수들은 감동한 모양인지 그의 인솔을 아주 잘 따랐다. 마후라가 매연을 뱉어내면 도로에 검은 그을음이 생겼다. 상상은 그걸로 끝이었다. 버스가 전복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작가가 되려면 그러한 위험을 미리 제거해야 했음에도.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종점에서 하차할 예정이었다.


*


그는 교도소에서 한 권의 책만을 읽었다. 계속 읽었다. 그는 망설였다. 그는 마디마디가 옹색하게 구부러진 손가락을 가졌다. 그는 첫 문장을 썼다. 그것은 그가 여인숙에 도착한 다음 삼일이 지난 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는 막연하게 산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산책을 하지 않았고, 산책하는 것처럼 글을 쓰자, 아니면 산책을 시도하듯 대문을 열고 갑작스레 들이친 햇볕에 당황한 사람처럼 뒷걸음질을 치자, 그것을 옮겨버리자, 순간의 놀라움에서 우연한 지속의 궤적으로 부리나케 나아가자, 그렇게 생각했다. 첫 문장은 이러하다. 나는 소설을 집필하는 대가로 국가의 녹을 먹었다. 봉급으로는 고무젖꼭지를 샀다. 그것은 내가 사용하는 물건이 아니라 나의 어린 딸이 사용하는 물건이었다. 구태여 회상으로 이 글을 시작하는 까닭은 회상이 글쓰기를 통해 편리하게 오염시킬 수 있는 누덕누덕한 헝겊 조각이기 때문이다. 딸은 힘차게 고무젖꼭지를 빨아댔다. 나는 딸을 저주했다. 딸에게 윽박을 질렀다. 나의 영특한 딸은 금세 내 마음을 이해했다. 칭얼거리고 싶을 때마다 고무젖꼭지를 물어뜯었던 것이다.
사실에 근접하는 글을 쓰고 싶지만 졸지에 부정확한 서술로 사실을 훼손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을 훼손하는 일이란 간혹 사실을 능가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사실을 궁지로 몰아넣고서 겁에 질려 빈사의 낯짝으로 창백해진 사실이 어떤 당돌한 용기를 획득하는지, 귀엽게 빌빌거리는지, 그대로 횟배를 까뒤집고 게거품을 흘리며 나자빠지는지, 사실의 운명이 벌써 희끗희끗한 갈기를 털며 마구간 너머를 아득하게 응시하는 절름발이 노새의 신세는 아닌지, 이러한 방식의 괴이한 변이를 권장하며 그것을 기꺼이 방관한다면 서술은 얼마든지 앞으로 밀쳐질 수 있다. 그러므로 글쓰기는 한없이 멍청한 방향으로 향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폐곡선을 그리는 곡예에 열심인 것이다. 박약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박약의 변주를 위해서 말이다. 순식간에 고꾸라져서 무엇이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더군다나 책상 앞에 앉은 작가에겐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작가란 고요하고 따분하게 전율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그는 거기 머무른다.
퇴행한 서술의 근육을 재활하기 위해선 고정된 채로 뇌리에 붙들려 있는 사실에 똥물을 끼얹어야 한다. 똥물이 아니면 황산. 증기를 펄펄 피워내며 이글거리듯 허물어지는 부동성에 도착적인 아름다움을 부여해야지. 이를테면 감히 그를 범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무능한 괴물의 아름다움. 옥사에 불합리하게 격리된 채 제 뱃가죽을 쥐어뜯는 총천연색 식물 기계. 이야기가 아니라 잡음. 기억이 아니라 잡음. 그가 교도소에서 읽은 단 한 권의 책은 딸이 쓴 장편소설이었다. 그는 생각했다. 딸은 악마의 문학을 실천하고 있군. 나를 닮아 언어적 재능이 남다르군. 허황된 하품의 무덤을 새빨간 부지깽이로 마구 찔러 보기. 가만한 세계에 조작된 환란을 삽입하기. 성애의 포인트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군. 내가 있었다면 보다 이로운 글쓰기의 방법들을 일러주었을 텐데. 앞길이 캄캄하군. 그러나 딸의 소설은 연이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지금 글쓰기의 삐뚤빼뚤한 회랑을 눈먼 채로 거닐고 있는 사람은 바로 그였다.
그는 딸에게 일러주고 싶다. 소설은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삶은 피규어가 아니니까. 나도 그것은 안다.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글쓰기는 도박장의 망가진 슬롯머신이지. 그것은 아무리 코인을 넣어도 참된 행운, 또한 도저한 불행에도 가까워지지 않는 아둔한 반성이란다. 내겐 코인을 넣는 순간만이 남지. 짤막한 기척. 코인을 움켜쥐는 순간. 코인을 잃는 순간. 꼬리를 자르는 순간의 잘린 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을 분할하는 순간. 공허와 코인을 교환하는 바로 그 순간을 쉽게 망각할 수는 없겠지. 이러한 순간에 미혹된 작가는 글쓰기를 통해 아무도 찾지 않는 까마득한 종탑을 짓고 엄격한 표정으로 작가를 내려다보는 노름판의 우상을 향해 매일 자정 종을 치는 부질없는 의식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물론 나의 경우엔 그렇다는 말이다. 네가 읽을 소설이 아니라 내가 쓰는 소설에 관한 이야기이다. 네 생각이 네 서술을 이끄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네가 자초한 서술이 너를 집어삼키며, 네가 점점 원숙한 서술의 방법들을 사용하게 될수록 너는 또한 너라는 괴물을 장려하고 재차 포획하는 이율배반적인 회로를 조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 퇴색한 회로의 은행으로 말할 것 같으면 기계 장치의 장식적인 무용성으로 빽빽하게 얽힌 골렘의 형상, 정수리에 뿔처럼 박힌 치솟은 굴뚝으로 희뿌연 연기를 토해 내고 있는 폐기 콜라주, 증기선의 불우한 화부(火夫)를 집어삼킨 석탄 트럭, 산패된 부속들이 가득 쌓인 고철장의 정상에 수직으로 꽂혀 펄럭이는 낡은 허수아비의 모습이다. 물론 나의 경우엔 그렇다는 말이다.
그가 교도소에서 딸의 소설만을 반복해 읽었던 것처럼 그는 딸과 함께 지냈던 모든 순간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머릿속으로 그 기억을 수차례 상연했다. 그것을 더 잘 서술하기 위해. 그러나 서술이란 애초에 그의 머릿속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말벌처럼 붕붕 소리를 낸다. 딸을 에워싼다. 떼를 지어. 뙤약볕 아래, 쨍쨍한 대로변에서. 그는 눈을 감아버린다. 그가 신중한 제스처로 선별한 회고적 언어와 정제된 수사들이 사실 딸의 얼굴을 뭉개버리는 말벌들을 위한 벌집을 짓는 일이었음을, 견고하며 칸칸의 모양이 일치하며 달콤하고 투명하게 반짝거리는 관능의 벌집, 인간과 적대적으로 관계하는 말벌들의 세계, 애벌레들이 꿈틀거리는 아늑한 말벌들의 가정. 말벌 텍스트를 비유로 이해하는 것은 말벌들의 치명적인 독(毒)이 가진 무한한 잠재성을 순화시키기 위해서이다. 말벌 텍스트는 세계의 축소된 모형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세계 내부에서 인간을 위협하는 다른 세계이다. 말벌들의 꽁지에 얻어맞은 딸의 얼굴은 이제 살점들이 떼로 합창을 하고 무너진 윤곽선이 벌겋게 부어오르는 난장이 되었다. 어떠한가. 그는 항상 딸을 사랑해 왔다. 소설을 완성하면 딸에게 보여줄 심산이었다. 딸을 찾아가면 딸은 기뻐할까. 원고를 읽어 줄까. 딸은 내게 반감을 느끼고 있을까. 적의를 느끼지는 않을까. 딸은 왜 내게 관심이 없을까. 아무튼 그는 소설을 써야 했다.


*


그가 보위부의 날조에 의해 B급 내란음모자 혐의로 체포되었을 당시, 딸은 그가 사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장소에 위치한 공립 기숙학교의 학생이었다. 재판에서 그의 형량이 확정된 후 딸의 호적은 자연스레 보위부 산하의 보육원으로 이전되었다. 그는 딸에게 서신을 보냈다. 걱정이 무척 되는구나. 소식 전해 주렴. 교도소로 답장을 보내온 이는 딸이 아니라 보육원의 원장이었다. 원장은 교활한 남자였다. 그는 원장이 보육원으로 발송한 자신의 서신을 횡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가로채고 있다고. 알 수 없는 일이다. 원장은 답장에서 딸이 매우 우수한 학생이라고 썼다. 간혹 신경질적인 언행으로 급우들과 소소한 마찰을 빚긴 하지만 그러한 문제를 제외하면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고 어른스러운 학생이라는 것이다. 특히 언변이 뛰어납죠! 원장은 하루걸러 서신을 보내왔다. 따님은 오늘 교내 화학 경시대회에서 만점을 받았습죠! 길고 하얀 다리를 쭉쭉 뻗으며 걸었습니다! 지도자 각하와 포옹을 했습죠! 저는 사진을 찍었고요!
따님께선 오늘 교내 대강당에서 손수 작성한 에세이를 낭독했습죠! 건군 기념일 행사였습죠! 행사에는 전교의 학생들이 모두 모였습죠! 학생들 모두 피로한 표정으로 따님의 낭독을 얼떨떨하게 청취하고 있었습죠!
연단 아래쪽에 가로놓인 의자에는 행사에 참석한 당원들이 교만한 자세로 앉아 있다. 팔걸이에 조각된 은빛 사과를 쓰다듬는 그들은 또한 당일 치러진 낭독 대회의 심사를 맡은 장학사들이기도 하다. 강당에 도열한 여학생들은 차렷 자세로 전방을 바라본다. 교사들이 분대 단위로 집합한 여학생들 사이를 거닐며 열 밖으로 삐져나온 무릎을 옷걸이 모양의 회초리로 후려친다. 장내는 적막하다. 딸이 연단 위에 선다. 가늘게 찢어진 눈매와 이마를 시원스럽게 드러내며 뒤통수를 향해 팽팽하게 묶인 머리카락이 딸의 고집스러운 성품을 드러내 보여주는 듯하다. 그녀는 당의 휘장이 날염된 푸른 종이케이스를 들고 있다. 그녀는 연단 중앙에 마련된 강연대에 종이케이스를 차분한 동작으로 내려놓는다. 엄숙한 표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엄숙함이란 가장된 엄숙함이 아니라 그녀가 견지하는 태연자약한 침묵이라고 서술하는 편이 적당해 보인다. 그녀는 낭독 직전 한 호흡을 쉬고 숨을 고르는데 이때 섬약하게 새어 나오는 호흡이 낭독을 듣는 사람들의 의식을 저절로 곤두서게 한다.
부동 상태로 얼어 있는 학생들의 인중에 꼬물꼬물 땀방울이 맺히고 있었습죠! 그만큼 무더운 날씨였습죠! 원장의 귓불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그것은 마치 방울져 녹아내리는 촛농처럼 보인다. 목구멍이 간질거린다. 원장은 기침을 참기 위해 혀끝을 입천장에 붙인다. 혀뿌리가 얼얼해진다. 따님은 양팔을 힘차게 휘저으며 낭독을 시작했습죠! 단추를 끝까지 채웠는데도 소매가 헐렁하게 남는 따님의 야윈 팔목이 또한 따님이 견지하고 있는 불면의 정신을 반영하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공중을 가로지르고 있었습죠! 저는 매혹되었습죠! 매혹될 수밖에 없었습죠! 당신이 그 모습을 직접 보셨어야 했는데! 어땠을까! 저절로 어깨가 들썩거리지 않았을까! 공기의 합력이 비스듬히 쌓인 블록처럼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매혹된 사람은 제 주제가 우습다. 심신이 불안정해지고 입으로 새를 낳는 사슴처럼 목이 불룩하게 늘어진다. 발가락이 감전된 것처럼 빳빳해진다. 따님의 발제는 당신과 같은 악질적인 레지스탕스들을 처형하기 위한 여러 방법에 관한 공학적인 보고서에 가까웠습죠! 웅변조로 발화되는 딸의 문체는 아직 서툴고 머뭇거려서 훗날 정말 성공한 작가가 되었을 때의 무분별하며 또한 유려한 광기를 어스름 속에 붙잡아 두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는 훗날을 예감할 수 있다. 보고서를 꾹꾹 씹어 읽는 딸의 단호함에서.
굵은 대못에 의해 팔다리가 결박된 당신의 육체가 돌아가는 풍차의 칼날 달린 네 쪽 날개 합판에 매달려 피를 쏟아내고 있었습죠! 잔혹한 광경이었습죠! 어눌함의 어둑한 터널을 지나 점진적으로 율격을 획득하는 따님의 우아한 억양이 보고서에 기술된 상상적인 풍차를 회전시키고 있었습죠! 피떡이 된 당신을 쥐어짜는 풍차가 한가로운 들판에 휘휘 뿌리는 혈청의 선명성은 이미 관성이 붙은 핏빛 풍차의 회전을 자축하는 신실한 군악대 나팔수들의 모습을 밀교의 굿판을 벌이는 무당들처럼 보이게 하였습죠! 그러나 굿판 따위 알게 뭐람! 저는 그런 의식엔 조금도 관심이 없습죠! 당신의 사지를 찢어발기기 위해 불알을 기른 황소들은 또한 지도자가 그들의 맹목을 치하하기 위해 직접 하사한 황금 투구를 눌러 쓰고 있었습죠! 발굽을 지면에 맞붙이고 콧김을 뿜으며 동서남북으로 나아가는 네 마리 황소들의 중심에서 당신이 꿈꿀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신의 육체를 훼손하기 위해 설계될 다른 기계였습죠! 다른 기계! 다른 징벌! 당신은 갑작스레 눈을 뜹니다! 당신은 누워 있습죠! 여전히 팔다리가 묶인 채! 천장에는 시뻘겋게 달궈진 쇳덩어리가 도르래를 통해 결박되어 있습죠! 달랑거리고 있습죠! 당신은 이곳이 당신의 감상을 실험하기 위해 마련된 차단된 큐브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습죠! 쇳덩어리 표면엔 어떤 문장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습죠! 드러누운 채로 뜨거운 쇳덩어리의 문장을 올려다보는 당신은 죽음 이후 입관될 빛나는 금자탑에서 또한 홀로 남겨질 당신이 대대로 외우고 암기해야 할 비문(碑文)의 영구적인 공포를 상상하고 있습죠! 도르래의 밧줄을 도끼로 자르고 낙하한 쇳덩어리가 당신을 짜부라트리면 당신은 비석에 새겨진 금언의 생육(生肉)에 근접합죠! 매캐한 누린내와 타들어가는 살점, 무두질한 가죽에 이식된 금언의 관능이 병풍처럼 첩첩이 겹쳐지는 섬유의 무늬, 드디어 당신은 지도자가 거하는 관저 침실 바닥을 장식하는 아름다운 융단이 되었습죠!
낭독은 계속되었습죠! 이윽고 따님은 모발도 없이 매끄럽게 깎인 당신의 대가리를 칼로 째고 거기 멸균된 플라스크 속에 기괴한 모양으로 헝클어진 한 송이의 목련을 툭, 하고 꺾었습죠! 분명 죽은 시궁쥐의 사체인데 다 쓴 걸레 모양으로 까발려 버려진 더러운 기저귀처럼 보였습죠! 따님이 당신의 두뇌를 돌담에 짓이기고 있었습죠! 축축하고 찐득찐득했습죠! 연단 아래에서 낭독을 청취하는 사람들의 지친 얼굴이 어느새 헐벗은 두려움으로 창백하게 변하고 있었습죠! 그들은 경악했습죠! 누구도 따님의 웅변을 억지할 수 없었습죠! 보고서를 읽는 딸의 음성은 깐깐하고 정확하다. 그것은 도축된 언어의 팔과 다리를 누덕누덕 기워 만든 크리스마스트리처럼 행간의 안전한 휴지부를 허락하지 않는다. 딱딱하게 이어지던 낭독은 웅변의 진행과 함께 감상적인 어조로 변한다. 그것은 위대한 낭독자들의 점진적으로 고양되는 발성을 복제하고 있긴 하지만 탁한 음조의 딸의 목소리와 혼합되어 기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학생들은 기절 직전이다. 등짝으로 땀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습죠! 따님이 당신의 비육한 사체에서 짜낸 미끌미끌한 언어의 비눗물이 강당에 모여 아연하게 소스라치는 몽매한 뼈다귀들을 세척하고 있었습죠! 뼈다귀들은 새것으로 번들거리고 있었지만 그것은 죽음을 재차 삶으로 인도하는 일이 아니라 죽음에 기름을 부어 부패한 해골의 판판한 이마에 새로운 광채를 부여하는 일에 가까웠습죠!
따님은 잔잔하지만 또한 틈틈이 서늘한 공백을 간직한 말씨로 당신을 처형하기 위해 조립된 기계들의 환상적인 효과들을 나열하고 있었습죠! 당신의 언어를 온전히 상속받은 따님이 오직 당신을 살해하기 위하여 그러한 눈부신 묘사적 기예를 발휘하고 있었습죠! 온몸을 휘돌아 나가는 하나의 감정, 간질거리는 감정, 간질거림을 초과한 다음 이미 제어할 방법 없이 부풀어버린 감정, 감정의 머리에서 무한히 하늘을 향해 자라나는 공중 철탑이 반신욕에 환장하는 늙은 신(神)의 되바라진 엉덩이를 능멸하는 것처럼! 그래! 바로 그것이로구나! 당신을 꿰뚫기 위해서라면 어떤 도구도 취할 수 있었습죠! 담배 한 개비, 젓가락 한 짝, 바늘 하나, 어떤 사물도 당신을 극형에 처넣을 수 있는 날카로운 열쇠가 될 수 있었습죠! 만일 병아리 한 쌍이 당신이 잠든 교도소의 독방으로 입양된다면 병아리들은 음험한 속내로 당신을 암살할 계획을 품고 있습죠! 금붕어들도 음모를 꾸미고! 당신은 그러한 작은 생물들을 얼마든지 굶겨 죽일 수 있겠지만 지금 당신이 혼곤한 잠에 빠졌다면 어떻습니까! 당신의 귓속으로 파고든 딱정벌레 한 마리가 자신이 은신한 당신의 두뇌를 평생을 게으르게 축낼 만한 풍요로운 곳간처럼 여길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흥분은 수그러지기 마련입죠! 더디게 따라오던 생각이 초라해진 감상의 뒤꿈치를 밟습니다! 추월해 버리는 겁니다! 따님은 따님을 응시하는 수많은 시선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작업을 실현하는 일에 몰두하였습죠! 따님의 정념은 비애와 은밀한 즐거움과 신경쇠약과 해방적인 기쁨을 산만하게 오르내리는 잔인함에 대한 열띤 순진성을 지니고 있었습죠! 그것은 극도로 소심한 작가가 자신의 서술을 뾰족하게 깎는 강박적인 회랑의 말미에서 공을 들여 설계한 정육면체의 밀실을 연상시키기도 하였습죠! 무용하고 과장된 사물들의 끈질긴 배치, 설득할 수 없는 내밀하고 사소한 세부들로 가득 채워진 그녀만의 아방궁을 말입죠! 따님은 자신의 낭독을 올려다보는 청중들을 압도하거나 배척하면서 개인적인 바리케이드, 다시 말해 폐기물과 고철 더미와 당신의 새빨간 혈흔이 채 마르지 않은 처형 기계들을 겹겹이 쌓아 매우 과시적으로 여겨지는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있었습죠! 그와 더불어 호소력을 놓아버리지 않는 단속적인 발음, 침착하고 근엄하며 진지한 태도를 겸비하고 있었습죠! 뒤틀린 것들이 한꺼번에 혼재되어 있었고, 그것들이 부딪쳐 번뜩이는 불똥은 난해한 궤적을 그리며 머릿속의 권태로운 어둠을 소란스럽게 했습죠! 그러다 그대로 꺼져버렸습죠! 그것은 그저 음향이었으니까!
그녀가 보고서의 마지막 페이지를 낭독한다. 청중들은 얼어붙어 박수조차 치지 못한다. 낭독을 마친 그녀는 강연대를 쓰러트리며 제자리에 혼절하고 만다. 허구의 바리케이드가 허물어진 것이다. 낭독의 호흡을 고려할 때 연단에 널브러진 그녀의 모습은 마치 고도로 연출된 기획처럼 여겨지는 구석도 있다. 역시 알 수 없다. 원장이 단상 위로 뛰어오른다. 바지에 오줌을 지린 것처럼 부자연스러운 뜀박질인데, 원장은 자신을 마비시킨 낭독의 영향력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당원들은 미간을 찌푸린다. 나자빠진 그녀의 다리가 거칠게 뒤흔들린다. 원장은 얼른 그녀에게 가져온 담요를 씌운다. 담요가 꿈틀거린다. 원장은 맥없이 처진 그녀의 몸을 들쳐 업고 연단 위에서 내려온다. 연이어 당원들 앞으로 다가가 악수를 하고 차렷 자세를 취하고 그러한 의례를 되풀이한다. 진이 빠진 그녀의 머리가 원장의 어깨에 목만 남은 불상처럼 놓여 있다. 당원들이 그녀를 힐끔 치어다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위인이 되시겠군! 이내 행사가 마무리된다. 원장은 여태껏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그녀를 업고 기숙학교 복도를 걸어간다.
저는 기대하였습죠! 텅 빈 관능의 짓밟힌 알밤 껍질을 떠올리게 하는 그녀의 엉덩이를 더듬거리며! 등짝에 밀착된 그녀의 가슴이 고르게 오르내리는 것을 은근하게 감지하면서! 아 정말 좋다! 세상이 망해도 좋다! 귓속의 솜털이 쭈뼛거린다! 복숭아뼈가 시큰거린다! 좆이 다 빠지겠다! 불모의 모래성을 운반하듯 조심스레 전진하면서! 이 시간이 영원했으면! 그녀를 발가벗겨야겠다! 오일을 발라야겠다! 성가신 잡초들은 모두 베어버려야겠다! 짙푸른 언덕을 올라 거기 캄캄한 구덩이를 파고 홀로 장(葬)을 치르는 외로운 지게꾼처럼! 그녀를 취해야겠다! 서신을 작성하는 이 순간에도 몸이 달아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빠른 시일 내에 그녀와 잠자리를 가져야겠다! 원장으로서 내가 행사할 수 있는 온갖 치졸한 협박과 비열한 유혹의 기술들을 모두 동원해야겠다! 밑그림을 그려 보겠다! 하하! 홍홍! 힝힝! 당신은 저를 어찌할 수 없습죠! 저는 이미 그러한 계획을 실천에 옮기는 중이니까! 당신은 독방에서 제 발가락이나 빠는 모자란 인간이니까! 말하자면 저는 직전에 도달해 있습죠! 당신의 따님이 교탁 위에 올라 벌을 서고 있으면 저는 슬며시 다가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립죠! “그러지 마라!”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 “그만 교탁에서 내려와라!” 달콤하게 속삭입죠! 그녀는 다리가 부러진 노새처럼 깜찍한 눈빛으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고요!


*


원장 개새끼. 후장을 찢어버릴 새끼. 그는 생각한다. 그는 원장이 근무하는 보육원 입구를 서성거린다. 원장이 나타날 때까지. 그러니까 원장이 아직도 원장이라면, 원장이 쭈글쭈글한 입술로 보육원의 고아들을 희롱하는 탐욕스러운 얼간이라면, 지팡이를 짚은 늙은 원장이 절뚝거리며 귀갓길에 올라 생기라곤 터럭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입술을 비죽이 모아 휘파람을 시도한다면, 그것은 매일 아침 항정신성을 투약하는 저 깡마르고 가소로운 생물 귀두가 오늘 모처럼 감동의 눈물을 찔끔 쌌기 때문, 지금 원장을 추격하는 그는 옷섶에 늘씬한 사냥용 산탄총을 감추고 있고, 원장의 걸음걸이는 진척되지 않고 다만 어정거리듯 지지부진해서 원장의 뒤를 밟는 그 또한 앞서가는 원장이 적당한 간격으로 멀어질 때까지 머뭇거리는 거리를 유지하는 중이다. 황량한 저지대의 풍광이 저물녘의 어스름 속에서 장밋빛 아마포를 뒤집어쓴다. 빽빽한 공동주택의 먼지 두텁게 앉은 난간들에는 퀼트 모양으로 널린 빨래들 사이로 소년들의 머리가 냉골에 기생하는 못생긴 버섯처럼 돌연하게 불거졌다 순식간에 지워진다. 그는 그 광경을 바라보지 않는다.
죽은 지도자의 눈알을 물고 날아가는 까마귀들. 죽은 지도자의 창자를 물고 날아가는 까마귀들. 그것들은 사라진다. 거열형에 처해진 지구의 값비싼 불알을 적출하기 위해 우주에서 날아오는 외계의 포클레인. 그것은 공중에 떠 있다. 귀여운 들쥐가 불쑥 얼굴을 내민 악취 나는 하수구에서는 청회색 광채가 은은하게 새어 나온다. 그는 본다. 흘러나오는 광채가 마치 서서히 유출되는 허상의 분진이듯. 어스름은 구겨진 신문지 같다. 그 신문들은 그의 마지막 소설이 수록된, 그러니까 이십여 년 전에 간행을 중지하여 더는 연재를 재개할 수 없는 만료된 헛짓이 수록된, 그러나 그가 언젠가 딸의 도움을 빌려 소규모 출판사에 앙앙 생떼를 부려 억지로 출간하게 될 말년의 양식을 예감하게 한다. 물론 그는 그때까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이 소설이 계획한 것보다 조금만 일찍 망가진다면. 이미 그러고 있다. 원장은 절룩거리며 버려진 신문지가 창궐하는 굴다리의 어둠을 향해 나아간다. 그는 원장에게 가깝게 다가선다. 원장의 뒤통수에 총구를 들이댄다. 총구의 냉기를 감지한 원장이 흠칫 놀란다. 그는 목숨을 구걸하는 원장을 향해, 뒤축 뜯어진 장화처럼 무릎 꿇은 원장, 그 삶에 대한 처량한 집념을 향해 침을 퉤 뱉는다! 이제 무슨 말을 할까! 어떤 말을 해야 직성이 풀릴까! “……!” 원장의 낯빛이 사색으로 변한다!
그러나 그는 원장의 행방을 추적하지 않는다. 딸과 재회하지도 않는다. 그는 소설을 쓴다. 그는 기만자이다. 그의 손은 자주 주저한다. 누구도 쫓을 수 없는 손이다. 그는 이 손으로 무엇을 만졌을까? 아무것도 제대로 만진 적 없는 자가 만질 수 없는 것을 만지겠다고? 사유는 가로막힌다. 무릎이 썩어버린다. 환영은 어떤 의미도 표현하지 않는다. 그것은 꿈도 침묵도 부재도 아니다. 그것은 글쓰기가 산출하는 가능한 어지럼증의 이동이다. 내가 오를 수 있는 외줄을 긋고 외줄이 아니면 글쓰기를 정지하기. 심연으로 떨어지지 말고 뒤뚱거리며 허구의 영도에 납치당하기. 삼 미터가 채 되지 않는 고립된 공중을 직선의 외줄로 통과해 지면에 안착하는 것이 아닌, 지면에 다다르지 말고 멋대로 휘어버리는 외줄의 계속으로 삼 미터의 제한된 공중을 겹쳐져 뒤엉킨 거리 다발로 만들기. 매듭이나 덤불처럼. 치닫는 파고와 혼란의 부피. 말미잘 형상으로 회오리치는 궤적들. 아득한 해변의 미농지 낱장처럼 건조된 우윳빛 해파리들.
글쓰기가 중단된 자리에서 그는 자신의 창백한 손을 내려다본다. 창백한 손은 번들거리다 기름진 손이 된다. 기름진 손은 물어뜯기며 훼손된 채 부들거리는 소중한 뻐꾸기가 된다. 그는 운다. 손톱으로 여인숙 화장대를 긁어댄다. 화장대 위로 그의 갈겨쓴 필체가 뭉텅이로 펼쳐져 있다. 그는 생각한다. 딸아, 내 글쓰기를 막아서는 사람일랑 오로지 너뿐이란다. 네 소설은 내 소설의 목발이란다. 내가 원장을 추적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멈춘다. 나는 무섭구나. 네가 내 발각된 거짓을 감춰진 진실의 흔적으로 환치하는 사람, 네가 내 비겁함과 부주의와 잘못된 선택이 야기한 암전된 소망의 자취를 추적하는 사람인 것이다. 너는 커버렸다. 나의 영향력 바깥에서 훌쩍 커버렸다. 그는 자신이 표현하는 정념이나 환상이 전부 딸이 쓴 소설의 다른 판본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는 교도소에서 딸의 소설만을 반복해서 읽어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글쓰기를 실천해야 했다. 목발을 내버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뒤척거려야 했다. 어쨌든 과거 그가 발표했던 소설이란 죄다 자극적인 기사나 허황된 도시전설을 덕지덕지 짜깁기한 수준 낮은 르포르타주였다. 그에게 그 이상의 재능이 숨겨져 있을 턱이 없었다.
소리.
자박거리는 발소리.
딱딱한 느낌의,
오줌보에 맺힌 결석을 쥐락펴락하는,
누군가 그의 객실 문을 걷어찬다.
구두코로 세 번가량.
―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그는 황망하게 의자에서 일어나 죔쇠가 채워진 객실 문짝 앞까지 간다. 서둘러서 말이다. 그는 문을 열고 싶지 않고, 그러니까 문고리를 쥐고 자세를 낮춰 의미심장하게 버티는 어떤 결연한 항의의 포즈를 취하고 싶고, 하지만 그는 그러한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주섬주섬 문의 잠금을 해제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문고리를 비틀어 열자 허량한 복도가 나타난다. 그는 문 밖을 두리번거리다 적막한 복도 측면에 걸린 액자 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액자에는 붉은 사과를 깨물고 있는 지도자의 초상화가 있다. 그것은 떼어진다. 떼어진 자리에 희미한 테두리가 남아 있다. 희미한 테두리에는 붉은 사과를 깨물고 있는 지도자의 정물화가 있다. 그는 누구도 객실로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 자신이 환청을 들었다는 사실에 오싹한 기분을 느낀다.
그의 기분을 무참하게 배반하는 원장은 무슨 이벤트를 준비한 사람처럼 문짝 뒤편에서 깜찍하게 튀어나온다. 아마도 그가 액자를 바라보는 동안 열린 문짝 뒤편으로 으흐흐 웃음을 흘리며 몸을 숨겼던 모양이다. 천박한 개수작이다. 웃기지도 않는다. 그는 객실 문턱을 사이에 두고 원장과 마주한다. 원장의 외모는 그가 기나긴 세월 교도소에서 마음속의 원한을 키우며 상상했던 모습과는 판이하다. 그의 상상 속에서 원장은 중풍 앓는 노인네 자체였다. 지난한 상상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를 방문한 원장은 지저분한 축사의 콧구멍을 왕성하게 킁킁거리는 집돼지를 연상시킨다. 몸집이 땅딸막하다. 헤어스타일은 포마드를 발라 가르마를 탔으며 포마드의 점도 때문에 뭉쳐진 머리카락에는 잿빛 먼지들이 들러붙어 있다. 익살스러운 몰골이지만 광대라기보다는 부담스럽게 친절한 푸줏간의 백정 같다.
― 선생님! 처음 뵙습니다! 저는 승진에 승진을 거듭해 보위부의 차관이 되었습니다! 이것 보세요!
원장은 까불거리듯 제복 가슴팍에 달린 배지를 자랑한다. 배지는 지도자의 얼굴이다. 광택이 난다. 빌빌거리는 일이 습관이 되었는지 차관은 인사를 여러 차례 반복하다 문턱 앞에서 우물쭈물하며 몸을 배배 꼰다. 발을 동동 구른다. 그러한 소극적인 태도에 비해 차관의 목소리는 담대하고 울림통이 크다. 목소리만을 당원 식(式)으로 훈련한 듯하다. 이 한심한 작자가 어떻게 차관이 되어 보위부 예하의 무수한 비밀경찰들을 통할하는 막중한 임무를 떠맡게 되었는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
― 선생님! 제가 이렇게 직접 찾아온 까닭은 이번 분기 보위부에서 새로 창간하는 잡지에 선생님의 원고를 청탁하기 위해서입니다!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목소리 다음엔 굽실거리는 침묵이다.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눈앞의 부조화, 황당할 정도의 기만적인 외침에 말문이 막힌 탓이다. 차관에 대한 그의 적의는 일순간 방향을 잃고 만다. 이 남자가 정말 원장이, 아니면 차관이 맞는가. 내 해묵은 원한을 방출하기 위해선 버젓하게 출현한 차관의 뻔뻔함을 압도하는 분노의 일격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는 생각한다. 차관은 어깨 너머의 객실을 힐끔거린다. 뭔가를 기대하는 눈치이다. 그러나 그는 제 객실 안으로 차관을 들일 생각이 없다. 길길이 성을 내며 차관을 내치고 그 통통한 얼굴에 주먹을 먹이는 편이 보다 온당한 대응일 것이다. 그는 차관을 가로막는다. 차관은 고개를 떨어뜨린 채 그의 발등을 내려다본다. 참회하는 것처럼? 처연하게? 기회를 엿보듯이?
― 선생님이 출소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원고료가 필요하십니다! 우리는 선생님의 소설이 필요하고요!
차관은 제 육체를 후련하게 밀어붙이듯 객실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차관을 저지하는 그를 어떻게 통과할 수 있었는지, 마치 길쭉하게 늘어진 그림자처럼, 그러니까 복도 천장의 실내등을 등진 차관의 발끝에서 시작해 문턱을 사수하는 그의 바짓가랑이 밑으로 천연덕스럽게 진입하고 있는 바로 그 그림자, 면(面)을 갖지만 내부를 갖지 않는, 척척한 냄새를 풍기며 객실의 중심에서 재차 솟아나는 차관의 육체, 어떤 방벽에서도 빈틈을 발굴해 내는 그 육체, 격리된 공간을 구부리며 육체를 이전시키는 그림자, 깊이 없는 평평한 오줌 지도, 존재의 꼬리이자 존재의 물총인 바로 그것, 그는 그러한 그림자 앞에서 홀연히 휘어버리는 등불 속의 꼬마.
차관은 객실 침대에 앉아 있다. 차관은 실내용 슬리퍼를 신고 있다. 차관은 슬립 차림이다. 차관은 기웃거린다. 돔 속의 칠면조. 없는 뒤통수. 대답 없는 머리. 대답 없는 로비. 머릿속에서 녹아내리는 버터. 나는 종종 결단의 비명. 그러나 대부분의 나는 비명 직후의 얼얼한 침묵. 통제할 수도 예측할 수 없는 비명의 효과. 언제나 나의 비명을 묵살하는 것은 비명을 초과하는 그러한 효과들. 나는 임계점. 지겨운 임계점. 나는 육체에 박리된 균열. 깨어진 균열을 회복하고 봉합하는 것이 아닌, 균열의 위치와 그 일그러져 굳어진 모양을 움직이고 갱신하며 흐트러트리는 동안. 동안의 침 튀김. 지도자. 연설문. 더위 먹은 강아지. 나는 방송을 준비합니다. 나는 전시합니다. 나는 따라갑니다. 균열 하부의 무의식적인 판들이 그 치밀한 고착인 결락의 간격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어질어질하게 흔들리는 모습을. 나는 나. 달라지지 않지만 달라지는 것. 회전하는 결함. 결함은 마치 광장처럼 소요를 거듭합니다. 상황은 간단하지 않다. 차관은 앉는다. 차관은 일어선다. 차관은 체조를 한다. 차관은 창밖을 바라본다. 창밖에 새 떼가 날아가고 새 떼는 그 꼬랑지로 형형색색의 풍선을 생산하고 있구나. 차관은 화장대 앞에 앉는다. 차관은 쓰레기통을 뒤져 구겨진 원고들을 펼치고 입으로 읽지 않고 다시 구겨 창밖을 향해 던진다. 소설은 개구리가 잠수한 물동이 속으로 처박힌다. 차관은 타액이 말라붙어 있는 베개를 베고 드러누운 채 천장의 도형을 본다. 도형의 찌그러짐. 찌그러진 도형들은 합쳐진다. 그렇게 합쳐지는 도형들을 보고 있자니 참된 우정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차관은 생각한다. 차관은 많은 경우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으면 비뚤어진 도형들이 차관의 얼굴을 향해 쏟아진다. 도형은 빨판을 잃어버린다. 차관은 삼일째 그의 객실에 있다. 같은 객실에서 출입과 퇴장 중 무엇도 선택하지 않는 차관은 언제나 같은 서술로 표현될 수 있는 일을 한다. 차관의 정체성이란 광물 경향의 포르노이다. 예컨대 침대에서는 일어나야겠지. 잠을 잤으니까. 깨어난 시각이 언제이든. 뒤척임이 길어져 잠 속을 헤엄치다 다시금 눈을 뜨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유년의 점액질을 뭉텅이로 게워내더라도. 화장대 앞에선 앉아야지. 화장대 앞에서 앉지 않고 허리를 구부린 채 자신의 지문이 덕지덕지 묻은 거울을 바라볼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앉아야 한다. 변소에 가야 한다. 소변이 마려운 사람처럼. 내가 아사한다면 내가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변소에 너무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 수탉처럼 갸웃거리며. 사유에 무관심한 덜떨어진 의문들을 생산하면서. 변소에선 꼼지락거린다. 다음엔 객실로 돌아와야겠지. 텔레비전은 켜보지 않았지만. 텔레비전을 켜면 지도자가 나온다. 나의 지도자는 어여삐도 생겼다. 쇄골이 단정한 가냘픈 소년이네. 입술이 봉긋하게 부풀어 야생 딸기를 연상시키네. 그렇다면 나는 야생 딸기를 느리게 베어 물고 있는 빨강 범벅이 된 당나귀의 입술 같네.
그는 외친다.
― 당장 나가시오!
차관은 그의 외침에도 개의치 않고 화장대에 널브러진 그의 원고들을 뒤적거린다. 원고를 솎아내는 차관은 또한 화장대 거울에 비친 자신을 곁눈질하며 민첩한 동작으로 위로 뻗친 잔머리를 포마드가 검질기게 엉겨 있는 제 정수리에 고정시킨다. 차관의 손가락이 화장대에 펼쳐진 그의 원고와 광이 나는 자신의 정수리 사이를 빠르게 오르내린다.
― 그만두지 못하겠소!
그가 치미는 구역질과 함께 차관의 어깻죽지를 움켜쥐었을 때
차관의 목이 돌아가는데,
대체 이게 뭐지?
통통하고 작달막했던 차관의 신체는 이제, 붉게 익은 문어처럼 댕댕하게 부어오른, 복막염을 앓는 돼지의 창자처럼 기세등등하게 팽창한, 새파란 빛깔의 기름진 핏줄들에 의해 겹겹이 에워싸인, 복수(腹水) 차오른 거대한 고깃덩어리 물병처럼, 원형의, 바늘로 찌르면 검은 담즙이 비어져 나오는 종양 상태의 다육질 인큐베이터, 표면에는 짜낸 고름 모양으로 솟아오르는 물고기의 눈알, 와류처럼 동심원을 그리는 수백의 눈알들이 명멸하는 배치를 이탈하는 과정 중의 찌꺼기들, 물큰하게 함몰된 양파와 썩은 달걀과 질척한 젤라틴과 눅진하게 굳은 염소의 젖을 무자비하게 배합해 끓여낸 악취의 뚝배기, 아니면 옆구리가 찢어져 노란 액젓을 흘리는 비계 폭포, 밀회의 드럼통을 열면 고릿하게 발효된 채 체외의 경계를 향해 넘쳐나는 수백 상자의 도시락 묶음, 숙변 파먹는 목신, 골격이 녹아버린 외설 개밥그릇, 두뇌도 성대도 불알도 없는 어린 알비노 고릴라가 매장된 쫄깃한 구근의 형상으로, 여전히, 이 혼탁한 점액질 고깃덩어리를 표현하기 위한 환란의 얼개는 그저 비유가 아니라 마치 그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실황 자체인 것처럼
서술해야겠지!
그러므로 그는 쩔쩔매고, 뒷걸음질하며, 할 수 있는 말을 잃어버리고, 할 수 있는 말이란 언제나 그의 빈곤한 내면을 보충할 허구의 재산이 되어 주었는데, 그는 지금 그러한 가상의 영토에서도, 파산했기 때문에, 얼굴에 돋아난 종기를 손톱으로, 성급하고 집요하게 뜯어내고 있을 따름으로, 그는 초조하고 겁이 나니까, 자신이 어떤 순간에 황당함을 느끼고, 또 어떤 순간에 두려움을 느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으니까, 자라나는 종양의 동태를 살피면서, 천천히 다가가는데, 그러한 기형의 고깃덩어리가 단지 차관의 변화된 모습이라는 것을 입증하듯이 머리카락이, 차관의 머리카락, 폐기 정유를 쏟은 잔디처럼 끈적끈적한 머리카락이 종양의 표면에 듬성듬성 돋아나 있고, 이때 종양의 머리카락은 인간의 머리카락이 그러하듯 종양의 상단에 돋아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래쪽에, 인간이라면 생식기가 위치할 만한 그곳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는, 용기가 생겨서, 종양이 차관이고, 차관이 종양이라면, 그것이 트럼프 카드의 앞뒷면이라면, 혹은 휠체어에 앉은 고아한 시인의 영혼이 휠체어에 감금된 유년의 괴팍한 독서가의 영혼과 다르지 않듯이, 사망 직전에 놓인 인간의 신체를 게걸스레 먹어치우는 종양과 종양의 삶을 위해 반드시 경유해야 하는 인간 사이의 가교 또는 미싱 링크처럼 보이는 머리털의 잔해를 헤아리면서, 따뜻한 피가 온몸을 돌아 나가는 것을 느끼며, 간지럽게 하자, 종양을 간지럽게 해보자, 호기심이 생겨서,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슬쩍 종양의 아랫도리에 손을 넣어 거웃을, 천진한 척, 예뻐하는 척, 사랑해 죽겠다는 척, 쓰다듬고 어루만지기 시작하는데, 빳빳한 덤불을 손가락으로 헤집으며, 살살 문지르는 가운데, 그는 종양이 너털웃음을 터트리길 바라고, 좋아하길 바라고, 거웃 사이로 자라난, 기계 레버? 벌거벗은 인형? 쥐의 꼬리? 아무튼 생식기를 대체하는 무엇을 발굴해서, 그것을 비틀고, 쥐어짜서, 아니면 잡아 빼서, 조롱박이라는 것을, 쌍떡잎식물이라는 것을, 자중지란이라는 것을, 확, 낚아챌 수 있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마음으로!
그러나 종양은 아무런 반응이 없을 뿐만 아니라, 거웃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고, 이 종양에겐 인간의 민감하게 벌어진 가랑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만약 차관처럼 남성이라면, 종양의 남성 생식기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를 향해, 틀림없이 그것은, 예컨대 자신의 남성 생식기를 거꾸로 뒤집어 삽관하고 있는, 내면의 어스름 속으로, 전체적으로 둥근 모양의, 살코기들이 부글거리는, 눈먼 힘줄들의 악착스러운 줄다리기로 붐비는, 배척하는 각도로 빠듯한, 제로로 멎은, 김을 피워내는, 구토를 유발하는, 시럽을 끼얹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펜 위에서 포슬포슬 굳어 있는, 타원형의 오믈렛이며, 시간이 흐르는 과정에서, 종양의 표면을 장악한 잡스러운 생육의 더미가 지구본처럼 종양을 둘러싸며 공전하기 시작하는데, 마치 자전하는 행성의 이마를 스치고 가는 구름처럼, 그는 현기증을 느끼고, 아무것도 할 의욕이 없고, 만지기도 싫고, 다 팽개치고 싶고, 그가 그럼에도 여전히 이러한 무감동한 주법을 지속하는 까닭은, 그는 무엇이든 발견하고 채집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니까, 이 종양과 관계할 수 있는 어떤 마땅한 인간적인 수단이 부재하기 때문에, 그는 이따금 종양의 눈치를 살피고, 눈알은 또한 수백의 눈알, 수백의 눈알은 또한 수백의 찡그림, 수백의 찡그림은 또한 수백의 얼굴들처럼 분화되는 가운데, 종양은 시간이 흐를수록 두개골처럼 형해의 단단한 얼개로 변화하여, 이제 그것은 물큰하게 만져지는 고깃덩어리가 아니라 괴사한 육체가 뒤얽혀 형성된 일종의 매듭이며, 그가 더듬는 종양이 관능의 극점에 근접하는 동안, 망상 속에서, 안쪽으로 커다래지는 종양의 내향성 생식기가, 대못처럼, 종양의 중심, 다시 말해 차관의 내적 우주를 향해, 자족적으로, 내밀하게, 꿈틀꿈틀, 비척비척, 발기하면서, 그것이 관통하는 지점, 다시 말해 종양 스스로의 연약한 코어를 산산이 부수어내는 장면을, 그는, 역시 상상하거나 기대할 뿐, 보지 못하며, 그는 이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종양의 거웃을, 한 올씩 뽑고 있을 따름으로, 뽑고, 또 뽑고, 마치 잡초를 뽑듯 거웃을 신경질적으로 뽑는 동안, 자명종 시계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딸깍거리는 소리를 내는,
차관,
뇌 없는,
궤도에 합류한,
키득키득 부품을 뱉어내는 형해의 무덤이
재차 차관의 목소리를 되찾고 있는 것이다.
― 선생님! 선생님의 역량을 보여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들에게! 선생님의 소설을 기다리는 독자들에게! 따님에게요! 우리는 좀처럼 실망이라는 것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그는 차관의 제안을 반려해야 할까? 정중하게? 곤란한 표정으로? 포악하게 따귀를 날리면서?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차관이 과거에 어떤 인물이었든 어렵게 청탁을 결정한 보위부 일동을 향해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겠지. 그는 생각한다. 청탁서는 수기로 작성되었다. 말미의 발행인 명단에 딸의 이름이 적혀 있다. 딸의 이름. 그는 그것을 잊고 있었다. 딸의 이름. 그것은 읽자마자 전부가 상기되는 이름이다. 차관이 돌아간 직후 그는 객실을 초조하게 어슬렁거린다. 객실은 싸늘하다. 발바닥이 시리다. 그는 슬리퍼를 신는다. 밑창에 비계가 붙은 슬리퍼가 찍찍 소리를 내며 객실을 돌아다닌다.
그는 봉투를 찢는다. 차관이 찔러준 네모반듯한 서류봉투 안에는 교도소가 그에게 지급한 급여를 훌쩍 상회하는 현금 다발과 함께 영수증, 차관의 명함, 스테이플러로 갈음한 딸의 편지 한 묶음이 있다. 편지들은 모서리가 낡고 색이 바랬다. 차관은 딸의 편지들을 교도소로 부치지 않았다. 차관은 딸의 편지들을 착복하는 악랄한 우체통이었다. 딸의 고독과 불행을 심화시키기 위해, 그와 딸 사이의 오해를 부추기면서, 남몰래 축재한 딸의 편지들이 딸과의 관계에서 차관이 꿈꾸는 흉악하며 변태적인 협잡을 실현할 수 있는 명분이자 재산이라도 되듯이. 지금에서야 편지들을 반납한 저의를 모르겠다. 틀림없이 나를 희롱하려는 것이다. 자극하고 들쑤시려는 것이다. 그는 약이 오른다. 펄펄 날뛴다. 그는 딸의 편지를 읽지 않는다. 그것을 거부한다. 그는 자신이 딸의 편지를 읽기 위해 소설을 쓰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동기를 부여하듯, 자신을 힐책하는 것처럼. 그러면 작업이 더 잘 된다. 마감과 동시에 딸의 편지와 황홀하게 조우해야지. 자신에게 암시를 건다. 문장은 쓰면 는다. 그것은 간다. 사랑하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으면 소설이 어엿해진다. 그것은 상황이 징그럽게 변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눈물을 펑펑 쏟아야지. 편지가 흥건해지도록. 그러나 이건 또 무슨 지랄일까? 그것은 헛꿈에 불과하다. 아직까지.


*


그는 객실을 나섰다. 로비로 내려갔다. 피로한 눈의 여인숙 주인이 그를 심드렁하게 쳐다보았다. 여인숙 주인은 청년 시절 그가 쓴 소설을 읽은 독자였을 것이다. 지금은 청년의 마음을 위로하고 섬세한 영혼을 뇌쇄적으로 핥아 준 이 노쇠한 작가를 알아보지도 못한다. 그는 마음으로 툴툴거렸다. 괘씸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부정적인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그는 여인숙 밖으로 갔다. 더 걸었다. 도착한 저택의 초인종을 누르자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멜로디가 들렸다. 대문이 열렸다. 대문 앞으로 코안경을 쓴 남자가 등장했다. 차관이었다. 기병대 대장처럼 어깨와 무릎에 황금색 각반을 착용한 모습이었다. 웃고 있었는데 눈만이 찌그러지지 않고 이글거리며 멎어 있었다. 남자는 악수를 청하며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한 보 물러서 악수는 됐다고 말했다.
― 일전에 만났지요?
차관은 자신이 이 저택의 청지기로 근무하고 있다고 말했다. 야윈 목에서 깊은 인중에 이르기까지 빨래판 모양의 검버섯이 피었다. 해쓱한 피부는 고사한 나무의 피륙처럼 거칠고 핏기가 없었다. 체중을 급하게 감량한 모양인지 말 그대로 폭삭 삭아 있었다. 그는 뚫어져라 자신을 응시하는 청지기의 시선이 괜스레 민망하게 여겨졌다.
악수를 청하려던 청지기의 손이 자취를 감췄다. 그는 놀랐다. 청지기는 요대에서 승마용 채찍을 꺼내 그를 향해 휘두르려는 자세를 취했다.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었던 탓에 그는 치솟는 채찍을 피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공중에서 말벌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그가 눈을 떴을 때 청지기는 허공에 휘두른 채찍을 공손하게 내밀고 있었다. 청지기의 왼쪽 팔꿈치에 둥글게 말려 있는 채찍은 거기 똬리를 튼 귀여운 방울뱀 같았다.
― 받으세요.
― 싫소.
그는 청지기를 따라 저택의 정원으로 향했다. 풀 냄새가 향긋한 정원은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보도 양쪽 측면으로 절지된 관목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청지기는 절뚝거리며 걸었다. 말이 없었다. 인공호수가 나타났다. 지느러미를 맞붙여 기도하는 사람의 자세를 취한 물고기 석상 몇이 폭포를 맞고 있었다. 수면에는 잉어들이 바글거렸다. 청지기는 각반이 거추장스러운 듯 자주 어깨와 무릎을 만졌다. 그는 청지기가 어색했다. 청지기가 인공호수 앞에서 튀밥을 뿌렸다.
그는 청지기에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려 했다. 최대한 예의를 갖춰서 말이다.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호의는 고맙습니다. 당장 원고를 집필하고 싶지만 아시다시피 부득이한 사정으로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저 제가 국가에 씻을 수 없는 위해를 끼친 죄인이라고만 생각합니다. 저도 제 소설을 잊지 않은 보위부의 은혜에 보답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제 얼굴을 좀 보십시오. 저는 작가로서의 재능과 총기를 전부 잃어버리고 말았답니다.
한 가지 진심을 담아 전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럼에도 저는 하루의 가장 오랜 시간을 책상 앞에서 소모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자꾸만 책상 앞으로 귀환해 뭔가 조잡한 옹알이를 시도하는 형편이니까요. 문제는 나아지지 않습니다. 다 틀렸습니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을 끝내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쩌겠습니까? 지금의 제겐 책상 앞에 앉을 비용이 절박하게 필요합니다. 연금을 수령할 방법을 구체적으로 일러주시면 요구하는 서류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제게 연금을 지급하십시오. 심려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청지기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는 황급히 청지기를 따라갔다. 그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하려는 말을 되뇌어 외웠다. 그러자 자신감이 생겼다.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이 마땅한 이야기라면 말이다. 저택의 정문으로 향하는 보도 양 측면으로 비슷한 신장의 인삼들이 외발로 서 있었다. 생장점에 호르몬제를 주사한 것처럼 커다란 크기였다. 인삼들은 제각기 닫힌 문 앞에서 인삼이 취할 수 있는 다양하고 무의미한 자세들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중이었다. 예를 들어 쪼그려 앉은 자세나 기대 있는 자세. 마치 마임을 하고 있는 듯했다. 인사를 하거나 사격을 하거나 넘어지기 직전의 인삼들. 공놀이를 하거나 파리를 쫓거나 혀를 깨물고 있는 인삼들은 성별이나 연령이 상이했으며 모두 가족이었다. 죄다 개처럼 한쪽 다리를 들고 울적한 사람의 심리적인 하향 곡선을 연상시키는 오줌을 발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 이게 뭐요?
― 몰라요.
저택 내부는 어슴푸레했다. 청지기가 내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누르자 환하게 밝아진 저택의 정경에 그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저택은 천장이 높았다. 마치 예배당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정면으로 아라베스크 문양의 카펫이 깔린 널찍한 계단이 보였다.
― 저는 이십 년째 이 저택에서 근속하고 있습니다.
청지기가 계단을 올랐다. 몇 보 떼지도 않았는데 어깨에 무거운 짐을 얹은 것처럼 무릎이 쑤셨다. 청지기는 그를 저택의 응접실로 안내했다. 응접실 안에는 원형 테이블이 있었다. 그곳에 초조한 얼굴의 작가 몇이 앉아 있었다. 다리를 떨며 하나같이 면전에 재떨이를 놓아두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불안해 보였다. 그는 주춤거리다 비어 있는 좌석에 앉았다. 청지기가 그에게 재떨이를 가져다주었다. 그는 재떨이가 필요하지 않았다.
― 받으세요.
― 됐소.
청지기가 속삭였다.
― 몰래 들으세요. 표정을 관리하시고요. 헛기침을 하세요. 연금이나 뜯으러 온 가난뱅이들이에요. 게으른 자들이지요. 낙오한 자들도 나름의 알리바이를 가져야지요. 지도자 각하의 말씀이에요. 세상 일이 그래요. 유치원에 소속되느냐 노인정에 소속되느냐가 문제일 따름이지요. 둘 중 하나예요. 작가들 또한 형무소로 향하는 것보단 협동농장으로 향하는 편이 낫지요. 게으른 자들은 결국 죄를 짓는 법이니까요. 정량의 연금을 대가로 협동농장으로 이주한 작가들은 함께 글을 쓰게 되어요. 사랑을 해요. 소설을 쓰지요. 세상을 이롭게 만들어요. 그렇게 작성된 소설은 협동농장의 이름으로 잡지에 실려요. 소설에 감격한 독자들은 협동농장의 주소로 팬레터를 쓰고요. 협동농장은 자애로운 공간이에요. 그러니까 소설이란 언제나 자애로운 마음을 표현해야 하지 않겠어요? 협동농장이 그들에게 자애로운 공동체를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에요.
청지기가 박수를 쳤다. 그리고 시간이 되었다고 말했다. 작가들이 응접실 밖으로 나서려는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청지기와 그는 복도를 지나쳐 갔다. 복도에는 아무런 장식품이 없었다. 액자도 없었다. 청지기는 그를 식당으로 안내했다. 나무문의 상단에 식당이라는 문패가 보란 듯이 걸려 있었다.
― 이곳은 작업실입니다.
작업실은 족히 백 평은 넘어 보였다. 작업실 중앙으로 길쭉하게 가로놓인 식탁이 있었다. 작업실에 상주하는 웨이터들은 전부 서른 명가량이었다. 그들은 접시를 한쪽 손바닥으로 받들고 작업실 안쪽을 분주하게 왕래하고 있었다. 한눈에도 바빠 보였다. 그는 멈췄다. 웨이터들은 모두 수려한 외모에 매력적인 신체의 소유자들로 제 사타구니만을 손수건 너비의 훈도시를 통해 감추고 있었다. 농염한 분위기를 풍기는 자가 있었던 반면 수줍어하는 자도 있었다. 기민하고 사뿐거리는 걸음걸이를 가진 자가 있었는가 하면 중후하게 제 무게를 한 걸음에 전부 내어주듯 나아가는 자도 있었다. 귓불이나 젖꼭지나 팔꿈치가 붉은 자가 있었는가 하면 야무진 근골에 세심하게 붓질을 해서 갈라진 부위의 음영을 뽐내듯 적나라하게 드러낸 자도 있었다.
발가벗은 웨이터들은 작업실 안을 설왕설래하며 백색의 접시를 날랐는데 식탁은 항상 텅 비어 있었고 그 때문에 그는 그들이 같은 접시를 운반하며 마치 그것이 별다른 접시이듯 서둘러 식탁 근처와 부엌으로 통하는 작업실 후문을 이리저리 내왕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충돌할 것처럼 서로를 향해 정면으로 다가오다 일순간 급격히 턴을 하고 방향을 꺾거나 했으며 무슨 아슬아슬하게 부딪치지 않는 웨이터 놀이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들은 토슈즈를 신고 있었다. 웨이터들은 마치 암거래를 주고받는 것처럼 그와 청지기를 의식하며 접시를 교환했는데, 교환한 접시와 교환된 접시를 다시 교환하기까지 채 몇 분이 걸리지 않았다. 이러한 웨이터들의 놀이는 사실 딸에 의해 기획된 것이었다. 저택의 주인인 딸은 작업실을 내왕하는 웨이터들이 탈진해 나가떨어질 때까지 종일 이러한 서비스를 지속하게 했다. 서비스는 지엄한 명령이었다.
그것은 작업을 진행하는 딸의 눈요기를 위해서였다. 식당을 작업실로 개조한 사람도 딸이었다. 딸은 작업을 하다 글쓰기가 지지부진해지면 고개를 쳐들고 분방하게 약동하는 웨이터들의 신체를 그윽한 시선으로 감상하곤 했다. 요염하게 무르익은 웨이터들의 육체는 대개 답답하게 막힌 글쓰기의 회로를 환기하는 일에 도움을 주었다. 딸은 식탁의 상석에 앉아 있었다. 타자기 한 벌이 놓여 있었다. 딸은 백발이 되어 있었는데, 정갈하게 묶인 머리카락에 비녀를 꽂았고 불투명한 살굿빛 슬립을 입고 있었다. 그의 가슴이 거칠게 뛰었다. 딸은 글쓰기에 열심이었다. 타자기를 부서져라 두들기는 제 손가락에 주의를 기울일 뿐 기계적이거나 임의적으로 밀고 밀리는 웨이터들과 그들 사이에서 우두커니 걸음을 멈춘 그와 청지기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타자소리가 간격 없이 이어졌다. 마치 폭우 속에 우산을 쓰고 덩그러니 버려진 기분이었다. 그의 심경이 그랬다. 청지기가 웨이터들 사이를 뚫고 딸을 향해 다가갔다.
청지기는 이윽고 착용하고 있던 각반을 해제하고는 입고 있던 옷을 훌훌 벗어버렸다. 건장한 웨이터들 사이에서 탄력 없는 살갗이 망측하게 늘어진 청지기의 알몸은 단연 도드라져 보였다. 청지기가 웨이터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민첩함이 모자란 청지기의 입장에서 웨이터들을 좇아 딸의 명령을 수행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말하자면 청지기는 딸의 눈요기를 망치는 난봉꾼일 따름이었다. 아무도 청지기에게 접시를 쥐어주지 않았다. 일종의 이지메였다. 회전하는 웨이터들의 뒤꽁무니를 따라 무질서하게 작업실을 배회하는 청지기는 마치 능숙한 웨이터들 사이에서 맹랑하게 두드러지는 제 갑갑함과 어눌함과 흉측함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극화된 명령의 주인공인 것처럼 보였다. 청지기는 애꿎은 투쟁을 시작했다.
청지기의 합류로 대열의 리듬을 잃어버린 웨이터들은 점진적으로 나태해졌다. 활기가 사라졌다. 인원이 줄어들기 시작했는데 다들 청지기의 존재를 끔찍하게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작업실 후문으로 도주해 더는 작업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후문 뒤편의 어둠 속에서 작업실 내부를 엿보는 반짝거리는 눈빛들은 청지기의 메스꺼운 신체를 품평하는 메이드들이었다. 웨이터들은 메이드들의 연인이었다. 그들은 잠재적인 모반자들이었고 반역을 꿈꾸고 있었다. 웨이터들이 후문으로 피신해 휑뎅그렁해진 작업실에서 청지기만이 승마용 채찍 한 짝을 꼬아 잡고 스스로를 웨이터로 가장하는 불능의 폭주를 지속하고 있었다. 청지기의 민폐와 난동을 저지할 사람이란 오로지 딸밖에 없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작업에 열중할 뿐 그와 청지기를 의식하지 않았으며, 동시에 그는 이러한 광경에 넋이 빠져 아직까지 딸의 이름을 목청 놓아 부르지도 못하고 있었다. 청지기의 움직임이 격화되었다. 리본체조를 하듯 구불거리는 채찍으로 허공에 형상의 공허한 토대들을 휘갈기고 있었던 것이다. 형상의 공허한 토대들, 그게 뭘까?
가파르게 휘어지는 채찍의 움직임을 일순 붙잡은 사람은 딸이었다. 딸이 식탁 의자에서 일어섰다. 청지기는 자신의 행위에 완전히 몰입하고 있었다. 딸은 마치 날뛰는 독사의 머리를 틀어쥐듯 재빠른 손으로 채찍 끝을 비끄러맨 다음, 무릎을 꿇으려는 청지기의 이마를 신고 있던 하이힐로 걷어찼다. 청지기가 나가떨어졌다. 채찍을 빼앗긴 것이다. 딸이 구두를 벗었다. 청지기는 넘어지자마자 벌떡 앉아 무릎을 꿇은 채 허리를 반으로 접고 양손으로 깍지를 낀 다음 반성의 넋두리를 우물거리듯 무슨 신실한 단독자의 방언을 뇌까리듯 뜻 모를 입말들을 중얼거렸다. 요가 고수 같았다. 딸이 청지기를 내려다봤다. 법정의 현관에 설치된 천사상이 왼손엔 저울, 오른손엔 칼을 들고 있다면 도도하게 얼어붙은 채 청지기를 빤히 내려다보는 딸은 왼손엔 채찍, 오른손엔 자신의 하이힐을 치켜들고 있었다. 청지기가 애걸을 했다. 자신을 상대하는 애걸이었다. 청지기는 자기연민에 빠져 있었다. 그러므로 청지기는 더 이상 청지기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었다. 딸이 말했다.
― 아버지도 하세요.
냉담한 목소리였다. 딸이 그에게 채찍을 쥐어주었다. 청지기는 양손으로 뒤통수를 감싼 채 궁색하게 엎드려 있었다. 딸은 청지기의 대가리에 하이힐 굽을 맞붙인 채 마치 정으로 돌을 쪼듯 그곳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는데,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청지기의 머리를 깨부수기까지 채 몇 초가 소요되지 않을 것 같았다. 청지기가 벌벌 떨었다. 청지기가 뱉어내는 뜻 모를 입말들이 점점 의미를 갖추기 시작했으며 그것은 대략 딸을 향해 간청을 하는 내용이었다. 어서 하세요. 제발 하세요. 제게 당신이라는 절대를 먹여주세요. 간청은 공포에 시달리는 청지기의 바짝 엎드린 자세와 대비되어 보다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이때 그는 아래로 고꾸라진 채찍을 간신히 움켜쥔 채 딸과 청지기를 멍하니 응시할 따름이었다. 방법이 없었다. 어떤 행동을 취하는 일 자체가 여의치 않게 여겨졌다. 딸이 청지기의 머리에 하이힐을 내리쳤다. 비틀거리던 청지기의 몸이 판판하게 펼쳐졌다. 청지기가 견지하던 굴종의 정념이 일시에 와해된 것이다. 딸의 눈이 호기심으로 빛났다가 이내 누그러졌다. 하이힐은 청지기의 머리에 그대로 꽂혀 빠지지 않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청지기의 머리통으로 하이힐이 말뚝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 아버지가 하세요.
딸이 말했다. 그는 그렇게 했다. 하이힐에 의해 완벽히 봉쇄된 청지기의 머리, 피나 골수가 단 한 방울도 흘러내리지도 않는 그 머리를 내려다보며 그는 채찍을 휘두르는 중이었고 휘두를 때마다 온몸이 신체의 연장처럼 여겨지는 채찍의 굽이치는 행로를 향해 빨려드는 느낌을 받았다. 채찍은 더뎠다. 탄성이 없었다.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그는 지쳐 있었다. 청지기의 얼굴은 하이힐이 치받치는 순간의 쨍한 경악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채찍이 다녀갈 때마다 청지기의 알몸에 시퍼런 멍이 생겼다. 딸은 채찍을 내리치는 그의 동작을 감시하듯 팔짱을 끼고 서서 제 아버지의 성실성을 시험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어떤 삽질, 어떤 의욕 없는 사무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이 순간 이 장소, 2층의 작업실이란 폭력을 위한 격발된 충동의 즉흥성과 거리가 먼, 당일의 할당량을 달성하기 위해 무기력하고 기진맥진한 정동을 거듭하는 뙤약볕 아래의 노역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딸이 독려하듯 그의 등짝을 몇 차례 토닥거렸다.
― 아버지.
딸이 그를 말렸다.
― 이제 됐어요.
딸이 그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따뜻한 손바닥이었다. 그는 감격했다. 그러나 눈물이 나오진 않았다. 그는 이 순간을 평생 그리워했던 것이다. 머릿속으로 이 장면을 몇 번이나 복기했던 것이다. 반복이 감동을 마비시킨 것이다. 채찍이 그의 손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그는 딸에게 참회의 제스처를 취하려고 했지만 가능한 말을 마련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는 침울하게 고개를 떨어트리고 있었다. 자책감이 들었지만 청지기 때문은 아니었다. 딸은 곧 작업실 후문을 향해 눈짓을 했다. 후문에서 그림자들이 혼란스레 수선을 떨었고 곧 멀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등장했는데, 그는 후문 뒤편의 감추어진 주방에서 벌어진 웨이터들 사이의 경쟁적인 소동을 청산하고 막 청지기로 등극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청지기는 우쭐한 것처럼 보폭을 넓게 벌리며 그와 딸을 향해 다가왔다. 청지기 뒤편으로 마스크를 쓴 웨이터들이 전(前) 원장, 전 차관, 또는 전 청지기의 시신을 치우기 위해 들것을 들고 왔다. 시신을 들것에 태웠다.
― 가시죠.
딸은 다시금 타자기 앞에 앉아 작업을 시작했다. 타이핑 소리가 또박또박 계속되었다. 그는 작업실을 나온 뒤 청지기를 따라 저택의 복도를 지나쳐 갔다. 타이핑 소리가 점차 흐릿해졌다. 청지기는 저택 복도 끝에 있는 널찍한 침실로 그를 안내했다. 침실 화장대에는 딸이 쓰던 타자기와 동일한 타자기 한 벌이 놓여 있었다. 타자기 옆으로 색색의 유리병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포플러 냄새가 났다. 그는 침대를 층층이 에워싼 레이스를 걷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시트에 화사한 빛깔의 꽃잎들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그는 꽃잎 하나를 쥐어 콧잔등에 댔다. 정신이 몽롱했다. 침실 창밖으로 정원의 풍광이 보였다. 노을이 침실 안으로 스며들었다. 정원의 수목들이 밀려든 노을로 인해 노곤한 미광을 발하고 있었다. 청지기가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불었다. 저물녘의 청량한 취기였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목을 길게 빼고 창밖을 응시했다. 청지기 또한 잠자코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린 채 어딘가를 주시하고 있었다.
내려다보이는 정원 한가운데 응접실에서 만났던 작가들이 모여 있었다. 누군가 이 측은한 작가들에게 원산폭격을 시킨 모양이었다. 뒷짐을 지고 부들거리는 머리를 잔디밭에 맞붙인 채 그들은 엇비슷한 자세의 육체적인 고행을 감내하고 있었다. 타들어가는 노을 속에서 말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바라다보는 청지기와 그의 시선을 감지한 것처럼 최선을 다해 끙끙거렸다. 신음이 2층에 있는 침실까지 전해질 정도였다. 그림자가 휘청거렸다. 바람이 정원을 헤매고 다녔다. 잔디들이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가지런하게 쓰러졌다. 퇴로가 막힌 노을이 자신의 뒤를 바짝 추격하는 어스름에 의해 제 온유한 광채를 빼앗기고 있었다. 작가들은 시간의 경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시도하는 균형을 포기하지 않았다. 넘어지지도 않았다. 그것은 고통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왠지 가짜 고통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 쉬시죠.
청지기는 꾸벅 인사를 하고 침실을 나갔다. 나무문이 삐걱거리며 닫혔다. 침실에 홀로 남겨진 그는 여전히 작가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기꺼이 고통을 감내하겠다는 태도로 제 몫의 원산폭격을 끈질기게 이행하던 작가들은 어느새 요령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는 하품을 했다. 눈이 침침해졌다. 어두워지자마자 정원은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겼다. 작가들은 배를 깔고 풀밭에 엎드려 시시덕거렸다. 간혹 낄낄거리기도 했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교도소 시절이 떠올랐던 것이다. 단조로운 선분을 연상시키는, 먼지구름이 피어오르는 교도소의 노역장에서 함께 복역하는 친구들과 오붓하게 둘러앉아 주먹밥을 까먹던 화목한 권태에 관해. 그 시절을 형언하는 언어는 거짓말이거나 진실이더라도 아주 무례한 진실일 것이다.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그는 서둘러 잠 속으로 헤엄쳐 들어갔다.
귀청이 얼얼한 총성을 듣고 깨어났을 때는 한밤이었다. 그는 얼굴에 덕지덕지 들러붙은 꽃잎을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릿속이 흐리멍덩했다. 조갈이 들었다. 비강이 눅눅했다. 냉수를 마시고 싶었다. 총성에 놀란 청각은 한동안 정상으로 되돌아오지 않았다. 하늘거리는 윤슬을 닮은 미미한, 그러나 찰랑거리는 빛이 침실 내부를 희미하게 밝히고 있었다. 빛의 출처가 모호했다. 일단 그는 창틀 앞으로 갔다. 캄캄한 어둠이 드리워진 정원으로 어둠보다 더 짙은 음영이 불길하게 팽창하고 있었다. 그 음영은 틀림없이 가지치기를 당한 정원의 나무들이었는데 잠든 사이에 그 부피가 몇 배로, 그리고 보다 혼연한 형세로 부풀어버린 듯했다.
이윽고 그는 정원을 가로지르는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램프를 들고 있었다. 램프가 형성한 반원의 차양 아래서 남자의 걸음은 망설임이 없었다. 오히려 조바심을 내는 것처럼 목표를 향해 급전직하로 전진하는 걸음걸이였다. 어둠이 램프와 남자를 잡아먹을 듯이 가까워지다 썰물처럼 제자리로 휩쓸려갔다. 램프는 캄캄한 정원의 어둠에 우묵하게 팬 구멍이었다. 그리고 환한 구멍 안에서 구멍을 이끌고 정원을 통과하고 있는 남자의 정체는 청지기였다. 청지기 말이다!
청지기는 크로스백을 메고 있었다. 잔상을 긴 꼬리로 늘이며 정원을 질러가던 청지기가 정지한 장소는 작가들이 원산폭격을 하고 있던 그곳이었다. 비천하며 빌어먹는 일에 도가 튼 작가들은 이번엔 팔꿈치를 귓전에 맞붙인 채 어디선가 가져온 허름한 의자를 양손으로 받아 들고 벌을 서는 와중이었다. 청지기가 램프를 풀밭 위에 내려놓았다. 크로스백에서 산탄총을 꺼냈다. 이때 청지기가 크로스백 안에서 끄집어낸 이 산탄총이란 어쨌든 그가 이 소설의 처음과 중간에서 각각 버스기사와 원장을 향해 들이댔던 그 산탄총들과 동일한 산탄총이었다. 그 산탄총들이 그저 상상의 산물이었다면, 청지기가 꺼낸 산탄총은 그의 거듭된 상상을 역전시키거나 배가시키는 무서운 실물 자체였다. 그러나 상상이건 실물이건 그것들은 똑같은 산탄총이기도 했다. 그는 온전히 개별적인 산탄총을 떠올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청지기가 총신을 작가들 쪽으로 돌렸다. 개머리판을 어깨에 붙였다. 기절초풍한 작가들은 징벌용 의자를 내동댕이친 후 각자의 방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질겁해 얼어붙은 자도 있었으며 기어가는 자도, 뛰어가는 자도 있었다. 물론 청지기에게 덤비려는 자도 있었다.
굉음이 솟구쳤다. 총구가 불을 뿜었다. 여러 갈래로 쪼개진 탄환이 고요한 정원을 꿰뚫었다. 탄환이 달아나는 작가들의 급소를 정확히 관통했는지의 여부는 불분명했다. 포연이 난분분했다. 아무튼 덤비려는 자는 쓰러졌고, 청지기는 덤비려는 자의 등짝에 깃발을 꽂으며 산탄총을 연달아 갈겨댔다. 어둠이 술렁거렸다. 단말마가 들렸다. 작가들 중에는 죽은 자도 있고 산 자도 있었다. 죽은 자들은 정원의 풀밭에 엎어져 있을 것이고, 산 자들은 어디엔가 숨어 저택을 빠져나갈 방법을 골몰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때였다. 쿵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반사적으로 침실 문 쪽을 노려보았다. 누군가 침실 문을 매섭게 두드리고 있었다.
― 아버지!
그것은 딸의 목소리였다.
― 아버지! 모반이에요! 쿠데타라고요!
딸의 목소리는 급박했다. 헐떡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허둥지둥했으며 모종의 불안감을 느끼며 문을 열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딸은 침대에서 그대로 뛰쳐나온 듯했다. 맨발이었으며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작업실에서 웨이터들을 지휘하고 청지기의 머리를 박살내던 그녀가 아니었다. 위엄과 성마름이 동시에 공존하던 그녀가 아니었다. 고무젖꼭지를 물어뜯으며 칭얼거리다 울음을 꾹 삼키던 어린 시절의 딸이었던 것이다. 그는 딸을 끌어안고 싶었다. 그는 떨리는 딸의 어깨를 양손으로 힘주어 붙잡았다. 그리고 딸을 안심시키려 했다. 그때 딸의 손이 스르르 상승했다. 그는 물러섰다. 딸의 표정이 돌변했다. 공중에서 날붙이가 번뜩였다.
― 그렇습니다! 머리를 빠개야 합니다! 머리를 빠개는 일이 소설의 역할입니다! 개중 가장 빼어난 소설은 자신의 머리를 빠개는 소설입니다! 동물 공장의 컨베이어에 탑승한 정교한 머리의 분신들이 잇따라 도착하면 도끼를 쳐들고 하나씩 빠개야 합니다! 뒤처지면 혼쭐이 납니다! 망설이지 말고! 혓바닥으로 꽃꽂이를 하듯이! 안녕하세요! 환영합니다! 코가 크시네요! 귀걸이가 예쁘시군요! 눈썹이 진하네요! 늦으셨어요! 반갑습니다! 머리를 조아리는 것처럼! 이렇듯 머리를 빠개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지도자의 머리를 빠개기 위해섭니다! 지도자는 머리들의 총합이니까요! 그러나 지도자는 또한 머리를 빠개는 일을 감독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지도자는 빠개진 머리를 헐값에 처분해 제 부를 늘리는 사람이니까 말입니다! 눈앞의 머리를 빠개지 않으면 지도자가 화를 냅니다! 마구 때립니다! 해고를 당합니다! 지도자는 딴청을 부리는 일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반응하고 내리쳐야 합니다! 끝없이 응시해야 합니다! 수많은 머리들이 웅성거리며 몰려오고 있는 레일의 저편, 불길한 트랙의 저편, 먹구름에 파묻힌 미끄덩한 저편을 말입니다!
도끼날이 그의 머리에 박혔는데, 이번엔 청지기의 경우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머리에 꽂혀 있었지만 곧 딸은 그것을 뽑아냈고, 으스러진 골격을 향해 다시금 도끼질을 했으며 조각난 두개골, 물에 젖은 휴지처럼 풀어진 두뇌가 새빨갛게 다져져 뼈와 고기가 살점 덩어리로 뭉쳐 분간되지 않을 때까지 도끼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딸은 분노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러한 결말의 꼭짓점으로 모든 정념을 집중한 사람의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기숙학교 시절부터 그녀가 무던히도 다스렸던 감정들이 태엽처럼 적재적소를 찾아 맞물려 돌아가는 순간이기도 했다. 딸의 얼굴이 흠뻑 젖었다. 분화구처럼 검붉게 뚫린 머리에 비해 그의 인중 아래는 온전한 편이었다. 딸은 진이 빠진 것처럼 시신에서 떨어져 숨을 골랐다. 주저앉아서 말이다. 거친 호흡이 잦아들었다. 딸은 잠시간 휴식을 취했다. 비린내가 진동했다. 새벽이었다. 창밖이 보랏빛이었다가 이내 새파래졌고, 정원에는 한 겹의 반투명한 장막 같은 안개가 드리워졌다. 청지기에게 발각된 작가들이 양쪽 손바닥을 세차게 비벼대고 있었다. 용서를 빌고 있었던 것이다. 청지기는 곧 그들을 인솔해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에는 그들 몫으로 주어진 공짜 담배가 있었다. 테이블이, 머릿수만큼의 재떨이가 있었다. 담배는 좀처럼 동이 나지 않았다.
일어선 딸이 그의 오목한 인중에 도끼를 처박고는 제 엄지와 중지를 맞부딪쳐 딱 소리를 냈다. 청지기가 웨이터들을 대동하고 침실로 들어왔다. 딸은 침실을 빠져나갔다. 목욕을 하려는 것이다. 청지기가 호루라기를 불었다. 웨이터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들에게 그의 시신은 장난감이거나 인형이었다. 인중에 도끼가 처박힌 장난감. 혹은 인중에 도끼가 처박힌 인형. 웨이터들이 그의 사체를 화장대 앞에 앉혔다. 신체가 경화되기 시작하면 그는 마치 의자에 고스란히 용접된 얼굴 없는 도롱뇽의 흉상처럼 보일 것이다. 방부제를 친다면. 유악을 바른다면.
청지기는 침실을 드나들었다. 그가 잘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마치 아빠처럼. 아빠는 나날이 왜소해졌다. 그는 타자기 자판에 양손을 얹었다. 얹게 되었다. 웨이터들의 날랜 조작에 의해서. 그는 글을 써야 했다. 쓰는 자의 자의식을 회복하고 지속을 다짐해야 했다. 그것은 그가 이 소설에서 끈질기게 타진했던 고민이었다. 한 단락도 제대로 나아가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끝장을 내야겠지. 그는 생각했다. 생각한 바를 옮길 수야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물큰한 고기 조각의 모습으로 쭈그려 핀셋으로 고기 조각을 수거하는 웨이터들에 의해 병목이 좁은 호리병으로 운반되었다. 그래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막간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막간을 딛고 되돌아와야 했다. 사체에게 다음 소설을 써낼 수 있는 감상의 단초를 심어 주어야 했다. 여기를 넘어갈 수 있다면, 사체에게 인공의 전극을 붙이고 사활을 실험할 수 있는 후반기의 권능, 요행과도 같은 도깨비불을 일으킬 수만 있다면. 그럴 수 없음을 통해 자신의 볼기짝에 확언의 매질을 가하듯이. 이러한 바람은 어디선가 배워 온 넋두리였다. 그의 것이 아니었다. 이윽고 그는 조금 더 먼 곳에 도달했다. 따뜻하고 막다른 곳에. 차갑고 거품이 떠다니는 곳에. 웨이터들이 훌쩍거렸다. 콧물을 먹고 있는 것이다. 청지기가 찐득한 분화구를 쓰다듬었다. 그를 응원하는 것처럼. 달덩이를 달래듯. 딸은 작업실로 갔다. 그는 소설을 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보였다. 미심쩍은 소설을. 극진하게 내밀어 받든 손아귀로 낙하하는 한줌 똥과 같은 소설에게. 가짜를 탄원하는 가짜의 가짜, 가짜의 가짜를 탄원하는 가짜 소설을 위하여. 이제 그만 두려움을 그칠 것. 제발 그만. 여기 물체와 같은 두려움을 끝끝내 두려워하지도 못하는 네가.



















작가소개 / 양선형

제14회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데뷔.


《문장웹진 2017년 07월호》


추천 콘텐츠

좋아하는 마음 없이

좋아하는 마음 없이 김지연 안지는 이른 결혼을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아니, 그걸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이혼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안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그때 이혼한 일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늘 그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여러 말들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은 안지의 비밀은 아니었지만 먼저 나서서 밝히지도 않았다. 어릴 때 안지는 무척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그런 표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속해야 하는 집단에서 튀지 않는 사람, 아주 평균적인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 찬반투표를 할 때면 눈치를 보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서 좋아하고 친구의 것과 비슷한 브랜드의 신발을 사서 신었다. 친구들이 싫어하는 선생을 따라서 싫어했다. 사실 안지는 그 선생에게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다가 술술 흘러나온 그 선생에 대한 욕을 듣고 재빨리 노선을 바꿔 함께 욕을 했다. 한동안 안지는 수학 시간마다 왜 애들은 저 선생을 싫어할까? 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더 열심히 선생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수학을 가르친다는 점만 빼면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쉽게 답할 수 없는 내용을 골리듯 물어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생들한테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뭔가 잘못 알고 섣불리 화를 냈을 때, 그러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선생들은 그러게 헷갈릴 만한 짓을 왜 하고 다니느냐고 도리어 짜증을 부렸는데 그 선생은 재빨리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알았어. 미안해. 가끔 안지는 머릿속으로 그 목소리를 재생해 보곤 했다. 그 때문에 선생이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싫어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나?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안지는 대학에 갔고 연애를 했고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 결혼도 했다. 아주 평균적인 삶이었다. 조금씩 빠르기도 했다. 조바심이 나 있었으므로. 자신도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식도 올리기 전 임신을 해 낳은 아이가 막 돌을 지난 참이었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계속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낙태를 밀어붙이지 않은 것을, 시간을 끌다가 영영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을, 어떤 결단력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새로운 여자가 생겼을 때는 안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겨우 육 개월을 만났을 뿐

  • 관리자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