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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모나 네모로 얼룩을 번역하시오

  • 작성일 2019-03-01
  • 조회수 3,978

[문학 리뷰(시)]




세모나 네모로 얼룩을 번역하시오




민경환





1. 액자를 믿지 않기로 하자


나는 유닛과 유닛의 세계에 결코 몰입하지 않는다
- 권시우, 「유닛으로 질주하기」


지금 제도에 기생하며 무언가를 쓰거나 이렇게 한가로울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거짓말이다. 다시, 거짓말이다. 이미 옛날에 다 끝났는데 여전히 '미래'가 가능하다고 말하며 줄글을 적어내리고 있다면. 현실의 편을 들면 문학은 거짓말이고, 현실을 외면해도 문학은 처음부터 끝나 있었다.
그러므로 근대의 잔여물로 여전히 대물림되는 '자율성'의 개념을 의문에 부치며 삶과 문학 사이의 거리를 다시 설정하는 순간들은 최근 한국 문학 비평이 거둔 가장 인상적인 승리의 장면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1) 박상수가 00년대를 '윤리적 모험'의 시대로, 10년대를 '일상 재건'의 '윤리적 책임감'의 시대로 규정함으로써 '윤리'의 준별을 시도할 때에도2) 10년대에 삶이나 현실이 압도적인 크기로 문학에 당도했음을 큰 전제로 삼고 있다. 10년대의 '윤리'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입장마저도 '현실'을 철회할 수 없는 하나의 사실로서 인정하는 태도를 보인다면, '문학'을 초과하거나 간섭할 마땅한 권리를 쥔 '현실'은 부정할 수 없는 견고한 사실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최근의 몇몇 작품의 틈으로 비치는, 매일처럼 구축되고 무너지는 풍경들을 단지 세계의 압도적 크기에 의한 결과물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재현'할 수 없는, '상징계' 바깥의 허상들에 대한 충실성과 윤리로 비롯된 성스러운 실패라는 비평은 물론 어디에나 어울린다. '보이지 않는 것'의 일방성을 승인하는 길은 언제나 옳다. 하지만 이번엔 대신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믿되, 쓸 수 있는 것 이상을 써서는 안 된다는 '이중의 구속'이 시인의 왼손을 방해하고 있다고 하자.
만약 문법을 믿을 수 있다면 세계의 비참을 쓰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액자 안에 그려 넣는 것이 또 다른 현실이라고 '칠' 수 있다면 액자 안에 그 비참을 채우면 될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불가피한 공회전을 허락하는 문장들이 내용을 대신한다. 이로써 돌출하게 되는 것은 형식의 거짓됨이다. 형식이 '재현 가능성'을 갖지 못하고 있음에 대한 허술한 인정이다. 주어진 평면이 거짓임을 이미 알기 때문에 평면에 몰입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로부터 우리는 '상징계'의 거짓됨을 곧바로 도출하고 '실재계'를 향한 윤리로 돌아서선 안 된다. 단순한 인과론. 즉 우리가 외면해온 '실재계'에 의해 '상징계'가 필연적 파국을 맞았다는 결론을 경계해야 한다. 글쓰기가 강물을 건넌다면 그 장면은 언제나 '상징적'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때문에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선 '상징계'에 더 머물러야 한다. 처음부터 '상징계'가 거짓이었던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무효화되는 것은 '상징계' 그 자체가 아니라, 문자와 세계 사이의 등가성을 보장하던 상상적/상징적 동일시의 '기제'들이다. 따라서 지금의 상황은 어떤 '안정점'이, 세계와 말이 하나였던 통일감이, 또는 어떤 리얼리티 장치가 고장 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종종 이론은 그 '현실감'이 중단되는 순간들, 특히 '낯설게' 되는 효과를 편애해왔다. 그 '현실감'이라는 것은 한편으로는 우리를 기만하는 문화적 '관습'이거나, 이데올로기의 누적물로 형성된 '환상'이기 때문에 그 차폐막을 관통하는 순간을, 그리고 그렇게 소외된 진리를 독자의 눈앞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작가가 감당할 수 있다고 믿어 왔다. 그러나 그 '몰입'과 몰입의 '중단'에 관한 문제는 문학-생산자의 차원에서 논의되기보다는 문학-수용자의 차원에서, 또 그 효과의 층위에서 논의되어 왔다. 물론 신비평이 그어 놓은 금지선은 합당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하나의 서투른 실수를 반복해야 한다. 단,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작가의 '의도'를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그가 '몰입'에의 장애를 겪고 있다고 할 때, 약간의 의미를 구하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이 '말'을 압도하는 상황 그 자체를 지켜본 것이 아니라, '형식'에 대한 과소몰입을 하나의 증상으로 마주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이들은 형식에 대한 지독한 불신을 말하면서도 여전히 형식 속에서 거주하고 있다. 이것이 윤리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우리는 이 수사학적 질문을 차라리 문자적인 의미로 받아들이길 원한다. 이것은 '윤리'가 아닌 무엇이다.

1) 백지은, 「텍스트를 읽는 것과 삶을 읽는 것은 다르지 않다」, 『문학과사회 하이픈』, 2018년 여름호.
2) 박상수, 「발칙한 아이들의 모험에서 일상 재건의 윤리적 책임감으로」, 『너의 수만 가지 아름다운 이름을 불러줄게』, 문학동네, 2018.



1. 표정을 바꾸기 위한 거짓말이 없다면


요즘이라면 "기대감소 시대"와 같은 사회학적 전제를 통해 작품의 의미를 도출하는 것도 크게 이상하지 않다. 미용실에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떴을 때 달라진 자신"을 상상하거나(이현승, 「경험주의자와 함께」) "기대가 좋아서 릴케가 좋"다며(김승일, 「에듀케이션」) 최대치의 변화를 자신의 취향이자 논리로 삼던 시절. 그런 시절로부터 "나는 늘 기대가 싫었어요"라고 시를 맺는 감각 사이의 낙차는 사회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묻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좋아하는 걸 모두 적어 보세요, 이런 문제는 조금 잔인하잖아요 선생님 더는 비참해지고 싶지 않은데 나는 꽃말에 지나친 의미를 두는 게 싫어요 일부러 소중한 것을 만들고 싶지 않아요 공포영화를 좋아하는 친구는 그런 게 싫대요, 없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 자리에 있었다, 이런 거요 스탠드를 끌 수 없는 밤이 누구에게나 찾아오듯 나는 습관처럼 매일 같은 립스틱을 골라요 고르지 않고 그냥 집어요 별것도 아닌데 바닥에 떨어진 이름들을 보면 살짝 심란해지고 눈을 감으면 눈동자가 어느 곳을 향하게 될지 실은 조금 궁금하기도 해요 이런 입술은 내게 어울리지 않나요? 내일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거라고 믿던 날들도 있었지만 그런 것에 마음을 베팅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야 좋아하는 것을 몇 개나 적을 수 있나요, 그런 걸 물어보면 내가 초라해지잖아요 나는 한없이 찻잔 속으로 미끄러지다가 오늘 태어날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요 그 사람들은 선생님의 물음에 오늘을 적게 될까 탄생화를 궁금해 할까 편지는 꼭 집에 가서 열어 봐, 공포영화를 좋아하는 그 친구가 말했지만 나는 늘 기대가 싫었어요

- 조윤진, 「낙엽송」 전문(『시로 여는 세상』 2018 12월호)


자신의 문화적 기호를 전리품처럼 늘어놓으며 변신의 재료로 삼던 앞선 10년의 화자들과 달리, 이 화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조차 분명하게 발음하기도 힘겹다. 거울 앞에서 매번 같은 립스틱을 집어 드는 선택의 보수성은 "내일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거"라는 기대가 헛되다는 결론을 예비한다. 그러나 행위의 반복과 지당한 결론 사이에서도 의구심은 집요하게 살아남는다. 화자는 사실 "눈을 감으면 눈동자가 어느 곳을 향하게 될지" 모르고 싶기도 하다. 이 의문은 보수적인 입술의 반복과 소극적인 반문의 입술 사이에 배치됨으로써 느린 관능을 생산한다. 반복의 틈으로 생산된 이 관능성은 제도의 바깥에서 '진리'와 '주체'를 생산하는 하나의 절차로서의 '사랑'이라는 비평적 상투형3)을 작동시킨다. 그러나 "이런 입술은 내게 어울리지 않나요?"라는 방어적인 의문문은 짧은 변신을 번복하도록 시를 이끈다. 화자는 어쩌면 잠재적 연인일 수 있을 상대방의 얼굴을 앞에 두고서 "한없이 찻잔 속으로 미끄러지다가" 돌연 "오늘 태어날 사람들"로 비약하는 지점은 '가능성'이라는 긴장의 반복 속으로 다시 시를 밀어 넣는다. 그러나 시는 정념의 비등점을 넘기기 전에 "기대가 싫었어요"라며 다시 뚜껑을 닫는다.
이 화자를 여전히, 또 온전히 '나'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문자적인 의미에서 '텅 빈 소실점'으로서의 자아인 한에서 그렇다. 화자는 분명하게도 우리가 기대하던 '책임감'의 주체가 아니다. 그는 '타자'의 단순한 영사막이 되거나, 펜-인간이 되어 의미의 일시적 계류지로 기능하고자 하는 '비반성적 주체'가 아니다. 하지만 이 '나'는 화자와 상대방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화자 스스로에 대한 거리를 통해 성립된 위치임은 분명하다. 시의 화자는 정념에 스스로를 팔아넘기지 않는다. 대신 연애의 장면으로부터 자신을 철회하고, 그로부터 증류된 자아를 얻고, 비로소 왜소해진다. 지난 00년대는 불가능을 벗어나기 위해, 환상을 전개하기 위해 자신 주변의 문화적 생산물에 기생하며 난삽하게 망루를 쌓아올렸다. 주변을 조망할 수 있는 약간의 높이 속에서 00년대는 구멍 뚫린 자아의 대응물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수비적 행위가 액자의 내부로 진입하는 발판의 노릇을 하던 00년대와는 달리, 우리가 마주한 화자는 자신을 변신시켜 줄 거짓말을 갖고 있지 못하다. 이제 "나름의 자기표현 방법을 체득"4)하고 있던 '왜소한 주체'도 불가능하다. 화자는 '상징계'의 가소성을 믿어 보거나, '문자'를 하나의 물질로 취급함으로써 달성되는 '상상계적' 축성을 통해서는 표정을 바꿀 수 없다.
하지만 장면으로부터 끊임없이 물러나는 이 화자의 경우, 기대가 축소된 세계에서 적극적 비행위를 통해 실패하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고, 이로써 일종의 '전능감'을 향유5)하는 것은 아니다. 비행위를 통해 '전능감'을 누리기 위해서는 행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객관적 '기대'가 낮아져야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세계에 거는 주관적 기대까지 사라져야 한다. 그렇지만 "기대가 싫었어요"라고 말하기 위해 도열한 긴 문장들은 도리어 그에게 주관적 기대가 사라지지 못했다는 증거물에 가깝다. 여전히 어떤 '왜소한' 주체는 주관적 기대를 비움으로써 작동하는 10년대의 생존전략을 자신의 것으로 취득하지 못했다. '끝나지 않는 일상'은 충분히 기쁘지 못하다.

3) 알랭 바디우, 『사랑 예찬』, 길, 2010.
4) 김영찬, 「2000년대, 한국문학을 위한 비판적 단상」, 『비평극장의 유령들』, 창비, 2006, 73쪽.
5) 박상수, 「기대가 사라져버린 시대의 무기력과 희미한 전능감에 관하여」, 『너의 수만 가지 아름다운 이름을 불러줄게』, 문학동네, 2018.



3. 여덟 번의 화자


지구가 조금 부서졌다. 지구는 아프지 않았다. 바다가 차오른다.
그는 열탕에 팔 하나를 넣어 본다. 열탕이 끓는 소리를 낸다. 그는 그것을 단숨에 들이킨다. 환생을 믿지 않는다.
고생대는 산소가 풍부해 모든 생물이 거대하였습니다. 그는 하루 종일 숨 쉬는 상상을 한다. 몸이 터질 때까지 숨 내쉬지 않을 거야.
그러나 모락모락 김이 솟는 팔을 보며 그는 식욕을 느낀다. 모든 것이 울창하고
조금 부서진다.


센세, 나는 그런 말을 들었어요. 센세가 죽어 가고 있을 때 무얼 하고 있었냐고. 센세가 한 잔 더 하랄 때도 그냥 듣고만 있었어요. 내가 다 알아서 하겠다고, 이런 세상 같은 건 몰라도 괜찮다고··· 그 말을 듣고 놓았어요. 내가요. 센세, 센세가 버스 뒷좌석에서 다 사라져 없어져야 한다고, 팔을 가슴께까지 휘두르면서 닿았나 확인하지 않는 순간에도, 버스가 산울림 언덕을 지나 홍대 쪽으로 겨우 흘러내리고 있을 때에도··· 센세라 불러 주면 뭐든 다 한다고 했죠. 그러니까 당장 튀어나와 이 좆새끼야. 너는 죽어 가면서도 조금 더 죽어 본다, 하고 말했지. 나한테 들릴까 봐 정말로 죽어 가는 목소리로, 하지만 열락에 겨운 센치하고 역겨운 목소리로···


겨울 비닐봉지가 무리 지어 날아가고
존 코너가 그것을 뒤쫓고 있다.


비닐은 중첩되지 않아.
비닐은 감쌀 뿐
비닐은 늘어져도 좋다.


존 코너의 머릿가죽이 뒤죽박죽이고 있다.


(중략)


*


그저 아무렇게나 움직이고 있었는데 궤도에 진입했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진심으로 축하해. 네가 그럴 줄 알았어. 나는 막 살겠다는 결심의 끝이 이런 것이었는지 의아했다. 나는 막 살겠다는 결심을 막 끝낸 차였다. 정말 축하해. 결국 해낼 줄 알았어. 나는 돌고 있었다. 아니, 대답하지 마.


나의 고향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 고향은 조금 부서졌고, 인정 넘치는 동네였다.


- 서호준, 「혼돈, 파괴, 망가」 부분(『그라네이드』, 창간호)


당신은 이입을 하고 싶겠지만 그럴 수 없다. "지구가 조금 부서졌다"고 한다면 당신은 마땅히 슬프겠지만 "지구는 아프지 않았다". 따라서 이입은 차단된다. 당신은 산소가 희박한 시대의 유일한 생존법이란 결국 부정을 통해 의미를 확보하는 오래된 금욕적 사제의 전술이라는 결론과 함께 읽기를 작동시킬 수 있다. "산소가 풍부해 모든 생물이 거대"했던 시절을 아는 당신과 우리로서는 "숨을 내쉬지 않을 거"라는 초점 인물의 진술을 납득할 충분한 근거가 있다.
그러나 자신의 팔을 보며 식욕을 느끼는 나르시시즘적 구도는 이내 무너진다. "센세"를 부르며 시작되는 진술에서 당신은 이때까지의 화자와 동질적인 화자를 가정할 수 없다. 추가로 제공된 정보로 인해 독자로서의 당신은 앞서 제시된 초점 인물이 보여주는 "열락에 겨운 센치"함에 거리를 두지 않을 수 없다. 정해진 수순이다. 당신은 화자의 변덕으로 인해 몰입하지 못한다. 당신은 금욕주의적 기율 위에서 자란 자아도취자를 옹호하거나, 비난하고 싶겠지만 시는 중첩되지 않고 감쌀 뿐인 "겨울 비닐봉지"로 시선을 돌릴 뿐이다.
몇 번의 화자를 거쳐 마무리하게 되는 지점에서 화자는 자신의 고향을 "인정 넘치는 동네"로 표현하는데, 이 장면은 충분히 계산된 아이러니를 산출한다. 그러나 시의 전개는 마지막의 거리감을 효율적으로 생산하는 중간동선 대신에 "나는 망해버릴 것이다 운이 좋아도 나는/ 망해버릴 것"이라며 푸념을 늘어놓는 화자를 대신 배치하는 쪽을 택한다. 이렇게 하나의 결정적 발화점을 확보하지 않고 흩어지는 발화의 조각들을 모아서 '전(前)인칭적 역량'의 증거물로 제출하는 해석이 있을 수 있다. 혹은, 분노 대신에 체념을 택하는 진술을 두고 축적된 실패의 경험에 대응하기 위해 '기대'를 줄여버린 세대론적 현실을 도출하는 독해 역시 세련되었다.
하지만 서호준의 화자가 2000년대의 화법과 같이, 또 어쩌면 언제나와 같이 시에서 복수의 목소리가 운용된다면, 이는 그들을 반복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2000년대의 주자들을 하나의 대전상대로 소환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소환된 악마는 온전히 퇴치되기보다는 악령처럼 배회하고, 그 악령은 비닐보다 나을 것이 없다. 00년대에 이미 완수되지 못할 것이 예견된 "살부(殺父)놀이"(조연호)는 성립조차 되지 않는다. 오래된 화법은 단순한 파괴의 대상으로서 소환되지 않는다. 앞선 주자들은 양가적 감정 속에서 인용되고, 이후 파괴된다. 따라서 화자는 이전 세대에 대한 완전한 '거리두기'와 완전한 '몰입' 둘 모두에 실패하며 시는 파편의 집적으로, 파편의 미로화로 이어진다.
여기서 플레이어가 게임에 몰입할 수 없다면 그것은 그에게 기본적으로 주어진 캐릭터로부터 느끼는 거리감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여전히 그에게 주어진 최초의 화자-피규어를 처음부터 박살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고향으로부터 너무 먼 선택지가 플레이어에게는 가혹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센세'는 편리한 동일시의 대상이 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포기될 수 있는 무엇도 아니다. 정전적(canonical) 영향력을 행사하던 모델들의 지위가 위태로워진 결과로, 화자의 주관적 '기대'는 복수화 되고, 때때로 그 기대들은 서로 모순된다.



4. 신이 바보라면 싸울 필요는 없다


네가 신이라면
첫 페이지에 역사와 종교를
다음 페이지에 철학과 과학을 적고
잠깐 잊었다는 듯 어딘가에 음악과 시도 적겠지
그렇다면 나는 눈을 감고 거꾸로 책장을 넘기겠네


독재자의 동상 앞에서
예술가들을 추방한 철학자들과 춤을 추겠네


네가 신이라면 새들에겐 그림자
인간에겐 견딜 만한 추위와 허기를 주고


그들의 기쁨과 슬픔을 공깃돌처럼 가지고 놀겠지


나는 구멍 난 공깃돌에서 흐르는
작은 슬픔을 엿보네


네가 신이라면
나는 네 두 눈 속에 오래 서 있는 동상
네 다리를 핥는 회갈색 눈의 개


너는 사랑하는 두 사람과 두 사람을 막아서는 나무들
무성한 나무들의 숲과 그 숲에
울려 퍼지는 절규의 화음을 만들지


그것을 사람들은 음악이라 부르네


소년들은 커서 좀도둑이 되고
소녀들은 헐값에 신부가 되고


네가 신이라면 나는
무성한 나무숲을 돌지
포기를 모르는 들개처럼


네가 신이라면
너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는 하나의 귀


나는 밝은 대저택과 침침한 교회 앞에서
하인처럼 조아리는 두 개의 음악


트리에 온통 반짝이는 것은
심장처럼 매달린 전구들


나는 붉게 빛나는 허름한 구두 한 짝
하늘엔 비행기
땅에는 부드러운 털모자를 쓴 인간들


실밥은 터진 호주머니 사이로 흐르고
가난한 연인들은 사랑을 조각보처럼 기워서 입고 다니지


- 주민현, 「네가 신이라면」 전문(『자음과 모음』 2018 겨울호)


부득이하게 중세의 가을에 태어났다면, 와중에 신까지 상상해야 한다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것보다 더 큰 것"(안셀무스)을 그려 보며 나름의 불경과 모순에 봉착하는 일은 피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셰익스피어 이후라면 "귀머거리 천국(deaf heaven)" 정도는 상상하는 편이 옳다. 영국인들이 불경을 범했다면 한국인은 작은 창으로 "빼꼼 얼굴을 내"미는 얄미운 신(진은영, 「然霧 도시」)이나, "삐져나온 오리털"을 뽑는 것과 정확히 같은 무게로 인간의 죽음을 취급하는 신(문보영, 「오리털파카신」) 정도를 귀엽게 상상하곤 하는 편이다.
만약 '신'이라는 표상을 두고, 기존 질서에 대해 개인이 취할 수 있는 잠재적 태도가 등록되는 문서고이자, 질서에 대해 개인이 취해야 할 태도를 형성하는 집합적 무의식의 주형틀6)이라고 하는 일이 아직 어렵지 않다면, 인용된 시에서 드러나는 태도는 다소 문제적이다. 물론 신이 인간들의 "기쁨과 슬픔을 공깃돌처럼 가지고 놀"거나 "사랑하는 두 사람과 두 사람을 막아서는 나무들" 행세를 하는 것은 아무래도 낯설지 않다. 개인의 소망이나 공중의 도덕이 좌절될 때 "네가 신이라면 / 너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는 하나의 귀"라고 비난하는 것은 지극히 흔한 태도다.
하지만 화자는 역사와 종교, 철학과 과학 뒤에 "음악과 시"가 위치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눈을 감고 거꾸로 책장을 넘기"는 방식으로, 단순하고 우아하게 질서를 뒤집는다. 그리고 이 우아한 역전보다 눈에 띄는 것은 "예술가들을 추방한 철학자들과 춤을" 추겠다는 화자의 위치다. 화자 자신이 예술가에 속한다면 이미 추방당했으므로 춤을 출 수 없고, 그러므로 화자는 예술가가 아니다. 그렇다고 화자가 철학자는 더더욱 아니므로 철학자들과의 춤은 어딘가 모양이 이상하다. 책장을 거꾸로 넘기며 우아한 역전을 얻어낸 뒤에도 예술가들은 이미 추방되었고, 어쩌면 화자가 좋아했을 그들을 추방한 철학자와 함께, 보통은 철학자 자신과 화자 모두에게 어울리지 않을 춤을 춘다.
다시금, 신이 "사랑하는 두 사람과 두 사람을 막아서는 나무들"의 모습으로 등장한다면, 화자는 "포기를 모르는 들개처럼" "무성한 나무숲을" 도는 편을 택한다. 이 대목에서 화자는 과연 사랑하는 두 사람에 속하는가? 앞뒤의 진술을 살펴본다면 화자가 "들개처럼" 나무숲을 도는 것은 연인 사이를 가르는 신도, 가로막힌 두 연인도 아닌 제3의 입장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어지는 내용에서 "하인처럼 조아리는 두 개의 음악"이 되기도 하는 화자는 이별을 경험하는 '한' 명의 입장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화자는 자신의 불행을 고백하는 대신, "구멍 난 공깃돌에서 흐르는 / 작은 슬픔을 엿보"는 편이다.
화자가 내적으로 역전시킨 질서는 객관적 현실 수준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화자가 그것을 모를 수는 없다. 화자는 추방된 자들을 다시 데려올 수 없다. 따라서 화자는 역사와 종교보다 가까운 차선책으로서의 철학자들과 춤을 춘다. 나무가 빼곡한 숲에서도 화자는 이 숲에 불을 지르는 대신 차라리 들개처럼 떠돌기를 반복한다. 주민현의 화자에게 질서란, 자신의 힘으로는 되돌릴 수도 없고, 또 불을 질러버릴 수도 없이 이미 벌어지고 있다. 주민현의 화자는 그런 '장면'에 직접 위치하는 대신 제3의 위치를 다시 발명함으로써, 내부의 '당사자'였다면 겪었을 좌절이나 과격함을 피하고 어중간한 거리를 확보한다. 화자는 이렇게 확보된 거리를 근거로 따뜻한 관조를 획득하는 한편, 화자 자신은 기존의 질서가 유발하는 위험한 정념으로부터 안전해지고 있다.

6) "인민의 목소리는 신의 목소리(Vox Populi, Vox Dei)"라는 금언이 내려오던 시절부터 '신'은 때때로 인간의 핑계로 대동되었음을 상기하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5. 그리하여도 알겠다면, 윤리처럼 보이는 것들로


지난날 그의 집 정원은 계절 꽃으로 가득했다. 지금은 꽃이 없는 계절이다. 계절 아닌 계절에 찾아온 누군가에게 그의 정원은 빛 없는 장소이다. 봄의 화사함 혹은 여름의 무성함은 그리하여 누군가에게는 모르는 억양이 된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한 마리의 개. 개는 보이지 않는 정원의 보이지 않는 무성함 속을 뒹굴고 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개의 보이지 않는 눈 속에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본다. 시들어버린 꽃과 떨어져 나부끼는 잎과 꺾이고 부러진 나뭇가지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사람들과 흔적 없이 사라진 어제의 길들······ 끝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고 쓰면서. 마지막 문장은 언제나 맨 처음 쓰인 것이라고 쓰면서. 줄글은 달려 나가는 동시에 달아난다. 그리고 거름 더미 위에 앉아 울고 있는 녹색. 색깔보다는 소리로 불리길 원했으므로. 다시 소리 내어 울고 있는 녹색. 그는 정원의 사잇길을 따라 걷는다. 보이지 않는 개가 그의 뒤를 따라 걷는다. 울고 있는 녹색이 보이지 않는 개의 뒤를 따라 걷는다. 언젠가 아주 어린 날. 학교에 나오지 않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걷고 걸었던 길고 긴 논길. 친구는 몇 날 며칠을 울어 부은 눈으로 그를 마중 나와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학교에 가지 못했다고 했다. 슬픔에 대한 예의를 알지 못했으므로. 조용히 위로하는 법을 알지 못했으므로. 그는 친구보다 더 크게 울고 울었다. 그리고 다시 보이지 않는 개. 그리고 다시 속으로 속으로 울고 있는 녹색. 그는 정원의 사잇길과 사잇길을 천천히 천천히 걷는다. 부은 눈으로 자신을 달래 주던 어린 날의 친구를 두고 두고 생각하면서. 울고 걷고 울고 걷고. 녹색은 색깔보다는 소리로 불리길 원했으므로. 울음은 보이지 않는 마음으로 맴돌고 있어서. 지난날 그의 집 정원은 계절 꽃으로 가득했다. 이제는 꽃도 잎도 없는 계절이어서. 보이지 않는 개와 울고 있는 녹색이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그의 뒤를 따라 걷고 있다.

- 이제니, 「울고 있는 마음」 전문(『시인동네』 2018 12월호)


언젠가 현전했겠으나 지금은 부재하는 어떤 계절의 불가피함을 끈질기게 증언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글쓰기를 윤리라고 하지 않는 것은 어렵다. 비가역적 사태, 또는 돌이킬 수 없는 상실에 대해 항거하거나, 중얼거리거나, 애써 외면하거나, 이상화하거나, 알 수 없는 것으로 남겨 두거나, 상상하거나, 잘못하거나, 잘못하지 않거나, 그만두는 것들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멈추는 법이다. 멈추는 것이 애도라면, 이제니의 화자는 멈추지 않으므로 따라서 더 살 수 없게 만든다. 상실의 상징적/형상적 정지를 거치지 않고 그 자체로 무한한 것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는 전적으로 윤리의 영역에 속한다.
물론 화자의 시도는 좌절될 수밖에 없다. "보이지 않는 개"와 "보이지 않는 정원"과 "보이지 않는 눈"으로 이어지며 반복되는 '보이지 않는 것'들은 모두 시각적 차원을 기각한다. 화자가 시도하던 돌파는 예정된 불가능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지속하려는 과정에서, (불가능을 자아의 소극적 쾌락으로 전환하는) '숭고'를 '연출'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화자가 불가능한 위치에 도달하려는 행위를 통해 숭고와 윤리 사이를 미끄러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색깔보다는 소리로 불리길 원했으므로" 두 번 반복되는 반복의 구조가 반복되는 상황을 통해 화자는 희미한 가능성을 획득한다. 기각된 시각적 차원은 청각적 차원에서 조금의 구제를 얻는다. 하지만 "속으로 속으로" 울며 "사잇길과 사잇길을 천천히 천천히" 반복하는 방법은 결코 '언어 너머'의 '실재'에 도달하겠다는 뜻이 아니며, 오로지 언어를 통해서 그저 언어에 도달하겠다는 불가능한 기획이다.
화자에게 주어진 형식은 하나뿐이다. 만약 화자가 그 형식의 거짓됨을 알면서도 구태여 속기를, 또 믿기를 일부러 택한다면 그것은 분명 어떤 자의식 조작을 통해 달성되는 몰입이다. 따라서 화자는 형식의 거짓됨을 모르지 않았고, 속지 않으면서도 액자의 내부에 잔류하기를 택했다. 이 속에서 화자는 의식의 분열을 겪지 않을 수 없고, 액자로의 몰입 역시 언제나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이제니의 화자에게 '언어'는 그대로 믿을 정도로 투명하지는 않지만, 방법조차 아니라고 말할 정도로 불투명하지는 않은 '반투명'의 물질이다.
그가 겪는 부재는 분명히 현실의 것이되, 그 돌파는 전적으로 언어에 의해, 청각적 차원에 의해 조율되고 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텍스트'와 '삶'이 다르지 않다는 원래의 주장으로 돌아오게 된다. 애초에 그랬던 것과 같이, 문학과 현실의 단순한 일원론과 이원론, 현실과 자율성의 부박한 양자택일을 포기해도 좋다. 우리에게 주어진 화자에게, 윤리란 문학이나 언어의 '외부'에 존재하는 현실을 향하는 대신에 언어이자 현실인 '내부'를 향한다. 그가 만약 '타자'를 향한다면 그것은 언어에 내장된 타자일 것이며, 그 타자는 오로지 반복에 의해 비로소 낯설게 되는 화자의 '애매한' 몰입 덕택이다. 따라서 우리의 화자가 넘어서게 되는 체크 포인트는 단순히 '윤리적 모험'이기만 한 것도 아니고, 오직 '윤리적 책임감'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단호하게 둘 모두를 요구해야만 한다.



6. 몰입 불가능한 평면 속에서


얼룩은 일종의 무한이다. 무자비한 고해상도로도 '완벽한' 얼룩은 무딘 사각형이나 작은 계단을 거치지 않고선 완성되지 않는다. 맞지 않는 퍼즐 조각을 들고 있다. 맞지 않을 수밖에 없다. 한 조각만 안 맞아도 퍼즐을 엎기엔 충분할 테지만 사실 처음부터 맞는 조각은 하나도 없었다. 단지 갖고 있던 조각들끼리의 아귀가 맞았기 때문에 얼룩처럼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물들이 정해진 방식으로 움직이는 체스판 안의 이야기다. 그렇지만 이제 그림 속에서 쌓은 성채는 전진할 수 없고, 이제 적당히 귀퉁이를 깎거나 잘게 조각을 내거나 하는 방식으로 퍼즐이 맞지는 않을 것을 안다.
'연애'가 '가족'의 문제에서부터 '개인'에게 넘어오기까지, 그러니까 집안 어른을 중매쟁이가 대체하고, 친구를 데이팅 앱이 밀어내는 세월을 거쳐 드러난 것은 '근대적 연애'의 필요조건으로서의 '우발성'이다. 근대적 합리성이 억압한 것으로 간주되던 '우연성'은 근대와 공모하고 있거나, 근대 자신의 불가피한 뒷면이다. 누구든 아무런 필연성 없이 누구의 누군가가 되고, 그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운명처럼 꼭 맞는 것은 몇 개의 취향이나 공통점을 통해 날조하면 된다. 주사위를 굴리러 들어오는 남녀들. 화면을 밀 때마다 얼굴이 바뀌는 속도를 경험한 뒤에야 우리는 '우연성'을 취소하고, 또 유지하기 위해 꽤 많은 사회적 거짓말이 필요했음을 이해한다. 필요한 우발성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장소가 '제도'와 '장치'라면 누군가는 여전히 속고 누군가는 아직도 속지 않는다.
그렇다면 화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조윤진의 화자는 주어진 장면의 속도에 몰입하지 않고 끝없이 물러섬으로써 불만족스러운 1인칭을 얻어낸다. 반면 서호준의 화자는 장면을 파괴하기 위해 복수의 캐릭터를 운용하며 하나에 몰입하는 대신 파편이 된 캐릭터를 집적한다. 주민현이 동원하는 화자는 신을 부정하는 대신 스스로를 정립된 장면의 느슨한 외부에 위치시키는 메타적 조작을 통해 애매한 위치를 점한다. 이제니는 장면 자체의 허구성을 폭로하며 형식이 스스로 무너지도록 둔 뒤에, 그 형식을 통해 형식이 말할 수 있는 형식의 너머에 도달하고자 한다.
다시, 이것은 우리가 아는 '윤리'는 아닌 무엇이다. '우연'은 제도의 서로 다른 리듬들 속에서, 어떤 충돌로 인하여 발생하는 것이지 그 절대적 '바깥'은 아니다. 어떤 화자들은 특정한 제도가 요구하는 '우연성'의 속도를 피하는 '반복'으로, 또는 제도가 요청하고 야기하는 어쩔 수 없는 '복수화'로 '우연성'을 마주하거나 버티고 있다. 현실의 화급한 당위가 '진실의 탐색'이라는 문학의 고전적 경로를 취소하는 윤리적 증상의 풍경이 결코 부정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동시대의 다른 계절들이 증언하는 장면은 그런 중단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또 소망충족적-도덕적 글쓰기에 머무르지도 않는다. 제도와 불화하지 않지만 몰입하지도 않는 메타성이나, 제도와 대립하면서도 그 제도의 리듬에 몰입하는 미지근한 헌신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화자는 모두 액자 안에 장기 체류한다.













작가소개 / 민경환

2018년 「바로크 놀이터의 겨울」로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문장웹진 2019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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