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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게임의 서글픈 레짐

  • 작성일 2019-06-01
  • 조회수 1,834

[문학리뷰(소설)]



생존 게임의 서글픈 레짐

- 최유안, 「거짓말」/ 장강명, 「대기 발령」/ 김유담, 「이완의 자세」



김영삼




1


지난 몇 년간 우리는 생존을 위협하는 각종 재난과 사건들을 목도해 왔다. 그 참혹한 서사의 리얼리티가 위협적인 이유는 생명정치 관리 시스템의 파열음들이 현 세계의 풍경과 구조에 앞으로도 고스란히 재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두는' 생명정치는 곳곳에서 실패의 신음을 생산하고 있다. 계급, 세대, 지역, 인종, 젠더 등의 뇌관을 건드리면서 작동하는 혐오와 차별의 언어들이 그 증거다. 또한 결혼, 출산, 육아, 취업 등 생의 과정 곳곳에 놓인 높은 문턱은 개인들을 생존과 경쟁의 서바이벌 게임으로 내몰고 있다. 주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모든 경계에 대한 거부와 두려움에서 생산되는 기호들이 곧 현시대 우리 삶의 아비투스이며 기표이며 서글픈 레짐이다. 이즈음에 발표되는 한국의 소설들은 이러한 마음의 풍경들을 예민하게 관찰하면서, 생명정치의 우울한 파편들을 일상 공간의 사건들로 보고하고 있는 듯하다.



2


최근 출산과 육아가 다루어지는 소설의 풍경에는 그들이 체화한 삶의 기호들이 아프게 새겨져 있다. 그것이 아픈 이유는 사회가 생산한 위험이 개인적 삶의 차원에서 경험되면서 개인의 윤리 또는 개인의 능력을 시험대에 올리는 참담함 때문이다.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모든 위험군들을 재난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면, 전투의 최전선에서 경력이라는 자원을 축적해야 하는 여성 노동자에게 임신이라는 사건은 재난에 준하는 경고장이다. 은행에서 근무하는 「거짓말」(최유안, 《문장 웹진》 2019년 5월)의 주인공 세영에게 임신은 "커리어"의 단절을 의미한다. 임신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브라질에서 열리는 국제은행 컨퍼런스에 참가할 기회를 단단히 붙잡았을 것이며, 이후 본사 발령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임신과 출산은 생애 주기의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라 의도하지 않은 오발탄에 가깝다. 생존의 게임에서 자신의 계정을 휴면 상태로 전환하는 일은 전투에서의 패배를 의미한다. 때문에 경제적 재생산 구조의 논리로 임신과 출산을 장려하거나 아이가 주는 가상의 행복을 제시하는 모든 행위들은 생존의 장애물로 인식된다. 소설에서 쌍둥이 엄마가 보여주는 상대적 우월감과 성취감이 세영에게 인식적 폭력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쌍둥이 엄마도 결국 경력 단절을 고민하면서 고투하고 있다는 소설적 진실은 덫에 걸린 여성 주체가 다시 덫을 놓는 불행의 재생산구조가 일상화된 우리 사회의 낭만적 거짓을 폭로하는 역할을 한다) 출산을 단념할 수밖에 없는 방향으로 개인의 삶이 유도될 때, 사실상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강요에 다름 아니다.
서사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 세영은 윤호와 결혼하는 데에도 상당한 노력과 결단이 필요했다.


그즈음 언론에서는 주택 가격 상승과 청년 실업률 증가가 우리 세대의 결혼 연령을 늦추고 있다고 분석했지만 나는 그것과 내 결혼 사이에 도대체 상관성이란 없다고 생각했다. 윤호는 윤호의 커리어를, 나는 내 커리어를 각자 생각하기에도 벅찬 날들이었다. 그러니 인간의 자유의지를 어떻게든 프레임에 가둬 해석하는 잔인한 사회의 습성에 맞춰 나는 나를 옭아맬 생각이 없었다. 이건 내 전공이었던 사회학을 경멸하는 내 나름의 방식이었다.
일단 결혼을 하고 나니 수많은 사람들이 물었다. 애 생각은 없어?

- 최유안, 「거짓말」 중에서


'임신-출산-육아-교육-대학-취업-결혼-다시 임신'으로 이어지는 정상적(?) 생애 주기는 더 이상 표준적 모델로 기능하지 못하는 듯하다. 생애 주기별 관리 프로세스가 국가의 정책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생애 주기별로 위험군들이 대기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세영의 친구 재희는 서울 시청 출산정책과에서 근무하지만 정작 그녀는 결혼과 출산에 관심이 없다. 노동 과정으로부터의 자발적 소외를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하나의 문턱을 넘는 데도 고도의 노력과 능력이 요구된다. 그러니 '생존' 자체를 목적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이들은 모두 탈­표준화된 삶의 모델을 스스로 생산하고 있는 셈이다. N포 세대라는 말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은 것은 그것이 근접해 있다는 근거다. 무한대로 확장 가능한 기표 N에는 무한한 공포와 두려움이 잠복해 있다. 그런 점에서 세영의 신체가 조기 폐경이 의심되며, "아이가 착상되기 어려운 자궁"을 가졌고, "고위험군에 속하는 산모"로 분류된다는 사실은 개인의 불행을 지시하기보다 이 사회의 재생산구조가 불임 또는 난임의 위기에 처했다는 사회적 표상으로 읽힌다.
그녀는 아이를 유산했다. 유산이 그녀가 원하는 바는 아니었으나 임신과 출산 역시 계획에 없었던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양육 주체들의 갈등과 선택 장애는 서바이벌 참가자인 우리가 잠재적 유아 살해의 공범 내지는 미필적 고의에 준하는 방조범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아프게 직시하게 한다.
최유안의 서사는 우리의 삶을 관리하는 생명정치라는 숲 속에 있는 늪의 영역에서 쓰였다. 아름다운 숲길로 위장한 늪에 서서히 가라앉으면서, 먼저 늪에 빠진 이들의 안도의 눈빛을 응시하며, 그들의 손짓에 새겨졌던 거짓을 읽지 못했던 자신을 후회하며, 동아줄조차 마련해 놓지 않은 숲의 위장술을 저주하며 이렇게 외치고 있다.
'거짓말.'



3


김홍중은 "서바이벌은 청년 세대의 꿈이며 악몽이다"(『사회학적 파상력』, 문학동네, 2016, 50쪽)라는 명제를 제시한 바 있다. 장강명은 이런 류의 악몽을 일상의 서사로 바꿔 놓는 데 익숙한 작가다. 소설 「대기발령」(장강명, 《릿터》 2019년 4/5월)은 주인공 조연아가 선배 희정, 윤수, 지연, 중훈과 함께 대기발령 사령장을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들은 사외보 <행복동행>을 발간하는 편집부 소속이었다. 처음부터 식품회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부서였고 수익성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팀은 몇 차례의 부침을 겪었던 터다. 한때는 발행 부수가 10만 부를 넘기도 했지만, 선대 회장의 사망 후 식품회사가 "문화잡지를 만들면서 편집부를 회사 내에 둔 이유"(149쪽)를 그 누구도 설명할 수 없었으니 부서 폐지는 당연한 경제적 합리성의 수순이었다. 대기발령을 받은 그들은 사무 공간과 복도 사이의 경계에 놓인 텅 빈 책상에서 선택을 해야 했다. 자회사로의 발령을 받아들이는 "각자도생"(158쪽)의 길과 "인간의 존엄"과 "품위"(162쪽)를 유지하는 길이 선택지다. 이제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실존의 가치를 전략적으로 계발함으로써 자신의 쓸모를 증명해야 한다. 회사(사회라고 쓸 뻔했다)는 주체에게 스스로를 구성하고 구제해야 할 과제를 부여했다.


어디 나가서 청소를 하는 게 차라리 낫겠어. 실존적 고민이 들더라니까. 내가 지금 뭐 하는 건가 하는. 이거 아주 실존적 형벌이야. 그런데 회사는 저희를 지금 자르려는 거예요, 벌을 주는 거예요? 그게 문제지. (152쪽)


어학 공부, 독서, 게임, 취침 등 금지. 경영지원 팀으로 일일 업무 보고서 제출(매일 퇴근 전), 회사 혁신 방안 보고서 제출(매주 수요일 퇴근 전). 자기 주도 학습 보고서 제출(매주 금요일 퇴근 전) ······ (156쪽)


전날 술자리에서 실존적 형벌이라는 얘기가 나왔는데 이건 실존적이라기보다 초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업무를 하지 않는데 어떻게 업무 보고서를 쓰라는 건가. 회사 혁신 방안을 사무실 안에서 말없이 꼼짝 않고 앉아서 떠올릴 수 있는 걸까. 자기 주도 학습이라니, 나에게 뭘 가르쳐야 하는 걸까. 눈치? 적응력? 비굴함? (156쪽)


서바이벌 게임의 스펙터클은 희박한 전망과 가혹한 고투가 주는 외로움에서 생산된다. 이 싸움은 상대를 공격하기보다 최소한의 안전을 위해 울타리 안으로 위험군이 침투하지 못하게 하는 철저한 방어가 유일한 전략이다. 경쟁에서 승리하기가 아니라 경쟁에서 잔존하기가 목적이다.
문제는 실존의 텅 빔을 경유할 수밖에 없는 그 외로운 투쟁의 내면에 새겨진 배신의 쓰라림을 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다는 점이다. 대기발령 일주일째 윤수가 처음으로 GG를 선언했다. 회사 앞 지하철에서 지상으로 오르는 계단 앞에서 가빠지는 숨을 이겨내지 못했다. 대기발령 12일째 지연은 사직서와 함께 남은 세 사람에게 메일을 남긴 채 떠났다. 기회에 남편과 히말라야를 가고 싶다고 했다. 연아는 짧은 답장만을 발송했다. 며칠 후 연아는 자회사로의 고용 승계 제의를 수락하는 쪽을 택했다. 물론 패자에게는 면접이라는 형식적 절차와 반성문이라는 굴욕이 요구되었다. 희정은 홍보팀으로 옮기는 걸로 내정되어 있었지만 일이 꼬였다. 서둘러 패자들이 떠나야 하는 눈치 게임에서 그녀는 배신의 칼날이 오히려 자신을 상처내고 있음을 나중에야 안 듯하다. 결국 그녀도 연아가 떠난 이후 회사의 배신 제안을 배신했다. 중훈만이 석 달을 버텼다. 연아는 "벽을 보고 앉은 중훈의 등 뒤를 그냥 지나"(161쪽)/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녀는 자회사에서 석 달을 일하고 나와 여러 회사를 옮기면서 "우정이나 동료애 같은 단어가 공허하고 기만적인 구호"(159쪽)라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생존의 게임에서 "업의 본질이라든가 자아실현이라든가 하는 따위의 말"(159쪽)들은 실존적 사치일 뿐이다. 대신 그 자리에 남는 것들은 청춘이 지워진 자리에서 행복을 미래로 유예하는 청년들, 사람이라는 음운이 지워져 버린 '삶'이라는 텅 빈 기표, 억압의 주체가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거대 담론의 이데올로기로 치환 불가능한 싸움(네그리가 설명하는 '제국'의 일상적 지배논리와 '다중'이라는 대항논리는 너무 아득하고 멀다), 도덕적 정당성 혹은 윤리적 가능성의 이름으로 남는 철학적(너무 철학적이어서 현실을 초월하는) 질문들뿐이다. 장강명이 이론이나 이데올로기로 환원될 수 없는 한국 사회의 구체적 현장을 소설로 쓰는 데에는 그만한 전략적 이유가 있다.



4


김유담의 중편 「이완의 자세」(《창작과비평》 2019년 봄호)는 '24시만수불가마사우나'의 여탕 때밀이 오혜자 여사의 딸 김유라(나)의 이야기다. 오혜자 여사도 한때는 잘나갔다. 여상을 졸업하기 전부터 "당시만 해도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곳"(197쪽)이라던 서울 최고의 백화점 1층 화장품 매장에서 근무하며 특출 나게 단정한 용모를 뽐내기도 했단다. 산업재해로 사망한 아버지의 보상금으로 '오혜린 피부관리숍'을 운영할 때도 엄마의 "윤기 나고 반짝이는 피부"(198쪽)는 그녀의 빨간 스포츠카처럼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아름다웠단다. 사파이어 아저씨에게 사기를 당하면서 혜자가 혜린으로 변하는 마법이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리기 전까지 말이다. 그 이후 줄곧 엄마는 구 '선녀탕' 현 '24시만수불가마사우나'의 여탕에서 때를 민다. 돈을 벌어 빚을 갚고 아파트를 장만해도 엄마는 사우나 여탕의 평상 위에서 벌거벗은 몸으로 몸을 누인다. '나'는 그런 엄마와 함께 유년의 몇 년을 여탕 평상 위에서 벌거벗은 채로 보냈고, 간혹 엄마의 때밀이 연습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때부터였는지 모르겠다. 그녀의 신체가 여성성을 상실한 채 '경직된 자세'로 뻣뻣하게 굳어버린 것이 말이다. 어린 그녀의 가랑이는 부끄러움을 학습할 기회도 없이 때밀이 수건에 쓸리면서 노동생산을 위한 몸으로 기호화되었다. 그러다 소아질염에 걸려 손님들이 오가는 탕 한구석에서 다리를 벌린 채 대야에 담긴 갈색 약물로 좌욕을 해야 했던 그때, 그녀의 신체는 에로스적 기능이 정지되었다. 어린 그녀가 "밋밋하고 딱딱한" 미미인형을 세숫대야에 거칠게 씻기면서 "가랑이를 쭉 찢어서 비누칠을"(207쪽) 하는 장면과 사파이어 아저씨를 찾기 위해 엄마가 필리핀으로 떠났던 어느 해 여름 홀로 초경을 겪는 장면은 경제적 논리에 밀린 몸의 에로스적 기능이 그녀에게서 탈착되는 증거로 기능한다.
김유담의 소설에서 몸은 두 가지로 분류된다. 하나는 강력한 욕망을 환기하는 에로스적 기능체로서의 몸이다. 간혹 이는 엄마의 아찔한 가슴 곡선과 목욕탕에 들르는 직업여성 언니들의 은밀한 부위 등의 기표로 표현된다. 다른 하나는 경제적 기능체로서의 몸인데 이때 몸의 기표는 무엇보다 엄마의 "붉은색 브래지어와 팬티"(232쪽)로 표상된다. 엄마의 속옷은 성적 충동을 야기하는 강력한 기호로 산출되지 않는다. 엄마에게 붉은 속옷은 "작업복"(232쪽)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전자를 포기하고 후자를 선택함으로써 생존 게임에 참여한다. 캐릭터는 딸이다. 동네 무용학원에서 딸은 신체의 움직임이 아름다움을 생산하는 방식을 습득한다. 신체의 예술적 쓰임은 그것이 노동과 생존이라는 경계 바깥에서 소비되는 기호라는 의미다. 때밀이의 딸로서는 과분하게도 유라는 명문여대 무용과에 합격함으로써 엄마의 소망은 대리보충 되는 듯했지만, 딸은 조연의 자리에서 멈추고 만다.
게임의 논리를 몰랐기 때문이다. 마지막 스테이지에 등장하는 최후의 괴물을 물리치는 서사로 끝나는 게임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로드에서 스테이지 하나하나를 무사히 건너가야만 하는 연옥의 무한반복이 게임의 룰임을 몰랐기 때문이다. 여기서 생존은 말 그대로 살아남는 것에 불과하다. 유일한 승리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단 하나의 소실점으로 수렴되는 그 자리일 것이다. 유라는 아니 우리는 그 하나의 소실점이 되지 못한 무수한 '우리'일 뿐이다. 무용수의 신체가 아름다움의 기호로 소비되면서 경제적 필요성과 노동 너머의 존재가 되기까지 무수한 경쟁의 터널을 통과해야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에로스가 뻣뻣하게 굳어버린 그녀의 신체는 무언가를 연기한다는 재현 능력 이상의 정동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녀의 몸은 에로스적 신체와 경제논리로 환원되는 몸 사이를 매개하면서 상실과 실패를 향한다.
(김유담의 소설은 이런 문장들이 지시하는 의미를 넘어서는 유쾌함과 따뜻함의 서사를 갖추고 있다. 그러니 여기 쓰인 문장들의 폭력을 용서해 주기를 바란다. 나는 어느새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을 기다린다. 울면서 웃을 준비가 되어 있다.)



5


초등학교 4학년 아들이 즐겨 읽는 만화책이 있다. 『○○에서 살아남기』 시리즈다. 주로 ○○의 자리는 사막, 무인도, 아마존 같은 것들이 차지한다. 생존에 필요한 정보와 기술을 알려준다. 최근 이 시리즈는 수학세계에서도 살아남는다. 물론 아들놈은 여기에 관심이 없다. 녀석에게 정작 필요한 책은 따로 있는 것 같아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질 않는다. 방법을 모르니 내가 써줄 수도 없다. 누구라도 찾으면 알려 달라. 제목은 『한국에서 살아남기』이다.















김영삼

작가소개 / 김영삼

2019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전남대 국문과 강사.


《문장웹진 2019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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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1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이소 1. 스무 살을 훌쩍 넘어 성인이 되어도 자신을 어른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뉴스를 보면 언제나 피해자의 억울함에 몰입하고, 많은 경우 나를 포함하지 않은 채 ‘어른들’에게 분노를 터트리는 사람. 2014년 4월 16일, 이 날 나는 처음으로 어른의 자리에서 사건을 경험했다. 아이의 자리가 아닌 해운회사의 직원이나 공무원이나 인솔 교사의 자리에 서 있었다. 항해사나 해경보다 교사인 나를 떠올리기가 더 쉬웠다. 누구나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기억이 있으니까. 나는 전문가를 깊이 신뢰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내가 그 배에 탔다면 안내 방송을 충실히 따르며 어른들과 시스템을 믿으라고 아이들을 다독였으리라는 걸 알았다. 누가 보아도 나는 완벽히 어른이었다. 굳이 괴로웠다는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그때는 모두가 괴로웠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다음해 문학을 전공하러 대학원에 들어갔다. 누군가 공부라는 게 어떤 실천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런 답변도 떠올릴 수 없다. 나부터가 그런 희망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전처럼 살 수 없을 뿐이었다. 나는 어른이었고,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수습될 수 있는 사고가 아니라 소화할 수 없는 사건이었으며, 내게는 더 정확한 언어가 필요했다. 딱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었다. 2. 지금도 교사인 나를 상상해 본다. 항해사나 해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교사라는 직업과 위치가 내게 어른이란 무엇인지 사고실험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과 달리 미성년인 학생들을 상대하는 교사는 흔히 이중적인 이미지로 재현된다. 전교조와 교총을 교대로 인터뷰하는 기사의 관례처럼, 전통을 수호하는 보수적인 교사와 변화를 추동하는 진보적인 교사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그려지는 건 흔한 일이다. 제도가 부여한 의무와 규범을 학생들에게 어디까지 얼마만큼 요구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한 명의 교사를 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지만, 이 경우에도 그의 심리적 갈등은 그의 교육방식에 딴지를 걸 더 완고한 교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전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코 전위적인 존재에 도달할 순 없지만, 마땅히 후위의 역할은 초과해야 하는 사람. 그러나 생각해 보면 교사만 그럴 리는 없다. 모든 직업은 사회가 요구하는 허용범위 안에서 가까스로 변주를 시도하고, 모든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며 유사한 딜레마에 빠진다. 교사는 자신의 의무를 익히 아는 어른의 상징이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점점 학생보다 교사에게 더 쉽게 이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문제는 오래되고 흔한 방식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현이 더는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데 있을 것이다. 어차피 시대가 변한 줄 모르는 늙은 교사들은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없다. 보수적인 교사와 진보적인 교사의 대립은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갈등을 통해 사회를 혁신하는 재생산 메커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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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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