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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소설의 자리 (2)

  • 작성일 2023-02-01
  • 조회수 1,949

[비평연재]

2023년 비평연재는 두 명의 평론가가 3회씩 연재하며, ‘시대와 작품을 가로지르는 비평가의 눈’이라는 주제로 보다 확장된 문제의식을 펼쳐 보인다.





우리 소설의 자리 (2)



백지은




움직이는 신체의 표면


- 이번 생의 나는 웅덩이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조금도 실망은 없었다. 언제나 바다일 수는 없는 법. 우리들에게 이 문장은 누구나 바다일 수는 없는 법이라는 문장과 똑같이 읽혔다. 우리들은 말하곤 했다. 누군가는 주전자에 담겨 끓여져야 하고 누군가는 오줌이 돼 악취를 풍겨야 한다고. 달리 말하자면 언젠가는 주전자에 담겨 끓여져야 하고 언젠가는 오줌이 돼 악취를 풍겨야 한다. 물의 운명이란 그런 것이니 우리 물들에게 너라는 말은 지난 생의 나 혹은 다음 생의 나라는 말과 똑같은 의미.1)


이렇게 시작하는 현호정의 「한 방울의 내가」는, ‘한 방울’로 탄생한 ‘나’가 거치는 물의 다사다난한 일생을 서사화한 소설이다. ‘메이’의 눈물로 태어난 나는 ‘한 방울의 몸’으로 굴러 떨어진 이후, 강물로, 오리알의 흰자로, 웅덩이로, 바다로, 구름으로, 몸을 바꾸며 변화하는 생을 이어 간다. 물방울은 빙글빙글 돌고, 찢기고, 끌려 들어가고,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고, 쉬고 또 쉰다. 물방울(들)은 서로 뭉치고 나뉘고 커지고 작아지고 삼키고 삼켜진다. ‘동화의 춤’이라고도 불리는 이 과정에서 ‘나’는 오로지 ‘한 방울’의 신체이자 웅덩이, 바다, 구름 등의 거대한 물(방울들)로의 전환을 겪는 신체로 존속한다. 메이의 눈물로 태어났으니 언제까지나 메이의 눈물이고 싶다는 생각, ‘온’이라 불리는 그 기억과 감정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 그 “이기”(171)를 ‘나’는 잃지 않으나, 춤을 멈추지 않는 물의 운명을 거스르지는 못한다. 한 방울의 나는 이윽고 바다가 되고 구름이 된다. 그러나 ‘온’을 잃는 것이 아니다. 바다가 내가 되고 구름이 내가 되는 것이어서, 나의 ‘온’은 큰물에 잡아먹히거나 수증기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바다처럼 출렁이고 구름처럼 고요해질 뿐이었다.


이 이야기에서 물의 일생, 물의 운명, 물의 세계에 빗대어진 서사적 주체는 ‘한 방울’의 신체로 표상되어 있다. ‘한 방울’ 안에서 ‘나’를 이끄는 온갖 동력이 가동된다. 한 방울의 힘, 한 방울의 입, 한 방울의 의지, 한 방울의 호기심, 한 방울의 충동, 한 방울의 부끄러움, 한 방울의 궁금증……. “한 방울의 몸 혹은 마음”(167)인 이것은, ‘나’를 다른 물과 구별되게 하는 ‘온’과 함께 탄생한 신체이자 ‘온’을 보존하는 신체이지만, 동시에 다른 물로 환승하고 변모하는 신체이기도 하다. 이 소설의 서사는 이 신체의 움직임과 형상을 따라 전개된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최선을 다해 길쭉하게 늘여”졌다가 “다시 납작하게 둥근 모습”이 되고, “탁해진 채로 밑바닥까지 가라앉고”, “온몸으로 환호성을 지르고”(166) “표면을 맞대며 옴츠러들”고 “아래로 뾰족해진 채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을 느”끼고(167), 다른 물들의 “정신없는 무도회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점점 나를 잊어”(168) 가고, “울먹이며 몸 안쪽으로 손들을 뻗어 내 온을 꽉 움켜쥐”고(174), “펄펄 끓듯이 출렁이다가 얼어붙듯이 굳어버”리고 “당겨지고 토해지고 찢어지고 떨어져 나가”다가 “한없이 가벼우므로 어디든 갈 수 있”게 되고(175), “다른 물방울들의 잠을 깨우고” “모두가 함께 춤추었지만 같은 춤을 추”지는 않고(178) “메이를 향해 산산조각 나고”(179), “메이의 눈동자를 끌어안”는다(180).


단독적인 동작이자 집단적인 움직임을 그려내는 이 신체는 한 방울(의 나)이자 한 방울들(이라는 우리)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곳은, ‘누군가는’이 ‘언젠가는’과 같은 말이고, ‘너라는 말’은 곧 ‘지난 생의 나’, ‘다음 생의 나’와 다름 아닌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의 운명이고 이 운명에 속하지 않은 물방울은 없다. 메이의 눈에서 굴러 떨어진 이후 다시 메이의 눈동자를 끌어안기까지 ‘한 방울’은 ‘나’이자 ‘너’이고 누군가의 이번 생이자 다음번의 나의 생일 것이다. ‘한 방울의 내가’ 변모와 환승을 거치면서도 고유한 자기를 인식하고 유지하는 이 서사적 과정에서, 물방울의 신체는 외부의 소동 - 동화의 춤 - 으로부터 차단된 한 방울의 내면에 물의 핵심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외부와 내부가 섞이는 동작 - 동화의 춤 - 을 계속 수행함으로써 물의 핵심을 잃지 않는다. 물방울에게 세계란, 자아의 내면을 통해 발견하는 외부의 풍경이 아니라 자기의 신체를 통해 경험하는 다른 장소다. 그러므로 정신을 담은 신체라기보다 정신으로서의 신체인 그 ‘한 방울’이란,


- 수렴하는 바다. 얼어붙는 현재. 내리는 가능성들과 증발하는 생. 끓는 고백. 흐르는 기억. 고이는 추억. 흩어지는 과거. 가라앉는 결정. 떠오르는 진심. 터지는 물음. 흡수되는 고통. 쏟아지는 약속. 솟구치는 허기. 젖어드는 한숨. 밀려드는 비밀. 쓸려가는 대화, 굽이치는 피로, 갈라지는 예감. 파고드는 용서. 쓰다듬는 절망. 맺히는 대답. 톡톡 소리를 내며 튀어 오르는 결말. 비로소 잠기는 이해. 깊이 소용돌이치는 우리.(179-180)


이렇게 끝나는 현호정의 「한 방울의 내가」는 결국, 이 마지막 문단의 현란하고 아름다운 어구(語句)들 - 관형어와 명사의 결합으로 된 - 을, 한 방울의 ‘신체’로서 출현시킨 소설이라고 말해 볼 수 있다. 보통 ‘나’라는 일인칭 단수의 ‘내면’에서 생겨나고 저장되는 것으로 생각되는 저 다채로운 추상명사들이 여기에서는 한 방울의 ‘신체’로서 응축돼 있다. 동사로 된 관형어들을 업은 이 신체는 물질적으로 유동하는 움직임과 함께, 움직임을 통해 생성되고 유지된다. 보통 주체의 내면에서 생겨나는 고백, 기억, 진심, 고통, 비밀, 예감, 절망, 이해 등 - 이 소설의 용어로는 ‘온’ - 이, ‘한 방울 나’에게서는 흐르고, 가라앉고, 갈라지고, 파고들고, 끓어오르고, 얼어붙고, 쓰다듬고, 굽이치는 신체에 의해 구현된다. 그리고 마침내 다다른 자리, “깊이 소용돌이치는 우리”, 이것은 일인칭 복수의 형태이며, 이(들) 소용돌이는 확실히 (물방울의) 내면의 정신이라기보다는 신체의 표면이다. 요컨대, 한 방울의 ‘나-주체’가 간직한 ‘온’은 오직 물방울-신체로 체화되고, 이때 한 방울의 나는 곧 물방울-우리이며, 이 ‘한 방울’의 이야기가 재현한 것은 ‘나’의 내면이 아니라 ‘우리’의 표면이다.


1) 현호정, 「한 방울의 내가」, 《릿터》, 2022 10/11월호, 민음사. 165쪽.




신체의 객체성과 지향성


「한 방울의 내가」에서 ‘온’이라는 물의 핵심이 나-내면이 아닌 우리-신체로 체화되었다는 분석은 객체 지향 서사를 논의하는 데 몇 가지 시사점을 준다.
먼저, 서사의 주체가 물의 신체인 이 소설은, 인간 중심의 행위 주체성을 재고하며 비인간 존재들의 감각과 활력을 발견하는 시각에 적절히 참조될 만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최근 한국 문학에 등장하는 ‘비인간’에 주목하는 논의 중에는 “인간의 감각과 사유 바깥에서 우주와 조우하는 순간들 속에서, 사물에 행위 주체성을 부여하는 관점과 나란히 한국 문학의 새로운 파장”2)을 발견하거나, “동물, 식물, 자연 등 비인간 타자에 예민하게 감응하고 있는 동시대 문학이 창발해 내는 사유와 상상력을 포착하”3)려는 시도들이 눈에 띈다. 그런데 이러한 담론들의 현재성을 의식하면서도, 물의 핵심을 물의 물질성을 통해 주체화하는 한 방울의 동작을 분석한 앞 절의 논의는 다만 비인간 물질에 내재한 생기와 에너지에 주목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굳이 밝혀 둔다. ‘의인화된’ 물질이라고 해야 맞을 ‘한 방울의 나’는, 비인간 사물의 생동성을 복권하거나 비인간 타자로서 인간과 긴밀하게 조응하는 주체가 아니다. 이 시대 생태 환경에 대한 자각은, 인간이라는 종을 생태학적으로 인식하는 데 있어 필연적으로 비인간 물질들과 인간의 연결 또는 관계 맺기에 대한 고찰과 고민을 전제하게 했다. 그러나, 아니 그렇기에 더욱, 사물의 생동성을 부각함으로써 인간/비인간 위계 사이의 균형을 찾겠다는 의도는 자칫 행위자 중심의 주체-대상 구도에서 다만 그 중심을 사물의 행위성으로 잠시 이동시키는 결과에만 이를지도 모른다. 비인간의 행위성과 인간의 행위성이 ‘양자’ 구도의 균형을 맞추기보다 비인간의 행위성으로 인해 양자의 ‘관계’와 ‘연결’ 구도에서 발현되는 행위 주체성에 주목할 때 기존의 인간-주체적 사고를 재고하는 의의가 찾아질 것이다.4)


2) 강지희, 「구멍 뚫린 신체와 세계의 비밀」, 《문학동네》 2022년 봄호, 137쪽.
3) 인아영, 「개와 나무와 양말과 시」, 《문학동네》 2022년 봄호, 97쪽.
4) 오늘날 기후 위기 상황과 관련하여 인간중심주의의 재편을 요청하는 사고는, 비인간/동식물/사물 등의 행위자와 인간 행위의 연결 및 관계 맺기의 중요성을 인지하는 쪽으로, 그럼으로써 인간 주체의 한계를 적시하고 인간 종의 생태적 위상을 올바르게 파악하려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인간-자연 이분법을 해체하고, 인간-비인간 위계를 타파하고, 포스트휴먼-트랜스휴먼 등의 새로운 인간종을 상상하며 고전적 휴머니즘의 인간 예외주의를 반성하는 흐름 가운데, 인간이 스스로 ‘인간 중심적’이기를 거부하는 이 전도된 사태에 내포된 또 다른 인간적 행태 또는 의미의 난감함까지 다시 물어지는 근본적 고민도 없지 않다. 우리가 수동적이고 관성적인 대상으로 간주해 온 동식물, 자연, 사물 등 비인간 물질의 주체성을 사고할 때, 인간 중심적 가치에서 분리된 그 행위성을 인간과 온전히 무관하게 기입할 길은 인간에게 없다. 비인간의 행위성을 (인간의 의도, 의미, 의의 등의 반영물로 보게 될 것을 경계하여) 인간의 의지나 욕망 너머로 밀어내는 순간, 다시 인간의 ‘한계’라는 인간 중심적 판단이 발생하는 아이러니를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비인간 행위자들에 주목하는 까닭은 인간-너머-행위의 작용을 인지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성 때문이고, 그 작용이 인간 외의 존재 및 그들과의 연결로부터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른바 ‘물질적 전회’로의 사고가 인간이 인간 외의 존재와 동등해짐으로써 인간 주체의 중력을 벗어던질 수 있다거나 그럼으로써 우세종으로서 인간이 저질러 온 생태학적 폐해를 바로잡는 책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판단에 이를 수는 없다.


다음, 「한 방울의 내가」의 서사를, 물의 핵심에 빗대어진 인간(성)의 핵심으로 논의를 옮겨 생각해 볼 수 있다. 기억, 감각, 사고, 욕망, 인지, 정서 등의 자기 동일적 주체성의 요소들, 이 소설에서 ‘온’으로 통칭되는 그것은 한 방울의 ‘나-내면’으로 통합되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우리-신체’의 형태로 변모, 환승하며 유동한다. 이는, 오늘날 인간의 온갖 지성과 경험은 물론 개인을 다른 개인과 구별 짓는 핵심 요소들이 ‘정보’의 형태로 전환되어 존재하는 다양한 양상들을 떠오르게 할 수도 있다. 예컨대 데이터 처리 알고리즘 기술로 형성된 온라인 생태계에서 ‘개인성’의 고유한 표지인 경험, 지식, 감정 등이 각종 데이터로 수집되고 (재)분할되어, 기업, 미디어, 공공서비스 등 집단적 시스템의 기획 하에 생성, 유통, 관리되는 사태는 더 이상 놀라운 일도 부정할 일도 아닌 것이다. ‘포스트휴먼’ 논의에서 흔히 말해지듯, 이는 인간성의 핵심이 정보로 전환됨으로써 인간의 유한한 신체를 떠나 무한히 존속 가능해진 사태일 수도 있겠다. 이제 어떤 개성은 ‘누군가’의 내면에 고유하게 존재하기보다 ‘누구나’의 신체 또는 ‘어디나’의 장소에 장착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 방울의 내가」를 다시 전유하여 이야기하자면, 한 방울(또는 물방울들)의 ‘온’은 변모 환승하는 신체와 분리되어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변모 환승하는 신체로서, 즉 ‘온’을 체화한 신체로서만 존속한다. 주목할 것은, 그 신체가 구르고 치솟고 합쳐지고 튀어 오르는 한 방울의 물임으로써, 개체이자 집단인 그 신체는 확대/축소, 연결/분리되는 동력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반복건대 ‘나’의 내면이 아니라 ‘우리’의 표면으로 유동하는 이 신체는 ‘한 방울’인 개체-물이자 웅덩이, 바다, 구름 등 개체-너머-물이다.


개체(개인)-주체의 자리가 고정된 ‘나’가 아닌 ‘우리’라는 복수로 전환될 때, ‘주체/타자 논의’를 재고해 볼 만한 맥락이 떠오른다. 중심적, 위계적 사고에 기반한 주체/타자의 이분법을 문제 삼는 논의들에서, ‘타자(성)’의 사유가 결국 ‘사유하는’ 주체의 자리로 회귀하는 전도(顚倒)를 잠시 헤아려 보자. ‘주체성’ 비판의 목적은 무엇인가? 더 나은 주체가 ‘되기’ 위함일까? 아니다. 주체성을 비판하는 이유는 ‘주체’라는 자기 동일성이 언제나 자명한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즉 ‘나’가 자동적으로 주체(화) 되(는 줄 믿)기가 (불)가능한 지점이 있다는 데서 ‘나’의 주체성(과 타자성)에 대한 사유가 시작된다. 타자는, ‘나’ 아닌 다른 존재를 지칭하는가? 아니다. 타자는, 내가 주체가 되(지 못하)게 하는 요인, 즉 나의 자기 동일적 주체성을 (불)가능하게 하는 대상이다. 주체/타자 이항은 모순 관계가 아니라 반대 관계로서 서로 교섭한다. (주체성은 ‘나’의 성질, 타자성은 ‘남’의 성질인 것이 아니다.) 어떤 주체화의 과정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또는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타자성이지만, 타자성의 핵심은 주체화에 끝내 저항하는 지점에 있을 것이다. 따라서 타자(성)를 사유한다는 것은 나의 자기 동일성을 의심하고 반성하는 것과 별개는 아니다. 그럼에도 “타자에 대한 사유가 주체의 문제로 회귀되고 마는 현 시점의 비평적인 장력”5)의 문제는, ‘타자에 대한 사유’를 마치 ‘나 외의 다른 존재를 더 잘 이해하고 더 많이 수용하려는 (착한) 노력’과 유사한 뜻인 듯 오해하거나 오용하는 오류가 여전히 적잖은 데 있다. 이해, 수용, 극복, 화해 등은 타자를 사유하는 방식일까, 아니면 주체의 자기 동일화를 유지하(려)는 노력일까? 이 둘은 모순적인 게 아니고, 우리의 사고는 이 둘이 혼재된 방식으로 진행된다.


문제는 이분법의 폐해다. 그것은 어떤 이항관계가 ‘주체가 타자를 사유하다’의 구도가 되는 것이 절대적으로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 구도에서 주체와 타자가 교환되고 대치되고 섞이고 분열하고 부재할 수 있음을 무시하거나 은폐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주체의 자리를 ‘개인-나’의 개념에 고정해 온 근대적 인간주의가 반성될 수밖에 없었던 까닭도 이것이며, ‘나’의 주체성이 나라는 행위자 외의 다른 (비)인간의 행위 및 그 연결망으로부터 이해됨으로써 주체의 자리에 ‘관계’나 ‘연결’이 들어설 수 있게 된 까닭도 이것이다. 인간과 비인간, 중심과 주변, 화자와 대상, 나와 너의 이분법을 그토록 경계해 온 까닭, 둘 사이의 위계가 그토록 불편한 이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요컨대 ‘인간 중심’, ‘주체 중심’의 문제는 인간-주체의 추상성이 ‘개인-주체’라는 단위로 고정된 문제이고, 바꿔 말하면 추상화된 인간의 단위를 다시 설정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이때 ‘우리’라는 일인칭 복수는, 개체가 아닌 개체‘들’의 회집체로서 개인-너머-주체(들)의 행위 및 그 관계와 연결을 지향하는 상태를 드러내기에 적합한 단위가 아닐까? ‘우리’라는 자리에서는 중심을 고정하지 않는 행위들(의 연결)이 드러나고, 주체성과 타자성이 길항하며 공존한다. 이 단위는 단일한 행위 주체의 중심성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회집된 행위자들 간의 매개와 영향을 보존한다. 주체/대상, 중심/주변, 능동/수동, 인간/비인간 등의 이항을 분할하기보다 상호 지향하는 이 단위는 (이항의 위계가 행사되기 쉬운 ‘주체’보다는) “하나의 실체이자 관계들의 복합체”6)(하먼)인 ‘객체’로서 사유되는 편이 더 적당할 것 같다.


5) 인아영, 앞의 글, 95쪽. 이 글에서 인아영은 비인간 타자를 다룬 문학에 날카롭게 개입하는 최근의 비판적인 독법들을 정리하고, 그 공통된 인식을 바탕으로 “타자를 조금 더 섬세하게 사유하기 위한 윤리가 그 타당성과는 별개로 다시 주체라는 덩어리로 회귀한다는 근본적인 난관”(96-97)을 다룰 방법을 모색했다.
6) Harman, Guerrilla Metaphysics, p.85(레비 R. 브라이언트, ?존재의 지도?(김효진 역, 갈무리, 2020), 122쪽에서 재인용.)




우리의 거처, 우리의 영토


브뤼노 라투르는 코로나 팬데믹 이후 드러난 “가치들의 근본적인 전도”7)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그때까지 우리가 ‘경제Economie’라고 대문자로 표시해 불렀으며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세계’라고 일컫는 바와 동일시되던 어떤 것이 단번에 멈췄다.”(89) 팬데믹으로 인한 격리 상황 속에서, 이전까지는 아마도 사회적, 윤리적, 이상적 관심사, 즉 ‘상부구조’에 속했을 “생성의 염려와 존속”(90)의 문제가 가장 심층으로 가라앉고, “여태까지 실제 삶의 반박할 수 없는 토대라 여겨졌던 경제가 위쪽으로 다시 올라온 양상”(90)이라는 것이다.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천부적인 것도 자연적인 것도 아니며, “서로에게 아무것도 빚지지 않고”(92) 살며 다른 모든 생명의 형태를 ‘자원으로’ 간주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이기적인 ‘개인들’이란 아무도 발명해 내지 못했다. 핵심은 “정치경제학을 새로이 비난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생명의 형태들이 서로 안에 유지하는 관계들의 설명서로서 그것을 완전히 버리는 데 있다”.(97) 그는 격리의 경험은 “자기 동일성의 경계에서 드디어 해방되는 일”(98)이었으며, “우리는 결코 윤곽이 분명하게 한정된 개인들이 존재한다고 가정함으로써 우리의 관계들을 단순화시킬 수 없으리라.”(101)고 주장한다. 격리의 경험으로 우리는 “어디에 거처를 정할지 다시 모색을 시작”(101)할 수 있고, 그러자 ‘글로벌화’라는 유령 같던 용어를 대체하여 “다른 이들과 더불어 묘사하려 해야 할 하나의 장소 안에 우리의 자리를 매기도록 노력하자.”(104)는 명령이 나타났다고 말한다.


인류세의 인간에게 ‘지구와 함께하는 삶(la vie avec Terre)’을 통한 행동생태학, 생태정치학 등을 권장하는 라투르의 입장은, 기후 위기를 비롯한 각종 불평등, 불합리, 불가능의 위기를 맞은 이 시대에 근대의 과학(학문)으로 논의해 온 개념과 경계들이 조정되어야 한다는 요청이기도 하다. 이 조정이 불가피한 것은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와 우리 삶을 지탱하는 세계를 일치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8) 그는 우리가 지구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 의존하는 존재들과 만날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는 것”(109)이므로, 의존하는 것이 행동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해방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상식으로 변화시키는 것, 이것을 연대와 해방을 이해하는 토대로 만드는 것이9) 그에게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와 우리 삶을 지탱하는 세계를 일치’시키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입장 또는 주장으로부터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문학으로 어떻게 ‘지탱’할 수 있을까 고민해 온 맥락이 잇대어질 수 있을 것 같다. 동시대 문학이라는 재현 체제는 현실과 일치하는 재현(의 유사성)이 아니라, 현실을 지탱하는 재현(의 가능성)으로 성립할 수 있지 않을까? 현실의 재현 (불)가능성을 모색하는 문학의 고민은, 현실과 문학의 불일치를 어떻게 줄일 것인가가 아니라 현실과 문학의 간극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에 있다. 라투르는 우리의 관점과 묘사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한다. 사물들의 역동성에 무관심한 채 다만 ‘정면’에서 바라보던 “예전의 ‘대상들’ 앞에 선 예전의 ‘주체’와 반대로”(125), 우리는 “이제 결코 하나의 풍경에 마주설 수 없다”.(119) 우리가 그리는 영토는 우리가 점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정의하는 것이고(119), 우리의 묘사가 행하는 것은 “위치 측정되는 것(etre localise)”이 아니라 “스스로 자리매김하는 것(se situer)”(106)이다. 그것은 아마도 “당신이 스스로 삶을 해낼 수 있도록, 당신을 돕는 다른 이들과 내리는 판결. 그러면서 동시에 당신이 살도록 해주는 것에 대해, 이어 당신을 위협하는 것에 대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위협을 제압하기 위해 당신이 실천하거나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제기되는 질문들에 건네는 대답”.(116-117)


7) 브뤼노 라투르, ?나는 어디에 있는가??, 김예령 역, 이음, 2021, 89쪽. 볼드체는 원문의 것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이하 두 문단에서 이 책의 인용은 괄호 안에 쪽수 병기.
8) 이때 “결정적인 방향 전환은 생산의 확대가 아니라 거주할 수 있는 지구 환경의 유지를 우선시하는 것”(브뤼노 라투르, 니콜라이 슐츠, ?녹색 계급의 출현?, 이규현 역, 이음, 2022, 32쪽)이라는 주장에 가장 관심이 기운다. 생산만을 지향하는 경제적 인간이란 개념은 조정되어야 하고 경제화에 대한 사회의 저항을 확대해야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생산주의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의 지평으로부터 완전히 물러나는 것, 즉 “생산을 인간들 사이의 관계에, 그리고 인간과 인간이 익숙하게 의존해 온 것들 사이의 관계를 분석하는 원칙으로 여기지 않는 것”(같은 책, 32쪽)이다. 존재물을 자원으로 하여 낳고 키우는 생산이 아니라, 존재물의 영속성을 위해 취합하고 조합하는 생성이 필요하다. 이는 “합리적인 것의 재규정을 통해 역사의 흐름을 변화시키”(같은 책, 40쪽)는 것이다.
9) ““나는 의존한다. 이것이 나를 해방하는 것이다. 나는 마침내 행동할 수 있다.”라는 표현을 어떻게 상식으로 변화시킬 것인가? 어떻게 이것을 연대와 해방을 폭넓게 이해하는 새로운 토대로 만들 것인가?”(브뤼노 라투르, 니콜라이 슐츠, ?녹색 계급의 출현?, 이규현 역, 이음, 2022, 53-54쪽)


이제 우리, ‘권진주와 김니콜라이’의 이야기를 읽어 보자.


- 두 사람의 역사는 길다. 서울 동북부의 한 중학교로부터 서로를 기억하는 두 사람이 있다. 담임교사는 두 사람에게 각자의 이름이 적힌 흰 봉투를 하나씩 줬다. 대개는 내야 할 어떤 돈을 내지 않았다는 안내문이었다. ‘너도 봉투 받는 애구나’ “둘이 친하게 지내.” 두 사람은 전혀 친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이 한 끝과 한 끝에 서 있는 단체 사진만이 졸업 앨범의 한 페이지에 남았다. 진주가 야간 자율학습을 하는 동안 니콜라이는 자격증 대비반에서 쇠를 깎았다. 5년이 지나는 동안 둘은 다양한 사람을 만났으나 그보다 많은 사람과 헤어졌고 그중 몇 명은 다시는 안 볼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아무 연고도 없으며 중학생 때는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경기도 동남부의 한 도시에 도착했다. 두 사람이 그 도시에서 처음 보는 아는 얼굴이었다. 니콜라이는 3조 2교대로 일했으므로 주말이 휴일이 아닌 때가 많았고, 진주는 근무 시간을 제외하고는 시험 준비에 매진했지만, 두 사람은 이주나 삼주에 한 번은 만났다. 두 사람은 반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신고 페퍼로니 피자와 코다리갈비찜과 치즈 김치전을 먹으러 다녔다. 낙엽이 다 떨어지는 동안 진주와 니콜라이는 서로의 방에 몇 번 갔다. 일요일 오후, 함께 몸과 시간을 탕진하고 매트리스 위에 누워 있으면 발가락 위로 햇살이 떨어졌다. “섹스는 공짜라서 다행이야.” 어두운 골목을 걸어 다시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면 불안해졌다. 하루에 삼분의 일에서 이분의 일을 일터에서 성실하게 보냈고, 공과금도 기한 내에 냈다. 그럼 큰 걱정 없이 살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우리가 그렇게 잘못 살았냐?” 자주 니콜라이의 눈에 띄는 문장이 있었다. “기립하시오 당신도!” 위키는 그 문장이 베르톨트 브레히트라는 독일 사람의 시에서 유래한 밈이라 알려주었다. 진주와 니콜라이가 인터내셔널가의 작고 뾰족한 재생 버튼을 눌러 본 것은 크리스마스를 앞둔 밤이었다. 다른 동네에 살면서 웃기는 사진이나 영상을 서로에게 보낼 때, “이거는 기립이네” “여기 빨갱이가 있네”와 같은 농담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생활비를 아낄 방도를 다각도로 궁리했다. 공장과 아파트는 어디에나 있었으나 3500만 원을 벌지는 못했다. 두 사람은 경기도 서남부의 한 도시에 함께 도착했고 같이 살아 보기로 결정했으며 그것에 대하여 누구의 허락도 구하지 않았다. 이사 첫날, 유튜브가 추천한 4시간 51분 분량의 95개국의 인터내셔널가 모음을 되는 대로 틀어 놓고 짐을 정리했다. 종이 상자와 포장 비닐로 어질러진 바닥. 기울어진 식탁 옆에서 드라이버와 손걸레를 손에 쥔 채 껴안은 두 사람. 낯설고 새롭고 따뜻했다. “우리는 친한 사이야.” 어떤 예언은 엉뚱한 형태로 전해지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실현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중에서10)


(계속)


10) 김기태,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문장 웹진》 2022년 8월호.(https://webzine.munjang.or.kr/archives/152421)












백지은
작가소개 / 백지은

문학평론가. 『독자시점』, 『건너는 걸음』, 『그때 그 말들』을 출간했다.


《문장웹진 2023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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