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기후위기 시대에 문학하기

  • 작성일 2021-08-01
  • 조회수 5,515

[현장 비평]

《문장웹진》은 다양한 시선을 통해 폭넓은 담론을 펼칠 수 있는 ‘비평의 장’을 마련하고자
2020년 진행되었던 〈본격! 비평〉 코너를 정비하여, 2021년 4월호부터 〈현장 비평〉을 선보인다.
2021년 〈현장 비평〉은 신진 문학평론가 9명이 각자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주제를 정해 매월 1편씩 발표된다.



기후위기 시대에 문학하기
: 생태주의 문학/비평의 몇 가지 의제들



김보경




0. 전염


인간의 말로 쓸 수 없음. 주어, 서술어. 쓸 수 없음. 주어, 목적어, 서술어. 쓸 수 없음. 닭은 인간처럼 말하지 않고. 관형어, 주어, 서술어. 인간처럼 생각하지 않고. 주어, 목적어, 부사어, 서술어. 인간과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느끼기에 쓸 수 없음. 내가 쓸 수 있는 건 이성적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말. 이성을 신뢰하는 말. 인간의 말. 인간의 말로 기록된 역사. 인간의 말로 세운 규범. 인간의 말로 만든 문화. 인간의 말로 지은 문학. 휴머니즘. 인간이 나와 인간을 만나 인간에 대해 사유하는 문학. 인간이 인간에게 감동받는 문학. 인간에 대한, 인간을 위한, 인간만의 문학. 오직 인간만을 위한 문학. 인간이 세상의 주인공이 되는 문학.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조건으로서의 문학. 인간이 동물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드는 문학. 망각의 문학. 의인화. 닭에게 인격을 부여하는 건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나를 붙잡아 쓸 수 없음. 문장을 이어 갈 수 없음. 닭에게 인간의 목소리가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닭의 목소리가 부여될 수 있기를 바람. 바라는 마음으로 다시 쓰기.

- 서이제의 「두개골의 안과 밖」1)부분

1) 서이제, 〈두개골의 안과 밖〉, 《자음과모음》 2021년 여름호.


서이제의 「두개골의 안과 밖」은 야생 철새의 분변으로부터 변이 바이러스가 창궐함에 따라 가금류에 대한 대거 살처분 명령이 내려진 한국의 상황을 배경으로 한 근미래 SF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변이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통증에 시달리다가 새가 되어버린다는 소문이 퍼진 가운데, 10만 명의 사람들이 증발되고 새의 번식이 급증한다. 소설을 읽다보면 구제역, 조류 인플루엔자, 아프리카돼지열병, 코로나19 등 각종 바이러스가 발생할 때마다 감염 확산 방지와 방역을 이유로 동물들이 대거 살처분 대상이 되었던 역사가 매립지에 매몰된 동물 사체들의 암모니아 냄새를 통해 우리의 코를 뚫고 들어온다. 공장식 축산의 참혹한 현실이 비좁은 축사에 갇힌 수십만 마리 닭들의 울음소리를 통해 우리의 귀를 뚫고 들어온다. 이 소설에서 까치의 사진, 동일한 글자(닭, 鷄)의 반복, 한자를 활용한 새인간의 형상(羽人羽) 등은 표상적 언어의 한계를 허물며 이미지로서의 강렬한 힘을 발휘한다. 읽기보다는 보기를, 보기보다는 느끼기, 느끼기보다는 전염되기를 요구하면서.
인류학자 에두아르도 콘은 『숲은 생각한다』에서 퍼스의 기호학을 바탕으로 근대의 인간주의적인 기호학에서 벗어나 비인간 존재들의 기호 작용을 포괄하는 기호학 이론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소쉬르의 기호론이 인간 언어를 기호 체계의 모델로 삼았다면, 퍼스는 인간적인 것 너머로 기호의 의미를 확장하고 어떻게 인간이 인간적이고 비-인간적인 기호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살아가는지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퍼스가 구분한 아이콘, 인덱스, 상징은 각각 기호 매체와 대상 간의 닮음의 기호, 대상과의 연결이나 영향을 표상하는 기호, 규약을 수반하는 기호에 해당한다. 콘이 드는 케추아어(Quechua語)의 사례를 짧게 인용해 보면, 강물 속으로 뛰어드는 모습을 음향적으로 표현하는 ‘추푸(Tsupu)’와 같은 단어는 아이콘적 기호이며, 강물 속으로 뛰어든 소리가 누군가에게 위험한 일이 발생했다는 것 같은 일을 의미하게 될 때 이 충격음이 다른 무언가를 지시하게 되는 것은 인덱스적 기호에 해당하며, 기호들이 특유의 문화적 환경 안에서 역사적으로 문법적·통사적 관계를 통해 결합된 체계는 상징적 기호에 해당한다. 이때 근대적 기호학은 인간이 사용하는 상징적 기호만을 언어로 이해해 왔으나, 기실 인간은 언제나 비인간 존재들과 아이콘이나 인덱스적 기호 작용을 공유해 왔다. 요컨대 아이콘-인덱스-상징의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때 이 세계는 인간적인 것 이상의 기호 작용으로 차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러한 기호론은 실재를 살해한 대가로 언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된 인간 주체라는 헤겔적 판본이 바탕을 둔 “한쪽에는 인간, 문화, 정신, 표상을 세워 두고 다른 한쪽에는 비인간, 자연, 신체, 물질을 세워 두는”2) 이분법을 무너뜨린다.
앞서 인용한 서이제의 소설에서 “이성”을 동력 삼아 “인간의 말”로 지은 문학을 “휴머니즘”이라 일컫고 이를 거부하는 것은 그러한 문학이 “인간이 동물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소설 속 화자는 닭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려 하지만, 곧 화자는 닭에게 인격을 부여하여 의인화하는 방식 역시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 지나지 않을까 자문한다. 결국 인간이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라면, 인간이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은 애초에 모순적인 말이 아닐까. 이 소설은 이런 모순 즉 인간이 동물로 말한다는 것의 한계를 봉합하지 않으며 그럼에도 “인간의 말로 쓸 수 없”다는 조건 속에서 쓰인다. 그렇게 소설은 동물에게 인간의 목소리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동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 즉 인간에게 닭의 목소리가 부여되기를 택한다. 서이제의 소설에서 한글과 한자를 활용한 아이콘적 기호로 제시된 닭의 울음소리는 인간의 전유물로서의 언어가 아니다. 변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새 인간이 된다는 소설 속 설정은 메타포가 아니다. 이 울음소리에 전염됨으로써 인간적인 것 너머의 나의 동물임이 일깨워진다.
한편 이 소설에서 인간중심주의를 허무는 또 다른 방식은 이 소설이 살처분 혹은 공장식 축산과 같이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이루어지는 동물 억압 및 착취의 주요 형태에 연루된 여러 행위자들의 다중 시점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소설에는 살처분된 동물들에 대해 소설을 쓰려하는 서술자뿐만 아니라 살처분에 투입된 공무원과 일용직 노동자, 축사나 농가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 수의사 등 인간의 시점이 번갈아 가며 제시된다. 또한 인간의 시점만이 아니라 TV의 보도 내용이나 인터넷 창의 댓글이 삽입되기도 하고 새의 시점을 취해서 쓰이기도 한다. 이러한 형식은 동물들에 대한 합법적 살생이라는 사건을 둘러싸고 여러 인간 및 비인간 행위자들이 어떻게 구조적으로 연루되어 있는지 효과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비인간 동물들은 인간종에 비해 열등한 존재로, 인간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되는 존재들로 전락했다. 국가는 까치 한 마리당 8,000원의 몸값을 부여하며 총살을 합법화하고 장려한다. 변이 바이러스가 퍼지자 새를 향한 혐오가 난무한다. 죽음의 현장에서 도망치고 싶어 하고 고통을 느끼는 것은 닭들만이 아니라 “시대가 요구하는 속도에 맞춰” 닭을 마대자루에 처넣는 노동자들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단지 동물에 대한 시혜적인 동정이나 휴머니즘적 대우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 많은 죽음들을 빌려” 살고 있다는 끔찍한 진실을, 그러한 죽음에 저마다 어떠한 방식으로 연루되어 있는지를 직시하게 만든다.


우리에게 희망은 있는가?3)

2) 에두아르도 콘, 『숲은 생각한다』, 차은정 역, 사월의책, 2018, 77면.
3) 김종철, 〈생명의 문화를 위하여〉, 《녹색평론》 1991년 창간호, 2면.



1. 90년대 생태적 전환과 여성주의


1990년 창비에서 마련된 좌담 〈생태계의 위기와 민족민주운동의 사상〉은 90년대 초 사회변혁 운동의 노동자계급 중심성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가시화되고 여성운동 및 생태운동 등이 의제화 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4) 문단에서는 주로 시단에서 생태 시와 페미니즘 시의 부상이 주목된 바 있다.5) 그리고 《녹색평론》 창간 25주년 기념호의 특집 좌담인 〈에코페미니즘 – 새판 짜기의 비전과 실천〉에서 윤정숙은 90년대의 이러한 생태주의의 부상이 여성주의 운동과의 관련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요컨대 서양에서는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에 활발히 논의되기 시작한 생태여성주의가 “한국에서는 상당 기간 동안 ‘여성들의 환경운동’일 뿐으로 인식되었던 것 같”다며, 1990년대에 들어서 한국에서 생태여성주의 실천이 “‘여성들이 주체가 되어 하는 환경운동’, ‘젠더 관점의 환경운동’, ‘생활 환경운동’ 등으로 개념화”되고 “환경운동의 가부장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는 것이다.6) 또한 이 좌담에서 장이정수는 2015년 무렵 생태여성주의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을 두고 “강남역 사건, ‘메갈리아’의 등장 이후 페미니즘에 관한 관심이 엄청나게 늘어난 것”7) 과 연관시키기도 하는데, 이는 한국에서 생태주의와 여성주의 운동이 밀접한 관계를 띠며 이루어져 왔던 역사가 반복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2020년 6월에 발간된 《문학3》 ‘주목’ 코너의 키워드는 비인간동물로, 이를 기획한 김미정은 이 주제가 반드시 페미니즘의 문제의식과 연관된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최근 수년간의 문화예술계의 의제와 긴밀한 관계를 보인다고 말하며 다소 유보적으로 그 관련성을 언급하기도 한다.8)
이 반복을 좀 더 주시할 필요가 있는 것은 첫째로 당대 문학과 비평장에서 생태주의의 의제와 여성주의의 의제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파악하기 위함이고, 둘째는 이를 통해 기후 위기에 직·간접적으로 대응하는 최근의 문학 작품들을 의미화하는 지평을 새롭게 맥락화하기 위해서다. 생태주의와 여성주의의 절합(Articulation)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 절합의 양상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90년대 한국 문학과 비평에서 이 둘이 절합 되었던 양상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는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한국에서의 생태주의 및 여성주의 문학의 특징을 살피고 그 의제를 구체화하는 데 유의미한 참조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현재 우리에겐 팬데믹과 기후 위기 시대의 위기감을 종말론적 수사로 치환하거나 휴머니즘적 윤리를 도출하는 데 만족하지 않는 구체적인 의제들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90년대 초엽 생태 지향적 문화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주창하며 창간된 《녹색평론》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아 본다. 알려져 있다시피 《녹색평론》은 생태주의 사상과 운동이 대중화되는 데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해 온 매체였으나, 초기에 그 기조가 어떻게 여성주의와 절합되어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주목된 바가 없었던 듯하다. 《녹색평론》의 주 독자층이나 당대 생태운동의 중요한 주체로 여성들이 꼽히기도 했지만,9) 비평 담론의 차원에서도 《녹색평론》은 초기에 생태여성주의 이론가들을 소개하는 등 여성주의와의 친화성을 보이고 있다. 일례로 《녹색평론》 창간호에서부터 꾸준히 글이 실린 저자 중 한 명인 반다나 시바는 생태여성주의 이론가이자 운동가로서 이반 일리치 등과 함께 《녹색평론》에 이론적 자양분을 준 이론가에 해당한다. 반다나 시바는 여성과 자연을 억압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기제로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맞물려 있음을 지적하며 가부장적 자본주의라는 세계 체제가 여성과 이민족, 그들의 땅을 식민화함으로써 유지된다고 비판해 왔다.10) 특히 그녀의 주장에서 여성주의적 시각에서의 토착 경제에 대한 강조는 자급적이고 협동적인 농업 경제를 중시해 온 《녹색평론》의 기조나 한국에서 풀뿌리여성운동을 확산시키는 데 이론적 뒷받침이 되었다.
한편 《녹색평론》의 주간 김종철의 글에서도 생태여성주의적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예컨대 《녹색평론》 29호에 실린 정화열의 글 〈생태철학과 보살핌의 윤리〉를 소개하며 김종철은 “지금까지 세계를 지배해 왔던 ‘근대적’ 담론, 즉 남성 본위의, 인간중심적인 세계관 - 따라서 ‘권리’에 대한 자기주장이 사회조직의 압도적인 원리로 되어 온 - 으로는 지금 걷잡을 수 없이 ‘거주 불가능한 곳으로’ 되어 가고 있는 지구를 되살릴 수는 없다”는 것을 가르쳐준다고 말하며, 무엇보다 정화열의 글에서 남성·인간중심적 세계 질서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제시된 “여성적인 ‘보살핌의 윤리’”의 필요성에 깊이 공감을 표한다.11) 그리고 김종철은 이러한 관점을 보다 발전시켜 〈‘보살핌의 경제’를 위하여〉라는 글에서 ‘여성주의 경제학’을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여기서 그는 자본주의가 가부장제와 맞물려 작동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근대적 산업경제가 여성들의 돌봄 및 가사노동을 무상으로 착취하는 가부장제의 분할 정치에 의존하고 있음을 설명한다. 나아가 여성들의 이러한 노동은 “생명을 보살피고, 인간관계를 평화롭게 유지시키는 데 관계”12)하고 있다는 판단 하에, 여성들이 보존해 온 이러한 ‘보살핌의 경제’를 확대하는 것을 현 산업경제를 전환시키는 방향으로 제시한다. 그가 이 글에서 언급하고 있는 한살림운동이나 귀농 및 농촌 체험의 확대 등은 당대 보살핌 경제를 실천하는 구체적인 예시에 해당할 것이다. 이처럼 한국에서 90년대 생태운동을 이론·사상적으로 뒷받침하는 데 여성적인 가치의 발굴 및 윤리화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당대 문학장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생태주의는 90년대 문학 안에서도 시문학이나 비평에 영향이 짙게 드러나며, 시에 있어서 생태시라는 명명으로 생태주의적 관점을 표현한 시가 장르화 되기도 했다.13) 특히 당시 시단에서는 생명사상이라는 표현을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이에는 김지하의 생명사상이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김지하는 80년대 중반부터 「생명의 담지자인 민중」과 같은 글에서 기존에 고수해 온 민중론을 생명사상으로 전환하는 작업을 해왔다. 또한 그는 김종철이 《녹색평론》을 처음 기획하는 데 함께 참여할 뜻을 밝히기도 했고, 《녹색평론》을 통해 글을 꾸준히 실으며 생명운동가이자 작가로 활동하는 등 90년대 문학장에서 나타나는 생태적 전환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이때 김지하의 문학론을 비롯해 90년대 문학장에서 활성화된 생태주의 문학이나 비평이 《녹색평론》의 경우에서와 같이 주로 특정한 여성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가령 김지하는 생명운동에 있어서 주부의 역할을 강조하고 이들을 문명사 전환의 주체로 호명하는 한편 그러한 운동의 흐름이 “여성성과 여성 원리에 집약”된다고 말한다.14) 또한 유성호는 당시 생태적 경향을 띠는 여성 시인들의 시의 성격을 “‘모성으로서의 자연’ 지향”으로 정리하고 “상상적 자연 친화보다는 어머니·대지·고향으로서의 ‘자연’의 근원성”을 생태 지향 시의 핵심으로 본다.15) 기실 이 여성성이란 송희복이 당시 평단에서 “자연을 모성성의 표상으로 이해하고 재인식하고 맥락화하는 데서 에코페미니즘 비평의 단초”16)를 찾을 수 있다고 한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자연과 등치된 모성성을 의미한다.
물론 남성성과 대비되며 그간 멸시되어 왔던 여성성에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문화적 페미니즘(cultural feminism)의 전형적인 전략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에 기초한 생태여성주의 이론은 기실 남성/여성의 위계적 이분법을 문제 삼지 못한다거나 모성성을 본질화하고 여성의 재생산 경험을 특권화 한다는 이유 등으로 비판받아 왔고, 90년대 한국의 생태주의 문학이나 비평에서 나타난 경향 역시 이러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은 자명해 보인다. 여성에 대한 억압과 자연에 대한 억압의 연관성을 사유하는 것이 생태여성주의 인식론의 기초적 전제라면,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모성성을 본질화하거나 윤리적·미적 상징으로 전유하는 전략의 한계를 짚지 않을 수 없다. 김혜순이 90년대 시단의 경향을 되돌아보며 유독 여성 시인에게만 가족주의나 내면주의에서 벗어난 사회적 관점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자연, 어머니 같은 부드러운 것을 일깨워야 한다는 억압이 가해졌다고 말했던 것을 상기해 본다면,17) 90년대 생태주의 문학/비평의 젠더화된 측면이 어떻게 여성들의 다양한 경험적 현실로부터 유리되거나 심지어는 억압으로 작용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90년대 생태주의 문학/비평에 대한 비판은 이러한 여성주의적 관점에 입각해 있었다기보다는 자연에 대한 관습화된 재현 방식을 문제 삼는 방식으로 주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런 비판은 물론 90년대에도 있어 왔지만, 특히 한국 문학 장에서 생태시의 창작과 이에 대한 관심의 퇴조는 2000년대 초중반 서정시의 정치성이나 미학성의 시효 만료를 주장하는 흐름의 영향으로 가속화 되었다. 일례로 김수이는 90년대에 자연이 서정의 자산으로 전유된 경향을 짚으며, 여성성과 관련해서는 서정시에서 자연이 여성과 등가화 되어 왔다는 점을 정확히 지적한다.18) 그런데 자연의 매트릭스라는 명명을 통해 당대의 서정시 일부에 대해 “문명/남성의 세계 속에서 자연/여성의 원초적 생명력을 기억하고 살아내는 일이 ‘자동화된 반복’의 상태에 들면서 시의 생산성이 떨어진 것”이라 비판하고 이 ‘자동화된 반복’이 “자연 파괴의 절정에서 위태롭게 증식하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체계”의 지배 원리에서 기인한다고 분석될 때,19) 이에는 다소 불충분한 면이 있다. 여성을 자연과 등치시키며 미학화하는 방식은 후기 자본주의의 징후일 뿐만 아니라 여성의 몸을 미적 상징으로 전유함으로써 여성의 현실과 유리되게끔 하는 효과가 있다는 점에 입각해서도 비판적으로 검토될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나아가 김수이의 입론을 일부 받아들이면서 신형철은 90년대 시의 서정성에서 벗어난 새로운 시적 경향을 뉴웨이브라 새롭게 명명하며 그중 자연이라는 가상의 이상화에 대한 비판의 논리를 다음과 같이 개진한다. 그에 따르면 생태주의적 서정은 자연을 아름답게 노래함으로써 현실을 망각하는 식의 자기 동일성의 미학에 갇혀 있다는 한계를 보인다. 대신 자연이 자아와 동일시되는 기제에 포섭되지 않을 때 “자연의 존재 그 자체가 인간적 세계의 상처를 더 선연하게 부조”하는 것으로 드러난다.20) 그의 분석이 허수경과 이성복의 시를 예로 들고 기존의 서정성에서 벗어나는 ‘시적인 것’의 출현을 설명하는 명료한 입론이었음은 부정하기 어렵지만, 여기서 자연은 개인의 윤리성을 가늠하게 하는 타자로 대치되고 만다. 또한 자기 동일성의 기제로 환원되지 않는 자연의 실체가 “인간적 세계의 상처”로 나타난다는 설명으로 이어질 때 생태주의적 서정에 대한 그의 비판은 기실 인간중심적 인식론에 입각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처럼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 서정시의 미적·정치적 효과에 대한 비판의 흐름 안에서 자연과 여성을 등치시키며 생태시의 미학이 마련된 데 대한 여성주의적 비판의 맥락은 잘 보이지 않는다. 물론 당시의 비판들이 향하는 표적이 자연을 이미지화하는 관습화된 방식에 있다고 할 때 이 관습화된 방식에는 모성성을 자연화(혹은 자연을 여성화)하는 방식도 포함되어 있었을 수 있지만, 이를 직접적으로 이야기한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은 강조될 필요가 있다. 이는 90년대 한국 문학계에 생태여성주의 이론이 활발히 유입되는 과정에서 생태여성주의가 귀착될 수 있는 본질주의적 경향에 제기된 비판도 함께 소개되었지만, 정작 문학 작품을 비평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여성의 몸이나 모성성을 생산성의 상징으로 신비화하는 독해가 지속되었던 정황과도 관련된다.21) 이러한 방식의 창작/비평의 관성으로 인해 생태시는 단지 미적 효과만을 잃어버렸던 것만이 아니라 여성의 현실과도 멀어지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묻게 된다.

4) 백낙청 김종철 외, 〈생태계의 위기와 민족민주운동의 사상〉, 《창작과비평》 18(4), 1990.
5) 1990년대 한국 시의 위상을 점검한다는 기획으로 이루어진 특집에서 이를 언급한 당대 평론으로 이광호, 〈모욕당한 달-90년대 시의 체위〉(《문학동네》 1996년 가을호)가 있다. 한편 이재복의 〈전환기로서의 90년대와 새로운 비평가치의 모색 : 탈근대주의 비평 담론을 중심으로〉(《우리말글》 34, 우리말글학회, 2005.)이나 서영표의 〈한국의 녹색담론과 사회주의〉(《진보평론》, 2009년 40호.)와 같은 글에서는 90년대에 부상한 비평 담론으로서 생태주의와 여성주의가 꼽힌다. 그런데 서영표는 여성주의와 생태주의를 90년대 초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사회주의의 현실적, 이론적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사회주의가 수용 및 재구성한 이론으로 보는데, 이에 대해서는 여성주의 및 생태주의에 관한 관심이 대두하게 된 여러 다층적 계보와 절합의 양상들을 사회주의라는 단일한 기원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는 문제를 지적할 필요가 있다.
6) 〈에코 페미니즘 – 새판 짜기의 비전과 실천〉, 《녹색평론》, 2015년 11-12월호(통권 제151호), 155면.
7) 위의 글, 171면.
8) 김미정, 〈기획의 말〉, 《문학3》, 2020년 2호(통권 제11호).
9) 이문재와의 대담에서 김종철은 《녹색평론》의 주요 독자층으로 가정주부, 시민운동 하는 사람들, 지역에서의 풀뿌리 운동가들을 꼽는다. (〈“이것은 문학이 아니다”〉, 《문학동네》 2008년 15(4)호.)
10) 국내에 주로 알려진 반다나 시바의 저서로는 마리아 미즈와의 공저인 『에코페미니즘』(손덕수·이난아 옮김, 창비, 2020.)이 있다.
11) 〈책을 내면서〉, 《녹색평론》, 1996년 7-8월호(통권 제29호), 4면.
12) 〈‘보살핌의 경제’를 위하여〉, 1998년 7-8월호(통권 제41호), 19면.
13) 당대 생태주의적 주제를 드러낸 문학 작품들은 생태시, 녹색 문학, 생명문학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려 왔지만, 이 글에서는 포괄적이고 잠정적인 의미로 생태주의적 주제로 독해될 수 있는 작품을 생태주의 문학이라 지칭하고 있음을 밝힌다. 90년대에 생태주의적 관점을 내걸었던 평론집으로는 정효구의 『우주공동체와 문학의 길』(1994), 도정일의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1995), 최동호의 『하나의 도에 이르는 시학』(1996), 남송우의 『생명시학을 위하여』(1996), 김욱동의 『문학 생태학을 위하여』(1998), 송희복의 『생명문학과 존재의 심연』(1998), 이남호의 『녹색을 위한 문학』(1998), 정효구의 『한국현대시와 자연탐구』(1998), 김경복의 『한국의 아나키즘 시와 생태학적 유토피아』(1999), 신덕룡의 『환경 위기와 생태학적 상상력』(1999) 등이 있다. 1997년에는 『초록 생명의 길: 에코토피아를 위한 시론』이라는 단행본에 신덕룡, 김종철, 장석주, 구중서, 정과리, 박희병, 고은, 천양희 등의 평론가 및 시인들의 글이 엮여 나오기도 했다.
14) 김지하, 『생명학·1』, 화남, 2003, 54면.
15) 신덕룡·유성호·김수이·이승하, 〈디지털 시대의 생태적 상상력〉, 《계간 서정시학》 2001년 11권 2호, 31-32면.
16) 송희복, 〈서정성과 생태주의 : 90년대 비평의 한 메타적 성찰〉, 《오늘의문예비평》 1999년 여름(통권 제33호), 84면.
17) 김혜순, 〈90년대의 시적 현실, 어디에 있었는가〉, 《문학동네》 1996년 가을호.
18) 김수이, 「자연의 매트릭스에 갇힌 서정시-최근 시에 나타난 ‘자연’의 문제점」, 『서정은 진화한다』, 창비, 2006, 16면.
19) 김수이, 〈자연의 매트릭스와 현실의 사막〉, 《창작과비평》 33(3), 2005.
20) 신형철, 〈문제는 서정이 아니다〉, 《문학동네》 44호, 360면.
21) 예컨대 김욱동은 『문학 생태학을 위하여』(민음사, 1998)의 한 꼭지를 서구의 ‘생태페미니즘’ 이론들을 상세히 소개하는 데 할애하는데, 여기에는 생태페미니즘이 빠질 수 있는 생물학적 본질주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의 생태페미니즘 이론들도 함께 소개된다. 그런데 그가 한국 문학 작품을 분석할 때 가령 그는 김지하의 시 「결핍」에서 “아가씨들 엉덩이”나 “작고 보드라운 젖가슴” 등으로 표현된 “둥근 것”을 순환적 세계관으로 해석하는 한편 이러한 은유를 전혀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간다. 여기서 확인되는 이론과 비평의 낙차는 이 저서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닌 듯하다.



2. 비거니즘22)


(…)
밥으로 떡을 만든다
밥으로 술을 만든다
밥으로 과자를 만든다
밥으로 사랑을 만든다 애인은 못 만든다
밥으로 힘을 쓴다 힘쓰고 나면 피로하다
밥으로 피로를 만들고 비관주의와 아카데미즘을 만든다
밥으로 빈대와 파렴치와 방범대원과 창녀를 만든다
(…)
밥은 나를 먹고 몹쓸 시대를 만들었다 밥은 나를 먹고 동정과 눈물과 능변을 만들었다, 그러나
밥은 희망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 밥이 법이기 때문이다 밥은 국법이다 오 밥이여, 어머님 젊으실 적 얼굴이여

- 이성복, 「밥에 대하여」 부분


(…)
밥으로 떡을 만든다
밥으로 술을 만든다
밥으로 과자를 만든다
밥으로 내일과 사랑을 만든다 아내도 만들 수 있다


남편이 새벽 다섯 시에도 아침밥 차려줘요
결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게다가 얼마나 맛있는지 여태까지 아빠 밥이 제일 맛있는 줄 알고 삼십 년을 살았는데 남편이 해주는 밥이 정말 맛있다
아침에 혼자 식당 가면 남편이랑 싸웠냐고 물어봅니다
(…)

- 성다영, 「밥에 대하여」 부분


성다영의 시집 『스킨스카이』23)에는 이성복의 「밥에 대하여」를 패러디한 시 「밥에 대하여」가 실려 있다. 이성복의 시는 떡과 술과 과자와 사랑을 만들고, 나아가 피로와 비관주의와 아카데미즘을, 그렇게 몹쓸 시대를 만들고 국법이 되는 ‘밥’에 대한 시이다. ‘밥’은 인간의 정치·사회적인 삶의 근간에 자리한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토대를 상징하며, 내가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밥이 나를 먹는다는 표현을 통해 그러한 밥의 행위성이 강조된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 “밥은 국법이다 오 밥이여, 어머님 젊으실 적 얼굴이여”에서는 그러한 물질적인 삶을 돌보고 관리해 온 사람들이 ‘어머님’으로 표상되는 여성들이었다는 인식이 드러난다. 이때 성다영은 같은 제목의 시 「밥에 대하여」에서 이성복의 위 시의 기본적인 소재나 구절을 가지고 오되 시적 상황을 다음과 같이 뒤집어 놓는다. 성다영의 시에서는 밥을 하는 사람이 어머니가 아니라 남편에 해당하며, 남편들이 해왔던 말을 아내의 발화(“남편이 새벽 다섯 시에도 아침밥 차려줘요/결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로 뒤바꾼다. 이 아내의 목소리는 “아빠 밥이 제일 맛있는 줄 알고 삼십 년을 살았는데 남편이 해주는 밥이 정말 맛있다”며 “아침에 혼자 식당 가면 남편이랑 싸웠냐고 물어봅니다”와 같이 남성들의 말을 따라하며 되비춘다.
이처럼 성다영의 시는 인간의 삶의 물질적인 토대를 의미하는 ‘밥’이 만들어지기까지의 노동이 기실 여성들의 몫이었다는 젠더화된 현실을 패러디한다. 그런데 이 패러디는 위의 이성복의 시뿐만 아니라 김지하의 생명사상에서도 ‘밥’이 인간 및 비인간 존재들과 얽혀 있는 삶의 물질적 토대를 표상한다는 점과 연관해 유념할 필요가 있다.24) 그에게는 “사회과학”이나 “종교” 모두 “별것 아니”며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찌개백반”(김지하, 「카농 서형」)이야말로 삶의 근간에 자리한다. 그의 생태주의적 사상은 이처럼 인간이 ‘밥’에 의존하는 존재라는 사실에 주목하며 육체/정신, 자연/문명 등의 위계적 이분법을 문제 삼아 왔다. 그런데 앞서 확인했던 바, 이러한 이분법을 해체하는 인식론이 유독 여성에 대해서는 작동하기를 멈추고 여성은 쉽게 관념화되고 상징으로 비약했던 것은 아닐까. 이는 성다영의 시에서 먹는 행위를 둘러싼 물질적 조건의 탐색이 경험적인 현실에 밀착해 여성이나 동물의 서로 다른 위치의 존재들을 연결하는 작업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과 비교해 볼 때 그 차이가 보다 선명해진다.

22) 채식주의는 동물 착취에 저항하는 동물권 운동의 주요한 실천 방법으로, 비거니즘은 채식주의를 포괄하여 동물 착취를 통해 생산된 상품을 소비하지 않는 등의 방법으로 동물 착취에 반대하는 일상적인 실천으로서의 운동을 의미한다. 관련해 진송이 「외연의 확장 혹은, -‘소수자 문학’의 당사자 재현에 대한 의혹」(웹진 비유 34호, 2020, 10.)이라는 글에서 비거니즘을 실천하는 비건이 재현된 최근의 소설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간략히 비판의 핵심적 논점을 되짚자면 이 소설들은 육식주의를 해체하는 운동으로서의 비거니즘을 취향의 문제와 뒤섞거나 어떻게 정상성과 화합할 수 있는지의 문제틀로 이동시킴으로써 탈정치화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이 글에서 비거니즘이라는 의제를 정치화할 필요성에 동의하며 성다영과 김선오의 시를 살피고자 했다.
23) 성다영, 『스킨스카이』, 근간 예정. 시집의 해설에 썼던 내용 일부를 이 글의 맥락에 맞추어 부분적으로 가져왔으며 인용 표시는 생략했음을 밝혀 둔다.
24) 김지하의 생명사상이 ‘밥’으로 압축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저서로 『밥』(솔출판사, 1995)이 있다. 김욱동은 앞의 책에서 이러한 밥 철학이 관념 철학과 대비되는 물질적 요소를 중시한다고 본다(앞의 책, 65면).


고기는 고기이기 전에 귀엽고 고기인 다음에는 맛있다 여자는 여자이기 전에 귀엽고 여자인 다음에는 맛있다/이상하지 않니?/(여기서 시작해)

- 「투명한 얼굴」 부분


성다영은 「투명한 얼굴」, 「액체로 쓴 시」, 「가상들판」 등에서 종차별주의나 성차별주의 등 사회의 지배적 규범이 이상하고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들을 포착하며, 동물에 대한 폭력과 여성에 대한 폭력이 교차하며 작동해 온 역사를 주제화한다. 개별 시에 대한 분석은 『스킨스카이』의 해설에서 이루어졌으므로 생략하겠으나, 이 시들의 문제의식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되짚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이 시들이 여성과 동물이 경험하는 억압의 교차성을 짚고 있다는 점과 다른 하나는 육식과 관련된 문제의식이다. 먼저 「액체로 쓴 시」나 「가상들판」은 전자를 잘 보여주는 시로, 젖소의 젖을 짜내는 과정에서 자행되는 폭력과 여성이 경험하는 폭력이 젖소와 여성에게서 재생산 능력을 박탈하는 성적 통제라는 점에서 유사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성차별주의와 종차별주의, 인간중심주의, 자본주의, 이성애중심주의가 교차하는 권력관계 안에서 여성과 동물은 ‘먹히고’ ‘강간당하고’ ‘팔리는’ 존재로 위치 지어진다.25)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성다영의 시에서 두 번째 문제의식으로 이어지는데, 가령 화자는 “젖과 피와 땀과 상처에서 흐르는 진물이 뒤섞여 하얗게 흘”러 내리는 것을 “우유”라 부르며 먹는 일이 이상하지 않은지 묻는다(「액체로 쓴 시」). 식탁 위에 놓인 ‘고기’가 고기이기 이전에 “귀엽다”고 불린 동물이었다고 한다면, ‘고기’에는 그러한 동물이 착취당하고 도축을 당한 공정 과정이 은폐되어 있다면 어떨까. 성다영이 「밥에 대하여」에서 한 끼의 식사가 차려지기까지 관여된 성차별적인 현실을 환기했다면, 이 시들은 식사에 동물에 대한 폭력이 연결되어 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도록 만든다. 그리고 이는 성다영의 시에서 “감바스 없는 감바스 알 아히요”나 “꿍 없는 똠양꿍” “타코 없는 타코야키”처럼 “완벽”해 보이는 “이름”이지만 그 동물성 주재료인 감바스(새우), 꿍(새우), 타코(문어)가 빠진 음식에 대한 서술(「신명기新命記」)에서처럼 육식의 원본성을 해체하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관련해 김선오의 시집 『나이트 사커』26)에서 「비와 고기」, 「냉동육」, 「미디엄 레어」 등의 시에서 육식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이 어떻게 인간과 동물의 위계를 허무는 시도로 이어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김선오의 시에서 고기는 인간에게 먹히기를 기다리는 죽은 사물이 아니다. “고기는 우산을 들고 걷”고 “발을 끌며” “부양해야 할 식구들”을 향해 가며 살아 움직인다(「비와 고기」). 부양해야 할 식구 중 한 명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케이크와 우산을 들고 귀가하는 “고기”의 모습은 여느 인간의 모습과 다름없지만, 이 시가 고기를 인간처럼 묘사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앞서 서이제의 소설에서 보았듯 의인화라는 수사법은 기실 인간중심성의 한계를 노정한다는 감각이 여기에도 스며 있다. 대신 이 시는 이 살아 움직이는 “고기”의 물성과 행위성을 드러내면서(“고기가 흘린 핏물이 하수구로 줄줄 빨려 들어간다”), 동시에 인간도 “고기”라는 단순하지만 쉬이 망각되었던 사실을 감각하게 만든다. 나아가 우산을 들고 걷는 “고기”와 그 고기를 보는 (인간인) “그”를 구분하는 경계는 시의 후반부의 “고기는 고기의 몫을 하려고 한 손에는 케이크를 다른 손에는 우산을 들고/그는 차를 마신다 느리게 걷는 고기를/케이크 상자에 매달린 작은 폭죽이 들썩이는 모습을 바라보면서”라는 문장에서 무화되기에 이른다. “그는 차를 마신다 느리게 걷는 고기를”이라는 행에서의 ‘그’는 앞 행에서의 ‘고기’를 받는 대명사로도 읽히는데, 이 경우 이 문장은 이 고기가 “느리게 걷는 고기” 즉 자기 자신을 먹는다는 문장을 의미하게 되기 때문이다.
「냉동육」과 「미디엄 레어」는 고기를 먹는 나와 고기로서 먹히는 나 사이의 이러한 혼동을 형상화한다. “꿈속에서 나는 하나의 거대한 살점”으로 “칼이 나의 단면을 훑고 지나가”지만 실은 “꿈속에서 나는 칼”이기도 하고 이런 ‘나’는 냉동실로 향하며 “팔을 들어 고기를 꺼낸다”(「냉동육」). 혹은 허공의 손들이 “내 몸에 박힌 수십 개의 이빨을 빼내려고 애쓰”고, “발등에 박힌 것을 빼낼 때에는 거의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이 이빨은 “내 입속에 보관”되고 “입안”에서는 “은 식기 부딪치는 소리가 난다”(「미디엄 레어」). 이러한 혼동에는 어떠한 카니발리즘적인 쾌락도 없다. 다만 먹는 ‘나’가 먹히는 고기로서의 ‘나’와 다를 바 없다는 서늘한 진실이 형상화할 뿐이다. 이 시집의 부록에서 시인은 ‘고기’의 경우와 같이 “식재료가 되기 이전과 이후의 이름을 굳이 다르게 부르는 경우가 있던가” 물으며 “고기를 먹는다”는 문장에는 “오로지 먹기 위해 동물을 탄생시키고 고통 속에 살게 하다 죽인 뒤 가공하는 과정 모두가 은폐”되어 있다며, “고기에는 동물이 부재한다”고 쓴다. 김선오의 시는 날카로운 칼이 몸을 베어 오는 감각으로 이 부재하는 동물을 드러낸다. ‘나’의 살성, 즉 나 역시 고기와 다르지 않은 몸으로 이루어진 존재임을 드러냄으로써 말이다.
이처럼 성다영과 김선오의 시는 한 끼의 식사에도 사회의 지배적 규범과 여성이나 동물에 대한 억압이 얽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감각하고 이에 대해 사유해 보도록 만든다.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것은 정말 자연과 유사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기실 인간이 만들어 온 규범을 거스르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식사가 종차별주의 및 성차별주의를 강화하는 데 일조해 왔다고 한다면, “동물이 고기로 태어나지 않듯이/나는 누구로 태어나지 않았다”(성다영, 「두 번째 피부」)와 같은 선언에서 드러나듯 동물을 폭력과 착취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는 일과 여성을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는 일은 무관한 과제가 아닐 것이다. 이들의 문학은 대지의 여신을 찬미하기보다 대지와 여성, 인간, 동물이 어떻게 교차하고 관계 맺고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앎과 감각으로 쓰이고 있다.

25) 캐럴 애덤스는 『육식의 성정치』에서 육식 문화가 어떻게 여성과 동물의 몸과 노동력을 착취함으로써 이득을 취하는 가부장적 자본주의 체제와 공모했는지 주장한 바 있다. 섹슈얼리티와 재생산에 대한 통제를 중심으로 가부장제, 자본주의, 인종차별주의, 종차별주의, 이성애중심주의 등이 서로 맞물려 작동하는 양상을 살핀 황주영의 글 역시 성다영의 시를 생태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한우리·김보명·나영·황주영, 『교차성x페미니즘』, 도서출판 여이연, 2018, 140-187면.)
26) 김선오, 『나이트사커』, 아침달, 2020.



3. 시의 수행


비거니즘은 평등을 위한 실천이다. 윤리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함이 아니다. 또한 비건은 무언가에 도달하여 달성한 상태가 아니다.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으로 쉽게 정의되지만, 나는 시인인가? 시인은 단지 시를 쓰는 사람인가? 라고 질문을 던지면 대답하기 어려워진다. 비건도 마찬가지다. 비건의 뜻은 사전을 찾아보면 쉽게 알 수 있지만, 나는 내가 이미 비건이라고 여기고 있을 때에도 내가 정말 비건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면 명쾌하게 대답할 수 없다. 완벽한 비건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비건은 비건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27)


성다영의 위의 글은 비건이 자주 직면하는 오해들을 상기시킨다(위에 인용한 대목에 비건이라는 단어 대신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넣어도 자연스럽다). 스스로를 비건이라 밝히는 일이 윤리적 우위를 확보하려는 것이 아니냐거나, 비건이면 동물성 식품을 정말 아무것도 먹지 않고 동물성 제품을 전혀 사용하지 않느냐는 식의 의도가 선명한 질문들. 이러한 질문들은 보통 완벽하게 비건으로서 사는 일의 어려움을 비건으로서의 실천에 흠집을 내고 비거니즘 운동의 의미를 폄훼하는 의도로 발화된다. 이러한 비아냥거림에 스스로를 방어하고 싶어지다가도 성다영은 자신의 글로 인해 “비건을 지향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생길지 모르”기에 자기변명 대신 자신이 어떻게 비거니즘을 실천하게 되었고 실천하고 있는지에 관한 구체적인 경험들을 쓴다. 나는 특히 비거니즘에 있어서 비거니즘과 관련된 경험을 발화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은데, 그 까닭은 이러한 경험들의 나눔이 서로를 정동하고 경험의 연쇄를 낳는 주된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28)
이러한 맥락에서 안태운의 「집에서 시퀀스를 연습하세요」(『산책하는 사람에게』, 2020)라는 시에 나온 “나는 무슨 연습을 해볼 수 있을까 (…) 선풍기를 연습해봐야지/생태 시를/제로 웨이스트를/도마를 연습해봐야지/우리의 환경에 대해서/시계를 연습해봐야지/시퀀스를”이라는 구절을 떠올려 본다. 나는 이전에 쓴 글에서 이 시를 비롯해 같은 시집의 마지막 글인 「묘사 계절풍경」에 주목한 일이 있다. 「묘사 계절풍경」에서 시인은 세월호 추모 낭독회(“마침 오후 4시 16분으로 시간은 흐르고 있었으니까”)에 모여 낭독을 하고 흩어지는 사람들을 보며 “그렇게 수행하고 기억하고 모였다가 흩어지면서 남겨둘 건 남겨둠으로써 집으로 향하고 있”다며 썼다. 이 두 작품에서 시인은 반복적인 수행과 연습을 강조한다. 그 수행과 연습의 “시퀀스”가 “끝”이 있는 것일지라도 “하지만 돌이켜보자”고,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자연과 세계에 대해” 돌이켜보자고 말한다. “그래 인상 쓰지 말고/그게 중요합니다”라고. 이런 목소리는 성다영의 글과 마찬가지로 어떤 완벽한 이상과 이념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닌 일상적인 수행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읽힌다.
버틀러적인 의미에서 사회의 지배적 규범이 일상적인 수행의 반복을 통해 굳혀지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라면, 이 반복에는 언제나 동일하게 반복되지 않는 실패가 내장되어 있고 이 실패의 가능성으로 인해 특정한 수행이 다른 맥락으로 연결되며 기존의 규범에서 벗어나는 변화가 생겨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가 잘못한 것들을 바로잡기 위한 반복적인 수행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안태운의 시에서 나는 시의 수행이라고 명명할 법한 어떤 새로운 변화를 느꼈던 것 같다. 물론 새롭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가령 용산 참사, 4대강 사업, 세월호 참사, 촛불 혁명, 강남역 살인사건, 문단 내 성폭력 등의 사건에 대해 작가들이 직접 목소리를 내고 모여 행동할 때 낭독은 시가 할 수 있는 수행의 방법이자 독자들과 연결되는 주된 방법이 되어 왔다. 그러므로 이 새로움은 안태운 시의 새로움이라기보다 변화된 매체 환경 안에서 문학을 쓰고 읽는 방식의 변화를 표시하는 것이라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한 편의 시는 한 시인의 내면의 투사물로 읽힐 수도 있고, 잘 짜인 언어적 조형물이나 모종의 실험적 텍스트로 읽힐 수도 있을 것이지만, 동시에 시는 함께 모이게 만들기도 한다. 모여서 한 편의 시를 말하고 듣는 그 자리에서 우발적인 변화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최근 안태운은 「생물 종 다양성 낭독용 시」(《현대시》 5월호)를 발표했다.

27) 성다영, 「생명 하나 생명 둘 생명 셋」, 『문학3』 2020년 2호.
28) 물론 이 나눔이 일으키는 정동은 비인간 동물과의 윤리적인 관계 맺기를 위한 긍정적인 실천으로만 이어지지는 않는다. 채식주의에 대한 주장은 누군가에게는 쉽게 불쾌함을 일으키고 비꼼이나 모욕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에 정동 및 미학 교육에 초점을 맞추어 동물권 운동이 긍정적인 정동을 일으킬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숙고해야 한다는 백종륜의 주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백종륜의 「채식의 정동정치 – 디엑스이서울의 ‘방해시위’를 통한 새로운 동물권 운동 전략의 모색」(한국문화연구학회, 문화연구 8(1), 2020.)


이제부터 생물 종 다양성에 대해서 살아갈 것이다,
라고 나는 오늘 다짐했다
거울 속 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내 얼굴과 나뿐 아닌 인간 얼굴의 여러 가지 면을 떠올려 보다가도, 아니 아니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
생물 종 다양성에 대해서
하지만 어떻게?
내 삶 공간에서 어떻게?
(…)
랩스 청개구리(Ecnomiohyla rabborum)
브램블 케이 멜로미스(Melomys rubicola)
포오울리(Melamprosops phaeosoma)
크리스마스섬집박쥐(Pipistrellus murrayi)
콰가(Equus quagga quagga)
세실부전나비(Glaucopsyche xerces)
스텔러바다소(Hydrodamalis gigas)
타이완구름표범(Neofelis nebulosa brachyura)
……
인간의 언어로
(…)
기만적입니까,
라고 의식했습니다만
인간이므로
인간으로서
인간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였지만
인간 때문에 동식물이 자연도태보다 500배나 빠르게 절멸되고 있다,
2010년대에만 467종이 절멸되었다,
라고 지구에서는 내내 보도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나요
(…)
지구에 최대한 해를 덜 끼치려고 노력하면서
조금이라도 쓰임과 효용이 되고 싶었는데
내 시간과 공간에서
한반도에서 내 몸과 마음에서
가끔 무언가를 끼적이는 사람이므로 해볼 수 있는 게 있을지
끼적인 걸 낭독해 보며
낭독용 시를 써보며
해볼 수도 있을까
낭독해 볼게
낭독해 보자
생물 종 다양성에 대해서
(…)


이 시는 “생물 종 다양성에 대해서 살아갈 것”이라 분명하게 선언하며 시작하지만, 프로파간다라 보기에 이 말은 나의 다짐에 불과한 듯 “거울 속 나의 얼굴”을 향해 던져진다. 이미 지구에 엄청난 해를 입혀 오고 동식물을 절멸시키는 속도를 가속화 해 온 인간으로서 “생물 종 다양성”을 위해 사는 일은 어쩐지 기만적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안태운은 「집에서 시퀀스를 연습하세요」에서의 ‘연습’이라는 행위처럼, “내 시간과 공간에서” “한반도에서 내 몸과 마음에서” 지구에 “조금이라도 쓰임과 효용”이 될 수 있는 실천을 하고자 하고, 이는 「생물 종 다양성 낭독용 시」에서처럼 생물 종 다양성 낭독용 시를 쓰고 시를 낭독하는 행위로 이어진다. 그리고 낭독은 언제나 누군가를 향해 발화된다. 그의 시는 세상은 이미 망해 가고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비관론에 반대하며,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가 마치 문학의 최소한의 윤리인 양 여겨 온 입장들에 반대하며, 자신이 자리한 이 시간과 공간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차라리 나에게는 이러한 수행이 최소한의 윤리이자 이 시대에 필요한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실천의 출발점으로 보인다.












김보경
작가소개 / 김보경

문학평론가.


《문장웹진 2021년 8월호》


김보경

추천 콘텐츠

혁명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혁명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386세대와 패배하지 못한 혁명들의 시차 임세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퇴근 후에 넥타이를 존나 풀고 찾아와 옛 추억에 잠겨 노래 한 곡 워어어어 케케묵은 노래들을 불러대며 울어대네 아름다운 젊음이여 흘러간 내 청춘이여 너희들이 정녕 민주화를 아느냐 이 손으로 일군 민주주의 대한민국 요즘 어린 것들은 몰라도 한참 몰라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투쟁도 혁명도 이제는 모두 봄날의 꿈 그리웠던 혁명동지 돈을 꾸러 찾아왔네 골프채로 쫓아내니 마음속이 허전해 내일은 미스 김의 보지 냄새 맡아야지 밤섬해적단, 〈386 Sucks〉, 《서울불바다》, 2010. 1. 중단된 혁명 이제는 진부한 제재처럼 감각되는 ‘후일담’의 환멸과 자조 이후 한국 문학에서의 386세대 재현은 익숙하지만 낯선 ‘진정성’의 풍광들을 펼쳐 보인다. 이른바 ‘포스트-진정성 체제’1)에서의 속물들의 세계상은 기실 그 문제적 주체로 호명되었던 386세대뿐만 아니라, 386세대에 의해 다시 지목당한 ‘20대 개새끼론’의 대상이었던 ‘88만원 세대’에게도 벗어내기 힘든 혐의였다. IMF 이후 가속화된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서 20대 빈곤의 원인이 세대 간 착취에 있다는 통찰 가운데 던져진 “토플책을 덮고 바리게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2)라는 조언을 (귓등으로) ‘학습’했던 새 세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이었고, 어디로 향하였는가. 타 세대에 의한 명명 대신 “나는 씨발 존나 멋진 이십대 청춘”3)이라며 타락한 386의 ‘흘러간 청춘’을 조소하던 20대는 어느덧 MZ세대의 선봉으로 싸잡아 묶여진 채 40대의 문턱을 넘고 있다. ‘민주화’라는 ‘명분’ 위에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모두 쟁취한 것처럼 조롱되는 386세대에 대한 냉소는 오늘날 “운동권 특권 정치를 청산하라는 강력한 시대정신”4)을 따르겠다는 한동훈 전 국민의 힘 비대위원장의 취임사로 구현되며 동세대 정치인들의 반발과 분노를 유발하기도 했다.5)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본다면 386세대가 이룩한 ‘민주화/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오염되고 폄훼의 대상이 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민주화 시키다’라는 표현은 386세대에 대한 비판이 본격화되었던 201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강제로 억압하다’는 조소의 뜻을 지닌 채 활용되었다. 입으로는 ‘케케묵은’ 투쟁의 추억을 타령하며 실제 삶에서는 동지를 배신하고 돈과 섹스의 욕망을 좇는 운동권 세대를 저격한 〈386 Sucks〉의 면면은 새로울 것도 없는 386의 전형(stereotype)을 노래한다. 그런데 이 오래된 냉소의 역학 속에서 눈

  • 관리자
  • 2024-07-01
오염, 오류, 오독

오염, 오류, 오독 - 소설이 수행하는 ‘다시’ 황유지 마들렌을 먹으며 과자 부스러기와 차 한 모금이 어우러진 달콤한 환기 속에서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일은 마르셀에게 행복을 준다. 그러나 발벡의 호텔방에서 신발을 벗으려다 문득, 할머니가 신을 벗겨 주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은 그에게 행복감을 주지 않는다. 죽은 할머니를 떠올리는 일, 그것은 “고통스러운 소멸”을 확인시킬 뿐이다.1)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이 일화는 과거를 부르는 일이 각기 다른 정서를 환기함에 대한 예시로 내밀어지며 ‘기억’에 착종되는 다양한 감정이 주체를 어떻게 흔들 수 있는지 넌지시 묻는다. 소멸의 확인도 그렇지만 미완, 불완전, 불만족인 채로 내버려둔 사건에 대한 기억의 소환 역시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인데, 그건 엄연히 그 일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라 모종의 감정적 자원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에서 이런 ‘다시’는 레트로로 나타난다. Retrospect, ‘추억’에 뿌리를 둔 이 말은 패션, 음악, 영상부터 먹거리, 금융상품에 이르기까지 그 반경을 확대하며 과거로 우리의 기억을 끌고 간다. 과거의 소환은 이 사회에 대한 일종의 환각제이자 자본주의라는 무한한 기계적 힘에 대한 제동, 그 중단의 본능적 발현이다. 이런 레트로는 과거에 대한 향수, 노스탤지어의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 고대인들에게 노스탤지어란 ‘되돌아가는 일(nostos)’을 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아픔(algos)’으로 이해된다. 그러니까 레트로는 돌아갈 수 없는(가본 적도 없는) 시절을 향한 자본주의적 환각제이다. 프루스트의 위대한 주제가 사물들을 처음 경험할 때의 무능력이라 파악하는 프레드릭 제임슨은 진정한 경험이 우리가 의식적으로 다른 것을 의도하는 동안, ‘눈가’를 통해 온다면서 그 가능성을 글쓰기에서 찾는다. 기어이 돈을 주고라도 사겠다는 환각성 추억과는 달리 기억을 통한 글쓰기는 상실한 것을 복원하려는 고도의 정신 작업이랄 수 있다. At the corner of eye, 거기가 바로 진정한 경험이 되돌아오는 자리로 가장 의도적인 두 번째 경험, 글쓰기는 그 형식이 된다. 2) 글쓰기는 행해짐과 동시에 복수의 행위자를 탄생시킨다. 쓰는 자와 읽는 자,3) 이는 시차(時差)와 함께 탄생하며 텍스트가 현실과 맞닿은(혹은 결별한) 그 부위에 필연적으로 틈을 만든다. 대체로 모든 문제는 이 ‘틈’에서 태어나는 것처럼도 보인다. 틈은 이미 분리, 분절된 것으로 존재하면서 거기에 무엇을 메우든 결코 원본의 형태를 완벽히 구현할 수 없다. 원본처럼 복원한 것조차 복사본일 따름이라 틈은 그 자체 오류가 되는 것이다(가령 원본이 틀린 것이라 할 때도 제대로 수정된 본은 오류가 된다. 틀린 원본에 대해 기어이 맞추어진 진실

  • 관리자
  • 2024-07-01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이소 1. 스무 살을 훌쩍 넘어 성인이 되어도 자신을 어른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뉴스를 보면 언제나 피해자의 억울함에 몰입하고, 많은 경우 나를 포함하지 않은 채 ‘어른들’에게 분노를 터트리는 사람. 2014년 4월 16일, 이 날 나는 처음으로 어른의 자리에서 사건을 경험했다. 아이의 자리가 아닌 해운회사의 직원이나 공무원이나 인솔 교사의 자리에 서 있었다. 항해사나 해경보다 교사인 나를 떠올리기가 더 쉬웠다. 누구나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기억이 있으니까. 나는 전문가를 깊이 신뢰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내가 그 배에 탔다면 안내 방송을 충실히 따르며 어른들과 시스템을 믿으라고 아이들을 다독였으리라는 걸 알았다. 누가 보아도 나는 완벽히 어른이었다. 굳이 괴로웠다는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그때는 모두가 괴로웠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다음해 문학을 전공하러 대학원에 들어갔다. 누군가 공부라는 게 어떤 실천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런 답변도 떠올릴 수 없다. 나부터가 그런 희망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전처럼 살 수 없을 뿐이었다. 나는 어른이었고,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수습될 수 있는 사고가 아니라 소화할 수 없는 사건이었으며, 내게는 더 정확한 언어가 필요했다. 딱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었다. 2. 지금도 교사인 나를 상상해 본다. 항해사나 해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교사라는 직업과 위치가 내게 어른이란 무엇인지 사고실험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과 달리 미성년인 학생들을 상대하는 교사는 흔히 이중적인 이미지로 재현된다. 전교조와 교총을 교대로 인터뷰하는 기사의 관례처럼, 전통을 수호하는 보수적인 교사와 변화를 추동하는 진보적인 교사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그려지는 건 흔한 일이다. 제도가 부여한 의무와 규범을 학생들에게 어디까지 얼마만큼 요구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한 명의 교사를 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지만, 이 경우에도 그의 심리적 갈등은 그의 교육방식에 딴지를 걸 더 완고한 교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전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코 전위적인 존재에 도달할 순 없지만, 마땅히 후위의 역할은 초과해야 하는 사람. 그러나 생각해 보면 교사만 그럴 리는 없다. 모든 직업은 사회가 요구하는 허용범위 안에서 가까스로 변주를 시도하고, 모든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며 유사한 딜레마에 빠진다. 교사는 자신의 의무를 익히 아는 어른의 상징이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점점 학생보다 교사에게 더 쉽게 이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문제는 오래되고 흔한 방식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현이 더는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데 있을 것이다. 어차피 시대가 변한 줄 모르는 늙은 교사들은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없다. 보수적인 교사와 진보적인 교사의 대립은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갈등을 통해 사회를 혁신하는 재생산 메커니즘

  • 관리자
  • 2024-07-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