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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나의 개

  • 작성일 2022-12-01
  • 조회수 1,882

[단편소설]



당신은 나의 개



강이라





겹겹의 진실을 수의로 걸치고 떠난 이를 봅니다. 쓸어 모은 뼈와 뼛조각이 분쇄기 안에서 곱게 갈립니다. 몇 줌의 가루는 항아리에 옮겨 담기고 흰 보자기에 싸여 작은 목함으로 들어갑니다. 담기지 못한 것들은 미미합니다. 부유하던 점점의 파편이 허공으로 도약하며 구석으로 밀려납니다. 생이란 험지를 떠나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천장 모서리에 고인 수많은 혼들에는 그림자도 없습니다. 겨울 나무껍질처럼 일어난 입술을 윗니로 잘근잘근 씹으며 수골실 앞에 서 있습니다.
남은 건 저 목함과 미량의 사실뿐입니다.


*



아버지가 죽었습니다.
부검은 없을 겁니다. 경찰의 말투는 야박했습니다.
사인은 경부압박 질식사. 쉽게 말해 자살입니다.
사고사라 하기에 스스로 목을 매는 행위는 몹시 이례적이고 무익합니다. 얻을 것이 없어요. 죽음밖에는. 정황은 모르지만 타살이라면요. 그 밤과 새벽, 집에 함께 있던 사람은 저뿐입니다. 제가 아버지를 죽인 걸까요?
왜요?
저는 소파 끝에 매달리듯 걸터앉아 오가는 경찰을 향해 물었습니다.
제가 아버지를요?
답을 얻지 못한 질문이 돌아와 발밑에 툭툭 떨어집니다. 발치는 이미 질문의 사체로 수북합니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려던 경찰이 돌아와 제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제복 안주머니에서 네모반듯한 작은 종이 하나를 꺼내 제게 내밀었습니다. 앞으로 그 질문을 수십 번 반복하게 될 겁니다. 백을 채우거든 더는 견디지 말고 이 주소로 찾아가세요. 경찰이 제 손에 쥐어 준 건 명함이었습니다. 견딘다는 건 그늘 속에서 그림자를 찾는 일입니다. 서향의 거실에 볕이 밀물처럼 들어차는 걸 보며 몇몇 이에게 돌리기 시작한 부고는 만조가 채 되기도 전에 끝났습니다.
선생님.
개 얘기부터 해도 될까요. 네, 걔 말고 개 맞습니다. 아버지 이야기를 하려면 아무래도 그 개에 대해서 먼저 말하는 게 좋겠어요.
개는 아버지가 죽기 한 달 전, 비오는 날 처음 들였습니다. 이른 장마에 들떠 있던 맨션 외벽의 페인트칠이 낙진처럼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던 날이었습니다. 외벽에는 세월에 닳은 네 글자, 혜원맨션이 화석처럼 박혀 있었습니다. 혜원맨션은 오르막길 끝에서 야산으로 이어지는 언덕바지 한쪽에 위치한 낡은 맨션입니다. 맨션의 맞은편, 산기슭에는 점집인지 절집인지 모를 작은 암자 한 채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산 사람보다는 죽은 이에 대한 기도가 더 많은 곳입니다. 본전에서 흘러나오는 기계음의 불경은 억겁의 윤회처럼 돌고 돕니다.
늙고 여윈 흰 개는 맨션 입구 철제 난간에 묶여 있었습니다. 예보 밖의 비는 피할 겨를도 주지 않고 쏟아졌습니다. 바람이 없어 바닥으로 곧장 떨어진 빗방울이 사방으로 화살촉처럼 튀었습니다. 개는 베란다 창문을 닫던 아버지 눈에 띄었고, 아버지는 그 자리에 붙박여 한참을 지켜보다가 말없이 현관문을 열고 나갔습니다. 빗줄기가 더 굵어진 것도 아니고 개가 서럽게 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한 손으로 우산을 받쳐 든 채 남은 손으로 난간에 묶인 줄을 풀어 개를 가슴팍으로 안아 올렸습니다.
측은지심은 아니다.
욕실에 쪼그리고 앉아 개의 등허리에 온수를 연신 끼얹으면서 아버지는 묻지도 않은 말을 했습니다. 물세례를 받으면서도 흰 개는 버둥거리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비가 그치자 아버지는 개를 데리고 나가 철제 난간에 다시 묶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비가 오거나 저녁이 되면 데리고 들어오는 일을 며칠 동안 반복했습니다. 들고나는 동안에 개는 짖지도 낑낑대지도 않았는데 제 숙명으로 여기는 듯도 했습니다. 종일 비가 오는 날에는 좁은 거실과 베란다의 벽이 만나는 구석에 바짝 몸을 붙이고 앉아 간헐적으로 떨기만 했으니까요. 그 자리는 서향의 거실에 늦은 빛이 들어도 끝내 음지인 자리였습니다. 비가 오면 들이고 비가 그치면 내놓는 일은 장마만큼이나 지루하게 이어지다가 멈추었습니다. 이름 없이 얘나 쟤로 불리던 개는 어느 날 사라졌고 철제 난간에는 남은 목줄만이 둘둘 감겨 있었습니다.
그 후 징검돌처럼 주고받던 아버지와 저의 말들은 물속으로 서서히 가라앉았습니다. 빛이 귀한 집에서 아버지와 저는 어둠과 그림자로 살았습니다. 어둑한 백열등 아래 놓인 4인용 식탁에 어긋난 단층처럼 비껴 앉아 밥을 먹고 술을 마셨습니다.
개가 걱정되지 않아요?
저는 거실 구석에 시선을 둔 채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컵에 담긴 반주를 입에 털어 넣었습니다. 마른 목울대 아래 자상 같은 목주름이 깊었습니다.
나는 측은지심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밥그릇을 국그릇에 포개 들며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조도 낮은 식탁의 등이 역광이 되어 아버지를 비추었습니다.
비가 내렸고 묶인 개가 보였고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으로 개를 들였을 뿐이야. 그게 전부다.
어떤 마음도 없이요?
빛을 등진 아버지의 실루엣은 한층 더 어두워 보였습니다. 빛에 눈이 시려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히며 인상을 쓰고 말았습니다.
꼭 무슨 마음을 내야 하니? 그래서 너는 어떤 마음을 내었니?
아버지는 제게 반문했습니다. 고저장단이 없는 말투였습니다.
그 마음으로 너는 무엇을 했니?
저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홀아버지였습니다. 애초에 제게 엄마란 존재, 모태가 있기는 했을까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흰 개를 거두듯 어느 비 오는 날 저를 거두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버지와 저는 제가 여섯 살 때부터 지금까지, 이 집에서 둘이 살았습니다. 처음부터 단둘이었지요. 천지간에 우리 둘, 단둘뿐이야. 아버지는 내 양쪽 뺨을 두 검지로 꾹 누르며 주문처럼 되뇌었습니다.
우리 둘이 단둘이 이 집에서 살자.
낯선 동네에서 우연히 발견한 혜원맨션 앞에서 아버지는 제게 말했습니다. 여섯 살의 저는 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여기서 행복하게 살자. 혜원아.


고모의 전화는 낮의 끝물이라 볕이 거실 바닥에 바짝 누운 때에 걸려왔습니다. 긴 한숨도 두세 번쯤 이어지면 결국 의미가 됩니다. 저는 발치에 걸린 볕을 발바닥으로 지근지근 밟았습니다.
얘야.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골백번을 다시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는 게…… 죽고 싶은 마음은 젊어서나 드는 거 아니니? 어차피 산 날보다 살날이 짧은 사람이 왜 제 명을 재촉해. 혜원이, 너는 알지? 한집에 단둘이 오래 살았으니 너는 알 거 아니니? 어쨌든 네 아버지잖니?
고모의 한숨이 후렴구처럼 서너 번 더 이어지다 기어이 곡으로 넘어갈 때쯤 저는 전화기를 바닥에 가만히 내려놓았습니다.
제가 아버지에게서 알고 싶었던 그 마음은 비 오는 날 거둬들인 개에게 낸 마음 - 측은지심이든 아니든 - 이 아니었습니다. 그 마음은 예보 없이 첫눈이 펑펑 내린 그날 밤에 있었습니다. 눈이 귀한 도시에 갑작스레 눈이 내렸고 흥분한 사람들이 집 밖으로 뛰쳐나와 이리저리 눈발처럼 몰려다녔습니다. 창가 자리가 있는 술집마다 눈과 술에 취한 이들로 넘쳐났고 분위기에 취해 남녀가 쉽게 허물어지는 밤, 저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여럿이 어울린 술자리에서 빠져나온 우리는 손을 잡고 비틀거리며 큰길로 나가 택시를 잡아탔습니다. 취기를 핑계 삼아 서로의 어깨와 가슴에 기댈 때마다 입술과 뺨과 목덜미로 달뜬 기운이 훅 끼쳤습니다. 저는 차창에 머리를 박고는 쏟아지는 눈을 무감하게 바라보았습니다. 허벅지 깊숙이 들어오는 그의 손을 밀어내며 고개를 돌리는데 백미러에 비친 얼굴이 보였습니다. 백미러 속에서 운전석의 시선은 내내 앞을 향하고 있었지만 저는 한눈에 알았습니다. 눈과 밤과 사랑 운운하며 포개져 오는 그를 고스란히 받아 안으며 저는 서늘한 열기를 느꼈습니다. 이내 도착한 목적지에서 택시비를 치르는 그를 기다리며 선 제 뒤로는 불야성의 모텔이 즐비했습니다. 조급한 그의 손에 이끌려 가장 가까운 무인 모텔로 들어가도록 택시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네. 선생님. 맞습니다. 백미러에 비친 얼굴은 제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영업 택시 기사였고 야간 운행 중이었습니다. 많은 택시가 눈과 술과 사랑 따위에 혼곤해진 남녀를 술집에서 모텔로 부지런히 실어 나르던 그 밤에 아버지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 못처럼 박혀 있었습니다. 자정을 훌쩍 넘겨 바닥에 아무렇게나 벗어 둔 속옷을 주워 입다 말고 저는 창밖을 내다보았습니다. 눈 덮인 길가에 택시가 있었습니다. 하얀 길 위에서 오로지 택시 밑바닥만이 깨끗했습니다. 모텔 골목을 이르게 빠져나온 남녀가 택시를 발견하곤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뒷문을 열었다가 도로 닫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몇 발짝 걸음을 옮기던 남녀는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타고는 큰길 쪽으로 사라졌습니다. 저는 엎드려 잠든 그를 두고 방을 나왔습니다. 비상계단을 통해 주차장 밖으로 나가 몇 시간 전에 왔던 길을 느릿하게 걸었습니다. 그러고는 택시의 뒷문을 열고 시트 깊숙이 몸을 밀어 넣었습니다.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고 있으려니 시동을 건 택시가 천천히 움직였습니다. 맨션 앞에 이르도록 아버지는 제게 한 마디 말도 건네지 않았습니다. 택시 뒷문을 붙잡고 서서 저는 백미러를 노려보았습니다. 희미한 실내등 아래 아버지는 유령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놓아주듯 문을 닫자 실내등이 꺼지며 아버지는 어둠에 잠겼습니다. 빈차 표시등을 켠 택시가 골목을 돌아 사라지도록 저는 꼼짝 않고 서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날, 그 밤 어떤 마음을 내었을까요. 아비로서 그게 가능한 마음이긴 하던가요. 얼음장 같은 철제 난간을 붙들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
통창으로 보이는 공원의 풍경이 근사합니다. 올라오기 전까지 저 소공원을 느릿한 걸음으로 몇 바퀴나 돌았습니다. 어린이집에서 몰려나온 아이들이 없었다면 저는 아직도 돌고 있을지 모릅니다. 내주신 보리차가 몹시 뜨겁습니다. 아뇨아뇨. 오히려 좋습니다. 차가 식을 동안에 저도 할 말을 추릴 수 있겠어요. 찻잔이 독특합니다. 간유리로 만든 컵은 처음 봅니다. 속내를 쉽게 들키지 않으려는 컵의 고집일까요. 어쩌면 저와 아버지도 간유리 같은 사이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온전히 보여주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으니 맘대로 가늠하며 원망할 수밖에요.
말씀드렸듯이 아버지는 스스로 목을 맸습니다. 자신의 키보다 낮은 곳에 목을 매고 죽는다는 건 생의 지평이 바늘 끝보다 좁기 때문입니다. 사는 재미도 살아야 할 이유도 적은 사람인 건 알고 있었지만 생을 툭 꺾을 정도로 삶을 욕망하지 않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낮입니다. 창문 너머 나뭇가지에 앉은 새 보이시죠. 저기, 작은 새요. 선생님. …… 제가 지금 여기서 하는 말들을 저 새가 다 알아듣지는 않을까요. 괜찮을까요. 이런 말 해도 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아버지와 저는 이 집에서 오래 살았습니다.
혜원맨션, 우리 집은 17평으로 실평수는 그보다 훨씬 작은 집입니다. 방 두 개와 부엌, 거실과 좁고 긴 베란다가 전부입니다. 거실을 가운데 두고 현관 쪽의 제 방과 안쪽의 아버지 방이 이어져 있고 맞은편으로는 일자형 부엌이 있습니다. 집은 서향이라 오후에나 누른빛의 볕이 듭니다. 아버지와 내가 동향이나 정남향 집에 살았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이른 축복 같은 아침볕을 좀 더 받고 살았다면 서로에게 체온의 항상성으로 식지 않는, 미더운 존재가 되어 줄 수 있었을까요. 그렇다면 둘 또는 둘 중 하나라도 발화하고 발산하고 발색하는 삶을 살았을런지요.
그날 아버지는 거실에 있었습니다. 제 방과 붙은 거실 벽에 길쭉한 인조 가죽 소파가 놓여 있고 맞은편 벽에 텔레비전이 걸린 흔한 거실 모습입니다. 오후 서너 시였을 겁니다. 주중이었고 택시는 쉬는 날이었습니다. 텔레비전에서는 야구 중계가 한창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공수의 텀이 있고 템포가 유연하며 길게 볼 수 있는 야구 중계를 좋아했습니다. 경기를 보러 구장까지 간 적은 한 번 뿐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저를 얻기 전이라고 했으니 삼십 년은 넘었겠지요. 양 팀 모두 변변한 안타 하나 없이 볼넷으로 진루 흔적만 남기는 지루한 경기 끝에 한 팀이 볼넷만으로 만루를 만들었지만, 그것마저 무위로 돌리는 걸 보고 아버지는 견딜 수 없는 무력감을 느꼈고 그 후로는 구장을 찾지 않았다고 합니다.
제 방 책상에 앉아 뭔가 끼적이던 저는 시끄러운 텔레비전 소리가 거슬렸습니다. 돌아보니 방문이 한 뼘 정도 열려 있더군요. 일어나 방문을 닫으려다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내밀어 거실을 살폈습니다. 텔레비전에서는 투수가 1루로 몸을 틀며 견제구를 던지려던 중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소파에 길게 누워 있었습니다. 소파의 팔걸이를 베개처럼 베고 천장을 향해 반듯이 누워 눈은 감고 있었습니다. 굳게 다문 입으로 보아 잠든 것 같지는 않았어요. 몇 번의 견제 끝에 마침내 투수가 공을 던졌습니다. 견제구는 1루수를 얇게 스쳐 뒤쪽으로 빠졌습니다. 주자는 방향을 바꿔 2루를 향해 뛰기 시작했습니다. 1루 주자 2루로 2루로. 캐스터의 목소리가 커지고 높아지며 빨라졌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눈을 뜨지 않았습니다. 내린 두 팔 중 하나는 가슴에 다른 하나는 그보다 밑에 둔 채였습니다. 손은 아래로 향했습니다. 배에서 내려간 손은 허리 밴드를 지나 놓친 견제구처럼 파자마 바지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습니다. 손은 놓친 볼을 쫓아가듯 좀 더 아래로 좀 더 아래로 향했습니다. 밑으로…… 그보다 조금 밑으로…… 배꼽 아래…… 거웃 밑으로…… 살집 없이 내려앉은 아랫배에서 한참 더 내려간 손은 한 곳에 이르러 마침내 낮은 둔덕을 이루며 멈췄습니다. 얇은 파자마 아래로 마른 속살이 보였습니다. 손은 깊숙이 트렁크 팬티 속까지 내려가 있었는데 손놀림은 분주했지만 다급한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파울 라인 끝에서 볼을 잡은 1루수가 그대로 몸을 틀며 2루를 향해 볼을 던졌습니다. 2루를 향하는 주자와 볼, 버티고 선 2루수와 지켜보는 주루 심판의 모습이 화면 속에서 스틸 컷처럼 지나갔습니다. 아버지의 손이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위아래로 움직임은 점점 더 격렬해졌습니다. 저는 방문에 몸을 반쯤 걸치고 서서 중계 화면을 빤히 보았습니다. 화면 속의 아버지는 간유리처럼 흐릿했지만 들썩이는 아랫배와 아랫도리의 갈급한 손놀림은 확연했습니다. 길어 올린 생기를 감당할 수 없어 아버지는 아랫도리를 붙잡고 쩔쩔맸습니다. 2루를 향해 공 날아갑니다. 주자, 슬라이딩 시도합니다. 캐스터의 흥분한 목소리가 거실을 뱅뱅 돌았습니다. 1루수가 던진 공은 2루 베이스로 몸을 던지는 주자의 오른쪽 등에 맞았고 주자의 몸은 활처럼 뒤로 젖혀졌습니다. 반동으로 다시 몸이 앞으로 쏠리며 엎어지는 순간에도 주자의 두 팔은 2루 베이스를 향해 뻗었습니다. 동시에 아버지의 가슴 위에서 버티던 왼손이 쫙 펴지며 손끝까지 힘이 들어갔습니다. 아버지의 입에서는 낙엽 쓸어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규칙적이던 템포가 막다른 길에 내몰린 듯 빨라졌습니다. 아버지의 미간이 좁아지며 두 입술이 벌어졌습니다. 윗입술과 아랫입술 사이로 거미줄처럼 이어지던 마른침이 끊기는 순간 아버지의 입에서는 밭은 숨이 흘렀습니다.
엎어진 주자와 공을 받아낸 수비수 사이에 서 있던 2루 심판이 팔을 들어올렸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고샅에서 손을 멈춘 채 절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심판의 팔이 마침내 움직이던 그 순간, 텔레비전은 꺼졌습니다. 살고 싶은 주자와 죽이고 싶은 2루수는 사라지고 검은 화면 속에는 아버지와 저, 투 샷뿐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진루는 저지되었습니다. 체화된 비루함으로 삶의 동력을 잃은 아버지의 삶에 어쩌면 저 짧은 희열이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지금에 와서 합니다만, 그때는 2루에 생을 건 주자만큼이나 아버지가 딱해 보였습니다. 텔레비전을 끄지 않고 심판이 세이프를 외쳐 주자가 살았다면 아버지는 달뜬 얼굴로 제 본능에 끝까지 충실했겠지요. 아버지는 제가 방으로 들어가도록 죽은 사람처럼 소파에 누워 있었습니다. 끝내 눈을 뜨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이제 와 그 일을 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저는 왜 지금 그 일을 떠올리는 걸까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가 죽은 날 저는 경찰이 제 앞을 지나갈 때마다 왜냐고 물었습니다. 이 명함을 준 경찰 말입니다. 그 경찰은 제게 검안의 소견상 자살이 확실하므로 부검은 없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왜요. 저는 거듭 물었습니다. 자살하는 사람들에게는 전조가 있습니다. 정말 몰랐습니까. 경찰이 나무라듯 말했습니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죽은 이의 가슴과 제 가슴을 열고 들여다봐야 합니다. 자살자의 가족이 견디기에 그 과정은 몹시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한 번은 거쳐야 합니다.
경찰은 선생님을 찾아가 심리 부검을 받아 보라고 했습니다. 죽은 아버지를 이해해야 저도 살 수 있다고 하더군요.


선생님. 이 창으로 내다보이는 공원에는 여러 꽃이 심어져 있습니다. 목련, 철쭉, 수레국화, 덩굴장미, 수선화 구근까지 다양합니다. 이 공원의 조경을 맡은 사람은 아무래도 상록수보다는 꽃을 더 좋아하나 봅니다. 한겨울에도 꽃이 피고 지는 곳입니다. 선생님이 더 잘 알고 계시겠지만요. 이곳에 올라오기 전에 저 공원을 몇 바퀴 느리게 돌았다고 말씀드렸지요. 지금은 아이들이 어린이집으로 모두 돌아갔네요. 어린이집과 공원이 니은자로 이어진 화단에 두 그루의 동백나무가 심겨 있습니다. 어른 가슴께까지 오는 키에 바짝 붙어 심어져 언뜻 보면 한 그루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한철이 지나 핀 꽃보다는 바닥으로 진 꽃이 더 많았습니다. 아시다시피 동백꽃은 가장 아름다울 때 제 목을 쳐 생을 끝냅니다. 대개의 꽃은 꽃 이파리가 하나씩 떨어져 내리며 서서히 지지만 동백꽃은 작심하고 투신하듯 통째로 떨어져 내립니다. 매끈한 초록 이파리가 무성한 나무 아래 쌓인 동백꽃들은 졌다고 부르기엔 너무 온전해 처연할 지경입니다. 왜냐고 물어도 대답하는 꽃은 없으니 그저 꽃 무덤을 내려다볼 밖에요. 아니요. 제가 동백꽃을 좋아해서는 아닙니다. 저는 피고 지는 것들을 좋아하지 않으며 생사를 피고 지는 꽃에 비유하는 데 오히려 불편함을 느낍니다. 생사가 한 송이 꽃일 수는 없어요. 아니요. 아버지가 꽃을 좋아했던 것도 아닙니다. 아버지는 흐드러진 꽃 앞에 서면 생이 부끄러워 견딜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한 번도 제대로 피어 보지 못한 사람처럼 쓸쓸해했습니다.
지난겨울, 폭설이 내린 밤이었습니다. 자정 즈음 아버지는 운행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빨갛게 언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더군요. 붉은 동백꽃이었습니다. 어느 공원 갓길에 택시를 세우고 손님을 기다리는데 어디선가 툭,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조용한 주택가였고 오가는 차도 사람도 없었습니다. 눈 내리는 밤의 작은 기척을 아버지는 기민하게 느꼈습니다. 아버지는 택시에서 내려 공원으로 향했습니다. 툭…… 툭…… 툭…… 기척은 공원 가장 깊숙한 곳에서 났습니다. 아버지는 눈을 맞으며 공원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주위는 반사된 눈빛으로 어둡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동백꽃 앞에서 걸음을 멈췄을 때 툭 소리를 내며 꽃송이 하나가 눈 위로 떨어져 내렸습니다. 아버지는 허리를 접어 동백꽃을 주웠습니다. 아버지는 손님이 부르기 전까지 꽤 오랫동안 그곳에 홀로 서 있었다고 합니다. 꽃의 임종을 지켜본 후 아버지는 그 동백꽃을 들고 집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아버지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도록 그 꽃 주검은 거실 탁자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저는 식탁 등 아래 문상객처럼 앉아 뜨겁게 데운 보리차를 마셨습니다. 보리차 드려요? 아버지는 대답 없이 소파와 탁자 사이의 바닥에 앉아 꽃송이를 한 뼘 가까이 당겨 놓고는 가만히 들여다보았습니다. 붉은 홑동백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중얼거렸습니다. 제게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상체를 기울여 꽃에게 귓속말을 하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명복이라도 빌었던 걸까요. 아니면 낙화도 보아 넘기지 못하는 측은지심이었을까요.
선생님. 아버지는 태생부터 측은한 존재였습니다. 칠남매를 끝으로 할머니는 더 이상 아이를 갖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가난은 지독할수록 새끼를 친다고 뱃속에 아버지가 들어섰고 떼어내려는 온갖 모진 방법에도 버텼습니다. 질긴 명줄을 갖고 태어났지만 아버지는 평생 잦은 질병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중 침잠한 진흙 같은 우울한 기질은 제게로 이어졌습니다. 할머니는 아버지를 지우기 위해 무리하게 가했던 자기학대로 몸이 망가져 십여 년을 누워 지내다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큰누나 집에서 얹혀살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도망치듯 군대에 갔고 제대 후에는 지방을 떠돌며 막일로 먹고살았습니다. 한 군데 뿌리내리지 못하고 한해살이풀처럼 이곳저곳에서 피고 지는 삶을 살았던 겁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낡은 트럭을 한 대 사서는 전국 오일장을 돌며 옷 장사를 했다고 합니다. 십 년 훌쩍 넘게 떠돌며 살던 아버지가 어린 제 손을 잡고 큰누나네 집으로 돌아와 이제는 뿌리내리고 살겠노라 말했습니다. 큰고모는 그때 저를 처음 보았고 간간이 아버지와 소식을 주고받을 때도 아버지는 한 번도 어떤 여자를 만났고 살림을 차렸으며 아이를 낳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너를 낳았는지 주웠는지 나도 모를 일이다. 아버지는 전 재산을 털어 낡은 혜원맨션을 얻었고 저를 데리고 그곳으로 들어갔습니다. 영업 택시 일을 시작한 건 그 이후의 일입니다. 아버지가 저를 낳았든 주웠든 훔쳤든 그리 궁금하지 않습니다. 제가 궁금한 건 아버지가 삶 속에서 기대한 게 무엇이었는지입니다. 아버지가 동백꽃 같은 죽음을 선택하며 삶 이후에 기대한 건 또 무엇이었는지도요. 눈 내리던 그 밤, 스스로 제 목을 친 동백꽃 한 송이에 사람은 자신의 생사를 걸 수 있는가 말입니다. 아버지가 저를 주운 것처럼요. 자식에게서 얻을 수 있는 생의 기쁨을 아버지는 누려 보지 못한 이유일까요. 제가 개화되지 못하는 삶을 사는 것을 아버지는 못 견뎠던 걸까요. 선생님. 제주의 어느 숲에 가면 동백나무 군락이 있다고 합니다. 그곳에 사는 동백나무는 꽃을 피우지 못한다고 합니다. 워낙 습하고 어둡고 외지고 척박한 땅이기 때문입니다. 꽃도 없고 열매도 없습니다. 고독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멸절의 때를 기다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살고 죽으며 죽고 다시 태어나는 순환이 그 동백나무 숲에서는 불가능한 것인지요. 그 동백나무에게는 우주가 무너지는 일도 제 고독과 멸절보다 못한 일일는지요.
아버지는 탁자 위에 놓인 동백꽃을 들고 조심스레 꽃잎 한 장을 떼어냈습니다. 선혈 같은 꽃잎을 탁자 한쪽에 내려놓은 후 다시 꽃잎을 뗐습니다. 그렇게 떼서 놓인 꽃잎은 모두 다섯 장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이어 꽃잎보다 작은 꽃받침 다섯 개를 하나씩하나씩 떼어 놓았습니다. 아버지의 손안에는 진한 노란색 꽃술만 남아 있었습니다. 암술 하나를 수술이 감싼 모양이었습니다. 꽃술을 꽃잎 옆에 나란히 놓은 다음 아버지는 보리차 한 잔을 달라고 했습니다. 데운 보리차 한 잔을 다 마시도록 아버지는 말이 없었습니다. 저는 식탁 옆에 선 채로 남은 보리차를 홀짝였습니다.
알 수 없어…….
아버지는 꽃 조각들을 한 손으로 쓸어 쥐고 욕실로 가 변기에 던져 넣고는 물을 내려버렸습니다. 탁자 위에 남은 꽃술 몇 개를 손끝으로 끌어 모으는데 손가락 끝에 노란 꽃가루가 묻어났습니다. 저는 검지 끝을 가만히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고는 손끝에 후, 연한 숨을 불어 넣었습니다. 무얼 기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작은 줄기처럼 뻗은 검지 끝에서 노란 꽃가루는 꽃눈으로 맺혀 꽃망울로 자라더니 작은 홑동백 꽃으로 피어났습니다. 활짝 피는가 싶더니 꽃은 이내 툭 떨어져 내렸습니다. 피고 지고 피고 지며 동백꽃은 손끝에서 속절없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무수한 꽃이 져 내리고서야 검지 끝은 깨끗해졌습니다. 아버지가 닫고 들어간 방문 앞에서 잠시 주저하다가 저는 제 방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후 아버지는 동백꽃을 주워 오지 않았습니다. 그저 맨션 앞 화단에서 피고 지는 꽃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네. 선생님. 선생님 말씀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아무리 아버지의 뼈와 살을 들추고 밑바닥까지 들여다본들 알 수 없겠지요. 낮은 방문에 허리띠를 말아 걸고 그 속으로 목을 집어넣은 뒤 서서히 조이며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저는 모릅니다. 키보다 낮은 자리에서 제 목을 조일 만큼 무거웠던 아버지의 고독은 무엇이었을까요. 사타구니 사이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던 손이 갈망하던 건 생에 대한 열망이 아닌가요. 왜 그 마음으로는 살 수 없었던 것일까요. 늙은 남자의 고샅 사이에서 얻을 수 있는 건 휘발되는 욕망과 지루한 자기혐오뿐인가요.
아버지는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날 그렇게 떠나기로 약속되어 있었던 사람처럼 사라졌습니다. 문상객들이 제게 묻더군요. 정말 몰랐느냐고. 어떤 신호도 없었느냐고. 네. 유서는 없었습니다. 안방의 장롱과 서랍장, 거실장까지 뒤집고 엎어 가며 찾아보았지만 없었습니다. 네. 유서를 남기지 않고 떠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건 들어 압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유서가 없다고 해서 모든 죽음이 즉흥으로 행해지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알고요. 아버지는 즉흥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가슴과 두 발에 돌을 얹고 걷는 사람처럼 생각과 움직임은 무겁고 신중했습니다. 오히려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한 사람은 저였습니다. 선생님. 아버지는 올해 일흔입니다. 일흔인 남자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건 흔한 일인지요. 아니요. 정신과 치료를 받은 적은 없습니다. 잠이 적은 편이었지만 불면증 치료를 받은 적은 없는 걸로 압니다. 오히려 밤 운행이 더 좋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밤에 홀로 깨어 있음을 즐겼습니다. 한갓진 길에 차를 세우고 라디오의 볼륨을 최대한 줄인 후 손님을 기다리며 택시 안에 홀로 있는 그 시간이 주는 안온함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어떻게 아냐고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방구석까지 밀려든 볕으로 그나마 서향집에 온기가 도는 늦은 오후였습니다. 노크 소리에 돌아보니 아버지가 낡은 영업용 전대를 쥔 채 제 방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탁상시계를 보니 밤 운행을 나갈 시간이었습니다. 문단속 잔소리겠거니 하며 저는 앉은 채로 회전의자를 돌리고는 몸을 일으켰습니다. 현관으로 나간 아버지가 신발을 다 신기를 기다리는데 아버지가 불쑥 말을 뱉었습니다.
라디오에 음악은 어떻게 신청하는 거니? 엽서로는 안 받는 거 같은데.
일상성을 벗어난 질문에 저는 잠시 머뭇거리다 심드렁하게 대답했습니다.
휴대폰 어플이나 문자로 신청하면 될 거예요.
아버지는 택시 운행을 나갈 때마다 라디오 채널을 클래식 FM에 맞췄습니다. 클래식을 좋아해서라기보다는 말이 가장 적은 채널이라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잠시 주저하던 아버지가 셔츠 앞주머니에서 구깃구깃한 종이를 꺼내 제게 내밀었습니다. 다시 듣고 싶은데.
아버지는 빈손으로 셔츠 주머니를 일없이 계속 매만졌습니다. 하필이면……. 저는 말끝을 흐렸습니다. 밤 운행을 나가는 이에게 레퀴엠이니 진혼곡이니 하는 듣기에 꺼림칙한 말을 굳이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저는 아버지가 나간 후 라디오 어플을 깔고 신청곡을 유료 문자로 보냈습니다. 단문은 50원, 장문은 100원이더군요. 딱히 쓸 말이 없어 신청곡만 보냈습니다. 마지막 곡입니다. 자비로운 주님, 피에 예수입니다. 남자 진행자는 느린 단조의 목소리였고 쉼표를 길게 써서 그런지 말과 말이 달라붙지 않았습니다. 늦은 오후에 썩 잘 어울리는 목소리라고 생각했어요.
선생님. 저의 이런 말들이 어떤 의미가 있나요, 무슨 소용이 있나요. 선생님은 아버지에 대한 말이라면 어떤 것도 좋다고 하셨지만요. 대신 어떤 기억도, 어떤 일도 미리 체에 거르지 말고 말로 뱉으라고 하셨어요. 불순물이 있어도 괜찮다고 하셨어요. 사금파리 한 조각 없이 불순물뿐이면 어떡하죠. 온통 가라앉아 체에 무엇 하나 남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개요? 아…… 제가 개 이야기도 했던가요. 그 개는…… 제가 풀어 주었습니다. 아버지도 알았을 겁니다. 도망갔다면 목줄을 매단 채 갔을 테니까요. 개는 슬금슬금 뒷걸음치며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살아 있다면 들개가 되었겠지요. 왜…… 왜냐고 물으셨나요. 글쎄요…… 측은지심이었을지도요. 아버지는 아니라고 했지만요.


며칠 전이었습니다. 고단한 이의 발걸음처럼 지척지척 부슬비가 내리는 오후였습니다. 짙어진 풍경의 농도에 빨래를 걷던 손을 멈추고 베란다 너머를 내다보았습니다. 물 먹은 산은 상처 입은 한 마리 짐승 같았습니다. 저는 빨래를 내려놓고 맨발에 슬리퍼를 꿰어 신고는 문을 열고 나갔습니다. 공용 현관에 이르러서야 우산 없이 빈손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이런 비가 더 깊이 젖는다는 걸 알지만 철제 난간을 짚고 산으로 이어지는 비탈길을 올랐습니다. 손에 묻은 녹물을 옷자락에 닦아내며 난간 끝에 둘둘 묶인 목줄을 보았습니다. 난간을 두세 번 휘감은 목줄은 아래로 축 늘어져 맥없이 흔들렸습니다. 저는 다그쳐 오르며 팔을 뻗어 목줄을 붙잡았습니다. 빗물이 스민 슬리퍼 안에서 발이 미끄러져 한쪽 무릎을 시멘트 바닥에 찧으면서도 허공에 치켜 든 목줄만큼은 놓치지 않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던 걸까요. 목줄에 목이 조인 흰 개가 혀를 길게 늘어뜨린 채 고개를 외로 떨구고 있었습니다. 조인 목줄 아래 길게 늘어진 목은 숨조차 지나갈 길이 없어 보였습니다. 한쪽 무릎마저 바닥에 꿇고 두 손으로 흰 개의 사체를 받아 올리려는데, 선생님. 제 손은 빈손이었습니다. 개는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벌떡 일어나 난간의 목줄을 풀어내려 했지만 줄은 이리저리 더 꼬일 뿐이었습니다. 간신히 푼 줄을 손에 들고 저는 주저 없이 산으로 난 길로 향했습니다. 뒷걸음으로 도망치면서도 끝내 제게서 눈을 떼지 않았던 그 개의 겁먹은 눈동자가 마지막으로 사라진 덤불숲에는 작고 연한 것이 들어앉은 흔적이 있었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들이 가진 원형의 모습. 발아와 발육이 미처 시작되지 않은 태초의 둥근 씨앗. 왜 겁먹은 것들은 몸을 말아 제 안으로 숨어드는 것일까요. 네 발을 끌어 모아 배와 가슴 아래 밀어 넣고 목을 바짝 당겨 원형으로 돌아가던 흰 개의 자리에 모로 웅크리고 누운 아버지. 아버지의 등 위로 드러난 앙상한 척추는 마른 나무줄기처럼 보였습니다. 덤불 속으로 팔을 뻗어 오목한 자리에 손을 대보았지만 자리는 축축했고 식은 지 오래였습니다. 덤불 가시에 긁힌 손등의 생채기에 선홍색 핏물이 맺혔습니다. 손등을 입으로 가져가 혀로 핏물을 핥고는 덤불을 빠져나왔습니다.
안방 문손잡이에 허리띠를 걸어 만든 고리에 목을 걸고 앉은 아버지는 몹시 평온해 보였습니다. 손바닥을 내보인 두 팔은 허벅지 양옆에 놓여 있었고 두 다리는 발끝이 벌어져 골반의 긴장까지 완전히 풀린 상태였습니다. 아버지의 오른쪽 코에서 흐른 피는 퇴색한 꽃잎처럼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팍 위에 점점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저는 아버지 앞에 주저앉아 눈을 맞췄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보았지만 아버지는 이미 먼 곳을 보고 있었습니다. 얇은 쌍꺼풀 아래 반쯤 감긴 눈을 마저 쓸어 감긴 후 아버지의 인중으로 손을 내려 검지에 핏물을 묻혔습니다. 색은 짙었고 되직했습니다. 저는 피 묻은 검지를 입술 가까이 대고 후, 연한 숨을 불어 넣었습니다.
이불 홑청을 넓게 펴 덮은 듯 부슬비는 산속을 채우며 내려앉았습니다. 슬리퍼를 신은 맨발에 착 달라붙은 젖은 낙엽을 떼어내려다 그만두었습니다. 오르막 산길은 온통 낙엽 천지였습니다. 저는 눈썹 위로 흘러내린 앞머리를 걷어내며 나무 기둥을 짚고 서서 입을 달싹였습니다.
…… 개야.
알지 못하니, 이름으로 부르지 못하고 뭉뚱그립니다. 어느 시인이 말한 호명의 의미를 뒤늦게 안들 소용없지만 그래도 추려내듯 부릅니다.
개야.
오르막과 내리막이 너울처럼 반복되는 산길 모퉁이에서 이쪽과 저쪽을 번갈아 봅니다. 발바닥에서 차오른 습기는 발목까지 차올라 바짓단을 완전히 적셨습니다.
상수리나무 두세 그루가 뒤엉킨 산그늘을 헤치는데 발밑으로 무언가 물컹 밟혔고 힘이 다른 발에 쏠리며 균형을 잃었습니다. 떠밀린 듯 몸이 뒤로 무너지며 나무 둥치에 등을 부딪치며 주저앉았습니다. 더는 밀리지 않으려고 가지를 붙들고 버티는데 눈이 마주쳤습니다. 관목 뒤에 몸을 숨기고 가지 사이로 내다보는 겁먹은 눈이었습니다. 더는 흰 개라 부를 수 없이 누런 흙물이 든 몸은 반 토막으로 야위어 있었고 비에 젖은 목줄은 목을 한 줌도 안 되게 옭아매고 있었습니다. 원령처럼 서서 개는 제게서 눈을 떼지 않았습니다. 저는 둥치에 박힌 몸을 일으키며 빈 두 손을 내어 보였습니다. 아버지가 난간에 묶인 개를 발견한 날에도 이렇게 손을 내보였겠지요. 부르면 의미가 되는 이름으로…….
아버지.
두 손을 내보인 채로 저는 아버지를 호명했습니다. 그리고 절뚝 걸음으로 개에게 다가갔습니다. 개는 한두 발짝 물러서면서도 도망치지는 않았습니다.
…… 아버지.
올무 같은 목줄만 벗겨 주고 싶었습니다. 저 목줄만 벗겨낸다면 남은 생을 들개로 산다 해도 걱정이 없겠습니다.


해가 집니다.
선생님. …… 괜찮다면 잠깐 라디오를 틀어도 될까요? 아뇨, 괜찮아요. 휴대폰으로도 들을 수 있어요. 네. 그 노래요. 꼭 한 번은 듣고 싶은데 혼자서는 듣지 못하겠어요. 이렇게 하루해가 넘어갈 때면 더더욱요. 같이 들어 주신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해요. 마지막 곡으로 신청했으니 곧 나올 겁니다.


아, 음악이 나옵니다…… 바로 이 노래입니다. ■











강이라
작가소개 / 강이라 

2012년 신라문학대상 소설 당선. 2016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2019년 현진건 문학상 추천작 수상. 소설집 『볼리비아 우표』, 앤솔러지 『나, 거기 살아』, 『당신의 가장 중심』, 『작은 것들』.

   《문장웹진 2022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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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음 없이

좋아하는 마음 없이 김지연 안지는 이른 결혼을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아니, 그걸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이혼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안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그때 이혼한 일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늘 그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여러 말들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은 안지의 비밀은 아니었지만 먼저 나서서 밝히지도 않았다. 어릴 때 안지는 무척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그런 표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속해야 하는 집단에서 튀지 않는 사람, 아주 평균적인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 찬반투표를 할 때면 눈치를 보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서 좋아하고 친구의 것과 비슷한 브랜드의 신발을 사서 신었다. 친구들이 싫어하는 선생을 따라서 싫어했다. 사실 안지는 그 선생에게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다가 술술 흘러나온 그 선생에 대한 욕을 듣고 재빨리 노선을 바꿔 함께 욕을 했다. 한동안 안지는 수학 시간마다 왜 애들은 저 선생을 싫어할까? 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더 열심히 선생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수학을 가르친다는 점만 빼면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쉽게 답할 수 없는 내용을 골리듯 물어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생들한테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뭔가 잘못 알고 섣불리 화를 냈을 때, 그러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선생들은 그러게 헷갈릴 만한 짓을 왜 하고 다니느냐고 도리어 짜증을 부렸는데 그 선생은 재빨리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알았어. 미안해. 가끔 안지는 머릿속으로 그 목소리를 재생해 보곤 했다. 그 때문에 선생이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싫어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나?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안지는 대학에 갔고 연애를 했고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 결혼도 했다. 아주 평균적인 삶이었다. 조금씩 빠르기도 했다. 조바심이 나 있었으므로. 자신도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식도 올리기 전 임신을 해 낳은 아이가 막 돌을 지난 참이었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계속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낙태를 밀어붙이지 않은 것을, 시간을 끌다가 영영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을, 어떤 결단력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새로운 여자가 생겼을 때는 안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겨우 육 개월을 만났을 뿐

  • 관리자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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