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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망스 미학과 새로운 ‘합일’을 희구하는 낭만적 주체의 언어

  • 작성일 2024-05-01
  • 조회수 883

   로망스 미학과 새로운 ‘합일’을 희구하는 낭만적 주체의 언어


염선옥


   첨단 테크놀로지의 물결이 세계를 장악하면서 시를 쓰는 철학적 기반에도 작지 않은 변화가 초래되었다. 가령 시 쓰기의 새로운 지표가 친환경적 태도로 기울어 가거나, 고독과 우울 같은 정서를 급격하게 동반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의 이면에는 서정적인 것이 낡은 것이라는 신념이 도사리고 있는데, 이는 시인들이 “‘서정적=감상적’이라는 오도된 등식과 연쇄적으로 마주”1)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삶의 모순을 표현하는 데 서정적 일치감보다는 대상과 내면 사이의 불일치를 선택하는 경향이 우세해진 것도 그 까닭의 한 측면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K-팝과 시가 화려한 리듬과 언어유희를 독자에게 전달한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K-팝이 선풍적 인기를 구가하는 것에 반해 시는 일부 문학인들의 전유물로만 공유되고 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K-팝이 K-문화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세계인들에게 통할 보편적 상상력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는 새로움이 주체의 상상력에서 연유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사유하는 것도 상상력”2)이라는 바슐라르의 표현처럼 K-팝은 이미지와 사유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음악이 덮고 있는 낭만성, 서정성이라는 은밀한 파동을 전달한다. 음악이 읊는 이미지는 사유로 이어지고 그것은 다시 ‘너’의 사유로 가닿는다. 이성의 시대를 맞이하면서“시를 쓸 수 없는 시대”, “시가 죽었다”라는 클리셰가 난무하는 가운데도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열정은 조금씩 패턴화되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그런 와중에 문단 내로 불어오는 ‘서정’의 바람은 꽤 육중하고 소중하게 다가온다.


   비역동적 세대의 내적 추락


   2010년대 들어 청년층을 가리키는 신조어들이 국내외에서 쏟아져 나왔다. 국내에서는 3포 세대에 이어 N포 세대라는 신조어가 나왔고,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사토리 세대, 중국에서는 탕핑(躺平, 당평, 눕자) 족이 출현했다. 2010년대 기준 청년실업 등 여러 사회 문제에 시달리는 20~30대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암울한 현실을 일컫는 ‘N포 세대’는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의미를 염두에 둔 부정적 용어라고 볼 수 있고, 사토리 세대(とり世代)는 불교 용어로서 ‘깨달은 세대’, ‘득도한 세대’로 해석되어 물질적 욕망에서 벗어난 초월적 존재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현대사회에서 희망을 포기한 젊은 세대를 일컫는다. 탕핑 족 역시 “평평하게 누워 있기”를 뜻하는 중국어로서 그 속내는 제아무리 일을 열심히 해도 대가가 없고 결국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 있는 게 현명하다는 뜻을 함축한다. 이는 존재의 고유한 운동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세대를 통칭한다는 점에서 공통 함의를 띠고 있다.

   한국과 주변 국가에 불어온 이러한 어휘들은 청년층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인식한 기성세대의 표현이자, 기성세대가 쌓아올린 유산에 대해 합일되기를‘포기’한 세대에게 보내는 부정적 시선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들은 과연 ‘포기’를 택한 세대일까? 오히려 정반대로 이들은 주어진 옛것을 모방하고 계승하며 감성과 이성의 조화나 형식과 내용의 통일을 목적으로 합일의 세계를 도출하고 추구하려는 인습적 세계를 ‘거부’하는 세대가 아닐까. 혹시 기성세대는 이 시대가 누리는 풍요로움을 자신들이 이룬 업적으로 돌리며 다시 오지 못할 정황에 대한 미련과 동경, 향수를 통해 청년층을 향해 ‘낭만’ 없는 세대라고 말하곤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그들을 가리켜 청년층은 ‘라떼’ 혹은 ‘꼰대’로 부르며 인습적이며 과거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들로 바라본다. 결국 청년층과 기성세대는 서로에게 무관심한 태도로 공존하는 셈이다.

   음악이 나오지 않는 헤드폰을 낀 채로 근무하고 전동킥보드를 타고 출근하며 회식은 선약이 아니면 불가능한 청년층의 행태를 기성세대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을 낭만의 세대로 규정하고 청년층을 이성의 세대로 규정하는데 그것은 ‘낭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낭만’을 뜻하는 ‘로망스’라는 말에는 두 개의 함의가 있다. 하나는 기성세대가 사용하는 삶의 낭만적 태도를 가리키고, 다른 하나는 18세기 말 유럽에서 전개된 문예사조로서의 낭만주의 개념3)이다. 젊은 청년층은 기성세대의 형식과 틀을 중시하는 태도, 제한된 정서와 감정의 억제, 객관적 경험을 우위에 두는 성향 등을 비판하면서 그들을 동시대의 ‘청년층’으로부터 분리하려 하고, 기성세대는 ‘낭만’의 두 번째 개념으로 청년층을 바라보려 하지 않는다. 청년층은 개인의 무의식적 자아를 중시하면서 동시에 기존 세계가 제시하는 틀과 형식을 거부한다는 차원에서 낭만주의자들이다. ‘로망스’는 라틴어 roman에서 출발한 낭만주의(Romanticism)는 있음직한 것(probable)이 아니라, 놀랄 만한 것(wonderful)이고 어떤 기이하고(strange) 당돌하며(unexpected) 강렬하고(intense) 극단적(extreme)이면서도 진기(unique)하여 전통적인 혹은 고전적(classic)이라고 불리는 것과 근본적으로 대조를 이룰 때 사용되기도 한다.4) 오늘날 청년층은 기존 세계가 형성해 온 ‘합리주의’를 거부하고 ‘비합리주의적 사고’를 삶의 방법론으로 택한 존재들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이성을 거부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로 파악되었던 이성과 진리가 불변이 아니며 인간 존재의 삶에 답을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이처럼 청년층은 21세기가 내세우는 평균화와 표준화, 기준과 질서에 강하게 반발하고 합의보다 개성과 독창성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한다. 이들은 새로운 ‘합의(Unity)’가 필요하다고 믿는 존재들이다. 개성과 주관성, 감성과 조화가 분명 로망스의 요소이면서 동시에 질서의 거부, 통일의 포기나 형식과 틀을 진부하거나 낡은 것으로 보려는 시각 역시 ‘로망스’가 지닌 양가성이다. 따라서 21세기 우리 세대에게서 포착되는 예술성은 낭만성 혹은 낭만주의 문학의 가능성에 기분을 두고 있다. 이들의 자연관은 낭만주의 시대의 자연관처럼 “만들어진 자연(natura naturata)으로서가 아니라 만들어 가는 자연(natura naturans)”5)으로 존재한다. 로망스의 두 가지 층위에서 기성세대의 ‘로망스’가 청년의 로망스와 다른 의미라고 할 때 기성세대가 청년층에게서 포착하는 위기는 무엇일까. 그것은 비역동적 세대의 포기의식이 내적 추락에 기인하고 있다. 그들의 포기의식은 역동적 주체로서의 포기와 관련해 무수한 관계와 경험의 부재를 낳고 빈약한 사유로 시적 질서를 뒤흔들기 때문이다.


   경험의 부재 : 경험 분배의 역학적 구조


   경험은 문학의 주요 소재가 된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아니 에르노는 한 개인의 경험이 어떻게 사회적 글쓰기가 될 수 있는지를 과감히 보여주었고, 한스 카로사는 『뷔르거 의사의 운명』을 포함해 자기의 체험에 바탕을 둔 자전적인 소설을 다수 썼다. 마크 트웨인(Mark Twain)이라는 필명으로 더 유명한 새뮤얼 랭혼 클레먼스(Samuel Langhorne Clemens, 1835~1910)는 필명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듯이 배를 대는 거리 ‘2길’을 이름에 붙였을 만큼 항해사가 되고 싶었던 자신의 꿈을 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이라는 가상 인물을 통해 보여주었다. 모험소설 『톰 소여의 모험』과 『허클베리 핀』이 그 결과물이다. 헤밍웨이가 사냥이나 낚시를 다루게 된 것도 경험이 풍부했기 때문이며, 최근 장애문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가능성을 연 『미라클 크리크』의 앤지 김 역시 이민자라는 자신의 경험과 병치레가 잦은 세 아이를 키운 어머니, 변호사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쓴 바 있다. 그가 이 소설을 “내 인생의 궤적과 맞닿아 있는 아주 사적인 책”6)이라고 밝혔듯이 소설 속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 장애와 질병, 치료 과정과 진실, 고통받는 가족, 언어 문제 등이 핍진하게 독자의 가슴에 와닿는 것은 경험의“정체성”과 관련지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시의 창작 과정이 자신의 경험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시는 어느 정도 서사적 속성을 지니게 된다.

   계급과 권력은 분배의 역학 구조 속에서 결정된다. 마르크스나 푸코 등을 비롯한 여러 연구자가 자본과 자원의 분배에서 출현한 수직적 구조에 주목해 왔다면, 21세기 우리는 자원과 자본의 불균형적 분배가 촉발하는 ‘경험의 불균형적 분배’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경험의 불균형은 사유뿐만 아니라 삶의 의욕으로 이어져 결국 존재의 정신적 정점에서 어떠한 관념과 이미지를 출항하기 때문이다. 경험의 박탈은 삶에 대한 문학적 묘사의 윤색을 퇴색시키고 그 이미지가 촉발시키는 부정적 격정 속에서 희망 대신 분노와 적의를 드러내게 한다는 점이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다.

   현대사회의 과학기술과 생명기술은 수명 연장과 관련된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쳤고 특별히 사회적 주체로 여겨지는 청년층을 확장했다. 넓어진 청년층 속에서 젊은 청년(Young Adults)들은 기성 청장년층들의 위계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양상을 띠곤 한다. 그 과정에서 MZ 세대들은 기성의 틀에 자신을 맞추기를 포기하고 자신들만의 틀을 새롭게 써나가는 방식으로 세계를 조성해 나가고 있지만, 사회경제적 차원에서 여전히 역부족이다. 이들은 종종 사회경제적 열세 가운데 독립하지 못하고 여전히 박탈과 배제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바우만(Zygmunt Bauman)은 『새로운 빈곤-노동, 소비주의 그리고 뉴퓨어』7)에서 사회가 정의하는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될 때 인간 실존은 괴로움과 고통 그리고 굴욕을 느끼게 된다고 하였다. 그 사회에서 ‘행복한 삶’이라고 정의하는 기회들로부터의 단절과 박탈은 사회에 대한 희망 대신 분노와 적의, 폭력의 형태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고 경고하였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구촌 사람들은 각기 다른 차이에도 불구하고 유사한 경험에 묶여 살아간다. 이제 세계는 문화적 차이가 아닌 사회경제적 차이 속에서 극심한 정신적 빈곤과 고독, 경험을 당하는 세대가 새로운 서발턴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확장된 청년층은 분열된 채 놓여 있다.



   소년은 첨벙첨벙 물놀이를 한다

   매끄럽게 가라앉고 물 밖으로 솟아오른다

    웃는 얼굴이다

    우는 얼굴이다

    스포츠머리를 하고

     신경과에서 뇌파검사를 받기도 하고


    사랑

    사랑은 한 적이 없었다

    사랑은 병원보다 비쌌고


    흔들의자에 앉아 발장구를 친다

    질 좋은 재킷을 입고 앉아 있는 사내를

    자신을

    누군가 잘 그려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중략)···


    저 비둘기들을 사랑해야지

    감정을 사용하지 않으며

   끝까지 남는 비둘기 한 마리를

   슬쩍 차버려야지, 놀래켜야지

     연약한 것이 얼마나 연약한지

     세상에 보여줘야지, 적어도 두세 명은 보겠지

     비슷한 사람들끼리 주저앉겠지


     전조등 불빛 아래 떨어진 단추처럼

― 장수진, 「청춘」, 『순진한 삶』 부분8)



   서발턴으로서 청년들은 사랑을 “한 적이 없”다. “사랑은 병원보다” 비싸기 때문이다. 시적 주체는 “비둘기들을 사랑”하기로 한다. 그것은 비용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주체는 비둘기를 차버리거나 놀라게 할 때 “연약한 것이 얼마나 연약한지/세상에 보여”주고자 한다. 자신보다 연약한 존재를 놀라게 함으로써 자신의 연약함을 가리고자 한다. 그런 상황에서 시적 주체는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같은 위치에 있는“적어도 두세 명”이 관심을 가지고 그 장면을 함께 볼 것이라고 믿는다. 이들은 시적 주체와 “비슷한 사람”일 테니까 말이다. 주체가 바라보는 「청춘」 주체들은 관심을 주고받고 싶지만 어떤 것도 택할 수 없는 포기의 존재들이다. 이들은 “질 좋은 재킷을 입고 앉아 있는 사내”에게서 이질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부러움을 느낀다. 그러나 주체는 포기하지 않고“밤이면 강가를 따라 달”린다. 그것은 “자신의 생이 그리 짧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또한 “비슷한 사람들끼리 주저앉으면//그것은 전조등 불빛 아래 떨어진 단추처럼” 보이겠지만, 그래도 함께할 수 있다면 “비둘기들을 사랑”하기로 하는 것이다.


   로망스와 서정의 상실


   기성세대가 청년층을 낭만의 세대로 인정하지 않는 데에는 사토리 세대, 탕핑 족, N포 세대가 포기한 것이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뿐만 아니라 주체를 풍요롭게 하는 관계와 로망스, 서사도 포함된다는 데 있을 것이다. 가령 “삶의 전체성을 다루는 실천적 명제로서의 ‘시’”9)가 되어야 하듯 삶은 감각과 사유, 신체 모두가 통합적으로 이루어내는 실천이면서 경험을 통해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2000년대의 시를 가리켜 서정의 근원을 상실했다고는 보는 데에는 주체의 해체와 분열, 산문화된 시의 형식에만 그 이유가 있지 않다. 로망스와 서정의 상실은 결국 한 개인의 전체성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지식과 정보의 범람이라는 세계를 살아가면서 개인의 경험은 초라한 것으로 폄훼되기 일쑤다. 그러나 삶은 합리적인 것, 과학적인 것이 대신해 줄 수 없는, 사유의 내적 운동에 의해 동화와 이화 과정을 거쳐 가게 마련이다. 경험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결과물이라고 할 때, 경험의 부재는 윤리적 존재로의 이행을 실패하게 만들고 타자를 역동적 주체의 자리에서 내쫓는 결과를 낳는다. 여기서 논하는 윤리란 시의 내용이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초대 없는 시적인 것의 완성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리라’에서 어원을 가져온 서정은 악기의 떨림과 파장을 전하는 행위이며 그것을 듣는 청자의 사유가 움직이는 과정을 포함한다. 시가 한 개인을 휘감은 사유의 파장을 오브제를 통해 전달하는 것이며 그 진폭을 느끼는 독자에게서 공감과 교감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서정과 낭만의 상실은 우리로 하여금 윤리적 존재로 나아가지 못하게끔 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의미는 의미를 말한다고 해서 전달되지 않는다. 오히려 공감의 파장으로 의미의 전달이 가능하다. 이때 어떤 젊은 시인들은 요설과 현란함만이 남은 시들에 대한 비판적 시각 이후 공감의 파장과 진폭으로 새로운 합일을 희구하는 낭만적 주체들로 출현하고 있기도 하다.



   고르고 고른 선별된 사람들 자발적으로 자본을 쓰고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들 한순간엔 모두 신부님 바라보며 맹신하고 신부님 읊으시는 순간 일제히 고개를 처박거나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지 그런데도 물어 신부님 방금 말씀하신 게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 애당초 너희의 이해를 바라며 기록된 것도 아닌데도 너무 바라지 염원하지 온전히 읽고 가닿을 수 있기를 아무런 의도도 없는 맑은 눈의 광······신도 같은 질문에 신부님 조금 당황했지 나는 이 모든 상황을 보면서 생각했지 이건 전부 우리의 잘못이라고 이런 짓은 한참 전에 그만뒀어야 했는데 조금 일찍 태어났다고 너무 늦게 태어났다고 서로 눈치 주고 눈치 보고 승인하거나 승인하지 않고 그렇게 만들어진 무작위적인 힘은 정말로 과녁이 없어서 쏘는 사람을 미치게 만들지 무슨 살을 날려야 하는지 얼만큼 정확해야 하는지 애초에 살을 쓸 필요가 있기는 한 건지 건방지게 과녁 자체를 의심하게 되지 그래도 신부님 당황하지 않았어 모른다고도 말 않았지 사실로서의 가오와 굶주림의 기개가 있잖아 그는 능숙히 빠져나갔지 역시다운 임기웅변이었어


   ···(중략)···


   이건 우리 모두의 잘못입니다

   기대를 너무 많이 한 당신의 잘못입니다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지나치게 격양된 당신의 잘못입니다

   지나치게 격양된 동료와 후배와 선배 들 가로막지 않은 당신의 잘못입니다

   마구잡이 의미로의 중축 죽은 당신의 잘못입니다

   그것을 타파하지 않고 오로지 답습하며 재생산과 물살 타기에만 급급했던 당신의 잘못입니다

   그들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권리는 오로지 당신에게만 있었는데 그걸 알았는지 몰랐는지 상관없어 무조건 당신의 잘못입니다

   세계를 의미로 단절시킨 당신의 잘못입니다

   의미의 의미를 말했어야 했는데 그건 정말 당신의 잘못입니다

   눈물 용서 기도 무릎의 패배 시위 강령

   모두 틀렸습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습니다

   이미 도래했기 때문에

   대비하십시오

   말들이 현재를 살생할 수 없도록

   그것이 직업이 되지 않도록

   굶지 말고

   손쓰며 막으십시오

  ― 박참새, 「우리 이제 이런 짓은 그만해야지」, 『정신머리』 부분10)



   2023년 연말에 나온 박참새의 『정신머리』는 긴 산문 형식에서도 서정을 해체하려는 움직임보다 음악적 리듬과 성찰적 사유의 전달이 얼마든지 가능함을 증명한다. 그의 시는 기성세대와의 융합을 택하기보다는 그들과 불화함으로써 윤리적 존재의 진실과 현실의 아이러니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는 반(反) 서정을 택하는 것과 유사한 방식이지만 우리가 회복해야 한다고 믿는 시적 윤리성이 그 안에 담겨 있다는 점에서 분명 서정의 회복 가능성을 충일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되고도 남는다. 신부님이 “읊으시는 순간 일제히 고개를 처박거나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는 성도들 사이에서 ‘나’는 “방금 말씀하신 게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 묻는다. “신부님 조금 당황”하고 ‘나’는 “이 모든 상황을 보면서” 생각한다. “이건 전부 우리의 잘못이라고 이런 짓은 한참 전에 그만뒀어야 했”다고. ‘나’는 “마구잡이 의미로의 중축”은 “죽은 당신의 잘못”이라고 말한다. “그것을 타파하지 않고 오로지 답습하며 재생산과 물살 타기에만 급급했던 당신의 잘못”이라고. 오히려 이것이 “의미의 의미를 말”하게 만들었노라고. 그래서 이제 ‘나’는 “이미 도래했기 때문에/대비하”여야 한다고 한다. “말들이 현재를 살생할 수 없도록/그것이 작업이 되지 않도록/굶지 말고/손쓰며 막”아야 한다고 말이다.


   새로운 감성, 로망스의 흔적들


   청년들은 절대적 자아라는 무시무시한 망루에서 벗어나11) 모든 존재와의 대화 가능성을 열어 간다는 점에서 신(新)낭만주의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인간이 피조물로서 자연으로 돌아가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에 의해 존재가 스스로를 드러낸다는 주체 중심의 움직임에서 벗어나야 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시인은 자기가 생각하고 느낀 바를 표현할 수 있는 위대한 능력을 지닌 존재지만, 종종 재현 수단에 매이는 한계를 지닌다. 시인에게 틀과 형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면 예술은 현실을 담아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재현된 미학적인 것은 객관적 이상에 따라 창출된 결과물일 뿐이다. 시인은 의식에 앞서 발현되는 본유의 속성인 목소리와 몸짓, 속성을 읽어내야 한다. 그것이 의식 속에 스며들고 사유를 전율케 해야 한다. 그것은 익숙해진 관념과 통념에 자연과 사물을 내부에 가두지 않고 그들 스스로가 넘치게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1800년 Wordsworth가 Lyrical Ballads의 서문(The Preface)으로 첨가한 로망스 시의 정의와 목적은 오늘날 ‘신(新) 낭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What is Poet? He is a man speaking to men······

   All good poetry is the spontaneous overflow of powerful feelings: it takes its origin from emotion recollected in tranquility.12)



   2000년대 이후의 시를 향해 낭만의 상실, 서정의 근원이라고 말하는 것은 시적 주체가 시 속에서 해체되고 리듬을 잃은 점에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최근 젊은 시인들은 고도의 기술사회의 발달로 억압되고 상실된 인간성 회복을 강조하는 시편들을 써나가고 있다. 이들은 자연을 일방적으로 찬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현대의 과학기술로 미래를 미화하지 않는다. 또한 고독을 절대적으로 부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다가올 미래를 부정적으로 예견함으로써 위선과 타락으로부터도 거리를 두고 있다. 이들은 고통과 가난, 추악한 사회에 존재하는 부조리를 그대로 인식하고 그것이 야기하는 정서로부터 달아나지도 그것에 동조하지도 않는다.



   지구는 평평하다


   피켓을 든 사람과

   비난하는 사람들이

   사이좋게 눈을 맞고 있었다


   나는 녹색 불이 켜지길 기다리며

   지구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다가

   건너가도 좋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신이여, 저는 불신이 가득한 자

   이것은 어디로 건너가라는 계시입니까

   그때 신이 말했다


   네가 평평하지 않고 공평하다면

   세모일 수도 있고

   네모일 수도 있고

   청설모일 수도 있지


   ···(중략)···


   천사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눠준 전단을 받았다

   진실을 밝혀라

   지구는 평평하다


   미안해요 천사

   나는 아직도 지구가 둥글다고 생각해


   하지만 엄마의 병이 다 나아서

   검은 머리가 난다면


   그때는 평평지구

― 민구, 「평평지구」 부분13)



   한때 지구는 ‘평평’하여 “둥글다고” 외치는 목소리를 불온한 것으로 여긴 적이 있었다. 시적 주체는 “지구가 둥글다고 생각”하는데 “지구는 평평하다//피켓을 든 사람들과/비난하는 사람들” 사이에 서 있다. 시적 주체에게 지구가 둥글다는 것, 지구가 평평하다는 것은“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물음표”로 어쩌면 “낭떠러지로 향하는 이정표”일지도 모른다. 시적 주체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어떠한 객관의 사실이 아니라 ‘나’의 감정과 정서, 삶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들이다. 주체는“천사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눠준 전단을” 받아 본다. ‘참’만을 말할 천사 옷을 입은 자들은 “진실을 밝혀라/지구는 평평하다”라고 외치고 절대적 진리라 믿어 왔던 ‘신’과 ‘천사’의 복장을 하고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서 “사랑에 목마른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시적 주체는 “나는 아직도 지구가 둥글다고 생각”하지만 “엄마의 병이 다 나아서/검은 머리가 난다면//그때는 평평지구”라고 믿겠다고 말한다. 세계를 흔드는 이성과 객관의 것이 한 개인의 내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아이러니’처럼 최근 젊은 시인들은 ‘객관의 것’이 지니는 모순성을 드러내는 중이다.


   삶에서 로망스와 새로운 서정을 논하는 것은 낭만 주체의 회복을 꿈꾸기 때문일 것이다. 첨단 과학기술과 정보화 사회에서 부와 권력의 불균형은 낭만의 불균형적 분배로 이어지고 이들은 모든 것을 간접 경험함으로써 타자 초대를 거부한다. 타자뿐만 아니라 주체의 내적 추락은 사유를 빈약하게 하고 윤리적 존재로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그러나 젊은 세대들을 비윤리적 존재나 자기 성찰에 인색한 존재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그들은 새로운 합일을 희구하는 신(新) 낭만의 주체이며 서정을 새롭게 해석하려 하는 이들이다. 비록 그들은 연약하지만 기존의 질서와 법칙, 그리고 서정을 배척하려고만 하지 않는다. 공감적 정서는 텍스트의 순환성과 생명성이고 문학 수용을 용인하게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은 서정을 매개로 타자에 가닿고 타자를 통해 윤리적 존재로 나아감을 잘 아는 주체들이다.


1) 유성호, 「사물과 상상력을 결속하는 원리로서의 서정」, 『서정의 건축술』, 창비, 2019, 33쪽.
2) 가스통 바슐라르, 『공기와 꿈』, 이학사, 2020, 184쪽.
3) 이숭원, 「낭만의 시학」, 『가히』 2024 봄호, 문학의전당, 40쪽.
4) 이창배, Romantic and Victorian Poetry, 신아사, 1981, 13쪽.
5) 구본철, 「워즈워스의 『서정민요집』의 낭만성」, 『국제언어문학』 14, 국제언어문학회, 2006.12, 200쪽.
6) 앤지 김, 이동교 옮김, 『미라클 크리크』, 문학동네, 2021, 5쪽.
7) 지그문트 바우만, 이수영 옮김, 『새로운 빈곤-노동, 소비주의 그리고 뉴퓨어』, 천지인, 2010, 72~73쪽.
8) 장수진, 『순진한 삶』, 문학과지성사, 2024, 150~151쪽.
9) 유성호, 「극서정시의 미학적 비전과 성취」, 『서정시학』, 32(1), 2022.3, 15쪽.
10) 박참새, 『정신머리』, 민음사, 2023.12, 61~63쪽.
11) 앤터니 이스톱, 박인기 옮김, 『시와 담론』, 지식산업사, 1994, 188쪽.
12) 강선구, 『낭만주의 영시 해설』, 한신문화사, 2002, 6쪽 재인용.
13) 『현대시』 2024년 3월호, 한국문연, 2024.3, 124~1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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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을 넘는 법

세계의 끝을 넘는 법 박인성 왜 시간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시간이란 모든 것이며,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다. 시간은 물질세계의 변화를 파악하는 우리의 인식에 불과하지만, 언제나 실제적인 힘으로 우리 삶에 개입한다. 시간을 단위로 파악하는 것은 인간 사회의 편의적인 메커니즘일 뿐이지만, 그러한 메커니즘이 다시금 인간의 모든 삶에 작동하면서 우리의 모든 사유와 행위를 시간이라는 틀에 맞추어 운영하게 만든다. 인간이 만들어낸 사변적 도구가 다시 우리의 삶을 조직하고 운영하는 내재적 체제가 된다는 흥미로운 생각이다. 우리는 실시간으로 시간을 측정하지만 모든 시간에 대한 경험은 순간적이며 지속되지 않는다. 하지만 놀랍게도 시간에 의해서 변화하는 그 모든 것들의 누적된 결과는 지속적이며 실체적인 방식으로 우리 삶에 개입한다. 이것이 시간을 이야기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다. 시간은 순간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된 결과로서 주관적 경험에 그칠 수도 있는 인간 삶에 대한 근사치의 이해를 제공한다. 어디까지나 근사치 말이다. 인간이 처음으로 자연의 운행을 파악하는 시계를 만들고, 달력을 통해서 시간의 흐름을 정례화한 순간부터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변화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인간은 오랜 세월 시간이라는 운영체제(OS)에 의해서 작동하는 시간-사이보그로서 살아왔으며, 이러한 운영체제에서 벗어날 수 없어 보인다. 시간이라는 개념의 재귀적 성격은 시간을 다루는 모든 확장된 논리를 발견하고 활용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기억과 회상, 약속과 지연, 예언과 예지는 모두 인간이 시간이라는 틀을 활용해서 세계와 타인에 개입하기 위한 조작적인 수단에 불과하다. 시간은 허상이지만 동시에 실존하며, 인간은 시간에 대한 조작적인 사유를 통해서 의미를 조직해 낸다. 이것이 우리가 시간을 이야기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다. 시간은 결코 분절되지도 정지할 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끊임없이 멈추거나 지연시킨다고 생각하면서 시간에 대한 경험적 이해를 형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의미’란 바로 시간을 사유하는 조작적 시간(정지와 지연)에서만 발견되고 생성된다. 사실 시간을 정지시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삶의 의미를 떠올릴 때, 우리는 삶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공간이 존재하는 것처럼, 일종의 ‘시간의 바깥’을 상연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인터스텔라(Interstellar, 2014)〉에서 블랙홀을 통해 진입한 5차원 공간에서 과거 지구를 떠나기 전 딸 머피와의 만남을 다시 바라보게 되는 조셉의 모습은 비유적이지만 정교하다. 우리는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을 벗어날 수 없지만, 마치 다른 중력의 영향을 받듯이 느려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나간 삶에 대한 예외적인 의미화를 수행할 수 있게 된다. 이미 흘러가 버렸으며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순간들이 마치 구조화된 순서처럼 배열되고 우리는 거기에 그럴듯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SF 장르로서 〈인터스텔라〉가 물리 법칙에 주어진

  • 관리자
  • 2024-06-01
정주하지 못하는 인간들

정주하지 못하는 인간들 - 서수진의 「한국인의 밤」, 「헬로 차이나」 최정호 2024년,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고향을 떠나 어딘가로 이동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지속되는 전쟁과 기후 재난으로 발생한 난민들의 사례가 연일 보도되고, 저마다의 이유로 한국 사회에 정착하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다문화 가정도 증가하는 추세다. 문화적으로는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와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를 통해 이민자와 재일조선인의 서사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도 했다. 이 두 작품은 디아스포라 정체성을 지닌 인물들을 조명해 소수자성을 서사화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1) 디아스포라는 본래 제1성전과 예루살렘의 파괴로 인해 세계 각지에 정착한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때의 디아스포라라는 용어는 상실이나 추방 혹은 시련과 연결된다. 하지만 오늘날의 디아스포라는 이주에 방점이 찍혀 사용되고 있다. 강제로 추방된 소수의 집단 공동체나 정치적 난민뿐만 아니라 자발적인 이민자와 소수 인종 등과 같은 다양한 범주의 사람들도 디아스포라로 포괄된다.2)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주민의 정체성을 디아스포라로 단편화할 때, 그 말은 “그 사람들을 한 장소에 단단히 고정시키고, 디아스포라를 셀 수 있는 실체로 환원”3)한다. 다시 말해, 고향을 떠나 새로운 장소로 향하는 중이거나 도착한 이들의 복합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한데 모아 디아스포라로 호명하는 것은 정주하지 못한 이들을 한 장소에 고정하고 구체화하는 작업이다. 이는 이주민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이주의 이유와 정주 과정의 어려움이 한데 모여 뭉개진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다. 이주민들이 고향을 떠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그들은 애써 도착한 장소에 정주하지 못하고 디아스포라로 호명되는가. 소니아 샤는 이주민들에게 왜 이동하는지 물을 수 있지만, 직접적이고 단순한 방식으로 답하기는 어렵고, ‘왜 이동하느냐’는 질문 속에는 어떤 하나의 이유로 설명될 수 있음이 전제되어 있다고 말했다.4) 이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복합적인 맥락들이 생략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때때로 이주민들이 겪는 문제는 인종차별, 부적응, 향수병의 차원으로 수렴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맥락들이 있다. 오늘날의 이주민들이 디아스포라로 환원되고 있다면, 서수진의 소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맥락을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에 띈다. 서수진의 소설집 『골드러시』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 어딘가를 떠나(대체로 대한민국)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이주에 방점이 찍혀 있는 일반적인 디아스포라의 용례로 설명할 수 없는 복합성을 지니고 있다. 서수진의 소설 속 인물들은 새로운 장소에 도착했으나 정주하지는 못하는 양상을 보이는데, 이는 사실상 여전히 이동 상태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인물은 새로운 공동체에, 누군가는 집이라는 공간에 집착한다. 이동 과정에서 균열

  • 관리자
  • 2024-06-01
To be, or not to be,

To be, or not to be, 홍미르 It's the economy, stupid. 평단에서 처음으로 ‘매력의 경제’를 문제 삼았던 이희우는,1) 「비판이 오래 가르쳤지만 배울 수 없었던 것들」2)에서 비평이 취해야 할 자세를 제시하고 「배움의 단계들—손보미, 「불장난」 읽기」(이하 「단계들」)3)를 통해 구체적인 비평까지 선보인 바 있다. 여기서 전개된 그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미와 윤리의 칸트식 분리가 효력을 다한 오늘날 비판은 더 이상 비평적 개념으로서의 ‘매력’을 도외시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매력의 경제와 그에 대한 실망을 배움으로 승화시킬 의무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의해야 할 점은 김건형의 지적처럼 그의 이론이 다분히 신비평적 결말에 이를 위험을 내포한다는 점이다.4) 「단계들」에서 그는 작품 속 매력과 실망에 따른 배움의 과정을 상세히 열거하는데, 이 과정에서 작중 주인공의 배움만 명시되기 때문이다. 즉, 작중 배움이 어떻게 작품 바깥의 ‘배움’으로까지 이어지는지는 공백으로 처리된 셈이다. 이 공백이 확정적 결여가 될 때 ‘배움의 비평’은 “텍스트의 언어·형식적 운동성에 대한 감탄”5)에만 국한된 채 사회·역사와 유리된다는 신비평의 한계를 답습할 여지가 있다. 쉽게 말해 작중 주인공의 배움과 독자의 배움은 별개라는 뜻이고, 독자의 배움이 뒷받침되지 않는 ‘배움의 비평’이란 결국 작품 내부에서만 진동하는 형식 놀이에 불과하게 된다는 의미다. 영향 받지 않는 독자를 상정해 버리면 아무것도 못 하는 게 당연하다고, 이건 다른 비평들도 마찬가지인 거 아니냐며 억울해할 수도 있겠지만, 이 어려움은 어찌 보면 자초된 일이다. 왜냐하면, 칸트식 분리 대신 매력의 경제가 전제될 때, 논의의 대상이 ‘감각’적 기호로 ‘구체화’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보편성을 상실한 구체적 기호들의 역학관계가 ‘개별적 감각을 매개로 배움에 이르는’ 장면의 분석은, 따라서 ‘개별 텍스트의 매력 해설’6)에 그치게 되고 그 자체만으로는 작품 바깥으로 일반화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비평적 개념으로서의 매력’을 포기해야 하는 걸까? 우리는 배수아의 에세이 『작별의 순간들』(문학동네, 2023)에서 (의도적으로) 누락된 채 제시되는 정보에 대한 의문을, 오석화의 「열린 문으로 잠입하기, 어둠 나누기」7)가 해소해 나가는 과정을 보며, 이 난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희우가 작중의 배움을 제시하면서 작품 바깥의 배움을 기대할 때, 오석화는 이희우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차용하되 그와는 반대 방향, 그러니까 매력의 개념을 작품 외부에 먼저 적용하고 독자가 작품의 의도된 ‘공백’을 통해 내부로 잠입해 나가는 과정을 그려낸다. 이것이 가능했던

  • 관리자
  • 202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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