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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않(을)은 길을 향한 반유토피아적 노스탤지어

  • 작성일 2024-05-01
  • 조회수 891

   가지 않(을)은 길을 향한 반유토피아적 노스탤지어

   ― 전하영의 소설들


권영빈


   온다 리쿠(恩田陸)의 소설 『잿빛극장』(김은하 역, 망고, 2022)은 1990년대 일본에서 실제로 있었던 동반 자살 사건에서 출발한다. 죽은 두 여성은 대학 시절 만난 친구 사이로 죽음에 이르기 전 함께 살았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이름도, 얼굴도 없이 단지 서로를 죽음의 의지처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특수한 관계성만 남긴 채 사라진 그들은 작가 자신이자 서술화자이기도 한 ‘나’의 마음에 왜인지 사무쳐 버린다. 그로부터 이십여 년 후, 두 여성의 이야기는 소설의 형식으로 소환되고 그들의 삶과 죽음에 존재감이 부여된다.

   추리·미스터리 장르를 주축으로 하는 온다 리쿠의 소설은 한국에서도 이미 인기작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래서인지 그가 형상화하는 이 기묘하고 슬픈 ‘실화’는 독자로 하여금 이들 여성이 어떤 역사를 거쳐 동반 자살이라는 흔치 않은 비극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소상히 밝히는 데 주력할 것으로 기대하게 만든다. 그러나 소설은 죽음의 원인을 직접적으로 추적하는 대신 여성들의 삶과 죽음에 소설적 자리를 내주려는 분투 자체에 무게를 둔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주된 장치가 바로 ‘극장’이다. 『잿빛극장』은 작가가 죽은 두 여성의 이야기를 소설화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번민과, 완성된 텍스트를 토대로 이들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드는 과정을 다루는 시점을 교차해 보여준다. 그 사이사이 T와 M이라는, 익명의 두 당사자 여성 각자의 입장에서 그려지는 일상과 회고의 장면이 삽입된다.

   극장이라는 장막은 사실로서의 죽음과 허구로서의 죽음 사이에서 빚어지는 재현 윤리를 과장되게 내세우거나 추상화하는 일을 경계하면서 여성들이 살았던 흔적을 희미하게나마 만들어낸다. 1990년대 사십대였던 여성들이 살아가며 겪었음 직한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억압과 경력단절, 젠더화된 빈곤의 문제를 건드리면서도 그것을 죽음의 단적이고도 극적인 요인으로 지목하지 않으면서 다만 이들 여성의 시작과 끝을 지켜볼 수 있도록 하는 가변적인 무대를 만드는 것이다. 이름이나 얼굴이 아닌 이야기로 존재하게 된 두 여성은 작가와, 연극배우와, 가상의 당사자 캐릭터 주변을 선회하면서 눈치 채지 못하는 순간 잿빛의 세계로 다 같이 녹아든다. 어떤 사태가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 시작과 끝에 개입한 이야기 조각들을 수집하고 짜 맞추면서 결국에는 비가역적인 ‘한 시절’을 만들어내는 온다 리쿠 특유의 노스탤지어가 새삼 엿보이는 소설이다.

   전하영의 소설을 말하려는 이 글이 그와는 세계관도, 세대도 다른 국외 작가의 소설을 거론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돌이킬 수 없는 ‘한때’를 향한 정동과 ‘극장’ 말이다. 시절에의 이끌림과 회한을 발판 삼아 작금의 사태를 해석하고 전망하려는 전하영의 소설은 노스탤지어의 분위기와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집 떠난 남성 자유인이 관습적으로 희구하던 향수 같은 것이 아니다. 전하영의 노스탤지어는 인물들의 이행 ― 어쩌면 ‘성장’이라는 범박한 말로 갈음할 수 있을법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일면 전형적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전근대적 낭만으로의 도피나 퇴행과는 거리가 먼 곳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이하 「조명등」)1)는 대학 시절의 반추와 그 기억-경험의 (재)해석을 통해 삶을 구성하는 결정적인 ‘디테일’들을 습득하게 되는 ‘나’의 이야기다. 2021년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작이자 전하영의 이름을 더 확실히 알린 이 소설은 그의 등단작부터 표출되었던 예술가 정체성 탐문이라는 주제에 연결되어 있다. 영화와 설치미술 분야에서 활동했던 작가의 이력이 소설이라는 다른 재현, 메타화의 형식과 만나면서 먹고사는 문제이자 고유한 삶의 방식이기도 한 예술의 물질성과 세속성이 새로운 필치로 알려졌고 이는 지금까지의 전하영의 문학성을 이해하는 데 주된 관점으로 작용한다. 물론 예술의 탈낭만화·탈신비화 자체가 문학의 새로운 주제는 아니지만(특히 2016년 전후로 있었던 문단 내 성폭력 고발 사태와 미투운동,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시대적 분기점을 통과하면서 (비)자발적으로 발가벗겨졌던 문학의 현실사회적 맥락에서 또한) 전하영 소설이 주목하는 여성 예술가의 좌절과 분투는 남성 젠더화된 지배적 예술가 문화 속의 이른바 ‘혐오스런 마츠코’ 되(지 않)기를 둘러싼 주체의 의지와 관련된다는 점에서 자기만의 핍진함을 확보한다.

   「당신의 밝은 미래―현대미술 작가로 살아남기」(《황해문화》 2020 가을호)처럼 여성 유표화된 예술가가 형해화된 예술과 만나는 서사도 새롭지만, 「영향」(《문학동네》 2019 가을호)이나 「시차와 시대착오」(『구도가 만든 숲』, 안온북스, 2022)처럼 여성 예술가의 인정투쟁을 가로막는 성차별과 부모에게 부채가 되는 딸의 정체성을 병렬하는 구조도 흥미롭다. 이들은 적절한 때에 ‘어른의 세계’로 넘어가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그 탓에 자기혐오를 일삼는다. 주체의 존재 양태를 틀 지우는 젠더의 구조는 복합적이고 수행적이기에 교착 상태에 빠진 여성들에게 삶이란 아군은 없고 적군은 아득히 멀리 있는 형국이다. 이러한 예술 또는 예술가(로서의 삶)를 다루는 전하영의 소설 가운데 「조명등」이 특별한 이유를 꼽자면 적이자 구조이기도 한 대상에 구체적인 상(像)을 부여했다는 점인데, ‘장 피에르’라는 존재가 그것이다. 장 피에르는 노스탤지어에서 태어나 노스탤지어로서 사멸한다.


   ‘나’의 대학 시절 어느 교양 강좌의 담당 교수였던 장 피에르는 규격화된 세계를 거부하는 듯한 차림새와 행동거지, 그러면서도 그런 자신을 드러내기를 수줍어하는 것 같은 태도로 당시 만 스무 살 언저리에 모여 있던 학생들을 매혹한다. 특히 ‘열혈 운동권’이었던 그의 과거와 “감옥에 가는 대신 파리에 가야 했”(316)다던 내력은 학생들로 하여금 그가 적대하는 권위와 거기 굴복해야 했던 상처에 더욱 몰입되도록 만든다. 그의 취향과 태도는 강력한 동경의 대상이 되어 모두가 그와 ‘사랑’에 빠지는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나를 포함한 이들이 그를 사랑하는 방식이다. 일반적으로 교수-학생 간 지배-추종의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은 힘의 불균형을 전제로 하는 교육 환경에서 비교적 흔한 일이지만, 소설은 그러한 관계를 만들고 공고히 하는 것이 장 피에르의 압도적 실력이나 인간성이 아닌 그가 가진 기묘한 취약함에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부서진 사물의 보이지 않는 역사. 연약한 식물 같은 내면. 평생 어떤 역할에 적응해서 살아가지 못할 것 같은, 왠지 자살하거나 정신병원에 갈 것만 같은 어색한 기운”(315)을 가진 그를 학생들은 아끼고 응원한다.

   요컨대 이들은 장 피에르의 자유로운 수업 방식이나 영화에 대한 지식, 또는 매번 있던 수업 뒤풀이에서 강화되는 친밀감만으로 그에게 매혹되었다기보다, 마치 권총 쥔 손을 코트 주머니에 숨기고 다니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그의 엉거주춤함으로 그를 애정의 대상으로 위치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언제든지 세상을 위협할 것처럼 행동하는, 그러면서 이미 겁에 질린 모습은 연민이나 돌봄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그의 우울은 가련하면서 힘이 있다. 이는 스무 살 언저리의 ‘나’(를 포함한 ‘학생’들)가 충분히 어른인 ‘삼십칠 세’(이자 ‘교수’)인 장 피에르를 상상하는 방식을 설정한다. 세상과 불화함으로 주목받고, 존재 자체로 사랑과 연민의 대상이 되면서도 타자화되거나 우스꽝스럽게 취급되기는커녕 존경받을 수 있는 어른. 그러나 소설의 현재 시점에서는 장 피에르가 얼마나 가당찮은 존재인가를 ‘나’는 안다.

   주지하다시피 「조명등」의 서사는 ‘장 피에르’라는 남성-지식인-예술가 정체성을 떠받치는 기만의 구조를 폭로하고 그로부터 벗어난 여성들이 자기만의 예술적 삶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파리의 우울’을 체현한 듯한 장 피에르는 예술 또는 예술적인 것을 둘러싼 낭만성이 환상적 제스처일 뿐이면서도 결코 거부할 수 없는 매혹으로 강제됐던 ‘한 시절’의 중심에 있고, 거기에는 여성, 즉 어리고 무지하며, (그래서) 성적으로 대상화되는 약자를 심리적·육체적으로 착취하는 순간들이 집약되어 있다.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가 장 피에르 같은 사람을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이유는 「조명등」이 예술을 다루는 전하영의 다른 소설들 사이에서 특별히 성취한 보편성에 있을 것이다. 소설은 장 피에르의 뒤편에 놓인 아우라, 즉 “서구 백인 남성 지식인이 주조한 예술의 거대한 조명등”2)이 만들어내는 폐단을 드러내고, 나아가 그렇게 “깨진 미학의 조명등을 벗어나 새로운 조명등 아래로”3) 주체적으로 향하는 여성들의 존재론을 물을 수 있게 한다.

   이렇듯 ‘나’의 관점에서 소환되는 장 피에르의 기억은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색채를 띠지만, 그것이 노스탤지어의 속성을 지니는 이유는 비단 현재의 ‘나’의 취향을 만든 근거지로서의 의미가 그곳에 담겨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나와 함께 그 시절을 보낸 ‘연수’가 있다. 장 피에르와 연수를 함께 흠모했던 나는 이들 사이에서 분명히 상처받지만, 그때가 단지 회한과 자조로 단언될 수 없는 이유는 거기에 언제까지나 나의 (재)해석을 기다리고 있는 기억의 지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장 피에르로 대변되는 예술의 낭만성이 강요하는 ‘욕망의 삼각형’ 없이도 무언가를 욕망하거나 향유할 수 있었던 순간에 대한 발견 말이다. 「조명등」 속 노스탤지어의 정체는 ‘나’와 ‘연수’의 삶이 (재)해석되는 여정 안에서만 드러난다.

   나는 종종 연수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고 연수 모녀를 보면서 아름답고 병적인 것을 상상하며 연수의 정체성을 멋대로 단정한다. 그래서 연수가 장 피에르를 두고 그가 “모든 것을 다 소유하고서도 불행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고, “저런 우울감은 특권층만 가질 수 있는” 것이자 “그게 자기 매력이라는 것조차 의식할 필요가 없”(318)는 사람이라 말해도 그 진의를 파악하지 못한다. 그런 연수 역시 연수가 “아무것도 아니기에 아름답다”(320)는 장 피에르의 허무맹랑한 가스라이팅에 속절없이 휘둘리고 나와 연수의 갈등은 파리 여행에서 격화된다. 장 피에르를 만나느라 나와의 일정과 관계를 소홀히 하는 연수를 기다리며 나는 밤새 조명등을 켜두는 것으로 시위하고, 연수를 욕망하면서도 이제는 “서로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없다는 것을”, “서로에게 진절머리가 난 상태”(334)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소설은 나와 연수, 장 피에르를 둘러싼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는 조명등 곁의 이 장면을 계기로 장 피에르라는 노스탤지어의 얼굴 이면에 있던 진짜 ‘한 시절’을 보여준다.


   그런 순간이 있었다. 파리에서. 아마도 우리가 함께 보낸 몇 안 되는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실재하는 기억이 아니라 한 장의 흑백사진으로 남아 각인된 장면이다. 흐릿해진, 그러나 불완전한 강렬함을 지닌 하나의 이미지. 어두운 카페에서 우리 둘은 나란히 앉아 테이블 위에 손을 얹거나 턱을 괴고 있다. 영락없이 어린 소녀들이다. 특히 연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어리고 순진해 보인다. 나는 그때까지도 시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사진이 찍힐 때 내가 언젠가 봤던 스케치 속의 랭보와 똑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만족한다.) 두 소녀는 지금까지 살아온 날보다 더 길고 긴 나날들이 자신들 앞에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감히 상상하지 못한다. 각자의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음악을 들으며 우리 주변을 흐르는 무한한 시간이 고요히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평화로운 순간들. (335-336)


   파리의 어느 어두운 카페에서 순진한 얼굴로 시를 쓰거나 랭보의 자세를 취하는 소녀들. 처음 피워 본 담배와, 젊고 잘생긴 남자에게 라이터를 빌려준 기억. 해가 바뀌면서 맞은 스물두 살이라는 ‘말도 안 되는’ 순간. “유혹에 대한 면역이라곤 없는”(337), 그러나 너무 많다고 느껴지는 창피한 나이. 소설은 이 대목을 지금까지의 서술 방식과 다르게 스크린 위에 스냅사진을 슬라이드 쇼처럼 흘려보내는 방식으로 묘사한다. 장 피에르 없이도 온전한 존재일 수 있었던 나와 연수의 이 ‘평화로운 순간들’은 마치 어둠 속에 켜져 있던 희미한 조명등으로 영사되듯이 다른 기억의 형식으로 연출되는 것이다.

   물론 이 조명등의 조도가 삶 속에서 점차로 높아지기까지 이들에게 많은 좌절의 경험이 수반되었음을 소설은 밝힌다. 그 끝에 놓인 장 피에르의 추문과 연수의 “우리는 기록하는 여자가 될 거야”(345)라는 다짐은 「조명등」에 깃든 노스탤지어의 본질에 다가설 수 있게 한다. 나에게 장 피에르의 존재가 시간이 흐르면서 깨닫게 된 “사소하고도 중요한 디테일들”(336) 중의 하나라면, 연수는 그런 이치에 포섭되지 않고도 의미를 가질 수 있었던 미결정된 ‘한 시절’이다. 이 기억의 지대를 탐구하는 것은 현재의 ‘나’와 ‘연수’를 (재)해석하고 (재)구성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내가 사랑했고 나와 함께 함정에 빠졌던 연수는 더 이상 영화 속 남자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는 여자 주인공으로 은유될 수 없고, 나 또한 낭만의 무대에서 소외된 비주류적 목격자로 위치지어질 수 없다.

   장 피에르에의 매혹이 젠더에 의한 것이기도 하면서 시간의 격차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는 지적처럼4) 이제 그들은 밤바다에 뜬 해파리의 아름다움이 독성을 가리는 형광물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시절을 산다. 이러한 현재에서 소환되는 나의 기억과 노스탤지어는 해파리에 현혹됐던 비참함으로부터 파리의 호텔 방에서 연수를 기다리며 켜두었던 조명등과 그것이 비추는 흑백사진의 순간들로 옮겨간다. 기억 속에서 명멸하는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그 시절을 나약함과 치기어린 순간들이 아닌 “연수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342)게 된 현재의 유효한 기원이 되도록 한다. 그리고 장 피에르는 이십대 초반의 청춘을 “추한 시절”(311)이라는 말로 격하하며, 그에 대한 그리움에 매였던 모순된 모습 그대로 여전히 진행 중인 그 자신만의 노스탤지어, 즉 지속되는 ‘추한 시절’로서 ‘나’와 ‘연수’에게서 희미해진다. “진짜 별것도 아닌 게”(343) 된 채로 말이다.

   요컨대 「조명등」의 노스탤지어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욕망이나 견뎌낸 환멸에 대한 것이 아니라 현실에 소환됨으로써만 의미를 밝힐 수 있는, 아직 정의되지 않은 것에 가깝다. 무엇인지도 모를 그것에 이끌리는 이유는 인물이 현재를 해석하기 위한 (비)의지적 작업으로서의 자기 역사에의 탐색, 즉 노스탤지어가 주체화의 형식과 행위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억에의 원심력과 구심력 속에서 ‘자기’를 찾으려는 이러한 이행은, 그러므로 변증법적 종합의 형식으로 귀결되지 않고 감내의 과정이 된다. 마치 극장에서 재개봉되는 옛 영화를 볼 때와 같이 전하영 소설 속 인물들이 이끌리는 ‘한 시절’은 그들을 익숙한 사실과 새로운 진실 사이의 긴장 속에 밀어 넣으면서 스스로 노스탤지어의 의미를 밝히도록 부추긴다.

   이를 전하영 소설이 지닌 하나의 양식(style)으로도 볼 수 있을까. 또는 작가가 소설을 쓰게 하는 동력 가운데 하나로 추정해 볼 수 있을까.


   등단작 「영향」5)에는 다소 체념적으로 무위의 삶을 수용하고 있는 인물 ‘난희’가 등장한다. 영화를 전공한 그는 미국 유학 경험도 학위도 있지만, 그것이 일정한 직업이나 사회적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기에 초조한 상황에 놓여 있다. 그 요인에는 여성 예술가에게 가해지는 성차별이 있다. 난희는 서른이 넘었을 때 동종업계 남성으로부터 “그럼 이제 더 팔 게 없겠네요”(81)라는 모욕적 언사를 들었고 마흔에 가까운 현재 시점에서는 생계를 위해 현실과 타협해 보리라 하면서도 “그것도 뭐든 팔 게 있을 때나 가능할 테지만”(85)이라며 씁쓸해한다.

   난희는 자살한 작가가 살았던 작업실을 이어받아 어머니의 돈으로 최소한의 생활을 하면서, 창 아래 펼쳐진 더럽고 소란스러운 중국인 거리를 무심하게 촬영하는 것 외에는 하는 일이 없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열정을 쏟는 일이 있다면 바로 영어를 잊지 않기 위한 노력이다. 영어는 난희가 늦은 나이에 유학을 단행할 정도로 영화에 열정적이었던 때를 환기해 주는 것이기도 하고 유학이 단지 무의미한 시간만은 아니었음을 증거하는 자원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제이미’를 떠올리기 위한 창구라는 점이 중요할 것이다. 난희는 중국인 거리를 찍은 영상에 무의미한 내레이션을 영어로 입히면서 “영어를 잊으면 안 돼. 절대 안 돼”(96)라고 읊조린다.

   난희가 오하이오에서 제이미와 함께 보냈던 시절은 분명 그리워할 만한 것이다. 제이미는 어릴 적 사고로 얼굴에 상처를 입고 보청기가 없으면 대화가 어려울 정도로 청력이 손상되었지만 난희의 미숙한 영어를 놀라울 정도로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이다. 난희는 그 관계를 “양 귀퉁이의 모서리가 딱 맞는 결핍”(88)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두 사람이 함께인 인생을 상상했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89)고 회상한다. “이제 더 이상 남자를 사귈 만큼 어리석지 않”(87)으므로 제이미와의 과거를 나름대로 객관화하려는 난희지만, 한국에 들르게 됐다는 그의 연락을 받고는 일종의 도피처로 그와의 새 출발을 상상한다는 점에서 난희에게 제이미와의 시절은 종결된 것이 아니다.

   난희가 소환하는 기억에 로웰 천문대 이야기가 등장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제이미는 로웰이 발견했다고 주장한 화성의 운하가 단지 망원경 안에 스며든 빛의 산란일 뿐이었다는 말을 들려주고, 난희는 그가 천문학자가 아니라 ‘예술가’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중요한 건 그가 무언가를 보았다는 사실이야. 그건 아마 그를 충분히 행복하게 해주었을걸”(95)이라는 난희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제이미와의 기억은 난희가 자신이 투신한 예술을 ‘행복’으로 정의할 수 있었던 시절에 대한 것이자, 그와의 재회를 통해 그 시절을 되살릴 수 있으리라는 난희의 희망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난희의 노스탤지어를 깨뜨리는 것은 ‘정화’의 존재다. 오하이오에서 난희와 정화는 “돈 안 되는 공부를 하러 왔다는 공통점”(98)으로 끈끈해졌지만 현재 시점에서는 그 시절을 단지 그리워할 만한 것으로 볼 수 없게 만든다. 난희의 현재에 제이미보다 먼저 도착한 정화는 유창한 영어와 자신의 미래를 과신하는 태도로 난희에게 내심 비난받는다. “결코 불운의 늪에 빠질 일이 없으리라는 확고하고도 순진한 믿음을 가졌던 시절”을 통과한 난희는 “이곳에서 그녀의 박사학위는 무용지물”(100)이라고 단정한다.

   난희의 비난은 정화에게 불공정한 측면이 있기는 해도 비교적 정확한 진단일 수 있다. 여성 예술가의 삶을 구조화하는 차별이 공기처럼 흐르는 소설에서 난희에게 정화와의 시절은 현재의 불안과 불행에 강력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제이미, 오하이오, 유학이라는 ‘한 시절’의 의미화 작업은 유보되는 듯하지만, 난희가 최소한의 생활비로써 지키려는 무위의 삶을 두고 정화가 “언니는 본인이 특별하다고 생각해요? 난 예전에 그런 생각 버렸어요”(103)라고 일침하는 장면은 소설의 전환점이 된다. 난희가 식비를 아끼려 매일같이 찾는 기사식당에서 “자신이 입장할 수 있는 남자들의 세계는 고작 기사식당에 불과할 뿐”(110)이라며 자조하는 것은 난희가 정화에게 그랬듯 난희를 향한 정화의 ‘특별함’에 대한 평가도 다소 왜곡되어 있음을 말해 주지만, 이어서 난희가 거울을 보며 “다른 여자가 해주는 밥을 기다리고 있는 자기 얼굴이 끔찍”(110)하다고 느끼는 대목으로부터 여성-예술가라는, ‘특별한/무력한’ 존재로 환원되지 않는 자기를 발견하기 위한 기억의 변곡점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난희와 제이미의 재회가 불발되는 것은 정합적이다. 제이미와 정화로 대변되는 시절의 구심력과 원심력 사이에서 난희는 구심력의 손을 놓아 주고, 동시에 원심력의 의지로 나아가는 대신 그 시절을 다른 방식으로 추억한다.


   (···) 곧이어 아래층에서 그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난희가 서둘러 몸을 일으키자, 아이린이 조언하듯 난희의 팔을 잡아 살짝 끌었다.

   “낸, 너무 빨리 가지 않게 조심하렴. 다들 너를 하녀라고 생각할지 모르잖니.” (111-112)


   언젠가 그곳에서 한참을 걸어 초원으로 나갔다. 긴 시간 울었고, 무언가에 취해 있었다. 혼자 풀밭에 누워 바람소리를 들었다. 여러 겹의 소리를 다 구별할 수 있었다. (···) 나는 이 모든 것을 사랑해, 그녀는 계속해서 사랑한다고 속살거렸다. (···)

   한밤중에 깨어났을 때는 몸을 잔뜩 웅숭그린 채 집으로 돌아갔다. 앞으로 나아갈 순 없었지만, 집까지 걸어올 수는 있었다. 바로 눈앞에서 잡힐 것 같았던, 그러나 끝끝내 교묘히 그녀를 피해 간 빛나는 행운의 조각들이, 다다를 수 없는 먼 곳의 성운들처럼 그저 아득히 빛을 내뿜고 있었다.

   빛은 멀리 있을 때만 아름다웠다.

   난희는 정성 들여 기도하듯 여자들에 대해 생각했다. 초원에서 죽은 여자들을. 그녀의 귀에 소곤대던 가는 목소리들을. 거기에서 등 돌려 걸어 나오던 한 사람의 뒷모습을. 그리고 불 꺼진 집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희미한 그림자를 떠올렸다. (113-114)


   제이미의 할머니를 만났을 때, 다른 식구들이 부르는 소리에 응하려는 난희를 보며 할머니가 주의를 준 기억. 그리고 어느 초원을 걸어가면서, 세계와 고독과 아득히 먼 행운과 죽은 여자들과의 연결을 실감했던 오하이오에서의 한순간. 다종한 차별의 착종 속에서 손쉽게 약자가 되곤 했던 위치성이 난희에게 익숙한 사실이라면, 온전히 홀로 예술의 본질과 접촉했던 오하이오에서의 기억은 그에게 새로운 진실이다.

   이 모든 것들이 여성-예술가의 정체성이라는 점에서 난희의 노스탤지어는 훼손 이전의 유토피아를 찾기 위한 것도, 비관적 현재를 타개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이 지겨운 것들 중 소중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114)는 난희의 말이 현재와 과거를 동시에 아우르는 현실인식이라는 점에서 그의 노스탤지어는 선조적이고 단절적인 시간의 문법에 갇혀 있지 않다. 미결정된 ‘한 시절’로서의 노스탤지어는 과거 기억-경험의 조정으로 현재의 퇴로를 내는 것이 아니라 밝혀짐으로써 현재를 추월해 미래를 향한다. 난희는 비가역적인 순간에 경도되거나 그것을 현재에 복원하려 하지 않고, 단지 그곳에 미리 기입되어 있었던 진실을 분별함으로써 자기 앞을 보는 시야와 시선의 반경을 변경한다.

   난희는 이제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인다. 아무도 듣지 않는 영어를 중얼거리던 폐쇄된 스튜디오를 벗어나 직접 카메라를 들고 중국인 거리 속에 들어가기로 마음먹는 것이다. 가지 않을 길, 그리고 가지 않은 길을 동시에 내파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보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듯한 결말이다. 초원의 기억이 플래시백으로 묘사된 것처럼, 「조명등」 속 나와 연수의 평화로운 순간들이 흘러가는 흑백사진으로 그려진 것처럼, 새로운 진실로서의 노스탤지어는 언제나 다른 상연의 형식을 필요로 했고 난희의 다짐은 거기 연결되어 있다.


   이렇듯 세계를 인식하고 재현하는 방식인 뷰파인더의 중요성은 전하영의 소설에서 종종 ‘글쓰기’라는 예술 형식에 유비된다. 「남쪽에서」(《현대문학》 2019 12월호)의 ‘나’는 실패한 시나리오로 상징되는 과거의 기억-경험에 매몰되어 있고, 「숙희가 만든 실험영화」(《릿터》 2023 6/7월호)의 ‘나’는 사회적 호칭이 주는 압박감을 견뎌낼 수 있는 저지선으로 글을 쓴다. 이들은 모두 정상성의 생애주기가 가하는 압력에 괴로워하는데, 이는 특히 ‘개념적 아이’를 둘러싼 인물들의 회한과 갈등으로 나타난다. 아이를 곧 예술, 인간의 창조성 그 자체라 이를 수 있다면 「남쪽에서」의 ‘나’는 “내가 모르게, 무언가를 쓰고, 사라진 여자들”6)이 만들어낸 새로운 삶의 질서를 발견하고, 「숙희가 만든 실험영화」의 ‘나’는 실재하는 아이와의 접촉을 기점으로 이미 떠나보낸 순간들과 다가올 미래가 그저 ‘데자뷔’ 같은 것이 아닐 수 있음을 깨달으면서 각자의 예술로서의 삶 앞에 선다. 착오뿐인 삶은 다른 시차(들)에 대한 인식 속에서 재편되고 그 안에는 노스탤지어의 잔해들이 부유하고 있다. 전하영에게 소설이 새로운 뷰파인더였다면 노스탤지어는 그 안에 새롭게 담길 수밖에 없는 경관일 것이다.

   시인이자 비평가인 수잔 스튜어트는 과거의 어느 장소 또는 시절을 향한 인간의 갈망과 그것을 서사화하려는 욕망의 집합체인 기념품에 관한 글에서, 우리는 반복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그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반대로 실재성을 잃었지만 반드시 꾸며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사건들은 기념품과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노스탤지어라는,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으로 현실이 아닌 현실의 환유이기에 언제나 불완전할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이야기는 미래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파고드는’ 성질을 갖게 된다.7)

   노스탤지어가 상실과 교착이라는 전제 위에서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전하영의 소설 속 인물들이 서있는 자리 또한 애상적인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끌림으로써 이탈하는 것으로서의 노스탤지어를 담지한다. 노스탤지어는 현실에 없는, 과거의 샘에 고인 순결한 무언가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래서 시간성이 결여된 무구한 것이 아니라 세속성과 물질성을 가진 채 현재와 미래로 범람하는 것이다. 이러한 형상화는 전하영이 택한 소설-글쓰기라는 예술 형식에서 발현된 것이고, 우리는 그가 감각하는 다양한 시차를 매력적으로 받아들이는 중이다.

   전하영이 비추는 또 다른 노스탤지어의 극장을 기대하며.


1) 전하영,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문학동네》 2020 가을호. 이하 작품 인용은 괄호 안 쪽수로 표기.
2) 강지희, 「조명등이 깨진 후」, 『2021 제12회 젋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1, 372쪽.
3) 심진경, 「이것은 페미니즘이 아닌 것이 아니다」, 《문학동네》 2021 가을호, 155쪽.
4) 선우은실, 「낭만적일 수 없는 그때 그 시절」, 《문학동네》 2020 겨울호, 635쪽.
5) 전하영, 「영향」, 『시차와 시대착오』, 문학동네, 2024.
6) 전하영, 「남쪽에서」, 위의 책, 75쪽.
7) 수잔 스튜어트, 『갈망에 대하여: 미니어처, 거대한 것, 기념품, 수집품에 대한 이야기』, 산처럼, 2015, 282-2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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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01
정주하지 못하는 인간들

정주하지 못하는 인간들 - 서수진의 「한국인의 밤」, 「헬로 차이나」 최정호 2024년,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고향을 떠나 어딘가로 이동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지속되는 전쟁과 기후 재난으로 발생한 난민들의 사례가 연일 보도되고, 저마다의 이유로 한국 사회에 정착하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다문화 가정도 증가하는 추세다. 문화적으로는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와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를 통해 이민자와 재일조선인의 서사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도 했다. 이 두 작품은 디아스포라 정체성을 지닌 인물들을 조명해 소수자성을 서사화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1) 디아스포라는 본래 제1성전과 예루살렘의 파괴로 인해 세계 각지에 정착한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때의 디아스포라라는 용어는 상실이나 추방 혹은 시련과 연결된다. 하지만 오늘날의 디아스포라는 이주에 방점이 찍혀 사용되고 있다. 강제로 추방된 소수의 집단 공동체나 정치적 난민뿐만 아니라 자발적인 이민자와 소수 인종 등과 같은 다양한 범주의 사람들도 디아스포라로 포괄된다.2)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주민의 정체성을 디아스포라로 단편화할 때, 그 말은 “그 사람들을 한 장소에 단단히 고정시키고, 디아스포라를 셀 수 있는 실체로 환원”3)한다. 다시 말해, 고향을 떠나 새로운 장소로 향하는 중이거나 도착한 이들의 복합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한데 모아 디아스포라로 호명하는 것은 정주하지 못한 이들을 한 장소에 고정하고 구체화하는 작업이다. 이는 이주민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이주의 이유와 정주 과정의 어려움이 한데 모여 뭉개진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다. 이주민들이 고향을 떠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그들은 애써 도착한 장소에 정주하지 못하고 디아스포라로 호명되는가. 소니아 샤는 이주민들에게 왜 이동하는지 물을 수 있지만, 직접적이고 단순한 방식으로 답하기는 어렵고, ‘왜 이동하느냐’는 질문 속에는 어떤 하나의 이유로 설명될 수 있음이 전제되어 있다고 말했다.4) 이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복합적인 맥락들이 생략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때때로 이주민들이 겪는 문제는 인종차별, 부적응, 향수병의 차원으로 수렴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맥락들이 있다. 오늘날의 이주민들이 디아스포라로 환원되고 있다면, 서수진의 소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맥락을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에 띈다. 서수진의 소설집 『골드러시』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 어딘가를 떠나(대체로 대한민국)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이주에 방점이 찍혀 있는 일반적인 디아스포라의 용례로 설명할 수 없는 복합성을 지니고 있다. 서수진의 소설 속 인물들은 새로운 장소에 도착했으나 정주하지는 못하는 양상을 보이는데, 이는 사실상 여전히 이동 상태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인물은 새로운 공동체에, 누군가는 집이라는 공간에 집착한다. 이동 과정에서 균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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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01
To be, or not to be,

To be, or not to be, 홍미르 It's the economy, stupid. 평단에서 처음으로 ‘매력의 경제’를 문제 삼았던 이희우는,1) 「비판이 오래 가르쳤지만 배울 수 없었던 것들」2)에서 비평이 취해야 할 자세를 제시하고 「배움의 단계들—손보미, 「불장난」 읽기」(이하 「단계들」)3)를 통해 구체적인 비평까지 선보인 바 있다. 여기서 전개된 그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미와 윤리의 칸트식 분리가 효력을 다한 오늘날 비판은 더 이상 비평적 개념으로서의 ‘매력’을 도외시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매력의 경제와 그에 대한 실망을 배움으로 승화시킬 의무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의해야 할 점은 김건형의 지적처럼 그의 이론이 다분히 신비평적 결말에 이를 위험을 내포한다는 점이다.4) 「단계들」에서 그는 작품 속 매력과 실망에 따른 배움의 과정을 상세히 열거하는데, 이 과정에서 작중 주인공의 배움만 명시되기 때문이다. 즉, 작중 배움이 어떻게 작품 바깥의 ‘배움’으로까지 이어지는지는 공백으로 처리된 셈이다. 이 공백이 확정적 결여가 될 때 ‘배움의 비평’은 “텍스트의 언어·형식적 운동성에 대한 감탄”5)에만 국한된 채 사회·역사와 유리된다는 신비평의 한계를 답습할 여지가 있다. 쉽게 말해 작중 주인공의 배움과 독자의 배움은 별개라는 뜻이고, 독자의 배움이 뒷받침되지 않는 ‘배움의 비평’이란 결국 작품 내부에서만 진동하는 형식 놀이에 불과하게 된다는 의미다. 영향 받지 않는 독자를 상정해 버리면 아무것도 못 하는 게 당연하다고, 이건 다른 비평들도 마찬가지인 거 아니냐며 억울해할 수도 있겠지만, 이 어려움은 어찌 보면 자초된 일이다. 왜냐하면, 칸트식 분리 대신 매력의 경제가 전제될 때, 논의의 대상이 ‘감각’적 기호로 ‘구체화’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보편성을 상실한 구체적 기호들의 역학관계가 ‘개별적 감각을 매개로 배움에 이르는’ 장면의 분석은, 따라서 ‘개별 텍스트의 매력 해설’6)에 그치게 되고 그 자체만으로는 작품 바깥으로 일반화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비평적 개념으로서의 매력’을 포기해야 하는 걸까? 우리는 배수아의 에세이 『작별의 순간들』(문학동네, 2023)에서 (의도적으로) 누락된 채 제시되는 정보에 대한 의문을, 오석화의 「열린 문으로 잠입하기, 어둠 나누기」7)가 해소해 나가는 과정을 보며, 이 난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희우가 작중의 배움을 제시하면서 작품 바깥의 배움을 기대할 때, 오석화는 이희우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차용하되 그와는 반대 방향, 그러니까 매력의 개념을 작품 외부에 먼저 적용하고 독자가 작품의 의도된 ‘공백’을 통해 내부로 잠입해 나가는 과정을 그려낸다. 이것이 가능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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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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