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세 통의 러브레터

  • 작성일 2019-05-01
  • 조회수 2,696

[문학리뷰(소설)]



세 통의 러브레터



한설




작년부터 운 좋게 모 문예지에 계간평을 쓰게 되었는데, 언젠가부터 깊은 회의감이 느껴졌다. 계간평, 혹은 월평이나 격월평은 도대체 누가 읽는 걸까. 가뜩이나 위기라는 독서시장에서 문예지를 찾아 읽는 사람은 몇이겠으며, 거기서도 애써 계간평을 펼쳐 보는 사람은 몇일까. 기껏해야 평론가나 편집자 정도가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계간평을 쓰는 이유는 뭘까. 읽는 이가 거의 없는 글일 텐데…….
회의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최근에 작고하신 김윤식 선생님에 대해 여러 글을 찾아보다 발견한 어떤 문장 덕분이었다. "월평이란 것은 작가에게 한 마디 말을 걸어보는 거지요. 말을 한번 슬쩍 걸어보면 그만입니다. 작가는 그걸 봅니다. 자기에게 비평가가 말을 걸어오니까."1) 어쩌면 계간평은 작가라는 단 하나의 독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이 구축한 세계가 사랑스럽다고 말하기 위하여, 나아가 당신의 세계를 계속해서 보고 싶다고 말하기 위하여, 이를테면 라디오 사연란에 보내는 러브레터 같은 글. 당신의 라디오가 어디에 주파수를 맞췄는지도 모르면서.
세 통의 러브레터를 전파에 띄워 본다. 부디 이것이 무사히 송신되어 작은 응원이라도 되기를 바란다.

1) 권영민, 「어떤 만남 그리고 헤어짐」, 《문학사상》 2018년 12월호, 문학사상사, 8쪽


1. 이한슬, 「어떤 사이」(《세계일보》 2019년 신춘문예)


- 나는 오래전에 터키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말한 뒤에 아내와 함께 9박 10일 동안 여행을 다녀왔다고 이어 말했다. 아내, 라는 말에 전기 포트를 들어 찻잔에 물을 붓던 그녀의 신경이 곤두섰다. 아버지는 9박 10일간의 터키 여행에 대해 사소한 것까지 말하려 들었다. 여행 내내 무슨 음식이든 잘 먹었던 아내와 달리 자신은 음식이 맞지 않아 버스에서 내내 메스꺼운 기분을 느껴야 했다는 것과, 과민성 대장증후군이 있는 여행객 때문에 툭하면 버스가 세워졌던 상황들, 그런 순간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하기 위해 말이 길어질수록 아버지의 말들은 점점 문법이 맞지 않거나 가끔은 루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말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루와 달랐다. 그 엉망진창인 말들은 그녀는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아버지의 말이 사실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녀는 엄마가 갔던 해외 여행지들을 모두 알고 있었다. […] 아버지가 점점 더 제대로 된 영어를 쓰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제는 횡설수설하다 못해 엉망으로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리고 루가 난처해하고 있다는 것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녀는 초조한 마음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루의 저녁 아르바이트 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어떤 사이」의 미덕은 루의 존재이다. 소설은 루를 묘사하는 데 상당한 분량을 할애한다. 그녀는 "큰 키에 마른 체구, 짧은 녹갈색 머리칼, 회색빛 눈동자를 가진 외국인"이며 "대화를 나눌 때면 […] 언제나 영어를 사용"하는 은수의 "완벽한 룸메이트"이다. 그런데 은수의 아버지가 그들을 찾아오면서 루는 순식간에 소설의 중심에서 주변으로 밀려난다. 그녀는 자신의 의사를 전혀 드러내지 못한 채 묵묵히 아버지의 기나긴 이야기를 듣기만 한다. 공(空)에 한없이 가까워진 루. 이제 아버지의 이야기는 투명하기 그지없는 루를 그대로 통과해 은수에게 향한다.
과거에 은수의 엄마는 그들 사이에서 불화를 완충하는 역할을 맡았었다. 그녀는 남편의 폭언을 부드럽게 은수에게 전했고, 은수의 토로를 요령 있게 남편에게 전했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지금 세상에 없다. 은수와 아버지의 관계는 점점 악화된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아버지를 향한 원망이 울컥 솟아올랐을 때, 비로소 그녀는 엄마가 없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그래서였을까. 은수는 예전부터 루에게서 엄마의 역할을 기대했었다. 루가 청소할 때 엄마가 청소하던 모습을 떠올렸으며, 루가 텔레비전을 볼 때 엄마가 텔레비전을 보던 모습을 떠올렸다. 하지만 루는 엄마의 역할을 맡을 수 없다. "그녀의 집에 남아 있던 엄마의 흔적들을 치워 준 건 루였다. 방에 남아 있던 몇 안 되는 엄마의 물건들을 박스에 담아 준 건 루였다." 루는 엄마의 역할을 대신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 정리해 주는 사람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방문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은수와 아버지 사이에는 어떠한 완충도 없다. 날카로운 감정만이 가득할 뿐. "제발 거짓말 좀 그만 하세요. […] 그렇게 잘 아셨으면 엄마 심장이 멈추기 전에 병원에나 데려가지 그랬어요."
그런데 소설을 다시 읽다 보면 루와 엄마가 어슷하게나마 겹쳐지는 것도 같다. 루는 공(空)에 가까워졌고, 엄마는 공(空)이 되어버렸다. 부재를 매개로 포개지는 둘. 거기서 소설은 새로운 맥락으로 비상한다. 아버지가 찾아오기 전까지 은수는 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버지가 하는 질문들은 그동안 루와 그녀가 지켜 왔던 선을 제멋대로 넘나들고 있었다. 서로에 대해 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 않음으로써 유지되었던 두 사람 사이의 편안함, 그 적당한 거리를 아버지가 다 망가뜨릴 것만 같았다." 어쩌면 그것은 엄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완충을 필요로 하면서도 정작 그에 관해선 소홀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아버지는 은수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니? […] 네가 네 엄마를 다 안다고 생각하지 마라."
아버지가 떠난 다음 은수는 그들 사이에 완충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또 그동안 완충을 맡은 이에게 무지했다는 사실 역시 깨닫는다. 그리하여 그녀는 나지막이 다짐한다. "다음에 아버지가 다시 터키 여행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면 잠자코 들어 봐야겠다고". 그들의 힘으로 관계를 유지해 가면서 엄마의 삶을 이해해 보겠다는 각오. 비로소 이야기가 새롭게 시작된다.



2. 장희원, 「우리(畜舍)의 환대」(《악스트》 2019년 3/4월호)


"그럼 학교에 다니니?"
아내는 영재의 표정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요."
민영은 고개를 저었다.
"변기 닦는 일을 하는데요."
민영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민영은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서 있는 재현에게 물은 여깄어요, 하면서 냉장고 아래 칸을 가리켰다. 그녀는 자신이 직접 나서서 물병을 꺼내, 새 컵에 따라 주었다. 그는 물컵을 받으면서 짜릿한 냉기가 손에서 전해지는 걸 느꼈다. 손등을 쓸어 봐도 그 느낌이 채 가시지 않았다.
[…]
민영이 다시 부엌 쪽으로 사라졌고, 아들과 노인은 소파를 좋은 위치로 조금씩 옮겼다. 일이 끝나자 아들과 노인은 서로를 얼싸안았다. 그는 걸음을 멈췄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순간은 엄청나게 크게 다가왔다. 노인은 두툼한 손바닥으로 아들의 등 언저리를 짧게 토닥였다. 티셔츠 위로 솟은 아들의 날개뼈 언저리를 온 마음으로, 어루만져 주듯 잠시 그곳에 손을 갖다 댔다. 그리고는 아들의 목 뒤로 짧게 입을 맞췄다. 재현은 그 자리에서 꼼작도 할 수 없었다. 아들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보이지 않았다.


「우리의 환대」의 미덕은 부부의 엇갈린 시선이다. 그들은 아들 영재의 집에서 각각의 이유로 불편함을 느낀다. 재현의 아내에게 그것은 민영이다. "훤히 드러난 허벅지에는 검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영재보다 어려 보였다. 여자애는 풍선껌을 질겅질겅 씹었다." 재현의 아내는 아들이 '그런' 여자와 함께 산다는 사실이, 또 아들이 '그런' 여자와 친하다는 사실이 신경 쓰인다. 한편 재현에게 그것은 노인이다. 예전에 그는 아들이 포르노를 몰래 보던 것을 목격했었다. "화면에는 어깨가 벌어진 근육질의 두 남자가 뒤엉켜 있었다. 조금 더 체격이 큰 쪽이 상대방의 목을 그러쥐고 조르고 있었다." 그는 아들의 성적 지향이 동성애라고 생각하며, 그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잠깐이지만 아들이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만큼. 때문에 그는 아들이 '그런' 노인과 함께 산다는 사실이, 또 아들이 '그런' 노인과 남달라 보인다는 사실이 신경 쓰인다.
민영은 조신함으로 대표되는 여성-질서의 바깥에 위치한 사람이고, 노인은 이성애로 대표되는 사랑-질서의 바깥에 위치한 사람이다. 그들은 부부가 영위하던 그간의 체계에 이면이 있다는 사실을 저 스스로 폭로함으로써 끊임없이 부부의 체계를 교란시킨다. 기호분석학자인 줄리아 크리스테바라면 이를 두고 비체(卑體, abject)라고 불렀을지도 모른다. 너무도 이질적이어서 위협적인 것. 그리하여 본능적인 거부감과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그러니 부부는 언제나 구역을 느낄 수밖에. "아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무언가를 씹고 있었는데, 무척이나 삼키기 어려워 보였다. […] 그는 그래…… 하고 맛을 음미하다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즐겁지 않은 파티'라고 명명될 수 있는 이런 류의 서사는 기실 낯선 것이 아닌데, 누군가의 속물성이나 허위성을 폭로할 때마다 요긴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달뜬 마음으로 초대에 응한 객(客)이 모순적인 언행을 일삼는 주(主)에 실망한다는 식으로. 흥미롭게도 이 소설은 그런 것에 일절 관심이 없어 보인다. 주(主)는 어떠한 위선적인 면모도 보이지 않은 채 진심으로 객(客)을 환영하고 있다. "어쨌든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은 손님인 그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객(客)의 불편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들의 언행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 자체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기 있는 사람 중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이 소설은 무언가를 폭로하려 하는 대신 중대한 윤리적 질문을 하나 제시하려 한다. 체계의 바깥이 말을 걸어올 때 체계의 안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가, 같은. 그리고 그것은 환대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는 한 언제나 유효한 질문일 것이다.



3. 박서련, 「곤륜을 지나」 (『릿터』 2019년 4/5월호)


내가 복이 없다.
그때껏 말이 없던 늙은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자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내가 복이 참 없다.
늙은이는 그 말을 크기와 높낮이만 달리하여 여러 번 되풀이했다. 자영은 귀를 막고 뛰어내리고 싶어졌다. 이런 말을 들으려고 이제껏 참은 것이 아니었다. 몇 걸음 앞서 걷는 늙은이를 확 자빠뜨리고 벼랑 아래로 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도 들었다. 뭐가 영산이고 뭐가 신선경인가. 드는 생각이라곤 온통 흉측한 것들인데.
[…]
듣기 싫어요.
자영이 빨개진 눈으로 늙은이를 쏘아보았다. 듣기 싫다고. 제발 그만둬. 그런 말 몇 마디 하면 나를 다 이해한 것 같은 기분이 드나요. 늙은이는 자영의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럴 것이었다. 자영은 애초에 아무 말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곤륜을 지나」의 미덕은 늙은이의 일방적인 속죄이다. 그녀는 며느리인 자영이 근속 10주년을 맞아 해외여행 상품권을 받자 대뜸 중국행을 종용한다. "아범한테 들었다. […] 내가 생각해 둔 데가 있는데 말이다." 심지어 그녀는 여행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자영의 카드로 결제한 데다 눈치 없이 사돈한테 자랑까지 한다. "자영 좋은 일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 애초에 돈을 주며 가라 해도 마다할 여행이었다. 독박을 이중 삼중으로 쓰면서 벌 받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결말에 이르러 자영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전한다. "나는 아범 낳을 때 내 복을 다 썼다. […] 내가 복이 없으니까 네가 고생한다. […] 내가 니 업이고 니가 내 업이다. […] 업이 씻어진다더라. 곤륜에 오면……."
겉보기에 두 사람의 여행은 화해를 향해 천천히 나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처음에 자영은 중국으로 가는 배에서 극심한 멀미에 시달리는데, 이는 당연히 그녀가 늙은이를 그만큼 역겨워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지랄맞은 건 어머님이잖아요." 하지만 그녀는 노산의 정상에서 아주 잠깐이지만 늙은이와 함께 사진을 찍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애도 아닌데 이쯤에서 져 드려도 되지 않나 하는 생각". 게다가 엉겁결에 찍은 사진이 의외로 괜찮게 나온다. "적어도 자영과 늙은이는 모두 선상에서 찍은 사진보다는 한결 밝은 표정이었다." 어스름한 화해의 징조 속에서 늙은이는 자영에게 맥주를 부탁한다. 기묘한 대화와 함께. "힘드냐? […] 힘드냐고 했다. […] 네가 덕 없고 팔자 사나운 노인네를 만나서 힘에 많이 부칠 것이다."
헌데 속죄란 것이 원래 이렇게 말 몇 마디로 해결되는 것이었나. 그동안 늙은이는 자영을 괄시해 왔었다. 결혼을 앞두고 자영이 인사를 드리러 찾아오면 단번에 돌려보냈고, 아이를 가지려는 자영의 노력이 번번이 실패하면 그게 다 팔자라면서도 계속 어멈이라 불렀다. 그런 오랜 설움을 말 몇 마디로 퉁치려는 것은 너무도 이기적인 생각이 아닐까. 중국에 있는 사이 엄마는 암으로 입원까지 했다는데. "혼자 편해지려고? 자기 마음만 편해지면 그만이고, 그간 잘못한 것 있으면 다 잊어버리라고?"
소설의 마지막 순간, 자영은 의식을 잃어버린 늙은이를 등에 업고 산을 마저 올라가야 할지 도로 내려가야 할지 갈등한다. "그럼에도……"를 되뇌이며. "차마 끝까지 할 수 없는 말". 자영의 다음 말은 무엇일지, 그리하여-소설이 판단을 유보한-일방적인 속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작가소개 / 한설

1996년 출생. 2016년 대산대학문학상 평론 부분 수상. 현재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재학 중.


《문장웹진 2019년 05월호》


추천 콘텐츠

대중문화 속 부동산과 젠더 정치학

대중문화 속 부동산과 젠더 정치학 전지니(한경국립대 교수) * 이 글에는 종결되지 않은 웹툰과 올해 공연된 연극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투기와 여성 이 글은 한국의 부동산 현실, 그중에서도 전세 사기로 집약되는 부동산 범죄를 다룬 웹툰과 연극을 겹쳐 보려 한다. 이를 통해 동시대 대중문화 텍스트 안에서 자산 증식에 대한 소시민적 욕망이 어떻게 젠더화되어 형상화되는지를 살피고, 여성을 범죄의 가해자 혹은 피해자로 배치하는 작품 속 시도가 갖는 양면성에 대해 조망한다. 논의할 작품은 표제에 부동산을 내세워 비슷한 시기 독자, 그리고 관객과 만난 (유기 글/그림, 2024.1.13.~연재 중), (김수정 작/연출, 2023.10.14.~22.(초연), 2024.6.1.~9(재연)) 등 두 편이다. 부동산과 여성을 관련지어 논의하는 경우는 본격적인 강남 개발 이후인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다. 부동산 가격 상승과 서민의 박탈감, 중산층 진입의 욕망 등의 문제는 박완서의 강남 아파트를 산 교수 부인의 이야기인 「낙토의 아이들」(1978)에서부터 시작해 재개발을 둘러싼 부녀회의 욕망을 다룬 웹툰 (스토리 매미/작화 희세, 2019.05.05.~2020.09.27.)까지 꾸준히 반복되었다. 염두에 둘 점은 (유하 작/연출, 2015), (연상호 작/연출, 2018)의 경우처럼 대중문화 속에서 개발·재개발의 역학관계를 다룰 때는 남성 인물이 이야기의 중심에 놓이지만, 개발의 수혜를 입고자 하는 소시민의 욕망을 다룰 때 그 중심에는 여성이 자리한다는 점이다. 관련하여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불안한 경제상황 속에서 반복되었던 투기는 여성의 것으로 전유되는 일이 빈번했다. 전쟁 이후 사회 혼란의 주범으로 간주되었던 ‘사설계’를 주도하는 부인들이나 1970년대 후반부터 매체에 오르내린 부동산 투기의 주범 ‘복부인’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은 근현대사 속 뿌리 깊은 여성 혐오와 직결되어 있다. 정치·사회적 불안으로 발생한 투기 심리를 여성의 전유물로 간주하며 문제의 핵심을 피해 가고 비판의 대상을 국가와 체제가 아닌 여성으로 지목한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여성이 투기에 몰두하는 이유를 심리학적,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기사도 있었다. 한 언론은 “복부인의 욕구 단계는 생리 욕구와 안전 욕구의 원시적인 단계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며 여성이 상대적으로 안전 욕구가 강하고 사회 진출이 부진한 것을 복부인이 생기는 이유로 분석하기도 했다.1) 이 와중에 투기를 여성의 것으로 지정하는 데 대한 자성의 목소리도 있었다. 1984년 한 신문 독자는 신문 기고를 통해 ‘복부인’은 여성 천시 단어로 공공매체에서 이 같은 유행어를 쓰면 안 된다고 역설한다. 그는 “이는 여성 학대의 사회적 악습에서 오는 콤플렉스를 여성의 사회 유린이라는 감정으로 희석시키려는 ‘투사’ 심리요, 또한 일종의

  • 관리자
  • 2024-10-01
휴먼들의 소화불량, 비인간-사물의 매혹

휴먼들의 소화불량, 비인간-사물의 매혹 황녹록 밖에선 바퀴벌레의 신음소리 아버지가 숨겨 둔 약을 먹은 것입니다 어머니 내 책상 위에 아버지가 피운 모기향 좀 치우세요 시집 위에 몸 약한 날벌레들 다 떨어지잖아 동생 문 열고 들어옵니다 나는 문밖으로 재빨리 나가려고······ 동생이 소리 질렀습니다 여기 또 있어 진은영, 중1) 오래된 사물, 거슬리는 존재감 이제 우리는 반려인, 반려동물, 반려식물, 반려미생물, 반려사물 등 반려종의 경계를 구분 짓지 않기로 한다. 반려종이란 서로의 밥을 나누고 몸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는 관계를 뜻하는 말로 어떤 물질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를 의미한다. 반려들은 나눔의 상호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못지않게 서로를 위태롭게 하고, 서로 먹다가 소화불량이 되기도 하고, 때로 죽고 죽이는 유해성의 성분도 가지고 있다.2) 그리하여 누군가의, 무엇인가의 반려가 된다는 것은 결코 무구할 수 없는 관계 속으로 이끌려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과 비인간 반려들의 낯선 이물감으로 시작되는 관계맺음은 애초에 구역감과 체기(滯氣)를 동반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관계맺음은 일상 속에서 예기치 못한 만남으로 강제될 테고, 그로부터 서로를 향한 진지한 응시의 요구가 시작된다. 그 응시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물음과 응답의 이야기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새로운 관계맺음에 대하여 ‘영원한 동반자’라는 환상을 기대하거나, 우정 어린 돌봄으로 윤리적 책임을 지우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다른 존재들의 있음을 감각하고 그 감각에 감응하는 관계로서 반려를 말하려는 것이다. 김초엽의 소설 『지구 끝 온실』3)은 SF적 상상력을 통해 인간 지수와 사이보그 레이첼, 레이첼과 희귀식물 모스바나, 그리고 모스바나와 이희수의 혼종적 관계맺음에 대한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종의 경계를 넘어선 존재들의 반려-되기는 멸망해 가는 지구 끝에서 찾아내는 희망의 메시지로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나아가 구원의 식물(푸른빛)이자 악마(생태계의 위협적인)의 식물인 ‘세발갈고리덩굴’의 이중적 존재감은 반려들의 관계로부터 인류의 재건과 구원의 (불)가능성에 대한 적극적인 타진으로 읽어 볼 수도 있다. 꽤 오래전 카프카는 그의 단편에서 규정할 수 없는 것들, 식별 불가능한 반려들의 존재감을 감지한 바 있다. 카프카의 작은 존재들은 경직된 습관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다양한 실험과 그 과정에서 예기치 않게 발생된 감염의 산물이다. 카프카의 비인간-사물들은 서로를 반려종으로 여기기에는 아직 미심쩍고 불안한 상태로 존재한다. 오드라데크(Odradek)4)는 낡은 실타래 조각처럼 묘사할 수 없는 형태를 띠고,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듯한 웃음소리를 낸다.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 분명하지만, 가장(家長)은 자신이 죽은 후에도 오드라데크가 계속 살아 있는 것이 근심스럽다고 고백한다. 또 있다. 반은

  • 관리자
  • 2024-10-01
한일 문화의 초국적 접점과 ‘마주침’의 서사학

한일 문화의 초국적 접점과 ‘마주침’의 서사학 : 동시대 한국 소설 속 ‘일본’이라는 물음 정창훈 올해 상반기 일본 방송가는 ‘한일 로맨스’로 뜨거웠다. 한국인 배우 채종협(작중 윤태오 역)과 일본인 배우 니카이도 후미(모토미야 유리 역)가 공동 주연을 맡은 드라마 가 그것이다.1) 이 드라마는 채종협을 단숨에 한류 톱스타로 만들며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은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여러 OTT 플랫폼이나 케이블 TV채널을 통해 방영되며 화제가 되고 있다. 나 역시 이 드라마를 매회 빠짐없이 챙겨보았는데, 기대 이상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다고 생각한다. 이 두 인물의 연인 관계에 시련이나 위기를 가져오는 여러 갈등의 요인들이 있었으나, 그 가운데서 국가적, 역사적 문제와 연관되는 요인을 끝내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오히려 신선했다. 국적(내셔널리티)과 언어, 생활관습의 차이는 둘 사이의 장벽이 되기는커녕 상대에 대한 관심을 극적으로 심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가족이나 주변인들도 이 둘이 한국인,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둘 사이를 반대하진 않는다. 이것은 종래의 한일 서사물에서 양국 인물의 연애사를 그려 온 방식과는 차별화되는 것인데, 이를 통해 ‘이례적인’ 해피엔딩의 결말이 주어진다. ‘한일 로맨스’ 자체가 이례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른 아시아 이웃들의 경우와 비교했을 때, 한일 양국 인물의 만남을 그린 서사적 재현이 여러 차례 반복되어 온 점, 나아가 오늘날 그 재현의 양상이 현저히 다양화되고 있다는 점은 주목을 요하는 현상이다.2) 물론 나쁘게 말하자면 이 드라마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정치적, 역사적 이슈를 정교하게 회피함으로써 구축된 가상의 이야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는 한국과 일본이라는 이웃이 서로를 감각하는 방식에 새로운 무언가가 ‘첨가’되고 있음을 예시하는 것이 아닐까. 돌이켜보면 지난 몇 년 동안 한국 소설은 이러한 변화에 한 발 앞서 민감하게 대응해 온 것으로 보인다. 여러 가지 껄끄러운 문제를 공유한 ‘오랜 이웃’과의 ‘새로운 관계’를 상상하는 시도가 동시대 소설 속에서 계승되어 온 점, 이 글은 거기에 새삼스레 주목하려 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움직임이 가져온 의미를 통시적 관점에서 살펴보기 위해, 잠시 과거로 돌아가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현해탄 서사’ 이후, 한일을 넘나드는 월경의 서사 근대 이래 한일 관계에서 ‘현해탄’은 상징적 의미를 지녀 왔다. 특히 식민지-제국 체제의 해체 이후 그것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의 바닷길(대한해협)’이라는 외시적 의미만이 아니라 역사적, 정치적 문제 등으로 인한 한국과 일본의 ‘가깝고도 먼 관계’(심리적 거리감, 국가적 입장의 차이 등)를 가리키

  • 관리자
  • 2024-10-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