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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 작성일 2024-07-01
  • 조회수 150

   혁명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386세대와 패배하지 못한 혁명들의 시차


임세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퇴근 후에 넥타이를 존나 풀고 찾아와

옛 추억에 잠겨 노래 한 곡 워어어어

케케묵은 노래들을 불러대며 울어대네

아름다운 젊음이여 흘러간 내 청춘이여

너희들이 정녕 민주화를 아느냐

이 손으로 일군 민주주의 대한민국

요즘 어린 것들은 몰라도 한참 몰라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투쟁도 혁명도 이제는 모두 봄날의 꿈

그리웠던 혁명동지 돈을 꾸러 찾아왔네

골프채로 쫓아내니 마음속이 허전해

내일은 미스 김의 보지 냄새 맡아야지

밤섬해적단, 〈386 Sucks〉, 《서울불바다》, 2010.



   1. 중단된 혁명


   이제는 진부한 제재처럼 감각되는 ‘후일담’의 환멸과 자조 이후 한국 문학에서의 386세대 재현은 익숙하지만 낯선 ‘진정성’의 풍광들을 펼쳐 보인다. 이른바 ‘포스트-진정성 체제’1)에서의 속물들의 세계상은 기실 그 문제적 주체로 호명되었던 386세대뿐만 아니라, 386세대에 의해 다시 지목당한 ‘20대 개새끼론’의 대상이었던 ‘88만원 세대’에게도 벗어내기 힘든 혐의였다. IMF 이후 가속화된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서 20대 빈곤의 원인이 세대 간 착취에 있다는 통찰 가운데 던져진 “토플책을 덮고 바리게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2)라는 조언을 (귓등으로) ‘학습’했던 새 세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이었고, 어디로 향하였는가. 타 세대에 의한 명명 대신 “나는 씨발 존나 멋진 이십대 청춘”3)이라며 타락한 386의 ‘흘러간 청춘’을 조소하던 20대는 어느덧 MZ세대의 선봉으로 싸잡아 묶여진 채 40대의 문턱을 넘고 있다. 

   ‘민주화’라는 ‘명분’ 위에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모두 쟁취한 것처럼 조롱되는 386세대에 대한 냉소는 오늘날 “운동권 특권 정치를 청산하라는 강력한 시대정신”4)을 따르겠다는 한동훈 전 국민의 힘 비대위원장의 취임사로 구현되며 동세대 정치인들의 반발과 분노를 유발하기도 했다.5)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본다면 386세대가 이룩한 ‘민주화/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오염되고 폄훼의 대상이 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민주화 시키다’라는 표현은 386세대에 대한 비판이 본격화되었던 201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강제로 억압하다’는 조소의 뜻을 지닌 채 활용되었다. 입으로는 ‘케케묵은’ 투쟁의 추억을 타령하며 실제 삶에서는 동지를 배신하고 돈과 섹스의 욕망을 좇는 운동권 세대를 저격한 〈386 Sucks〉의 면면은 새로울 것도 없는 386의 전형(stereotype)을 노래한다. 그런데 이 오래된 냉소의 역학 속에서 눈여겨볼 지점은 ‘민주화/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상찬이든 비판이든 386이라는 특정한 세대를 경유한 가운데에서만 활용되고 상상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민주화’는 왜 그 실패까지도 포괄하여 386의 전유물이 되었는가. 이러한 질문은 혁명 이후의 삶을 전망하는 크고 작은 관점들에 386세대를 어떤 원형이자 축으로 삼는 관성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장-뤽 낭시는 “오늘날 ‘민주주의’는 무의미의 전형적인 사례가 됐다”며 민주주의가 정치와 윤리 법, 권리, 문명 모든 것을 뜻하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뜻하지 않게 된 ‘무의미’의 의미를 진지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한 바 있다. ‘중단된 혁명’의 과정에 존재했던 봉기의 순간과 갱신하는 행위로서의 정치를 ‘무의미’로부터 사유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5)

   낭시의 통찰처럼 정치가 그 토대를 잃게 만드는 ‘혁명’은 어느 순간 필연적으로 중단될 수밖에 없다는 엄연한 진리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민주화’ 이후의 세계상은 봉기와 갱신의 순간들을 사유하기보다 좌초된 혁명, 우스꽝스러운 투사의 이미지를 재생산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또한 그 재생산의 주체가 비(非)운동권이었던 동세대 남성-엘리트 내지 ‘전향자’, ‘민주화’의 혜택 덕분에 안온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여겨지는 후세대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미투(MeToo)의 국면에서 386 남성은 전세대 여성들을 성적으로 착취하고 희롱한 적폐의 표상으로 등극했다. 계속해서 탐문되고 갱신되어야 할 ‘혁명’의 순간들과 투쟁의 이상은 왜 정치적 헤게모니 싸움이나 세대 갈등으로 구조화되며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하였는가.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이 글은 ‘민주화’ 이후의 세계를 물려받은 80년대생 작가, 이미상과 김기태가 각각의 소설에서 재현하고 있는 ‘중단된 혁명’과 시차(時差)의 간극을 포개어 읽어 보려고 한다. 이들 80년대생 작가들은 왜 자신들의 것이 아니었던 ‘혁명’을 전유하여 그 실패와 성취를 씁쓸한 유산처럼 각인하고 있는가. 의도적인 시대착오(時代錯誤)의 형상들을 왜 2020년대의 갱신되지 않은 혁명의 지도 위에 겹쳐 놓고 있는가.



   2. 엉켜버린 실타래의 끝, 동시대의 비동시성


   돌이켜 보면 87체제 이후의 한국 사회에도 숱한 혁명의 모멘텀들이 있었다. 2017∼2018년의 촛불항쟁,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의 변혁들, 2014년 세월호 참사, 2002년 효순이 미선이 사건(미군 여중생 압사 사고) 등은 하나의 시대정신으로서 민주주의의 현 단계와 국가의 정치적 수행성과 책임을 근본적으로 사유하게 하는 기제로 작동하였다. 이른바 ‘근대문학 종언론’ 이후에도 꾸준히 모색되었던 문학의 정치적 역할과 새로운 윤리적 가능성의 틈바구니에서 그러나 80년대의 민주화항쟁은 너무나 거대하고 엄숙한 기표로서 현재형의 표상 가능성을 잃어 갔다. 꾸준히 사유되고 갱신되어야 할 ‘민주화’의 영역은 신성화된 채 반대급부로서 386세대의 전향, 속물화, 성폭력이라는 표리부동과 퇴색의 이미지가 들러붙게 된 것이다.

   주지하듯이 386이라는 명명은 인텔 마이크로프로세서를 탑재한 컴퓨터의 명칭에서 차용한 조어로서, (용어가 만들어질 90년대 당시) 30대, 80년대 학번, 60년대 출생인 세대를 뜻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386은 486, 586이 되었고, 그때는 혁신적이었으나 지금은 ‘낡아버린’ 컴퓨터의 이름 대신 86세대로도 호명된다. 그러나 대학 진학률이 낮았던 시대에 8로 시작하는 ‘학번’을 가진 대학생은 30%대에 불과했고,7) 다수의 비대졸자가 포함된 60년대 생들을 ‘386세대’가 아닌 ‘민주화 2세대’, ‘베이비붐 세대’로 규정하는 명명법8)이 말해 주듯 386은 ‘세대’의 이름이 아니라 특수하고 제한적인 범주의 남성-지식인-이념 세력의 별칭이다. 그럼에도 386은 한국 사회와 문학에서 중요한 위상을 지닌 윤리적 주체이자 민주화의 주역, 여전히 푸른 청춘의 이름으로 소환되며 자신들의 정치적 지분과 정체성을 공고히 구축하였다. 소수의 386이 이룩한 성과와 한계에 대한 논의를 경유하지 않고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를 전망하기란 어려운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 점에서 80년대에 출생하여 2000년대에 대학을 다닌 작가들이 386세대의 존재-부재를 경유하여 현재적 서사를 써나간다는 점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대학에서 운동권 세력이 퇴조하였으나 여전히 흐릿하게 잔존하는 선배 세대의 영향력 속에서 반미 시위나 등록금 투쟁에 ‘어설프게’ 동참하거나 먼발치에서 목격했던 00년대 학번 작가들이 386을 경유하는 상상력에는, 혁명 이후의 꿈을 살아가는 새로운 세대의 곤경과 모색이 잠재되어 있다.

   「하긴」9)의 서술자는 386의 세속적인 ‘오늘’을 환기하는 동시에 386에 대한 세간의 스테레오타입화된 환멸을 정확하게 체현하는 인물이다. ‘나’는 과거 운동권이었고, 현재는 언론사에서 일하며 자신의 연재 코너까지 가진 기자이다. 번듯한 외국계 인권단체에서 일하는 아내와 ‘나’는 공장에서 만난 ‘학출’ 출신으로, 아이에게 보미나래라는 큰 뜻의 한글 이름을 지어 준다. ‘나’는 아이가 보수 우익이 되든 종교인이 되든 “구미에 맞게 조련해 키우지 않겠다는 급진적인 양육관”(14쪽)을 가지고 주말마다 역사를 가르치는 ‘이상적’인 삶을 꿈꾼다. 그러나 그들의 ‘희망’을 삶으로 실현해야 할 딸이 저지능 판정을 받고 변변한 대학 입학조차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자 ‘나’의 삶에 도사리고 있던 허위와 기만들이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작가는 민주화운동 세력에게 오래도록 비판으로 가해졌던 지점들, 그들의 위선적 면모를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촉발하는 현재진행형의 이야기로 재소환한다.

   ‘나’는 흔한 자기연민과 패배의식에 빠진 감상적인 인물도 아니다. 그는 “후일담이나 꾀죄죄하게 늘어놓으며 추앙받고 싶진 않다. 처절하게 부정되고 가열하게 척결되고 싶다.”(20쪽)는 ‘깨어 있는’ 의식을 지닌 인물이다. 지식인답게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그것을 언어화하며 끊임없이 경계한다는 점에서 386세대의 근원적 불행과 희극적 면모는 한층 강화된다. 민주화 이후 ‘운 좋게’ 얻은 안온한 삶 내부에서 결코 부정된 적 없던 신념과 이상,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희구가 얼마나 편의적이고 허울뿐인 것이었는지를 작가는 반복해서 강조한다. 

   ‘나’는 “지능은 유전 아닌가?”(12쪽)라며 자신과 같은 대학원을 나왔지만 학부는 다른 대학 출신인 아내의 지능을 의심하고, 학출 시절 만난 ‘여공’과 결혼한 석형의 딸이 그러니까 ‘고작’ 여공의 딸이 어떻게 카이스트에 입학할 수 있는지를 의아해한다. 민주화운동의 과정에서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변혁해 내지 못한 것, 나아가 혁명을 거치며 깨닫게 된 냉혹한 진실은 그의 안락한 삶과 계급성을 담보해 준 조건인 동시에 그의 딸 보미나래의 삶의 가치를 판정하는 준거가 된다. 그것은 단지 계급을 재생산하는 장치로서의 교육 시스템, 학벌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다수 민중과 소수 엘리트를 위계적 질서 속에서 판별하는 그 기준에 따르면 보미나래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삶의 의미조차 알지 못하는 채로 소모되다 죽어가는 일개미처럼 살아갈 것이다.



   민중이 뭔가. 민중은 개미다. 우리가 했던 건 뭔가. 개미 행렬의 패턴을 읽고 옳은 길로 가도록 안내하는 것이었다. 개떼가 흥분해 왈왈댔다. 더 빨리! 더 빨리! 더 빨리! 나는 이를 꽉 물며 손을 비틀어댔다. 네 딸년들은 파브르의 시점에 있겠지. 내 딸이 식별 불가능한 개미의 얼굴을 하고 흙에 고개를 처박은 채 자기가 뭘 하는지도 모르면서 복잡한 개미집을 짓고 있는 동안, 물웅덩이 앞에서 한없이 당황하는 동안, 네 자식들은 조감하며 거기가 아닌데, 그렇지 거기지, 하겠지.(32∼33쪽)



   세상을 내려다보고 삶의 형태들을 조감한다는 것은 세계의 부조리를 간파하고 변혁을 부르짖으며 민중을 이끌었던, 특히 학출이라는 형태로 공장에 잠입해 노동자들을 일깨우려 했던 ‘나’와 석형의 가장 자랑스러운 과거이자 그들 존재의 근간이다. 그러나 자랑스러운 민주화의 성과와 별개로 그 엘리트들은 딸을 개미 같은 민중의 일원으로 키우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이러한 선험적 판단에는 민주화운동의 주역이었던 386세대가 수용해버린 ‘세상의 이치’에 대한 절망과 체념이 내재되어 있다. “풀 수 있는 문제는 풀 수 있고, 풀 수 없는 문제는 풀 수 없다”는 것을 “나는 경험상 안다.”(20쪽)

   이 냉철한 ‘앎’이 겨냥하는 끝 지점은 힘겹게 얻어낸 과거의 교훈이 아니라 엉켜버린 실타래를 툭 넘겨받은 현재의 해명 불가능성이다. 풀지 못한 모순들이 자신과 딸의 삶을 육박해 올 때 ‘나’는 어떤 편법을 써서든 딸을 안전한 체제 안으로 편입시키는 쪽을 선택한다. 딸을 정규 고등학교 과정 대신 대안학교에 입학시킨 후, 그녀가 미국의 에코 공동체에서 거주하는 동안 입시에 이용할 포트폴리오를 자신이 직접 ‘제작’하기로 한 것이다. 대입의 ‘명분’을 위한 입시 컨설팅을 해주는 것은 과거 운동을 하다 이력에 빨간 줄이 생겨 취업을 못 하고 사교육시장에서 억대 연봉의 컨설턴트가 된 친구 문이다. 기시감이 들 정도로 익숙하고 이토록 노골적인 386 재현 방식은 한 영웅적 세대의 위선과 어리석음을 전면화하고 있는데, 그 배면에는 ‘짱돌을 들라’고 종용 당했던 새 세대의 관조적 시선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혁명 이후의 시간을 살아간다는 것은 여전히 풀지 못하고 엉켜버린 실타래를 함께 넘겨받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동일한 연대기적 시간을 살고 있지만 다양한 세대가 경험한 현실적인 시간은 모두 다르다는 것, 이 ‘동시대의 비동시성’10)이 만들어내는 간극에서 여전히 유력하지 못한 세대의 혁명의 시차(時差)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어내지 못한 것, 스스로의 언어를 통해 자신을 정체화하는 자의식과 합리화의 기제들이 촉발되는 지점들을 작가는 집요하게 응시한다. 그것은 결국 언어(말과 글)를 통해 추동되며, 궁극적으로 세계를 완성한다. ‘나’는 실체적 진실과 무관하게 자신이 정체화하기를 원하는 어떤 상(像)을 편지 형식으로 신문 지면에 발표하여 자신을 구축한다. 아직 글도 읽지 못하는 흑인 손자 샘에게는 청춘에 대한 소회와 ‘진짜 봄’을 가르쳐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고, 아내에게는 그녀의 바라봄이 자신 생존의 조건이라며 애틋한 사랑을 고백한다. 이러한 명명과 선언의 세계 속에서 존재는 명분과 의미를 지닐 수 있게 된다. 명목상의 수신자인 아내와 샘이 편지를 읽지 않아도 무방하다. 그것은 편지라는 형식의 외피를 빌렸지만 결국은 내가 나에게 쓴 나르시시즘적 발화이자 ‘그렇게’ 보여지고 싶은 자기상을 세상에 각인해 넣기 위한 대외적 포즈이기 때문이다.

   “내가 잠시 바람을 피웠던 것도 결국에는 존재의 근거가 채워지지 않아서였다”(20쪽)라거나, 흑인 아이를 출산한 딸이 미국에서 로스쿨에 다니는 남자와 약혼했다는 거짓말은 그 자신의 부정(不正)에 대한 합리화인 동시에 ‘나’가 현재를 부인하며 정확히 그 반대급부로서만 소망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으로서 기능한다. 현실에 대한 부정(否定), 반-테제만을 축으로 뻗어 나가는 가상의 이상이라는 점에서 「하긴」을 읽는 독자는 그것이 ‘나’가 투신했던 민주화운동의 실체와 과연 무엇이 다른가를 또한 씁쓸하게 탐문할 수밖에 없다.

   ‘나’가 후세대의 이상처럼 여기는 문의 딸 초롱은 “중학교를 중퇴하고 삭발하고 사르트르 따위를 읽다가 최연소로 등단해 검정고시를 거쳐 국공립 예술대학에 들어간”(14쪽) 반항적인 청년이다. ‘나’는 자신의 세대가 이룩해 내지 못한 것, “우리가 우리 부모에게 가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던 것을 우리에게 가하는 새끼를 길러낸다는 것”(21쪽)을 이상적인 삶으로 여긴다. 초롱은 확실히 “원천봉쇄의 부진함”을 장착한 채 “별다른 일탈도 않는 착한 딸”, “그렇게 반항의 맛마저 없는”(14쪽) 보미나래와는 다른 “종자”(11쪽)처럼 보인다. 초롱이 아버지 문을 저격하며 쓴, “자기 이름으로 운동하는 것들은 싹 다 죽어야 돼.”(20쪽)라는 거친 글쯤이야 “자기 언어를 가진 자식을 둔다는”(20∼21쪽) 기쁨에 비하면 별것 아니다. 자신을 육박하듯 빠르고 거칠게 공격하는 후세대에게 기분 좋은 당혹감을 느끼는 순간에 대한 기대와 상상은,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보미나래에 의해 실현되며 그 실체를 드러낸다.

   ‘나’가 그토록 희구했던 “부정”과 “척결”의 계기는 예상치 못한 보미나래의 출산과 ‘임테기 천사’의 재림으로 도래한 것이다. 한강 화장실에서 필요한 사람에게 임신 테스트기를 건네고, 그가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리는 동안 문밖에서 가만 휘파람을 불어 주는 임테기 천사, 보미나래. 자신의 세대가 부모 세대에게 가하지 못한 공격, 결코 상상하지 못했고 언어화할 수조차 없는 비정형의 실천으로 후세대는 자신만의 혁명기를 살아내고 있음을, 이제는 40대가 된 82년생 작가 이미상은 새삼스러운 386 재현을 통해 역설하고 있다.



   3. 죽은 자의 꿈을 살아가기


   중단된 혁명 이후, 죽은 자의 꿈을 이어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경건하고 거룩한 일이다. 그렇기에 혁명을 또 다른 혁명으로 이어 가지 못하고 현실과 타협하여 윤택한 삶의 궤도로 안착한 386세대에 대한 냉소와 조롱은 어쩌면 새로운 혁명을 추동하는 힘으로 전화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짱돌과 바리게이트’라는 구래의 무기를 유산처럼 건네받은 후세대는 자기 세대의 ‘명분’ 없이 어정쩡한 자세로 선봉대에 서야 하는 것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민주화’ 이후 정치적 헤게모니를 잡고 경제적 부를 이룩한 386세대의 자조와 환멸이 그 자체로 혁명의 지속 불가능성을 선언했던바, 그 모순적인 체념과 절망을 딛고 혁명을 이어 나갈 투사가 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되어버린 까닭이다.

   이른바 ‘꿀 빤 세대’로서의 ‘86세대 책임론’이 부각되면서 386세대의 위선과 이중성, 그들이 만들어낸 세계상의 면면 또한 함께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능력주의와 권위주의의 가장 큰 수혜자이자 비정한 신자유주의 세계를 축조해 낸 주체로서 386의 책임과 역할이 다시 주목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세대론의 구도에서 당시 새로운 청년 세대는 어떤 책임을 부여받았고, 어떤 역할을 자임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의문에 대해 김기태의 「보편 교양」11)은 새로운 시대의 가치를 탑재한 청년도 아니고 민주화의 빛나는 성취를 간직한 중년도 아닌 채로 늙어버린 ‘끼인 세대’의 서글픈 이상을 그 답변으로 제시하고 있다.

   마흔 살의 교사 곽은 “지난 시대 교육이 남긴 상흔”(191쪽)을 기억하며 “학생들은 나의 식민지가 아니”(198쪽)라는 사실을 되새기는 교육자이다. “교육은 예전에 끝났”(191쪽)다는 냉소 속에서도 곽은 “교사의 책임”(196쪽)에 대한 사명감을 지니고 수업에 임한다. 물론 곽 역시 “공교육이란 중산층의 아비투스를 재생산하고 체제 유지에 기여하는, 필연적으로 보수적인 국가 장치”이며, “규율화된 신체를 양산해 사회적 유용성을 극대화하려는 학교-감옥의 통치술”(205쪽)이라는 것쯤은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곽은 공교육 체제 속에서 선택과목으로 등장한 ‘고전 읽기’라는 수업을 맡은 뒤 최선을 다해 교육자로서의 신념과 이상을 실현하려 한다.

   「보편 교양」은 곽의 진심이 깊어질수록 더 크게 배반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통해 폭로한다. ‘고전을 통해 자아와 세계를 이해’하고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보편적인 교양과 바람직한 인성을 형성’한다는 과목의 취지에 따라 곽은 동서고금의 명저들을 공들여 살피고 백인 남성들의 저작에 편중되지 않도록 균형 있는 텍스트 목록을 만든다. 곽은 학생들이 책을 읽고 싶어지도록 차분한 색으로 벽면을 새로 칠한 전용 교실에 새 책장과 연계도서들을 채우고, 컬러로 출력해 코팅한 큐레이션 메모를 붙이며, 타탄체크 커튼까지 구매해 직접 핀을 꽂는 정성을 들이지만 수업 첫날 교실에 들어선 대다수 학생들은 노트 한 권 펜 한 자루 없는 상태이다. “미적분이나 영어는 싫고 그나마 국어라서”(196쪽) ‘고전 읽기’를 선택한 학생들 중 “스무 명은 엎드려 자고, 다섯 명은 이어폰을 꽂고 인터넷 강의를 듣”(205쪽)는 것이 곽이 맞닥뜨리게 된 현실인 것이다.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곽의 교육자적 신념이 명백히 옛 시절의 유물임을 소설은 반복적으로 환기한다. 곽은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에 등장하는 ‘늙은 교수’를 떠올리며 “현실과 괴리된, 정체된, 그래서 화자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다고 해설되는 이미지”(189∼190쪽)와 자신의 현재를 겹쳐 본다. 그러나 ‘노-트를 끼고’ 강의에 출석하며 밤마다 육첩방에서 시를 쓰는 성실한 삶에 대한 욕망은 자신이 늙지도 않았고 교수도 아니라는 자기 인식에 다다른다. “그렇게 생각하다 ‘늙지도 않았고’ 부분의 판단은 유보했다”(190쪽)는 대목은 「보편 교양」의 가장 문제적인 부분이다. 왜냐하면 「보편 교양」의 곽이 맞닥뜨리게 되는 ‘세상의 이치’를 완벽히 수용하거나 단호히 거부할 수 없게 하는 근본적 원인이 바로 이 ‘늙지 않음’이라는 경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로 다시 모든 판단은 ‘유보’ 상태에 놓이게 된다.

   “선생님도 민주화운동 했어요?”(190쪽)라는 학생의 질문에 곽은 대꾸할 말이 없다. 이제 마흔 살이 된 곽이 80년대에 한 일이 있다면 ‘태어나는 일’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재치 있는 대답으로 “독립운동을 했냐고 묻지 그래요?”(190쪽) 같은 말을 떠올리는 곽에게 기실 ‘민주화운동’은 먼 옛날의 ‘독립운동’과 다를 바 없는 사건이다. 그것은 전언으로 물려받은 먼 과거일 뿐, 위대한 명분을 지니고 역사적 족적을 남긴 독립운동에도 민주화운동에도 그 자신의 지분은 없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시대/세대 속에 놓여 있는가. 곽은 지식인답게 “세대론은 의심스러운 도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마흔 살이 된 지금, 곽은 ‘동시대’라는 단어에 소유권이 있다면 자신보다는 십대들의 지분이 크다는 걸 납득”(190쪽)할 만큼, 어떤 주도권을 상실했음을 자각하는 상태이다.

   그의 어렴풋한 깨달음처럼 곽을 포함한 민주화운동 이후의 세대는 ‘어떤 주도권’을 가져 본 적이 없다. 빛나는 영광도 쓰라린 패배도 없이 어영부영 생활자가 되어버린 곽이 “우리는 예전에 끝났어”(191쪽)라는 록밴드의 인터뷰를 곱씹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시작도 없이 끝나버린 세대의 일원으로서 마흔 살의 곽은 ‘늙지 않음’과 ‘늙음’의 경계에서, 어떤 넘어섬도 없는 ‘늙음’을 쉽사리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수업시간에 정치적으로 편향된 내용을 가르쳤다는 민원”에 대해 곽은 “분노나 환멸보다 잃어버렸던 무엇을 찾은 듯한 반가움”(192쪽)을 느낀다. 곽에게는 ‘투쟁’의 경험도 없고, 조직과 단결에 대한 믿음도 없다. 조금이라도 비슷한 경험이라곤 대학 신입생 시절 등록금 동결을 요구하는 집회에 동원되어 어색하게 입을 벙긋거렸던 기억이 전부이다. 머리띠를 매고 팔뚝질을 하거나,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곽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곽은 민원 앞에서 ‘맞서다’라는 단어를 떠올린 자신에게 놀라고, “그 낯설고 활기찬 감정에 반항심이라는 이름을 붙여”(199쪽) 보기도 한다. 기실 386의 전유물이자 청춘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투쟁과 반항의 이미지들은 한 번도 대사회적으로 분출된 적 없던 곽의 열정과 ‘진정성’을 가시화할 유력한 기제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민원에 맞서기로 결심한 곽은 순식간에 투사적 열정에 사로잡힌다. 교육자의 불가침한 권리를 파괴하려는 시도이자 학생의 지적 호기심을 파괴하고 ‘사상의 자유’를 위협하는 민원이라고 생각하며 한껏 ‘반항심’을 불태우는 것이다. 이 새삼스러운 투사적 열정은 표면적으로는 교사로서의 소명이라는 외장을 쓰고 있지만 명백히 386 운동권의 잊힌 테제를 재소환한 것이다. “삶에서 한번은 맞닥뜨릴 거라 예감한, 파괴될지언정 패배해서는 안 되는 시험이 먼 길을 돌아 눈앞에 나타난 듯”(200쪽) 느끼는 곽의 비장함은 그러나 학부모의 기회주의적이고 경박한 태도 앞에서 우스꽝스럽게 좌초된다.

   민원은 수업시간에 『자본론』을 읽힌 것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였고,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 맑스의 책을 소장하고만 있어도 문제가 되던 시기를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학부모는 “저 때 생각만 하다가 지레 걱정을”(204쪽) 했다며 곽에게 사과하기까지 한다. 이제는 맑스를 읽는다고 이념성을 의심받는 시기가 아니며, 오히려 맑스는 대입 생기부에 효과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아이템이라는 사실이 확인되는 대목에서 곽이 민원 대응을 위해 『자본론』 수업을 톺아보며 고심했던 맑스의 현재적 의의와 가치는 한층 더 양가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잠시나마 곽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했던 반가운 반항심 역시 그 가치를 잃은 시대착오임이 재확인된다.

   민원을 제기한 학부모의 자녀인 은재가 생기부 일반전형으로 서울대에 합격하면서, 비자발적으로 이념의 투사가 될 뻔했던 곽은 변화한 대입 흐름을 미리 읽어내고 대비한 유능한 교사로 부상한다. 곽 자신도 교사로서 수업에 최선을 다하고 은재를 위해 최고의 생기부를 작성한 것에 대한 보람을 느낀다. 심지어 은재는 “선생님 좀 진심이신 것 같았거든요”(202쪽)라며 곽의 수업의 진정성을 알아준 유일한 학생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은재의 완벽했던 기말과제에는 ‘컨설턴트 선생님’의 손길이 뻗쳐져 있었고, 은재 아버지의 사과 역시 ‘컨설턴트 선생님’이 맑스 읽기를 허락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밝혀지며 곽의 ‘진심’은 다시 한 번 우롱 당한다. 긴 시간을 건너 2020년대에 도달한 맑스가 전혀 다른 시대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는 사실만큼이나, ‘민주화운동 세대’에나 통용되었을 진심과 반항심, 부끄러움을 지닌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시대착오적인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잠시나마 투사로서의 자기 정체화를 통해 살아 있음을 느꼈던 곽의 패배는 자기 세대의 언어와 주장과 목소리를 갖지 못한, ‘동시대’라는 단어에 어떤 소유권도 갖지 못한 세대의 비참이기도 하다. ‘보편’이라고 여겼던 동시대성의 환상은 처절하게 깨져버린다. 머그컵에 새겨진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는 『노인과 바다』의 한 문장을 보며 “자신은 패배는커녕 파괴되지도 않았다는 걸”(191쪽) 곱씹던 곽은, 낡아버린 혁명의 지도 위에서 완전히 패배했음을 깨닫는다. 심지어 그것은 달콤한 패배이다. 대입에 성공한 은재가 감사 선물로 건넨 고급 파티세리 디저트의 맛처럼 “사람을 전혀 파괴하지 않고도 패배시킬 수 있는 달콤함”(209쪽).

   그제야 자신의 패착을 검토하기 시작한 곽은 그러나 결코 사태의 본질에 도달할 수 없다. 중단된 혁명 이후를 살아가는 곽은 본래부터 ‘교양(bildung)’이 불가능한 시대의 인물이며, 그가 ‘진심’이라고 믿으며 학생들에게 가르쳤던 ‘교양(culture)’은 결국 편의적인 자기기만에 불과하다는 것이 오히려 사태의 본질일지 모른다. ‘보편’과 ‘교양’의 불가능을 깨닫는 순간 곽은 비로소 자신의 비어 있음과 대면하게 된다. 성장할 수 없었기 때문에 늙어버릴 기회조차 갖지 못한 곽의 가능성은 어쩌면 이러한 ‘무의미’에서 모색될 수도 있다.

   인터넷 서점 장바구니에 이런저런 책들을 잔뜩 넣어 두고 만족하는 뷔페식 속류 인문학을 좇았다는 혐의, 모든 총서와 전집을 알맞게 배치한 것 같지만 전체적으로 조화롭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어렴풋한 불만족을 해석할 언어가 부재하다는 사실은 곽이 애써 외면했던 그 자신의 정체이기도 하다. 전(前) 세대가 이상적인 것으로 구축해놓은 이념을 편집적으로 좇거나 동시대성의 얄팍한 가상에 빚지지 않고 그 자신에 대한 탐문을 시작할 수도 있는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다시 시작”(209쪽)할 수 있는 가능성의 순간에 아이러니하게도 곽은 다시 모든 판단과 언어화를 유보한다. 『자본론』의 서문으로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며, 교실에 앉아 새로 나온 개역판 세트를 검색해서 주문하는 소비적 태도로 갱신된 교양을 만족적으로 구매하는 결론에 다다르는 것이다. 이러한 곽의 환원적 태도는 소설의 저간에 수놓아졌던 곽의 실체와 익숙한 속물성에 다시금 합치된다. 결국 곽은 어떤 이념을 지닌 투사로서의 형상–경험하지 못한 전 세대의 이미지를 유령처럼 소비했다는 것, 전교조처럼 수세에 몰린 과거의 시대정신은 애당초 공유하지도 않았으며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고 규정한 적도 없다는 것, 도리어 수업을 위해 맑스를 급속으로 발췌해 읽었으며 『자본론』에 대한 특별한 애정도 없었다는 실체적 진실들이 상기되는 것이다.

   애초부터 곽은 패배할 의향도 용기도 없는 평범한 직장인이었으며, 그가 물려받은 것은 운동권 세대의 거룩한 이념이 아니라 삿된 타협과 속물성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곽에 한정된 특수성만은 아니라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그를 내적 갈등에 처하게 하는 기제는 오히려 실체 없이 옅게 드리워진 전 세대의 그림자, 한 번도 주도권을 지니지 못한 채 ‘늙음’을 맞이하게 된 세대적 곤경이기 때문이다.

   ‘포스트’라는 접두사가 붙은 새로운 시대성과 인간형에 대한 명명이 난무하는 와중에도 현재-미래의 전망은 여전히 어떤 과거와의 연속성 속에서 포착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응시해야 하는 것은 연속성 내부의 결절들, 그리고 왜인지 짙게 칠해져 있거나 비어 있는 지점들에 대한 질문들이다. 너무나 거룩한 민주화가 소비되고 조롱되는 방식, 여전히 혁명의 시차가 발생하고 있는 지점과 시간의 균열들을 우리는 그간 자신의 목소리를 갖지 못했던 세대의 관점으로 재구조화할 필요가 있다. 기본적 가치들이 파괴되고 매우 심각한 윤리적 방향 상실이 일어난, 마치 이 세계가 우리가 전에 갖고 있던 그 어떤 세계상에도 포함되지 않은 것처럼 감각되는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12) 「필경사 바틀비」처럼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지도 못하고, 때문에 완전히 파괴될 수조차 없었던 곽의 세대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거렸던 희망이 옛 세대의 꿈들이었다는 점은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이 아이러니한 혁명의 시차는 파괴되지도 않은 채 ‘패배’를 예감했던 ‘늙은 청년’들과 ‘중단된 혁명’ 이후를 살아가는 386세대에게 더 완전한 파괴, 완벽한 패배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하나의 단서가 된다. ‘완전히 패배’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 자신의 시신을 볼 수 없었다.


1) 김홍중,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2) 우석훈·박권일, 『88만원 세대』, 레디앙, 2007.

3) 밤섬해적단, 〈나는 씨발 존나 젊다〉, 《서울불바다》, 2010.

4) 「한동훈 “지역구·비례 출마 않겠다··· 운동권 특권 정치 청산해야」, 《조선일보》, 2023.12.26.

5) 「임종석 “군사정권 저항했던 삶··· 함부로 대하지 말라”」, 《경기신문》, 2023.12.27.; 「민형배 “한동훈, 사회운동 경험 1도 없으면서 운동권 청산?」, 《한국경제》, 2023.12.27.

6) 장-뤽 낭시, 「유한하고 무한한 민주주의」, 조르조 아감벤 외, 김상운 외 옮김, 『민주주의는 죽었는가?―새로운 논쟁을 위하여』, 도서출판 난장, 2010, 107∼114쪽.

7) 1981년 졸업정원제의 시행으로 1975년 기준 7.7%였던 대학진학률이 1985년 기준 33%로 크게 늘어나면서 386세대의 규모는 크게 팽창되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전체 인구 중 30%대에 불과한 대학 진학자가 한 세대의 대표적인 이름을 점유하고 역사적 정체성을 표상한다는 것은 미심쩍은 일이다. 조사 결과 및 평가는 조대엽, 「한국의 사회운동세대, 386」, 『사상』 54, 사회과학원, 2002, 133쪽.

8) 홍덕률, 「한국사회의 세대 연구」, 『역사비평』 64, 역사비평사, 2003, 171∼174쪽.; 최샛별, 『한국의 세대 연대기―세대 간 문화 경험과 문화 갈등의 자화상』,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2018, 171∼173쪽.

9) 이미상, 「하긴」, 『이중 작가 초롱』, 문학동네, 2022. 이하 이 장에서 소설을 인용할 시 본문의 괄호 안에 쪽수를 병기함.

10) 카를 만하임, 이남석 옮김, 『세대 문제』, 책세상, 2013, 29쪽.

11) 김기태, 「보편 교양」, 『창작과비평』 201, 2023. 이하 이 장에서 소설을 인용할 시 본문의 괄호 안에 쪽수를 병기함.

12) 주디스 버틀러, 김응산 옮김,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 창비, 2023, 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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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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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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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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