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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열렸던 시간들을 위해 2

  • 작성일 2023-02-01
  • 조회수 1,471

[비평연재]

2023년 비평연재는 두 명의 평론가가 3회씩 연재하며, ‘시대와 작품을 가로지르는 비평가의 눈’이라는 주제로 보다 확장된 문제의식을 펼쳐 보인다.





미래가 열렸던 시간들을 위해 2




양재훈




‘통합’을 다시 생각하기


문학가동맹의 민족문학론에는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를 주는 대목이 한 가지 더 있다. 그들이 당대에 민족문학을 과제로 내세웠던 이유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다. 이들에게 민족은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는 혈연 집단이 아니었다. 민족의 기반에 있는 민족체(Nationality)의 존재 여부와 별개로, 그것이 근대적 정치체제로서의 국가를 안 받치는 이념이라는 점이 중요했다. 언어, 혈연, 문화, 지리, 정치, 경제 등의 공통성을 바탕으로 형성되어 있던 중세적 민족체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민족에 미달하는 집단이다. 장차 민족으로 발전할 예비적 집단이 존재해 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근대적 국민국가 체제의 바탕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공동체로 거듭나야만 민족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족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이제 상식이 되어 있다. 혈통이라든가 장기간 같은 지리적 조건에서 형성된 공통생활문화를 공유하는 운명공동체라는 식의 관점은 민족에 대한 통속적 관념으로 기각된다. 근대적 합리성의 세례를 받은 우리는 합리성의 시련을 견뎌내지 못하는 관념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민족이라는 이념에 달라붙어 있는 그러한 상상적 허구가 현실에서 발휘하는 힘은 결코 약하지 않다. 예컨대 정치인들은 결코 국가/민족 구성원의 분열이나 분할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사회 통합을 외친다. 내면에 품은 생각이 무엇이건 간에 그들이 통합을 외칠 수밖에 없는 것은 분열이라는 기표를 통해 유권자의 동의를 얻어내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이미 국가/민족 단위 내에서의 통합을 당연히 달성해야 할 이상적인 상태로 설정하고 있다. 민족은 하나(여야 한)다. 민족의 분열은 극복해야 할 이상 상태다.
국가나 민족과 같은 거대하고 추상적인 관념보다 자기 삶의 구체적 국면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에 훨씬 더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도 올림픽이나 월드컵 시즌을 맞으면 느닷없이 애국자가 되곤 한다. 이때만은 서로를 무한히 적대하는 정치적 대립 따위도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유년 시절 나는 그러한 국제대회들에서 자국 대표선수단을 응원하는 일에 의구심을 품었던 적이 있다. 내가 아홉 살이던 시절에 열린 올림픽에서였는데, 내가 우리나라를 응원하며 우리나라의 승리에 기뻐하고 패배를 안타까워한다면, 다른 나라 사람들도 그러하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느 선수단은 이기고 어느 선수단은 지며, 그것이 나 자신의 승부도 아니고 나의 직접적 이해관계와도 무관한데 어째서 누군가의 안타까움을 대가로 기쁨을 얻는 것이 가능한가? 이후 나는 올림픽이나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대표선수들이 거두는 성적이나 경기 등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국가대표를 응원할 마음이 생긴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으니, 내가 국제 스포츠에서 민족적 교감에 참여한 기간은 매우 짧았던 셈이다. 물론 승패와 무관하게 일종의 축제로서 그것을 즐길 수 있으며, 응원 역시 그러한 즐거움을 구성하는 요소임을 모르던 때의 이야기다. 하지만 저 의구심 자체는 유효하다. 왜 국제 스포츠대회의 응원은 항상 자국 대표를 향하는가? 이 단순한 의문만으로도 그러한 교감을 부르는 자연스러운 감각이 실은 자연화된 감각임이 드러난다.
우리는 민족을 믿지 않지만 우리의 행동은 믿음을 지니고 있다. 지젝은 여러 차례 믿음의 자리는 의식이 아니라 행동임을 역설한 바 있다. 그러한 ‘믿음의 행위’가 그 믿음의 대상이 되는 관념의 실효성을 지속시킨다. 지젝이 든 예는 화폐의 효과다. 우리는 모두 화폐가 물신의 권능을 지닌 특별한 사물이 아니라 단지 특정한 방식으로 주조되거나 인쇄된 금속 또는 종이에 불과함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이 그 자체로 가치를 체현하고 있는 사물인 것처럼 행동한다. 우리가 화폐의 가치를 믿는 듯한 행동을 중단한다면 화폐는 곧장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화폐의 효과를 지속시키는 것은 우리의 행동에 담긴 믿음이다.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우리는 스스로 더 이상 민족을 믿지 않는다고 여기지만 실은 그것을 믿는 것처럼 행동하며, 그러한 무의식적 믿음을 통해 민족의 효력을 지속시키는 데 참여하고 있다. 지난 20-30여 년 동안 민족에 대한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되었음에도 민족이 끈질기게 살아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당장 ‘통일’의 당위성에 대한 관념부터가 그렇다. 분단의 대안이 왜 통일이어야 할까? 더욱 급진적인 분리를 통한 완전한 타국으로서의 각자 인정이나 그를 통한 평화 체제의 수립 같은 것은 불가능할까?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민족에 대한 믿음은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요인 중 하나다.
이런 의문을 지니고 읽어 보면 문학가동맹의 민족문학론은 충격적인 대목을 보여준다. 그들이 주장하는 민족은 분열을 극복하고 혈통, 지리, 언어, 문화 등의 공통성을 바탕으로 이미 형성되어 있는 기원적 통일을 회복하고자 하는 이념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히려 민족 발생의 계기에 민족체의 분열이 있다고 보았다. 이는 문학가동맹이 사회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결집한 단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적 유물론의 가르침에 따라 역사의 발전이 계급투쟁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여겼고, 중세에서 근대로의 역사 발전을 대표하는 민족국가의 발생 역시 민족체 내부에서 발생한 계급투쟁에 따른 것이라 보았다. 그들에게 민족은 근대적 세계체제를 구획하는 정치체인 민족국가를 구성하는 원리였다. 이는 민족이 중세에서 근대로의 역사 진행을 낳은 이념이며, 근대 이행의 기저에 있는 계급투쟁의 결과물임을 뜻하는 것이었다. 중세적 신분제를 파괴하고 신분에 의해 나뉘어 있던 민족체의 다양한 구성요소들을 평등한 민주주의적 개인들로 해체・재구성하는 것이 민족이라면, 민족은 신분에 따른 민족체의 내적 분할이 가시화되고 문제시될 때 비로소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민족의 통일은 조화로운 공존이 아니라 분열의 드러남과 투쟁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민족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작동하는 변증법은 처음의 유기적 공동체가 분열되고, 그것이 다시 하나로 통합되는 과정이다. 그러나 통합은 최초의 유기적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돌이킬 수 없이 파괴하는 방식으로 행해진다. 그리하여 민족 형성이 완결된 사회는 유기적인 하나의 공동체 내에서 각자가 제자리를 갖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러한 유기적 일원성이 파괴된 장소에서 각자가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제자리를 찾아야 하는 공간, 다시 말해 개인이 공동체와 통합되어 있는 사회가 아니라 반대로 모든 구성원이 공동체와 분리된 단독적 개인으로서 사회 구성에 참여해야 하는 근대적 시민사회가 된다. 구성원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져 있는 자기 자리를 확보하고 있는 유기적인 중세적 공동체가 파괴된 자리에서,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민족의 공통적 역사라는 관념은 유기적 통합이 불가능해진 사회를 보충하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 그럼으로써 그것은 해당 사회를 다시 통합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민족은 한 사회의 분열을 통해 성장하며, 그 사회를 유기적으로 통합하고 있던 원리가 파괴된 자리에서 다시 사회를 통합하는 기능을 한다. 통합의 기표인 민족은 분열과 비유기성을 조건으로 한다는 역설을 내장하고 있다. 민족은 민족체가 공동운명체라는 외관 아래 은폐하고 있던 내부의 분열을 가시화한다. 요컨대 민족 형성의 제일 원리는 통합이 아니라 분열이다.
민족의 이념은 민족체가 공동운명체라는 외관 아래 은폐하고 있던 내부의 분열에서 싹튼다. 요컨대 민족 형성의 제일 원리는 통합이 아니라 분열이다. 분열된 민족체를 재통합하는 민족의 이념은 각 부분들 사이의 평화로운 공존을 도모하는 중립적 이념이 아니다. 신분제의 모순이 드러남으로써 분열된 부분들 사이의 평화로운 공존은 신분적 질서의 지속을 의미할 뿐이기 때문이다. 통합은 오직 분열과 투쟁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그것은 철저히 신분제에 의해 사회체 내의 비주체로 격하되어 있던 피지배계급의 입장에 종속되어 있다. 민족이란 오직 자신들 역시 지배계급과 동등한 지위를 획득하여 사회체 내의 평등한 구성원으로 대우받기를 원하는 피지배계급의 이념일 수 있을 뿐이다. 민족은 분열된 구성요소들 사이에서 어느 한쪽의 입장만 긍정하는 편파적인 이념이다.
문학가동맹의 민족문학론에는 이러한 전제가 깔려 있다. 그들이 민족을 소수의 진보적 부르주아지와 노동자, 농민, 중간층의 연합을 근거로 사유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조건 위에서였다. 민족은 중세의 신분적 질서 속에서 사회체 내의 비주체로 격하되어 있던 피지배계급이 스스로의 존엄을 위해 지배계급에 대항해 투쟁함으로써 형성되는 집단 주체라는 것이 민족에 대한 이들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당대 민족 형성의 준거가 진보적 부르주아, 노동자, 농민, 중간층으로 설정된 것은 말하자면 그것이 일제의 식민 지배를 거쳐 형성된 당대 조선의 피지배층에 해당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임화는 “민족은 폐왕도 아니요, 자본가도 아니요, 지주도 아니요, 어느 외국관서의 속리도 아니”1) 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그가 당대 민족체 내부에서 민족을 형성하기 위한 분할선이 어디에 그어져 있다고 여겼는지 알게 한다. 해방 직후 문학가동맹에게 민족은 폐왕, 자본가, 지주, 외국관서의 속리 등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진보적 부르주아지와 노동자, 농민, 중간층의 연합을 통해 형성되어야 할 집단 주체였다. 문학가동맹이 당대의 과제로 설정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그러한 민족의 형성과 그에 따른 사회의 변혁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민족문학론은 그 변혁을 담당해야 할 주체인 민족의 형성에 기여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오랜 역사 속에서의 연속성을 바탕으로 외부와의 차이를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역사적 불연속성과 내부적 분열을 통해 형성되는 민족의 개념은 현재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 우리 사회는 심각한 계층, 성별, 세대 및 정치 진영 간 분열과 갈등에 처해 있다. 통합이 과제로 주어져 있지만 문제는 어떤 통합이냐에 있다. 반세기도 전에 문학가동맹이 주장했던 민족 개념은 분열의 극복이 단순한 중재나 반대 진영 사이의 평화로운 공존 따위와 거리가 멀다는 판단을 담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 중 하나인 분열의 극복이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대해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1) 임화, 「민족문학의 이념과 문학운동의 사상적 통일을 위하여」, 『임화문학전집』5, 소명출판, 2009, 459면.


과거의 실패들을 되살리기


더욱 중요한 것은 문학가동맹 민족문학론이 민족을 미해결 과제로서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해방 직후의 혼란 속에서 문학가동맹이 당대 조선의 최우선과제로서 민족을 내세운 것은 그것이 과거로부터 시도되어 왔으나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제라는 판단에서였다. 이는 이른바 ‘창조론적 유물론’이라는 관점을 통해 조명할 때 그 의미가 드러난다. 창조론적 유물론은 지젝의 용어로, 그가 사적 유물론의 목적론적 해석을 비판하며 제시한 개념이다. 그는 목적론적으로 해석된 사적 유물론을 ‘진화론적 관념론’이라 부르며 자신이 ‘창조론적 유물론’이라 부른 관점과 대조했다.2)
문학가동맹은 당대의 여타 국내외 사회주의 세력들과 마찬가지로 사적 유물론에 따른 객관적 역사발전법칙의 과학성과 필연성을 믿고 있었다. 사적 유물론은 세계의 역사가 생산력의 증대에 따라 생산관계가 진화하는 방식으로 발전한다고 이해한다. 사적 유물론은 이러한 역사발전법칙에 따라 세계가 원시 공산주의 – 고대 노예제 – 중세 봉건제를 거쳐 근대 자본주의로 이행해 왔으며,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서 발생하는 모순에 따라 이후 세계의 역사는 사회주의를 거쳐 인류 역사의 최후 단계인 공산주의를 향해 나아갈 것이라고 보았다. 이와 같은 목적론적 관점에서 당대의 사회주의 세력은 당대 조선의 상황을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과정에 있는 것으로 파악했으며, 그에 따라 조선 역사를 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가는 과도기적 과정으로 설정했다. 이때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주체인 민족은 서구가 이룩한 것과 같은 근대성에 도달하고자 하는 프로그램에 속한 것으로 격하되곤 했다. 문학가동맹을 우경화된 집단으로 평가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측은 문학가동맹의 민족문학론을 사회주의라는 더욱 근본적인 목표를 몰각한 프로그램으로 비판한 바 있다.
목적론적으로 파악된 사적 유물론은 역사 진행의 경로를 단순화하고 획일적인 미래상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오류를 내포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역사는 객관적인 역사적 합법칙성이라는 대타자에 의해 그 성공이 보장된 과정으로 규정되며, 그럼으로써 그러한 과정에 참여하는 주체들은 모두 대타자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의 지위로 격하된다.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의 논리에서 민족이 당대에 여전히 실현되어야 할 과제였음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사회주의를 성취하기 위한 중간 과정으로서 소홀히 취급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한 관점은 역사를 단선적으로 진행하며 발전해 가는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각 발전단계에서 승리한 자들의 입장에서 과거를 바라본다. 그에 따라 그러한 관점에서는 기존의 사회에 저항하던 주체들의 다양한 관점들과 그들에게서 상상되었던 다양한 가능성들은 단선적 역사에 일치하는 경우만 남기고 과거 속으로 사라져 버리게 된다. 민족이라는 과도기적 주체가 그다음 단계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 안에서 소홀히 취급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문학가동맹의 민족문학론이 민족을 보는 관점은 이러한 목적론적 관점의 오류를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들 역시 사적 유물론이 제시하는 역사 진행의 경로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민족을 내세울 때, 그것은 미래의 사회주의를 예비하는 집단으로서가 아니라 조선왕조 말기로부터 당대까지의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시도되었고 실패를 거듭하며 진전되어 왔던, 그리고 여전히 현재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반드시 실현해 내고 말아야 하는 과제로서 내세웠던 것이다. 여기에서 초점이 되는 것은 민족이라는 당대의 역사적 과제 자체이며, 이를 뒷받침하는 논리 역시 미래를 향한 역사가 아니라 반복해서 실패해 왔던 과거의 시도들이었다. 말하자면 이들의 민족문학론은 대타자에 의해 보장된 성공이 아니라 과거의 실패를 향한 동일시에 따른 것이었다. 이들의 민족문학론이 바라보는 민족이란, 실패를 반복하며 조금씩 더 나은 실패를 향해 나아 온 역사라는 전제 위에서 파악된 과제였던 셈이다.
실패를 반복하며 조금씩 더 나은 실패를 향한 역사라는 관점과, 그 가운데 부과된 과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는 지젝이 ‘충동의 윤리’라 부른 것을 떠올리게 한다. 특정한 대상을 향한 마음의 작용인 욕망과 달리 충동은 대상이 부재하는 빈자리를 향한다. 때문에 충동의 윤리는 대상을 획득하는 데 실패한 자리에서만, 그 실패의 불가피성을 온전히 수긍하는 주체에게서만 활성화될 수 있다. 욕망이 우연적으로 선택되어 근본적 결여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대상을 겨냥한다면, 이를 통해 은폐되는 근본적 결여, 대상이 치워진 뒤에 남는 텅 빈 자리 자체가 충동의 대상이다. 충동이 욕망과 가장 확연히 구분되는 점은 그 수동성(Passivity)에 있다. 빈자리를 채울 대상을 향해 움직임으로써 적극적으로(Active) 저 근본적 결여라는 사태에서 벗어나려는 마음이 욕망이라면, 충동의 주체는 이 견디기 힘든 빈자리 자체의 인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것에 끌려 다니는 것이다. 충동의 주체는 결여를 채울 대상이 궁극적으로 부재함을 확인시키는 사건에 매여 있다. 충동은 이런 트라우마를 안겨 주는 사건, 곧 ‘사물(Thing)로서의 원인(Cause)’,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오는 실재에 충실하도록 하며, 그에 대한 흩어지고 왜곡된 기억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주체를 붙드는 힘이다. 욕망의 주체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행동한다면 충동의 주체는 달리 어쩔 도리가 없어 행위한다.3)
충동의 윤리는, 주체를 실패 앞에 무기력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로 그 실패로부터 동력을 얻어내며 행위하게 한다. 충동의 행위는 무언가를 표나게 바꾸려는 적극성을 띠지 않기 때문에 무기력과 쉽사리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그것이 흩어지고 왜곡되는 기억들을 되살려내는 데 목적을 두기 때문이다. 무기력의 주체가 저 괴로운 기억에서 빨리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충동의 주체는 그것이 흩어져 잊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그 안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충동의 거점이 되는 실패는 주체를 주저앉히거나 다른 것을 향해 떠나게 하는 끝이 아니라 언제나 거기서부터 무언가가 다시 시작되는 회귀의 지점, 주체가 거기 머물러 있게 하는 원지점이자 그럼으로써 저 기억이 결코 끝나지 않게 하는 무엇이다.
문학가동맹이 민족을 역사가 당대에 안겨 준 부채로 파악했던 것은 그들이 주장한 민족문학론이 충동의 윤리에 따른 것임을 알려준다. 그들은 사회주의라는 역사의 최종국면을 향해 적극적으로(active) 전략을 세우고 그에 따라 당대의 과도기적 과제로서 민족을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조선의 역사가 당대에 안겨 준 부채를 파악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민족을 내세운 수동적(passive) 주체였다고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적극적인 욕망의 주체라기보다는 수동적인 충동의 주체였다.


2) 진화론적 관념론(evolutionary idealism)과 창조론적 유물론(creationist materialism)에 대해서는 지젝,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수련 옮김), 새물결, 2013.
3) 충동의 윤리에 대해서는 슬라보예 지젝, 박정수 옮김,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인간사랑, 2004, 509–514쪽 참조.


현재 우리는 문학가동맹이 민족문학론을 내세우던 것과는 다른 역사적 조건 위에 있다. 특히 민족이라는 말이 내장할 수 있는 가능성의 범위가 매우 축소되어 있는 상태다. 우리는 남북 분단으로 인해 각각 남과 북에 들어선 독재 체제를 떠받치는 방향으로 민족 개념이 굳어져 온 상황 아래 놓여 있다. 그 과정에서 민족이 중세적 질서 속에서 고통 받던 피지배 신분의 이념으로서가 아니라 그 잔재를 안고 일제를 거치며 굴절된 역사 속에서 형성된 기득권층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봉합의 기표로 전유되어 왔다. 지금 상황에서 문학가동맹의 민족문학론을 다시 가져오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그러나 그 내용의 측면에서 볼 때 그것이 소용을 다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해방 직후 문학가동맹과 같은 제3의 민족 개념이 현재의 그것에 패배함으로써 우리는 여전히 중세적 잔재의 청산과 일제 잔재의 청산 등 문학가동맹이 선명한 구호로 내걸어 왔던 과제조차 해결할 기회를 잃어버린 바 있고, 그 영향은 여전히 우리에게 미치고 있다. 현재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분열과 갈등이 또 한 번 기득권을 위한 봉합으로 귀결되는 것은 곤란하다. 한국 근대사의 흐름 속에서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을 돌아볼 필요, 그리고 그 가운데 시도되었던 다양한 가능성들을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문학가동맹의 민족문학론은 그러한 가능성 중 하나로 남아 있다.
문학가동맹의 민족문학론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그것이 내장하고 있는 충동의 윤리에 있다. 과거에 시도되었으나 여전히 해결을 보지 못한 문제들을 다시 끄집어내어 현재 속에 되살려내는 일은, 단지 영웅적 실패를 찬양하는 것과는 다르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그 실패한 시도들을 통해 개방되었던 가능성, 이후의 역사 과정 속에서 은폐되었으나 결코 사라지지 않고 이어져 온 가능성을 돌아보는 일이기도 하다. 앞의 연재에서 말했던 것과 같은, 미래가 열렸던 시간 속에서 개방된 가능성과 그에 따라 문화 속에 남아 지속됨으로써 우리의 삶을 바꾸어내는 느리지만 분명한 움직임이 바로 그것일 터이다. 문학가동맹의 민족문학론만 해도 그렇다. 그것은 분명 이후의 연속적 역사 속에서는 사라져 버렸지만, 4월 혁명과 6・10 민주항쟁 등의 사건을 통해 불연속적 역사 가운데 끊임없이 되살아나며 다시 돌아보아야 할 이론적 준거로서 부활해 왔다. 아마도 2016년의 촛불 역시 그러한 사건들의 목록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미래가 닫힌 듯 보이는 현재 한국 사회의 상황 속에서 미래가 열렸던 과거의 시간을 돌아보고 그를 통해 변화되어 지속되고 있는 현실을 찾아내는 것이 이 연재의 목표다. 이를 위해 그러한 태도의 준거가 될 수 있는 문학가동맹의 민족문학론을 돌아보았다. 너무 길어진 감이 있지만 이는 이 연재의 목표가 문학가동맹의 민족문학론이 보여주었던 가능성을 이론적 준거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에 말한 것과 같은 내 글쓰기의 습관과도 연관이 있다.
지금부터 검토해야 할 것들이 많다. 한 차례 남은 연재분으로 다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 연재를 통해 못 다할 것들은 긴 호흡을 갖고 앞으로의 글들을 통해 조금씩 해나가 볼 참이다. 우선 다음 연재분에서는 지금 우리 문학이 1980년대를 기억하는 방식으로 시작해 볼까 한다. 그것이 그럭저럭 가까우면서도 충분한 거리를 두고 있어 정리하기에 수월한, 열린 미래를 보던 시대였던 듯하기 때문이다. 지면과 시간이 허락한다면 2016년 이후 문학의 변화에 대해서도 살펴볼 참이다.











작가소개 / 양재훈

201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 대표평론 「새해가 오게 하려면」, 「반박귀진의 하수들과 철없는 바틀비들」 등.


《문장웹진 2023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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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속 부동산과 젠더 정치학 전지니(한경국립대 교수) * 이 글에는 종결되지 않은 웹툰과 올해 공연된 연극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투기와 여성 이 글은 한국의 부동산 현실, 그중에서도 전세 사기로 집약되는 부동산 범죄를 다룬 웹툰과 연극을 겹쳐 보려 한다. 이를 통해 동시대 대중문화 텍스트 안에서 자산 증식에 대한 소시민적 욕망이 어떻게 젠더화되어 형상화되는지를 살피고, 여성을 범죄의 가해자 혹은 피해자로 배치하는 작품 속 시도가 갖는 양면성에 대해 조망한다. 논의할 작품은 표제에 부동산을 내세워 비슷한 시기 독자, 그리고 관객과 만난 (유기 글/그림, 2024.1.13.~연재 중), (김수정 작/연출, 2023.10.14.~22.(초연), 2024.6.1.~9(재연)) 등 두 편이다. 부동산과 여성을 관련지어 논의하는 경우는 본격적인 강남 개발 이후인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다. 부동산 가격 상승과 서민의 박탈감, 중산층 진입의 욕망 등의 문제는 박완서의 강남 아파트를 산 교수 부인의 이야기인 「낙토의 아이들」(1978)에서부터 시작해 재개발을 둘러싼 부녀회의 욕망을 다룬 웹툰 (스토리 매미/작화 희세, 2019.05.05.~2020.09.27.)까지 꾸준히 반복되었다. 염두에 둘 점은 (유하 작/연출, 2015), (연상호 작/연출, 2018)의 경우처럼 대중문화 속에서 개발·재개발의 역학관계를 다룰 때는 남성 인물이 이야기의 중심에 놓이지만, 개발의 수혜를 입고자 하는 소시민의 욕망을 다룰 때 그 중심에는 여성이 자리한다는 점이다. 관련하여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불안한 경제상황 속에서 반복되었던 투기는 여성의 것으로 전유되는 일이 빈번했다. 전쟁 이후 사회 혼란의 주범으로 간주되었던 ‘사설계’를 주도하는 부인들이나 1970년대 후반부터 매체에 오르내린 부동산 투기의 주범 ‘복부인’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은 근현대사 속 뿌리 깊은 여성 혐오와 직결되어 있다. 정치·사회적 불안으로 발생한 투기 심리를 여성의 전유물로 간주하며 문제의 핵심을 피해 가고 비판의 대상을 국가와 체제가 아닌 여성으로 지목한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여성이 투기에 몰두하는 이유를 심리학적,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기사도 있었다. 한 언론은 “복부인의 욕구 단계는 생리 욕구와 안전 욕구의 원시적인 단계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며 여성이 상대적으로 안전 욕구가 강하고 사회 진출이 부진한 것을 복부인이 생기는 이유로 분석하기도 했다.1) 이 와중에 투기를 여성의 것으로 지정하는 데 대한 자성의 목소리도 있었다. 1984년 한 신문 독자는 신문 기고를 통해 ‘복부인’은 여성 천시 단어로 공공매체에서 이 같은 유행어를 쓰면 안 된다고 역설한다. 그는 “이는 여성 학대의 사회적 악습에서 오는 콤플렉스를 여성의 사회 유린이라는 감정으로 희석시키려는 ‘투사’ 심리요, 또한 일종의

  • 관리자
  • 2024-10-01
휴먼들의 소화불량, 비인간-사물의 매혹

휴먼들의 소화불량, 비인간-사물의 매혹 황녹록 밖에선 바퀴벌레의 신음소리 아버지가 숨겨 둔 약을 먹은 것입니다 어머니 내 책상 위에 아버지가 피운 모기향 좀 치우세요 시집 위에 몸 약한 날벌레들 다 떨어지잖아 동생 문 열고 들어옵니다 나는 문밖으로 재빨리 나가려고······ 동생이 소리 질렀습니다 여기 또 있어 진은영, 중1) 오래된 사물, 거슬리는 존재감 이제 우리는 반려인, 반려동물, 반려식물, 반려미생물, 반려사물 등 반려종의 경계를 구분 짓지 않기로 한다. 반려종이란 서로의 밥을 나누고 몸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는 관계를 뜻하는 말로 어떤 물질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를 의미한다. 반려들은 나눔의 상호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못지않게 서로를 위태롭게 하고, 서로 먹다가 소화불량이 되기도 하고, 때로 죽고 죽이는 유해성의 성분도 가지고 있다.2) 그리하여 누군가의, 무엇인가의 반려가 된다는 것은 결코 무구할 수 없는 관계 속으로 이끌려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과 비인간 반려들의 낯선 이물감으로 시작되는 관계맺음은 애초에 구역감과 체기(滯氣)를 동반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관계맺음은 일상 속에서 예기치 못한 만남으로 강제될 테고, 그로부터 서로를 향한 진지한 응시의 요구가 시작된다. 그 응시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물음과 응답의 이야기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새로운 관계맺음에 대하여 ‘영원한 동반자’라는 환상을 기대하거나, 우정 어린 돌봄으로 윤리적 책임을 지우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다른 존재들의 있음을 감각하고 그 감각에 감응하는 관계로서 반려를 말하려는 것이다. 김초엽의 소설 『지구 끝 온실』3)은 SF적 상상력을 통해 인간 지수와 사이보그 레이첼, 레이첼과 희귀식물 모스바나, 그리고 모스바나와 이희수의 혼종적 관계맺음에 대한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종의 경계를 넘어선 존재들의 반려-되기는 멸망해 가는 지구 끝에서 찾아내는 희망의 메시지로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나아가 구원의 식물(푸른빛)이자 악마(생태계의 위협적인)의 식물인 ‘세발갈고리덩굴’의 이중적 존재감은 반려들의 관계로부터 인류의 재건과 구원의 (불)가능성에 대한 적극적인 타진으로 읽어 볼 수도 있다. 꽤 오래전 카프카는 그의 단편에서 규정할 수 없는 것들, 식별 불가능한 반려들의 존재감을 감지한 바 있다. 카프카의 작은 존재들은 경직된 습관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다양한 실험과 그 과정에서 예기치 않게 발생된 감염의 산물이다. 카프카의 비인간-사물들은 서로를 반려종으로 여기기에는 아직 미심쩍고 불안한 상태로 존재한다. 오드라데크(Odradek)4)는 낡은 실타래 조각처럼 묘사할 수 없는 형태를 띠고,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듯한 웃음소리를 낸다.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 분명하지만, 가장(家長)은 자신이 죽은 후에도 오드라데크가 계속 살아 있는 것이 근심스럽다고 고백한다. 또 있다. 반은

  • 관리자
  • 2024-10-01
한일 문화의 초국적 접점과 ‘마주침’의 서사학

한일 문화의 초국적 접점과 ‘마주침’의 서사학 : 동시대 한국 소설 속 ‘일본’이라는 물음 정창훈 올해 상반기 일본 방송가는 ‘한일 로맨스’로 뜨거웠다. 한국인 배우 채종협(작중 윤태오 역)과 일본인 배우 니카이도 후미(모토미야 유리 역)가 공동 주연을 맡은 드라마 가 그것이다.1) 이 드라마는 채종협을 단숨에 한류 톱스타로 만들며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은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여러 OTT 플랫폼이나 케이블 TV채널을 통해 방영되며 화제가 되고 있다. 나 역시 이 드라마를 매회 빠짐없이 챙겨보았는데, 기대 이상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다고 생각한다. 이 두 인물의 연인 관계에 시련이나 위기를 가져오는 여러 갈등의 요인들이 있었으나, 그 가운데서 국가적, 역사적 문제와 연관되는 요인을 끝내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오히려 신선했다. 국적(내셔널리티)과 언어, 생활관습의 차이는 둘 사이의 장벽이 되기는커녕 상대에 대한 관심을 극적으로 심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가족이나 주변인들도 이 둘이 한국인,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둘 사이를 반대하진 않는다. 이것은 종래의 한일 서사물에서 양국 인물의 연애사를 그려 온 방식과는 차별화되는 것인데, 이를 통해 ‘이례적인’ 해피엔딩의 결말이 주어진다. ‘한일 로맨스’ 자체가 이례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른 아시아 이웃들의 경우와 비교했을 때, 한일 양국 인물의 만남을 그린 서사적 재현이 여러 차례 반복되어 온 점, 나아가 오늘날 그 재현의 양상이 현저히 다양화되고 있다는 점은 주목을 요하는 현상이다.2) 물론 나쁘게 말하자면 이 드라마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정치적, 역사적 이슈를 정교하게 회피함으로써 구축된 가상의 이야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는 한국과 일본이라는 이웃이 서로를 감각하는 방식에 새로운 무언가가 ‘첨가’되고 있음을 예시하는 것이 아닐까. 돌이켜보면 지난 몇 년 동안 한국 소설은 이러한 변화에 한 발 앞서 민감하게 대응해 온 것으로 보인다. 여러 가지 껄끄러운 문제를 공유한 ‘오랜 이웃’과의 ‘새로운 관계’를 상상하는 시도가 동시대 소설 속에서 계승되어 온 점, 이 글은 거기에 새삼스레 주목하려 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움직임이 가져온 의미를 통시적 관점에서 살펴보기 위해, 잠시 과거로 돌아가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현해탄 서사’ 이후, 한일을 넘나드는 월경의 서사 근대 이래 한일 관계에서 ‘현해탄’은 상징적 의미를 지녀 왔다. 특히 식민지-제국 체제의 해체 이후 그것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의 바닷길(대한해협)’이라는 외시적 의미만이 아니라 역사적, 정치적 문제 등으로 인한 한국과 일본의 ‘가깝고도 먼 관계’(심리적 거리감, 국가적 입장의 차이 등)를 가리키

  • 관리자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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