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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

  • 작성일 2021-07-01
  • 조회수 1,907

[단편소설]



나는 나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 *



채 정




무대 조명은 눈부셨다. 손을 투영시키면 뼈마디가 비칠 듯 강렬했다. 박은 얼마 전에 찍었던 엑스레이를 떠올렸다. 흑백필름에 찍힌 어깨뼈는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다른 뼈를 누르고 있었다. 의사는 너무 오래 방치했다고 말했다.
투명한 컵에 담긴 얼음 알갱이가 부딪쳤다. 박이 뒤를 돌아보았다. 박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청년이 무대를 보며 환호하고 있었다. 박은 청년의 손에 들린 음료에 온통 신경이 갔다. 흥분한 청년이 움직일 때마다 음료가 박의 어깨를 스쳤다. 통증으로 인해 박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고통 앞에 의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우리나라 만세
후렴구를 장송곡처럼 느리게 시작한 「애국가」는 곧 귀를 찢는 록(Rock)으로 이어졌다. 빠르고 강렬한 비트에 귀가 먹먹했다. 광장을 가득 메운 군중들은 박수와 환호로도 모자라 몸까지 흔들었다. 밝고 환한 웃음, 그늘 없는 그들의 표정, 생동감 있는 몸짓까지……. 이 모두가 박에겐 이질감으로 다가왔다. 군중의 환호에 음악은 극으로 치달았다. 박을 발견한 총무가 손을 흔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빈 의자를 가리켰다. 박은 총무를 외면한 채 무대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박의 꽉 다문 입매는 몹시 예민했다.
사람들의 환호에 가수가 무대 아래로 내려섰다. 등 뒤에서 쏘는 조명 앞에 선 가수는 깜짝 마술을 부리듯 시야에서 사라졌다. 작은 일에도 쉬 목이 타고 현기증이 이는 계절이었다. 오월은. 강한 기시감에 박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정신 차려!”
총무가 박을 흔들었다. 박이 고개를 들었다. 박은 애초에 이 자리에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총무는 박을 앞에 내세우길 좋아했다. 몇 년 전, 간첩단에 몰렸던 사람들의 보상 문제가 다시 거론되고 박이 매스컴을 탄 뒤부터였다. 박은 자잘한 행사 때마다 불려 다니는 것이 싫었다. 잊고 싶은 기억을 헤집어 놓는 것 같았고, 불분명한 명목에 휩쓸리는 것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보이지 않는 목줄에 매달린 듯 불편했다. 박이 총무의 옆자리에 앉았다. 깔끔한 정장 차림의 사람들 사이에서 박의 옷차림은 눈에 띄었다.
“옷이라도 좀 챙겨 입지.”
총무가 자신의 연회색 양복을 매만지며 말했다. 총무의 노란색 넥타이가 봄 햇살처럼 환했다. 박은 급한 주문을 마치고 오느라 미처 갈아입지 못한 자신의 옷차림새를 훑었다. 일하기 편해서 입은 등산복과 운동화에 먼지가 부옜다. 투덕투덕 옷에 붙은 먼지를 털었다. 무대의 강한 불빛에 먼지가 부유했다. 「애국가」가 끝나자 다음 곡의 자막이 대형 스크린에 떴다.

목련꽃이 한낱 목련꽃이 진다 해도 무에 그리 그리 슬프랴
피었다가 피었다 지는 것이 어디 목련꽃뿐이랴
우리네 오월에는 목련꽃보다 더 하얗고
순결한 영혼 영혼들이 꽃잎처럼 아프게 떨어진 것을…….

열여섯의 소년이 쓴 시에 곡을 붙였다는 「목련이 진들」이었다. 여성 특유의 가녀린 목소리와 떨림이 서늘했다. 노래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격해지더니 ‘꽃잎처럼 아프게 떨어진 것을’에서는 실제로 꽃잎이 떨어지듯 여백을 두었다.
노래가 끝났다. 사회자가 귀빈들을 소개한 다음, 박을 포함한 스물 남짓의 유공자를 호명했다.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볍게 목례를 한 박과 달리 그들은 90도로 몸을 꺾어 인사했다.
5시에 시작된 공연은 7시에 끝이 났다. 손나팔을 한 총무가 ‘왕갈비탕’으로 모이라고 소리쳤다. 박은 슬그머니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공방에 도착한 박은 간판을 손으로 쓸었다. 오동나무에 ‘나무뜰’이라고 글자를 새기던 시절이 떠올랐다. 이곳은 번화가와 주택가가 맞물려 있었다. 낮에는 죽은 도시처럼 잠들었다가 밤이 되면 깨어났다. 새벽까지 쿵쾅거리는 소음 때문에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시간이 흐르는 건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지만, 시류를 따르기에 박은 너무 나이를 먹었다.
공방을 통해 안채로 들어온 박은 냉장고를 열었다. 아내가 쓰던 양문형 냉장고는 혼자 쓰기에 턱없이 컸다. 냉장고 안에는 생수와 묵은김치와 달걀 몇 개가 들어 있을 뿐이었다. 박은 총무의 요청에 못 이긴 척 밥이라도 먹고 올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놋그릇에 달걀 두 알을 깨트렸다. 그 위에 들기름을 한 방울 떨어뜨렸다. 랩을 씌워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1분에 맞추고 스위치를 눌렀다. 50초 후 흰자는 익고 노른자는 부드럽게 풀어질 수란을 상상하며 쓰린 속을 달랬다. 박은 그럴 나이가 되었다. 잦은 음주와 제때 챙겨 먹지 못한 식사로 속이 쓰리고 신물이 넘어오는 나이. 50초의 시간을 초과하지 않으려고 남은 시간을 눈으로 훑는 조바심까지……. 10초를 남겨 두고 정지 버튼을 눌렀다.
소금 대신 조미된 김을 수란에 섞다가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머니는 밥 때가 되면 수란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어머니가 들어오면 고소한 들기름 내가 코를 자극했다. 하지만 먹는 것과는 별개였다. 박의 몸을 일으킨 어머니가 벽에 베개를 세워 등을 기대 주었다. 억지로 눈을 뜨면 방 안이 빙글빙글 돌았고 촉수 낮은 전등은 고문실을 연상시켰다.
빛에 가려진 그들은 2인 1조였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질문을 던지는 사람과 곤봉으로 바닥을 두드리는 사람. 탁, 탁, 일률적으로 들리는 소리는 위압적이었다. 눈앞에 바짝 들이댄 30촉 전구의 강렬한 빛에 박의 몸이 뒤로 젖혀졌다. 똑바로 해! 보이지 않고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는 극에 달했다. 박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빛을 감당하지 못해 눈을 감으면 뒤통수에 충격이 가해졌다. 전구와 눈싸움이라도 벌이듯 눈을 부릅떠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용을 써도 소용없었다. 구불구불한 나선형의 필라멘트를 노려보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울컥, 생목이 올라왔다. 빈속을 타고 올라오는 건 쓰디쓴 액체뿐이었다. 놋그릇을 내려다보았다. 흰자에 둘러싸인 노른자는 우물 속에 빠진 둥근 달 같았다. 수란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셨다. 공방은 적막했다.


소음에 눈을 떴다. 아침 8시였다. 김이 들어오고부터 몸이 편해졌다. 혼자 일을 할 때는 새벽이든 낮이든 눈이 떠지는 대로 공방으로 나갔다. 시장기로 허리가 접힐 즈음에야 밥을 먹었다. 주문에 따라 밤을 꼬박 새기도, 어떤 날은 오전에 일을 마치기도 했지만 대체로 일을 놓지 않았다. 그래야 헛생각이 끼어들지 않았다. 밤에 자다가도 깜짝 놀라 깨는 일이 허다해도 낮잠도 자지 않았다. 잠재된 불안감이 언제 튀어나올지 몰랐다. 눈치만큼 몸도 빠르다는 말을 들었지만 점점 굼떠지면서 실수가 빈번해졌다. 배달할 물건이 뒤바뀌거나 잘못 배달된 물건을 반품하는 경우로 낭패 보는 일이 허다했다.
한번은 두 시간 거리의 좀 먼 곳에 배달을 갔다. 내비게이션 안내에도 길을 찾을 수 없었다. 박은 길가에 차를 세우고 전화를 했다. 길을 못 찾겠다고 하자 고객이 말했다. 그거, 고문 후유증이네요. 박은 몸에 힘이 빠지면서 사는 게 참 허망했다. 유공자들끼리 서로 돕자는 취지로 고객을 소개받으면 그들은 박의 행동을 이해하는 것처럼 말했다. 박은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듣는 말에 비굴해지는 느낌이었다. 배려인지 질책인지 모를 말에 본데없는 사람이려니 생각하며 마음을 추스르는 것도 싫었다. 힘든 시기를 함께 건너온 사람들이 뭐든지 다 이해하고 감싸 주리라는 생각은 틀렸다. 자신의 이익과 연결된 채 타인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어쩌다 만나게 되는 행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제 다리가 뺄 수 없는 증건데 왜 안 된다는 겁니까?”
“글쎄, 말씀은 알겠다니까요. 그러니까 증인이나 증거를 가져오라고 몇 번을 말씀드렸습니까? 비슷한 시기에 다쳤다고 누구나 유공자가 될 순 없잖아요!”
정부에서 피해자에 관한 접수를 시작할 때였다. 급조된 사무실은 사람들로 인해 시장 통처럼 북적였다. 자기를 내세우려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졌고 가끔은 폭력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박은 일찍 접수를 마치고 장을 기다리던 참이었다.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 진땀을 흘리는 김의 사연은 흔한 사례였다. 그래서인지 김과 접수자와의 간극은 좁혀지지 않았다. 그들의 언쟁이 길어지자 사람들이 혀를 차며 수군거렸다. 김의 사정이 딱하다는 동정도 있었고 억지를 쓴다는 비하의 말도 있었다.
그리고 공방 근처 술집에서 총무와 낮술을 마시던 중에 지나가는 김을 보았다. 합석한 김을 찬찬히 뜯어보다가 윤재를 떠올렸다. 짙은 눈썹과 좁은 이마, 짧은 고수머리와 얍삽한 입술까지. 일자리를 찾고 있다는 김에게 박이 함께 일하자고 말했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김은 기동력은 떨어졌지만 성실했다.
옷장에서 갈아입을 옷을 꺼내다가 방을 둘러보았다. 방은 단출했다. 낡고 추레한 책상과 아내가 결혼할 때 혼수로 가져온 8자짜리 장롱이 전부였다. 아내의 장롱도 많이 낡았다. 명색이 장인인데 아내를 위한 장롱 하나도 만들어 주지 못했다. 책상만 해도 그랬다. 손님이 주문했다가 찾아가지 않은 거였다.
박은 책상에 놓인 액자 속 사진을 보았다. 건은 뭐가 못마땅했던지 뚱한 표정이었다. 그에 반해 곤은 활짝 웃고 있었다. 유공자가 된 날부터 ‘애국자’인 양 살아가던 박은 아이들이 태어나자 ‘건’과 ‘곤’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건이나 곤을 부를 때마다 우쭐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건을 못 본 지 십 년이 다 되었다. 이제 스물아홉이 되었을 건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여드름이 성성한 얼굴과 웃을 때 드러나는 덧니를 떠올리자 가슴이 먹먹했다. 박의 강압적이고 독단적인 행동에 가족 모두는 힘들어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흘러내리던 작년 여름이었다. 오래된 선풍기가 털털거리더니 멈췄다. 탁 소리와 동시에 공방 안의 열기가 박의 몸을 휘감았다. 금세 바닥으로 뚝뚝 땀이 떨어졌다. 스위치를 껐다가 켜보고 코드를 뺐다가 다시 꽂아 봐도 소용없었다. 박이 선풍기와 씨름 중일 때 곤이 공방으로 들어섰다. 반가웠다. 그래서 활짝 웃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눈앞이 흐려졌다. 박은 얼른 눈물을 훔치고 물었다.
“여행은 어땠어?”
건이 사라지자 곤이 달라졌다. 곧잘 하던 공부가 바닥까지 내려갔다. 입시가 코앞이라 걱정이었지만 곤까지 집을 떠날까 봐 꾹 참았다. 담임과 상담한 뒤 국립대학 ‘신소재공학과’에 원서를 냈다. 대학 2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다녀온 곤이 일 년이 지나도 복학하지 않았다. 박은 조심스럽게 ‘공무원 시험 합격 역대 최대!’임을 내세운 학원 수강증을 곤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다음날 곤이 여행을 떠난다는 쪽지를 남기고 떠났다. 그러니까 두 달 만이었다.
곤은 한결 차분해진 눈빛으로 말했다.
“사진을 찍고 싶어요.”
“그걸로 밥벌이가 되겠냐?”
“제가 살고 싶은 대로 살 권리가 있어요!”
곤은 사진 찍는 일을 하면서 공방 일을 배우겠다고 했다. 다행이라고, 박은 생각했다. 곤의 얼굴이 편안해져서 참 다행이라고.
아비와는 다른 삶을 살라며 건을 모질게 대했던 게 사실이었다. 공부에 집중하라고 소리쳤고, 이걸 성적표라고 받아왔냐며 정강이를 걷어찼다. 숨겨 둔 야동을 찾아내 불태웠고 게임기를 바닥에 던지고 짓밟았다. 박은 제 안의 폭력에 놀랐다. 자신의 내면 어디에 이렇듯 차가운 피가 흐르는지 참담했다. 건이 반항하듯 아내의 지갑에 손을 대더니 밖으로 나돌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과거로 거슬러가다가 박은 ‘사랑방’을 떠올렸다. 단체에 소속되면서 뒷담화의 장소로 박의 공방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결론 없는 이야기를 끝없이 나누다가 마지막엔 항상 자녀교육에 관해 얘기했다. 주로 유공자의 자녀에게 주어지는 가산점에 관한 내용이었다. 가산점을 고려해서 어느 대학에 원서를 내고, 공무원이나 공기업에 입사할 때의 적용 범위에 대한 정보를 공유했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을 제 밥그릇도 못 찾는 바보로 생각했고 현실성이 부족한 사람으로 치부했다. 그들과 그런 얘기를 나누다 보면 금방이라도 아이들 진로가 결정된 듯 흥분되면서 걱정이 사라지곤 했다.
건이 수시로 대학에 입학했다. 박이 바라던 인 서울이었다. 학비가 면제되었고 기숙사비도 지원받았다. 지방에서 서울로 유학 보내는 건 기둥뿌리를 뽑아야 가능하다는, 축하를 받을 때마다 이 모두가 사랑방에서 얻은 성과 같아서 박은 우쭐했다. 가끔 건과 연락되지 않는 게 걸렸다. 하지만 집 떠난 사내란 으레 그러려니 여겼다.
어느 날,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곤은 다 알고 있는 눈치였다. 박이 통화하는 내내 서성거렸다. 건이 ‘토토’라는 스포츠 도박에 빠져 주변 사람들 이름을 빌려 불법 대출을 받은 다음 도주했다고 했다.
“도박이요?”
되묻는 박의 몸이 휘청 꺾였다. 도박이라니…… 게다가 불법 대출을 받고 사라졌다니…… 박은 경악했다. 매스컴에서 주워들은 내용을 증명하듯 도박은 철저하게 건을 유린했다.
건의 흔적을 찾아 헤매다가 박은 깨달았다. 사람들 대부분이 지구가 둥글다고 믿어도 네모라고 믿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지구가 둥글다고 믿던 박은 아직 옳고 그름의 판단력이 부족한 건이 네모로 생각하는 걸 참지 못했다는 것을. 그래서 자신의 강압에 건이 튕겨 나갔다는 걸, 박은 인정했다.


위원장 임기를 앞두고 사람들은 여전히 공방으로 모여들었다. 박은 건의 사건 이후 모임에 시들해졌다. 일을 핑계로 늦게야 합류했다. 코를 벌렁거리며 흥분한 총무가 눈이 감기도록 웃으며 말했다.
“저야, 여러분들이 밀어만 준다면야, 뭐든 다 할 각오가 된 놈입니다.”
분위기를 간파한 박이 제동을 걸었다.
“이런 얘기는 좀 부담스러운데…… 다음에 합시다.”
“우리끼린데 뭐 어때? 얘길 마저 마칩시다. 우리와 생각이 같은 사람을 요직에 앉히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니까.”
눈치 빠른 총무가 입술에 손가락을 세우며 말했다.
“쉿!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들으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죠. 우리끼리 마음이 통했으니 그걸로 됐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번에 제 딸이 공기업에 입사했어요. 마지막까지 아슬아슬하게 맘 졸였는데 유공자 가산점이 도움이 됐어요.”
“그럼 그럼, 당연히 그래야지. 우리가 목숨을 내놓았는데 그 정도는 받아야지!”
총무의 양볼이 부풀어 올랐다.
“그나저나 박 동지! 아들놈은 아직도 연락 없어?”
황은 이름 대신에 동지라고 부르길 즐겼다. 박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총무가 한턱내겠다며 사람들을 몰아 밖으로 나갔다.
문득 박은 사는 게 허탈했다. 이 모든 게 다 자신의 탓인 것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민주화운동에 목숨을 걸었던 자신이 그 취지를 벗어난 채 살아온 탓일까? 그 뜻을 제대로 이어받지 못해 가족이 제자리를 못 찾고 어긋나는 걸까? 술에 찌들어 사는 박을 못마땅해 하다가 고통 속에 죽은 아내나 아이들을 소유물인 양 치부했던 어리석음의 대가일까?
박은 액자 속 건의 얼굴을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얼굴선을 따라 움직이다가 날카로운 느낌에 손을 뗐다. 유리에 실금이 가 있었다. 손끝에 피가 맺혔다. 나뭇등걸이 된 손도 미세한 날카로움에 반응한다는 게 신기했다. 휴지로 손가락을 동여맸다. 휴지에 흡수되는 선명한 핏빛에 울컥, 생목이 올라왔다. 서랍에서 초를 꺼내 불을 붙인 다음 심호흡했다. 어쩌면 사람이 지닌 감각 중 가장 민감한 건 후각인지도 몰랐다. 숨을 쉬면서 공기와 함께 들이켜는 분자들이 후각을 자극하고, 뇌의 중추에 신호를 전달하면서 느껴지는 감각. 하지만 기억으로 소환되는 냄새는 달랐다. 기억은 치유되는 게 아니었다. 잠재된 채로 있다가 작은 꼬투리에도 구겨진 종이처럼 부르르 떨며 분연히 일어났다.


“어떤 마음이었나요?”
총무의 추천으로 왔다며 시민단체 소속의 기자가 공방으로 찾아왔다. 4월 말이었다. 아직 햇살이 들어오지 않은 시각, 공방은 서늘했다. 코트 깃을 여미며 그가 말했다. 그때를 재조명하는 시선으로 남겨진 사람들에 관해 취재하는 것이라고. 박은 기부금 때문이면 싫다며 거절했다. 용서되지 않은 과거를 말하는 건 또 한 번 기억을 뒤집는 일이었다. 생각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렸다. 왜 하필 박을 추천한 건지 총무의 오지랖이 원망스러웠다. 박이 대꾸가 없자 기자가 다시 물었다.
“거룩함, 같은 마음이 있었나요?”
“거룩함, 이라니?”
박은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데 갑자기 용량을 초과하기 직전인 물꼬를 건드린 듯 말이 술술 풀렸다. 거룩함이라는 단어조차 알지 못했고, 그저 그곳에 제자가 있었을 뿐이었다고……. 박은 그날의 상황이 눈앞에 재현되듯 허공을 헤매는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사십 년 전, 박은 공업학교에 입학했다. 취업해서 아버지의 빈자리를 대신할 생각이었다. 졸업 무렵 직업학교가 생기면서 뜻밖의 교사 자리가 주어졌다. 박은 목공 수업의 선생으로 채용되었다. 나무의 향이나 껍질, 나이테에 관해 알려주려던 박은 그런 각오가 부질없음을 깨달았다. 학교에서는 철저한 실습 위주의 수업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서윤재’는 그때 만난 학생이었다. 작달막한 키에 다부진 체형이 박과 비슷해서 형제냐는 놀림을 받곤 했다. 말이 제자였지 나이 또한 엇비슷했다. 윤재는 빨리 취직하려는 마음이 컸다. 말뿐만이 아니라 노력도 남달랐다. 스물넷이 되던 봄, 입대를 더는 미룰 수 없게 된 박은 사직서를 냈다. 최루탄 연기와 학생들의 구호를 귓등으로 흘리며 술집 순례를 했다.
전날의 숙취로 점심때까지 늘어지게 잔 박은 날이 어둑해지자 밖으로 나왔다. 도청은 학생들과 시민, 군인들의 대치가 치열했다. 박은 넋을 잃었다. 그때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걷던 윤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밀집된 무리를 피해 길을 건너던 윤재가 군인들 눈에 띄어 군홧발에 밟히고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맞았다. 느린 정지화면처럼 몸이 고꾸라지더니 머리에서 분수처럼 피가 터져 나왔다. 붉게 물든 윤재의 머리는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를 뿌려 놓은 것 같았다. 반사적으로 뛰쳐나가 윤재를 안았다.
그렇게 뜻하지 않게 그 상황에 속하게 되었고 무기를 맡게 되었다. 시도 때도 없이 두려움을 넘어선 공포가 영혼까지 잠식했다. 그런데 참으로 묘했다. 기자가 거룩한 마음이었냐고 묻자 박의 머릿속이 얽히면서 그런 마음이었다고 믿게 되었다.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뻐근하게 차오르는 느낌을 거룩함이라고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뭉클함이나 경건함을 느꼈던 건 사실이었다. 그 감정은 사태가 점점 극으로 치닫자 더 단단해졌고 강인함으로 바뀌었다. 상황을 파악하는 눈빛도 예리해졌다. 자신도 모르는 능력이 표출되면서 이전과는 다른 존재가 된 것 같았다.


김은 라디오와 함께 생활했다. 라디오를 통해 다른 사람의 삶을 알게 되고 음악에 위로받는 게 좋은 듯했다. 라디오를 듣다가 큰 소리로 웃기도 했고 가끔은 욕설도 내뱉었다. 가끔 기분이 좋을 때면 노래를 따라하거나 휘파람을 불기도 했다. 입술을 새 주둥이처럼 내밀고 휘파람을 부는 김은 사포질에 여념이 없었다. 대패질한 나무의 표면을 부드럽게 하는 사포질은 많은 시간과 체력을 소모했다. 김은 편백나무 자투리로 쟁반을 만드는 중이었다. 언제부턴가 김은 소품을 만들어 쏠쏠하게 부수입을 올렸다. 주문이 늘자 점점 과감해졌다. 더러 나무 원판에도 손댔다. 박이 눈총이라도 하면 김은 당당하게 말했다.
“형님이야 보상도 받았고 쯩도 있지만, 나는 아무것도 없잖아요.”
귀에 연필을 꽂고 사포질을 하는 김은 어느새 베테랑이었다. 박은 강 사장이 주문한 장롱의 표면을 만졌다. 오랜 세월을 거슬러온 나무의 숨결이 손끝을 통해 전해졌다. 원목의 질감을 살리는 무늬 맞추기로 시간이 소요되었고, 원앙 한 쌍을 끌로 새기고 그 위에 색을 입히느라 일정이 좀 늦어졌다.
서랍을 만들 목재와 연장을 차례로 늘어놓았다. 박은 연장을 보물 다루듯 아꼈다. 어젯밤 숫돌에 갈아 놓은 대팻날을 확인했다. 옆으로 세워 손끝으로 만져 보았다. 날이 고르게 섰다. 신문지에 가져다 대면 스윽 잘릴 거였다. 박은 그 느낌을 좋아했다. 예전에는 날을 간 뒤 손등이나 팔에 난 털을 밀어 날을 확인한 적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아찔했다. 그때는 그런 치기를 젊음인 양 여기며 살았다. 대패에 날을 끼운 다음 망치를 두드려 고정했다. 날을 잘 끼워 넣는 것도 묘수였다. 나무를 작업대에 고정했다. 몸을 숙이고 어깨에 힘을 뺀 다음 대패를 쥔 손목에 힘을 주고 앞으로 당겼다. 대팻밥이 일정한 두께로 깎여 나왔다. 대패질은 정적인 작업이었다. 미세한 먼지로 흩어지는 기계 작업은 편리하기는 해도 먼지부터 달랐다. 그건 서로 격이 다른 거였다. 서랍 이음새는 ‘주먹장’으로 맞췄다. 도브테일(dovetail) 이라고도 불리는 주먹장은 비둘기 꼬리처럼 쉽게 빠지지 않게 촉에 경사를 주는 방식이었다. 끌로 촘촘하게 촉을 파내고 사포질을 한 다음 암놈과 수놈을 끼워 맞췄다. 매끄러운 이음새를 확인한 뒤, 김에게 넘겼다.
김이 사포질을 시작했다. P80으로 거친 부분을 제거한 뒤 P150, P220, P320을 거쳐 P400으로 마무리했다. 손끝으로 표면을 확인한 김이 손을 털었다. 밖에서 목에 두른 수건을 풀어 먼지를 털고 들어온 김이 배고프다고 했다. 시계를 보니 정오가 지나 있었다. 식사를 주문한 뒤 박이 빗자루를 들었다.
불쏘시개용 자투리 나무를 모으다가 눈앞의 미세한 움직임에 고개를 들었다. 천장 아래 거미줄에 걸린 나방이 몸부림치고 있었다. 햇살에 반사된 투명한 거미줄은 촘촘했다. 나방을 옭아맨 거미가 그네를 타듯 줄을 흔들었다. 포획자의 여유였다. 낭창낭창한 흔들림에 나방이 움직임을 멈췄다. 박은 거미가 자신인 양 소름이 돋았다. 빗자루를 들어 거미줄을 내려쳤다. 바닥으로 떨어진 거미가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빗자루로 거미의 통로를 막았다. 막힌 길을 인식한 거미가 방향을 틀었다. 다시 빗자루로 막았다. 통로가 차단된 거미는 죽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박 사장, 식사는 하셨소?”
박이 손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강 사장이었다.
“거미는 눈에 띄는 대로 밟아 죽여야지, 안 그러면 번식이 장난 아닙디다.”
박의 행동을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강이 장롱 앞으로 갔다.
“흠, 원앙 한 쌍이라…… 좋다. 그런데 언제 다 될까요? 어머니 칠순 선물인데.”
박은 서랍만 넣으면 된다고, 이제 곧 배달하겠다고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던 강 사장이 쟁반에 눈이 멎었다. 김이 안경을 추켜올리며 다가왔다.
“이거 편백이에요.”
“흠, 쇠로 손잡이를 붙이면 근사하겠는데요?”
“아, 맞아요. 저는 미처 생각 못 했는데, 대단합니다.”
김이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다.
“쟁반에 쇠붙이는 안 돼요. 금세 녹이 슬거든요!”
박이 말하자 김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거참 형님! 그냥 손님 취향을 존중합시다. 쉽게 가자고요.”
강 사장을 배웅한 뒤 박은 잊고 있던 빗자루를 들췄다. 몸이 돌출된 거미는 잠시 머뭇거리다 톱밥 속으로 몸을 숨겼다. 한없이 느린 듯 느껴지던 햇살이 공방 안까지 밀고 들어왔다. 밖에서 배달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 헬멧을 쓴 청년이 음식을 내려놓았다. 식사합시다. 김이 재촉했다.
“형님, 아들놈이 나를 원망합디다.”
반주로 마신 소주에 얼굴이 불콰해진 김이 말했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유공자 자녀가 받는 혜택에 대한 프로그램을 보다가 아들이 물었다고 했다. 그때 유공자증을 받은 사람이 수천 명인데 아버지는 왜 비켜 간 거냐고. 취업을 준비 중인 아들의 눈빛이 어찌나 절박한지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고, 김이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당시 고등학교 졸업반이던 김은 학교와 집만 오갔다. 시민들 참여를 독려하는 가두방송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김이 밖으로 나간 건, 여동생의 늦은 귀가로 어머니가 등을 떠밀어서였다. 그러다가 천변 부근에서 곤봉을 휘두르는 군인들을 보았다. 그들은 그저 길을 가는 행인에게 곤봉을 내려쳤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김은 그들을 향해 돌멩이를 던졌다. 그리고 정신없이 도망치다가 넘어졌다. 천변에 몸을 숨긴 김은 오른쪽 발목뼈가 부러진 줄도 몰랐다.
“세상이 참, 지질맞죠? 누군 다리병신이 되었는데도 요 모양 요 꼴로 살고, 누군 멀쩡한 사지 육신을 가지고도 유공자에, 보상금에, 호사를 누리니 말입니다.”
김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되었다. 하지만 호사를 누린다는 김의 말은 틀렸다. 보상금만 해도 그랬다. 보상금이 지급되었다는 보도에 낯선 단체에서 연락을 취해 왔다. 몇 개의 단체에 적절하게 기부했다. 사실 유공자 혜택도 별거 없었다. 국가가 지정한 병원에서의 치료비 면제와 국립공원 입장료 면제, 영화관 할인, 몇 번으로 한정된 기차 요금 반값 할인, 정도였다. 다만 아이들 학비를 면제받을 때는 달랐다. 오래전의 행동이 옳았다는 자부심과 우쭐함은 있었다. 하지만 유공자 자녀에게 주어진 가산점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스물넷의 젊음은 도전이었고 열정이었다. 그렇다고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때로 민주화운동의 중심에 자신이 서 있었다는 사실은 거룩해지기도 했고, 그날의 함성이 이명처럼 남아 고통스럽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그때 그런 일이 정말 있었나? 자주 거론되는 여론에 맞춰 일정 부분 지어낸 건 아니었나? 한 번씩 의문이 들었다. 고통스러웠던 순간도 세월에 의해 깎이고 무뎌지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그 모든 과정을 지나왔다. 딱히 김의 푸념이 아니어도 박은 이제 편해지고 싶었다. 우두커니 있다가도 삶이 저문다는 느낌에 막막해지는 걸 보니, 생의 끝점이 구체화되는 시점에 도달했다는 생각도 강했다. 이제는 그저 책에서 읽었거나 술자리에서 주워들은 이야기로 기억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박은 김의 등을 몇 번 토닥인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은 총회에 꼭 참석하라는 총무의 성화에 공방을 나섰다. 어디선가 날려 온 라일락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오월도 막바지였다. 도심은 활력이 넘쳤다. 분수대 앞에는 버스킹이 진행 중이었다. 쿵쾅거리는 노래를 귓등으로 흘리며 총무가 운영하는 식당에 도착했다. ‘국가유공자의 집’ 스티커가 붙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서른 명 정도의 시선이 한꺼번에 박을 향해 쏠렸다. 얼굴이 상기된 총무가 마이크를 손에 들고 말하고 있었다.
“모두가 하나로 뭉쳐야 힘이 강해지고 뭔가를 이뤄낼 수 있다는 걸, 몸으로 보여준 우리가 아닙니까? 제게 힘을 실어 주셨으니 제 한 몸 뼈가 부서지게 노력해서 예전의 영광을 되찾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총무가 건배를 제시했다. 황이 과장되게 잔을 부딪쳤다. 건배주를 단숨에 비운 박은 갈비탕을 그릇째 들고 마셨다. 갈빗대를 양손으로 잡고 뜯던 박이 손을 멈추고 말했다.
“기억나? 우리가 고문을 당하던 도중에도 밥 때가 되면 음식이 배달된 거?”
“어떻게 잊어? 굶주린 개처럼 침 흘리는 우리를 의식하듯 쩝쩝거리며 밥을 처먹던 모습을…….”
황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개중에는 조용히 먹자고 하는 군인도 있었지. 그 사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한 번씩 궁금해지기도 해.”
“생각하면 뭐 해. 다들 한통속이었겠지.”
황의 대답에 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뼈를 쥔 손아귀에서 국물이 흘러내렸다. 뼈를 내려놓고 물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모처럼 입은 와이셔츠가 땀에 젖어 후줄근해졌다. 박은 혼잣말을 했다. 가끔은 생생한 기억이 지겹다고…….
총무가 테이블을 돌며 술을 권했다. 건넨 만큼 받아 마신 그가 빠르게 취했다. 과거를 회상하는 눈빛이 되면서 말이 많아졌다. 코를 벌름거리며 자신의 기억 속에서 선택된 언어로 오래전의 상황에다 더 극적으로 살을 붙여 재현했다. 흥분한 얼굴은 귓불까지 빨갰고 눈빛은 빛났다. 횡설수설한 말에 박은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그때 우리를 지탱하던 자아와 공명심까지도 방향을 상실한 듯 느껴졌다. 가증스러웠다. 그게 우리의 한계이며 속성이라고 생각해도 그랬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잊고 살아도 좋을 그 시절을 상기시키는 건 어쩌면 이런 모임 탓일지도 모르겠다고. 유공자임을 증명하는 증을 지닌 한 원망과 상처를 지닌 사람으로 살다가 죽을 것 같은 불안감이 일었다. 그 시기를 함께 지나온 사람들과 함께인 것도 의미 없는 일인 양 여겨졌다. 그래서일까. 같은 공간에서 뭔가를 기억하고 반응하는 유대의 영역에서 이제는 벗어나고 싶었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총무가 옆 사람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사람들이 하나둘 따라하면서 그들은 금세 하나가 되었다. 어깨동무한 그들은 왼쪽과 오른쪽으로 번갈아 쏠리며 「애국가」를 불렀다. 노랫소리는 우렁찼다. 평소의 엇갈림과 편 가르기를 내려놓고 예전의 동지로 돌아간 그들은 노래로 하나가 되었다.


곤은 아직 귀가 전이었다. 곤은 어느 외진 곳에서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고 있는 것일까? 약해 보여도 강단이 있는 곤은 뭘 해도 잘 해낼 거였다. 방으로 들어간 박은 책상 앞에 섰다. 서랍에서 유공자증을 꺼냈다. 그 안에 자신의 40년 흔적이 녹아 있기라도 한 듯 앞뒤로 돌려 가며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박태성 1957년 3월 10일생. 사진 속의 박은 지금과는 달랐다. 눈빛은 형형했고 웃을 듯 말 듯 올라간 입꼬리는 뭔가를 성취한 듯 자신에 찬 모습이었다.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던 그 시절이 행복했던 순간이었을까? 박은 지갑 속에 유공자증을 넣었다.
속이 헛헛했다. 박은 놋그릇에 달걀 두 알을 깨트렸다. 노른자가 흐트러지지 않은 달걀은 신선했다. 달걀이 닭의 몸 밖으로 나오는 순간, 공기와 접촉한 뒤 흰자와 노른자의 경계가 흐려지듯, 사람도 마찬가지일 거였다. 살아가는 일에 닳고 닳아 단단하던 살과 뼈가 흐물거릴 즈음, 의식이나 생각도 두루뭉술 허물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되기 전에 결단을 내린 게 다행이라고, 박은 생각했다.
수란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1분의 시간을 맞췄다. 50초의 시간을 초과하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떴다. 10초를 남겨 두고 정지 버튼을 눌렀다. 전자레인지에서 수란을 꺼냈다. 고소한 들기름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



* 김영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서 제목 인용함











채정
작가소개 / 채정

2021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등단으로 작품 활동 시작.


《문장웹진 2021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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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음 없이

좋아하는 마음 없이 김지연 안지는 이른 결혼을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아니, 그걸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이혼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안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그때 이혼한 일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늘 그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여러 말들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은 안지의 비밀은 아니었지만 먼저 나서서 밝히지도 않았다. 어릴 때 안지는 무척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그런 표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속해야 하는 집단에서 튀지 않는 사람, 아주 평균적인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 찬반투표를 할 때면 눈치를 보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서 좋아하고 친구의 것과 비슷한 브랜드의 신발을 사서 신었다. 친구들이 싫어하는 선생을 따라서 싫어했다. 사실 안지는 그 선생에게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다가 술술 흘러나온 그 선생에 대한 욕을 듣고 재빨리 노선을 바꿔 함께 욕을 했다. 한동안 안지는 수학 시간마다 왜 애들은 저 선생을 싫어할까? 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더 열심히 선생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수학을 가르친다는 점만 빼면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쉽게 답할 수 없는 내용을 골리듯 물어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생들한테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뭔가 잘못 알고 섣불리 화를 냈을 때, 그러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선생들은 그러게 헷갈릴 만한 짓을 왜 하고 다니느냐고 도리어 짜증을 부렸는데 그 선생은 재빨리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알았어. 미안해. 가끔 안지는 머릿속으로 그 목소리를 재생해 보곤 했다. 그 때문에 선생이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싫어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나?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안지는 대학에 갔고 연애를 했고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 결혼도 했다. 아주 평균적인 삶이었다. 조금씩 빠르기도 했다. 조바심이 나 있었으므로. 자신도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식도 올리기 전 임신을 해 낳은 아이가 막 돌을 지난 참이었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계속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낙태를 밀어붙이지 않은 것을, 시간을 끌다가 영영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을, 어떤 결단력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새로운 여자가 생겼을 때는 안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겨우 육 개월을 만났을 뿐

  • 관리자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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