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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5

  • 작성일 2019-11-01
  • 조회수 3,659

[단편소설]



후5



최진영




지현과 연락을 주고받던 시절에는 핸드폰 번호의 중간 자리 숫자가 세 개였다. 011211. 지현의 핸드폰 번호는 그렇게 시작했다. 이젠 다를 것이다. 뒷자리 번호 네 개는 그대로일 수 있지만 011211은 바뀌었을 것이다. 지현에게 전화를 걸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011로 시작하는 열 개의 숫자를 반복해서 외운다. 예전 번호로 전화를 걸면 현재 번호로 자동연결이 될까? 지현이 전화를 받을까?
나 이지연.
하고 말한다면 지현은 아, 이지연. 지연이구나. 대답할 것이다. 정말 오랜만이라는 말을 주고받을 것이다. 서로 어디에 사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묻고 대답하면서, 지현은 자기에게 연락한 진짜 이유를 말하기를 기다릴 것이다. 그냥 생각나서 전화했다고 말한다면 지현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웃을까. 나도 따라 웃을 수 있을까. 갑자기? 내 생각을? 하고 되묻지는 않을까. 자주 너를 생각한다고 솔직히 대답할 수 있을까. 지현은 나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할까. 싫은 사람이겠지. 싫어하진 않더라도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사람' 또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기억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내게 지현은 어떤 사람인가 생각해 보면…… 생각할수록 지현은 지워지고, 그 시절의 나만 부각된다. 그때 대체 왜 그랬느냐고 지현이 물어본다면 나는 모든 걸 설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현은 내게 물어본 적이 없다. 열 개의 숫자를 외우며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전화를 걸고 싶은 마음은 사그라지고, 이상하게도, 지금의 나는 껍데기 같다. 성숙하여 탈피했는데 나는 껍데기로 남고 생명은 멀리 날아간 것만 같다. 껍데기에 붙어 조금 남은 생명이 바로 나 같다.


*


고등학교 입학하기 전 기숙사에 들어갈 학생들이 따로 소집되던 날, 아마도 지현과 나는 처음 만났을 것이다. 지현도 나도 그날의 서로를 기억하지는 못했다. 기숙사에 들어가려면 성적이 좋고 집이 멀어야 했다. 기숙사 건물의 1층은 학교 식당이고 2층부터 4층까지 침실, 5층은 독서실이었다. 나는 교실에서 야간자율학습을 마친 다음에도 기숙사 독서실에서 새벽 한 시까지 문제집을 풀었다. 늦게까지 독서실에 앉아 있는 사람은 거의 고3 언니들이었다. 지현은 늘 나보다 오래 독서실에 머물렀다. 지현이 독서실을 나설 때까지 나도 버텨 본 적이 있다. 지현은 새벽 두 시가 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날부터 나도 새벽 두 시까지 버텼다. 문제집을 푸는 시간보다 엎드려 자는 시간이 더 길 때도 많았다. 엎드려 자다가 새벽 네 시 넘어서야 방으로 들어간 적도 있다.
첫 모의고사를 치르고 기숙사 독서실에는 전교 1등에서 30등까지 이름과 성적이 순서대로 붙었다. 나는 16등이었다. 지현은 17등이었다. 나는 다시 새벽 한 시까지만 공부하는 패턴으로 돌아갔다. 1년 동안 나는 15등과 20등 사이를 맴돌았다. 지현의 등수는 늘 나보다 아래에 있었다.


2학년이 된 첫날 교실에서 지현을 봤다. 눈이 마주치면 인사하려고 했는데 지현은 자기 친구들과 이야기하느라 주변을 둘러보지 않았다. 담임은 앉을 자리를 따로 정하지 않겠다고 했다. 매일 아침 앉고 싶은 자리에 알아서 앉으라고. 아이들은 환호했다. 1학년 때 친하게 지내던 희주와 다른 반이 되어버려서 내겐 기꺼이 같이 앉자고 말할 사람이 없었다. 내게 그렇게 말을 걸어 줄 사람도 없을 것 같았다.
다음날 평소보다 일찍 교실에 갔다. 자기들끼리 친한 아이들 틈에 뒤늦게 끼여 앉는 처지가 되느니 애초에 내가 먼저 자리를 잡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교실에는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먼저 와 있었다. 나는 교실이 한눈에 들어오는 가장 뒷자리를 선택했다.
교실은 금세 소란해졌다. 빈자리가 거의 남지 않았을 즈음 교실 뒷문으로 들어서는 지현을 봤다. 사실 옆자리에 누가 앉든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도 나는 마치 지현의 자리를 미리 잡아 놓은 사람처럼 손을 들어 보이며 지현을 불렀다.
여기, 여기 앉아.
나도 모르게 말해버리고 혼자 겁을 먹었다. 지현이 내 말을 못 들은 척하고 다른 자리로 가버릴까 봐. 우리는 같이 기숙사 생활을 했지만 한 번도 대화해 본 적 없었고, 지현은 확실히 나보다는 친구들이 많아 보였으므로, 이미 다른 아이와 같이 앉자고 말을 맞춰 놓았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지현은 망설이지 않고 내 옆자리로 걸어왔다. 창가 자리에서 누군가 지현을 불렀다. 이지현, 여기 네 자리 맡아 놨어, 하고 말했다. 이지현은 이지연처럼 들리기도 했고, 나는 이지현이 부러웠고, 지현에게 여기 앉으라고 말한 것을 후회했다. 지현은 내 옆자리에 책가방을 놓으면서 창가의 아이들에게 말했다.
그냥 여기 앉을게. 거기는 민정이 오면 앉으라 그래.
창가의 아이들은 서운해 하지도 자기들에게 오라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곧 나민정이 교실로 들어섰고, 그들은 나민정을 향해 손짓했다. 지현은 의자에 앉으며 손으로 이어폰을 돌돌 감아 교복 주머니에 넣은 뒤 가방에서 필통과 책을 꺼냈다. 나는 지현에게 뭔가 말을 건네야 한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친한 척한 것을 설명해야 한다고. 예전부터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었다든가, 같은 반이 되어서 좋다든가, 기숙사 독서실에서 너를 자주 봤다든가, 너 예지랑 친하지 나 예지랑 같은 방 쓰잖아……. 하지만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현은 책을 펼치다가 가방에서 두루마리 휴지를 꺼내 코를 풀었고 교복 주머니에서 작은 손거울을 꺼내 코 주변을 봤다. 나는 곁눈질로 지현의 눈치를 살폈다. 앞자리에 앉은 아이가 지현을 돌아보며 휴지 좀 달라고 했다. 지현은 그 아이에게 두루마리 휴지를 통째로 건넸다. 교실 앞문으로 영어 선생님이 들어왔다. 나는 지현에게 말 걸기를 단념했다.
뭐야.
지현이 혼잣말했다.
수학 아니었어?
지현의 책상에는 수학 교과서가 펼쳐져 있었다.
오늘 수요일 아니야?
나는 그제야 혼잣말이 아니란 걸 알아챘다.
화요일인데.
지현을 멀뚱히 쳐다보며 대답했다. 지현은 수학책을 넣고 영어책을 꺼내며 말했다.
우리 완전 잘못 걸렸어.
응?
저 선생님 매주 쪽지 시험 본대. 영어 본문 통으로 외워서 쓰는 거. 틀린 문장 오십 번씩 써오라고 숙제 내고. 근데 너 타이 뒤집어 달았는데.
나는 고개를 숙여 타이를 내려다봤다. 앞뒤가 뒤집혀 있었다. 단추를 풀어 바로 달면서, 이게 이렇게 쉬울 수도 있는 거구나 생각했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건다는 게. 작정한 대로 '너랑 정말 친하게 지내고 싶었어.' 같은 말을 지현에게 건넸다면 지현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을 것이다. 황당한 표정을 지었을지도 모른다. 나의 가식을 단번에 알아봤을 것이다.
영어 선생님은 정말 그렇게 말했다. 매주 쪽지 시험을 보겠다고. 틀린 문장을 오십 번씩 쓰는 숙제를 낼 거라고. 오십 번씩 쓰다 보면 문장이 절로 외워질 거고 그럼 문법 공부를 따로 할 필요가 없다고. 이게 다 너희들을 위해서라고. 지현과 나는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창가 아이들이 우리 자리로 다가왔다. 나는 잠이 오는 척 책상에 엎드렸다. 안 가? 지현이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밥 먹고 자. 늦게 가면 맛있는 반찬 없잖아. 창가 아이들은 총 네 명, 지현과 나까지 합쳐 여섯 명이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지현의 친구들 틈에 스며들었다. 우리는 두어 명씩 무질서하게 뒤엉켜 식당까지 걸어갔다. 여섯 명이 함께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해서 네 명과 두 명으로 찢어져 앉았는데, 지현은 내 옆에 있어 줬다. 밥을 다 먹고 식당을 나와 여섯은 다시 뭉쳤다. 역시 무질서하게 뒤엉켜서 매점까지 걸어갔다. 매점에서 각자 먹고 싶은 음료수나 아이스크림을 골라 교실로 오는 동안 다 먹었다. 각자의 사물함에서 칫솔과 치약을 꺼낸 뒤 우리는 다시 무리지어 화장실로 갔다. 나는 조금 들떴고 평소보다 많이 웃었다. 말 속에 과장된 표현이 절로 섞였다.
5교시가 시작되었다. 지현은 팔꿈치를 책상에 얹은 상태로 금방 잠들었다. 지현의 몰래 자는 기술은 탁월했다. 팔로 턱을 괴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고, 허리를 꼿꼿이 편 상태로 고개만 살짝 숙이고서 아주 잘 잤다. 나는 교실을 둘러봤다. 앉은 채로 조는 아이들의 일정한 고갯짓과 점점 내려가는 어깨를 구경했다. 고요하고 나른한 공기 속에서, 나는 점심시간의 활기를 떠올렸다. 종종 그런 나를 상상하곤 했었다. 무리 속에 어울려 어색하지 않게 웃고 떠드는 나를. 남들에게는 흔한 일인데 나는 그런 그림 속에 들어가 본 적이 없지. 그런데 나는 오늘 정말 그랬어. 창가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며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외웠다. 나민정, 오수경, 김유진, 김석미. 민정과는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유진은 기숙사에서 종종 본 적 있었다. 석미와 수경은 이름만 몰랐지 낯설지 않았다.
지현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자잘하게 솟은 잔머리와 긴 속눈썹이 오후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일정한 속도로 숨을 쉬는 지현은 아주 평온한 잠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선생님이 지시봉으로 교탁을 두어 번 쳤다. 졸던 아이들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정신을 차리고 기지개를 켜라고 선생님이 말했다. 지현은 눈을 뜨고 교탁 쪽을 흘깃 보더니 어깨를 젖히고 두 팔을 높이 들어올렸다. 전혀 잠이 오지 않았지만, 막 잠에서 깬 사람처럼, 나도 지현을 따라 기지개를 켰다.


6교시에도 거의 자던 지현은 청소 시간이 되자 반짝 깨서 이어폰을 귀에 꽂고 밀대로 복도를 닦았다. 7교시에는 노트에 필기하는 척하면서 누군가에게 편지를 썼다. 저녁시간 종이 울렸다. 우리 여섯 명은 다시 무질서하게 뒤엉켜 식당으로 갔다. 식당의 메뉴판을 보고 온 수경이와 유진이가 오늘은 그냥 차선집에 가자고 말했다. 차선집? 그게 뭐야? 지현에게 물었다. 차선집 몰라? 우린 거기 자주 가는데. 지현이 왼팔로 내 허리를 두르며 대꾸했다.
우리는 실내화를 신은 채로 교문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이전까지 운동화를 신은 상태로만 교문 밖으로 나가 봤다. 주말 아니면 교문 밖으로 나갈 일도 거의 없었고, 주중에 교문 밖으로 나가려면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알고 있었다. 선생님한테 말해야 되는 거 아니야? 교문을 나서기 전에 나는 약간 주춤하며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한테 뭘 말해? 유진이 물었다. 저녁시간에 외출하려면……. 내가 말끝을 흐리자 아이들이 웃었다. 그럼 넌 가서 말하고 와. 석미가 말했다. 저녁 급식이 왓더헬이어서 떡볶이 먹고 오겠다고. 야, 근데 지금 선생님들 어디 있냐. 선생님들도 다 나간 거 아니야? 메뉴판 보고 왓더헬 그러면서? 민정이 말하자 아이들이 와르르 웃었다. 별로 웃기는 얘기도 아닌데 막 웃음이 났다. 저녁 어스름이 진 하늘에 얇은 달과 샛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이들은 큰길을 재빨리 건너 골목길로 들어섰다. 나는 그런 골목길이 거기 있는 줄도 몰랐다. 세 사람이 나란히 걸으면 조금 불편할 정도로 좁은 길이었다. 앞서 걷던 유진이 왼편에 있는 여닫이 유리문을 열고 들어갔다. 간판이 없었다. 유리문에 '차선집'이나 '분식집'이라는 글자도 붙어 있지 않았다. 다섯 명의 아이들이 가게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나는 미심쩍은 마음으로 가게 외양을 두리번거렸다. 가게 안에서 지현이 내 팔을 잡아당겼다.
가게는 생각보다 넓었다. 식탁이 열 개는 넘어 보였고, 벽을 따라 기다란 바도 있었다. 같은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실내화를 신은 채로 옹기종기 모여서 떡볶이와 김밥 등을 먹고 있었다. 남는 자리가 거의 없었다. 사람과 음식의 온기로 훈훈했다. 발가락을 움츠리게 하던 추위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앉고 선 아이들이 많은데도 번잡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처음 들어선 골목길에서 처음 본 유리문을 드르륵 열고, 아주 다른 세계로 들어온 것만 같았다.
주방에서 가장 가까운 바에 자리를 잡은 뒤 민정은 주방 쪽으로 가서 주문을 했다. 유진은 컵과 물병을 가져왔다. 석미는 초록색 플라스틱 그릇에 계란국을 덜어 왔다. 지현은 수저통에서 숟가락과 포크 여섯 개를 착착 꺼내서 각자의 손에 쥐여 줬다. 셋은 등받이 없는 의자에 나란히 앉고 셋은 그들 사이에 서서 계란국을 떠먹었다. 주방 쪽에서 나민정! 하고 부르자 민정이 우리, 우리 거, 하고 말했다. 지현이 쟁반에 음식을 받아 왔다. 김밥과 떡볶이와 순대와 어묵이 동글동글한 접시에 각각 담겨 있었다.
차선집이 무슨 뜻이야?
김밥을 먹으며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물었다.
몰라. 근데 전부 그렇게 부르던데.
누구여도 상관없는 아이가 대답했다.
뜻도 모르고 간판도 없지만 다들 그렇게 부르는 장소가 거기 있다는 걸 나도 그제야 알게 되었다.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학교로 돌아온 우리는 그날 점심에 했던 일을 그대로 반복했다. 매점에서 간식을 사 먹고 화장실에 나란히 서서 이를 닦았다. 화장실 거울을 보면서, 그날 아침 지현을 보고 나도 모르게 '여기 앉아 여기' 하고 말한 뒤 일어난 일들을 경이로운 마음으로 되새겼다. 특별한 노력도 없이, 지현이 내 옆에 앉았다는 이유만으로, 차곡차곡 일어난 신기한 일들. 나에게도 '친구들'이 생겼다.


야간자율학습이 시작되었다. 나는 좀처럼 영어 문장을 독해할 수 없었다. 멍한 상태로 무의미한 밑줄만 그었다. 지현은 이어폰을 낀 채로 수학 문제를 풀었다. 망설이거나 고민하는 기색 없이 숫자와 알파벳을 쓰고 금방 답을 내렸으며 바로 다음 문제로 넘어갔다. 나는 영어 문제집에 빗금 낙서를 하면서 지현의 문제 풀이만 쳐다봤다. 마음의 풍선이 한껏 부풀었다가 갑자기 쪼그라든 느낌이었다.
쉬는 시간이 되자 지현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간다는 말도, 같이 가자는 말도 없이 복도로 나갔다. 화가 났나?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현이 갑자기 차가워진 것만 같아서 초조해졌다. 내가 뭘 잘못했나? 따라가야 되나? 가서 미안하다고 해야 되나? 창가의 아이들은 다들 엎드려 자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갔다. 멀리 지현이 걸어가고 있었다. 모두 똑같은 교복을 입고 비슷한 머리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단번에 지현의 뒷모습을 알아봤다. 지현은 화장실로 들어갔다. 나는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빗금 낙서로 가득한 문제집을 내려다보며, 그날 처음으로, 혼자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진짜 혼자일 때는 하지 않던 생각이었다. 지현은 나를 버린 게 아니다. 화장실에 갔을 뿐이다. 그런데 내 기분은 왜 이렇지. 이게 뭐지. 불안한 건가. 비참한 건가. 지현의 문제집을 봤다. 지현이 스무 개 넘는 수학 문제를 푸는 동안 나는 한 문장도 독해하지 못했다. 지현이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교복 주머니에서 초콜릿을 꺼내더니 먹을래? 하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지현, 유진과 같이 기숙사로 갔다. 유진은 바로 방으로 올라갔다. 지현은 기숙사 1층에 있는 자판기에서 밀크커피를 뽑아 마셨다. 평소의 나라면 바로 방으로 가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책을 챙겨 독서실로 갔을 것이다. 나는 평소처럼 하고 싶은 마음과 지현의 곁에 머물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갈등하는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어서 선택해야 했다.
너는 몇 호야? 303?
지현이 물었다.
아니, 305.
나는 지현이 301호를 쓴다는 걸 알았다.
아, 예지랑 같은 방이구나. 거기 미란이도 있잖아.
지현이 커피를 홀짝이며 물었다. 지현이는 미란이도 아는구나. 나는 미란이랑 같은 침대를 쓰는데도 아직 친해지지 못했는데. 같은 방 쓴 지 겨우 사흘째니까 그럴 수도 있지. 근데 지현이는 다 아네. 방 배정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누가 어디에 있는지 다 알면서 내 방만 헷갈렸네. 나는 뒤늦은 의문에 빠졌다. 지현은 왜 내 옆에 앉았을까? 나에 대해 얼마나 알까? 나를 알긴 알았을까? 내가 자기보다 등수가 높다는 것도 알까? 근데 나는 어째서 지현이가 몇 등인지 알고 있지? 지현이 301호라는 건 또 어떻게 알지? 난 언제부터 얘를 신경 쓰고 있었지? 불안한 건지 비참한 건지 알 수 없는 감정이 다시 일어났다.
나 먼저 올라갈게.
나름 큰 용기를 내서 한 말인데,
그래. 먼저 가.
지현은 너무나도 쉽게 대꾸했다.
책을 챙겨 독서실로 가면서, 야간자율학습에 하지 못한 공부까지 다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현이 몇 시까지 공부하는지 신경 쓰지 말자고, 아니, 지현이 독서실에 있는지 없는지 관심도 갖지 말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나는 지현이 매일 앉는 자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지현은 교복을 입은 채로 벌써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매일 앉는 자리에 앉았다. 야간자율학습에 풀지 못한 문제를 풀려고 했지만, 수학 문제를 막힘없이 풀어 나가던 지현의 옆모습이 계속 생각났고, 나는 나의 문제에 집중할 수 없었다.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고개를 들어 지현이 앉은 자리를 봤다. 파티션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몸을 좀 더 일으켰다. 지현의 머리가 살짝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가면서 지현이 무슨 공부를 하는지 보려고 했지만 그런 속임수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계속 궁금해 하느라 시간을 허비하느니 그냥 가서 확인하자는 생각으로 지현의 자리까지 갔다. 지현은 수업시간에 잠을 자던 모습처럼, 팔짱을 끼고 책상에 팔꿈치를 기대고 있었다. 이어폰을 낀 채 미소 짓고 있었다. 책상에 문제집은 펼쳐져 있었지만 문제를 풀고 있던 것 같지는 않았다. 입 모양만으로 히죽 웃던 지현이 갑자기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몸을 숙이며 소리 없이 웃었다.
내 자리로 돌아왔다. 여전히 집중할 수 없었다. 새벽 한 시 넘어 책을 챙겨 일어났다. 독서실을 나가면서 지현의 자리로 다가갔다. 지현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지현이 이어폰을 빼며 나를 올려다봤다.
나 들어간다.
나는 입 모양만으로 말했다.
어, 그래. 잘 자.
지현도 입 모양으로 말했다.
근데 라디오 듣는 거야?
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 안 와? 안 피곤해?
피곤해.
지현이 장난스럽게 울상을 지으며 대답했다.
언제까지 들을 건데.
지현이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이며 소곤거렸다.
두 시 되면 방송 끊겨.
매일 듣는 거야? 두 시까지?
지현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왜?
지현은 당황한 듯 웃음을 거두고 나를 빤히 봤다.
왜는 왜야. 듣고 싶으니까 듣지.
지현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꾸했다. 나는 실없이 던져 본 질문이라는 듯 피식 웃으며 잘 자라고 말했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서도 금세 잠들지 못했다. 나도 음악 듣는 걸 좋아한다. 라디오도 듣고 싶지만 주중에는 참았다가 주말에만 듣는다. 공부에 방해되니까. 수업시간에도 최대한 자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런데 지현은 오후 수업시간에는 거의 졸고 매일 새벽 두 시까지 라디오를 듣는다. 그러니까 지현은 나보다 공부하는 시간이 훨씬 적은데도 겨우 2, 3등 낮을 뿐이다. 나는 패배감에 빠졌다. 지현보다 등수가 낮은 적은 없지만 지현을 제대로 이긴 적은 없는 것 같았다. 지현이 작정하고 공부한다면 나는 지현보다 절대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전까지 나는 내 점수나 등수에 불만을 갖지 않았다. 나름 최선을 다했고 그만큼의 점수가 나온다고 생각했다. 좀 더 노력하면 더 높은 점수를 받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밤, 열등감과 억울함에 휩싸인 채 잠들지 못하면서, 나는 나의 노력을 하찮게 여겼다. 등수만 보고 나보다 공부를 잘하느니 못 하느니 단정했던 스스로를 비웃었다.


다음날에도 지현은 내 옆에 앉았다. 그럴 리 없겠지만, 어젯밤 뒤척이며 내가 한 생각을 혹시 지현이 알아채면 어쩌나 겁이 났다.
오늘 아침 안 먹었어? 식당에서 못 봤는데.
지현에게 말을 걸었다.
나 원래 아침 안 먹어. 밥 먹을 시간에 십 분이라도 더 자는 게 낫지.
아침을 먹어야 머리가 잘 돌아간대.
우리 엄마랑 똑같이 말하네.
텔레비전에서 봤어.
우리 엄마랑 같은 거 봤나. 근데 난 밥 먹으면 졸리던데.
배부를 정도로 말고, 적당히 먹으면 오히려 잠이 깨.
지현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그래? 되물으며 가방에서 책과 노트를 꺼냈다. 나는 내일부터 같이 아침을 먹자고 했다. 지현은 싫다고, 귀찮다고 했다. 딱 일주일만 같이 먹어 보자고 계속 졸랐다. 얘가 왜 이러나 하는 눈빛으로 지현이 나를 쳐다봤다.
혼자 먹기 싫어서 그래.
왜 혼자야. 기숙사 애들 많잖아.
그래도 나는 혼자 먹는단 말이야. 솔직히 어제도 네가 먼저 밥 먹으러 가자고 안 했으면 나 혼자 점심 먹었을걸.
그럼 유진이랑 먹어.
오늘 아침에 보니까 유진이도 없던데.
걔도 늦잠 자나.
난 아침 안 먹으면 기운이 없어서 힘들단 말이야.
그럼 혼자 먹어.
혼자 먹기 싫다니까.
지현은 나를 멀뚱히 쳐다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아침에 깨우러 오든가.
지현이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지현이 계속 거절했다면 나는 책임져, 책임을 지란 말이야, 하고 대꾸할 작정이었다. 그 말을 하기 전에 지현이 먼저 승낙해서 안도했지만, 조금은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그날 오후 수업시간에 나는 잠든 지현을 계속 깨웠다. 지현이 짜증을 내면 선생님이 너를 자꾸 본다고 거짓말했다. 기숙사 독서실에서도 나는 지현의 옆자리에 앉았다. 지현은 내가 어디에 앉든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나는 어떻게 하면 지현과 라디오를 떼어 놓을 수 있을까 궁리했다. 수업시간에 졸지도 않고, 그림을 그리거나 편지를 쓰는 딴 짓도 하지 않고, 라디오도 듣지 않고 전력을 다해 공부한다면, 지현의 점수는 어떻게 될까? 나는 그걸 알고 싶었다. 최선을 다하는 이지현을 이기고 싶었다.


한 달 동안 하루 세 끼를 같이 먹고 잠잘 때 빼고는 거의 붙어 지내면서 지현과 나는 무척 가까워졌다. 창가의 아이들과도 그만큼 친해졌지만 나는 마음으로 늘 지현만을 살폈다. 지현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기분은 어떤지, 아픈 곳은 없는지 계속 신경 썼다. 너무 티가 나게 그러면 지현이 부담스러워하거나 성가셔할 수도 있으니까 나름 조심했다. 나는 아침마다 지현을 깨우러 301호에 갔다. 매일 레모나를 챙겨 줬다. 자판기에서 내가 마실 커피를 뽑을 때는 지현의 커피도 같이 뽑았다. 숙제했느냐고 물어봤다. 지현이 덜 한 숙제를 같이 하기도 했다. 지현이 찾으면 바로 줄 수 있게끔 각종 필기구로 필통을 채워 놨다. 휴지와 생리대와 진통제도 책가방 앞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지현이 잘 때 선생님이 시험에 관해 중요한 얘기를 하면 적어 뒀다가 지현에게 알려줬다.
그 달 모의고사에서 나는 12등을 했다. 2학년 되면서 문과와 이과로 학생이 나뉜 것을 생각하면 딱히 오른 등수도 아니었다. 오히려 떨어졌다고 볼 수도 있었다. 지현은 15등을 했다. 지현의 점수가 궁금했다. 나보다 몇 점이나 낮은지 알고 싶었다. 투정부리듯 점수 이야기를 꺼냈다. 지영이는 이번에 수학 두 개 과탐 하나 틀렸다더라. 야, 어떻게 언어에서 하나도 안 틀릴 수가 있냐. 특히 23번 문제. 그거를 걔는 어떻게 맞췄지? 너는 그거 맞췄어? 너는 언어 몇 점이야? 외국어는? 와, 진짜? 그럼 과탐은? 그렇게 지현의 점수를 알아내고야 말았다. 나보다 9점 낮았다. 나보다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데도, 그런데도 겨우 9점. 지현에게 졌다는 기분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우리 여섯은 계속 함께 다녔다. 일주일에 한 번은 차선집에 갔다. 때로는 저녁시간에 시내에 나가서 돈가스나 쫄면을 사먹기도 했다. 나는 교문 밖을 나서는 걸 더는 겁내지 않았다. 매달 모의고사를 쳤다. 지현은 나보다 늘 서너 문제를 더 틀렸다. 그래서 나는 매번 지는 것 같았다.
지현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나부터 찾게 되었다. 물어볼 게 있어도 내 이름부터 불렀다. 그래서 나는 지현이 뭔가를 찾을 것 같으면 먼저 건넸다. 물어볼 것 같으면 먼저 알려줬다. 독서실에서 지현이 라디오를 듣다가 팔꿈치를 책상에 기댄 채 잠들면, 그러기를 기다렸다는 듯 깨워서 방으로 보냈다. 점점 참견이 늘었다. 잠을 잘 거면 제대로 자. 양파 고르지 말고 먹어. 버섯도 먹어. 이를 너무 세게 닦지 마. 왜 우산을 안 쓰냐, 감기 걸리게. 볼펜은 이렇게 잡는 게 더 편해. 밖에 추워, 카디건 입어. 음악 너무 크게 듣지 마. 가방 무거우니까 그건 그냥 사물함에 넣어. 위험해, 거기서 그러지 마. 빈속에 약 먹으면 안 돼. 너 아까도 초콜릿 먹었잖아……. 그럴 때 지현은 놀란 고양이 같은 표정을 지으며 그저 웃었다.
야, 너 심하다. 지현이한테 잔소리 좀 그만 해.
유진이 그렇게 말했을 때 속으로 깜짝 놀랐다. 나는 누구에게 잔소리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여태 그래 본 적 없으니까. 그런데 지현은 나를 잔소리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내게 원래 그런 면이 있었던 게 아니라, 지현이 나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나는 굳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게 아니라 얘가 좀 그렇잖아. 계속 신경 쓰게 하잖아. 지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내가 좀 그렇지. 그러고는 유진을 보고 새침하게 말했다. 너도 나한테 신경 좀 써주겠니? 지현과 유진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었다. 지현에게 친구가 많은 이유를 새삼 깨달았다. 나도 지현처럼 하고 싶었다. 자연스럽게 농담하고 웃고 즐기고 싶었다.


여름방학 보충수업이 끝나고 기숙사에서 나온 다음, 우리는 거짓말처럼 만나지 않았다. 서로의 집에 전화를 해서 안부를 묻거나 시내에서 따로 만나지도 않았다. 그래도 나는 늘 지현을 궁금해 했다. 지금 지현은 뭘 하고 있을까 생각했다.
여름방학 끝나고 기숙사에서 지현을 만났다. 우리는 1층 자판기가 있는 곳으로 내려가 캔 커피를 뽑아 마셨다. 지현은 그새 마른 것 같았다. 잘 지냈느냐고 물었더니 잘 지냈다는 답이 돌아왔다. 우리는 잠시 할 말을 잃고 허공을 봤다. 지현을 만나지 않고 지낸 여름방학보다 그 잠깐의 순간이 훨씬 쓸쓸하게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가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동안 우리 사이는 순전히 지현의 힘으로 유지된 것만 같았다. 지현이 예전처럼 내게 말을 걸어 주길, 아무 말이나 하면서 막 웃을 수 있길 기다리며 커피를 홀짝홀짝 마셨다. 교문 쪽에서 예지가 걸어왔다. 지현이 손을 들어 인사했다. 예지도 크게 손을 흔들었다. 나도 모르게 캔을 살짝 구겼다.


아침에 깨우러 가도 지현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안 먹어, 안 먹는다고, 중얼거렸다. 수업시간에도 거의 자거나 도서관에서 빌린 판타지 소설책을 읽었다. 새벽 두 시가 넘어도 독서실에 계속 있었다. 자는가 싶어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눈을 뜬 채 연습장의 백지 같은 걸 빤히 보고 있었다. 여전히 여섯 명이 몰려다녔지만 지현은 예전처럼 다정하지 않았다. 누군가 말을 하면 습관처럼 웃었다. 웃을 뿐이었다. 2학기 첫 모의고사를 치른 뒤, 독서실 벽에 붙은 종이에 지현의 이름은 없었다.
오늘부터 라디오 듣지 마.
나는 지현의 귀에서 이어폰을 함부로 빼며 말했다. 지현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
라디오 듣지 말고 공부하라고.
지현의 표정이 단번에 굳었다.
공부하기 싫으면 방에 가서 자든가. 수업시간에 자지 말고.
지현은 내 손에서 이어폰을 뺏어 귀에 꽂았다. 나는 다시 이어폰을 뺐다.
왜 이래.
지현이 나를 빤히 보며 물었다. 지현은 웃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현은 웃지 못했다.
계속 성적 안 좋으면 내년에 기숙사 못 들어오잖아.
무슨 상관이야.
라디오 듣는 시간에 공부하면 너 성적 금방 오른다니까.
뭔 말이야.
공부하라고.
알았어.
지현은 다시 귀에 이어폰을 꽂으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이어폰을 뺐다.
아, 진짜!
지현이 큰 소리로 말했다. 독서실 사람들이 모두 우리를 쳐다봤다. 지현은 나를 노려봤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마음이 내려앉았지만, 지현의 눈빛 때문에, 나는 더 오기를 부렸다. 지현의 시디플레이어를 들고 독서실을 나가버렸다. 지현이 나를 쫓아왔다.
왜, 왜 그러는데.
지현이 내 팔뚝을 잡으며 따졌다.
니가 왜 우는데!
지현이 나를 보며 말했다. 나는 분하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울고 있었다.
사람 답답하게 왜 그러고 있는 건데, 진짜.
나는 끅끅 소리를 내면서 겨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있다고 말을 하던가!
소리를 질렀다. 고함에 가까웠다. 태어나서 처음인 것 같았다. 내 목소리에 내가 놀라 숨을 크게 쉬고 소리를 낮췄다.
내년에도 기숙사 들어와야 할 거 아냐.
내가 알아서 해. 내가 알아서 한다고. 너까지 이러지 말라고, 제발.
대꾸하면서 지현도 울었다. 우리는 손을 잡거나 쓰다듬거나 포옹하지도 않고, 거울을 보고 혼자 울듯 울었다. 그때 지현이 무슨 생각과 어떤 감정으로 우는지 나는 몰랐다. 지현도 내가 왜 우는지 몰랐을 것이다. 모르는 채로 우리는 서로를 향해 울었다. 뭔가 폭발해 버린 것 같았다.
다음날에도 나는 지현을 깨우러 갔다. 지현은 침대에 앉아 있다가 나를 기다렸다는 듯 방을 나섰다. 우리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같이 밥을 먹고 교실로 갔다. 같이 점심을 먹고 저녁을 먹었다. 같이 이를 닦고 아무 말이나 하며 웃었다. 독서실에서, 지현은 라디오를 듣지 않았다.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쉬지 않고 문제를 풀었다.


지현은 금세 30등 안으로 들어왔다. 다시 추워졌을 때, 지현의 점수는 나를 앞질렀다. 나는 지현에게 제대로 졌다고 생각했다. 진 것 같은 기분보다 제대로 졌다는 기분이 훨씬 가볍고 개운했다.


3학년 되면서 나는 민정, 유진과 같은 반이 되었다. 저녁시간에 종종 차선집에서 지현과 지현의 친구들을 만났다. 매일 밤 기숙사 독서실에서 지현과 나란히 앉아 공부했다. 우리는 2학년 때처럼 말을 많이 나누지는 않았다. 나 들어간다. 잘 자. 그 정도의 말만 나누었다. 멀어졌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가깝다는 느낌도 없었다. 충분하다는 느낌이었다.
여름이 물러가고 선선한 바람이 불던 어느 날, 독서실에서 지현의 옆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지현의 귀에서 이어폰 하나를 빼 내 귀에 꽂아 본 적 있다. 랩 메탈 음악이 흘러나왔다. 지현이 나를 보고 피식 웃더니 기지개를 켰다. 우리는 의자 등받이에 한껏 기대고 앉아 음악을 들었다. 음악이 절정에 달하자 보컬이 거듭 'wake up'을 외쳐댔다. 홀린 듯 마음으로 따라 외쳤다.


수능에서 나는 지현보다 15점 낮은 점수를 받았다. 지현과 같은 대학, 같은 과에 가고 싶었다. 나는 지현을 따라 논술시험을 보러 갔다. 그때 지현은 이상하다고 생각했을까? 합격할 가능성도 거의 없는데 굳이 자기와 같은 곳에 원서를 넣는 나를? 그랬을지도 모른다. 지현은 계속 자기 옆에 있으려는 나를 지겨워했을 수도 있다. 우리는 다른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 다니면서 지현에게 자주 전화했다. 공강 시간에 혼자 있을 때, 혼자 밥 먹을 때, 잠이 오지 않을 때면 핸드폰 폴더를 열고 011211로 시작하는 번호를 눌렀다. 전화를 받지 않을 때도 많았다. 아르바이트 중이었다거나 동아리 사람들과 같이 있느라고 전화 오는 줄 몰랐다고 지현은 말했다. 연락도 없이 지현의 학교에 찾아간 적도 있다. 지현을 찾아가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갇혀서 어쩔 수 없었다. 그때 지현은 자기 애인을 내게 소개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지현에게 나란 존재가 더는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그럼 고등학교 때는? 그때는 필요했나? 나는 특별했나 지현에게? 우리는 아무 얘기나 하면서 막 웃는 사이였다. 속마음을 나누는 사이는 아니었다. 지현은 누구에게 속마음을 얘기했을까? 민정에게? 유진에게? 아니면 예지에게? 이지연이 자꾸 이래라 저래라 간섭해서 너무 짜증나고 스트레스 받는다고, 지가 뭔데 나한테 밥을 먹으라 마라 명령이야. 누군가에게 그렇게 말한 적 있을까? 그리고 나를 보면 다시 웃었을까? 지현은 왜 라디오를 끊었을까. 내가 듣지 말라고 해서? 그렇게 묻는다면 지현은 웃을 것만 같았다.
니가 뭔데.
그렇게 대꾸할 것만 같았다.
고마워하는 마음이 조금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 간섭으로 지현의 성적이 올랐다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없었어도 지현은 적당한 시기에 마음먹었을지도 모른다. 지현은 자신 있었을 것이다. 전력을 다했을 때 자기가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지 지현은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수업시간에 잠을 자고 소설책을 보고 라디오를 들을 수 있었는지도. 나의 간섭이 우스웠을 것이다. 네가 그렇게 보고 싶다면 보여줄게. 지현은 그렇게 마음먹었던 것 아닐까. 아니, 지현에게 나는 영향을 주는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저 같이 밥을 먹는 다섯 명의 친구 중 한 명, 기숙사의 많은 친구 중 한 명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나는 이기거나 지는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상대는 이지현뿐. 그러므로 나는 이지현에게 사로잡혀 있었다. 지현은 무엇에 사로잡혀 있었을까? 나는 그런 것에는 관심 없었다. 일부러 관심 두지 않으려 애썼다. 질투로 미쳐버릴 게 분명하니까.


2학기 종강하는 날 같은 과 동기, 선배들과 술을 마셨다. 자리가 길어지자 여기저기서 언성이 높아졌다. 서운했던 얘기, 네가 그러면 안 된다는 말, 그때는 네가 심했다는 말, 그래서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느냐는 말, 이제와 생각해 보면 정말 고맙다는 말이 오고갔다. 어떤 사람은 화를 내고 어떤 사람은 울었다. 달래는 사람이 있었고 대신 용서를 비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앉아서 술잔만 쥐고 있었다. 왜냐면, 모두 내게 친절했으니까. 내게는 화를 내지 않고,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아무도 나를 질투하지 않았다. 서운해 하지도 않았다. 나는 지현을 생각했다. 고요한 독서실 복도에서 '니가 왜 우는데!' 소리 지르던 지현을, 마주 보고 울던 우리를, 서로의 퉁퉁 부운 눈을 모른 척했던 아침을 생각했다. 술집을 빠져나왔다. 후미진 골목으로 들어가며 핸드폰을 꺼냈다. 011211로 시작하는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지현아. 나 이지연.
응. 지연아.
잤어?
아니.
뭐 했어?
그냥 있어. 무슨 일 있어?
아무 일 없어도 전화할 수 있지. 그런 거 아니야?
……그래. 밖이야?
나 물어볼 거 있어.
뭔데?
있잖아, 우리 고2 여름에.
…….
너는 왜 그랬어?
내가 뭘?
여름방학 끝나고, 너, 좀 달랐었어.
내가 그랬나.
무슨 일 있는 것처럼 보였어.
아…… 좀 복잡했어, 그때.
뭐가?
내가.
네가 복잡했다고?
응.
뭐가 복잡했는데?
그냥 그랬어. 이제와 말해 봤자 소용도 없고.
그래도 말해 주면 안 돼?
굳이 그러고 싶진 않아.
……넌 나한테 왜 그래?
무슨 말이야?
나만 이러잖아, 늘.
무슨 말이냐고.
지현아.
응.
그때 왜 내 옆에 앉았어?
언제?
고2 올라갔을 때, 담임이 아무 자리에 앉으라고 했잖아. 근데 네가 내 옆에 앉았잖아. 우리 친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먼저 앉으라고는 했지만 그래도…….
네가 앉으라고 했다고?
그랬잖아. 내가 손 흔들면서 너한테 여기 앉으라고.
그랬나?
그래서 내 옆에 앉은 거 아니야?
아닌데. 나는 네가 손 흔드는 거는 못 봤어.
그럼 왜 내 옆에 앉았어?
왜는 왜야. 앉고 싶어서 앉았지. 그땐 너랑 친해지고 싶었어.
왜?
그냥 자꾸 네가 보였어.
그럼 지금은?
응?
이젠 내가 안 보여?
지연아, 너 술 마셨어? 많이 취했어?
……넌 나한테 궁금한 게 그런 것뿐이지.
…….
누구나 물어보는 거, 그런 것만 묻지, 너는.
나한테 서운한 게 많나 봐.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그럼 무슨 말을 할까. 너는 내가 하는 말 다 마음에 안 들잖아. 지금.
그렇게 말한 적 없어.
이지연. 하고 싶은 말 있으면 그냥 해. 돌리지 말고, 비꼬지 말고, 혼자 오해하지 말고.
그게 되면 진즉에 했겠지.
그럼 나보고 뭘 어쩌란 말이야.
이지현. 있잖아. 나는 널 되게 좋아하는 줄 알았거든. 근데 아닌 것 같아. 나는 네가 정말 마음에 안 들었던 거야. 그래서 그렇게 잔소리하고 신경 썼던 거지. 네가 되게 거슬렸던 거야. 왜냐면 나도 네가 자꾸 보였으니까. 나는 다 알았어. 네가 누구랑 친한지, 몇 번 방인지, 몇 등인지, 네가 안 먹는 거, 좋아하는 거, 무슨 진통제 먹고 무슨 생리대 쓰는지, 심지어 치약 다 쓰는 타이밍까지, 그런 거 다 알았어. 근데 넌 하나도 몰랐잖아. 너는 네가 앉고 싶으면 앉을 수 있지. 그냥 말 걸고, 친해지고 싶으면 친해지고 그럴 수 있지. 너는 나한테 그럴 수 있었고 나는 그럴 수 없었어. 그게 무슨 차이인지 알아? 그런 거는 생각해 본 적도 없을 거야. 그러니까 나한테 궁금한 것도 없는 거야. 너는.
지현은 지친 목소리로, 너는 정말 네 생각만 한다고 중얼거렸다. 그 말에 너무 화가 나서, 내가 너를 얼마나 생각했는지, 그때 너한테 얼마나 마음을 썼는지, 나보다 너를 더 걱정했다고, 그런 날들뿐이었다고, 그런데 네가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고 마구 쏘아댔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고2 때 하지 못한 말을, 행여 지현이 알까 두려워하던 나의 생각들을 핸드폰 배터리가 방전될 때까지 다 쏟아내고 말았다. 지현은 화를 내기도 했고, 나를 달래기도 했다. 우리는 같이 울었던가? 모르겠다. 나는 울었다. 지현의 얼굴을 볼 수 없어서, 한숨소리도 겨우 들려서, 지현이 우는지 웃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 밤 이후 나는 뒤늦게 복잡해졌다. 지현에게 다시 연락할 수 없었다.
대학교 4학년 겨울방학 때, 지현에게 문자 메시지가 왔었다. 잘 지내느냐고 묻고 있었다. 나는 답장하지 않았다. 이제 너에게는 나의 무엇도 보여주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누가 나를 '이지연!' 하고 불러도 더는 이지현을 떠올리지 않고 싶었다. 시절을 접고 싶었다.


*


이제와 생각해 보면 지현의 말은 전혀 틀리지 않다. 스무 살 이전에도 이후에도 나는 내 생각만 했다. 지현의 마음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았다. 지현에게 고맙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면서, 지현이 내게 고마워해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진 적도 없으면서 졌다고 생각했다. 나는 정말 그랬다.
지현에게 마지막 문자를 받고 십 년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여전히 이지현을 생각한다. 이어폰을 꽂고 걸어가는 고등학생을 볼 때마다, 겨자색 이스트팩 책가방을 볼 때마다, 심야 라디오를 들을 때마다, 이로 자근자근 씹은 흔적이 남은 종이컵을 볼 때마다, 다 써가는 치약 튜브를 볼 때마다…… 낯선 유리문 너머로 나를 잡아당기던 지현이 떠올라 아직도, 마음이 저리다.
















최진영

작가소개 / 최진영

2006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장편소설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끝나지 않는 노래』,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 『구의 증명』, 『해가 지는 곳으로』, 『이제야 언니에게』, 소설집 『팽이』가 있음. 한겨레문학상·신동엽문학상 수상.


《문장웹진 2019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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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10-01
이것은 사랑 없이는 깰 수 없는 유일한 꿈이었다.

이것은 사랑 없이는 깰 수 없는 유일한 꿈이었다. - 춤추는 무당 당골 이심과 춤추지 않는 무당 오키나와 영매 유타의 사진에 대하여 한정현 기생 아니고 무녀예요. 무당이라고요, 아저씨. 이 여자한테 그랬다간 저주받는다고요. 어쩌려고요? 팔아먹게? 그런 말을 했던 이는 곧 어흥, 하는 표정을 짓는다. 얼굴을 잔뜩 구기면서 말하는데도 생생한 눈빛이 빛난다. 사내는 입을 반쯤 벌리고 그이의 얼굴을 바라보다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되레 큰소리다. 내, 내가 억지로 잡아끌었나! 누가 이 얼굴에 돈을 내겠어! 그 말을 하면서도 사내는 손목이 잡힌 이심이 아니라 그이의 얼굴을 힐끗거린다. 나도 그냥 기생은 아니죠. 아저씨 그렇게 내 얼굴 빤히 보면 돈 내야 돼. 알죠? 아닌 게 아니라 그이가 입고 있던 소맷자락이 그것을 알려준다. 잘 다린 소맷자락에 수가 놓여 있다. 초량권번. 사내는 돈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아까보다도 낮은 자세로 어느새 이심의 손목을 놓고 슬그머니 물러선다. 사내가 놓아 준 이심의 손목은 줄이 그어진 듯 붉다. 공창제도는 한참 전에 없어졌지만, 부산이든 서울이든 이젠 사창제도가 판을 쳐요. 미군들에게 매매 놓아 주는 곳도 많고요. 몰랐나요? 어느 누가 꿀이라도 한가득 따라 놓은 걸까. 남북이 서로 총을 겨누며 싸운 지 1년이 넘고 보니 거리마다 향기는커녕 악취가 진동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향을 품고 있구나. 이심은 공창이 뭔지도 사창이 뭔지도 몰랐다. 이 부산이라는 곳에 오기 전까지. 다만 저건 알았다. 그이가 들고 있는 소매 끝에 달린 초량권번이라는 이름. 이 사람은 북쪽이 밀고 내려올 때 군예대로 온 최승희의 제자일까, 아니면 호남 제일 이매방의 제자일까. 이심은 문득 건너의 그이가 자신과 비슷한 또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심은 아마 저이가 권번에 들어갈 무렵 시집을 갔을 거다. 세습무라는 것은 보면 희한했다. 부모가 전라도 세습무인 당골이라 한들 그 자식이 당골이 될 수는 없었다. 신과 인간을 잇는 것이 그들의 업, 인간사 그 모든 번뇌 속에서 자신의 삶은 없는 한 맺힌 자리라 그런 것일까. 기이하게도 당골은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로 이어지는 거였다. 그렇다면 이심은? 남원 가재골 3대 당골 이심은 어떠한가. 이심은 제 발로 그 집에 들어갔다. 이심은 신이 아닌 한 인간에게 모든 걸 걸고자 했다. 한여름 빨래터에서 땡볕을 지고 일하는 이심에게 다가와 부채로 가만히 빛을 막아 주던 그 소년에게 모든 것을 걸고자. 사라진 것이 네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처음 해변에서 홀로 하얀 천을 두르고 기녀들이나 추던 입춤을 휘날리듯 추던 그 누군가. 어느 집 기녀가 저리 고울까. 종일 마른 볕에 앉아 빨래를 하던 이심에게는 꿈같은 광경이었다. 어지러움에 잠시 이심이 감았던 눈을 뜨고 보니 어느새 그 꿈이, 아니 그가 웃으며 부채로 빛을 가려 주고 있었다. 뜻하지 않게 빛나던 그것은, 윤슬이 아니었다. 그의 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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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1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전하영 R과 나는 바닷가의 한 도시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었다. 우리는 그 도시에 있는 어느 서점의 초청으로 북토크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처음에는 서점이라고 해서 작은 가게인 줄 알았는데 꽤 규모가 있었고 로컬에서는 인지도도 높은 곳이었다. 사례비가 두둑해서 나는 바쁜 R을 설득해 초청 인사로 함께 행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이럴 때는 그가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불려 다니는 일을 한다는 게 도움이 됐다. 주말에 집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를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북토크는 공식적으로도 그의 일의 연장이었다. 북토크에서 이야기할 책은 내가 이십 년 전에 쓴 소설로 처음에 출간됐을 때만 해도 거의 팔리지 않았는데, 영화화되면서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R은 그 영화의 제작자였다. 그가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책을 발견했고 영화화를 제의해 왔다. 안 될 게 뭐람? 그 책은 세상에서 잊힌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나는 반갑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적지 않은 이차 저작권료에 더 관심이 많이 갔는데 알고 보니 그쪽에서는 내가 당연히 그보다 큰 금액을 부르리라 예상하고 미리 낮춰서 제시한 금액이라고 했다. 그런 사정을 파악하게 된 것은 R과의 관계가 좀 더 사적인 성격으로 진전된 이후의 일이었다. 그 후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책이 영화화되자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처럼 책에 쓰인 시절도 내게 함께 돌아왔다. 이십 년 정도가 지나면 당시의 나를 더 이상 나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상황과 감정이 바뀐다. 인간의 몸은 7년마다 세포 전체를 모조리 갈아치운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책이 처음 출간된 이후 대략 세 번쯤은 완전히 다른 나로 거듭나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잘 아는 타인을 덕질하듯이 나는 과거의 나에게 향수를 느끼며 그때 그 시절의 장소를 방문하며 추억에 잠기곤 했고, 그때마다 함께하는 상대에게는 숨은 의도를 밝히지 않고 다른 볼일이 있는 것처럼 둘러댔다. 그것은 최근 들어 생긴 나만의 비밀이자 즐거움이었다. 북토크를 위해 우리가 방문하는 도시는 한때 유명한 관광지였지만 오랫동안 쇠락의 길을 걷다가 최근 들어 다시 각광 받기 시작한 지역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 비싸고 조밀한 서울에 진력이 난 젊은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었고 사람들이 모이니 인터넷 매체들이 관심을 보였다. 이제 조만간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 물망에 오를 테고 그렇다면 이 도시도 많은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프랜차이즈 카페와 플라스틱 상징물로 가득 찬 어느 평범한 한국의 소도시 중 하나로 거듭날 것이었다. 다름 아닌 영화제작자를 데려가는 셈이니 어쩌면 내가 그 도시를 망가뜨리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망상에 불과하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온 세상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 내가 하는 작은 행동이 불러일으키는 더 큰 효과에 대한 전망. 책이 영화화된 뒤로 줄곧 내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기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R에게 그 도시에 가본 적이

  • 관리자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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