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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소설의 자리 (3)

  • 작성일 2023-03-01
  • 조회수 2,610

[비평연재]

2023년 비평연재는 두 명의 평론가가 3회씩 연재하며, ‘시대와 작품을 가로지르는 비평가의 눈’이라는 주제로 보다 확장된 문제의식을 펼쳐 보인다.





우리 소설의 자리 (3)



백지은




평평한 장소의 인터내셔널

- 두 사람의 역사는 길다. 서울 동북부의 한 중학교로부터 서로를 기억하는 두 사람이 있다. 담임교사는 두 사람에게 각자의 이름이 적힌 흰 봉투를 하나씩 줬다. 대개는 내야 할 어떤 돈을 내지 않았다는 안내문이었다. ‘너도 봉투 받는 애구나’ “둘이 친하게 지내.” 두 사람은 전혀 친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이 한 끝과 한 끝에 서 있는 단체 사진만이 졸업 앨범의 한 페이지에 남았다. 진주가 야간 자율학습을 하는 동안 니콜라이는 자격증 대비반에서 쇠를 깎았다. 5년이 지나는 동안 둘은 다양한 사람을 만났으나 그보다 많은 사람과 헤어졌고 그중 몇 명은 다시는 안 볼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아무 연고도 없으며 중학생 때는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경기도 동남부의 한 도시에 도착했다. 두 사람이 그 도시에서 처음 보는 아는 얼굴이었다. 니콜라이는 3조 2교대로 일했으므로 주말이 휴일이 아닌 때가 많았고, 진주는 근무 시간을 제외하고는 시험 준비에 매진했지만, 두 사람은 이주나 삼주에 한 번은 만났다. 두 사람은 반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신고 페퍼로니 피자와 코다리갈비찜과 치즈 김치전을 먹으러 다녔다. 낙엽이 다 떨어지는 동안 진주와 니콜라이는 서로의 방에 몇 번 갔다. 일요일 오후, 함께 몸과 시간을 탕진하고 매트리스 위에 누워 있으면 발가락 위로 햇살이 떨어졌다. “섹스는 공짜라서 다행이야.” 어두운 골목을 걸어 다시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면 불안해졌다. 하루에 삼분의 일에서 이분의 일을 일터에서 성실하게 보냈고, 공과금도 기한 내에 냈다. 그럼 큰 걱정 없이 살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우리가 그렇게 잘못 살았냐?” 자주 니콜라이의 눈에 띄는 문장이 있었다. “기립하시오 당신도!” 위키는 그 문장이 베르톨트 브레히트라는 독일 사람의 시에서 유래한 밈이라 알려주었다. 진주와 니콜라이가 인터내셔널가의 작고 뾰족한 재생 버튼을 눌러 본 것은 크리스마스를 앞둔 밤이었다. 다른 동네에 살면서 웃기는 사진이나 영상을 서로에게 보낼 때, “이거는 기립이네” “여기 빨갱이가 있네”와 같은 농담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생활비를 아낄 방도를 다각도로 궁리했다. 공장과 아파트는 어디에나 있었으나 3500만 원을 벌지는 못했다. 두 사람은 경기도 서남부의 한 도시에 함께 도착했고 같이 살아 보기로 결정했으며 그것에 대하여 누구의 허락도 구하지 않았다. 이사 첫날, 유튜브가 추천한 4시간 51분 분량의 95개국의 인터내셔널가 모음을 되는 대로 틀어 놓고 짐을 정리했다. 종이 상자와 포장 비닐로 어질러진 바닥. 기울어진 식탁 옆에서 드라이버와 손걸레를 손에 쥔 채 껴안은 두 사람. 낯설고 새롭고 따뜻했다. “우리는 친한 사이야.” 어떤 예언은 엉뚱한 형태로 전해지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실현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위 문단은 김기태가 쓴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에서 뽑은 문장들로만 적은 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대부분 문장의 주어가 “두 사람”이고, ‘진주는’이 한 번 나오면 ‘니콜라이는’이 바로 나오는 형식으로 둘의 삶이 공평하게 기술되어 있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은 “두 사람의 역사”를, ‘진주’의 삶의 역정과 ‘니콜라이’의 삶의 역정을 동등하게 병렬하여 묘사한 소설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 스스로 자기 삶에 대해 묘사하는 화자가 아니라 제3의 화자에 의해 묘사되는 인물이다. 가령 이런 문장, “그날 봉투 안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단지 그 교무실에서 한 번은 눈이 마주쳤다는 기억.”에서 생략된 주어가 ‘두 사람은’이라고 할 때, 이 문장이 말하는 바가 그들의 ‘기억’이라 해도 그것은 두 사람 각자의 주관성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역사’로 객관화된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둘은 엄연히 분리된 개인들이지만 이 소설에서 둘의 신상은 따로 묘사되지 않는다. “언젠가는 흰 봉투 안에서 정말 무서운 것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라는 문장과 “볼빨간사춘기가 1인 그룹이 되는 사이 맥도날드와 김밥천국으로부터 홍콩반점과 할매순댓국으로 혼자 갈 수 있는 음식점이 늘어났다.”라는 문장은 같은 차원의 서술, 동등한 수준의 재현이다. 이러한 재현에는 화자와 대상 사이에 원근감이 없다. 재현의 가시성 - 재현되어 드러난 것 - 이 말하는 이의 특정한 위치(높이/깊이)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라 말해진 것들의 동등(평평/평등)한 평면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 두 사람은 이런 질문에 도달했다. “우리가 그렇게 잘못 살았냐?” 빨간 모자를 쓴 해병 병장은 네가 선택한 길이니 악으로 깡으로 버티라 했고 김정은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추노꾼 장혁이 오열하며 삶은 계란을 씹었고 개구리도 눈물을 줄줄 흘렸다. 물에 젖고 물만 맞는 여기는 아마존. 안 젖을 수 없는 여기는 아마아마 아마존. 쿨하고 펀하고 섹시한 미소를 짓는 옆 나라의 정치인. 인생이란 역시,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끄덕). 둘리가 답했다. 아이 싯팔.

소설에서 이러한 서술은, 삼차원의 깊이감 또는 공간감을 지닌 ‘현실’과의 유사성을 담보하지 않는다. 또한, 화자와 대상 간의 거리 감각이 원근법과 무관하게 유지되므로 개별적인 것 – 화자의 위치 – 을 대의representation하지 않는다. 이런 재현은 화자-주체의 현실에 대한 인식, 영감 등에 지배되는 허구세계가 아니라 화자-주체와 현실 사이의 간극에서 무한히 다르게 발생하는 허구세계를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허구성’은 작가의 창조력이 아니라 이야기와 현실 사이의 간극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실을 이야기로 매개하는 소설의 전통에서 이는 (현실 또는 현실을 바라보는 주체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 한계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 또는 현실에 존재하는 객체를 더 잘 보게 해주는 가능성이다. 현재 소설이라는 형식이 직면한 문제, 가령 이야기의 화자-주체가 재현하는 현실성 – 리얼한 것, 진정한 것 등 – 이 야기하는 문제는, 현실을 허구화하는 언어의 무능 또는 재현 가능성의 한계가 아니라 현실의 ‘현실성’을 고착하는 재현 체제의 위계 또는 허구성에 관한 고착된 이념이기 때문이다.

여하간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에서 그려진 “두 사람의 역사”는 이 세계의 ‘리얼한 현실’ 또는 ‘진정한 삶’ 등을 표방하기보다 두 사람을 통해 볼 수 있는 세계의 일부를 허구화한 것이다. 이들이 살아가는 세계는 “우리가 그렇게 잘못 살았냐?”라고 자문할 만큼 이들에게 난관을 주지만, 자신의 삶을 지탱하려는 이들의 노력은 그 세계를 이탈하지 않으며 어디에 거처를 정할지 모색하고 마침내 둘의 자리를 매기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둘은 서로에게 의존하는 존재가 됨으로써 스스로 삶을 지탱하고 삶에서 자유를 얻는다.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실현”된 둘의 ‘친한 사이’는, 서로 살도록 돕는 사이, 삶을 위협하는 것에 대해선 “기립하시오!”라고 함께 외치는 사이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진주’와 ‘니콜라이’가 ‘진주와 니콜라이’라는 ‘친한 사이’로 연합할 때, 이 연합은 하나로 통합되는 ‘글로벌’이 아니라 상호 교류하는 ‘인터내셔널’이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이라는 ‘친한 사이’에서 각자는 ‘스스로 자리매김하는(se situer)’ 행위의 주체이자 객체이며, 두 사람이 함께 형성한 ‘친한 사이’는 행위하는 주체보다는 이 세계의 한구석에 자리 잡은 객체로서 묘사된다. 마지막 장면, 둘이 마련한 거처인 “낯설고 새롭고 따뜻”한 그곳은 이들이 바라보는 ‘풍경’이 아니라 이들을 “낯설고 새롭고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장소’인 것이다.

- 즉석밥과 계란, 반창고와 감기약, 섬유유연제와 블루투스 스피커 등을 ‘친한 사이’ 해버렸고, ‘도망가면 안 친한 사이’라며 대청소 날을 정해 손가락을 걸었다. 니콜라이는 누구도 근황을 모르는 앙맨에게 ‘앙 맥주띠?’로 끝나는 메시지를 남겼고, 진주는 일 년 넘게 업데이트가 없는 힝구의 채널에 ‘힝구야 안녕’으로 시작하는 댓글을 달았다. 둘 다 답장은 받지 못했지만 ‘좋은 친한 사이 시도’였다며 서로 칭찬했다. 정전을 계기로 앞집 부부와 배드민턴을 쳤다. 부부가 대접한 더운 나라의 음식이 입에 맞진 않았지만 접시를 비웠고, 그 집 꼬마가 리코더 연주를 뽐냈을 때 박수를 쳤다. 집에 돌아와 ‘우리 오늘 이웃이랑 친한 사이 해버림’이라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둘의 거처가 된 이 장소가 위와 같이 그려질 때, 사람도 사물도 사건도 다 ‘친한 사이’ 해버린 이곳에 드러나 있는 모든 존재들 사이에는 어떤 상호작용이, 아마 ‘인터내셔널’이라 말해도 좋을 일종의 사회 작용이 일어나고 있는 듯하다. 이 작은 ‘사회’는, 이들의 미래를 닫힌 봉투 안에 넣어 놓고 때때로 삶을 형벌로 느끼게 하는 이 세계 – ‘한국 사회’라고 할 수도 있는 - 의 ‘사회적’ 관계들의 그 ‘사회’와 대비한다면 차라리 비사회적인 관계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사회’ 아닌 사회, 사회-너머-사회를 있게 한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이, “이백년 전 프로이센에서 약간의 시차를 두고 태어난 두 사람”이 선포했던 ‘혁명’과 그때 불린 노래, 그리고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Workingmen’s association)’의 명칭과 공명하며 동시대 현실의 한 평면을 드러낼 때, 문득 “엉뚱한 형태로 전해”진 사회주의 혁명의 그림자가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실현”될지라도 “어떤 예언”의 형태처럼 거기에 드리워져 있는 것을 전혀 못 알아보고 지나치기도 어려울 것이다.


‘우리-객체’가 열리는 순간

박상영의 『믿음에 대하여』에는 2020년 코로나19의 대유행 이후 2-3년간 한국의 젊은이들이 일터의 노동과 개인적 애정 관계에서 겪는 위기들을 그려낸 네 편의 이야기가 모여 있다. 각 편의 중심인물 – 이름이 부제로 달려 있는 - 이 다른 편의 주변인물로 등장하므로 소설집 전체를 통해 더 큰 하나의 배경 속에서 인물의 구도와 사건의 앞뒤를 가늠할 수 있는 옴니버스 구성이다. 부제 중 유일하게 두 사람 ‘유한영과 황은채’의 이름이 달린 「우리가 되는 순간」은 “사내 정치가 팽배한 대기업 마케팅 본부 산하의 한 신생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자기 자신을 포함한 여러 사람을 가리키는 대명사 ‘우리’가 결합하고 갈라지는 장면은 ‘각자도생’의 논리가 승인되어 가는 과정과 그 필연적 한계들에 대해 질문하게”1)하는 이야기라고 먼저 말해 볼 수 있다. 회사에 새로 스카우트되어 온 황은채 팀과 유한영이 함께 콘텐츠 기획에 성공을 거두면서 둘 사이에 신뢰와 우정이 쌓여 간다. 하지만 “싸워서 이기는 것”(154)을 기본 생리로 삼은 회사 생활에서 “고작 여기서 멈추려고 그 고생을 하며 바득바득 온 거야?”(151)라는 물음이 조장하는 경쟁심과 자기연민, “우리같이 여대 나온 사람들”(166)과 같은 말이 환기하는 동지의식 또는 피해의식 등을 깡그리 무시한 채 언제까지나 유지될 수 있는 동료애나 팀워크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한영과 은채’뿐 아니라 ‘진연희와 한영’, ‘진연희와 은채’, ‘한영과 찬호’, ‘진연희와 김무진’ 등, ‘우리 회사’의 상황과 구도에 따라 ‘우리’는 다르게 묶일 수 있다.

그러나 “인생, 어차피 각자도생”(154)이라는 말에 ‘우리 회사’의 모두가 함께 고개를 젓지 못한다 해도, ‘인생’, ‘어차피’, ‘각자도생’이라는 단어들에 모두가 한뜻을 품은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 회사’가 건재하는 이 세계는 안정된 가족 구성을 사회적 경제적 (재)생산의 근간으로 삼는 규범이 상식화된 곳으로서, 혼인, 출산, 육아 등을 각자의 개인적 선택으로 돌리는 동시에 노동과 임금에 관한 사회적 계약에 그 개인사가 결정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모순이 자연스러워진 사회다. ‘회사’로 대변되는 이 부조리한 사회에서 특히 여성의 삶과 퀴어의 삶은 규범에 저항적으로만 존속 가능하다. 한영이 은채에게서 내내 연상하는 ‘리나 이모’, “모든 것을 투쟁해서 얻어”(136)냈으나 갑작스레 죽음을 목전에 두게 된 그녀의 ‘인생’이 한편에서 증언하듯이, 여성의 ‘사회적 성취’는 모질거나 좌절하거나 허망해지기 쉬우며, “여대를 졸업해 아이를 낳고 지금까지 회사에서 살아남아 임원 승진의 문턱에서 좌절하고 만 진연희의 삶”(167)과 “그냥 열심히 살았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돼버렸지”(160)라고 중얼거리는 은채의 앞길이 얼마나 멀지 확신하기 어렵다. 은채의 십여 년 후를 상상하며 리나 이모를 보고 싶어 하는 한영의 마음, “김무진과 진연희의 차이에 대해서” “또 은채와 자신을 둘러싼 소문에 대해서”(167) 한참 동안 골몰해지는 한영의 이런저런 생각들은, ‘어차피’ 모든 관계를 경제화하는 이 회사/사회의 규범과는 어긋나는 퀴어의 ‘인생’과 분리된 의식이 아니다.

은채는 하필 남자친구와의 관계가 가장 위태로워지고 회사 내 팀워크가 깨질 지경이 된 이때 임신을 했다. 한영은 자신의 퀴어성을 온전히 이해해 주었던 리나 이모의 투병 소식에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회사에서 ‘밀접 접촉자’가 된 이 둘이 바이러스 검사를 받기 위해, 퍼붓는 폭우와 대규모 집회를 뚫고 “우산 하나를 나란히 받쳐 쓴 채” “마치 세찬 폭포를 거스르”(174) 듯 힘겹게 걸어가는 모습은, ‘회사’라는 사회에 속해 다른 ‘우리’ 중 하나가 될 수도 있었을 ‘한영’과 ‘은채’가 이제 그 회사/사회에 반(反)하는 ‘한영과 은채’로서 ‘우리가 되는 순간’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이들 ‘우리’는 여성과 퀴어의 연합이자, 회사/사회의 정치경제학적 구조와는 맞지 않는 사회적 관계로 맺어진 연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되는 순간’은, 생산성만 강조하는 회사/사회에서 ‘각자도생’의 논리를 내재화한 경제적 주체되기를 거부하는 순간, 경제화 된 관계 너머로 지속되는 ‘다른 사회’를 열어내는 순간이다. 회사 생활을 끝내지 않는 한 멈출 수 없을 이들의 각개분투와 상호연합은, 관계의 경제화에 저항하는 모든 ‘사회적’ 투쟁들과 다른 것이 아니며, 자본주의의 사회경제적 분배와 법적 문화적 인정에 대해 정의를 요구하는 ‘계급투쟁’과 나란히 놓일 수도 있다.

이렇게 말해 봐도 될까. 이 ‘우리’라는 계급은 마르크스가 사회사의 토대로 간주한 물질적 재생산 조건의 생산에 반대한다. ‘우리’에게 생산은 유일한 지평이 아니며, 거의 배타적으로 생산과 재생산에 입각해서 사유하는 사회주의의 정치경제적 나침반은 오늘날 계급의 풍경을 설명하기 어렵다. 기계 문명 초기에 그랬듯, 오늘날 문명의 변화된 조건 속에서 새로운 모순과 위기에 봉착한 인간 사회는 그 존속과 재생의 과정을 다르게 그릴 것을 요청한다.2) 과거 사회민주주의가 번성했던 시기에 정치적 논쟁은 국가를 토대로 그 내부의 동료 시민 관계의 작동에 관한 것이었고, 사회민주주의 운동 - 사회경제적 분배나 법적 문화적 인정의 정의에 관한 논쟁 - 은 지배 권력의 독점을 통해 근대화, 산업화 등을 수행해 온 국가 체제에 대한 비판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삶을 형성하는 사회적 과정들은 국가라는 토대를 넘은 초국가적 ‘글로벌’ 체제에 속박되며, 이 세계에서 자기 삶을 지속하기 위한 사회적 투쟁은 국가 체제의 토대가 아니라 ‘인터내셔널’의 영향과 합의에 관한 것이 되었다. 자본주의 체제와 불화하는 비사회적인 ‘우리의 사회’가 보여주는 오늘날 계급의 풍경은 국가 내부의 동일한 시민 관계가 아니라 시민 관계 내부의 갈림에서 부각된다. 한영과 은채가 ‘우리가 되는 순간’이, 광장의 대규모 집회 – 정권 퇴진을 외치는 사람들의 집회 – 를 뚫고 가는 장면으로 집약될 때, 여성과 퀴어의 이 연합으로부터 한국 사회의 ‘광장’ 정치에 참여했던 ‘집합’의 갈라짐을 감지하기는 어렵지 않다. 어쩌면 이들로부터, 광장에서 작동했던 배제와 위계를 조건 삼지 않을 수 없는 또 다른 집합체, 광장 이후 불가피하게 출현한 사회적 집합체가 다시 상상될 수 있지 않을까. “민중으로도 대중으로도 군중으로도 다중으로도 불렸던 집합적인 것에 대해 주체 타자의 이분법을 반복하지 않으면서 근대 이후, 아니 광장 이후를 구상하는 일”3) 이 ‘우리-객체’(들)로 가능할 수는 없을까.

1) 오은교, 「우리의 없는 미래, 우리의 있는 열기」, 『믿음에 대하여』 해설, 274-275쪽.
2) 라투르와 슐츠가 쓴 『녹색 계급의 출현』은, 오늘날 신기후체제에서 사회의 하부구조가 엄청나게 변화하는 가운데 형성 중인 ‘녹색 계급의 출현’을 알리며, 계급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정의를 이어받아 좌파의 전통적인 투쟁을 “연장하고 갱신하는”(27) ‘사회의 저항’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논의에 공감하며, “사회주의의 나침반은 거의 배타적으로 생산과 재생산에 입각해서만 사유하기 때문에, 오늘날 계급의 풍경이 형태를 달리하는 방식을 설명할 수 없다.”(25쪽)고 적힌 대목을 중점적으로 참고(수정 인용)하여 앞의 세 문장을 작성했다. 22~28쪽 참고.
3) 소영현, 『광장과 젠더』, 갈무리, 2022. 12쪽.


우리의 사회주의, 우리의 민주주의

작은 연합, 주변적 집단, 소수자 연대 등의 사회적 집합을 ‘우리-객체’로 포착한 소설들, 이 ‘객체 지향 서사’를 이 시대의 ‘소셜리즘(Socialism) 문학’이라고 불러 보려고 한다. 집단의 상호작용을 합리적 개인-주체들의 경제적 관계로 규제하는 체제에 대한 ‘우리’의 저항은, 지난 ‘사회주의운동’이 관여하고자 했던 사회의 ‘무엇’에 관해서보다, ‘누구’의 사회인가에 관해 더 기민한 입장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사회주의 문학’이라는 명칭과 구별되는 발음을 사용해 본다. 그런데 문학의 전통 안에서 ‘무엇’보다 ‘누구’에 더 민감한 쪽은 아마도 ‘모더니즘’이라고 불려 왔는지도 모르겠다. (사회에 대해 문학이 요구하는 정의가 ‘무엇’을 문제로 겨냥하기보다 ‘누구’를 실례로 발견함으로써 사회를 구성하는 입장들의 민주주의에 기여한 문학가들은 대부분 ‘모더니스트’로 칭해졌던 것 같다.) 이제 ‘우리’의 소설이 ‘누구’의 사회인가를 회의하게 만드는 이 ‘사회’의 배제와 위계를 위로 올릴 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입장들의 민주주의는 ‘소셜리즘 문학’에 의해 추구된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이런 명칭이 이 시대 소설의 유형을 가르는 데 특히 기여하지는 않을 것 같다. 박솔뫼가 쓴 『우리의 사람들』의 <작가의 말>에 나오는 이런 이야기가 생각난다.

- 며칠 전에는 소설을 쓰면서 무척 재미있다고 느꼈다. 사실 예전에도 줄곧 재미있었다. 이전의 재미와 지금의 재미는 어떻게 다를까. 재미가 아닌 다른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게 무엇일까 싶을 때도 있지만 그걸 더 생각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역시 소설은 조금 이상해서 내가 예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예전이지만은 않다고 이야기를 한다.

‘소설 쓰기’에 관한 소설가의 생각을 ‘소설 읽기’에 관한 비평가의 생각으로 바꿔 보았다. “이전의 재미와 지금의 재미는 어떻게 다를까.” “내가 예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예전이지만은 않다” 이런 말들이, 예전에 재밌었던 ‘모더니즘’ 소설이 한 일을 지금은 ‘소셜리즘’ 소설의 일이라고 말하고 싶어진 사정을 대변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고유명을 가진 ‘주체’를 따라가며 재미있던 읽기가 아마 “예전이지만은 않”은 일일 것이나, 익명으로 남은 ‘객체’들을 비추는 말하기의 방식에 주목하며 재미있게 읽은 소설들에서 더 많은 사람들과의 관련성을 느끼는 지금도 할 말이 많아 이토록 긴 글을 쓰고 만 것이다.

최근 한국 소설에서 이 시대의 개인들을 ‘우리’로 연결하는 관계의 객체성을 포착하여 ‘객체 지향 서사’라고 부른 데는, ‘소설의 주체’가 부재하거나 무용하거나 불필요하다는 판단이 개입해 있지 않다. (‘우리’는 대개 주어로 쓰인다.) 이 글에서 살펴본 ‘우리’의 이야기들은 개인의 자기-동일적인 고유한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인물-주체의 위치가 아니라 다양한 타인들과 함께 목격되고 증언됨을 통해 드러나는 인물-객체의 자리를 재현한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우리’라는 연결의 자리이자 자기-객체화가 가능한 자리, 우리-주체의 형상이 아니라 우리-객체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소설들은, 다시 말하지만 제목에 ‘우리’가 표기되거나 소설의 주인공이 다수인 경우에 한한 것이 아니다. 객체 지향 서사에 관한 논의는 무엇보다도 소설의 형식과 관련된 질문이어야 하고, 따라서 이 글은 소설과 현실, 텍스트와 삶, 문학과 사회 등의 쌍을 함께 사유하며 그 교차 가능성을 타진하고자 했다. 우리 소설의 동시대성과 소설을 쓰거나 읽는 우리의 동시대적 사회성이 중첩됨을 드러내고자 했다.

백지은
작가소개 / 백지은

문학평론가. 『독자시점』, 『건너는 걸음』, 『그때 그 말들』을 출간했다.


《문장웹진 2023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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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속 부동산과 젠더 정치학 전지니(한경국립대 교수) * 이 글에는 종결되지 않은 웹툰과 올해 공연된 연극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투기와 여성 이 글은 한국의 부동산 현실, 그중에서도 전세 사기로 집약되는 부동산 범죄를 다룬 웹툰과 연극을 겹쳐 보려 한다. 이를 통해 동시대 대중문화 텍스트 안에서 자산 증식에 대한 소시민적 욕망이 어떻게 젠더화되어 형상화되는지를 살피고, 여성을 범죄의 가해자 혹은 피해자로 배치하는 작품 속 시도가 갖는 양면성에 대해 조망한다. 논의할 작품은 표제에 부동산을 내세워 비슷한 시기 독자, 그리고 관객과 만난 (유기 글/그림, 2024.1.13.~연재 중), (김수정 작/연출, 2023.10.14.~22.(초연), 2024.6.1.~9(재연)) 등 두 편이다. 부동산과 여성을 관련지어 논의하는 경우는 본격적인 강남 개발 이후인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다. 부동산 가격 상승과 서민의 박탈감, 중산층 진입의 욕망 등의 문제는 박완서의 강남 아파트를 산 교수 부인의 이야기인 「낙토의 아이들」(1978)에서부터 시작해 재개발을 둘러싼 부녀회의 욕망을 다룬 웹툰 (스토리 매미/작화 희세, 2019.05.05.~2020.09.27.)까지 꾸준히 반복되었다. 염두에 둘 점은 (유하 작/연출, 2015), (연상호 작/연출, 2018)의 경우처럼 대중문화 속에서 개발·재개발의 역학관계를 다룰 때는 남성 인물이 이야기의 중심에 놓이지만, 개발의 수혜를 입고자 하는 소시민의 욕망을 다룰 때 그 중심에는 여성이 자리한다는 점이다. 관련하여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불안한 경제상황 속에서 반복되었던 투기는 여성의 것으로 전유되는 일이 빈번했다. 전쟁 이후 사회 혼란의 주범으로 간주되었던 ‘사설계’를 주도하는 부인들이나 1970년대 후반부터 매체에 오르내린 부동산 투기의 주범 ‘복부인’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은 근현대사 속 뿌리 깊은 여성 혐오와 직결되어 있다. 정치·사회적 불안으로 발생한 투기 심리를 여성의 전유물로 간주하며 문제의 핵심을 피해 가고 비판의 대상을 국가와 체제가 아닌 여성으로 지목한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여성이 투기에 몰두하는 이유를 심리학적,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기사도 있었다. 한 언론은 “복부인의 욕구 단계는 생리 욕구와 안전 욕구의 원시적인 단계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며 여성이 상대적으로 안전 욕구가 강하고 사회 진출이 부진한 것을 복부인이 생기는 이유로 분석하기도 했다.1) 이 와중에 투기를 여성의 것으로 지정하는 데 대한 자성의 목소리도 있었다. 1984년 한 신문 독자는 신문 기고를 통해 ‘복부인’은 여성 천시 단어로 공공매체에서 이 같은 유행어를 쓰면 안 된다고 역설한다. 그는 “이는 여성 학대의 사회적 악습에서 오는 콤플렉스를 여성의 사회 유린이라는 감정으로 희석시키려는 ‘투사’ 심리요, 또한 일종의

  • 관리자
  • 2024-10-01
휴먼들의 소화불량, 비인간-사물의 매혹

휴먼들의 소화불량, 비인간-사물의 매혹 황녹록 밖에선 바퀴벌레의 신음소리 아버지가 숨겨 둔 약을 먹은 것입니다 어머니 내 책상 위에 아버지가 피운 모기향 좀 치우세요 시집 위에 몸 약한 날벌레들 다 떨어지잖아 동생 문 열고 들어옵니다 나는 문밖으로 재빨리 나가려고······ 동생이 소리 질렀습니다 여기 또 있어 진은영, 중1) 오래된 사물, 거슬리는 존재감 이제 우리는 반려인, 반려동물, 반려식물, 반려미생물, 반려사물 등 반려종의 경계를 구분 짓지 않기로 한다. 반려종이란 서로의 밥을 나누고 몸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는 관계를 뜻하는 말로 어떤 물질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를 의미한다. 반려들은 나눔의 상호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못지않게 서로를 위태롭게 하고, 서로 먹다가 소화불량이 되기도 하고, 때로 죽고 죽이는 유해성의 성분도 가지고 있다.2) 그리하여 누군가의, 무엇인가의 반려가 된다는 것은 결코 무구할 수 없는 관계 속으로 이끌려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과 비인간 반려들의 낯선 이물감으로 시작되는 관계맺음은 애초에 구역감과 체기(滯氣)를 동반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관계맺음은 일상 속에서 예기치 못한 만남으로 강제될 테고, 그로부터 서로를 향한 진지한 응시의 요구가 시작된다. 그 응시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물음과 응답의 이야기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새로운 관계맺음에 대하여 ‘영원한 동반자’라는 환상을 기대하거나, 우정 어린 돌봄으로 윤리적 책임을 지우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다른 존재들의 있음을 감각하고 그 감각에 감응하는 관계로서 반려를 말하려는 것이다. 김초엽의 소설 『지구 끝 온실』3)은 SF적 상상력을 통해 인간 지수와 사이보그 레이첼, 레이첼과 희귀식물 모스바나, 그리고 모스바나와 이희수의 혼종적 관계맺음에 대한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종의 경계를 넘어선 존재들의 반려-되기는 멸망해 가는 지구 끝에서 찾아내는 희망의 메시지로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나아가 구원의 식물(푸른빛)이자 악마(생태계의 위협적인)의 식물인 ‘세발갈고리덩굴’의 이중적 존재감은 반려들의 관계로부터 인류의 재건과 구원의 (불)가능성에 대한 적극적인 타진으로 읽어 볼 수도 있다. 꽤 오래전 카프카는 그의 단편에서 규정할 수 없는 것들, 식별 불가능한 반려들의 존재감을 감지한 바 있다. 카프카의 작은 존재들은 경직된 습관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다양한 실험과 그 과정에서 예기치 않게 발생된 감염의 산물이다. 카프카의 비인간-사물들은 서로를 반려종으로 여기기에는 아직 미심쩍고 불안한 상태로 존재한다. 오드라데크(Odradek)4)는 낡은 실타래 조각처럼 묘사할 수 없는 형태를 띠고,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듯한 웃음소리를 낸다.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 분명하지만, 가장(家長)은 자신이 죽은 후에도 오드라데크가 계속 살아 있는 것이 근심스럽다고 고백한다. 또 있다. 반은

  • 관리자
  • 2024-10-01
한일 문화의 초국적 접점과 ‘마주침’의 서사학

한일 문화의 초국적 접점과 ‘마주침’의 서사학 : 동시대 한국 소설 속 ‘일본’이라는 물음 정창훈 올해 상반기 일본 방송가는 ‘한일 로맨스’로 뜨거웠다. 한국인 배우 채종협(작중 윤태오 역)과 일본인 배우 니카이도 후미(모토미야 유리 역)가 공동 주연을 맡은 드라마 가 그것이다.1) 이 드라마는 채종협을 단숨에 한류 톱스타로 만들며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은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여러 OTT 플랫폼이나 케이블 TV채널을 통해 방영되며 화제가 되고 있다. 나 역시 이 드라마를 매회 빠짐없이 챙겨보았는데, 기대 이상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다고 생각한다. 이 두 인물의 연인 관계에 시련이나 위기를 가져오는 여러 갈등의 요인들이 있었으나, 그 가운데서 국가적, 역사적 문제와 연관되는 요인을 끝내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오히려 신선했다. 국적(내셔널리티)과 언어, 생활관습의 차이는 둘 사이의 장벽이 되기는커녕 상대에 대한 관심을 극적으로 심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가족이나 주변인들도 이 둘이 한국인,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둘 사이를 반대하진 않는다. 이것은 종래의 한일 서사물에서 양국 인물의 연애사를 그려 온 방식과는 차별화되는 것인데, 이를 통해 ‘이례적인’ 해피엔딩의 결말이 주어진다. ‘한일 로맨스’ 자체가 이례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른 아시아 이웃들의 경우와 비교했을 때, 한일 양국 인물의 만남을 그린 서사적 재현이 여러 차례 반복되어 온 점, 나아가 오늘날 그 재현의 양상이 현저히 다양화되고 있다는 점은 주목을 요하는 현상이다.2) 물론 나쁘게 말하자면 이 드라마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정치적, 역사적 이슈를 정교하게 회피함으로써 구축된 가상의 이야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는 한국과 일본이라는 이웃이 서로를 감각하는 방식에 새로운 무언가가 ‘첨가’되고 있음을 예시하는 것이 아닐까. 돌이켜보면 지난 몇 년 동안 한국 소설은 이러한 변화에 한 발 앞서 민감하게 대응해 온 것으로 보인다. 여러 가지 껄끄러운 문제를 공유한 ‘오랜 이웃’과의 ‘새로운 관계’를 상상하는 시도가 동시대 소설 속에서 계승되어 온 점, 이 글은 거기에 새삼스레 주목하려 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움직임이 가져온 의미를 통시적 관점에서 살펴보기 위해, 잠시 과거로 돌아가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현해탄 서사’ 이후, 한일을 넘나드는 월경의 서사 근대 이래 한일 관계에서 ‘현해탄’은 상징적 의미를 지녀 왔다. 특히 식민지-제국 체제의 해체 이후 그것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의 바닷길(대한해협)’이라는 외시적 의미만이 아니라 역사적, 정치적 문제 등으로 인한 한국과 일본의 ‘가깝고도 먼 관계’(심리적 거리감, 국가적 입장의 차이 등)를 가리키

  • 관리자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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