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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하지 못하는 인간들

  • 작성일 2024-06-01
  • 조회수 456

   정주하지 못하는 인간들

   - 서수진의 「한국인의 밤」, 「헬로 차이나」


최정호  


   2024년,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고향을 떠나 어딘가로 이동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지속되는 전쟁과 기후 재난으로 발생한 난민들의 사례가 연일 보도되고, 저마다의 이유로 한국 사회에 정착하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다문화 가정도 증가하는 추세다. 문화적으로는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와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를 통해 이민자와 재일조선인의 서사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도 했다. 이 두 작품은 디아스포라 정체성을 지닌 인물들을 조명해 소수자성을 서사화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1)

   디아스포라는 본래 제1성전과 예루살렘의 파괴로 인해 세계 각지에 정착한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때의 디아스포라라는 용어는 상실이나 추방 혹은 시련과 연결된다. 하지만 오늘날의 디아스포라는 이주에 방점이 찍혀 사용되고 있다. 강제로 추방된 소수의 집단 공동체나 정치적 난민뿐만 아니라 자발적인 이민자와 소수 인종 등과 같은 다양한 범주의 사람들도 디아스포라로 포괄된다.2)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주민의 정체성을 디아스포라로 단편화할 때, 그 말은 “그 사람들을 한 장소에 단단히 고정시키고, 디아스포라를 셀 수 있는 실체로 환원”3)한다. 다시 말해, 고향을 떠나 새로운 장소로 향하는 중이거나 도착한 이들의 복합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한데 모아 디아스포라로 호명하는 것은 정주하지 못한 이들을 한 장소에 고정하고 구체화하는 작업이다. 이는 이주민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이주의 이유와 정주 과정의 어려움이 한데 모여 뭉개진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다. 

    이주민들이 고향을 떠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그들은 애써 도착한 장소에 정주하지 못하고 디아스포라로 호명되는가. 소니아 샤는 이주민들에게 왜 이동하는지 물을 수 있지만, 직접적이고 단순한 방식으로 답하기는 어렵고, ‘왜 이동하느냐’는 질문 속에는 어떤 하나의 이유로 설명될 수 있음이 전제되어 있다고 말했다.4) 이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복합적인 맥락들이 생략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때때로 이주민들이 겪는 문제는 인종차별, 부적응, 향수병의 차원으로 수렴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맥락들이 있다. 

   오늘날의 이주민들이 디아스포라로 환원되고 있다면, 서수진의 소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맥락을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에 띈다. 서수진의 소설집 『골드러시』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 어딘가를 떠나(대체로 대한민국)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이주에 방점이 찍혀 있는 일반적인 디아스포라의 용례로 설명할 수 없는 복합성을 지니고 있다. 서수진의 소설 속 인물들은 새로운 장소에 도착했으나 정주하지는 못하는 양상을 보이는데, 이는 사실상 여전히 이동 상태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인물은 새로운 공동체에, 누군가는 집이라는 공간에 집착한다. 이동 과정에서 균열을 발견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인물들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디아스포라라는 말을 재고하게 된다. 이 글에서는 서수진의 『골드러시』에 수록된 작품들을5) 통해, 서수진이 그리고 있는 이주민의 복합적인 면모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떠나온 자들의 공동체


   「한국인의 밤」의 주인공 클로이 최는 호주에 정착한 이민자 2세다. 클로이는 한국계이기는 하지만 한국이라는 나라에 특별한 애정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녀와 한국의 연결고리는 아버지를 매개한다. 클로이의 아버지는 빅토리아 주 한인회 임원이고 그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는 인물이다. 그런 아버지의 영향으로 한인 공동체에 속해 있는 클로이는 어린 시절 한글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소설은 클로이가 아버지의 제안으로 ‘한국인의 밤’ 행사 중 하나인 한복 패션쇼의 모델로 참여하면서 시작된다. 클로이는 한국 패션쇼가 “우스꽝스럽게 느껴”지지만, 아버지가 한인 공동체 속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는 데 도움을 주기로 한다.6)

   행사 전날 클로이는 준비된 한복을 받기 위해 아버지의 식당에 찾아간다. 아버지는 일식당을 운영하는데, 그는 영업 전략으로 한국어 사용을 금지한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일식당은 가짜처럼 느껴지리라는 우려 때문이다. 본인과 직원 모두 한국인이지만, 손님을 응대할 때는 일본어를 사용한다. 일본어 사용이 능숙하지 않으니 피치 못하게 한국어를 사용할 때는 손님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린다. 그 덕분인지 식당은 잘 운영되고 있는 듯하며, 한인회 임원 자리까지 꿰차고 있는 아버지는 안정적으로 이주에 성공한 인물로 보인다.

   아버지의 일식당에서 클로이는 내일부터 일을 그만두겠다는 종업원과 만난다. 종업원은 클로이에게 “한국인끼리 가족처럼 지내자면서 등쳐먹는 것밖에 더 돼요?”7)라며 불평한다. 종업원의 불평은 클로이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계기가 된다. 아버지는 클로이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했다. “네 시민권을 노리고 접근하는 거야.”8) 어린 시절 클로이는 그 말에 특별한 의문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의 경고를 무시하고 영주권이 없는 남자들을 만나기도 했다. 다만 나이를 먹어 가면서 다른 인종의 친구들과는 멀어지고 자연스럽게 한국인들과 어울리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남들 눈에는 자신이 한국인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다. 종업원의 말은 클로이를 한국 술 광고 포스터 앞으로 인도한다. 클로이는 포스터 속 여자와 유리창에 비친 자기 얼굴을 비교하고 이렇게 생각한다. “그들은 교포가 아닌 진짜 한국인일 터였다.”9) 스스로는 호주인이라고 생각하지만, 남들 눈에는 한국인으로 보이고, 그렇지만 한국에 사는 한국인과는 다른 자신의 모습을 자각한다. 이 순간부터 클로이는 호주인과 한국인 그 어느 쪽에도 정주하지 못하고 떠돌게 된다. 

  


   식당 직원 대부분은 유학생이거나 워킹홀리데이비자가 있었는데 다들 결국 영주권을 따지 못해서 한국으로 돌아갈 애들이라고 했다. 그러니 책임감을 기대해서도 안 되고, 정을 주어서도 안 된다고 했다. 그는 호주에 사는 한국인을 영주권자 이상, 이하로 나누었다. 영주권자와 시민권자만이 호주 이민의 고충을 나누면 서로 도울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10)

  


   여기서 잠시 클로이의 아버지에게 마이크를 넘겨보자. 클로이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주민의 정체성을 자각하게 되면서 아버지의 이야기도 다른 맥락으로 읽히게 된다. 아버지의 이주 서사가 구체적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그려지는 모습으로 미루어 짐작해 보았을 때, 아버지가 호주로 이주한 것은 본인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국인 호주에서 영주권과 시민권을 기준으로 한국인을 구분하고, 한인 공동체 속 지위에 집착한다. 그는 의식적으로 ‘한국계-호주인’이라는 연결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입장에서 말해 보자면, 영주권과 시민권이 없는 이는 ‘한국인’이며 그 반대는 호주인이 아닌 ‘한국계-호주인’이다. 이런 식의 “하이픈으로 연결된 정체성은 그들의 해외 정착을 이해하기 위한 주요 방안으로 ‘모국’에 관심을 집중시킴으로써 한 집단의 다름을 강조할 수도 있다”.11) 다시 말해, 클로이의 아버지는 모국인 한국과의 연결, 한인 공동체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클로이의 아버지는 호주에 안정적으로 정주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클로이의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호주 사람들은 영주권 혹은 시민권의 유무와 관계없이 외형으로 한국인들을 자신들과 구분한다. 호주 사회 속에 물리적인 의미의 영토와 다른, 인종적 영토가 공고히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클로이의 아버지가 선택한 방법은 민족적인 결집을 통한 탈영토화다. “탈영토화는 땅에 대한 근본적인 주장 이외의 정체성 확보를 암시”12)한다는 점에서 그의 전략은 어느 정도 효과를 본 듯하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그가 여전히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한 명의 이주민이라는 사실이다. 클로이를 한복 패션쇼에 모델로 올리기 위해 설득하고, 한국인의 정체성을 강요하던 모습들도 영토 확보를 위한 노력의 연장선으로 읽힌다.

     


   나는 가평대대를 전역했다네. 자네 가평전투를 아나?

   윌리엄이 클로이에게 말을 걸었다.

   아, 저는 호주에서 태어나서 한국 역사를 잘 몰라요. 

   (중략)

   사과할 거 없어. 나는 일부러 코리아타운에 있는 식당이나 술집을 돌아다닌 적도 있어. 가평전투를 아냐고 묻고 싶어서. 몇 명이나 알았을 것 같나?13)



   ‘한국인의 밤’에 참여한 클로이는 한복을 입고 윌리엄과 만난다. 이번 ‘한국인의 밤’ 행사는 한국전 휴전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고, 호주의 전쟁 기념일인 앤잭데이에 맞춰 진행해 호주와 한국의 연결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윌리엄은 한국전쟁 참전 군인이었다는 점에서 호주와 한국의 연결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클로이는 윌리엄과 함께 참여한 인터뷰에서 호주와 한국의 연결, 그것의 연약함을 발견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클로이의 아버지는 ‘한국인의 밤’을 굉장히 커다란 행사로 받아들이고 있다. 민족적인 결집을 통해 ‘한국계-호주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만드는 그에게 이번 행사는 의미 깊은 것이고, 다른 한인 공동체의 일원들에게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윌리엄은 코리아타운의 사람 중에 “몇 명이나 알았을 것 같”냐고 되묻는다. 몇 명이나 알았는지 구체적인 숫자를 말해 주지는 않지만, 아마 가평전투를 안다고 대답한 사람은 없거나 적었을 것이다. 플래카드에 적혀 있는 “우리는 그들을 기억할 것”14)이라는 문구는 가식적인 외침일 뿐이다. 

   한복 패션쇼에서도 마찬가지다. 인터미션 시간에 한 노인이 쓰러지는 사고가 발생한다. 클로이의 응급처치로 상황이 일단락된 후 영사관 직원은 끊임없이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참전 군인으로 추정되는 노인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한 전화가 아닌, 사고를 무마하기 위해 기자들에게 돌리는 전화다. ‘한국인의 밤’ 행사의 의미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한국인의 밤’ 행사에서 클로이가 겪는 일련의 사건들은 한국과 호주를 연결하려는 시도가 가지고 있는 허술함을 드러낸다. 그리고 행사 중간에 가게를 열기 위해 돌아간 클로이의 아버지 모습은 ‘한국계-호주인’이라는 탈영토화 전략의 공고함을 의심하게 만든다. 클로이는 공연장에서 어떤 말을 전하기 위해 윌리엄을 찾아다녔지만, 결국 윌리엄을 만나지 못했다. 클로이와 아버지, 한국을 떠나 호주에 도착한 이들은 여전히 한국과 호주 사이에서 정주하지 못하고 헤매는 중이다.



   집의 불안정성


   「한국인의 밤」에서 클로이의 아버지는 이주민으로서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민족적인 결집을 통한 탈영토화 전략을 선택했다. 「헬로 차이나」의 주인공 혜선의 방식은 다르다. 그녀는 집이라는 공간에 집중한다. 홀로 딸 에이미를 키우고 있는 혜선에게는 무엇보다도 둘이 함께 안정적으로 머물 수 있는 집이 중요하다. 혜선은 부동산 에이전트 일을 한다. 중국인 얀은 같은 “싱글 맘끼리 도와야 한다”15)며 꾸준히 혜선을 찾고, 덕분에 혜선은 에이미와 함께 살 수 있는 집을 마련했다. 집 마련의 힘겨움을 얀의 방식처럼 ‘싱글 맘의 고충’ 정도로 이해하는 것은 혜선이 가지고 있는 복합성을 단순화하는 작업일 테다.

   집을 마련하기까지의 과정에서 혜선이 가장 의식했던 부분은 ‘중국인’이다. 혜선은 대학원 시절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중국인이냐는 질문을 받아 왔다. 처음에는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강하게 부정했다. 중국인이라고 놀림 받는 상황에서 “어차피 인종차별을 당할 거라면 한국인으로 당하고 싶”16)다고 생각했다. 호주라는 타지에서 한국인 정체성을 인식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딸 에이미에게로 이어진다. 혜선은 에이미가 중국인들과 어울리고 중국인 남자친구를 만나는 사실을 우려하면서도 그것을 적극적으로 차단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혜선 본인이 중국인들과 깊은 관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직업적으로 중국인들이 주 고객인지라 그들의 문화와 언어를 공부했고, 얀에게는 “이제 중국인 다 됐네”17)라는 말까지 듣는다. 때문에 에이미가 중국인 남자친구를 만나고 결혼하고 중국에 가서 아이를 낳는 미래가 찾아오지는 않을까 걱정하지만, 그게 자기 탓인 것만 같아 혼란스러워한다. 이처럼 혜선은 호주와 한국 그리고 중국이라는 세 개가 복잡하게 얽힌 정체성 속에서 헤매는 중이다. 

 


   셰어하우스에서 쫓겨나듯이 나왔을 때는 역이민할 작정으로 한국에 들어가 에이미를 한국 학교에 등록시켰다. 에이미는 학기가 끝날 때까지 친구를 사귀지 못했고, 매일 집에 언제 돌아가냐고 물었다. 이제 여기가 집이라고 하면 울었다. 혜선은 다시 호주로 돌아왔다. 부동산 에이전트로 취업하고도 여러 집을 전전해야 했다. 지금 집을 계약한 날, 에이미가 방에 포스터를 붙여도 되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건 진짜 우리 집이야. 

   그 후로도 오랫동안 혜선은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에이미에게, 그리고 자신에게.18)



   이-푸 투안에 따르면 공간과 장소를 구분하는 기준은 경험이다. 어떤 공간에서 생활하거나 인상적인 경험을 하고 그것들이 쌓였을 때, 공간은 비로소 장소가 된다. 비유하자면 공간은 의미가 부여될 수 있는 백지와 같은 것이고 장소는 기존의 가치들이 내재된 평온한 중심지라고 말할 수 있다.19) 이를 적용해 생각해 보자면, 혜선이 거쳤던 셰어하우스와 같은 여러 집은 평온한 장소가 아니었던 셈이다. 혜선이 “진짜 우리 집”이라는 말을 되풀이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혜선은 안정적으로 정주할 수 있는 장소에 대한 욕망을 품고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진짜 우리 집”을 구한 이후로도 혜선의 고민은 끝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집은 고정된 실체로 존재하지 않기”20) 때문이다. 누군가 ‘집에 가고 싶어’라고 말할 때의 집은 그가 거주하고 있는 물리적인 실체를 지닌 집일 수도 있지만, 부모님이나 형제자매가 살고 있는 곳이 될 수도 있고, 여정의 종착점을 의미할 수도 있다. 정치·사회적인 이유로 새로운 집을 찾아야 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집이라는 것은 때에 따라 언제든 변할 수 있으니, 집은 그 안에 불안정성을 품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집에 영원히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다.”21) 결정적으로 혜선과 에이미가 그리고 있는 집의 모습이 다르다. 셰어하우스를 전전하다가 견디지 못한 혜선이 떠올리는 곳은 한국이다. 혜선은 자신의 고향, 한국에 역이민하여 정주할 생각으로 한국에 입국했었다. 이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혜선에게 있어서 집에 가장 가까운 공간이 한국이라는 사실이다. 반면 에이미가 생각하는 집은 호주다. 혜선과 에이미가 한국에 입국했을 때, 에이미는 한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학교에서 친구를 사귀지 못하고 매일같이 혜선에게 “집에 언제 돌아가냐고” 보챘다. 집에 머무르는 가족이라는 작은 공동체 속에서 서로가 그리는 집의 형상이 다르니 정주는 요원한 일이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항상 그랬어요. 잘하는 게 하나도 없으면 정부를 위해 일하라고. 잘하는 게 하나라도 있으면 그걸로 돈을 벌라고.

   얀은 맑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중국 정부는 무능한 사람들이 일하는 곳이에요. 큰돈을 벌 수 없죠. 큰돈을 버는 사람들을 제재하기 바빠요. 어떻게든 그 돈을 뺏으려고.

   (중략)

   그래서 나는 여기서 돈을 벌고 있어요. 혜선 씨한테 집을 사서. 아, 이번엔 월터 씨가 나를 도와줬고요.

   얀은 월터의 이름을 천천히, 분명하게 발음했다.22)



   집이 품고 있는 불안정성은 혜선이 반중 집회라는 사건과 마주하면서 그 실체를 본격적으로 드러낸다. 혜선이 거주하는 도시에서 벌어진 반중 집회는 ‘민주주의’와 ‘홍콩에 자유를’이라는 기치를 내세운다. 에이미는 반중 집회에 참석하는데 정치적인 목적은 없었다. 반중 집회는 일종의 유흥거리에 불과하다. 에이미는 중국인 남자친구 케빈과 함께 반중 집회에서 본 가짜 경찰차를 소재로 웃고 떠든다. 에이미의 이러한 가벼운 태도는 호주를 집이라고 생각하는 정체성과 무관하지 않을 테다. 반면 한국을 더 가깝게 느끼는 혜선은 에이미처럼 반중 집회를 가볍게 소비할 수 없다. 그녀에게 반중 집회는 너무나 정치적이다. 그렇다고 혜선이 문제의식을 강하게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소설의 전반부에서 반중 집회는 혜선에게 단지 회사 출퇴근이 불편할 수도 있는, 원경 정도에 머무른다. 

   하지만 반중 집회에서 티베트 오색기도 깃발을 발견하는 순간, 반중 집회는 혜선의 삶과 밀접한 것으로 변모한다. 혜선은 마당에 걸어 둔 티베트 깃발을 반복적으로 도난당했다. 특별한 정치적 의도는 없었다. 예뻐 보여서 걸어 두었을 뿐이다. 그래서 에이미는 포섬의 짓일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혜선의 반응도 자신의 집이 침범당했다는 사실에 불쾌해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반중 집회에서 티베트 깃발은 군중들의 발에 짓밟힌다. 혜선은 인파에서 빠져나오다가 에이미와 케빈이 농담처럼 말했던 가짜 경찰차로 추정되는 차량과 마주친다. 동물의 소행이나 불쾌한 장난 정도로 여겨졌던 티베트 깃발 도난 사건은 이제 정치적인 맥락으로 해석된다. 애써 마련한 “진짜 우리 집”이 정치적인 공격 대상이 된 것이다. 집은 더 이상 평온하게 정주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혜선은 “난 이제 더 못 참겠다”23)며 그동안 내버려두었던 에이미의 연애에 개입해 케빈을 내쫓는다.

   반중 집회를 바라보는 얀의 시선도 흥미롭다. 얀은 반중 집회를 두고 “정말 바보 같은 짓”24)이라고 말한다. 혜선은 얀의 기분을 맞춰 주기 위해 고개를 끄덕인다. 얀은 중국인이므로 반중 집회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리라고 예상했었다. 하지만 얀은 이어서 중국 정부를 두고 “무능한 사람들이 일하는 곳”이라 말한다. 이는 당황스러운 발언이다. 얀은 양쪽 진영을 모두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얀은 정치가 아닌 자본의 논리로 이야기하고 있다. 부동산 투자로 부를 쌓은 얀에게 중국 정부와 반중 진영은 무능하다는 점에서 똑같다. 고향 혹은 집, 머무를 장소를 두고 벌어지는 충돌을 철저히 자본주의의 입장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얀에게 집은 정주할 장소가 아니다. 언제든지 팔아치울 수 있는 물건일 뿐이다. “싱글 맘끼리”라는 유대감도 자본주의의 입장이 개입하자 무가치해지며, 똑바로 일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에이전트를 바꿀 수 있다는 은근한 경고로 되돌아온다.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디아스포라는 일반적인 용례로 접근했을 때 이주민이 가지고 있는 복합성을 단순하게 환원시킬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주민 개개인이 품고 있는 문제의 기원과 양상들이 모두 생략될 여지가 있다. 그런 점에서 서수진의 인물들과 그들의 서사는 복합적인 이해를 요구한다. 그들은 한국을 떠나 호주에 왔다는 점은 같지만, 누군가는 공동체를 통해 자신의 영토를 확보하려 시도하고(「한국인의 밤」) 누군가는 안정적인 정주를 위해 집이라는 공간에 집중한다(「헬로 차이나」). 이주민 신분으로 정체성이라는 화두를 가졌지만, 선택하는 방법론이 각기 다른 것이다. 또한 그들의 정주를 위협하는 요소들도 다양하다. 그것들에 대한 종합적인 고려가 없다면 두 소설 속 인물들로 쉽고 단순한 맥락으로 환원되어 읽히게 될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이주민이며, 복합적인 맥락 속에서 정주하지 못하고 헤매는 중이다.


1) 그러나 「미나리」와 『파친코』가 주요 시상식에서 상을 수상받고 영상 매체로 재해석되는 과정에서 비판적 힘을 잃었다는 지적과 모범 이주민 소수자 전형을 재생산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김소혜, 「안과 밖의 마이너 필링스 : 한국계 미국인 서사의 유통과 소수적 감성의 재배치」, 『여성문학연구』 통권 제56호, 2022; 나보령, 「모범 소수자를 넘어 : 이민진의 『파친코』를 통해 본 이주민 소수자 서사의 도전과 과제」, 『人文論叢』 통권 제79호, 2022 등 참조.

2) 디아스포라의 개념과 유래에 관해서는 비린더 S. 칼라 외, 『디아스포라와 혼종성』, 정영주 옮김, 에코리브르, 2014; 케빈 케니, 『디아스포라 이즈is』, 최영석 옮김, 앨피, 2016 참조.

3) 케빈 케니, 『디아스포라 이즈is』, 최영석 옮김, 앨피, 2016, 31-32쪽.

4) 소니아 샤, 『인류, 이주, 생존』, 성원 옮김, 메디치, 2021, 316쪽 참조.

5) 이 글에서 다루는 작품은 다음과 같다. 「한국인의 밤」, 「헬로 차이나」 이 소설들은 서수진, 『골드러시』, 한겨레출판사, 2024에 수록되어 있다.

6) 서수진, 「한국인의 밤」, 『골드러시』, 한겨레출판사, 2024, 146-147쪽.

7) 같은 책, 152쪽.

8) 같은 책, 154쪽.

9) 같은 책, 156쪽.

10) 같은 책, 153-154쪽.

11) 비린더 S. 칼라 외, 『디아스포라와 혼종성』, 정영주 옮김, 에코리브르, 2014, 71쪽.

12) 같은 책, 67쪽.

13) 서수진, 「한국인의 밤」, 『골드러시』, 한겨레출판사, 2024, 160쪽.

14) 같은 책, 158쪽.

15) 서수진, 「헬로 차이나」, 『골드러시』, 한겨레출판사, 2024, 116쪽.

16) 같은 책, 123쪽.

17) 같은 책, 125쪽.

18) 같은 책, 125쪽

19) 이-푸 투안, 『공간과 장소』, 사이, 윤영호 외 옮김, 2020 참조.

20) 임경규, 『집으로 가는 길』, 앨피, 2018, 43쪽.

21) 같은 책, 43쪽.

22) 서수진, 「헬로 차이나」, 『골드러시』, 한겨레출판사, 2024, 138쪽.

23) 같은 책, 139쪽.

24) 같은 책, 1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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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386세대와 패배하지 못한 혁명들의 시차 임세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퇴근 후에 넥타이를 존나 풀고 찾아와 옛 추억에 잠겨 노래 한 곡 워어어어 케케묵은 노래들을 불러대며 울어대네 아름다운 젊음이여 흘러간 내 청춘이여 너희들이 정녕 민주화를 아느냐 이 손으로 일군 민주주의 대한민국 요즘 어린 것들은 몰라도 한참 몰라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투쟁도 혁명도 이제는 모두 봄날의 꿈 그리웠던 혁명동지 돈을 꾸러 찾아왔네 골프채로 쫓아내니 마음속이 허전해 내일은 미스 김의 보지 냄새 맡아야지 밤섬해적단, 〈386 Sucks〉, 《서울불바다》, 2010. 1. 중단된 혁명 이제는 진부한 제재처럼 감각되는 ‘후일담’의 환멸과 자조 이후 한국 문학에서의 386세대 재현은 익숙하지만 낯선 ‘진정성’의 풍광들을 펼쳐 보인다. 이른바 ‘포스트-진정성 체제’1)에서의 속물들의 세계상은 기실 그 문제적 주체로 호명되었던 386세대뿐만 아니라, 386세대에 의해 다시 지목당한 ‘20대 개새끼론’의 대상이었던 ‘88만원 세대’에게도 벗어내기 힘든 혐의였다. IMF 이후 가속화된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서 20대 빈곤의 원인이 세대 간 착취에 있다는 통찰 가운데 던져진 “토플책을 덮고 바리게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2)라는 조언을 (귓등으로) ‘학습’했던 새 세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이었고, 어디로 향하였는가. 타 세대에 의한 명명 대신 “나는 씨발 존나 멋진 이십대 청춘”3)이라며 타락한 386의 ‘흘러간 청춘’을 조소하던 20대는 어느덧 MZ세대의 선봉으로 싸잡아 묶여진 채 40대의 문턱을 넘고 있다. ‘민주화’라는 ‘명분’ 위에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모두 쟁취한 것처럼 조롱되는 386세대에 대한 냉소는 오늘날 “운동권 특권 정치를 청산하라는 강력한 시대정신”4)을 따르겠다는 한동훈 전 국민의 힘 비대위원장의 취임사로 구현되며 동세대 정치인들의 반발과 분노를 유발하기도 했다.5)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본다면 386세대가 이룩한 ‘민주화/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오염되고 폄훼의 대상이 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민주화 시키다’라는 표현은 386세대에 대한 비판이 본격화되었던 201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강제로 억압하다’는 조소의 뜻을 지닌 채 활용되었다. 입으로는 ‘케케묵은’ 투쟁의 추억을 타령하며 실제 삶에서는 동지를 배신하고 돈과 섹스의 욕망을 좇는 운동권 세대를 저격한 〈386 Sucks〉의 면면은 새로울 것도 없는 386의 전형(stereotype)을 노래한다. 그런데 이 오래된 냉소의 역학 속에서 눈

  • 관리자
  • 2024-07-01
오염, 오류, 오독

오염, 오류, 오독 - 소설이 수행하는 ‘다시’ 황유지 마들렌을 먹으며 과자 부스러기와 차 한 모금이 어우러진 달콤한 환기 속에서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일은 마르셀에게 행복을 준다. 그러나 발벡의 호텔방에서 신발을 벗으려다 문득, 할머니가 신을 벗겨 주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은 그에게 행복감을 주지 않는다. 죽은 할머니를 떠올리는 일, 그것은 “고통스러운 소멸”을 확인시킬 뿐이다.1)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이 일화는 과거를 부르는 일이 각기 다른 정서를 환기함에 대한 예시로 내밀어지며 ‘기억’에 착종되는 다양한 감정이 주체를 어떻게 흔들 수 있는지 넌지시 묻는다. 소멸의 확인도 그렇지만 미완, 불완전, 불만족인 채로 내버려둔 사건에 대한 기억의 소환 역시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인데, 그건 엄연히 그 일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라 모종의 감정적 자원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에서 이런 ‘다시’는 레트로로 나타난다. Retrospect, ‘추억’에 뿌리를 둔 이 말은 패션, 음악, 영상부터 먹거리, 금융상품에 이르기까지 그 반경을 확대하며 과거로 우리의 기억을 끌고 간다. 과거의 소환은 이 사회에 대한 일종의 환각제이자 자본주의라는 무한한 기계적 힘에 대한 제동, 그 중단의 본능적 발현이다. 이런 레트로는 과거에 대한 향수, 노스탤지어의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 고대인들에게 노스탤지어란 ‘되돌아가는 일(nostos)’을 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아픔(algos)’으로 이해된다. 그러니까 레트로는 돌아갈 수 없는(가본 적도 없는) 시절을 향한 자본주의적 환각제이다. 프루스트의 위대한 주제가 사물들을 처음 경험할 때의 무능력이라 파악하는 프레드릭 제임슨은 진정한 경험이 우리가 의식적으로 다른 것을 의도하는 동안, ‘눈가’를 통해 온다면서 그 가능성을 글쓰기에서 찾는다. 기어이 돈을 주고라도 사겠다는 환각성 추억과는 달리 기억을 통한 글쓰기는 상실한 것을 복원하려는 고도의 정신 작업이랄 수 있다. At the corner of eye, 거기가 바로 진정한 경험이 되돌아오는 자리로 가장 의도적인 두 번째 경험, 글쓰기는 그 형식이 된다. 2) 글쓰기는 행해짐과 동시에 복수의 행위자를 탄생시킨다. 쓰는 자와 읽는 자,3) 이는 시차(時差)와 함께 탄생하며 텍스트가 현실과 맞닿은(혹은 결별한) 그 부위에 필연적으로 틈을 만든다. 대체로 모든 문제는 이 ‘틈’에서 태어나는 것처럼도 보인다. 틈은 이미 분리, 분절된 것으로 존재하면서 거기에 무엇을 메우든 결코 원본의 형태를 완벽히 구현할 수 없다. 원본처럼 복원한 것조차 복사본일 따름이라 틈은 그 자체 오류가 되는 것이다(가령 원본이 틀린 것이라 할 때도 제대로 수정된 본은 오류가 된다. 틀린 원본에 대해 기어이 맞추어진 진실

  • 관리자
  • 2024-07-01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이소 1. 스무 살을 훌쩍 넘어 성인이 되어도 자신을 어른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뉴스를 보면 언제나 피해자의 억울함에 몰입하고, 많은 경우 나를 포함하지 않은 채 ‘어른들’에게 분노를 터트리는 사람. 2014년 4월 16일, 이 날 나는 처음으로 어른의 자리에서 사건을 경험했다. 아이의 자리가 아닌 해운회사의 직원이나 공무원이나 인솔 교사의 자리에 서 있었다. 항해사나 해경보다 교사인 나를 떠올리기가 더 쉬웠다. 누구나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기억이 있으니까. 나는 전문가를 깊이 신뢰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내가 그 배에 탔다면 안내 방송을 충실히 따르며 어른들과 시스템을 믿으라고 아이들을 다독였으리라는 걸 알았다. 누가 보아도 나는 완벽히 어른이었다. 굳이 괴로웠다는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그때는 모두가 괴로웠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다음해 문학을 전공하러 대학원에 들어갔다. 누군가 공부라는 게 어떤 실천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런 답변도 떠올릴 수 없다. 나부터가 그런 희망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전처럼 살 수 없을 뿐이었다. 나는 어른이었고,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수습될 수 있는 사고가 아니라 소화할 수 없는 사건이었으며, 내게는 더 정확한 언어가 필요했다. 딱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었다. 2. 지금도 교사인 나를 상상해 본다. 항해사나 해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교사라는 직업과 위치가 내게 어른이란 무엇인지 사고실험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과 달리 미성년인 학생들을 상대하는 교사는 흔히 이중적인 이미지로 재현된다. 전교조와 교총을 교대로 인터뷰하는 기사의 관례처럼, 전통을 수호하는 보수적인 교사와 변화를 추동하는 진보적인 교사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그려지는 건 흔한 일이다. 제도가 부여한 의무와 규범을 학생들에게 어디까지 얼마만큼 요구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한 명의 교사를 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지만, 이 경우에도 그의 심리적 갈등은 그의 교육방식에 딴지를 걸 더 완고한 교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전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코 전위적인 존재에 도달할 순 없지만, 마땅히 후위의 역할은 초과해야 하는 사람. 그러나 생각해 보면 교사만 그럴 리는 없다. 모든 직업은 사회가 요구하는 허용범위 안에서 가까스로 변주를 시도하고, 모든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며 유사한 딜레마에 빠진다. 교사는 자신의 의무를 익히 아는 어른의 상징이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점점 학생보다 교사에게 더 쉽게 이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문제는 오래되고 흔한 방식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현이 더는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데 있을 것이다. 어차피 시대가 변한 줄 모르는 늙은 교사들은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없다. 보수적인 교사와 진보적인 교사의 대립은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갈등을 통해 사회를 혁신하는 재생산 메커니즘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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