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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생태계

  • 작성일 2023-06-01
  • 조회수 2,089

문학과 생태계

김미정


   1. 자연은 인간과 대립하는가? 생태계는 자연만 의미하는가?


   자주 사용하는 말이니 잘 알고 있는 듯한데 왠지 명쾌히 설명하기 주저되는 말이 있다. ‘생태계(生態界)’라는 말 역시 그러한 것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영역마다 정의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이 말은 대체로 ‘생물의 군집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무생물적 환경으로 구성된 생태학적 단위’를 지칭한다는 데 이견이 없는 듯하다. 그런데 왠지 ‘문학과 생태계’란 어딘지 특정 주제, 가령 기후나 환경의 문제에 문학이 개입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우선 연상시키니 이야기의 범위를 제약해야 할 것 같은 느낌도 지울 수 없다. 그런데 이 글이 애초에 시장 대신 생태계라는 말을 통해 문학을 상상해 보려 한다는 아이디어를 이전 회차에서 언급했듯, 이는 특정 주제(ex. 기후위기, 생태위기 등)를 강조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생태 문제보다 오히려 생태에 대한 통상적 관념 자체를 문제화하고 싶은 쪽에 가깝다고 해도 좋겠다.
   그럼에도 생태계라는 말이 자연=생태의 주제를 포함하고 있는 한, 그리고 그러한 주제를 강하게 환기시키는 한, 잠시 그에 대한 관점을 짚어 두는 것도 필요할 것 같다. 방금 생태계의 사전적 의미를 대략 적어 두었지만 실제 생태계는 생물, 무생물 혹은 유기물, 유기물 식의 자연과학의 언어를 통해 이해되어 온 개념이다. 또한 생태는 곧 자연이라는 말과 바꿔 이해될 때도 많다. 그런데 생태, 생태계를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는 첫 번째 난관이 바로 이 ‘생태=자연’으로 이해되는 방식이다. 이것은 대체로 이른바 인간vs.자연, 문명vs.생태 식의 자연스러운 이분법 도식을 전제로 한다. 예컨대 인간의 문명, 문화란 주어져 있는 자연을 개척하고 인위적인 힘을 가해 가공해 낸 산물로 이해된다. 이때 이미 인간, 문명, 문화는 자연이나 생태라는 범주와 늘 대립적이고 경합하는 존재이고, 이러한 도식이 우리에게는 꽤 자연스럽다.1)

   이 인간vs.자연, 문명vs.생태 식의 이항대립적 관념이 지닌 한계는 코로나 시국을 겪으며 간헐적으로 이야기되기도 했으나, 대체로 이러한 도식 자체는 우리 스스로 반성의 전제가 되는 것이기도 했다. 가령 코로나 바이러스가 불가항력적 재앙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초래한 것이라는 성찰, 또는 인간과 문명이 자연과 생태를 타자화하며 개척하고 정복해 온 역사를 반성하는 논리에는, 자연스레 이러한 이분법이 전제되어 있다. 특히 자연스레 (바이러스의 확산, 변종화와 무관할 리 없을 기후위기의 의제를 포함하여) 지난 수년간 인류가 겪었던 고난은 공히, 인간이 교란하고 훼손시켜 온 자연의 보복으로 인지되기도 한다. 위기와 재난의 상황은 궁극적으로 인류가 초래한 것이므로 인간 스스로를 향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윤리적 성찰도 폭넓게 공유되어 왔다. 이때 타자·자연 등은 동일자·인간(문명)의 폭력으로부터 구출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지고, 거기에서 다시 시작하자는 대안이 제기되곤 한다. 
   그런데 이때 타자·자연 등이 손쉽게 피해자의 형상 혹은 숭고한 대상으로 환원되면서 다시 바이러스를 퇴치해야 할 적·타자로 상정하고 박멸, 정복해 간 근대 과학의 논리가 거꾸로 오버랩된다. 타자를 지목하고 명명하면서 동일자를 구축해 간 근대의 세계관이 바로 이러한 논리 구조를 지니고 있음은 물론이다. 주지하듯, 근대의 제국주의는 나/너, 동일자/타자의 명료한 분할선을 전제하고, 외부로서의 너·타자를 계속 발견하며 전개되었다. 비서구는 야만(자연)이라는 타자로 지목되었고, 그것은 문명화라는 이름의 식민화에 합당한 논리를 제공했다. 인간의 권리를 토대로 성립한 근대국가 역시 ‘인간 아닌 자=비인간’을 외부로 거느리면서 작동해 왔다. 근대 자본주의 역시 자연을 인간의 외부에 놓인 대상으로 간주하며 끊임없이 자본 축적을 해왔다. 
   즉, 타자·자연을 인간(문명)의 외부에 두고 그것에 대한 인간의 행위성이 강조될 때의 성찰은 종종 바이러스와 감염증을 퇴치되어야 할 적으로 간주하는 근대적 타자관의 전제(도식)와 그리 멀지 않다. 물론 지금, 오늘날 가까스로 인간 스스로를 성찰하게 된 이러한 논의의 방향과 윤리 자체를 부정의 대상으로 놓으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바깥을 발견하고 구분선을 명료화하며 작동해 온 세계의 원리와, 타자로서의 바이러스에 대한 상상이 정확히 닮아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나아가 기후위기, 팬데믹 등으로 상징되는 위기 상황을 성찰하고 극복했던 논의들 역시 ‘동일자·문명·인간vs.타자·자연’의 구도를 자연스러운 전제로 놓을 때가 많다. 타자나 자연은 여전히 일방적인 대상의 자리에 놓일 때가 많다. 이러한 분할을 전제하는 논의에는 종종 “사물에 일방적으로 작용하는 인간의 행위성”2)이 강조된다. 그러한 전제하에서 여전히 인간(동일자) 중심주의는 거꾸로 놓인 거울처럼 작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자연은 늘 인간을 통해서 작동하고 동시에 인간은 늘 자연을 통해서 행위해 왔다3). 바이러스는 인간의 행위에 대한 자연의 보복이나 단죄가 아니라 인간-비인간, 인간-자연이 공생하고 얽히고 변형되고 산출된 결과다. 그런데 거기에서 인간의 반대편에 놓인 항들은 인간의 정당성을 확증하기 위해 부정적 이미지로 환원되고, 때로는 인간의 성찰을 위해 과도하게 낭만적이거나 유토피아적으로 파악되곤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에서 인간/비인간, 인간/자연, 동일자/타자 식의 경계선을 포기하거나 폐기하자는 방향의 이야기도 다소 신중할 필요가 있다. 경계를 무화시키기에는 현실의 역학이 이미 그 경계를 강력하게 규정짓고 있기에, 특정 양태마다 존재방식(ex. 인간, 비인간)의 차이를 지우는 것만이 목적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2. 스며듦과 얽힘의 원리


  이것은 결국 생태, 생태계를 통상적인 ‘자연’의 이미지, 이해로부터 이탈시키고자 하는 이야기다. 인간과 자연, 문명과 생태가 독립적이지 않다는 것, 애초에 서로를 공동 생산하는 방식으로 서로에게 작동해 왔고 생태를 그러한 ‘얽힘’의 장으로 상상해 보자. 그렇다면 이때의 생태란 반드시 기후위기, 생태위기 등의 긴급한 사안에 직접 개입하기 이전에 ‘인간’에게 이 세계의 시선과 발화와 행위성을 독점시켜 온 우리 스스로의 사유를 다소 후경화시키는 개념이기도 하다. 인간만이 이 세계를 보고 만지고 말하고 바꾸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 생물, 무생물, 그리고 각종 마주침에 의해 촉발된 정동이나 사유, 심지어는 언어로 구조화된 담론 등 모든 요소가 서로 얽히고 어떤 식으로건 연결되고 때로는 제3의 무언가를 산출해 내는 식의 관계가 곧 이 세계의 행위력일 수 있음을 생각해 보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지난해 출간된 소설집의 소설들을 읽다가 이 점을 각별히 생각해 보게 된 장면이 하나 있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다소 길지만 첫 단락을 인용해 본다. 
   “트렁크는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굳이 마음을 먹지 않더라도 언제고 이곳을 떠날 수 있었다. 떠나는 이유도 필요 없었고 떠난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저, 떠나면 되었다. 처음 트렁크는 침대 밑에 누워 있었다. 그러다 들어가고 나오는 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가끔은 먼지도 뒤집어써야 했고 침대의 삐걱거리는 소음을 참아야 하기도 했다. 트렁크는 문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것도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문을 여닫을 때마다 걸리적거렸고 가끔 문에 부딪혀 상처를 입기도 했다. 거실 한복판에 자리를 잡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곳만큼 재미없는 곳은 없었다. 손님이 올 때를 제외하고는 늘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손님이란 게 1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하다는 것이었다. 그 후 트렁크는 현관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겨울의 냉기를 견뎌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으나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트렁크로서는 언제든 떠날 수 있어 더없이 기뻤다.”4)
   3인칭 시점임이 분명한 이 대목에서 초점 화자는 트렁크다. 그런데 계속 읽어 가다 보면 또 하나의 초점 화자로서 그녀가 부상한다. 여기에서는 인간(여자)의 시점도 사물(트렁크)의 시점도 명료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여 트렁크는 여자의 심정이 투사된 사물도 아니고, 알레고리에서와 같이 의인화된 사물도 아니다. 
   예컨대 “처음 트렁크는 침대 밑에 누워 있었다. 그러다 들어가고 나오는 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는 대목은 트렁크의 관점에서도 그녀의 관점에서도 동시에 진술될 수 있는 의미내용을 갖고 있다. “문을 여닫을 때마다 걸리적거렸고 가끔 문에 부딪혀 상처를 입기도 했다.”는 문장에서 상처를 입는 주어는 트렁크로도 트렁크를 이동시키는 여자로도 읽을 수 있다. 단순히 상호작용으로서 상처를 입히고 입는 관계뿐 아니라, 그 주고받음의 동시적 작동과 그 효과가 암시된다. 그녀라는 인간과 트렁크라는 사물 사이의 명료한 개체적 구획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듦 자체가 언표화되어 있다. 여기에서 행위는 단지 여자나 트렁크에게 독점되지 않고 서로의 동시적 결과, 그리고 그 과정 자체를 의미한다. 행위력은 단지 그녀, 트렁크, 혹은 그 둘의 산술적 혼합으로만 환원되지 않는 그들과 그들로만 지목할 수 없는 요소들의 얽힘에 있다. 제목 ‘울퉁불퉁한 고통’이 바로 그 스며듦, 얽힘 자체를 지시하는 셈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존재들(여자, 트렁크)은, 주체-대상의 주박(呪縛)에서 풀려나 있다. 문장은 사물을 말할 뿐 아니라 사물이 말하게 한다. 소설 전체의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정해진 요일마다 트렁크를 끌고 혼자 머물 호텔을 찾아가는 여자, 그리고 엄마를 세상에서 떠나보낸 여자의 애도의 기록이다. 사물과 인간과 공간이 서로와 접속하고 교차한다. 서술자의 시선은 늙음, 소멸 등의 사건과 감정에 틈입했을 세계 만물의 흔적을 품고 있다. 이때 그 사건들을 둘러싼 감정은 반드시 인간 개별자의 것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또한 삶과 죽음 같은 개념들로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구체적 감각들을 상기시킨다. 슬픔, 외로움 등 몇몇 단어의 조합으로 설명할 수 없을 실재가 암시된다. 
   언어란 (번역이라는 과정까지 포함해서 생각하더라도) 늘 인식, 감각, 정동의 구조, 회로를 공유하고 있는 존재 사이의 매개다. 그러하니 언어는 어딘지 합리적이고 가치중립적인 이미지를 부여받을 때도 많다. 특히 음성, 문자 언어는 소통의 중요한 매개인 까닭에 그 자체가 투명한 도구처럼 상상되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언어야말로 앞서 그것을 사용하는 존재의 인식, 감각, 정동의 구조, 회로를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은 각별히 의식하지 않으면 인지하기 어렵다. 언어 자체가 이미 현실의 성, 젠더, 인종, 장애 여부, 이념 등을 반영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인간종 중심성의 세계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자세한 사례들을 생략하더라도 알아차리기 어렵지 않다. 언어는 늘 편향적이고 특정 이데올로기를 늘 내재하고 있는 도구이자 인식틀인 것이다.
   미학의 언어도 마찬가지다. 앞서 인용한 소설 대목은 기존 미학의 언어로 다시 읽을 때 몰개성화, 소외, 사물화, 모더니즘, 낯설게 하기, 실험 등의 말을 통해 분석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한편으로 앞의 인용에는 이러한 말들의 전제에는 주체/대상, 서술 주체로서의 인간, 인간 인식의 자명성 등으로 수렴되지 않는 이도 저도 아니고 비어져 나오고 새어 나오는 것들, 이른바 잉여가 있다. 기존의 개념들을 통해 말하기에 충분치 않은 솔기들이 있다는 말이다. 즉, 저 장면의 전제에서 우리는 작가의 의도와 별개로 자기 감각과 인식의 확실성에 대한 질문까지 읽을 수 있다. 이도 저도 아닌 듯 보이는 모호한 서술 주체는 단지 믿을 수 없는 화자나 의인화된 사물 식으로 말하기 어렵다. 또한 그렇다고 하여 사물(트렁크) 스스로가 자기만의 단독적 세계를 주장하며 존재 증명을 하는 것도 아니다. 대상으로 놓여 있던 존재를 의인화하여 자기 시선을 말하게 하고 그것을 다시 인간의 인식 가능한 범주로 회수시키는 방식과도 차이가 있다. 다시 강조컨대 저것은 어떤 관계 자체가 만들어내는 시선이고 행위력이다. 
   어쩌면 저 장면은 이 세계를 자명한 것으로 상정하는 우리(인간)의 인식 자체와 그 주체의 불명료함까지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소설 속 트렁크와 여자의 서로 스며듦, 그리고 그 둘뿐 아니라 그들이 지나는 공간과 그 동선, 여자의 어머니, 죽음 등의 이질적 존재와 사건들이 소설 전체의 주제(라고 말해질 것)를 빚어낸다. 나의 눈은 언제나 모든 것을 보고 있지 않고 나의 귀는 모든 것을 듣고 있지 않다. 하지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무언가는 늘 나의 신체를 통과하고 그것은 반드시 인지되지 않더라도 늘 발생하고 있다.  
   여기에서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오래된 인식론의 테제는 물론이고, 내 감각, 감정의 자명성(이라 믿어지는 것) 역시 질문에 부칠 수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식, 감각, 감정의 자명성이라 믿어지는 것이 어떤 메커니즘 속의 일인지 환기할 수 있다. 저 소설이 결국은 죽음과 애도라는 주제로 요약될 때, 그러한 주제 속 감정의 주체는 여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지독한 슬픔의 감정은 여자를 초과한다. 그녀의 소유라고 주장할 수 없다. 원리적으로 감정은 누군가에게 독점될 수 없는 셈이다. 과장하자면 저 소설에서 ‘여자의 슬픔’을 읽는 것은 감히 말하건대 오독이다. 명사형, 개념적으로 ‘슬픔’이라고 말해지는 것은 어떤 이질적인 것들의 마주침, 스며듦, 얽힘의 결과이고 그렇기에 비인격적이다. 그것은 인간은 물론이고 특정 존재에게 환원될 수 없다. 정동(情動, affect)이라는 말이 이럴 때 필요한 것이기도 하지만 굳이 그 말을 구사하지 않아도 이것이 통상적인 감정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를 어떻게 정교화할지는 전달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슬픔을 느끼는 몸은 나지만 나 혹은 슬픔을 개체(개별적인 것)로 환원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것은 ‘슬픔’도 ‘나’도 부정하지 않는 이야기다.
   비유컨대 ‘나’는 반드시 1인칭 단수가 아니라 여러 인칭의 복수일 수 있다. ‘나’라는 대명사를 1인칭 단수로 상상하는 이미지야말로 곰곰이 생각하면 부정확한 것이다. 어떤 사건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늘 이러한 관계 자체가 만들어내는 일시적 결절점이다. 사건의 행위자는 미리 결정되어 있는 인간이 아니라 이러한 이질적인 관계 자체다. 나, 우리는 경험하는 모든 것을 파악하기 위해 애쓰지만 이 세계는 그 노력을 늘 초과해 있다. 이제 대상을 전제로 하는 주체라는 말도 잠시 잊어 두는 것이 좋다. 이러한 행위력을 만드는 존재들에 대해 사물, 객체 등의 용어를 사용하여 설명하고자 하는 오늘날의 여러 논의들5)이 고심해 온 것도 이러한 지점이지만, 그 개념적 엄밀성과 차이는 잠시 부차적이다. 우선은 그 문제의식의 일단(一端)만 확인해 두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3. 문학과 생태


  이 글이 생태, 생태계라는 말을 고민하기 시작할 때 반드시 이러한 인간 인식, 감각, 정동의 자명성부터 먼저 질문해야 했다. ‘생물의 군집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무생물적 환경으로 구성된 생태학적 단위’ 정도로 폭넓게 사용되는 생태, 생태계의 의미는, 자연과학의 분류체계 및 그것에 내재된 명백한 근대의 관점을 통해 지지된다. 자연 보호, 생태 보호와 같은 말들이 위화감 없이 여겨지는 것도,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에 대한 관할과 관리의 권한을 인간만이 독점하고 있다는 인식의 결과다. 또한 이 말들에 위화감이 없는 것은, 인간 아닌 존재가 어떤 힘도 의지도 발휘하지 않는 대상으로만 놓여 있다는 인식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컨대 ‘여성 보호’라는 말의 이상함을 떠올려 보면 자연 보호, 생태 보호 같은 말은 분명 이상한 말임을 알 수 있고, 거기에 무엇이 함축된 것 역시 충분히 이해될 것이다.
   이러한 생태, 생태계에 대해 먼저 근본적으로 고민한 이들, 그리고 그 레퍼런스는 이미 풍부하다. 지금은 절판되었지만 정신의학자이자 철학자이자 활동가였던 펠릭스 가타리가 말년에 쓴 『세 가지 생태학』6)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에는 20세기 말 사회의 위기와 그 해법을 도모하기 위한 철학적 단상들이 담겨 있다. 그리고 가타리는 이 책에서 곧 도래할 21세기의 자본주의가 어떤 파괴적 양상을 보일지 통찰력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이 책의 진가는 생태학이라는 개념을 인간과 대립되는 자연의 개념을 거부하고 사회와 인간의 영역 전체로 확장시켰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발간된 지 30년이 훌쩍 넘은 책이지만 ‘생태’라는 말이 그 어느 때보다 많이 말해지고 피부로 와 닿는 오늘날, 재활성화 되어야 할 개념이나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책이기도 하다. 
   책의 제목이 암시하듯 저자 가타리는 세 가지(‘환경’, ‘사회’, ‘정신’) 측면에서 생태 문제를 고민하며 생태(ecologie)와 철학(philosophie)을 조합한 조어 ‘에코소피(ecosophy)’ 개념을 고안하기도 했다.7) 그는 20세기 말 세 개의 에콜로지 위기에 대해 이미 ‘지구적 규모’로 파악하고 ‘물질·비물질적’이며 ‘유·무형의 재화’ 생산의 목표를 새롭게 설정해야 한다며 정치·사회·문화적 혁명을 눈에 보이는 힘들의 관계를 넘어 정동이나 지성이나 욕망의 분자적 영역 차원에서부터 발생되기를 촉구했다. 환경, 사회, 정신 영역의 생태가 서로를 규정하며 작동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그의 실천 철학은 전개되는 것이다.
   오늘날 혁명 혹은 그에 상응할 만한 변화의 동력이 별로 말해지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변화에 회의하는 정동도 일반적인 것 같다. 그러하니 삼십 몇 년 전의 이야기가 그저 역사적인 것이라고 덮어 두고 싶은 마음도 생길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을 지금 다시 읽으며 무릎을 치게 되는 것은 생태나 이 세계 존재론을 근본적으로 다시 보고자 하는 최근 많은 논의들에 이미 훨씬 앞선 통찰력과 질문을 보여주고 있었다는 점이다. 강조컨대 가타리는 생태를 세 가지로 분류하여 언표화하기는 했으나 그것을 개별적으로 논의하고 있지 않다. 그의 전제에는 모든 요소들이 얽혀 있고 동시에 함께 작동하며 어떤 효과를 창출하고 나아가 이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인식이 놓여 있다. 그리고 전략적으로 그것을 다시 인간의 실천 영역을 강조하는 것으로 논의를 재구성한다. 
   오늘날 철학, 미학의 여러 새로운 논의들이 ‘아직은 존재론의 차원에서만 보자’고 역설하고 있지만8) 그럼에도 가타리는 그것을 다시 인간 관점의 실천으로 돌려 세계를 변화시키는 동력으로 활성화시키는 모순(처럼 보이는) 혹은 논리적 곡예까지 감행한 셈이다. 요컨대 가타리의 논의는 인간 중심성, 주체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하고, 그것을 해체하는 과정을 경유하여, 결과적으로 다시 인간의 결단과 행위의 촉구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 양태의 특수한 방식을 고려하여 이 세계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 그의 고민의 산물이자 일종의 전략이다. 그의 고민의 핵심은 이론이나 담론 내의 해석 투쟁과 별개로 스스로의 논의가 결국 이 세계에서 어떤 행위소(가타리의 표현은 아니지만)로 작동할지에 있었을 것 같다. 그의 개념을 빌리자면 세계가 달라지기를 바라는 ‘욕망들=강렬도’의 표현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논의는 지금 문학을 하나의 생태, 생태계로 상정해 보려는 관점에도 큰 자극을 준다. 예컨대 『세 가지 생태학』은 당시 ‘환경 에콜로지’의 문제에 대해 집단적 생존양식의 틀을 바꾸고 ‘정신의 에콜로지’ 역시 재편성해야 한다고 보았으며, 한편 ‘사회적 에콜로지’ 문제에 대해 이 세계에 대한 인간의 수탈적 관계를 질문하며 욕망, 정동, 지성의 새로운 생태를 동시에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혁명을 위해 세 가지 에콜로지를 임의로 분류한 셈이지만, 실제 그 얽힘의 양상은 예컨대 발효된 치즈에서 우유를 따로 분리해 낼 수 없는 상황에 비유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때 만일 가타리식으로 ‘문학’을 또 하나의 에콜로지로 상정하며 논의를 진행했다고 가정해 본다면, 문학은 예컨대 ‘문학성’, ‘시장’, ‘문단’, ‘미디어’ 등 무엇으로 환원시킬 수 없는 이질적 존재의 관계 자체다. 그리고 문학을 구성하는 무수한 존재의 등가성에도 불구하고 실제 거기에 작동하는 역학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작품 읽기와 쓰기를 넘어 문학이 이 세계를 어떤 식으로 디자인하는지까지 짐작하며 거기에 개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의 1회 차에서 오늘날 (자본주의) 시장이 우리 세계의 압도적 조건이 된 듯 여겨지고, 그것에 문학·예술의 상상력 역시 잠식하고 있지 않은지 질문한 것에는 이렇듯 ‘시장’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얽힘에 나의 욕망, 상상력이 어떻게 연동되며 만들어지고 무언가를 만들어내는지 쪽의 관심에 가까웠다. 그리고 이른바 현실이라고 말해지는 것에 대한 구체적 비판뿐 아니라 그 너머를 상상하고 디자인해 가는 이야기까지 모두 가능하려면 우선은 우리의 인식과 상상력과 믿음을 제약시키는 조건부터 해제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생태, 생태계는 그런 의미에서 많은 이들의 선행된 고민과 흔적을 밟으며 이어받은 말이다. 문학과 이 세계를 다르게 사유하는 방법에 대해 거칠게 요약된 고민이었지만 이 글들을 통해 그것이 조금이나마 공유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적어 본다. 


1) 참고로 이것은 문학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쳐 온 관념이기도 하니 단적으로 서정이라는 장르가 곧 그러한 관념에 근거하는 세계관을 지니고 있음은 여러 시론의 교과서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이기도 하다. 가령 ‘세계의 자아화’라는 서정 장르의 이념 혹은 자연과 인간의 내면을 대척점에 두며 그 통합을 말하는 시 장르의 방법이 바로 이러한 세계관의 흔적 아니었던가. 그러하니 2천년대 이래 가령 미래파라고 지칭된 시인들과 그 이후 세대 시인들의 시가 서정 장르를 근본적으로 질문케 했다는 기존 논의들도, 이러한 이분법적 사유틀로 수렴되지 않는 오늘날 문학 현장의 장면들을 간파했던 셈이다. 2천년대부터 서구 문학계, 철학계에서는 인간 의식이나 감정을 투사하며 추상화되곤 했던 자연관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말해지는데, 사후적으로 돌이켜보면 동 시기 한국어 문학의 서정 장르가 바로 이러한 인식론적 전환을 동시대적으로 선취한 사례가 아니었을까 생각되는 것이다.
2) 제인 베넷.
3) 이 말은 마르크스주의 생태철학자 제이슨 무어의 ‘세계생태론’, 사이토 고헤이의 ‘물질대사론’ 등의 논리 구조를 빌린 말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말은 그저 낭만적인 관점의 말이어서는 안 되는데, 조금 정확히 말해 이 말은 서로 독립적이거나 대척적으로 작동하는 인간과 자연을 상정하지 않고 늘 본래부터 서로를 공동생산한다는 관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4) 진연주, 「울퉁불퉁한 고통」, 『나의 사랑스럽고 지긋지긋한 개들』, 문학과지성사, 2022, 117-118쪽.
5) 가령 이 글에도 영향을 주고 있지만 소위 어펙트, 신유물론이라고 불리는 최근의 여러 논의들이 그러하다.
6) 1989년 프랑스어로 출간되고 2003년 한국어로 번역되었다가 지금은 절판(펠릭스 가타리, 『세 가지 생태학』, 윤수종 옮김, 동문선, 1989;2003)되었다. 잠시 사소한 이야기지만, 이 책에는 미국 전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당시 신흥 부동산 재벌이었던 면모가 잠시 언급되는데, 그의 빈곤층을 홈리스화하던 수완을 “베네치아 해의 간석지를 휩쓸고 가”는 “돌연변이적이고 기괴한 해초들”(26쪽)로 비유하는 비판도 새삼 흥미롭다.
7) 이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그의 『카오스모제』(윤수종 옮김, 동문선, 2003)를 참조하면 좋다.
8) 가령 신유물론이라는 범주로 분류되는 그레이엄 하먼, 레비 브라이언트 등이 그러하다. 또한 참고로 같은 신유물론자라도 결국 인간이라는 특정 양태의 존재 방식을 경유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인정하는 제인 베넷, 캐런 버라드, 티모시 모튼 등의 논의도 있다. 개인적으로 아직은 이 두 계열의 입장을 배타적인 선택의 문제로 보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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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혁명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386세대와 패배하지 못한 혁명들의 시차 임세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퇴근 후에 넥타이를 존나 풀고 찾아와 옛 추억에 잠겨 노래 한 곡 워어어어 케케묵은 노래들을 불러대며 울어대네 아름다운 젊음이여 흘러간 내 청춘이여 너희들이 정녕 민주화를 아느냐 이 손으로 일군 민주주의 대한민국 요즘 어린 것들은 몰라도 한참 몰라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투쟁도 혁명도 이제는 모두 봄날의 꿈 그리웠던 혁명동지 돈을 꾸러 찾아왔네 골프채로 쫓아내니 마음속이 허전해 내일은 미스 김의 보지 냄새 맡아야지 밤섬해적단, 〈386 Sucks〉, 《서울불바다》, 2010. 1. 중단된 혁명 이제는 진부한 제재처럼 감각되는 ‘후일담’의 환멸과 자조 이후 한국 문학에서의 386세대 재현은 익숙하지만 낯선 ‘진정성’의 풍광들을 펼쳐 보인다. 이른바 ‘포스트-진정성 체제’1)에서의 속물들의 세계상은 기실 그 문제적 주체로 호명되었던 386세대뿐만 아니라, 386세대에 의해 다시 지목당한 ‘20대 개새끼론’의 대상이었던 ‘88만원 세대’에게도 벗어내기 힘든 혐의였다. IMF 이후 가속화된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서 20대 빈곤의 원인이 세대 간 착취에 있다는 통찰 가운데 던져진 “토플책을 덮고 바리게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2)라는 조언을 (귓등으로) ‘학습’했던 새 세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이었고, 어디로 향하였는가. 타 세대에 의한 명명 대신 “나는 씨발 존나 멋진 이십대 청춘”3)이라며 타락한 386의 ‘흘러간 청춘’을 조소하던 20대는 어느덧 MZ세대의 선봉으로 싸잡아 묶여진 채 40대의 문턱을 넘고 있다. ‘민주화’라는 ‘명분’ 위에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모두 쟁취한 것처럼 조롱되는 386세대에 대한 냉소는 오늘날 “운동권 특권 정치를 청산하라는 강력한 시대정신”4)을 따르겠다는 한동훈 전 국민의 힘 비대위원장의 취임사로 구현되며 동세대 정치인들의 반발과 분노를 유발하기도 했다.5)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본다면 386세대가 이룩한 ‘민주화/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오염되고 폄훼의 대상이 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민주화 시키다’라는 표현은 386세대에 대한 비판이 본격화되었던 201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강제로 억압하다’는 조소의 뜻을 지닌 채 활용되었다. 입으로는 ‘케케묵은’ 투쟁의 추억을 타령하며 실제 삶에서는 동지를 배신하고 돈과 섹스의 욕망을 좇는 운동권 세대를 저격한 〈386 Sucks〉의 면면은 새로울 것도 없는 386의 전형(stereotype)을 노래한다. 그런데 이 오래된 냉소의 역학 속에서 눈

  • 관리자
  • 2024-07-01
오염, 오류, 오독

오염, 오류, 오독 - 소설이 수행하는 ‘다시’ 황유지 마들렌을 먹으며 과자 부스러기와 차 한 모금이 어우러진 달콤한 환기 속에서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일은 마르셀에게 행복을 준다. 그러나 발벡의 호텔방에서 신발을 벗으려다 문득, 할머니가 신을 벗겨 주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은 그에게 행복감을 주지 않는다. 죽은 할머니를 떠올리는 일, 그것은 “고통스러운 소멸”을 확인시킬 뿐이다.1)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이 일화는 과거를 부르는 일이 각기 다른 정서를 환기함에 대한 예시로 내밀어지며 ‘기억’에 착종되는 다양한 감정이 주체를 어떻게 흔들 수 있는지 넌지시 묻는다. 소멸의 확인도 그렇지만 미완, 불완전, 불만족인 채로 내버려둔 사건에 대한 기억의 소환 역시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인데, 그건 엄연히 그 일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라 모종의 감정적 자원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에서 이런 ‘다시’는 레트로로 나타난다. Retrospect, ‘추억’에 뿌리를 둔 이 말은 패션, 음악, 영상부터 먹거리, 금융상품에 이르기까지 그 반경을 확대하며 과거로 우리의 기억을 끌고 간다. 과거의 소환은 이 사회에 대한 일종의 환각제이자 자본주의라는 무한한 기계적 힘에 대한 제동, 그 중단의 본능적 발현이다. 이런 레트로는 과거에 대한 향수, 노스탤지어의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 고대인들에게 노스탤지어란 ‘되돌아가는 일(nostos)’을 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아픔(algos)’으로 이해된다. 그러니까 레트로는 돌아갈 수 없는(가본 적도 없는) 시절을 향한 자본주의적 환각제이다. 프루스트의 위대한 주제가 사물들을 처음 경험할 때의 무능력이라 파악하는 프레드릭 제임슨은 진정한 경험이 우리가 의식적으로 다른 것을 의도하는 동안, ‘눈가’를 통해 온다면서 그 가능성을 글쓰기에서 찾는다. 기어이 돈을 주고라도 사겠다는 환각성 추억과는 달리 기억을 통한 글쓰기는 상실한 것을 복원하려는 고도의 정신 작업이랄 수 있다. At the corner of eye, 거기가 바로 진정한 경험이 되돌아오는 자리로 가장 의도적인 두 번째 경험, 글쓰기는 그 형식이 된다. 2) 글쓰기는 행해짐과 동시에 복수의 행위자를 탄생시킨다. 쓰는 자와 읽는 자,3) 이는 시차(時差)와 함께 탄생하며 텍스트가 현실과 맞닿은(혹은 결별한) 그 부위에 필연적으로 틈을 만든다. 대체로 모든 문제는 이 ‘틈’에서 태어나는 것처럼도 보인다. 틈은 이미 분리, 분절된 것으로 존재하면서 거기에 무엇을 메우든 결코 원본의 형태를 완벽히 구현할 수 없다. 원본처럼 복원한 것조차 복사본일 따름이라 틈은 그 자체 오류가 되는 것이다(가령 원본이 틀린 것이라 할 때도 제대로 수정된 본은 오류가 된다. 틀린 원본에 대해 기어이 맞추어진 진실

  • 관리자
  • 2024-07-01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이소 1. 스무 살을 훌쩍 넘어 성인이 되어도 자신을 어른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뉴스를 보면 언제나 피해자의 억울함에 몰입하고, 많은 경우 나를 포함하지 않은 채 ‘어른들’에게 분노를 터트리는 사람. 2014년 4월 16일, 이 날 나는 처음으로 어른의 자리에서 사건을 경험했다. 아이의 자리가 아닌 해운회사의 직원이나 공무원이나 인솔 교사의 자리에 서 있었다. 항해사나 해경보다 교사인 나를 떠올리기가 더 쉬웠다. 누구나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기억이 있으니까. 나는 전문가를 깊이 신뢰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내가 그 배에 탔다면 안내 방송을 충실히 따르며 어른들과 시스템을 믿으라고 아이들을 다독였으리라는 걸 알았다. 누가 보아도 나는 완벽히 어른이었다. 굳이 괴로웠다는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그때는 모두가 괴로웠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다음해 문학을 전공하러 대학원에 들어갔다. 누군가 공부라는 게 어떤 실천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런 답변도 떠올릴 수 없다. 나부터가 그런 희망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전처럼 살 수 없을 뿐이었다. 나는 어른이었고,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수습될 수 있는 사고가 아니라 소화할 수 없는 사건이었으며, 내게는 더 정확한 언어가 필요했다. 딱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었다. 2. 지금도 교사인 나를 상상해 본다. 항해사나 해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교사라는 직업과 위치가 내게 어른이란 무엇인지 사고실험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과 달리 미성년인 학생들을 상대하는 교사는 흔히 이중적인 이미지로 재현된다. 전교조와 교총을 교대로 인터뷰하는 기사의 관례처럼, 전통을 수호하는 보수적인 교사와 변화를 추동하는 진보적인 교사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그려지는 건 흔한 일이다. 제도가 부여한 의무와 규범을 학생들에게 어디까지 얼마만큼 요구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한 명의 교사를 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지만, 이 경우에도 그의 심리적 갈등은 그의 교육방식에 딴지를 걸 더 완고한 교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전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코 전위적인 존재에 도달할 순 없지만, 마땅히 후위의 역할은 초과해야 하는 사람. 그러나 생각해 보면 교사만 그럴 리는 없다. 모든 직업은 사회가 요구하는 허용범위 안에서 가까스로 변주를 시도하고, 모든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며 유사한 딜레마에 빠진다. 교사는 자신의 의무를 익히 아는 어른의 상징이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점점 학생보다 교사에게 더 쉽게 이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문제는 오래되고 흔한 방식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현이 더는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데 있을 것이다. 어차피 시대가 변한 줄 모르는 늙은 교사들은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없다. 보수적인 교사와 진보적인 교사의 대립은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갈등을 통해 사회를 혁신하는 재생산 메커니즘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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