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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 작성일 2024-07-01
  • 조회수 176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이소



   1.


   스무 살을 훌쩍 넘어 성인이 되어도 자신을 어른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뉴스를 보면 언제나 피해자의 억울함에 몰입하고, 많은 경우 나를 포함하지 않은 채 ‘어른들’에게 분노를 터트리는 사람. 

   2014년 4월 16일, 이 날 나는 처음으로 어른의 자리에서 사건을 경험했다. 아이의 자리가 아닌 해운회사의 직원이나 공무원이나 인솔 교사의 자리에 서 있었다. 항해사나 해경보다 교사인 나를 떠올리기가 더 쉬웠다. 누구나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기억이 있으니까. 나는 전문가를 깊이 신뢰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내가 그 배에 탔다면 안내 방송을 충실히 따르며 어른들과 시스템을 믿으라고 아이들을 다독였으리라는 걸 알았다. 누가 보아도 나는 완벽히 어른이었다. 굳이 괴로웠다는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그때는 모두가 괴로웠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다음해 문학을 전공하러 대학원에 들어갔다. 누군가 공부라는 게 어떤 실천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런 답변도 떠올릴 수 없다. 나부터가 그런 희망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전처럼 살 수 없을 뿐이었다. 나는 어른이었고,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수습될 수 있는 사고가 아니라 소화할 수 없는 사건이었으며, 내게는 더 정확한 언어가 필요했다. 딱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었다. 



   2. 


   지금도 교사인 나를 상상해 본다. 항해사나 해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교사라는 직업과 위치가 내게 어른이란 무엇인지 사고실험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과 달리 미성년인 학생들을 상대하는 교사는 흔히 이중적인 이미지로 재현된다. 전교조와 교총을 교대로 인터뷰하는 기사의 관례처럼, 전통을 수호하는 보수적인 교사와 변화를 추동하는 진보적인 교사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그려지는 건 흔한 일이다. 제도가 부여한 의무와 규범을 학생들에게 어디까지 얼마만큼 요구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한 명의 교사를 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지만, 이 경우에도 그의 심리적 갈등은 그의 교육방식에 딴지를 걸 더 완고한 교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전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코 전위적인 존재에 도달할 순 없지만, 마땅히 후위의 역할은 초과해야 하는 사람. 

   그러나 생각해 보면 교사만 그럴 리는 없다. 모든 직업은 사회가 요구하는 허용범위 안에서 가까스로 변주를 시도하고, 모든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며 유사한 딜레마에 빠진다. 교사는 자신의 의무를 익히 아는 어른의 상징이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점점 학생보다 교사에게 더 쉽게 이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문제는 오래되고 흔한 방식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현이 더는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데 있을 것이다. 어차피 시대가 변한 줄 모르는 늙은 교사들은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없다. 보수적인 교사와 진보적인 교사의 대립은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갈등을 통해 사회를 혁신하는 재생산 메커니즘의 갱신을 상징한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처럼 학교에서 쫓겨나는 키팅 선생을 향해 책상 위에 올라가 경례를 올리던 열렬한 학생들도 결국 대학과 사회로 진출하여 어른이 될 것이다. 재생산의 회로는 결코 멈추는 법이 없고, 오히려 키팅 선생 같은 이들에 의해 다음 시대에 적합한 방식으로 조율되어 생산성을 유지한다. 그렇다면 더 이상 뜨거운 가슴을 지닌 진보적인 교사를 그려낼 수 없는 상황, 기성의 제도와 대립하여 학생들의 환호와 지지를 얻는 반골 교사를 상상할 수 없는 상황, 기성세대와 구별되는 다음 세대를 키워낼 새로운 유형의 교사를 재현할 수 없는 상황은 어떤 상황인가. 당연하게도 오래되어 낡고 삐걱거리는 회로가 여전히 유효해서는 아닐 것이다. 그저 사회가 갱신되고 개혁되기를 기대하는 쪽이 그보다 훨씬 더 어려워졌을 따름이다. 



   3. 


   「너머의 세계」1)의 연수는 교사를 그만둔다. 학생과 학부모의 괴롭힘에 시달리고 동료 교사들의 무시와 냉소에 상처를 입은 채 연수는 “중앙 현관을 넘고 나면 이제 다시는, 어떤 문 안으로도 몸을 들이지 않을 작정”(168쪽)으로 학교를 떠난다. 젊은 교사인 연수는 자신만의 교육 방침을 고수하다 자포자기한 것도, 제도에 맞서 신념을 지키려다 탈주한 것도 아니다. 연수 앞을 가로지른 선 안쪽에는 자신을 만만하게 여기는 학생과 학부모와 동료 교사들이 서 있다. 모두가 연수를 한심하게 여기고, 연수는 눈앞의 선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바깥에 점으로 존재한다. 만약 소설이 학부모와 학생의 갈등을 재현한다면, 연수에게는 제자의 고통을 공감하며 그와 연대를 형성하는 선택지가 주어지거나 혹은 어머니와 연대를 형성하여 제자를 설득하는 선택지가 주어질 수 있다. 반대로 학생과 학부모가 돈독하더라도 그들을 바라보며 동료 교사들끼리 서로 이해하는 과정을 재현한다면, 연수가 난관을 극복하든 극복하지 못하든 교사로서 어떠한 행위를 하고 그로 인한 결과를 수용하는 과정을 밟아 갈 수 있다. 그러나 선은 오직 연수 앞에만 그어진다. 그 단절선 앞에서 연수는 어떠한 교훈이나 경험도 얻지 못한 채 홀로 학교를 떠난다.

   다시는 어떤 문으로도 들어가지 않기로 한 연수의 세계를 벤다이어그램으로 그려 보면, 단 하나의 원소로 이루어진 작은 집합과 수많은 원소로 이루어진 커다란 집합이 아무런 교집합 없이 나란히 놓인 모양으로 그려질 것이다. 연수는 자신으로만 이루어진 집합 안으로 아무도 들이지 않는다. 학교를 그만둔 후 사람을 상대하고 싶지 않아 무인가게 청소일을 하던 연수는 행색이 초라한 어린아이가 자꾸 가게에 찾아와 비닐째 육포를 뜯어 먹는 기이한 광경을 목격하지만, 그 모습을 문밖에서 물끄러미 바라볼 뿐 안쪽으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연수의 벤다이어그램에서는 누구도 연수보다 약자일 수 없다. 언제나 연수는 선 바깥에 홀로 서 있고, 선 안쪽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여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연수는 너머의 세계에 있기로 했다. 그것은 부끄러운 선택이 아니었다. 적어도 연수에게는 그랬다.”(168쪽) 상처의 권리라고 해야 할까, 약자의 권리라고 해야 할까. 연수의 집합론에서 연수 한 명으로 이루어진 집합에는 어떠한 포함관계나 교집합도 고려되지 않는다.

   고통의 재림을 상상하며 불안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상처는 사람을 위축시키고, 자신의 상처에 깊이 함몰된 자가 그리는 그림은 ‘나’와 ‘내가 아닌 것들’의 대립으로 표현된다. 내 앞을 가로지르는 선, 그리고 선 너머의 전부. 그러나 소설이 등장인물을 변호하는 형식이 아니라 등장인물을 통해 질문을 제기하는 형식이라고 믿는다면, 연수가 그리는 단순한 벤다이어그램이 던지는 결코 단순하지 않은 질문을 곱씹어야 할 것이다. 과연 자연스럽다는 것은 자연스러움 이상의 가치를 담보할 수 있을까. 연수가 느끼는 불안과 공포가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해서 그것을 타당한 태도와 선택이라고 보증할 수 있을까. 어떠한 선도 넘지 않고 선 바깥의 점으로 남기로 한 연수의 선택은 이후 이어질 삶에서 언제까지 얼마만큼 알리바이로 인정될 수 있을까. 

   위험에 노출된 어린아이조차 선 안의 존재로 바라보는 시선, 내가 아닌 모든 것을 선 안쪽의 것으로 바라보는 공포심과 경계심 어린 시선은 아마도 어른의 시선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길을 잃고 배가 고파 무인가게에 드나들던 어린아이의 눈에는 연수야말로 선 안쪽의 존재로 보였으리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연수의 회피가 정말 “적어도 연수에게는” “부끄러운 선택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을지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어떤 상황에서나, 매번 같은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그런 어른은 없다. 점으로 남아 보호할 수 있는 ‘나’, 선을 넘지 않아 지킬 수 있는 ‘나’라는 존재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른의 시작이니까. 어른은 많은 것을 지킬 수 있는 자가 아니라 다만 포기하는 법을 아는 자에 가깝다.



   4.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2)의 희주 역시 교사를 그만둔다. 희주는 기후위기로 꿀벌이 사라지고 해수면이 올라가는 뉴스와 다큐멘터리를 보며 정말 “화내야 하는 일과 화낼 필요가 없는 일을 정”해야 한다고 믿었고, ‘할 필요 없는 일’들에 골몰하는 학생들에게 서둘러 그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어차피 인간은 죽는 건데. 다 같이. 희주는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들과 괴롭히는 아이들에게도 이 사실을 빨리 알려주고 싶었다. 어차피 우리는 모두 물에 잠길 거다. 잘하면 30년 뒤에. 다 같이 죽는 거지. 희주가 그 말을 한 건 아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희주가 근무하던 사립학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194쪽)



   학교를 그만둔 후, 희주는 환경 관련 기사를 스크랩하고 식물을 키우고 채식을 하고 수영장에 다닌다. 자기혐오와 자기연민을 오가며 불안에 시달리는 연수에 비하면, 지구에 사는 온갖 생명체를 향한 연민으로 가득한 희주의 일과는 한가하고 평화로워 보인다. 연수가 생활을 위한 최소한의 일과만 유지하며 살아간다면, 희주는 온갖 취미반에 등록하여 이것저것 배우기를 멈추지 않고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요리하는 일에 쏟아 부으며 무해하고 정성스러운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희주의 세계를 벤다이어그램으로 그려 보면, 언뜻 상반되어 보이는 연수와 희주의 세계가 사실은 상당히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음을 알아볼 수 있다. 세상의 멸망을 실감하는 희주 한 사람으로 이루어진 작은 집합과 멸망 앞에서도 아등바등 욕심을 부리는 나머지 사람들로 이루어진 커다란 집합이 나란히 놓여 있는 모양. 희주 엄마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희주의 삶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기에 두 집합 사이에 교집합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형태가 유사하다고 해서 희주와 연수의 벤다이어그램에 아예 차이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희주의 벤다이어그램에는 한 겹의 집합이 더 존재한다. 희주의 집합과 다른 사람들의 집합을 모두 포함하는 전체집합. 인류세 시대의 생명체를 원소로 삼는 거대한 집합이 이 모든 것을 감싸며 한 겹 더 크게 그려진다. 그러니까 희주의 집합은 주변 사람들의 집합과 교집합을 형성하진 않지만, 전체집합의 차원에서 보면 두 집합 모두 인류로서 생명체에 포함되는 부분집합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비록 관념적인 형태일지라도 희주가 푸릇푸릇한 것들에 대한 애착과 인류에 대한 연민을 지니는 것은 이 때문이다. 희주와 연수 두 사람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과 기꺼이 분리되길 선택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학교를 그만둔 후 깨지기 쉬운 도자기처럼 고통의 역치가 급격히 낮아진 연수와 달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전체집합의 균질한 원소로 바라보는 희주는 오히려 무덤덤한 구석이 있다. 연수의 분리가 고립이라면 희주의 분리는 고독이다. 단 한 사람의 원소로 이루어진 집합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연수와 희주의 집합은 형태상 유사하지만 그 구조를 따져 보면 차이가 발견된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 차이로 희주는 연수보다 넓은 행동반경을 유지할 수 있고, 그러다 주호처럼 희주의 선을 넘어오는 이와 마주쳐 잠시나마 교집합을 형성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어차피 우리는 모두 물에 잠길 거”라고 말하는 희주가 좋은 ‘인류’일지는 몰라도 좋은 교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초등학생에게 먼저 가르쳐야 할 것은 멸종의 윤리가 아니라 생활의 도덕이고,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와 ‘괴롭히는 아이’는 구별되어야 한다. 교사에게는 그들의 사정을 듣고 그들에게 각자 다른 말을 건네야 하는 역할이 있다. 몇 년 살아 보지도 않은 아이들을 어차피 죽을 인간으로 바라보며 연민하는 희주의 시선에는 어딘가 무심하여 잔인한 신학자 같은 구석이 있다. 아마도 바로 그 점이 연수의 경우와 달리 희주에게 장막이나 보호구 역할을 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그 점이 아이들을 한 명의 사람이 아닌 멸종 직전의 인류로 뭉뚱그려 누군가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5.

 

   「보편 교양」3)의 곽은 학교를 그만두지 않는다. 딱히 그만둬야 할 이유가 없었다. “아쉬운 월급이지만 임금노동자 평균 수입에 비하면 넉넉했”고 “자잘한 연수나 업무가 있긴 해도 방학은 방학이었다.” 중요한 건 언제나 “균형감각”(191쪽)이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입시를 통한 재생산 회로에 종사하고 있다는 자의식을 잃지 않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학생들에게 배움의 기쁨을 알려주겠다는 희망 또한 버리지 않는 것. 그는 “공교육이란 중산층의 아비투스를 재생산하고 체제 유지에 기여하는, 필연적으로 부수적인 국가 장치”라고 곱씹었지만, 그럼에도 미래에 대해 “아무도 예단할 권리는 없”(205쪽)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학생들의 과목 선택권을 보장하는 새 교육정책이 그래 봤자 입시 제도에 불과하다고 우려하면서도, 내심 ‘고전읽기’ 과목을 개설하여 학생들과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기대를 품었다. 그러니까 곽은 장기적인 전략에 따라 효율적인 전술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다. 정치적으로 편향된 내용을 가르친다고 민원을 넣은 은재 아버지에게 『자본론』이 ‘서울대 권장도서’가 될 만큼 얼마나 ‘안전’한지 설득하려다가 “자신이 마르크스를 긍정하려는 것인지 부정하려는 것인지 혼란스럽기도”(204쪽) 할 정도로.

   그러니 곽은 누구와도 완벽히 불화할 수 없다. 곽은 모범생인 은재가 대견한 만큼 학교를 겉도는 다른 학생들도 이해할 수 있고, 마르크스를 위험한 사상가로 동경하면서도 은재 아버지에게 그가 얼마나 안전한지 설명할 수 있으며, 비판과 사유가 체제를 향한 저항이라고 여기면서도 이제 체제가 비판적 사유 능력을 교양으로 요구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런 곽의 세계를 벤다이어그램으로 그려 보면 연수와 희주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그림이 그려진다. 중간 크기의 집합들이 서로 복잡하게 교집합과 포함 관계를 이루며 얽혀 있는 그림. 여기서 출발해도 저기로 도착하는 긴 사슬처럼 엮인 집합 다발이 보이기도 하고, 어제는 아무런 접점도 없었지만 오늘은 넓은 교집합을 공유할 수도 있고 내일은 꿀꺽 삼켜져 포함되어 버릴 수도 있는 유동적인 집합들이 가득한, 그런 입체적이고 혼란스러운 그림. 

   복잡한 교집합의 관계는 한눈에 파악되지 않는다. 『자본론』을 가르친 곽과 곽의 수업을 충실히 따라온 은재와 그것을 걱정하는 은재 아버지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곽은 수업을 통해 은재와 자신 사이에 교집합이 존재한다고 믿지만, 마르크스에 한해서라면 실은 곽과 은재 아버지야말로 단단한 교집합을 이루고 있다. 마치 군사독재 시절 마르크스의 저작을 금서로 지정했던 국가기관과 어떻게든 그것을 읽으려고 위험을 감수했던 학생들 모두 책의 힘을 믿는다는 공통점을 지녔던 것처럼, 곽과 은재 아버지 역시 책을 읽으면 사람이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 책을 읽으면 선을 넘을 수 있다는 믿음을 공유하며 교집합을 형성한다. 은재가 『자본론』을 스펙 삼아 서울대에 합격한 후에도 그들의 교집합은 여전히 유지된다. 이제 두 사람은 마르크스가 ‘보편’과 ‘교양’의 세계에 입성했음을, 마르크스를 읽는다고 선을 넘는 시대는 오래전에 영영 끝나버렸음을 깨달은 동류가 된다. 

   곽의 벤다이어그램에서 통치의 경계선은 엄청난 탄력성을 지니고, 그 선 바깥으로 넘어가는 일은 도저히 불가능해 보인다. 불온서적이 있다면 그것을 읽고 선을 넘을 수 있지만, 모든 게 교양이 되어버리면 애초부터 넘어야 할 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선 너머가 보이지 않는 곽의 벤다이어그램을 비관하자는 말은 아니다. 무얼 해도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통치의 경계선이 그만큼 자주 갱신된다는 의미이고, 통치의 경계선이 갱신 중이라는 말은 푸코의 주장처럼 언제나 통치와 저항이 동시에 구성된다는 의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선 너머로 갈 수 없다는 말을 영원히 내부에 갇혀버렸다는 투항의 뜻으로 들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통치에는 항상 예상치 못한 잉여와 빈틈이 존재하여 운신할 수 있는 내부 공간이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없다는 뜻으로 들을 수도 있다. 물론 이 모든 일은 곽의 냉소가 곽의 희망을 완전히 덮어버리지 않았을 때만 가능하다. 냉소와 희망 사이의 승부가 쉽게 나지 않길 바라는 것, 그것이 곽의 벤다이어그램에서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의 목표로 보인다.



   6.


   연수, 희주, 곽. 세 사람의 벤다이어그램은 평범한 어른이 자신보다 강고하고 막대한 사회를 표상하고 상대하는 세 가지 전형적인 형식을 보여준다. 물론 모두 맹점은 존재한다. 연수와 희주의 집합은 자기연민에 빠지거나 자기보존에 골몰하기 쉽고, 곽의 집합은 필연적으로 자기분열을 동반하기에 자칫 자기기만으로 이어지기 쉽다. 어쩌면 오늘날 교사로서, 어른으로서 산다는 것은 이 정도의 선택지 앞에 놓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인간 삶이 패배라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고 “삶이라고 부르는 이 피할 수 없는 패배에 직면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그 패배를 이해하고자 애쓰는 것”4)이라면, 삶의 맹점을 그리는 소설들이 제공하는 실존적 증거를 들여다보고 소설에 쓰이지 않은 것들을 상상하고 검토하는 일이 마냥 무의미하지만은 않다고 믿는다. 그러니 엉성하고 성긴 소묘지만 남겨 두기로 한다.

 

   #1. 연수처럼 첫 번째 방식으로 세계를 보는 사람들은 큰 집합과 작은 집합의 대치에 압도되어 있다. 당연하게도 그 경계선에 대한 의식과 두려움이 크고, 자꾸 자신의 상처와 내면으로 파고들거나 사회로부터 억압당한다는 대타의식을 키울 수밖에 없다. 이들의 불안과 공포는 눈앞의 경계선이 상당 부분 상상적으로 구성되었음을 인정해야만 줄어든다. 전체집합이 어떻게 구성되고 배치되어 있는지에 관한 메타적 시선을 확보해야 겁에 질린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가장 선명해 보이는 두 집합 사이의 대립에 집중하기보다 더 큰 세계에서 자신이 어느 좌표에 위치하는지 파악할 것. 언제나 피해자인 사람도, 언제나 보호받아야 하는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2. 희주처럼 두 번째 방식으로 세계를 보는 사람들은 전체집합에 대한 의식이 지나치게 강하여 삶이 보유한 속된 욕망에 적절한 지분을 할당해 주지 않는다. 어린아이에게도 삶보다 죽음을 먼저 속삭이는 이 상냥한 허무주의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전체집합 안에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중간 크기의 집합을 발견하고 가꾸는 일이다. 인류세 시대에 필요한 윤리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자기보호와 구별하기 어렵다. 그러니 중간 규모의 집합에서, 생활의 차원에서, 그 윤리를 실험해 봐야 한다. 다행히 소설에서는 선을 지킬 줄 모르는 주호의 동선이 희주가 그어 둔 경계선을 가로질러 교집합을 만든다. 덕분에 희주는 무해함과 보존의 서사에서 참견과 발견의 서사로 이동할 수 있게 된다. 

   #3. 곽처럼 세 번째 방식으로 세계를 보는 사람들은 다층적인 지도 위에 자신을 세워 두고 상황에 맞춰 운용한다. 다양한 집합 사이를 이동하는 플레이어처럼, 이들은 교집합이 아예 없는 고립된 집합이나 하나의 원소만으로 이루어진 단일한 집합은 선호하지도 신뢰하지도 않는다. 집합과 집합 사이를 오가다 보니 낙차로 인해 자연스럽게 아이러니가 발생하고, 그 낙차를 해소하기 위해 냉소와 유머의 기술이 필요하다. 교집합과 여집합 개념을 포함하여 집합론의 기초를 가르치기에 좋은 벤다이어그램을 가지고 있기에, 이들이 피해야 할 함정은 “계몽된 허위의식”을 지닌 똑똑한 “냉소주의자”,5) 그러니까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면서도 계속 그렇게 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들은 비애감 가득한 말투로 기만을 합리화할 방법쯤은 얼마든지 알고 있다.


  

   7.

 

   거칠고 도식적으로 분류해 보았지만, 실은 사회생활을 하는 어른들은 대부분 저 세 가지 벤다이어그램을 동시에 그리며 살아간다. 나 역시 그렇다. 대상에 따라, 상황에 따라 내가 서 있는 그림이 달라진다. 그 점을 반성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대상과 상황이라는 것을 제대로 파악하고 행동해 왔는지, 적어도 십 년의 세월이 지났다면 검토해 봐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할 뿐이다. 명백히 잘못 판단하여 후회가 남는 일도, 여전히 잘 모르겠는 일도, 다시 고민해 봐야겠다고 미뤄 둔 일도 많다. 다음 달에 이어질 글은 여기에서 시작하려 한다.


1) 안보윤, 「너머의 세계」, 《현대문학》 2023년 5월호.

2) 공현진,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악스트》 2023년 3/4월호.

3) 김기태, 「보편 교양」, 《창작과비평》 2023년 가을호.

4) 밀란 쿤데라, 박성창 역, 『커튼』, 민음사, 2012, 21쪽.

5) 페터 슬로터다이크, 이진우·박진애 역, 『냉소적 이성 비판1』, 에코리브르, 2005, 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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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386세대와 패배하지 못한 혁명들의 시차 임세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퇴근 후에 넥타이를 존나 풀고 찾아와 옛 추억에 잠겨 노래 한 곡 워어어어 케케묵은 노래들을 불러대며 울어대네 아름다운 젊음이여 흘러간 내 청춘이여 너희들이 정녕 민주화를 아느냐 이 손으로 일군 민주주의 대한민국 요즘 어린 것들은 몰라도 한참 몰라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투쟁도 혁명도 이제는 모두 봄날의 꿈 그리웠던 혁명동지 돈을 꾸러 찾아왔네 골프채로 쫓아내니 마음속이 허전해 내일은 미스 김의 보지 냄새 맡아야지 밤섬해적단, 〈386 Sucks〉, 《서울불바다》, 2010. 1. 중단된 혁명 이제는 진부한 제재처럼 감각되는 ‘후일담’의 환멸과 자조 이후 한국 문학에서의 386세대 재현은 익숙하지만 낯선 ‘진정성’의 풍광들을 펼쳐 보인다. 이른바 ‘포스트-진정성 체제’1)에서의 속물들의 세계상은 기실 그 문제적 주체로 호명되었던 386세대뿐만 아니라, 386세대에 의해 다시 지목당한 ‘20대 개새끼론’의 대상이었던 ‘88만원 세대’에게도 벗어내기 힘든 혐의였다. IMF 이후 가속화된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서 20대 빈곤의 원인이 세대 간 착취에 있다는 통찰 가운데 던져진 “토플책을 덮고 바리게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2)라는 조언을 (귓등으로) ‘학습’했던 새 세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이었고, 어디로 향하였는가. 타 세대에 의한 명명 대신 “나는 씨발 존나 멋진 이십대 청춘”3)이라며 타락한 386의 ‘흘러간 청춘’을 조소하던 20대는 어느덧 MZ세대의 선봉으로 싸잡아 묶여진 채 40대의 문턱을 넘고 있다. ‘민주화’라는 ‘명분’ 위에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모두 쟁취한 것처럼 조롱되는 386세대에 대한 냉소는 오늘날 “운동권 특권 정치를 청산하라는 강력한 시대정신”4)을 따르겠다는 한동훈 전 국민의 힘 비대위원장의 취임사로 구현되며 동세대 정치인들의 반발과 분노를 유발하기도 했다.5)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본다면 386세대가 이룩한 ‘민주화/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오염되고 폄훼의 대상이 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민주화 시키다’라는 표현은 386세대에 대한 비판이 본격화되었던 201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강제로 억압하다’는 조소의 뜻을 지닌 채 활용되었다. 입으로는 ‘케케묵은’ 투쟁의 추억을 타령하며 실제 삶에서는 동지를 배신하고 돈과 섹스의 욕망을 좇는 운동권 세대를 저격한 〈386 Sucks〉의 면면은 새로울 것도 없는 386의 전형(stereotype)을 노래한다. 그런데 이 오래된 냉소의 역학 속에서 눈

  • 관리자
  • 2024-07-01
오염, 오류, 오독

오염, 오류, 오독 - 소설이 수행하는 ‘다시’ 황유지 마들렌을 먹으며 과자 부스러기와 차 한 모금이 어우러진 달콤한 환기 속에서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일은 마르셀에게 행복을 준다. 그러나 발벡의 호텔방에서 신발을 벗으려다 문득, 할머니가 신을 벗겨 주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은 그에게 행복감을 주지 않는다. 죽은 할머니를 떠올리는 일, 그것은 “고통스러운 소멸”을 확인시킬 뿐이다.1)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이 일화는 과거를 부르는 일이 각기 다른 정서를 환기함에 대한 예시로 내밀어지며 ‘기억’에 착종되는 다양한 감정이 주체를 어떻게 흔들 수 있는지 넌지시 묻는다. 소멸의 확인도 그렇지만 미완, 불완전, 불만족인 채로 내버려둔 사건에 대한 기억의 소환 역시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인데, 그건 엄연히 그 일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라 모종의 감정적 자원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에서 이런 ‘다시’는 레트로로 나타난다. Retrospect, ‘추억’에 뿌리를 둔 이 말은 패션, 음악, 영상부터 먹거리, 금융상품에 이르기까지 그 반경을 확대하며 과거로 우리의 기억을 끌고 간다. 과거의 소환은 이 사회에 대한 일종의 환각제이자 자본주의라는 무한한 기계적 힘에 대한 제동, 그 중단의 본능적 발현이다. 이런 레트로는 과거에 대한 향수, 노스탤지어의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 고대인들에게 노스탤지어란 ‘되돌아가는 일(nostos)’을 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아픔(algos)’으로 이해된다. 그러니까 레트로는 돌아갈 수 없는(가본 적도 없는) 시절을 향한 자본주의적 환각제이다. 프루스트의 위대한 주제가 사물들을 처음 경험할 때의 무능력이라 파악하는 프레드릭 제임슨은 진정한 경험이 우리가 의식적으로 다른 것을 의도하는 동안, ‘눈가’를 통해 온다면서 그 가능성을 글쓰기에서 찾는다. 기어이 돈을 주고라도 사겠다는 환각성 추억과는 달리 기억을 통한 글쓰기는 상실한 것을 복원하려는 고도의 정신 작업이랄 수 있다. At the corner of eye, 거기가 바로 진정한 경험이 되돌아오는 자리로 가장 의도적인 두 번째 경험, 글쓰기는 그 형식이 된다. 2) 글쓰기는 행해짐과 동시에 복수의 행위자를 탄생시킨다. 쓰는 자와 읽는 자,3) 이는 시차(時差)와 함께 탄생하며 텍스트가 현실과 맞닿은(혹은 결별한) 그 부위에 필연적으로 틈을 만든다. 대체로 모든 문제는 이 ‘틈’에서 태어나는 것처럼도 보인다. 틈은 이미 분리, 분절된 것으로 존재하면서 거기에 무엇을 메우든 결코 원본의 형태를 완벽히 구현할 수 없다. 원본처럼 복원한 것조차 복사본일 따름이라 틈은 그 자체 오류가 되는 것이다(가령 원본이 틀린 것이라 할 때도 제대로 수정된 본은 오류가 된다. 틀린 원본에 대해 기어이 맞추어진 진실

  • 관리자
  • 2024-07-01
세계의 끝을 넘는 법

세계의 끝을 넘는 법 박인성 왜 시간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시간이란 모든 것이며,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다. 시간은 물질세계의 변화를 파악하는 우리의 인식에 불과하지만, 언제나 실제적인 힘으로 우리 삶에 개입한다. 시간을 단위로 파악하는 것은 인간 사회의 편의적인 메커니즘일 뿐이지만, 그러한 메커니즘이 다시금 인간의 모든 삶에 작동하면서 우리의 모든 사유와 행위를 시간이라는 틀에 맞추어 운영하게 만든다. 인간이 만들어낸 사변적 도구가 다시 우리의 삶을 조직하고 운영하는 내재적 체제가 된다는 흥미로운 생각이다. 우리는 실시간으로 시간을 측정하지만 모든 시간에 대한 경험은 순간적이며 지속되지 않는다. 하지만 놀랍게도 시간에 의해서 변화하는 그 모든 것들의 누적된 결과는 지속적이며 실체적인 방식으로 우리 삶에 개입한다. 이것이 시간을 이야기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다. 시간은 순간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된 결과로서 주관적 경험에 그칠 수도 있는 인간 삶에 대한 근사치의 이해를 제공한다. 어디까지나 근사치 말이다. 인간이 처음으로 자연의 운행을 파악하는 시계를 만들고, 달력을 통해서 시간의 흐름을 정례화한 순간부터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변화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인간은 오랜 세월 시간이라는 운영체제(OS)에 의해서 작동하는 시간-사이보그로서 살아왔으며, 이러한 운영체제에서 벗어날 수 없어 보인다. 시간이라는 개념의 재귀적 성격은 시간을 다루는 모든 확장된 논리를 발견하고 활용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기억과 회상, 약속과 지연, 예언과 예지는 모두 인간이 시간이라는 틀을 활용해서 세계와 타인에 개입하기 위한 조작적인 수단에 불과하다. 시간은 허상이지만 동시에 실존하며, 인간은 시간에 대한 조작적인 사유를 통해서 의미를 조직해 낸다. 이것이 우리가 시간을 이야기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다. 시간은 결코 분절되지도 정지할 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끊임없이 멈추거나 지연시킨다고 생각하면서 시간에 대한 경험적 이해를 형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의미’란 바로 시간을 사유하는 조작적 시간(정지와 지연)에서만 발견되고 생성된다. 사실 시간을 정지시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삶의 의미를 떠올릴 때, 우리는 삶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공간이 존재하는 것처럼, 일종의 ‘시간의 바깥’을 상연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인터스텔라(Interstellar, 2014)〉에서 블랙홀을 통해 진입한 5차원 공간에서 과거 지구를 떠나기 전 딸 머피와의 만남을 다시 바라보게 되는 조셉의 모습은 비유적이지만 정교하다. 우리는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을 벗어날 수 없지만, 마치 다른 중력의 영향을 받듯이 느려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나간 삶에 대한 예외적인 의미화를 수행할 수 있게 된다. 이미 흘러가 버렸으며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순간들이 마치 구조화된 순서처럼 배열되고 우리는 거기에 그럴듯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SF 장르로서 〈인터스텔라〉가 물리 법칙에 주어진

  • 관리자
  • 202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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