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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의 복음서와 묵시록

  • 작성일 2024-04-01
  • 조회수 1,240

   인공지능의 복음서와 묵시록

   ― 듀나의 SF를 ChatGPT와 함께 읽다


노대원


   한국 SF 계보에서 듀나라는 나비 효과


   2024년은 듀나(DJUNA)가 창작을 시작한 지 30주년이 되는 해다. 근본적으로 듀나의 SF 소설들은 1990년대의 PC통신에 기반을 둔 디지털 문학으로 출발했다. ‘기술적으로 포화된 사회의 문학’(로저 록허스트)1)이라는, SF에 관한 한 정의는 듀나의 SF에도 적절하다. PC통신 기술을 가능하게 한 한국 SF 팬덤의 본격화는 활발한 SF 아마추어 창작의 출현과 궤를 같이한다. 듀나는 자신의 초기작을 “90년대 통신망 문화에서 자연 발생한 잡동사니”2)라고도 표현한다. 여기서 PC통신은 독자가 곧 작가가 될 수 있는 디지털 기술이었다. 듀나가 그간 필명으로 디지털 공간에서 활동해 왔던 것도 디지털 문화의 한 특성으로 볼 수 있다. 박상준은 “사이버 시대의 상징적인 아이덴티티를 즐기고 있는 듯하다.”3)라고 지적한 바 있다. 과학소설 동호회의 팬덤 문화는 듀나라는 걸출한 SF 작가가 등장할 수 있었던 기술적 · 사회적 맥락이지만, 물론 그것만으로 듀나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 이 시절 등장한 많은 아마추어 SF 작가들이 모두 작가로서 명맥을 이어 나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SF 작가 이경희는 듀나의 초기 작품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초기 듀나 작품의 특징을 아주 단순화해 정의하자면 영미 장르문학의 장르 관습과 한국 문학의 세련된 문장이 결합된 형태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레퍼런스 삼을 국내의 SF가 전무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듀나는 이 둘을 재료로 자신의 기반을 다졌다.”4) 이 점은 듀나 스스로 작품의 레퍼런스를 자주 드러내는 것으로도 알 수 있고, 초기 창작의 상황을 회고하는 글에서도 동의할 수 있다. 작가의 개성과 독창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작가가 스스로 영향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 부정적으로 작용할 여지가 많다.

   그러나 듀나는 장르 작가로서 자신이 위치한 계보와 상호 텍스트적 맥락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창작의 전략으로 활용했다. 장르 작가로서의 자의식과 정체성을 지닌 작가로서 듀나의 SF 소설들은 ‘한국 SF 장르의 개별성과 고유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5)이다. 듀나 SF에서 탈식민성은 서사의 소재와 내용과도 관련되지만, 특히 듀나의 초기작들에 집중한다면, 주로 영미 서구 문화에 기원을 둔 SF 장르를 수용하고 한국적으로 다시 쓰는 현지화 과정 자체에 더욱 주목할 수 있다. 듀나 이후로 김보영, 배명훈과 같은 SF 작가들은 한국 SF의 현지화(localization)와 진화를 이어 나갔다. 그동안 PC통신 기술은 인터넷과 인공지능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기술적 혁신으로 이어졌다. AI는 SF가 현실의 서사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하여 지금, SF 장르는 한국의 문학적 우세종이 되었다. 이 글은 일상화된 AI 시대에 30년 전 듀나의 SF 소설을 다시 읽어 보려는 실험적 시도이다.


   계량윤리학과 계량서사학: AI와 함께, 「그레타 복음」 읽기


   「그레타 복음」은 ChatGPT가 등장한 이른바 ‘생성 AI의 시대’에 가장 흥미롭게 읽을 만한 듀나 초기작이다. 이 소설은 얼핏 보기에 교수들의 학술 활동을 다룬 지식인 소설로 보인다. 실제로 작가는 창작 당시의 “인문학자들에 대한 동족 혐오랄까, 그런 게 반영되었던 것 같습니다.”6)라고 언급한다. ‘계량윤리학’과 ‘중첩주의’와 같은 일견 그럴 듯하지만 현재는 부재하는 가상의 학문이나 이론 들이 등장한다. 인문 학술을 예의 듀나다운 냉소와 풍자의 시선으로 패러디한 소재들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이 소설이 어째서 SF인가에 집중해 보자. 그것은 이 단편이 인문학에 인공지능이 어떻게 개입될 수 있을지 한 가지 사례를 사고실험 또는 외삽(外揷, extrapolation)7)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이야기가 그렇듯이 이 소설의 독해를 인공지능과 함께 시도한다면 어떨까. 30여 년 전 듀나의 초창기 창작 시절, 이 소설은 사변적/비판적 상상의 서사였으나, 이제는 더 이상 허구적 산물이 아니라 현재의 문제를 다룬 시의성 있는 리얼리즘 서사가 되어버렸으니까. 

   이 소설 속의 ‘계량윤리학’은 정보종합학(Nexialism)과 같은 SF 장르 특유의 가상 학문이면서 윤리와 계량이라는 단어가 충돌해 빚어내는 모순과 아이러니의 힘에 주목하게 만든다. 현재 적어도 내가 아는 한, 계량윤리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날 이 SF의 시대에는 누구든 인공지능 컴퓨터 ‘그레타’와 접속할 수 있다. 생성 AI가 일상에 스며든 시대니까. 나 역시 문학 읽기에 AI 도구를 활용하고 있으므로8) 적어도 이 소설 속에서 AI와 결합된 이들이 어떻게 작업했을지 조금은 짐작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실제로 ‘computational narratology’ 즉 컴퓨터/전산/계산 서사학은 이미 존재하는 학문이다. 컴퓨터는 계산기이므로 계량과 유의어로 보아도 될 것이다. 말하자면, 이 글은 계량윤리학자의 이야기를 계량서사학자가 읽은 흔적이다.


*


   먼저 「그레타 복음」을 스캔해 문자 인식(OCR)을 하고, 이 디지털 파일을 OpenAI의 생성 AI인 ChatGPT(GPT-4)에 업로드한 뒤 줄거리를 요약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프롬프트에 대한 답변들 중 가장 우수한 결과물을 살펴보자.


   GPT-4 : 

   듀나의 「그레타 복음」은 미래 사회의 인문학 연구와 인공지능(AI)의 발전이 얽혀 있는 복잡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소설은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문학 연구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윤리적 · 철학적 문제들을 탐구한다. 주인공은 국제계량윤리학협회의 대형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울란바토르 대학의 계량윤리학자들과 함께 언어를 윤리학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에 매진한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인공지능 ‘그레타’와 그것이 만들어낸 인문학적 모델들, 특히 ‘중첩주의’라는 새로운 사상의 탄생과 그 영향력에 대해 깊이 있게 고민하게 된다.

   중첩주의는 21세기 초 위베르 마르티농에 의해 제창된 인문학적 통합론으로, 엘리엇 그로스브너와 카를 마르크스, 임마누엘 칸트를 결합한 것과 같은 인물인 마르티농이 이끌었다. 그러나 마르티농의 사후, 중첩주의는 그의 천재성을 이어받을 인물을 찾지 못하며 점점 퇴보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레타’라는 인공지능이 개발되어 인문학적 사상을 생성하고, 이를 인간 학자들에게 ‘배급’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그레타와의 결합으로 생겨난 새로운 사상과 이를 둘러싼 논란은 인문학의 본질과 학문적 진정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야기는 정찬환 교수의 비극적인 운명을 통해 절정에 이른다. 그는 그레타에 의해 만들어진 사상을 자신의 것으로 발표했으나, 결국 그의 능력 부족과 표절 문제가 드러나며 학계에서 추방되고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사상과 그 사상을 전파하는 현대의 인문학자들 사이의 윤리적 · 철학적 문제를 심도 깊게 탐구하며, 인간의 창조성과 기계의 역할 사이의 경계를 모색한다.

   결국, 소설은 기술 발전이 인문학 연구에 가져올 수 있는 긍정적이면서도 부정적인 가능성을 탐구하며, 인간과 기계, 사상과 기술의 복잡한 관계를 깊이 있게 다룬다.


GPT-4로 생성한 소설 삽화 일부


ai-comic-factory로 생성한 소설 삽화


   단순한 줄거리라고 하기엔 인물과 사건, 배경에 대한 요약 제시 이외에도 이미 과도하게 해석과 평가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9) 아주 탁월하게 독창적인 해석이나 평가가 아니라 할지라도 그럭저럭 수긍할 만한 비평적 진술들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줄거리 요약이란 이미 그 자체로 소설에 대한 해석의 결과물이다. 주관적인 해석이 줄거리에 반드시 포함된다는 말이 아니라, 서사 내용에서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판단하는 것부터가 하나의 해석 과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줄거리 요약은 독자들에 따라 매우 다른 결과물이 나올 수 있고, 당연히 LLM의 요약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 그다지 높게 평가할 가능성이 많지 않다. 

   어쨌거나 LLM에 우선적으로 줄거리를 제시하게 한 뒤, 이 소설을 분석할 때 가능할 법한 비평적 맥락이나 방향을 제시하게 하고, 그 뒤 사후 질문들을 통해 소설의 분석과 해석을 심화시켜 나가려던 내 계획은 다소 어긋나게 되었다. 그럼에도 계속 대화를 통해 소설을 분석해 나가려는 계획을 밀고 나가 보기로 했다. “이 SF 소설을 문학 평론에서 분석할 때 7가지 독창적이고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하라.”라는 프롬프트에 대한 GPT-4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이 역시 여러 답변 가운데 선택한 것이다. 


   GPT-4 : 

   1. 인공지능과 인간 지성의 공존과 대립: 인공지능 ‘그레타’와 인간 등장인물 간의 관계를 통해 현대 사회에서 AI와 인간 지성이 어떻게 공존하고 때로는 대립할 수 있는지 탐구한다. 이는 독자들에게 인공지능이 인간의 창조성과 사고 과정에 미치는 영향을 성찰하게 만든다.

   2. 학문적 진실성과 윤리: 정찬환의 학문적 성취가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이 학계의 윤리와 진실성 문제를 제기한다. 이는 학문적 연구와 성과의 진정성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키며, 독창성과 진실성의 경계를 모색하게 한다.

   3. 인공지능의 창조성: ‘그레타’와 같은 인공지능이 인간과 동등한 수준의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창조적 과정과 어떻게 다른지 분석한다. AI의 창조적 가능성과 한계를 탐구함으로써 인간만의 독특한 창조력에 대해 재고한다.

   4. 기술 발전과 인간성의 변화: 소설은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인간의 정체성과 역할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조명한다. 인공지능의 등장이 인간의 사고방식, 학문적 탐구, 심지어 감정과 대인 관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 분석한다.

   5. 인간과 기계의 관계 재해석: ‘그레타’와 인간 등장인물 간의 관계를 통해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재해석한다. 인공지능이 단순한 도구를 넘어 동반자 혹은 대립적 존재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한다.

   6. 사이버네틱스와 인문학의 융합: 소설은 인공지능을 통한 학문적 연구가 인문학적 질문과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 보여준다. 사이버네틱스 기술과 인문학적 사유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지식의 영역이 열릴 수 있음을 탐구한다.

   7. 미래 사회의 윤리적 딜레마: 인공지능이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미래 사회의 모습을 그리며,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윤리적 딜레마를 조명한다. 기술 발전이 인간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동시에 윤리적 · 도덕적 문제를 어떻게 야기하는지 분석한다. 이를 통해 기술 윤리와 인간의 책임에 대한 깊은 성찰을 이끌어낸다.



   나는 인공지능과 인간의 협력이 인문학과 문학에 어떤 변화를 줄지 평소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이 소설을 이 관점에서 흥미롭게 읽었다. 따라서 이 답변들 가운데 주로 1, 3, 6번의 아이디어에 주목하고 싶었다. 다른 아이디어들 역시 의미 있거나 혹은 인공지능과 관련해서 다소 일반적인 해석을 제시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LLM에 한 가지 답변을 요구하는 것보다 이처럼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제시하도록 하는 것은 LLM의 답변에 그대로 의존하기보다는 다양한 답변 속에서 이용자/독자가 자신의 해석을 확장하고 심화해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첨언하자면, 이 소설을 SF가 아닌 MF(Mainstream Fiction) 즉, 주류 소설이나 리얼리즘 소설로 읽는다면, 해석의 방향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러한 전통적인 소설 독법은 새로운 기술(novum)10)과 그 의미보다는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와 심리, 인문학적 탐구라는 주제 의식, 그리고 어쩌면 소설에서 주목하고 있는 몰락한 학자 정찬환 교수에 주목할지 모른다. 실제로 이러한 의도에서 GPT-4와 클로드 3 Sonnet에게 프롬프트를 입력했을 때, 특히 클로드 3에서 “인간 군상과 삶의 모습, 현실 사회 모습”을 분석할 수 있다면서 첫 번째 평론 아이디어로 “인물 성격 분석: 주인공 신지현, 정찬환, 스티븐 초우, 김혜린 등 주요 인물들의 심리와 성격, 행동 원인을 분석”을 제시한다.


GPT-4가 제안한 인물 관계 네트워크 (선 내부 숫자는 인물 간 상호 작용의 중요성 및 강도)



   다음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 7군데를 인용해 주고 간략하게 해설해 주세요.”라는 프롬프트를 입력해 보았다. GPT-4에서 몇 가지 주목할 만한 내용만 선별하고 수정해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GPT-4 : 

   1. 인공지능과 인간 지성의 경계 모호화:

   인용: “마르티농에게도 그레타는 도구였을걸. 생각해 봐. 그레타는 인문학적 패러다임을 생성해 내는 기계에 불과해.”

   해설: 이 대목은 인공지능 그레타가 단순한 도구를 넘어 인간 지성의 한 부분으로 통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이는 기술과 인간의 복잡한 관계를 탐구하는 중요한 순간을 나타낸다.

   2. 인간과 기계의 관계 재해석:

   인용: “그레타와 연합하는 것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기계의 노예가 되는 일이 아니야.”

   해설: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재해석한다. 기술과의 ‘연합’이 어떻게 인간의 가능성을 확장시킬 수 있는지 탐구하며, 기술을 인간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도구로 바라보도록 독려한다.

   3. 학문적 진실과 윤리의 문제:

   인용: “그는 일급 철학자였소. 단지 독창적 사고능력이 부족했을 뿐이오.”

   해설: 이 인용은 인공지능에 의존하여 학문적 업적을 달성한 인물의 문제를 다룬다. 학문적 진실과 윤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며, 기술이 학문적 독창성에 미치는 영향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4. 인간의 창조성과 기술의 한계:

   인용: “그는 카르멜파 수녀들이 예수와 결혼하듯이 그레타와 결혼했지만······.”

   해설: 이 구절은 인공지능과의 ‘결합’을 통해 인간의 창조성이 어떻게 확장될 수 있는지 탐색한다. 동시에, 이러한 결합이 인간 본연의 창조성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5. 사이버네틱스와 인문학의 융합:

   인용: “우리가 출판을 지원하는 책들 중 45퍼센트가 우리 컴퓨터의 생산물들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해설: 기술과 인문학이 어떻게 상호 작용하며 새로운 지식의 형태를 창조할 수 있는지 탐구한다. 인공지능이 인문학적 사유에 기여할 수 있는 방식을 제시하며, 두 분야의 경계를 넘나드는 학문적 협력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 인용들 역시 나의 편집(선별과 수정)을 거친 것이므로, GPT-4의 답변이 실제보다 더 뛰어난 것으로 여겨질 가능성이 많다.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위의 1, 2, 3, 4번 인용 등은 실제로 나 역시 독서 과정에서 중요하게 여겨 포스트잇을 붙여 둔 대목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12) 소설의 주요 대목들은 소설 평론의 해석 부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저 소설 인용문들은 평론의 핵심적인 아이디어로서 구체적인 비평적 진술로 확장될 수 있다. 물론 여기까지의 과정조차도 독자가 소설 독서와 비평 작업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갖고 있어야 가능하다. LLM에게 적절한 프롬프트를 제시하고 답변들을 취사선택한 뒤 지속적으로 후속 질문이나 요청을 통해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이 대화가 실제 문학 평론 집필로 이어져야 한다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레타 복음」에서 여러 학자들은 그레타와 협력하여, 혹은 그레타에 의존해서 자신의 논저를 집필했다. 그러나 그레타를 도구로 활용하는 것은 동일해도 그 결과나 성취는 다르게 나타났다. 이를 ‘기술을 어떻게 잘 활용해야 하는가’와 같은, 더 원론적인 기술 비평적 질문으로 환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이 소설에서는 일단 특정 도구나 기술의 이용자가 어떤 역량을 지녔는지, 그리고 어떤 방법과 태도를 취하는지에 따라 그 결과와 성취가 달라진다는 점을 더 강조하고 있다. 위베르 마르티농과 대조적으로 정찬환에 대한 서술자와 내포작가의 시선은 얼마나 냉소적인가. 

  

   GPT-4 : 

   「그레타 복음」에서 위베르 마르티농과 정찬환의 대조는 기술 활용에 있어서 개인적 역량과 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위베르 마르티농은 그레타와의 협력을 통해 자신의 학문적 업적을 향상시키는 데 성공적이라 평가받는다. 반면 정찬환은 그레타에 과도하게 의존함으로써 비판적 사고와 독창성을 상실한 채 학문적 성취에 실패한다.

   서술자와 내포작가의 시선이 정찬환에게 더 냉소적인 이유는 정찬환의 태도와 접근 방식이 기술의 활용에서 중요한 교훈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정찬환은 그레타를 단순히 자신의 업적을 위한 수단으로만 활용하려 하며, 이는 기술에 대한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사고를 등한시하는 태도를 반영한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기술 활용의 궁극적인 목표가 단지 개인적 성취에 국한되어서는 안 되며, 보다 깊은 이해와 인간의 창조적 능력의 발휘가 필요함을 시사한다.


   위 인용문은 바로 앞 문단에 이어서 GPT-4가 작성한 글의 일부분이다. 「그레타 복음」의 실제 텍스트에 의거한 해석도 있지만, 기술 활용에 대한 일반론이 조금 과하게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그레타’의 의미는 무엇인가?


   GPT-4 : 

   ‘그레타’는 인간의 지식과 학문에 새로운 시각과 가능성을 제공하는 인공지능으로서의 역할을 상징하며, 이 소설이 기술과 인간의 상호 작용, 특히 인공지능이 인간의 창조성과 학문적 탐구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한 탐구를 내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레타 복음’이라는 제목은 따라서 인공지능 그레타를 통해 인류에게 전달되는 새로운 지식의 복음, 즉 인공지능과 협업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새로운 지식과 이해의 차원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학문적 노력을 어떻게 보완하고 확장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이를 통해 인간과 기술의 미래 관계에 대한 심도 있는 성찰을 제공한다.


   ‘그레타’의 의미에 대한 GPT의 답변처럼 AI는 창작과 학문의 복음서가 될 수도, 묵시록의 재앙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텍스트포칼립스(Textpocalypse)’, 즉 AI가 생성한 텍스트가 범람하여 일으키는 대재앙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존재한다.13) 실제로 SF 잡지 <클락스월드>는 생성 AI로 양산한 투고작들이 대거 응모되는 바람에 더 이상 투고를 받지 않기로 했다.14) 반면에 SF 소설집 『메니페스토』에 참여한 작가들처럼 ChatGPT와 함께 창작에 나선 이들도 있다. 인공지능과 인간의 공존의 방식은 단지 복음서와 묵시록이 아니라, 사실상 그 사이의 무수한 가능태로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을 아는 자들만 이 복음서의 진정한 주인이 될 자격이 있다.

   「그레타 복음」에서 그레타는 등장인물들에 비해 조용히 존재하는 그림자처럼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기계에 연결-접속하는 인간들과의 결합에 의해 세계는 변화한다. 실제로 빌헬름 리히터 재단은 철학의 영향력으로 세상을 좌지우지하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이 음모의 네트워크에서 세계를 향한 그레타의 행위력 역시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 *


   SF 장르는 해당 장르의 기존 텍스트들과 무수한 상호 텍스트적 관계, 즉 메가텍스트(megatext)15)의 깊은 영향 하에서 창작되며, 작가는 이미 존재하는 이러한 맥락과 관습에 자신만의 창의성을 더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작품을 창작한다.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문학 생성 기계인 그레타와 이를 활용하는 학자들의 협력적인 인문학을 SF 장르의 창작에 유비(類比)해 볼 수 있을까? 거칠지만 이러한 비교를 통해 적어도 「그레타 복음」을 경유해 작가의 창작에 대한 사유를 곁눈질해 볼 수 있겠다.

   요컨대, 작가 듀나에게 이 소설의 그레타는 SF의 선행 텍스트이자 메가텍스트이다. 그것은 유익한 참조점인 동시에 새로운 창의성을 발휘해 넘어서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 듀나가 ‘SF 계보’라 부르는 것과 동의어는 아니지만 이와 관련되어 있다. 기계/계보에 종속되지 않으면서도 기계/계보와 더불어,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새로운 창조를 하는 것. 이것이 「그레타 복음」의 학자들이 AI 컴퓨터와 함께 작업할 때의 도전 과제이다. 또한 그것은 SF 작가로서 듀나가 언제나 견지해 온 도전 과제이기도 할 것이다. 그 도전 덕분에 우리는 한국 SF가 싹트고 잎이 피어나는 것을 목격했다. 가지 않은 길을 걸었던 듀나는 이제는 스스로 미래로 나아가는 길이 되었다.


1) 셰릴 빈트, 전행선 역, 『에스에프 에스프리』, 아르테, 2019, 33쪽.
2) 듀나, 『시간을 거슬러 간 나비』, 읻다, 2024, 8쪽.
3) 박상준, 「이영수 작품집 『나비전쟁』에 붙여」, 『나비전쟁』, 오늘예감, 1997, 423쪽.
4) 이경희, 「듀나 유니버스를 위한 안내서」, <씨네21>, 2021.11.04. (http://m.cine21.com/news/view/?mag_id=98911)
5) 이지용, 「듀나론 ― 모르는 사람 많은 유명인의 이야기」, 『오늘의 SF』 #2, 2020, 31쪽.
6) 듀나, 『시간을 거슬러 간 나비』, 98쪽.
7) 사고실험은 실제 실험을 진행하지 않고 마음속에서 상상으로만 이루어지는 실험이다. SF에서 사고실험은 가상의 상황이나 과학적 아이디어를 탐구하기 위해 사용된다. 외삽은 현재 알려진 사실이나 추세를 바탕으로 미래의 상황이나 발전을 예측하는 과정이다. SF에서 외삽은 작가가 현재의 과학적 · 기술적 · 사회적 조건을 미래로 확장하여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데 사용된다.(GPT-4로 생성 후 수정)
8) 근래 필자는 거대 언어 모델(LLM) AI를 문학 연구와 평론에 활용하는 시도를 지속해 오고 있다. 문학 평론을 예로 들면, 노대원, 「Back to the Future, 과거로 시간 여행하는 SF - 켄 리우 SF 소설의 역사적 상상력」, 『문학들』 2023년 겨울호.
9) Anthropic의 클로드(Claude) 3 Sonnet 모델의 경우, 구체적인 줄거리를 제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참고로 2024년 3월 현재, 공개된 거대 언어 모델 AI 가운데 Claude 3 Opus 모델이 언어적 수행이 가장 우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0) SF 장르에서 ‘노붐(novum)’은 다르코 수빈(Darko Suvin)이 제안한 개념으로 과학소설에서 새로운 요소나 현상을 가리킨다. 이 새로운 요소는 작품의 세계관에 고유한 것으로, 현실 세계와는 구분되는 특별하거나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기술, 발명, 사회 구조, 생명 형태 등을 포함한다.(GPT-4로 생성 후 수정)
11) 1번과 2번은 이어지는 대화의 부분이므로 하나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GPT-4의 실제 답변에서 1번과 2번 인용은 번호가 달랐으나 여기서는 이어진 번호로 수정하였다.
12) 물론 GPT-4와 같은 LLM은 대부분 동일한 프롬프트에 대해서도 실행할 때마다 다른 답변 결과를 제시한다. 또한 각 답변의 결과들은 저마다 수준 차이가 발생하거나 사용자의 의도에 적합한 답변을 제출할 확률은 그때그때 다르다.
13) https://www.theatlantic.com/technology/archive/2023/03/ai-chatgpt-writing-language-models/673318/
14) https://www.theguardian.com/technology/2023/feb/21/sci-fi-publisher-clarkesworld-halts-pitches-amid-deluge-of-ai-generated-stories
15) SF 장르에서 메가텍스트는 광범위하게 공유되는 서사적 및 세계관적 특성, 상징, 클리셰, 플롯 구조 및 설정들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SF 공동체에서 공유되고 있는 가상의 SF 장르 용어사전에 가깝다. (GPT-4로 생성 후 수정, 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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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386세대와 패배하지 못한 혁명들의 시차 임세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퇴근 후에 넥타이를 존나 풀고 찾아와 옛 추억에 잠겨 노래 한 곡 워어어어 케케묵은 노래들을 불러대며 울어대네 아름다운 젊음이여 흘러간 내 청춘이여 너희들이 정녕 민주화를 아느냐 이 손으로 일군 민주주의 대한민국 요즘 어린 것들은 몰라도 한참 몰라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투쟁도 혁명도 이제는 모두 봄날의 꿈 그리웠던 혁명동지 돈을 꾸러 찾아왔네 골프채로 쫓아내니 마음속이 허전해 내일은 미스 김의 보지 냄새 맡아야지 밤섬해적단, 〈386 Sucks〉, 《서울불바다》, 2010. 1. 중단된 혁명 이제는 진부한 제재처럼 감각되는 ‘후일담’의 환멸과 자조 이후 한국 문학에서의 386세대 재현은 익숙하지만 낯선 ‘진정성’의 풍광들을 펼쳐 보인다. 이른바 ‘포스트-진정성 체제’1)에서의 속물들의 세계상은 기실 그 문제적 주체로 호명되었던 386세대뿐만 아니라, 386세대에 의해 다시 지목당한 ‘20대 개새끼론’의 대상이었던 ‘88만원 세대’에게도 벗어내기 힘든 혐의였다. IMF 이후 가속화된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서 20대 빈곤의 원인이 세대 간 착취에 있다는 통찰 가운데 던져진 “토플책을 덮고 바리게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2)라는 조언을 (귓등으로) ‘학습’했던 새 세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이었고, 어디로 향하였는가. 타 세대에 의한 명명 대신 “나는 씨발 존나 멋진 이십대 청춘”3)이라며 타락한 386의 ‘흘러간 청춘’을 조소하던 20대는 어느덧 MZ세대의 선봉으로 싸잡아 묶여진 채 40대의 문턱을 넘고 있다. ‘민주화’라는 ‘명분’ 위에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모두 쟁취한 것처럼 조롱되는 386세대에 대한 냉소는 오늘날 “운동권 특권 정치를 청산하라는 강력한 시대정신”4)을 따르겠다는 한동훈 전 국민의 힘 비대위원장의 취임사로 구현되며 동세대 정치인들의 반발과 분노를 유발하기도 했다.5)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본다면 386세대가 이룩한 ‘민주화/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오염되고 폄훼의 대상이 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민주화 시키다’라는 표현은 386세대에 대한 비판이 본격화되었던 201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강제로 억압하다’는 조소의 뜻을 지닌 채 활용되었다. 입으로는 ‘케케묵은’ 투쟁의 추억을 타령하며 실제 삶에서는 동지를 배신하고 돈과 섹스의 욕망을 좇는 운동권 세대를 저격한 〈386 Sucks〉의 면면은 새로울 것도 없는 386의 전형(stereotype)을 노래한다. 그런데 이 오래된 냉소의 역학 속에서 눈

  • 관리자
  • 2024-07-01
오염, 오류, 오독

오염, 오류, 오독 - 소설이 수행하는 ‘다시’ 황유지 마들렌을 먹으며 과자 부스러기와 차 한 모금이 어우러진 달콤한 환기 속에서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일은 마르셀에게 행복을 준다. 그러나 발벡의 호텔방에서 신발을 벗으려다 문득, 할머니가 신을 벗겨 주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은 그에게 행복감을 주지 않는다. 죽은 할머니를 떠올리는 일, 그것은 “고통스러운 소멸”을 확인시킬 뿐이다.1)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이 일화는 과거를 부르는 일이 각기 다른 정서를 환기함에 대한 예시로 내밀어지며 ‘기억’에 착종되는 다양한 감정이 주체를 어떻게 흔들 수 있는지 넌지시 묻는다. 소멸의 확인도 그렇지만 미완, 불완전, 불만족인 채로 내버려둔 사건에 대한 기억의 소환 역시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인데, 그건 엄연히 그 일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라 모종의 감정적 자원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에서 이런 ‘다시’는 레트로로 나타난다. Retrospect, ‘추억’에 뿌리를 둔 이 말은 패션, 음악, 영상부터 먹거리, 금융상품에 이르기까지 그 반경을 확대하며 과거로 우리의 기억을 끌고 간다. 과거의 소환은 이 사회에 대한 일종의 환각제이자 자본주의라는 무한한 기계적 힘에 대한 제동, 그 중단의 본능적 발현이다. 이런 레트로는 과거에 대한 향수, 노스탤지어의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 고대인들에게 노스탤지어란 ‘되돌아가는 일(nostos)’을 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아픔(algos)’으로 이해된다. 그러니까 레트로는 돌아갈 수 없는(가본 적도 없는) 시절을 향한 자본주의적 환각제이다. 프루스트의 위대한 주제가 사물들을 처음 경험할 때의 무능력이라 파악하는 프레드릭 제임슨은 진정한 경험이 우리가 의식적으로 다른 것을 의도하는 동안, ‘눈가’를 통해 온다면서 그 가능성을 글쓰기에서 찾는다. 기어이 돈을 주고라도 사겠다는 환각성 추억과는 달리 기억을 통한 글쓰기는 상실한 것을 복원하려는 고도의 정신 작업이랄 수 있다. At the corner of eye, 거기가 바로 진정한 경험이 되돌아오는 자리로 가장 의도적인 두 번째 경험, 글쓰기는 그 형식이 된다. 2) 글쓰기는 행해짐과 동시에 복수의 행위자를 탄생시킨다. 쓰는 자와 읽는 자,3) 이는 시차(時差)와 함께 탄생하며 텍스트가 현실과 맞닿은(혹은 결별한) 그 부위에 필연적으로 틈을 만든다. 대체로 모든 문제는 이 ‘틈’에서 태어나는 것처럼도 보인다. 틈은 이미 분리, 분절된 것으로 존재하면서 거기에 무엇을 메우든 결코 원본의 형태를 완벽히 구현할 수 없다. 원본처럼 복원한 것조차 복사본일 따름이라 틈은 그 자체 오류가 되는 것이다(가령 원본이 틀린 것이라 할 때도 제대로 수정된 본은 오류가 된다. 틀린 원본에 대해 기어이 맞추어진 진실

  • 관리자
  • 2024-07-01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이소 1. 스무 살을 훌쩍 넘어 성인이 되어도 자신을 어른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뉴스를 보면 언제나 피해자의 억울함에 몰입하고, 많은 경우 나를 포함하지 않은 채 ‘어른들’에게 분노를 터트리는 사람. 2014년 4월 16일, 이 날 나는 처음으로 어른의 자리에서 사건을 경험했다. 아이의 자리가 아닌 해운회사의 직원이나 공무원이나 인솔 교사의 자리에 서 있었다. 항해사나 해경보다 교사인 나를 떠올리기가 더 쉬웠다. 누구나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기억이 있으니까. 나는 전문가를 깊이 신뢰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내가 그 배에 탔다면 안내 방송을 충실히 따르며 어른들과 시스템을 믿으라고 아이들을 다독였으리라는 걸 알았다. 누가 보아도 나는 완벽히 어른이었다. 굳이 괴로웠다는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그때는 모두가 괴로웠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다음해 문학을 전공하러 대학원에 들어갔다. 누군가 공부라는 게 어떤 실천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런 답변도 떠올릴 수 없다. 나부터가 그런 희망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전처럼 살 수 없을 뿐이었다. 나는 어른이었고,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수습될 수 있는 사고가 아니라 소화할 수 없는 사건이었으며, 내게는 더 정확한 언어가 필요했다. 딱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었다. 2. 지금도 교사인 나를 상상해 본다. 항해사나 해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교사라는 직업과 위치가 내게 어른이란 무엇인지 사고실험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과 달리 미성년인 학생들을 상대하는 교사는 흔히 이중적인 이미지로 재현된다. 전교조와 교총을 교대로 인터뷰하는 기사의 관례처럼, 전통을 수호하는 보수적인 교사와 변화를 추동하는 진보적인 교사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그려지는 건 흔한 일이다. 제도가 부여한 의무와 규범을 학생들에게 어디까지 얼마만큼 요구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한 명의 교사를 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지만, 이 경우에도 그의 심리적 갈등은 그의 교육방식에 딴지를 걸 더 완고한 교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전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코 전위적인 존재에 도달할 순 없지만, 마땅히 후위의 역할은 초과해야 하는 사람. 그러나 생각해 보면 교사만 그럴 리는 없다. 모든 직업은 사회가 요구하는 허용범위 안에서 가까스로 변주를 시도하고, 모든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며 유사한 딜레마에 빠진다. 교사는 자신의 의무를 익히 아는 어른의 상징이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점점 학생보다 교사에게 더 쉽게 이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문제는 오래되고 흔한 방식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현이 더는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데 있을 것이다. 어차피 시대가 변한 줄 모르는 늙은 교사들은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없다. 보수적인 교사와 진보적인 교사의 대립은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갈등을 통해 사회를 혁신하는 재생산 메커니즘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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