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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의 끝

  • 작성일 2018-02-01
  • 조회수 2,967

[단편소설]



파티의 끝



이승은




식탁 한편에는 은수와 민용이 앉았다. 가운데에는 은빛 펄로 무늬가 그려진 구 모양의 초를 켜두고 맞은편에는 지영과 동철이 앉았다. 작은 평수의 투 룸이지만 테이블 위의 음식과 촛불 덕분에 아늑해 보였다. 처음부터 커플 모임을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여자 친구들끼리 연말 모임을 계획하다가 민용과 동철이 합류했다. 유일하게 싱글인 수미는 회계 담당이라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다고 했고, 결혼한 지 삼 년이 된 성희는 연락이 없었다.
은수와 민용은 한 면이 벽에 붙어 있던 식탁을 가운데로 옮기고 상앗빛 식탁보를 씌웠다. 그릇을 꺼내 놓고 냉장고에 술과 음료수, 과일을 채워 두었다. 둘은 모든 준비를 함께했고 평소보다 자주 입맞춤을 했다. 신혼 집들이를 준비하는 것 같았다. 이런 모임은 내년 한 해를 잘 보내기 위한 신호탄이 될 것 같았다.
네 명뿐인데도 은수는 실속 없이 분주했다. 혼자 분주한 것은 아니었다. 은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눈치가 보이면 민용이 먼저 일어나 냅킨을 가져오거나 음식을 더 꺼내왔다. 민용은 마른 편이었지만 푸른 스웨터와 도톰한 면바지 덕분에 적당한 체격으로 보였다.
지영이 민용의 자상한 모습을 칭찬했다.
집안 내력이야.
민용이 장난치듯 말했다. 은수가 치이, 하며 웃고는 동철에게 말을 걸었다.
그 셔츠 멋지다. 질감도 좋아 보이고 잘 어울려.
난 뭘 입어도 잘 어울려.
체크무늬 셔츠의 주름을 펴 보이며 동철이 말했다. 동철은 요즘 광고에 많이 나오는 개그맨을 닮았다. 그 개그맨처럼 머리가 짧고 말이 빨랐다.
내가 골라 준 거야.
지영이 고갯짓으로 셔츠를 가리키며 웃었다. 겨자색 카디건을 입은 지영의 눈은 그냥 웃어도 눈웃음이 지어지는 반달형이었다. 대학 동기인 지영과 은수는 늘 서로의 남자 친구 고민을 들어주었다. 지영과 동철은 만나기 시작한 지 팔 개월 되었는데 은수는 벌써 동철을 여러 번 만났다. 지영을 만나러 가면 대부분 동철이 함께 있었다.
이 초 로맨틱하다. 무늬가 예뻐.
뾰족하게 솟아올라 춤추듯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면서 지영이 말했다.
민용 오빠가 사다 줬어.
은수와 민용이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은수와 지영, 동철은 동갑이고 민용은 그들보다 세 살 위였다.
촛농이 고인 동그라미가 점점 커지면서 벌써 무늬의 윗부분이 녹고 있었다. 초에서 퍼져 나오는 은은한 향이 코끝에 맴돌았다.
네 사람은 일곱 시쯤 모여 치킨과 연어 샐러드를 안주로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연말에 어울리게 한 명씩 돌아가며 올해 초에 계획했던 일, 그중에 한 일과 하지 못한 일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은수는 바라던 대로 학생이 되었고 민용의 바람은 오디오 세트를 새로 장만하는 것이었는데 이루어지는 중이었다. 며칠 전에 주문했는데 다음 주면 도착한다고 했다. 민용은 좋은 음악을 제대로 된 오디오로 듣는 것을 좋아했다. 지영은 프랑스에서 돌아온 후 입사한 향수 회사에서 과장으로 승진했다. 동철은 올해 못 이룬 것을 내년에 꼭 이루겠다고 했는데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담배를 끊으려고 했는데 그건 못 했지. 술 한 잔 들어가면 도저히 못 참겠어.
고개를 가로젓는 지영의 밝은 갈색 머리가 어깨에 닿을 듯 말 듯했다. 기분이 울적할 때면 지영은 미용실을 찾았다. 자신에게 딱 맞는 머리 모양을 찾고 싶었다.
사람을 모아 시끌벅적하게 놀기를 좋아하는 지영은 작년 이맘때 파티를 하자며 친구 여럿과 그때 만나던 남자 친구를 집으로 초대했다. 와인과 양주 몇 병을 비우며 자정을 넘겼을 때 지영은 짜증을 냈다. 담뱃갑을 못 찾겠다며 식탁 위에 파우치와 지갑, 이어폰과 영수증을 늘어놓았다. 소지품들을 가방에 쓸어 담던 지영은 고개를 푹 숙였다. 나 이제 사람 못 믿을 것 같아, 하며 울었다. 그날 지영의 남자 친구는 결국 오지 않았다. 서너 시경에 좀 늦을 것 같다는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연락이 되지 않았다. 작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 걱정을 했다. 하지만 지영은 금방 다른 연애를 시작했다. 내가 얘를 왜 만나는지 모르겠어, 얘는 진짜 아니야, 하면서도 동철과 계속 만났다.
치킨을 먹고 있는 동철과 눈이 마주치자 은수는 방긋 웃어 보였다. 그때 동철이 물었다.
은수는 대학원에서 뭐 공부한다고 했지? 비교문학이 뭐냐?
동철의 질문에 은수는 약간 뜸을 들였다. 이런 질문이 처음이 아니었지만, 그때마다 난감했다. 은수에게는 쉬우면서도 어려운 질문이었다.
문학과 철학이란 안경으로 세상을 보는 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
아아, 별로 쓸모는 없는 거구나. 안경 쓰면 답답하잖아.
동철의 말에 은수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민용과 지영은 피식 웃었다. 은수도 동철을 잠시 흘겨보고는 같이 웃었다.
지역마다 전통과 문화가 다르잖아. 그렇게 다른 문화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문학으로…….
손짓을 섞어 가며 은수가 설명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민용은 안쓰러운 듯 은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음, 역시 별 쓸모는 없는 거네.
팔짱을 낀 동철의 시큰둥한 말에 모두 웃었다. 은수도 이런 분위기가 기분 나쁘기보다 즐거웠다.
내년에는 뭐 하고 싶어?
은수가 지영에게 물었다.
용감해지는 것. 프랑스에 다시 가고 싶어.
지영은 무언가 결심한 듯 남은 술잔을 비우고 내려놓았다. 동철이 지영을 쳐다보았다.
그냥 가보고 싶다고. 여행이라도 말이야. 유학 갔을 때는 파리가 너무 싫고 프랑스 사람들, 프랑스에서 만난 한국 사람들이 다 싫었는데, 지금 다시 가면 어떨까, 그냥 궁금해.
지영은 자신의 빈 잔에 술을 따르려고 맥주병을 집어 들었다. 동철이 맥주병을 빼앗아 따라 주며 천천히 마시라고 했다. 은수는 지영이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몸이 안 좋다며 국제전화를 자주 하던 때가 떠올랐다.
꺼져 가는 하얀 거품을 보다가 지영이 고개를 들었다.
은수야, 넌?
한 가지 물건을 두 개 이상 혹은 패키지로 사지 않기.
은수가 말했다. 민용을 빼고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얼마 전에 마트에서 유통기한이 얼마 안 남은 치즈를 두 덩어리 샀어.
이 치즈?
아니, 이 치즈는 제값을 주고 산 거야. 그땐 며칠 동안 종일 치즈만 먹다가 배탈까지 나고 나중엔 냄새도 맡기 싫어지더라.
그래서?
여전히 의아한 표정으로 동철이 물었다.
치즈는 쳐다보기도 싫더라구. 근데 오늘 이렇게 다 같이 술 한잔하면서 오랜만에 먹으니까 너무 맛있고 좋아.
은수가 말을 좀 빙빙 돌려 할 때가 있어. 나도 처음엔 무슨 말인가 했지.
민용이 웃었다.
대학원에서 돌려 말하기 배우나 봐?
동철이 지영에게 어깨를 맞으면서 킥킥댔다.
진짜 원하게 될 때까지 기다리자는 거야. 얼떨결에 가지게 되면 소중한 줄 모르고 나중엔 귀찮은 것이 되어버리니까.
은수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음, 무슨 말인지 알겠다.
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공부를 시작하니 어렵지만 그래도 지금이 좋아.
은수는 공부하는 게 좋은가 봐. 난 공부라면 지겨운데.
앞 접시에 있던 올리브를 입에 넣으며 지영이 말했다.


빈 맥주병이 쌓여 가고 민용이 틀어 놓은 음악이 나른한 곡으로 바뀌었다. 네 사람의 기분에 어울리는 곡이었다. 촛불이 조금씩 흔들리고 가끔 창밖으로 사람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결혼하고 싶어 안달인 남녀가 나오는 프로그램 봤어?
지영이 턱에 손을 괴며 물었다.
그거 봤어. 요즘 예능엔 별게 다 나와.
은수가 맥주를 홀짝였다.
전 연봉이 칠천 정도 되고요. 외동이라 부모님 재산은 다 제가 물려받게 될 거예요.
동철이 출연자 중 한 명의 자기소개를 흉내 냈다.
결혼 못 해서 부모님 마음고생 시켰다고 울더라.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지영이 동철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연결되는 커플이 나오기는 하던데.
식탁 위에 흘린 연어를 동철이 주워 담았다.
그런데 그 사람들 잘살고 있을까?
지영이 냅킨으로 식탁보 위를 문질렀다.
결혼정보회사 생중계까지 봐야 하다니. 그 사람들은 어쩌다 그렇게 된 걸까?
은수는 그것이 정말 궁금했다.
최선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랬겠지?
민용이 조용히 듣고 있다가 말했다. 제대로 본 적은 없지만, 은수에게 들어서 어떤 프로그램인지 알고 있었다.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게 문제 아닐까?
은수가 물었다.
그런데 이렇게 뒷말 하면서도 자꾸 보게 돼. 꼭 막장 드라마 챙겨 보는 아줌마들처럼.
어깨를 움츠리며 지영이 웃었다.
동거하는 커플도 늘어나고 비혼주의자들도 많은데, 아직도 명절 때마다 그 얘기는 나오더라. 어떻게든 결혼을 해야 행복해진다는 환상.
손에 들고 있던 냅킨을 구기며 은수가 씁쓸하게 웃었다. 은수의 아버지는 딸의 결혼을 간절히 바랐다. 남자는 몰라도 여자는 결혼을 해야 한다고 했다.
저렇게 만나서 결혼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지영이 목소리를 죽이며 묻자 모두 다음 말을 기다렸다.
꼭 다 그런 건 아니지만. 회사 미팅 끝나고 술자리 하면 유부남들이 얼마나 귀찮게 하는지…….
지영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사랑해서 한 결혼이 아니다, 어머니가 아프셨고 마침 와이프를 사귀고 있었다, 이런 말을 한다니까. 부인이랑 관계를 거의 안 가진다고, 아무 느낌이 없다고.
그런 얘기까지 해?
회사 생활 하면서 난 집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유부남을 본 적이 없어.
남자라고 다 그렇진 않아.
민용이 일부러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술자리 가면 얼굴도장 찍고 빨리 나오라고. 아닌 건 아니라고 얘기하고.
어떻게 매번 그러냐. 빠질 수 없는 자리도 있지.
지영이 나초를 입에 넣으려다 말고 동철에게 쏘아붙였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은수가 누구지,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관문이 열리고 커다란 가방을 옆으로 멘 성희가 들어왔다.
연락 없기에 못 오는 줄 알았지.
우리 시댁이 이 근처로 이사 왔잖아. 코난 찾아온다면서 살짝 빠져나왔어.
성희는 큰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애완동물이동 가방이었다. 지영과 은수가 성희에게 민용과 동철을 소개했고 처음 만난 그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내가 와서 분위기 깬 거 아니지? 코난 잠깐 꺼내줄게. 답답해할 것 같아서.
가방 지퍼를 여니 어두운 회색 고양이가 귀를 쫑긋하며 머리를 내밀었다.
아이 귀엽다. 이름이 코난이래.
지영이 소리 질렀다.
고양이네요.
민용이 말했다.
코난은 낯 안 가려. 할퀴거나 하지 않을 거야.
성희의 말에 동철이 고양이를 몇 번 쓰다듬었다. 그뿐이었다. 아무도 고양이를 반기지 않았다. 성희는 민용이 내주는 자리에 앉았고, 코난은 주변을 기웃거렸다. 봄에 둘째를 낳은 성희는 모유 수유를 하느라 한동안 못 마셨다며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연신 매워하면서도 치킨 조각을 빨간 소스에 푹 담갔다.
아이 낳으니까 머리도 빠지고 뱃살도 늘어지고……. 초면에 이런 얘기 해도 되죠?
치킨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성희가 깔깔대고 웃었다. 은수는 성희에게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말해 주었다. 단발머리도 예쁘고 커다란 큐빅이 달린 핀도 귀엽다고 했다. 지영이 맞장구를 쳤고, 민용과 동철은 듣고만 있었다. 성희가 치킨 몇 조각을 더 먹은 후, 다 함께 건배를 하고 학창 시절 얘기를 잠깐 했다. 주로 성희가 이야기했다.
엄마야!
은수가 소리를 질렀다. 무언가 은수의 발목을 스치고 지나갔던 것이다. 고양이였다.
왜 그렇게 놀래. 그래도 얌전한 편인데.
애완동물을 안 키워 봐서 그런가 봐.
근데 나 오기 전에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
성희가 네 사람을 훑으며 물었다.
우리 진실게임 같은 거 할까요? 요즘엔 그런 거 안 해?
성희가 까르르 웃었다. 성희의 솔직하고 막무가내인 성격은 여전하다고 은수와 지영은 생각했다.
나 애 맡기고 몰래 나온 거란 말이야. 재미있게 놀아야 한다구.
네 사람은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어쨌든 하게 되었다. 말을 놓자는 동철의 제안에 성희가 좋다면서 동철을 첫 번째로 지목했다.
지영이한테 처음 실망했을 때가 언제야? 방귀 뀌었을 때, 트림했을 때, 이런 것.
시작하기도 전에 성희는 혼자 킥킥거렸다.
음…… 이런 것 얘기해도 되나…….
모두의 시선이 쏠려 동철은 당황했지만, 성희의 부추김에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버스 안에서 잘 때, 완전 턱이 뒤로 빠지더라고. 거기다가 눈은 반만 뜨고 입에서는 침이…….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입을 벌리고 있는 동철의 등을 지영이 찰싹 때렸다.
이거 봐. 왜 이런 걸 나한테 물어.
만족스러운 듯 성희가 식탁을 두드리며 웃었다. 웃음소리가 잦아들기 전에 민용이 재채기를 했다. 엄청나게 큰 재채기여서 모두가 쳐다봤다. 민용은 괜찮으니 계속 얘기하라는 손짓을 했지만, 이후에도 연속으로 몇 번을 더 했다.
다음으로 성희는 지영에게 물었다. 냅킨으로 입을 닦던 지영은 동철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자 동철의 표정이 굳었다. 장난기 가득하던 동철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그러더니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은수의 눈에는 잠깐 그렇게 보였다. 동철은 지영이 삼 년을 사귀다 헤어진 준형과 가끔 연락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둘은 연애 초기부터 자주 다퉜다. 동철과 싸우고 나면 지영은 꼭 전화를 걸어왔다. 한번은 동철이 너무 흥분하여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고, 집으로 또 찾아올까 봐 겁이 난다고 했다.
그럼 너는? 신랑한테 언제 실망했는데?
잠시 시무룩하게 있던 동철이 분한 듯 성희에게 물었다. 성희는 남은 맥주를 다 마시고 잔을 내려놓고는 입가를 쓱 닦았다.
민서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을 때인데.
동철이 맥주병을 집어 성희의 잔을 채웠다.
신랑이 공인인증서 비번을 공개하자는 거야. 자기가 먼저 하겠대. 그런가 보다 했지. 집에 혼자 있다가 심심해서 들어가 봤는데.
성희는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어쩌면 결혼은 결혼정보회사를 통해서 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어.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성희는 이어서 말했다.
조회해 봤더니 결혼 전에 거액 대출을 두 번 받았는데 합이…… 지금 사는 32평 아파트에서 화장실만 빼고 나머진 다 은행 것이라고 보면 돼. 그러니까 너희 다…….
성희는 뒤에 말을 잇지 않았지만 모두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았다.
첫째 민서가 태어난 후에 은수와 지영은 성희 집으로 놀러 갔다. 보채는 아이를 안고 달래다가 지친 성희는 중국집에서 배달음식을 시켜 주었다. 집에만 있다 보니 우울증에 걸리겠다며 절대 둘째는 갖지 않겠다고 했다. 작년에는 백화점에서 잠깐 만났다. 넌 이거나 봐. 우리 얘기 좀 하게. 성희는 민서에게 스마트폰으로 유튜브 영상을 틀어 주었다. 애가 이쁘긴 한데 체력적으로도 힘들고 돈 드는 것이 장난 아니야. 너네도 정신 차려. 결혼할 거면 서두르라고. 차를 마신 후에 은수와 지영은 민서의 손을 잡고 여성복 매장을 구경하는 성희 뒤를 따라 다녔다. 성희는 코트를 사겠다며 여러 벌 입어 보다가 결국 행사장 매대에서 패딩 점퍼를 하나 샀다.
그래도 신랑이 몇 년이면 갚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사는 거지.
성희는 이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성희는 임신 사 개월에 접어들었을 때 대기업에 다니는 신랑과 식을 올렸다.
잠깐 정적이 흐를 때 민용이 재채기를 해서 성희가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우와, 백 미터 밖에서도 들리겠어요.
민용은 미안해하며 잠깐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갔다. 동철이 맥주를 사러 뒤따라 나갔다.
현관문이 찰칵 닫히자마자 성희가 지영 옆으로 바싹 다가갔다.
준형이랑은 완전히 끝난 거냐?
끝났다니까, 언제 적 얘길 하는 거야.
지영이 핀잔을 주었다. 성희는 개의치 않고 동철의 직장이 어디인지, 연봉은 얼마나 되는지 물었다.
하나씩 좀 물어봐.
은수가 끼어들었다. 그러자 성희가 은수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야, 너넨 계속 만나는 거야?
은수는 한 번 씨익 웃고 말았다.
네가 이십대인 줄 알아? 내가 친구로서 민용 오빠한테 한마디 해줄까?
지영이 성희야, 하고 부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빠 부모님은 다 계셔? 가까운 사람이 이혼했거나, 뭐 다른 문제가 있는 거 아닐까?
성희가 또 물었지만 은수는 못 들은 척 딴청을 부렸다. 과일 먹을래?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수랑 민용 오빠는 잘 지내잖아.
지영이 은수를 흘끔 보고는 말했다.
야, 너도 네 얘기 좀 해. 예전부터 은수는 남 얘기 듣기만 하고 자기 얘길 안 하더라. 안 그러냐?
은수를 향해 말하며 성희가 지영의 동의를 구했다. 지영도 대꾸가 없었다. 은수는 싱크대 쪽으로 가 조용히 배를 깎았다.
잠시 후 민용과 동철이 들어왔다. 동철은 자리에 앉고 민용이 은수를 거들어 과일을 깎았다. 유년 시절의 상처를 찾으려는 듯 성희는 민용의 뒷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다가 민용이 식탁을 둘러보자 눈이 마주쳤다.
거기 빈 접시 좀 가져다줄래?
민용이 상냥하게 말했고 성희는 빈 접시를 전부 가져다 싱크대에 올려 두었다. 얼굴이 조금 붉어진 것 말고는 옆모습에서도 별다른 흠을 찾을 수 없었다. 다리를 흔들며 스마트폰 게임을 하던 동철은 설거지를 끝내고 자리에 앉는 민용의 얼굴을 보고 눈이 동그래졌다.
형, 울어요?
민용이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아, 맞다. 알레르기!
식탁을 탕, 치며 은수가 외쳤다. 민용의 얼굴에는 두드러기가 돋아 있고 눈물과 콧물로 범벅되어 있었다. 은수는 벌떡 일어나 청소기를 돌렸다. 청소기 소리에 놀란 코난은 창틀로 뛰어 올라갔다.
진작 얘길 하시지.
성희는 코난을 안아 가방 안에 넣었다.
혹시 그사이에 체질이 바뀌지 않았나 해서.
민용이 별것 아니라는 듯이 세수를 하고 돌아와 물기가 촉촉한 얼굴로 말했다.
이러다가 나중에는 숨도 못 쉴 지경이 된 적도 있어.
치료 방법은 없어요?
딱히 없어. 그냥 고양이를 멀리하면 괜찮아.
민용은 휴지로 눈물과 콧물을 찍어내었다.
근데 적응될 거라고 믿고 키우는 사람도 있대. 그러다가 천식도 생기고 응급실에 실려 가는 사람도 있대.
민용에게 손수건을 주며 은수가 말했다.
고양이가 그렇게 좋은가 봐.
지영이 막 울리기 시작한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스마트폰을 건네받은 성희는 네, 어머님, 금방 가요,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호 깼대. 또 언제 보려나. 암튼 미안하게 됐어.
성희는 들어올 때처럼 커다란 가방을 들고 서둘러 나갔다. 워낙 급하게 나가느라 마중을 나갈 수도 없었다.


성희가 간 후에는 얼음 잔에 위스키를 한 잔씩 돌렸다. 잔을 다 채운 후 민용은 식탁 가운데로 술잔을 들어 올렸다. 은수와 지영, 동철 모두 잔을 부딪쳤다. 민용은 건배만 하고 술은 마시지 않았다. 재미있게 본 영화 몇 편과 미국 드라마,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보냈는지 이야기하다 보니 자정이 넘었다. 동철은 언더락 잔을 빠르게 여러 잔 비웠다. 지영이 적당히 마시라며 동철의 잔에 얼음을 가득 넣어 주었다. 이벤트 회사의 기획팀장인 민용은 크리스마스이브인 토요일에도 야근을 했다고 했다.
아까 오빠 계획은 얘기 안 했죠?
난 뭐 특별한 거 없어. 꼭 뭘 계획해야 하나. 계획대로 못 했다고 자책하고, 그러면 재미없잖아? 자기 시간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 돈을 버느라 뭘 사느라 자기 시간은 없어지니까.
민용은 아직도 코를 훌쩍였다. 동철은 세 사람의 얼굴을 차례로 보다가 지영의 얼굴에서 멈추고 피식 웃었다. 지영에게서도 이런 비슷한 얘길 들은 적이 있었다.
자기 시간에 뭘 해야 하는데요?
동철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글쎄…… 뭘 하는 게 좋을까?
민용이 되물었다.
일기 쓰는 시간? 반성의 시간? 아, 난 잘못한 거 없는데. 요즘엔 말이에요.
동철이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오빠는 뭐 해요?
하품이 나오는 입을 가리며 지영이 물었다.
오빠는 음악 듣는 거 좋아해.
민용이 물을 한 모금 마시는 동안 은수가 대답했다. 민용이 듣는 음반 중에는 한 곡에 육십 분이 넘는 것도 있었다.
은수는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난 은수가 계속 공부를 하는 게 좋더라.
민용이 은수의 팔에 손을 올렸다.
그러니까 자기만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거죠? 음악 듣는 시간요? 아무 소음이나 방해 없이. 밥 먹어라, 애들이랑 놀아 줘라, 잘 시간이다, 형광등이 나갔다, 뭐 이런 소리 없이요?
딱히 누구의 흉내라고 할 것도 없이 동철이 과장되게 고개를 끄떡였다. 지영이 식탁 아래에서 동철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그거 솔직히 말해 이기적인 거 아니에요?
동철은 어깨를 으쓱했다. 은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민용을 흘긋 보았다. 민용은 노려보는 것처럼 동철을 보고 있었는데 알레르기 때문에 눈이 침침해져서인지 화가 나서인지 구분이 잘 안 되었다. 민용은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결혼이야말로 이기적인 거 아닐까?
민용은 아무도 쳐다보지 않고 허공에 대고 물었다. 동철은 입술에 힘을 풀고 푸, 푸 소리를 내더니 양팔을 식탁 위로 올렸다. 초가 흔들리며 촛농이 쏟아졌다.
연봉이 형만큼 될 일은 없겠지만 난 지금 직장에 만족해요. 그래도 난 운이 좋은 편이야. 채권일 다시는 안 해.
지영이 앞 접시와 포크를 치우고 식탁 모서리로 밀려난 물컵은 민용이 치웠다. 동철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지영의 손을 꼭 잡았다.
동철은 채권관리팀에서 일 년을 일했다. 홀어머니를 모셔야 했다. 일 년 후에는 고모부의 도움으로 화장품 회사에 입사했고 직장 동료에게 지영을 소개받았다.
야, 너 술 그만 마셔. 오늘 많이 취했다.
지영은 술잔도 옆으로 치웠다.
잠깐 나갔다 올게.
두 손으로 얼굴을 위아래로 쓸어내리며 동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오늘 처음 들었어. 전에 친구 아버지 회사에서 일했다고만 들었거든.
지영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셋은 가만히 식탁보 위에 떨어진 촛농이 굳어 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현관문이 열리고 동철이 들어왔다. 찬 공기 냄새가 났다. 잠깐의 정적을 깨고 동철이 흠흠, 헛기침을 했다. 어깨를 쭉 펴더니 지영의 손을 잡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나 얼마 전에 프러포즈했어.
자리에 앉으며 동철이 말했다. 지영은 은수와 민용을 번갈아 보며 씽긋 웃었다.
우와, 축하해.
민용이 서둘러 말을 꺼내 놓고는 은수를 쳐다보았다. 은수가 말할 차례였지만 살짝 입술을 떼고는 아무 말이 없었다.
드디어 했구나.
민용이 동철의 어깨를 한 번 툭 쳤다.
축하해, 지영아.
뒤늦게 은수가 말했다.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은수는 미소 지었다.
프러포즈 어떻게 했어? 합격이야?
민용의 물음에 동철이 머리를 긁적일 때 스마트폰이 울렸다. 동철은 스마트폰을 가지고 베란다로 나갔다.
동철은 그동안 둘이 찍은 사진과 동영상을 이어 붙이고 자막을 덧입혀 프러포즈 영상을 만들었는데 지영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 식상하다고 솔직하게 말했더니 동철은 며칠 밤을 새웠는데 알아주지 않는다며 뾰로통했다고 지영이 들려주었다. 은수는 지영의 얘기를 듣고 있지 않았다. 멍하니 지영 뒤편의 창밖을 보고 있었다.
은수가 창 쪽에서 지영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정말 잘 됐어. 날까지 잡았어?
아직. 동철이는 내년 여름에라도 하자는데…….
지영이 술잔을 입에 대어 목을 축였다. 은수는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술잔에는 작은 얼음이 몇 개 떠 있었다. 위스키가 출렁이며 얼음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여름은 좀 빠른 것 같지? 준비하려면 좀 빠듯할 것 같아.
은수는 대답이 없었다.
근데 은수야, 술 안 마셔? 얼음이 다 녹았어.
은수의 술잔을 보며 지영이 말했다.
응, 마셔.
은수 원래 술 잘 못하잖아.
붉어진 은수의 볼에 민용이 손등을 대었다가 술잔을 빼냈다. 은수의 손에서 술잔이 힘없이 빠져나갔다. 술잔을 쥐고 있던 빈손을 바라보다가 은수는 처음 보는 사람처럼 민용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방금 빼앗긴 것 같았다. 민용이 냉동실에서 얼음을 꺼내온 후 은수의 팔에 손을 얹으려고 할 때 은수는 양손을 식탁 아래로 내려 옷매무새를 만졌다. 민용은 자신이 은수의 기분을 상하게 했는지, 자기도 모르게 말실수를 하진 않았는지 생각해 보았다. 평소에 은수에게 하던 말이었다. 새로운 이야기는 없었다. 동철의 프러포즈도 전혀 놀랍지 않았다. 얼마 전부터 둘의 결혼 이야기가 오가던 것은 은수도 알고 있었다. 새로운 일이라면 그날 오전에 지영이 전화를 걸어온 것이었다. 프러포즈를 받았다며 지영은 은수 걱정을 했다. 자기가 결혼을 하면 친한 친구 중 수미와 은수만 빼고 모두 결혼을 한 셈이라고 했다. 민용은 그런 문제라면 은수는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걱정할 필요 없다고 했다. 그러자 지영은 민용에게 아직도 은수를 잘 모른다고 했다. 동철을 두둔하며 그동안 밤마다 전화를 걸어오는 은수에게 얼마나 시달렸는지 털어놓았다.
민용은 은수에게 혹시 몸이 좋지 않은지 물었지만 은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와 통화를 마치고 동철이 돌아오자 민용은 담배를 가지고 베란다로 나갔다. 지영도 같이 피우자며 따라 일어섰다. 식탁에는 은수와 동철, 둘만 남았다.
동철은 벽에 고개를 기대고 있었다. 어디서 바람이 들어오는지 촛불이 흔들리고 식탁 위에 그림자도 흔들렸다. 베란다에서는 민용과 지영이 얘기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은수는 식탁 위에 놓인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성희에게 잘 들어갔느냐는 안부 메시지를 보내려고 했는데 이미 성희로부터 메시지가 와 있었다. 생각 바뀌면 얘기해. 내가 신랑 친구 중에 괜찮은 사람 소개해 줄게. 은수는 스마트폰을 도로 내려놓았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은수가 애원하듯 물었다. 동철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을 왜 하려는 거야?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 그냥 같이 살고 싶은 거지.
싱겁다는 듯 동철은 눈을 감은 채 머리를 벽에 비볐다. 은수는 동철을 바라보았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셔츠는 구겨져 있었다. 동철의 얼굴은 피곤하고 우울해 보였다. 베란다에서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면 지영과 동철은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민용도 출근 준비를 위해 자신의 집으로 출발할 것이고, 은수는 스터디 과제를 해야 했다. 은수의 방, 책장에는 은수의 손때가 묻은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마음에 간직하고 싶은 문장들로 가득한 책이었다. 하지만 영어와 불어로 된 책을 읽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귀찮을 때도 있었다. 학교에서 읽어 오라는 책이 때로는 변명과 핑계거리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오늘 같은 날이 그랬다. 어깨에서부터 서서히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은수는 고개를 숙이고 포크를 만지작거렸다. 아무 장식 없는 은색 포크의 손잡이는 매끈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늘게 난 흠집이 보였다. 촛불에 비친, 잔잔한 무늬처럼 보이는 긁힌 자국들을 은수는 손으로 어루만졌다. 그러다가 연필을 잡듯 한 손으로 포크를 움켜쥐었다. 그때 잠깐 눈을 떴다가 동철은 다시 눈을 감았다. 불필요하고도 복잡한 상황에 놓이는 것을 동철은 끔찍이 싫어했다. 그런 상황에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머리는 그대로 벽에 기댄 채 팔짱만 바꿔 끼웠다. 그날 오전, 지영이 민용과 통화를 할 때 동철은 옆에 있었다. 은수의 기분을 잘 맞춰 주자는 지영의 말에 동철은 왜 그래야 하느냐며 투덜거렸다.
굳이 두 번째 이유를 대라면 난 집이 지긋지긋해. 결혼으로 완벽하게 독립할 거야.
투덜거리듯 동철이 말했다. 은수는 동철의 말에 놀라 입을 조금 벌렸다. 그리고 다른 학생들 모르게 선생님께 받은 사탕을 입에 넣은 학생처럼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어디선가 익숙한 멜로디가 들려왔다. 그 순간 동철의 두 눈은 감겨 있었지만 눈을 뜨고 자기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은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어떻게 될지 뻔히 알면서 왜 그런 선택을 하는 걸까. 은수는 알 수 없었다. 상처받을 지영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벌써 지영이 걸어오는 스마트폰 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은수는 다짐했다. 세미나와 발제 준비로 은수는 더 바빠질 테지만 지영의 전화를 모른 척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이야기든 들어주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런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 나는 포기하지 않아요. 그대도 우리들의 만남에 후횐 없겠죠.
한 남자가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지나갔다.
저 아저씨 열창하시네. 저 노래 좋아했는데.
민용이 담뱃재를 털고 말했다.
오빠도요? 라디오에서 저 노래 나올 때 기다렸다가 가사 받아 적었어요.
지영이 목소리에 생기를 띠며 말했다. 속으로 노래의 멜로디와 그다음 가사를 떠올렸다.
어떻게든 결혼하고 싶은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막상 결혼한다니까 이젠 올해의 계획 같은 건 세워 봤자 소용이 없는 건가 싶기도 해요.
지영이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완벽하게 가정적인 분이었어. 난 아버지를 좋아하고 존경하지만, 이런 생각이 들더라. 난 그렇게 해낼 자신이 없다는.
민용이 두드러기가 가득한 얼굴로 웃었다. 지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차가운 공기 속에 수많은 집과 몇몇 불빛이 보였다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는 거야?
옅은 담배 냄새를 풍기는 지영이 거실로 들어오자 은수가 물었다.
지영아, 다시 한 번 축하해.
은수가 활짝 웃으며 바짝 다가왔을 때 지영은 자기도 모르게 뒤로 한 발 물러났다. 은수의 눈길에서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어색함을 느꼈다. 하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조용히 이 자리가 끝나 가고 있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이런 어색함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사라지거나 아니면, 익숙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다시 모인 네 사람은 돌아가면서 좋아하는 음악을 틀었다. K-POP, 영화음악, 팝송, 7080 가요 등이 흘러나왔다. 음악을 들으며 은수는 민용의 손을 잡았다. 과일 몇 조각을 먹다가 지영은 깜빡 졸고, 동철은 의자를 벽 쪽으로 돌려 기대어 앉았다. 누군가는 초를 껐다. 새까맣던 창밖이 조금씩 환해지고 있었다. 조용한 노래 한 곡이 끝나고 적막해졌을 때 민용이 마지막으로 재채기를 했다. 술과 잠에 취해 있던 동철이 화장실에 다녀오며 어깨로 벽의 스위치를 건드리자 거실 등에 불이 들어왔다. 해가 잘 들지 않는 투 룸의 새벽, 창백한 형광등 아래 은수와 민용의 얼굴도 지영과 동철의 얼굴도 창백해 보였다. 우연히 밖에서 잠깐 봤을 때처럼 낯설었다. 그들은 잠깐 잠이 들었다가 깨어난 사람처럼 몸을 추스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새 꺼내 놓은 말들을 쓸어 담듯이 분주히 움직였다. 민용은 고개를 돌려 손수건으로 콧물을 닦았고, 지영은 담뱃갑과 라이터를 찾으러 베란다로 나갔다. 식탁 위에 타다 남은 초는 반구 모양이 되었고, 치즈는 말라붙어 있었다. 마른안주와 치즈가 뒤섞인 냄새가 났다. 민용이 빈 술병을 한데 모으고, 은수는 남은 음식을 냉장고에 넣거나 버렸다. 그릇과 술잔, 포크를 전부 개수대에 넣었다. 민용과 동철이 식탁을 들어 옮겼다. 촛농과 음식물로 얼룩진 상앗빛 식탁보를 벗기자 식탁은 깨끗했다. 다시 한쪽 벽에 붙인 식탁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 그레이엄 그린의 단편 <파티의 끝>에서 제목을 가져옴.















작가소개 / 이승은

1980년 출생. 2014년 단편소설 「소파」로《문예중앙》 신인문학상 수상. 2016년 대산창작기금 수혜.


《문장웹진 2018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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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음 없이

좋아하는 마음 없이 김지연 안지는 이른 결혼을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아니, 그걸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이혼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안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그때 이혼한 일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늘 그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여러 말들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은 안지의 비밀은 아니었지만 먼저 나서서 밝히지도 않았다. 어릴 때 안지는 무척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그런 표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속해야 하는 집단에서 튀지 않는 사람, 아주 평균적인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 찬반투표를 할 때면 눈치를 보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서 좋아하고 친구의 것과 비슷한 브랜드의 신발을 사서 신었다. 친구들이 싫어하는 선생을 따라서 싫어했다. 사실 안지는 그 선생에게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다가 술술 흘러나온 그 선생에 대한 욕을 듣고 재빨리 노선을 바꿔 함께 욕을 했다. 한동안 안지는 수학 시간마다 왜 애들은 저 선생을 싫어할까? 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더 열심히 선생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수학을 가르친다는 점만 빼면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쉽게 답할 수 없는 내용을 골리듯 물어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생들한테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뭔가 잘못 알고 섣불리 화를 냈을 때, 그러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선생들은 그러게 헷갈릴 만한 짓을 왜 하고 다니느냐고 도리어 짜증을 부렸는데 그 선생은 재빨리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알았어. 미안해. 가끔 안지는 머릿속으로 그 목소리를 재생해 보곤 했다. 그 때문에 선생이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싫어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나?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안지는 대학에 갔고 연애를 했고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 결혼도 했다. 아주 평균적인 삶이었다. 조금씩 빠르기도 했다. 조바심이 나 있었으므로. 자신도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식도 올리기 전 임신을 해 낳은 아이가 막 돌을 지난 참이었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계속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낙태를 밀어붙이지 않은 것을, 시간을 끌다가 영영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을, 어떤 결단력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새로운 여자가 생겼을 때는 안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겨우 육 개월을 만났을 뿐

  • 관리자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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