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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형식 (1)

  • 작성일 2023-04-01
  • 조회수 2,796

현장비평

2023년 비평연재는 두 명의 평론가가 3회씩 연재하며, ‘시대와 작품을 가로지르는 비평가의 눈’이라는 주제로 보다 확장된 문제의식을 펼쳐 보인다.

상실의 형식 (1)

김요섭

할아버지의 죽음은 작은 기억의 조각들로만 나에게 전해졌다. 어린 시절 내가 할아버지에 대해서 알고 있던 사실은 그가 똑똑한 사람이었다는 것과 이른 나이에 돌아가셨다는 것, 아버지와 다른 어른들이 조심스레 내비치던 그리움과 원망 정도였다. 내가 군대에 입대했을 무렵에야 아버지는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하나를 해주셨다. 군복무 중 갑작스레 고열로 입원한 자신을 살리기 위해 할아버지가 어떤 이들을 찾아가서 한 부탁에 대해서였다. 70년대 초 열악한 군대의 의료 환경에서 초임 부사관이 제때 좋은 치료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할아버지가 누군가에게 했던 부탁 때문이라고 아버지는 믿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찾아간 이가 누구였는지, 그가 어떻게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던 젊은 하사를 좋은 병원으로 보내 줄 수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내가 들었던 우리 가족의 역사는 가난한 시골 농부 집안의 이야기였을 뿐이니까. 어른들이 잘 이야기하지 않던 할아버지를 제외하면 말이다. 내가 서른이 넘은 뒤에야 할아버지가 시골 마을의 공무원이었다는 것과 그 이상을 목표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가 고독하게 세상을 떠난 방법에 대해서도.

둘째 작은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많이 원망했다. 할아버지가 어떤 일을 하기 위해 돈을 많이 필요로 했고, 자식 중 노동을 할 수 있는 아이들은 너무나 일찍 일을 배워야 했다. 둘째 작은아버지는 집을 떠나 일을 배웠다고 했다. 아직 학교에서의 배움이 한참 남았던 나이에. 양주에서 태어난 가난한 일곱 남매가 어떻게 흩어지게 되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단지 내가 어릴 때는 경기도의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친척들이 명절이 되면 의정부의 우리 집으로 모이는 장면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뿐이다. 아버지의 고향에는 먼 친척들만 살고 있었다. 나도 내 사촌들도 할아버지를 보지 못했으므로 그의 부재를 의식할 일이 없었다. 아이들의 궁금증을 유발하기에는 그의 빈자리는 가족의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재였다. 다만 어른들은 아이에게 들려주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을 자주 했다. 정치는 하면 안 되는 일이라고. 내가 초등학교 4학년생이었을 무렵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장례식에서도 그 말이 들려왔다. 마치 그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대신 전해 주듯이. 할아버지가 왜 그런 꿈을 꾸었고 왜 그토록 좌절했는지, 그 절박함의 이유를 여전히 알지 못한다. 단지 할아버지의 고향 마을에서 전쟁 중에 여러 사람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로 가늠할 수 있을 뿐이다.

할아버지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었을 무렵에 한 외국 학자가 자기 외조부의 과거를 추적하는 책을 읽었다. 영국의 법학자 필립 샌즈는 ?인간의 정의는 어떻게 탄생했는가?에서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외할아버지, 레온 부츠홀트가 숨겨 놓았던 기억의 단서를 쫓는다. 외할아버지가 전쟁 중 가족과 떨어져 있게 되었던 과거를 되짚어 가는 샌즈의 여정은 레온의 고향인 리비우에서 태어난 또 다른 이들의 이야기와 교차하기 시작한다. 홀로코스트에 맞서기 위한 (각자 다른) 국제법을 입안했던 폴란드의 두 법률가, 라파엘 렘킨과 라우터파히트의 기억과 얽히면서 외할아버지인 레온의 비밀은 그가 만난 적도 없던 이들의 삶을 이해하게 하는 열쇠가 된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이야기지만, 홀로코스트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닌 이 기억의 추격극을 읽으면서 할아버지를 생각했다. 내가 거의 알지 못하는, 하지만 작은 기억의 단서들을 쥐고 있던 그 죽음에 대해. 그의 이야기를 비슷한 방식으로 써볼 수 있지 않을까, 가족의 기억을 확인하기 위해 그들의 시대와 교차해 가며 정리하는 이야기의 방식 말이다. 내가 한국에 몇 없는 제노사이드 문학 연구자라는 사실이 기이한 운명처럼 느껴졌다.

샌즈의 책을 읽으며 느꼈던 운명에 대한 자각은 단순한 착각일 수도 있다. 샌즈와 달리 나는 할아버지의 과거를 거의 알지 못한다. 할아버지는 내 추측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정치를 꿈꿨을 수도 있다. 나에게는 그 기억의 작은 조각만 있다. 그리고 그 순서도 알지 못한 채로 어디선가 보았던 형태를 따라 배열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언젠가는 그 기억들이 나를 찾아오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 한 가지 새삼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왜 나는 필립 샌즈의 책과 할아버지의 과거를 겹쳐 보았을까? 전혀 다른 시대, 다른 지역, 다른 이들의 일인데 말이다. 그건 아마도 그가 쓴 기억의 형식을 가져와 할아버지의 이야기에 겹쳐 놓는다면 비어 있는 틈이 메꿔지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기억을 직조하는 형식은 때로는 기억의 내용보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일라이다 아스만은 기억 양식의 차이가 사회적 정체성과 현실의 해석, 가치 정당화의 과정을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같은 유형의 기억이라 하더라도 어떤 맥락들과 결합하느냐에 따라 해석 방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아스만은 민족공동체를 위한 희생자를 기리는 의례가 영국적 기억 양식에서는 민중이 주체가 되는 가족 축제로서 가족적 가치를 재생산하지만, 프랑스의 기억 양식에서는 교회 관리들이 주도한 거대한 행사가 거행되면서 애국주의를 전파했던 사례를 비교한다.1) 떠나간 이들에 대한 기억의 의미가 형식에 따라 달라진다. 내가 샌즈의 책에서 빌려와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에 부여하려고 했던 형식은 그의 죽음을 비극적 역사와 연결한다. 할아버지의 과거를 감싸는 이 낯선 형식은 그때의 예감처럼 나의 일에 새로운 의미와 의무를 부여할지도 모른다. 아직 그 비밀의 한 귀퉁이조차 보지 못한 기억이지만, 어떤 형식을 부여할 것이냐는 생각만으로도 많은 가능성이 열리고 또 닫힌다. 이 글에서 나는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파고들지 않을 것이다. 내 관심은 기억의 형식, 특히 떠나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감싸는 상실의 형식에 있다.


1) 일라이다 아스만, 변학수·채연숙 옮김, 『기억의 공간』, 그린비, 2011, 109~110쪽.


상실은 모두의 경험이다. 부처를 찾아와 자신의 아이를 살려 달라 부탁했던 한 여인의 이야기가 있다. 부처는 그를 돕겠다고 답하고는 어떤 사랑하는 이도 잃은 적 없는 가족을 찾아가서는 한 줌의 겨자씨를 얻어오라고 한다. 여인은 부처의 말대로 겨자씨를 구하기 위해 돌아다녔지만, 그가 얻은 것은 모두가 상실을 경험했다는 당연한 깨달음뿐이다. 아마도 ?법구경?에서 읽었을 이 이야기에는 인간은 상실을 피할 수 없다는 너무나 자명한 진리가 담겨 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기이한 역설도 함께 보여준다. 죽음과 상실은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타인의 상실을 우리가 너무 자주 잊고는 한다는 사실이다. 죽음이 모든 이에게 찾아온다는 사실을 여인이 모를 리 없다. 단지 타인의 상실에 그토록 가까이 다가가는 일이 처음이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는 알았을 것이다. 누구나 상실을 경험하지만, 모두가 다른 형식을 통해 그 상실을 기억한다는 사실을. 이제부터 나는 서로 다른 상실의 형식들과 만나려고 한다.


2


기억은 그 자체가 하나의 형식이다. 인간의 두뇌는 감각된 경험의 작은 부분만 인지할 수 있다. 인지된 정보는 단기 기억과 장기 기억으로 이행되는 과정을 거쳐 아주 작은 부분만 남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정리된 기억조차 그대로 남겨지지 않는다. 기억은 여러 조각으로 분산되었다가 회상 과정을 통해 인과적으로 재배열된다. 기억을 구성하는 인과는 대부분 시간의 순서를 따르게 된다. 이러한 기억의 형식에 우리는 매우 익숙하다. 사건을 시간에 따라 구조화하는 방식, 즉 서사의 가장 기본적인 정의2)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억의 형식으로서 서사는 하나의 고정된 형태를 가지지 않는다. 어떤 서사에서는 시간성과 인과성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구조조차 흔들면서도 여전히 서사로 남는다. 그래서 서사라는 형식은 지금까지도 새롭게 탐구되고 있다. 그런데 서사의 다른 가능성을 열어 보는 일이 상실의 기억에도 새로운 형식을 부여하게 해줄까? 민병훈의 신작 장편을 읽으며 가졌던 질문이다. 서사를 해체하듯 다채롭게 변형해 온 그가 상실의 기억을 처음으로 털어놓으려 했기 때문이다.

민병훈의 장편소설 『달력 뒤에 쓴 유서』를 구성하는 1부와 2부가 매우 이질적으로 보인다. 자살한 아버지의 기억과 마주하기 위해 소설을 쓰기 시작한 소설가 ‘나(민병훈)’의 시점을 보여주는 1부와, ‘나’와 같은 사건을 겪었으나 기억의 동일성을 확신할 수 없는 ‘그녀’, 어머니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2부로 나뉘고 있다. 소설의 1부는 전통적 서사 형식을 의심하고 해체해 온 민병훈의 전작들에서 연속된 작업처럼 읽힌다. 아버지의 죽음을(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은 전작인 「겨울에 대한 감각」에서 이미 밝힌 바 있지만) 소설 쓰기를 통해 이해하고 싶어 하는 작가는 고향으로 돌아가 그 사건이 있었던 장소와 그곳의 사람들과 만난다. 소설가인 그는 계속해서 의심한다. 과연 자신의 글을 통해 상실의 기억을 쓸 수 있는지, 그리고 그렇게 쓰는 것이 정당한 것인지.


나는 방금 위의 문장들에서 아버지에 대한 장면을 소설적으로 구성하기 위해 고민하다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어떤 객관성을 떠올리며 머뭇거렸다. 다분히 신파적인 문장들의 흐름이, 의도하지 않은 읽기를 유도하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누군가의 입장에, 감정적으로 가닿기를 바라, 거추장스러운 단어와, 불필요한 진술로, 기억을 꾸미고, 나도 모르게 관습화된,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염려스러웠다. 그렇다면 그것들을 경계하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일까.3)


그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소설로 구성하려고 할 때 관습화된 글쓰기가 개입하는 것을 우려한다. 평론가 박혜진의 말처럼 민병훈 소설의 문법은 “강박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불연속성”4)이다. 그의 단편 「겨울에 대한 감각」에서는 소나무와 백조, 겨울과 가족, 이국 떠나는 일과 아버지에 대한 기억 등 가깝지는 않지만 닿을 수 있는 이미지들 사이를 도약하듯이 뛰어넘어 가면서 연결된다. 민병훈 소설의 서사는 불연속적인 단절과 그 간극을 연결하는 감각의 도약을 통해 서술된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뚜렷한 사건이 있는 작품들도 마찬가지다. 그의 소설은 충분히 이야기하는 듯 보일 때조차 이해의 곤경을 의식하고 있다. 그가 자신이 문장을 구성하는 방식이라고 말했던 “철저히 내게서 기인한 것”(76), 즉 감각은 단독적인 고유한 것이어서 타인에게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단편집 『겨울에 대한 감각』에 수록된 작품들5)이 민병훈의 감각론을 구성하는 작업이었듯이 그의 글쓰기는 자신만의 방법을 분명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아버지의 이야기를 쓰는 과정에서는 자신의 글쓰기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그를 계속 괴롭힌다.


2) H. 포터 애벗, 우찬제 외 옮김, 『서사학 강의』, 문학과지성사, 2010, 22~23쪽.
3) 민병훈, 『달력 뒤에 쓴 유서』, 민음사, 2023, 33쪽. 이후 인용 시 괄호 안에 쪽수만 표기.
4) 박혜진, 「감각을 위한 논리」, 『겨울에 대한 감각』, 자음과모음, 2022, 116쪽.
5) 이 책에 수록된 3편의 단편 「겨울에 대한 감각」과 「벌목에 대한 감각」 그리고 「불안에 대한 감각」 모두 감각의 논리를 통한 소설 쓰기의 문제에 깊이 천착하고 있다.



나는 철저히 내게서 기인한 것들로만 문장을 구성하려 하는데, 이 작업을 진행하는 어떤 순간에는 너무 힘든 나머지, 다른 방식의 문장을 바랄 때도 있었다. 사명감, 책임감, 정치, 의욕이 담긴 것들.(76)


‘사명감, 책임감, 정치, 의욕’이라는 말이 어떤 서사의 형식을 지시하는 말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 문장이 민병훈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소설 쓰기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고등학생 시절 음독자살을 시도한 아버지를 발견하고 그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봐야 했던 기억 때문만은 아니다. 떠올리는 순간마다 새로운 괴로움을 만들어낼 수 있는 위험한 기억이지만, 단지 그 때문에 작가가 자신의 언어에서 도망치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문장만으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단편 「겨울에 대한 감각」에는 겨울의 감각을 자극하는 이미지들이 반복해서 교차한다. 그 이미지 중에는 1955년 겨울이 생일이었던 그의 아버지도 있다. 아버지의 생일인 “1955년 겨울”은 “2005년 여름”인 “아버지의 기일” 역시 떠오르게 한다.6) 「겨울에 대한 감각」을 직조하는 이미지 중 상당수는 『달력 뒤에 쓴 유서』에서도 사건과 인물, 장면으로 나타난다. 어머니와의 일본 여행, 이국을 걷던 중 돌발적으로 떠오른 가족의 기억, 썰매를 타던 어린 시절 무모하게 빙벽을 오른 아버지를 보며 느꼈던 불안의 순간까지. 「겨울에 대한 감각」에서 불연속적으로 도약하고 단절되기도 하는 이미지의 무리는 『달력 뒤에 쓴 유서』에서는 다시 그리고 다르게 쓰인다. 그렇다면 민병훈은 왜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시 써야 했을까? 그가 꾸준히 쌓아올려 온 자신의 문장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불안감을 견디면서까지 말이다. 이는 『달력 뒤에 쓴 유서』를 나누는 이질적인 분할선, 즉 어머니의 시선으로 쓴 2부가 있어야 했던 이유와 관련되어 있다.


6) 민병훈, 「겨울에 대한 감각」, 『겨울에 대한 감각』, 자음과모음, 2022, 18쪽.



3


“체험을 있는 그대로 쓰는 일은 가능하다. 그것이 나만의 체험이라면. 그리고 그것을 완벽하게 기억할 수 있다면.”(29~30)


체험을 그대로 쓰는 일이 가능하다는 말 뒤에는 두 가지 단서 조항이 따라붙는다. “그것이 나만의 체험”이어야 하고, 그리고 이를 “완벽하게 기억할 수 있다면” 있는 그대로 쓸 수 있다. 그렇다면 체험을 그대로 쓸 수 없는 이유는 그 일을 완벽하게 기억할 수 없고 또 자신만의 체험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죽음은 잊히기 어려운 기억이다. 그러나 완벽하게 기억될 수도 없다. 그가 알지 못하는 여러 이유와 장면들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그 기억이 너무나 쉽게 조각나서 퍼져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국에서 내리는 눈은 “눈송이가 아닌 이름 모를 도형”이 되어 흩날리고 아버지가 ‘나’에게 주었던 “삼각형과 사각형, 원통 등의 여러 모양의 장난감이 담긴 상자”(124~125)를 떠오르게 한다. 기억은 고정되지 않고 자주 다른 장면들과 결합한다. 그리고 상실의 기억인 “죽음은 섣부른 링크 같아 모든 걸 연결”(39)하기에 삶의 순간에 끝없이 침투한다. 그리고 그 기억은 죽음을 경험한 또 다른 이, 어머니의 삶에도 침투하려고 한다.


어머니는 소설가인 아들의 문장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계속 아들에게 질문한다. 왜 다른 이들에게 이해받는 소설을 쓸 수 없는 것인지. 그리고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은 이제 가족의 일을 소설로 만들려고 한다. 소설이라는 상실의 형식 위에서 모자의 관계는 비대칭적이다. 아들은 쓴다. 어머니는 이해할 수 없다. 어머니는 쓸 수 없다. 그러므로 아들은 읽을 수 없다. 소설가가 자신의 기억을 소설로 쓰게 되면, 아버지의 죽음은 그의 문장만으로 남겨질 것이다. 목소리가 사라진 뒤에도 문장은 사라지지 않고 영원처럼 견고한 형식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소설가는 모든 것과 연결되려고 하는 기억을 자신의 문장으로 써야 하지만, 자신의 문장만으로는 쓸 수 없다는 곤경과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의 요청처럼 다른 이들도 이해할 수 있는 관습적인 문장들 뒤로 물러서야 하는가 계속 고민한다. 그러나 그는 그 길을 끝내 거부한다. 그리고 대신 그는 기억의 거리를 방랑하기로 한다.

『달력 뒤에 쓴 유서』에서 ‘나’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소설을 쓰기 위해서 고향을 찾아간다. 그는 자신의 기억과 연관된 장소에서 여러 사람을 만난다. 그들과의 대화는 대화체 문장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나’의 대답을 포함하는 대신 그들이 하는 말들만이 페이지를 빽빽하게 채우고 있다. 그 말들 사이에는 오래전 죽음의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경찰관이 ‘나’에게 던졌던 질문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들의 말은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죽음의 기억을 이야기한다. 그중에는 경찰관의 말처럼 ‘나’의 외부에서 사실을 구성하려는 시도도 있다. ‘나’는 그들의 말에 반박하지도 답하지도 않는다. 그들이 말하는 기억은 각자의 것이지만 다시 ‘나’의 문장으로 이어지는 조각이 되어 묶인다. 죽음의 기억은 그 만남과 그 장소를 찾아가는 방황 없이도 이야기될 수 있다. 오히려 교차하는 말들과 거리를 누비는 걸음에 기억의 형식은 더욱 많은 가지를 쳐가며 혼란스럽게 펼쳐진다.

박혜진은 작가와 독자의 관계를 일종의 좌표계로 설명한다. 그는 소설의 의미망을 시소게임으로 비유한다. 작가와 독자가 함께 앉은 시소에서 작가는 내려앉는 깊이에 따라 시소가 올라가는 높이가 결정되지만, 시소의 다른 한쪽 끝에서 볼 수 있는 거리를 결정하는 것은 독자다. 깊이와 거리, X와 Y축에 의해 의미의 형태가 만들어진다는 것이 전통적 문학성의 논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민병훈의 소설은 이러한 문학성의 형식에서 이탈해서 깊이, 즉 이야기의 구성에 대한 작가적 지배력의 많은 부분을 내려놓기에 작가와 독자를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라 함께 방황하는 관계”7)로 재구성한다. 그가 불연속적인 문장을 통해서 해체하려고 했던 좌표계를『달력 뒤에 쓴 유서』의 ‘나’가 방황하는 장소와 비교해 보자.

좌표는 세계를 압축하고 질서를 부여한다. 공간을 측정하고 좌표라는 형식을 부여한 지도는 세계를 정해진 목적에 따라 단순화한다. 정치학자 제임스 C. 스콧이 가독성 작업이라고 부른 지도상의 단순화는 세계를 하나의 형식 안에 가두어 설명함으로써 공통의 형식, 즉 체제를 만들어내는 힘이다.8) 즉 지도라는 형식은 효과적인 압축이지만, 장소에 대한 다른 시각과 목소리를 가진 이들의 힘을 빼앗는다. 반면에 『달력 뒤에 쓴 유서』의 ‘나’는 기억의 장소를 계속 방황하며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작가는 장소와 목소리에 하나의 질서를 부여하지 않는다. 대신 하나의 규칙과 질서를 통해 기억을 종합하려는 시도를 계속 의심한다. 기억의 장소는 지도의 좌표처럼 단일한 질서를 끝내 가지지 못한다. 기억의 형식은 계속 경합하면서도 변화하게 될 사건으로 남겨질 뿐이다. 그래서 작가는 “이 글은 완성될 수 없을 것”이고 “훗날 더 자세히 쓰거나, 생략될 뿐”(104)이라 말한다. 그의 문장 위에서 좌표는 언제나 잠정적인 것이며, 다시 재구성될 무언가일 뿐이다. 그는 방황하는 기억 자체를 하나의 소설적 형식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형식은 다른 기억을 가진 이, 어머니의 시선을 보여주는 2부로 넘어가지 않고 단절된다.


7) 박혜진, 위의 책, 112쪽.
8) 제임스 C. 스콧, 전상인 옮김,『국가처럼 보기』, 에코리브르, 2010, 20쪽.


『달력 뒤에 쓴 유서』의 2부는 1부에서 ‘나’가 쓰기를 주저했던 형식처럼 보인다. 관습적 서사의 형식이라는 진부한 표현으로 2부의 문장들을 설명하더라도 그리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이 의도된 단절과 불연속의 결과물은 ‘나’의 것이 아니다. 소설의 2부는 오로지 ‘어머니’의 것이다. 어머니가 이해할 수 있는 문장, 아들의 문장을 이해하지 않아도 말할 수 있는 문장, 그리고 아들이 아닌 자신의 기억을 담는 문장이다. 이 문장으로 쌓아올린 형식에서 어머니가 아들의 소설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는 중요하지 않다. 형식 사이의 단절은 이제부터 그녀가 “그의 문장으로 무언가를 이해하고 극복하지 않아도 된다”(152)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어머니의 서사가 작가인 아들의 것이 아닌 형식으로 쓰이면서 기억에 대한 비대칭적 관계는 깨진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기억과 마주할 것이고, 그 공간을 열어 놓는 일이 오직 혼자만이 경험한 일이 아닌 그 상실의 형식을 민병훈이 자신의 문장으로 풀어내는 방법이다.

『달력 뒤에 쓴 유서』에서 상실의 형식은 하나가 아니다. 소설의 세계는 하나의 기억으로 통합되지 않는다. 오히려 각자가 경험한 상실의 형식‘들’이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점차 틈을 넓혀 간다. 영문학자 켈로라인 레빈은 문학에서 형식과 형식주의가 배제와 단순화의 권력에 복무해 왔다는 비판을 반박하면서, 오히려 문학은 형식들이 경합하게 함으로써 그 폐쇄성과 맞설 수 있다고 주장한다.49) 온전히 자신만의 기억일 수 없는 그 상실과 마주할 수 있는 열려 있는 서사는 하나의 형식이 아니라 그 형식들이 만나는 자리에서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고집스레 자기 세계를 쌓아올린 이 작가가 그 만남을 통해 어떤 새로운 자기의 문장을 만들어낼 것인가? 그가 어떤 새로운 문장을 보낼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은 소설에 대한 믿음”(126)을 전해 줄 것이다.

9) 캐롤라인 레빈, 백준걸·황수경 옮김,『형식들』, 앨피, 2021, 105~1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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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자리, 돌봄과 공생의 겹 ― 안보윤, 「수미」 정우주 1. 오늘날 한국문학장에서 돌봄이 뜨거운 화두라는 사실을 말하는 일은 이제 익숙히 합의된 현상이 되었다. 다양한 양상으로 돌봄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서사들에서부터 아예 돌봄을 키워드로 내세운 비평 특집들까지, 지금 돌봄의 외연은 빠르게 팽창하는 중이다. 이렇듯 돌봄 담론이 확장되는 흐름에는 특히 팬데믹을 지나오며 돌봄 공백의 문제가 수면화 되었고, 누구든 서로 의존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취약성을 절실히 체감하게 된 배경이 존재한다. 당연하게도 돌봄은 기본적으로 주체와 타자, 제공자와 수혜자라는 복수의 행위자 사이에 일어나는 행위라는 점에서, 모두가 취약하므로 상호의존해야 한다는 공동체의 관계적 가치와 자연스럽게 접속한다. 그런데 근래의 논의에서는 오히려 돌봄을 보편적인 사회 윤리로 치환할 수 없는 무언가로 지칭하려는 움직임들이 포착되고 있다. 돌봄에서 연대나 윤리만을 찾기보다 그 속의 지난함과 불쾌함을 들춰내는 데 주목하는 작업1)이나, 상호적 돌봄을 이타성이나 선함이 아닌 미성숙한 두 존재가 “서로 폐를 끼치고 받는 위험한 관계”로 정의한 목소리2) 등은 모두 사회 구성원들에게 매끄럽게 적용되는 도덕적 가치로써 돌봄의 불가능성에 방점을 둔 시도들이다. 다만 이처럼 돌봄의 관계가 지닌 온정적이고 친밀한 성격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갈등과 착취의 요소에 천착하는 일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돌봄이 바로 그 ‘관계’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에 기반한다. 다시 말해 돌봄은 철저히 사회구조적으로 배치된 역학관계에 토대를 두고 수행된다. 팬데믹 시기 이전부터 돌봄 노동이 가정 내 여성에게 전가되고 사적으로 평가절하되는 젠더 편향의 측면을 지적받으며 비판적 담론이 형성되어 왔음을 상기해 본다면, 현시점에 ‘돌봄 제공자가 돌봄 수혜자보다 권력의 우위를 점한다’는 비대칭적 관계의 구조를 역설하는 것은 그간 축적되어 온 페미니즘적 돌봄 논의에 역행하는 입장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때 돌봄의 위태롭고 끈적끈적한 지점을 부각시켰던 앞선 비평들이 돌봄의 가치가 공동체적 연대의 이름으로 단순히 포섭되어서는 안 된다는 공통된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즉 “돌봄이 총체적 위기를 해결할 만병통치약처럼 쓰이진 않을지”5) 우려하는 관점들이 빠르게 제출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 속에서, 돌봄을 둘러싼 권력관계의 비대칭성을 구태여 강조하는 행위 역시 돌봄 개념의 다층적인 결을 구분하지 않은 채 끝없이 확대되는 양태를 경계하려는 의식적 흐름과 맞닿는다. 무엇보다 돌봄은 사회학과 밀접히 결합한 실천의 영역이므로 구체성과 현장성이 중시되지만, 한편으로 지속되는 팽창이 상징하듯 돌봄에 내재된 의존과 책임이 교차하는 원리는 인접 의제와의 유의미한 연결 가능성을 가진다.4) 그렇다면 이제 돌봄을 확장하되, ‘어떻게’ 확장시킬 것인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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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01
과학과 비과학 사이의 SF들 - 흄의 당구공과 천선란의 식물에 대하여

과학과 비과학 사이의 SF들 - 흄의 당구공과 천선란의 식물에 대하여 임지연 사고실험 SF의 매력 중 하나는 사고실험이다. SF에서 사용되는 외삽(外揷)은 과거와 현재의 익숙한 사실에 특정 가설을 투여하여 새로운 미래를 예측하는 방법이다. 외삽을 통해 SF는 새로운 사고를 펼쳐내며 새롭고 낯선 세계를 예측하거나 대안적 세계를 재현한다. 인간의 합리성 속에 끼어든 비합리성 혹은 이성의 끝에 존재하는 비이성은 어떻게 가능한가, 혹은 왜 불가능한가와 같은 문제를 SF는 다룬다. 나의 문제의식은 SF가 과학을 넘어서 비과학이 될 경우, 그것을 왜 좋은 SF라고 하지 않는가이다. 그리고 인간인 우리가 비인간 존재들을 어떻게 사유할 수 있을까의 문제다. 비인간 타자가 인간 바깥에 존재할 수 있는가? 그런 존재와 인간은 어떻게 조우하고 서로 인정할 것인가? SF는 사고실험을 통해 그것을 어떻게 가능하게 하는가? SF가 극단적인 사고실험을 함으로써 인간의 인식 능력 밖의 사물을 사유할 때, 과학 혹은 비과학은 어떤 효과를 가져올까? 나는 스페이스 오페라를 덜 과학적이고 더 대중적이어서 SF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기 어렵다는 생각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 덜 과학적이라는 말은 과학을 합리적 법칙으로 제한할 때 가능한 말이지만 말이다. SF의 하위 장르로 하드 SF, 소프트 SF와 같은 구분법을 받아들일 때의 효용성 위에서 가능한 말일 것이다. 아이작 아시모프와 같은 하드코어 SF 작가나 철학적인 SF 작가 테드 창 정도의 이름을 거론할 때, 충실하고 세련된 SF 독자의 덕성을 갖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덜 과학적이거나 덜 철학적인 SF가 새로운 SF의 가능성을 열어 줄지 모른다는 생각을 최근 하게 되었다. 과학이 인간 이성의 최고치를 가리키는 지표라면, 하드 SF는 오히려 휴머니즘에 충실한 이야기가 아닐까? 외계인, 로봇, 사건의 지평선 등 지구 밖 이야기가 지적 즐거움을 주는 이유는 인간을 넘어서는 비인간 존재들과의 낯선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학은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 가능한 지적 능력에 기대어 있다. 그렇다면 고도의 과학지식으로 무장한 SF는 얼마나 인간으로부터 멀어져 낯선 비인간을 상상하게 하는 걸까? 그것은 우리가 과학의 숭고한 낯설음에 대해 과도하게 신뢰했기 때문은 아닐까? 과학적이라는 수사는 너무 많은 관대함을 허용하는 건 아닐까? 어린 시절 열광했던 TV 시리즈 , 나 한낙원의 『금성탐험대』는 과학시대가 요구하는 과학소녀의 덕성을 부여했다. 그것들은 대체로 어린이 공상과학소설의 범주에 드는 장르물이었다. 그저 소녀였던 나는 과학시대의 임무를 떠맡아야 할 사명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보이기 위해 과학소녀처럼 그것들을 보고 읽었다. 그러나 그것도 곧 시들해졌는데, 중고등학생이 되자 그것이 공상과학이지 과학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더 세련된 문학소녀로 돌변했다. 문학소녀는 ‘공상’과학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법. 공상과학소설은 상상력보다 급이 떨어지는, 덜 과학적인, 말도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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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01
영원히 숲에 머무를 수 없다면

영원히 숲에 머무를 수 없다면 이소 1. 십 년 전, 한국 문학은 세월호의 침몰을 ‘실재’이자 ‘사건’이자 ‘외상’으로 받아들였다. 잘 짜인 듯 보였던 상징질서가 찢기며 드러난 ‘실재’의 속살이자, 그 이전의 주체와 그 이후의 주체가 도저히 같을 수 없는 압도적인 ‘사건’이자,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외상’. 글을 쓰는 자라면 누구라도 사태의 ‘재현 불가능성’을 수용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고, ‘세월호 이후의 문학’을 한다는 것은 애도의 윤리에 복종하는 동시에 끝내 ‘애도 불가능성’을 증언해야 하는 이중의 난제가 되었다. 다른 글에서도 말한 적 있지만, “나는 이 무렵의 문학 비평이 출구 없는 폐허 위에 무릎을 꿇고 써내려간 ‘실재의 윤리’에 대해 어떠한 불만도 품은 바가 없다.”1) 다만, 실재를 향하라는 부정성의 요구가 언제까지나 생생할 순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고 믿기에, 이제 그간 암묵적으로 금기시되다시피 했던 작업들을 시도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할 따름이다. 그러나 아마도 같은 이유에서 출발했을, 얼마만큼의 반성과 얼마만큼의 결심을 담아 정성스럽게 쓰였을, 십 년 만에 도착한 한 평론가의 글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실재의 윤리’를 이야기하던 평론가의 반전 앞에서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당혹스러움이지만, 만약 그의 결론이 어떤 필연적인 경로 끝에 형성된 것이라면 이에 관해 이야기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독을 막기 위해 그 글의 마지막 단락을 중략 없이 길게 인용한다. 십 년 전의 나는 몰랐던 것 하나를 이제는 알고 있다. 세상엔 쓰일 수 없는 문장이 있다는 것. ‘아이가 죽었다’라는 문장은 불가능하다. 한번 태어난 아이들은 계속 산다. 계속 살아간다는 것은 어딘가에서 산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살아갈 장소가 필요하고 우리는 그곳을 마련한다. 아이들을 우리의 기억 속에 살게 하자는 말은 뻔한 말이다. 그런 말이 아니다. 기억을 창조해야 한다는 말이고, 그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공식 기억’과는 다른 ‘대항-기억’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지만, 이제 나는 ‘인공 기억artificial-memory’의 불가피함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예술로 생성되는 인공 기억을 ‘art-ificial memory’라고 부르면 되겠다고도 생각한다. 그리고 인간의 기억은 매우 허술해서 우리의 뇌 속엔 “기억의 진실성을 확인하는 메커니즘”이 없다는 말, “생생한 감각적 심상과 강력한 감정이 동반되면 (····&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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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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