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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문학의 장소성 – 출신지와 지역소멸에 관한 문제

  • 작성일 2018-12-01
  • 조회수 1,850

[젊은 비평가 특집]



최근 몇 년 간 한국문학의 흐름은 그야말로 숨이 가쁠 정도였다. 얼마나 많은 사건과 변화가 있었는지 머릿속에서 떠올리기조차 쉽지 않다. 한국문학은 달라져야 했고, 달라지고 있으며, 또 계속해서 달라져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해도 더 많은 것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고, 수많은 변화의 외침은 지금도 사방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이제 막 자리매김한 '젊은' 비평가들에게 한국문학에 관한 자유로운 글을 부탁했다. 이들의 글 속에서 꿈틀대는 변화에 대한 열망과 관습을 비트는 다른 시선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목소리들이 모여 새롭게 만들어갈 한국문학의 풍경을 기대하며 '기획'의 지면을 연다.






지역문학의 장소성 – 출신지와 지역소멸에 관한 문제'




신민희





1. 지역문학의 장소로서의 출신지라는 문제의식


'한국 문학'이라는 지면 위에 서 있다. 그리고 그 위에 서서 좌표를 들여다본다.
"안면도 출생, 부산 거주, 경성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광남일보 신춘문예 당선" 이러한 이력은 나의 좌표인가. 이 이력들 사이, 혹은 이 사이를 엇나가는 지점들은 가시화되지 않는다. 이 좌표를 통해서는 왜 가나마나한 대학에서 하나마나한 공부를 하냐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으며, 한국 문학의 위기 앞에서 지역문학의 소멸을 말하는 것이 왜 필요한지 설명할 수도 없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지역의 여성비평가로 살아가는 일까지로는 나아갈 수도 없다. 그래서 이 '한국 문학'이라는 지면 위에서 다시금 좌표를 들여다보는 일을 시작하고자 한다.
지금 오사카에서 한 달째 살고 있다. 이곳에서 나는 머무는 사람이거나 떠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요구받고 있다. 왜냐하면 장소와 정체성을 붙박아 두는 한에서, 나의 정체성은 한국과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전통음식, 한국의 유명한 장소, 한국의 유명한 사람 등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 그럴 때 어떤 방식으로 응답해야 하는 것인지 난처해질 때가 많다. 일반적인 것, 기원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면서 나는 부산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금의 발화는 한국을 대표하는 것도, 부산을 대표하는 것도 아니며, 나의 경험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부산에 살고 있다는 것의 의미가 한국의 하위범주로만 인식되는 한에서, 부산에서 살고 있다는 말은 사어가 되어버리고 만다. 한국도 모르는 사람에게 부산을 말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인 것인가. 그럴 때 오히려 일본어 속에 섞인 사투리의 억양만이 나를 한국(서울) 사람이 아님을 설명하는 마이너스 표지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출신지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출신지는 '머문다/떠난다'라는 짝패로 설명된다. 원래 살던 곳에서 벗어나 지금은 나는 거기에 없다라는 의미이거나, 어찌하지 못해 이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이후의 삶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후의 삶은 늘 이 출신지에 따라 해석되어, 시간의 선후에 따라 발전되고 향상되어 온 곳의 의미를 말하는 한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방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집안의 출신임에도 불구하고와 같은 역경을 이겨낸 서사들이다. 그렇기에 이곳에 살고 있다라는 의미는, 이 출신지라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영역들로, 선후의 시간에 있는 장소가 아닌, 자신의 삶을 기술할 수 있는 영역인 것이다.
낯선 공간에서, 자신이 지금까지 맺어 왔던 관계가 불가능해질 때, 이 출신지의 영역은 타인과 관계를 맺기 위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장소가 달라진다 해도 자신이 맺어 왔던 익숙한 관계를 반복하기 위해서는 출신지라는 장소가 가장 손쉽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서 익숙한 방식으로 세계를 다시 조망할 수 있는 위치를 획득할 수 있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 이 출신지의 문제는 다양한 역사적 맥락을 갖고 있다. 그것은 식민지 조선의 출신을 의미하기도 했으며, 산업화 시대에는 상경의 의미를 가지기도 했다. 현재 지잡대 출신, 경상도에 대한 이미지에 이르기까지 반복과 차이를 보여 왔다. 한국 문학의 자장 내에서도 이 출신지의 문제는 중요한 문제의식이었다. 그것은 '한국적인 것'을 찾아내는 작업이기도 했으며, 이에 대한 반동의 힘으로 '지역적인 것'을 찾아내는 작업이기도 했다. 이는 중심/주변의 위상학에 관련된 질문이었고, 주변부의 위상을 재배치하고자 하는 의도였다.1)
하지만 여전히 이 지정학을 출신지의 작가와 작품을 발굴하는 차원의 방식으로 논의를 진행하면서,2) 지역 작가를 '특집호'의 방식으로 배치하고 있다. 그것이 함의하는 바는 지역 작가의 발굴(발견)이 중앙으로부터 할당된 자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문제는 지역문학이라는 하위분류가 생산되는 구조에 있다. 지역에서는 지역 문학을 생산할 수 있는 시스템 자체가 부족한 실정이다. 지역의 출판사가 자생적인 구조를 갖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여전히 작가의 지위가 등단의 구조 안에서 가능하고, 지역의 작가가 중앙지의 등단을 통해 출신지를 교체해야 하는 순환의 고리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지역에서 지역의 문학을 생산할 수 있는 시스템의 부족이 물리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지역의 발화가 담론적으로 개입할 여지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1) 문재원, 「한국문학연구에서 로컬리티 연구 성과와 과제」, 『우리말글』, 2018.
2) 최병우, 「현대소설과 로컬리즘」, 『현대소설연구』, 2015.



2. 지역소멸에 관한 담론의 방향


최근 지역문학의 장소를 들여다볼 때, 드러나는 것은 한국 문학의 위기로 인한 고통분담에 대한 인식이다. 한국 문학의 위기에 대한 담론은 2000년대 이후 제기되어 왔다. 그것은 과거 문학이 점했던 위상을 되찾으려는 힘의 방향이었다. 하지만 문학의 위기에 대한 담론이 심화되어 갈수록 지역의 문학이 담론적으로 개입할 여지는 줄어들고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 이후 계급, 인종, 젠더에 관계없이 모두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인식은 지역의 문제 또한 모두의 고통으로 생산해 내고 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시점에서 노예화, 식민화를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전근대적이며, 과도하며,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이들이 만들어낸 언어라고 생각된다. 지역의 식민화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때에도 역시 이러한 대답이 돌아온다. 제도적으로 지방자치제가 시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지역의 식민화는 현실의 문제가 아니라 과도한 수사일 뿐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접근법이 수사적이다. 예전보다는 살기 좋아졌다라는 비교급의 수사이며, 일부분을 전체로 보는 수사법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들면서, 경쟁구도가 심화되고 전체의 삶의 질이 악화되면서 우리 모두 '약자'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예전에 소수에게만 행해졌던 일들이 확산되고, 악화되었다는 사실이 모두의 위치를 동일한 것으로 사유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담론 안에서 지역소멸이라는 문제의식은 일반적인 고통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되고, 지역의 소수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지나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지역소멸에 대한 담론이 지역의 소수성, 식민성을 오히려 과도한 수사로 만드는 과정에서 지역의 문학은 지역의 장소성을 문제 삼는 것에 대해 방어적 자세를 취하게 만든다. 지역의 장소에 대해 말하는 것은 미시적이며, 지역에 국한되는 협소한 이야기라는 자기 부정의 서사를 갖는 것이다. 지역의 문학에서 지역이 사라지고 있다는 비판은 이런 자기 부정의 서사에 대한 비판과도 관련된다. 지역을 말하는 것이 도태되는 경험일지 모른다는 우려를 비판하면서, 오히려 지역에 대한 세부적 묘사가 구체적인 인간의 보편성을 정밀하게 드러내는 토대임을 역설한다.3)
하지만 여기서 눈여겨볼 수 있는 지점은 지역의 소멸을 자기 부정의 서사로 이어지는 방식에 대한 비판이, '구체성-보편성', '리얼리티-판타지'의 구조 안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곧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적 태도를 견지하면서 지역문학을 정치적 거점으로 삼고 그것을 일종의 사회적 책무로 인식했던 시도에서 비롯된다. 특히 현재 지역문학에서 지역의 사라짐을 "인물이 처한 일상의 세계가 보여주는 세속성과 비루함이 빚어내는 왜소한 세계에 머물러 있음"4)을 통해 읽어내고 있는 지점은, 바로 지역을 중심의 대안으로 상상하고자 했던 정치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정치성에 대한 의미를 '세속성', '통속성', '내면', '판타지'의 반대편에 두고서 지역소설의 장소를 논의하는 것은 또 다른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지역소설에서 지역의 장소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의미는 정치적이냐, 세속적이냐라는 문제로는 담기지 않는다. 지역의 소설을 장소적인 것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보편적 구조로 설명되지 않는 다층적 장소를 다루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역의 차별적 구조를 말하는 것을 지역만의, 혹은 지역뿐만 아니라 모두가 처한 위기인식이라는 프레임을 벗어날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문학적 지역성을 판단함에 있어서도 사라진 장소성이 통속성을 버려야만 획득되는 것으로 이야기될 수도 없다. 지역의 장소란 출신지로 설명되지 않는 지역의 장소이며, 살아가는 이들의 관점에서 발화되고 병렬될 수 있는 이야기들의 구조인 것이다.

3) 하상일, 「부산지역 소설의 현재와 미래」, 『작가와 사회』, 2018.
4) 위의 논문.



3. 소수자의 좌표를 위한 장소성


지역문학의 장소가 출신지의 문제와 지역소멸이라는 문제로 환원되지 않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자기 서사들이 발명되고, 발화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제주도를 둘러싼 담론의 층위들을 통해서 지역의 장소, 지역문학의 장소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 보고자 한다.
제주도의 난민을 둘러싸고 갈등의 구조가 증폭되고 있다. 그것은 제주도가 갖고 있는 역사적 지층들을 통해서 설명 가능하다. 한국의 난민 문제가 왜 제주도에서 불거지게 되었는가.
난민 문제가 세계적인 문제로 떠오르고 있을 때, 한국은 난민 문제와 무관한 것으로 생각되어 왔지만, 제주도에 예멘 난민 신청자가 급증하면서 담론화 되기 시작했다. 이 문제는 난민을 생산해 내고 있는 세계적 구조와 관련되지만, 이 문제를 한국과 세계라는 대립적 항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난민으로부터 한국을 지켜야 한다는 논리를 통해 지역을 마지노선으로 삼는 것은 지역이 갖고 있는 복잡한 담론적 지형에 있기 때문이다. 한국을 지키기 위해 제주도를 마지노선으로 삼고 이 이상은 넘을 수 없다는 의미는, 대치의 상황에서 '지역'이 희생되어야 한다는 논리의 오래된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것은 한국 내에서의 지역의 식민화 문제와도 깊은 관련을 맺는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계발기에 제주도 전체가 관광산업으로 뒤바뀌게 된다. 이 과정은 이전에 제주도에 가해졌던 4・3을 비롯한 국가적 폭력의 자리를 자본화하고 경관의 시선 속에서 폭력의 장소들을 관광자원화 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폭력의 장소들이 자연화 되면서, 제주도가 갖고 있던 복잡한 지형의 문제는 단순화된 것이다.
제주도 출신이라는 사실이 폭력을 당해도 되는 것처럼 여겨졌던 인식 속에서 많은 이들이 제주도를 떠났다. 그리고 이 지형도 속에서 교토의 히가시구조의 '마당'에 다녀왔다. 그곳은 교토의 히가시구조라는 장소와 마당이라는 이름이 나란히 있는 곳이다. 이 행사에서 사람들은 사물놀이를 하고, 씨름을 하고, 노래자랑을 한다. 이들은 이것을 통해 한국에서 사라진 전통을 지속적으로 행하면서 정체성을 지키고 있는 것인가? 이들은 이미 낡아버린 것으로 치부되어 버린 민족적인 것을 지역적인 것으로 오인하면서 전근대적인 방식으로 지키고 있는 것인가?
그곳에는 다른 장소성들이 발화되고 있었다. 그것은 이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같은 시간, 정해진 장소에 모여 연습하며 보낸, 다른 세대에게 악기 연주 방법을 가르치며 함께 지낸 시간들의 장소성이다. 이는 전통을 고수하기 위한 일로도, 지역의 가능성 혹은 대안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한 달째 일본에서 살고 있는 나의 몸이 개입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지형도이기도 하다.












작가소개 / 신민희

경성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 과정 수료. 2017 《광남일보》 평론 등단.


《문장웹진 2018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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