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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시대를 맞이한다는 것

  • 작성일 2024-03-01
  • 조회수 1,809

   유령의 시대를 맞이한다는 것

   - 김선오 · 안미린의 시를 중심으로 -


황사랑


   1. 유령 문학의 역사


   인간의 역사에서 유령은 언제나 함께였다. 기원전 2000년경 수메르 서사시에서 길가메시에게 저승의 풍경을 묘사하는 엔키두의 유령부터,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햄릿에게 복수를 다짐하게 하는 선왕의 유령, 수많은 공포 영화와 게임까지 인간이 있는 곳에 유령이 등장하지 못하는 자리는 없다. 인간에게 유령은 죽음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만든 타자였으며, 죽은 자를 추모하는 관습을 만들어 죽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었기 때문이다.1)

   그렇다면 지금 한국 문학장에 등장하는 유령들은 어떤 이유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며 이전 시기의 유령들과는 무슨 차이를 보이고 있을까. 90년대까지 문학에서 유령은 대부분 한을 품고 이승을 떠나지 못했던 존재였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 문학에 등장하는 유령들에게서 미묘한 변화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고봉준은 자신의 평론집 『유령들』에서 유령을 “이미 죽었으나 충분히 죽지 못해 살아 돌아온 유령”과 “살아 있으나 시체로 간주되는 유령적 존재”로 구분하며 존재를 부정당한 후자의 유령들을 김이듬, 최금진, 안현미, 신해욱, 강성은 등의 시에서 발견해 냈다.2) 즉, 애도되지 못했기에 출현하는 유령들이 아닌 현재를 살아가지만 존재 자체가 문제시되어 계속해서 발화할 수밖에 없는 유령들이 출현한 것이다. 소설의 경우에도 주체와 유령 타자의 관계가 변하고 있음을 김영찬의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백민석, 신경숙, 윤대녕의 작품에 나타나는 주인공의 관심이 환상이 아닌 현실의 영역으로 다가가고 있음을 포착했다.3) 90년대의 문학이 사회적 관심에서 밀려난, 토대가 없는 환멸의 공간에서 만들어진 것을 기억할 때4) 2000년대의 유령 문학이 보여주는 현실로의 이행은 허무주의와 그에 따른 후유증에서 벗어나는 과정이라고 생각된다. 신수정이 윤성희와 황정은의 소설에서 애도의 작업에서 벗어나고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윤리적 가능성’을 발견한 것처럼5) 이제 유령은 환상이 아닌 현실적 타자가 된다. 너무나 인간적인 2020년대의 유령들은 바로 이러한 흐름 속에서 태어난 것이다. 

   많은 논자들이 주목했듯 최근 소설에서 나타나는 유령들은 인간과 함께 생활하고 인간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며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모습으로 등장한다.6) 인간과 다르지 않은 친근한 유령들이 등장하는 경향은 시에서도 뚜렷하게 발견된다. 강아지를 따라 움직이고 인간에게 말을 붙이며 인간과 같이 걷는 김선우의 “따스한 유령들”(「내 따스한 유령들」)이나 김리윤이 보여주는 “모든 거리를 초월해 가까이 있는”(「사실은 느낌이다」) 유령, 그리고 강지이 시의 화자가 “유령과 나란히 서서/손을”(「캠핑 일기」) 흔드는 모습을 통해 유령이 인간과 동일한 존재로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7)

   이토록 범람하는 유령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는 유령들이 있다. 김선오와 안미린이 그려내는 유령들이 그 예다. 이 유령들은 2020년대 유령의 특징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간과 유령의 경계가 무너지는 지점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두 시인들의 작품에선 유령과 인간이 나란히 있는 것뿐만 아니라 서로 섞여 들어간다. 비가시적인 것의 가시성을, 실체 없는 것의 실재를 보여주는 시들을 통해 앞으로의 인간과 유령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타진해 보고자 한다.8)


   2. 유령 인간과 투명한 리듬들


   김선오의 시에서 유령들은 가느다란 선을 타고 활동하는 존재들이다. 활발하고 자유로운 움직임을 보여주는 유령들에 비해 인간 화자는 유령보다 왜소한 존재로 “몸은 다 사라지고”, “눈앞이 온통 거미줄”(「나무에 기대어」)인 상태로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이미 죽어 있는 존재에 가깝다. 이는 2000년대의 시가 보여주었던 존재감을 부정당한 화자들과 같은 맥락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김선오가 들려주는 음(音)은 2000년대와는 다르다. 그는 수다스럽게 유령들의 방언을 내뱉을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인간과 유령을 대면시키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한계가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내 이름을 적기 위해 한 획을 그었다. 더는 글자를 쓰지 않고 손을 멈추었다. 종이를 서랍 속에 넣어 두었다.

   (···) 

   밤이 되면 학생들은 하나씩 지워졌다. 숱한 밤이 지나고 마지막으로 남은 한 명은 내가 처음 그은 선으로 만들어진, 녹슬고 오래된 학생이었다.


   우리는 함께 수업을 했다. 나는 그에게 삼차원을 가르쳤다. 공이나 나무, 심장처럼 부피가 있는 것들, 그 속에 담기는 사랑이나 감기, 졸음 같은 것들도 가르쳤다. 선으로 된 학생은 몸의 이곳저곳이 끊어질 듯했지만 언제나 열심이었다. 총명한 선이었다. 

   (···)

   그러나 나의 주먹은 종이 밖에서 무언가 쉴 새 없이 적어대고 있었다.


   팔 끝이 텅 빈 채로 나는 계속해서 걸어갔다.


   - 「부드러운 반복」 부분


   시인은 선을 긋는 행위를 통해 인간과 유령을 마주하게 한다. 김선오의 시에서 화자는 쓰는 활동을 통해 유령에 가까워지는데(나는,/이라고 쓰자 손끝이 희미해졌다 - 「불러오기」) 위의 시에 나타나는 화자 역시 이름을 적는 선적인 행동을 통해 유령적 존재인 나들을 불러낸다. 자신의 이름을 적다가 중단하는 소극적인 화자에 비해 유령-나들은 자유롭고 빛나는 움직임을 보인다. 주목할 만한 것은 유령-나들이 보여주는 리듬이 단편적인 움직임에 그치지 않고 입체적인 형태를 띠는 데까지 발전한다는 것이다.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는 리듬이 반복을 통해 고유한 존재가 되는 것처럼9) 종이에 선을 긋는 반복적인 리듬은 유령에게 반짝거리는 삶을 부여하고 화자의 손끝에 상처를 낼 정도로 물리적인 힘을 갖게 한다. 화자가 그은 수많은 선들이 합쳐져 종이 위에서 학교가 되는 것, 낱개의 선들이 학생이 되어 화자와 관계 맺는 모습에서 유령-나들이 환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양감을 가지고 실재에 가까워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종이 위에서 튀어 올라와 화자에게 찾아오고 화자와 수업을 하는 유령-나들은 완전한 실체를 가지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 되기란 쉽지 않다. 밤이 되면 하나씩 지워지는 유령-나들의 모습은 세계가 유령적 존재들을 어떻게 배척하는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화자가 잊고 있던 과거를 품으며,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성장하던 마지막 유령조차 허무하게 소멸하는 모습은 유령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세계의 억압을 보여준다. 인간 화자보다 빛나는 가능성을, 종이 위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는 창의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유령-나들은 사라져 간다. 그러나 그들의 움직임이 헛되지 않은 것은 화자를 통해 증명된다. 자신의 이름도 끝까지 쓰지 못하고 서랍 속에 묻어 두었던 생명력 없던 화자가 유령-나들과의 만남을 통해 울음을 터트리고, 주먹을 쥐고, 쉴 새 없이 적을 수 있는 인간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유령의 리듬을 간직한 화자는 신체가 “텅 빈 채로” 유령을 소거하는 세상으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유령의 일원으로서, 언제부터 이러한 장밋빛이 나의 피부를 감싸고 있던 것인지, 심장 쪽에 붉은색 등이 켜진 것처럼(우리에게 심장이 있다는 가정하에) 어째서 이 빛이 내부로부터 표면까지 침투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고, 장밋빛의 농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미세하게 짙어졌기에, 우리끼리는 그때그때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지 않았지만, 수줍으면 피가 몰리듯 얼굴에 장밋빛이 몰리기도 하였으므로, 가끔은 너무 인간적이라고 놀림을 받았습니다.


   (···)


   우리의 모든 면은 유리로 되어 있어 우리 밖으로 넘실대는 세상이 보입니다.


   농담입니다. 우리는 깨지지 않습니다.

   상처가 내장을 드러내면서도 깨지지 않는 방식과 같습니다.


   저는 제 말의 청자를 인간으로 삼아야 할지 유령으로 삼아야 할지 조금 헷갈리지만, 오늘은 그냥 당신으로 삼고 싶은 기분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인지 유령인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쪽으로요.


   - 「농담과 명령」 부분


   김선오 시의 화자는 유령의 장점들을 받아들이며 유령이 되어 간다. 「농담과 명령」의 화자도 유령의 일원이 되어 유령의 세계에 편입되는데, 이때 유령이 된다는 것은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움과 더 넓은 시야를 가진다는 것을 뜻한다. “유령이란 단지 그 되돌아옴을 우리가 보게 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를 보고 관찰하고 감시한다고 우리 스스로가 느끼는 그런 것”이라는10) 데리다의 주장처럼 김선오의 시에서 유령이 되는 것은 세계를 훑을 수 있는(검은 구체가 허공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종이 위 수천 개의 시선이 해변을 향한다. - 「침범, 노이즈, 산성」) 방대한 감각을 갖게 됨을 말한다. 그리고 이 유령의 시야는 인간으로서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유령의 세계를 체험하게 한다. 

   유령 인간이 된 화자가 마주한 유령의 세계는 다양성이 존중되는 곳이다. 유령들은 각자의 상처를 가지고 있기에 “불투명하게 아물어” 가고, “다른 속도”로 상처를 회복한다. 유령들의 세계는 서로의 상처를 헤집지 않고 상처를 감출 필요도 없으며 스스로 상처를 치유할 시간이 확보되는 곳이다. 그렇기에 유령들은 과거의 상처를 회복시키고 다른 유령들과 함께 현재를 살게 된다. 또한 이곳에서는 인간과 유령의 구분이 무의미하다. 성별이나 나이, 계급이나 민족 등 인간 세계의 규범이 통하지 않는 곳. 오직 ‘당신’이라는 존재 하나로 충분한 유령의 세계는 투명하게 빛난다. 이처럼 어떤 구분도 무화되는 곳에서 우리는 생각하지 못했던 타자에 대해 인식하게 되고, 살아 있지 않은 것들에 대한 존중을 갖게 된다.11)

   이처럼 김선오는 유령을 소거하고 인간과 유령을 구분 짓던 세계를 유령의 모습으로 관통하고자 한다. 유령의 투명성을 지니고 유령 인간이 되어 자유롭게 떠다니는 일은 투명성이라는 수백 가지 유령의 언어를 알게 하고, 서로 다른 상처를 지닌 유령들 사이에 있게 하며, 인간에게 다양성을 가르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김선오의 유령 인간은 인간 존재와 우주의 다양한 관계들을12) 자유롭게 오가며 리듬을 만들어낸다. 돌과 피부, 살과 뼈와 춤추고(「세트장」), 무생물과 식물, 동물 사이를 건너다니며(「범세계종」) “그저 나긋하고 부드러운 움직임”(「세트장」)을 가진 유령 인간만이 세계의 결말에 다다를 것이라는 믿음 속에서 장밋빛 리듬은 계속된다.


   3. 밝은 빛의 수행성


   유령을 뜻하는 ‘ghost’가 실제론 죽음 이후의 생존보다는 생명의 본질을 가리키는 말이었음을13) 떠올려 보면 안미린 시의 유령은 애도되지 못했던 타자도 아니며, 살아 있지만 유령처럼 여겨지는 존재도 아닌 수행성을 지니고 있는(유령이 유령임을 멈추지 않고 ‘유령을 하는’ 수행성. - 「유령 기계 9」) 생명에 가깝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던 살과 뼈로 현전하지 않는 육체의 가시성만 지닌 유령과는 다르다.14) 유령은 물속이나(수중 유령이 가득하고 ··· 흐르는 피가 뼈에 닿은 기억이 났어 - 「유령계 7」) 돌에서도 모습을 보이고(유령이 하얗게 뭉쳐진 돌을 주웠지. ··· 작은 돌을 주웠던 것뿐인데, 주변이 조금 밝아지는 기분 - 「유령계 2」) 비어 있는 공간을 자신들로 채우기도 하며(집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무거워진다는 것이었다.//이 무게에 빠져든다는 것이었다 - 「유령계 9」) 자신과 맞닿는 이들을 연결한다. 


   하얀 연골의 크리처가 오고 있다.


   빛과 불을 밝힐까.


   악천후에는 유령물을 찾곤 했지. 따듯한 미래물을 찾곤 했지.


   빛 속에서 눈을 감으면 가까운 뼈를 가졌다고 생각했어.


   얼린 티스푼을 두 눈에 올리면 그 차갑고 환한 기분이 유령의 시야였지.


   유령의 등뼈는 더 부서지려는 이상한 반짝임.


   크리처가 오고 있어. 들것에 실려 오는 시간.


   백골색 머리띠를 부러뜨리고 이마에 입을 맞추는 너의 어떤 면.


   - 「유령 기계 1」 전문


   위의 시에서는 크리처, 유령, 그리고 인간으로 추정되는 화자가 등장한다. 크리처는 하얀 연골을 가진 다 자라지 않은 생물이며, 유령은 궂은 날씨에 찾게 되는 밝은 빛과 가까운 존재다. 다른 존재자들의 “유령적 숙주와 공존”하고 “공생적 실재 속에서 유령”들을 불러 모아 연결되는 생태학적 관계들처럼15) 이들의 종은 다르지만 유령에 의해 서로를 발견하며 연결된다. 

   이때 유령은 하나의 생명으로, 화자가 유령과 합일되는 순간 이제껏 숨겨져 있던 비가시적인 세계를 가시적으로 감각할 수 있게 한다. 그렇게 유령 인간이 된 화자가 보는 것은 새, 야생 생물, 어린 들개(「비미래 8」)와 같은 세계의 여린 부분들이다. 안미린의 유령 인간이 유독 세계의 약한 부분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인간에게 수행성을 전해 주는 유령이 원초적인 생명력을 지니고 끝없이 샘솟는 생명의 원천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닌 막 태어난 여리고 희미한 생명에 가깝기 때문이다.(이 순간, 유령은 세계의 가장 여린 부위였다. - 「양털 유령, 양떼지기, 아기 양, 아기 양 지킴」) 이는 세계를 전체성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형태 없는 존재 방식으로 바라보며16) 세계의 소외된 부분을 드러내고자 하는 시인의 시적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즉 안미린의 시에서 유령은 세계가 숨겨 놓은 것들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매개가 되는 것이다.

   유령성이 개체들에 대한 패턴을 발견하기 위한 도구가 되는 것처럼17) 유령의 감각을 지니게 된 화자는 세계의 여리고 어린 부분들을 발견하고 보듬는다. 은폐된 존재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고(「유령 기계 9」), 어린 기계가 자라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부스러진 꽃잎에 믿음을 건네며(「유령 기계 7」) 다치기 쉬운 존재들을 부드러운 손길로 감싸는 것이다. 안미린의 근작 시 「양초 해골」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렇게 도달하고 나면

   마음 밖에도 마음이 있다는 것에

   더는 놀라지 않을 것 같아요.


   부재가 뚫고 들어간 눈과 입들이

   보이고 들릴 것 같아요.


   ······


   어떤 사람의 중심은 영혼으로 만든 뼈

   라는 생각이 이어지고


   뼛속까지 살고 싶다는 생각은

   내부로 돌아서는 기분이 들게 합니다.


   뼛속까지 지내고 있다는 느낌은

   서서히 기대앉은 형태를, 형태 공간을, 움푹 파인 눈과 입으로 만든 방을 만들고

   머물게 합니다.


   그곳에서 어떤 슬픔과 함께 깨어 있게 해요.


   (···)


   나는 텅 빈 네 얼굴뼈를 만지며

   먼 안개를 기억할 수 있어요.


   그것은 뼛속까지 파고드는 사랑의 흰 이미지겠죠.


   - 「양초 해골」 부분(『현대시』 2022년 9월호) 


   유령을 통해 세계의 여린 부분들을 발견하게 된 화자는 유령에게 받은 환한 빛들을 홀로 소유하려 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도 유령 인간으로의 기쁨을 나누어주고자 한다. 시의 화자가 “있어야 할 곳에 흰 것을 돌려주”는 일을 수행하고자 하는 것이 그 예다. 이를 보면 지금 화자가 자리한 세계는 유령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유령이 없기에 타자에 대한 감각을 상실한 곳임을 알 수 있다. 이곳은 타자를 기억했던 세계와는(감은 눈은 깊고 먼 기억을 가만히 받아들인다/더 연해지는 연골의 세계 - 「비미래 1」) 다르다. 화자는 유령 인간이 되어 성장하는 반면, 세계는 점점 더 악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종말을 향해 가는 세계에서도 화자는 자신의 일을 꿋꿋하게 이어 간다. 유령을 전해 주는 것이 화자에게 인간적 척도를 벗어난 지점을18) 감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마음 밖에도” 있는 마음들을 인식하는 일은 시야에서 배제되었던 타자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며, 화자의 세계 인식을 더욱 확장시키게 된다. 해골의 눈과 입에서 기댈 수 있는 자리를 발견하고, 부재를 보고 들을 수 있게 된 화자를 통해 우리는 어떤 가능성을 엿보게 된다. 다치기 쉬운 존재들뿐만 아니라 그 외의 존재들과도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들을. 그렇기에 안미린의 유령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어디에서나 발견된다. 

   유령 인간이 된 화자가 보여주는 수행성은 유령을 전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화자는 소외된 타자를 감싸는 것에서 나아가 타자의 내부로 향한다. 그동안 안미린이 수행성을 가진 유령을 통해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면 시인은 이제 인간의 내부로 들어가 슬픔을 발견해 내는 화자를 그리며 가시적인 것의 비가시화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안미린이 알려주는 섬세한 감각들은 양초 해골과 같은 사물에서도 인간이나 유령의 만남과 같은 애틋함을 가지게 하고, 타자의 내부에서도 그와 공명하며 편안히 자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어떤 사람’의 내부에 느리게 기대는 화자는 하나의 형상에서 “형태 공간”을 만들고, 더욱 부피를 늘려 방이라는 공간으로 확장되어 타자의 슬픔과 함께 지낼 수 있다. 타자의 “뼛속까지” 침투하고 슬픔을 위로하는 화자의 실천적 행동은 타자를 유령의 세계로 이끌 뿐만 아니라 화자 역시 지속적으로 깨어 있게 하는 힘이 된다. 짐작하건대, 유령이 준 사랑의 감각을 뼛속까지 새긴 화자는 이 다정한 유령적 실천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4. 당도한 미래


   인간은 정신과 신체로 구성된 기계라는 데카르트적 사상에 기반해 오랫동안 인간에 대한 신뢰와 인간 위주의 인식을 받아들여 온 우리에게 유령 인간이라는 새로운 종의 출현은 기이하고 낯설게 느껴진다. 그러나 김선오와 안미린이 그려내는 유령 인간을 접하게 되면 지금까지 견고하게 쌓아 온 인간에 대한 믿음을 잠시 내려놓게 된다. 자유로운 리듬을 통해 유령 인간을 만들어내고, 규범에서 벗어난 유령의 세계를 보여주는 김선오의 유령 인간과 수행성을 지닌 유령과 합일되며 세계에서 소외된 여린 부분을 발견하고, 타자를 향한 실천적 행동으로까지 나아가는 안미린의 유령 인간은 우리에게 유령적 사유와 실천이 필요함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특히 인류세라는 행성적 위기를 마주함에 있어 인간임을 내려놓고자 하는 유령 인간의 등장은 인간의 지위를 내려놓고자 하는 시도가 동·식물, 사물 등 비인간들과의 결합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부피를 줄이고자 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구에 과도하게 얹힌 인간의 무게를 줄여야 한다는 듯이 육체가 가진 질량을 버리고 투명하게 세계를 통과하는 유령 인간들은 인간의 시대가 끝나고 유령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지표다. 잘 아문 상처로 세계를 통과하고(김선오, 「농담과 명령」) 여린 부위를 쓰다듬을 줄 아는(입김으로 흰 꽃을 깨우는 유령의 동력과, 눈부신 빛의 순백력 - 안미린, 「비미래 9」) 유령의 시대를 환영한다. 이제 우리도 유령이 될 시간이다.


1) 장클로드 슈미트, 『유령의 역사』, 주나미 역, 오롯, 2015, 26-27쪽 참조.
2) 고봉준, 『유령들』, 천년의 시작, 2010, 4-6쪽.
3) 김영찬, 『비평극장의 유령들』, 창비, 2006, 51-52쪽.
4) 이광호, 「‘90년대’는 끝나지 않았다 - ‘90년대 문학’을 바라보는 몇 가지 관점」, 『문학과 사회』 1999 여름호, 758-760쪽.
     박영근·김형수·이성욱·방현석·방민호 좌담, 「90년대 문학의 길찾기」, 『당대비평』 1997 겨울호, 295-301쪽.
     김영찬, 앞의 책, 50쪽.
5) 신수정, 「2000년대 소설에 나타나는 유령 화자의 의미 — 윤성희・황정은의 소설을 중심으로」, 『한국문예창작』 18(2), 한국문예창작학회, 2019, 178쪽.
6) 소설에서는 임선우의 『유령의 마음으로』(민음사, 2022), 김멜라의 『제 꿈 꾸세요』(문학동네, 2022), 이주혜의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창비, 2022) 등 유령이 등장하는 작품이 증가했으며 이에 주목한 글은 다음과 같다. 김요섭, 「우리가 인간이기를 멈출 때」, 『문학과사회』 2022 겨울호; 이희우, 「멸망보다 긴-김지연, 나푸름, 임선우 소설에 나타난 인간의 유령들」, 『문학들』 2022 겨울호; 박혜진, 「인간의 얼굴을 한 유령, 유령의 얼굴을 한 인간」, 『문학들』 2023 봄호; 김다솔, 「유령의 자리, 유령의 미래」, 『문장 웹진』 2024.1.
7) 인용한 시가 수록된 시집은 다음과 같다. 김선우, 『내 따스한 유령들』, 창비, 2021; 김리윤, 『투명도 혼합 공간』, 문학과지성사, 2022; 강지이, 『수평으로 함께 잠겨보려고』, 창비, 2021.
8) 이 글에서 중심으로 다루는 시집은 김선오의 『세트장』(문학과지성사, 2022)과 안미린의 『눈부신 디테일의 유령론』(문학과지성사, 2022)이다.
9) 앙리 리페브르, 『리듬분석』, 정기헌 역, 갈무리, 2013, 16, 64-67쪽.
10) 자크 데리다·베르나르 스티글러, 『에코그라피』, 김재희·진태원 역, 민음사, 2002, 209쪽.
11) 같은 책, 214쪽.
12) 앙리 리페브르, 앞의 책, 82-83쪽.
13) 리사 모튼, 『유령에 홀린 세계사』, 박일귀 역, 탐나는책, 2022, 15-16쪽.
14) 자크 데리다·베르나르 스티글러, 앞의 책, 204쪽.
15) 티모시 모턴, 『인류』, 김용규 역, 부산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106쪽.
16) 시노하라 마사타케, 『인간 이후의 철학』, 최승현 역, 이비, 2023, 115-116쪽.
17) 티모시 모턴, 앞의 책, 125쪽.
18) 시노하라 마사타케, 앞의 책, 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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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386세대와 패배하지 못한 혁명들의 시차 임세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퇴근 후에 넥타이를 존나 풀고 찾아와 옛 추억에 잠겨 노래 한 곡 워어어어 케케묵은 노래들을 불러대며 울어대네 아름다운 젊음이여 흘러간 내 청춘이여 너희들이 정녕 민주화를 아느냐 이 손으로 일군 민주주의 대한민국 요즘 어린 것들은 몰라도 한참 몰라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투쟁도 혁명도 이제는 모두 봄날의 꿈 그리웠던 혁명동지 돈을 꾸러 찾아왔네 골프채로 쫓아내니 마음속이 허전해 내일은 미스 김의 보지 냄새 맡아야지 밤섬해적단, 〈386 Sucks〉, 《서울불바다》, 2010. 1. 중단된 혁명 이제는 진부한 제재처럼 감각되는 ‘후일담’의 환멸과 자조 이후 한국 문학에서의 386세대 재현은 익숙하지만 낯선 ‘진정성’의 풍광들을 펼쳐 보인다. 이른바 ‘포스트-진정성 체제’1)에서의 속물들의 세계상은 기실 그 문제적 주체로 호명되었던 386세대뿐만 아니라, 386세대에 의해 다시 지목당한 ‘20대 개새끼론’의 대상이었던 ‘88만원 세대’에게도 벗어내기 힘든 혐의였다. IMF 이후 가속화된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서 20대 빈곤의 원인이 세대 간 착취에 있다는 통찰 가운데 던져진 “토플책을 덮고 바리게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2)라는 조언을 (귓등으로) ‘학습’했던 새 세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이었고, 어디로 향하였는가. 타 세대에 의한 명명 대신 “나는 씨발 존나 멋진 이십대 청춘”3)이라며 타락한 386의 ‘흘러간 청춘’을 조소하던 20대는 어느덧 MZ세대의 선봉으로 싸잡아 묶여진 채 40대의 문턱을 넘고 있다. ‘민주화’라는 ‘명분’ 위에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모두 쟁취한 것처럼 조롱되는 386세대에 대한 냉소는 오늘날 “운동권 특권 정치를 청산하라는 강력한 시대정신”4)을 따르겠다는 한동훈 전 국민의 힘 비대위원장의 취임사로 구현되며 동세대 정치인들의 반발과 분노를 유발하기도 했다.5)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본다면 386세대가 이룩한 ‘민주화/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오염되고 폄훼의 대상이 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민주화 시키다’라는 표현은 386세대에 대한 비판이 본격화되었던 201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강제로 억압하다’는 조소의 뜻을 지닌 채 활용되었다. 입으로는 ‘케케묵은’ 투쟁의 추억을 타령하며 실제 삶에서는 동지를 배신하고 돈과 섹스의 욕망을 좇는 운동권 세대를 저격한 〈386 Sucks〉의 면면은 새로울 것도 없는 386의 전형(stereotype)을 노래한다. 그런데 이 오래된 냉소의 역학 속에서 눈

  • 관리자
  • 2024-07-01
오염, 오류, 오독

오염, 오류, 오독 - 소설이 수행하는 ‘다시’ 황유지 마들렌을 먹으며 과자 부스러기와 차 한 모금이 어우러진 달콤한 환기 속에서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일은 마르셀에게 행복을 준다. 그러나 발벡의 호텔방에서 신발을 벗으려다 문득, 할머니가 신을 벗겨 주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은 그에게 행복감을 주지 않는다. 죽은 할머니를 떠올리는 일, 그것은 “고통스러운 소멸”을 확인시킬 뿐이다.1)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이 일화는 과거를 부르는 일이 각기 다른 정서를 환기함에 대한 예시로 내밀어지며 ‘기억’에 착종되는 다양한 감정이 주체를 어떻게 흔들 수 있는지 넌지시 묻는다. 소멸의 확인도 그렇지만 미완, 불완전, 불만족인 채로 내버려둔 사건에 대한 기억의 소환 역시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인데, 그건 엄연히 그 일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라 모종의 감정적 자원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에서 이런 ‘다시’는 레트로로 나타난다. Retrospect, ‘추억’에 뿌리를 둔 이 말은 패션, 음악, 영상부터 먹거리, 금융상품에 이르기까지 그 반경을 확대하며 과거로 우리의 기억을 끌고 간다. 과거의 소환은 이 사회에 대한 일종의 환각제이자 자본주의라는 무한한 기계적 힘에 대한 제동, 그 중단의 본능적 발현이다. 이런 레트로는 과거에 대한 향수, 노스탤지어의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 고대인들에게 노스탤지어란 ‘되돌아가는 일(nostos)’을 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아픔(algos)’으로 이해된다. 그러니까 레트로는 돌아갈 수 없는(가본 적도 없는) 시절을 향한 자본주의적 환각제이다. 프루스트의 위대한 주제가 사물들을 처음 경험할 때의 무능력이라 파악하는 프레드릭 제임슨은 진정한 경험이 우리가 의식적으로 다른 것을 의도하는 동안, ‘눈가’를 통해 온다면서 그 가능성을 글쓰기에서 찾는다. 기어이 돈을 주고라도 사겠다는 환각성 추억과는 달리 기억을 통한 글쓰기는 상실한 것을 복원하려는 고도의 정신 작업이랄 수 있다. At the corner of eye, 거기가 바로 진정한 경험이 되돌아오는 자리로 가장 의도적인 두 번째 경험, 글쓰기는 그 형식이 된다. 2) 글쓰기는 행해짐과 동시에 복수의 행위자를 탄생시킨다. 쓰는 자와 읽는 자,3) 이는 시차(時差)와 함께 탄생하며 텍스트가 현실과 맞닿은(혹은 결별한) 그 부위에 필연적으로 틈을 만든다. 대체로 모든 문제는 이 ‘틈’에서 태어나는 것처럼도 보인다. 틈은 이미 분리, 분절된 것으로 존재하면서 거기에 무엇을 메우든 결코 원본의 형태를 완벽히 구현할 수 없다. 원본처럼 복원한 것조차 복사본일 따름이라 틈은 그 자체 오류가 되는 것이다(가령 원본이 틀린 것이라 할 때도 제대로 수정된 본은 오류가 된다. 틀린 원본에 대해 기어이 맞추어진 진실

  • 관리자
  • 2024-07-01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이소 1. 스무 살을 훌쩍 넘어 성인이 되어도 자신을 어른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뉴스를 보면 언제나 피해자의 억울함에 몰입하고, 많은 경우 나를 포함하지 않은 채 ‘어른들’에게 분노를 터트리는 사람. 2014년 4월 16일, 이 날 나는 처음으로 어른의 자리에서 사건을 경험했다. 아이의 자리가 아닌 해운회사의 직원이나 공무원이나 인솔 교사의 자리에 서 있었다. 항해사나 해경보다 교사인 나를 떠올리기가 더 쉬웠다. 누구나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기억이 있으니까. 나는 전문가를 깊이 신뢰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내가 그 배에 탔다면 안내 방송을 충실히 따르며 어른들과 시스템을 믿으라고 아이들을 다독였으리라는 걸 알았다. 누가 보아도 나는 완벽히 어른이었다. 굳이 괴로웠다는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그때는 모두가 괴로웠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다음해 문학을 전공하러 대학원에 들어갔다. 누군가 공부라는 게 어떤 실천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런 답변도 떠올릴 수 없다. 나부터가 그런 희망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전처럼 살 수 없을 뿐이었다. 나는 어른이었고,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수습될 수 있는 사고가 아니라 소화할 수 없는 사건이었으며, 내게는 더 정확한 언어가 필요했다. 딱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었다. 2. 지금도 교사인 나를 상상해 본다. 항해사나 해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교사라는 직업과 위치가 내게 어른이란 무엇인지 사고실험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과 달리 미성년인 학생들을 상대하는 교사는 흔히 이중적인 이미지로 재현된다. 전교조와 교총을 교대로 인터뷰하는 기사의 관례처럼, 전통을 수호하는 보수적인 교사와 변화를 추동하는 진보적인 교사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그려지는 건 흔한 일이다. 제도가 부여한 의무와 규범을 학생들에게 어디까지 얼마만큼 요구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한 명의 교사를 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지만, 이 경우에도 그의 심리적 갈등은 그의 교육방식에 딴지를 걸 더 완고한 교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전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코 전위적인 존재에 도달할 순 없지만, 마땅히 후위의 역할은 초과해야 하는 사람. 그러나 생각해 보면 교사만 그럴 리는 없다. 모든 직업은 사회가 요구하는 허용범위 안에서 가까스로 변주를 시도하고, 모든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며 유사한 딜레마에 빠진다. 교사는 자신의 의무를 익히 아는 어른의 상징이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점점 학생보다 교사에게 더 쉽게 이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문제는 오래되고 흔한 방식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현이 더는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데 있을 것이다. 어차피 시대가 변한 줄 모르는 늙은 교사들은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없다. 보수적인 교사와 진보적인 교사의 대립은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갈등을 통해 사회를 혁신하는 재생산 메커니즘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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