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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인터뷰 나는 왜 대담]나는 왜 약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가

  • 작성일 2014-10-01
  • 조회수 2,076

 

연속기획 공개인터뷰 _ 나는 왜?(제6회)

 

 

나는 왜 약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가?

- 소설가 조해진 편

 

 

정리 : 안희연(시인)

 

 

 

    바야흐로 가을입니다. 일본의 한 시인은 가을을 일컬어 ‘여름이 타다 남은 재’라고 말했다지요. 슬프도록 푸른 가을 하늘을 보면서 격랑이 지난 뒤의 고요, 눈보라의 끝, 한 고통을 관통한 뒤의 슬픔과 기쁨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오늘 모신 초대 손님도 그런 가을을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요. 우리를 한없이 멋진 꿈속으로, 아무도 보지 못한 숲으로 데려가주시는 분. 조해진 소설가와의 깊고 느린 산책길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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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백한 삶

 

 

 

kmy    ▶ 김미월(이하 김) : 《문장 웹진》 연속기획 공개인터뷰 [나는 왜] 여섯 번째 시간입니다. 먼 길 와주신 작가님께 환영의 인사를 드립니다. 오늘 모신 손님은 조해진 작가님인데요. 2004년에 등단을 하셨으니 올해로 10년차이시고, 그간 5권의 책을 내셨습니다. 이렇게 다작하는 작가가 무척 드문데 조해진 작가님의 작품은 양과 질 모든 면에서 모범적인 수작으로 꼽힙니다. 게다가 현재 장편 연재 중이고 내년이면 네 번째 장편이 출간될 예정인데요. 이 끊이지 않는 창작열이 어디서 오는지 궁금합니다. 아울러 작품의 소재는 어떻게 취하는지, 그 소재들을 어떻게 엮어 가는지도 말씀해 주세요.

 

jhj    ▶ 조해진(이하 조) : 너무 과찬의 말씀을 해주셔서. (웃음) 잘 쓴다는 생각은 안 해봤고, 실패했다고 말하기는 마음 아프지만 사실 부족한 작품도 많이 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렇게 용감하게 책을 냈을까 생각될 정도로요. 나무만 파괴하고 종비만 낭비한 작가가 아닌가, 무의미한 책을 낼 거면 알아서 스스로 안 내야 되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한 적도 있고요.
    제가 2004년에 등단을 했는데 첫 단편집이 2008년에 나왔어요. 첫 단편집에 수록된 단편들은 거의 대부분 청탁 받지 않고 썼던 작품들이었고요. 작품 발표를 아예 안 한 것은 아니지만, 그땐 제대로 된 청탁을 거의 받아 보지 못했어요. 등단한 잡지에서 기회를 주긴 했지만 그 외에는 대부분 투고를 하거나 정말 원고가 급한 지방 문예지에서 갑자기 연락이 와서 내거나 했죠. 저보다 무명 세월이 긴 작가들도 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가 조심스럽지만, 지면을 얻고 작품을 발표하는 게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늘 갈급한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청탁이 오면 거절을 못 하고 많이 쓴 것 같아요. 그리고 사실 제 삶은 무척 단순한 편이에요. 평소에도 읽고 쓰는 것 외에는 별로 하는 일이 없어요. 한 인간으로서는 그렇게 바람직한 인생이 아닐 수 있겠으나 (웃음) 작가로서는 단순하고 담백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소설의 소재에 대해서 여쭤 보셨는데요. 소설을 구상할 때는 무의식적으로 썼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써놓고 보면 평소의 기억들, 지나가듯이 하거나 들은 말들이 모이고 쌓여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여기 이 장면은 내가 어딜 지나갈 때 보았었구나, 이 대사는 누구한테 들은 것을 변형했구나, 책에서 읽은 인상적인 장면을 인용했구나, 하고 뒤늦게 깨달을 때가 많죠. 모든 감각으로 수용했던 것들이 모이고 쌓여서 작품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목요일에 만나요』의 표제작에 죄를 고백하는 ‘통곡의 의자’라는 상징적인 사물이 나오는데요. 처음에는 이 사물이 무의식적인 상상의 산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다시 보니 예전에 어떤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장면, 그러니까 죽기 전에 기도를 통해 신의 용서를 받고 싶어서 이슬람 신도들이 맹목적으로 사원을 찾아가는 장면이 제게 인상적으로 남아 있었더라고요.
    또 그 소설에서 남동생과 농구를 했던 기억이 중요한 장면으로 쓰이는데, 그 장면도 제가 평소에 밤 산책하는 걸 좋아해서 산책을 하다가 농구하는 장면을 보았기 때문에 쓰게 된 것 같아요. 중학교를 지나가는데 운동장에서 울리는 농구공 소리가 청아하면서도 맑고 참 좋더라고요. 운동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예전에 친구와 농구했던 기억이 나기도 했고요. 결국 소설은 혼자 쓰는 거지만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에선 제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 모든 공간들, 에너지 같은 것들이 씨앗이 날아오듯 저에게 다가와 영향을 주는 게 아닌가 싶어요.

 

    ▶ 김 : 소설은 혼자 쓰는 거지만 소설을 쓰기까지, 소재를 얻고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힌트가 되어 준다는 말씀을 해주셨네요. 단조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하셨지만 작가님께서 외부 세상과 부대끼지 않고 혼자 묵묵히 글을 쓰시는 덕분에 독자들이 보다 웅숭깊은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번 질문은 독자분들께서 많이들 궁금해 하실 듯한 질문인데요. 언제 처음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셨는지, 작가 이외의 다른 꿈을 품은 적이 있다면 무엇인지, 작가가 된 것을 후회하신 적은 없는지 궁금합니다.

 

    ▶ 조 : 언제 시작됐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환경상 어릴 때부터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고 공상하기를 좋아했어요. 학창 시절부터 막연하게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제가 책 읽는 걸 너무 좋아하고, 작가를 동경했거든요. 최근에 수잔 손택(Susan Sontag)의 『문학은 자유다』라는 책에서 ‘문학은 국가적 허영, 속물주의, 강압적 지역주의, 알맹이 없는 교육, 결함 있는 운명과 불운의 감옥에서 자유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해주는 여권이었다.’라는 문장을 읽었는데 무척 공감했어요. 책을 읽는 시간,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일주일 정도의 시간 동안 그 세계에 빠져들 수 있고 잠시 이 세계를, 주변 환경을 잊을 수 있다는 게 저에게도 매혹적이었거든요. 처음에는 작가가 너무 대단해 보여서 내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못 했어요. 그러다 대학 때 소설 창작 수업시간에 의외의 칭찬을 들어서, 나도 혹시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죠. 저는 문예창작을 전문적으로 배워 본 적이 없어서 거의 혼자 썼어요. 1년 정도 인터넷으로 합평을 받는 수업을 들은 적은 있지만요. 소설응모에 내서 한 번에 당선되셨다는 분들도 있지만 저는 많이 떨어졌어요. 무의식이 지워버려서 정확한 횟수는 기억이 안 나지만 (웃음) 스물 네 다섯 살부터 등단할 때까지 응모를 계속했으니 꽤 여러 번이었던 것 같아요.
    이런 얘긴 정말 처음 하는데 (웃음) 제가 어렸을 때 종교에 깊이 빠진 적이 있어요. 사춘기가 오기 전까지 성당을 굉장히 열심히 다녔는데, 보통 교회오빠를 좋아한다거나 신부님이 멋있다는 이유로 나가곤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순수하게 신을 믿었던 것 같아요. 기도하는 게 좋았고요. 아무도 없는 성당에 찾아가 울면서 기도를 하곤 했는데 기도를 하려면 말을 만들어야 하잖아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경험이 이야기를 만들고 싶게 하고 문장을 쓰게 하는 동력이 아니었나, 그런 생각을 최근 들어 하게 됐어요.

 

    ▶ 김 : 이야기를 듣다 보니 ‘통곡의 의자’의 고해하는 사람 이미지와도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는 것 같습니다. 글을 쓰고 칭찬을 들었던 경험 덕분에 계속 소설을 쓰셨다고 하니, 칭찬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 칭찬이 아니었다면 한 명의 뛰어난 한국 작가를 놓칠 뻔했으니까. (웃음)

 

    ▶ 조 : 칭찬이 고래도 춤추게 한다잖아요. (웃음) 그리고 저는 작가가 아닌 다른 직업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지만, 음악은 한번 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저는 기타 치면서 노래 부르시는 분들이 너무 부럽더라고요. 그래서 기타를 배우기도 했고요.

 

    ▶ 김 : 성당과 음악과 작가님의 무겁고 잔잔하고 어두우면서도 처연한 소설이 아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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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자의 작가

 

    ▶ 김 : 이번에는 ‘나는 왜’ 코너의 핵심적인 질문을 한번 던져 볼게요. 평자들이 늘 말하듯, 조해진 작가님의 소설에는 ‘타자, 이방인, 약자’가 자주 등장합니다. 『로기완을 만났다』의 로기완 같은 탈북자나, 『한없이 멋진 꿈에』에 등장하는 동성애자, 단편에서 이야기된 입양아 등 개인적, 사회적으로 상처받은 인물들이 대부분인데요. 성공한 사람들, 중심에 있고 빛나는 사람들이 아닌,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 통칭해서 ‘약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계속 시선이 가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 조 : 처음부터 계산을 하고 쓰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첫 단편집을 내고 ‘타자의 작가’라는 명명을 해주시니까, 오히려 그때부터 고민이 시작됐던 것 같아요. 내가 왜 그런 걸 썼을까 하고요. 그런데 사실 근본적으로는 문학이라는 게, 문학의 정체성 자체가 그런 것 같아요. 이름이 불리지 않는 사람들, 계급과 윤리의 문제를 다루는 게 문학의 본질이자 모든 작가들의 공통된 화두일 거라고 생각하고요. 부족하지 않은 사람들은 다른 매체가 알아서 기억해 줄 테니까요.
    아마 제 개인사와도 관련이 있을 거예요. 평소에 개인적인 얘기를 잘 안 하는 편인데 최근에 한 계간지에서 청탁을 받아 자전소설을 쓰게 됐어요. 그 소설을 쓰고부터는 조금씩 말을 하게 된 것 같아요. 어릴 때 살았던 동네가 소위 말하는 판자촌이었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거든요. 그때 보고 듣고 경험했던 것들이 제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고요. 아무래도 작가가 되고 싶거나 작가인 사람들에게는 ‘공감 능력’이 있기 마련이에요. 같은 장면을 봐도 그것이 단순한 연민으로 그치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자기 문제로 환원해서 같이 슬퍼하는 사람이 있는데, 전자가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저는 후자에 가까운 것 같아요.
    잘 쓴 소설을 보면 정말 치밀하잖아요. 소설가에게는 그런 영리한 면이 있어야 하는데 저는 그렇질 못하거든요. 대신 감성이 있는 것 같아요. 저는 굉장히 감정적인 인간인데, 사실 감정적인 사람은 피곤해요. 실수투성이이거든요. 그렇지만 소설을 쓸 때는 도움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어떤 장면을 보든 감정적으로 동화될 때가 많고, 그런 장면에서 이야기가 많이 흘러나오곤 하니까요.

 

    ▶ 김 : 공감 능력이 높은 사람이 작가로 빠지는 경향이 있다는 말씀이 굉장히 와 닿습니다. 조해진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이 작가는 상처 속으로 들어갔다 나오는구나, 여기까지 헤아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게 다 공감 능력 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문득 조해진 작가님을 어디 감옥 같은 데 가둬 놓고, 모두에게 주목받는 잘난 사람에 대해 쓰라고 해도 조해진 작가님은 그 사람에게 숨겨져 있는 상처, 아픔, 내밀한 기억을 끄집어내서 쓰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공감 능력이 많은 작가에게는 결국 모든 사람이 약자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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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감과 상상력

 

    ▶ 김 : 그럼 이제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나눠 볼까요. 작년에 나온 장편소설 『아무도 보지 못한 숲』은 숲에서 시작해서 현실과 숲을 오가다가 숲으로 끝나는 이야기인데요. 이 숲은 주인공 미수에게만 보이는 환상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지극히 현실적인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몽환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소설을 처음 구상하게 된 계기를 들려주세요.

 

    ▶ 조 : 환상적인 부분을 이전에도 써오긴 했지만 이 소설에서 특별히 확장되긴 했죠. 이 소설은 제가 자주 가던 영화관이 있는데 그 빌딩에서 본 보안요원과 안내원으로부터 시작됐어요. 그 빌딩이 너무나 완벽했기 때문에 그들이 전시품처럼 진열만 되어 있을 뿐 별로 할 일이 없어 보였거든요. 그 장면이 제게 인상적으로 각인됐던 것 같아요. 제멋대로 저 두 사람이 연인이 아닐까 상상하게 됐죠.
    소설의 첫 장면을 보면 미수가 놀이터에 앉아 있는데 꿈인 듯 꿈 아닌 듯 세상이 정지된 것 같고, 걷다 보니 처음 보는 숲이 나오고 그러잖아요. 여길 나가면 다른 세계가 펼쳐지지 않을까, 내가 몰랐던 장소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평소에 자주 했던 것 같아요. 제 소설에 빈 상점이라든가 빈 빌딩이라든가, 사람이 안 살거나 누군가 외출한 빈 공간이 많이 나오는데, 그것도 평소에 밤 산책을 할 때 불 꺼진 상점들을 보면서 안에 뭐가 있을까 궁금해 했기 때문인 듯해요. 평소 즐겨 하는 공상이 자연스럽게 소설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 김 : 결국엔 다 상상의 결과이군요. 『로기완을 만났다』 같은 경우도 신문기사를 통해서 어떤 탈북자 이야기를 접하고 거기에 상상의 나래를 펼쳐 장편소설로 완성한 것이라고 들었는데요. 공감 능력만큼이나 상상력도 뛰어나신 듯합니다. 제가 알기로 『로기완을 만났다』는 현재 영화로 제작되고 있는데, 최근 들어 문학작품이 영상물로 각색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요?

 

    ▶ 조 : 문학작품의 영상화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는 제가 잘 모르는 분야예요. 늘 남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했어요. 대부분 베스트셀러 작가의 작품이 영화화되곤 하니까요. 제 경우에는, 책이 나오고 한 달 만에 바로 제작자로부터 연락이 왔어요. 대뜸 ‘당신 소설 얼마 줄 테니 판권을 팔아라’ 하면 주춤했을 것 같은데 제작자분이 긴 편지를 보내오신 거예요. ‘나는 이 소설을 이렇게 읽었고, 이렇게 느꼈고, 끝내는 울고 말았다’라고요. 그 뒤로 연락이 와서 직접 만났어요. 처음 만났을 땐 편지와는 다르게 그리 진중한 타입으로 보이지 않아서 ‘내가 문장에 속았나?’ 싶었는데, 몇 번 더 만나다 보니 가슴이 뜨거운 분이더라고요. 첫 메일 읽었을 때 그 느낌이 맞았구나, 좋은 제작자를 만났구나 싶어 마음이 놓였고 판권을 팔게 됐어요.

 

    ▶ 김 : 이번에는 문장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조해진 작가님의 책을 읽다 보면 이따금씩 문장에 집중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 여기 이런 문장이 있네, 어떻게 이런 상황에 이런 문장을 쓸 수 있었을까, 이건 바로 떠올렸을까 오래 고민했을까 싶은,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쓴 것 같지 않은 정교하고 품위 있는 문장이 인상적으로 다가옵니다. 조해진 작가의 문장론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 조 : 질문이 어려운데요. 기본적으로 저는 제가 이야기 중심의 작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서사를 포기하진 않지만, 언어에 대해 더 관심이 많은 작가가 아닐까 해요. 소설은 이야기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도 내용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문장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아요. 그리고 어떤 관념 같은 것을 이미지화해서 표현하는 것을 좋아해요. 예를 들면 『목요일에 만나요』에 「유리」라는 단편이 있는데, 마지막에 여주인공이 자신이 상처받은 장면 속으로 (환상적으로) 들어가서 학창 시절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을, 유리로 보이는 그들을 깨뜨리는 장면이 있는데요. 그걸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완벽한 망각은 없다. 어떻게든 잔존한다.’일 거예요. 우리가 맺는 관계라는 것이 깨지기 쉽고, 의도하지 않게 상처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이미지화해서 표현했기 때문에, 그런 지점이 보시는 분들께서 문장이 좋다고 말씀해 주시는 이유가 아닐까 싶어요.
    사실 감당하기 힘들 만큼 슬플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는 제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굴러다니는 실타래 같아요. 먼지만 묻히며 다니는. 그게 정말 마음의 밑바닥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의 밑바닥에 닿을 때 만나게 되는 문장이 있어요. 요즘은 자제하는 편이지만, 한동안 그런 문장들을 구사했던 때가 있었어요.

 

    ▶ 김 : 한동안 문장에 탐닉했던 시기가 있었는데 최근에는 그걸 자제하려고 한다는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조해진 작가가 문장에 대한 강박을 벗고 이야기에 힘을 주면 어떤 소설이 탄생할지 기대가 됩니다. 저는 책을 읽을 때 ‘작가의 말’을 먼저 읽는 편인데요. 『목요일에 만나요』에는 ‘작가의 말’이 없더라고요. 특별한 의도가 있는지, 하지 않음으로써 하고 싶었던 작가의 말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 조 : 지난 네 권의 책에는 ‘작가의 말’을 다 썼어요. 기다리던 청탁이 오고, 작품을 발표하고, 내 작품이 실린 잡지가 서점에 있다는 것이 무척 황홀했고요. 잘 쓰고 싶었고, 나중에 보면 왜 이렇게밖에 못 썼을까 후회될 때도 있었지만 어쨌든 청탁 받고 작품을 준비하고 쓰는 5∼6년의 시간은 온전한 저의 시간이었기 때문에, 이 소설은 이렇게 썼고 저렇게 썼고 하는 말들을 얹고 싶지 않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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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의 한가운데서

 

    ▶ 김 : 전에 조해진 작가님께서 ‘내 소설은 항상 어둡다’라는 말을 하신 적이 있는데요. 작품들이 대체로 어둡고 무겁고 진중합니다. 전략적으로 그런 소설을 쓰시는 것인가요? 아니면 애초에 작가로서의 몸이 그런 소설을 쓰도록 만들어진 것인가요?

 

    ▶ 조 : 전략 같은 건 전혀 없어요. (웃음) 등단한 지 올해로 10년이 됐는데 요즘 들어 작가로서 책임져야 하는 게 작품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작가에게는 마땅히 작품을 미학적으로 완성도 있게 써야 할 책임이 있지만, 왜 썼는가에 대한 물음에도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는 걸 최근 들어 깨달았어요. 처음에는 그냥 좋아서 썼을 뿐, 왜 쓰는가에 대해서는 너무 준비 없이 살아왔다는 걸 깨닫고 반성을 하게 됐죠. 이건 나이가 들면서 생겨나는 변화이기도 할 텐데 아무쪼록 열려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초기 작품들 보시면 답답하다고 느끼실 거예요. 그땐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해?’라고 말할 정도로 출구가 없는 소설을 썼거든요. 그땐 그런 소설이 옳다고 믿었고, 그게 문학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최근에 자기 작품의 철학적인 부분까지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되면서 작품도 많이 바뀌었어요. 지금은 열려 있는 작품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죠.

 

    ▶ 김 : 왜 이렇게 어둡고 무거운 소설을 쓰느냐는 힐난은 아니었고요. 자신의 몸이 만들어진 대로, 자신의 길을 잘 가고 있다는 뜻에서 질문을 드렸습니다. 작가님은 꾸준히 작품을 쓰시는 성실하고 뛰어난 작가지만, 이따금 글이 잘 안 써지는 순간이 오기도 하잖아요. 그럴 땐 어떻게 이겨내는지 궁금합니다.

 

    ▶ 조 : 저도 사실 그게 궁금한데, 작가들이 한번 모여서 다 같이 이야기를 나눠 봤으면 좋겠어요. (웃음) 그런데 저는 인생 자체가 담백하고 인간관계도 담백한 편이어서, 안 써질 땐 그냥 안 써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아요. 특별히 운동을 하거나 여행을 가거나 하지 않고, 제가 좋아하는 커피나 맥주 마시면서 그냥 기다려요.

 

    ▶ 김 : 정말 담백하시네요. (웃음) 슬럼프가 아예 없는 건 아닌가요?

 

    ▶ 조 : (웃음) 아니에요. 슬럼프가 많아요.

 

    ▶ 김 : 작가님께는 소설쓰기가 천성적으로 잘 맞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자, 어느덧 마지막 질문인데요. 현재 쓰고 있는 장편 이야기를 좀 들려주세요. 더불어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 조 : 현재 『문예중앙』이라는 잡지에 「여름을 지나가다」라는 제목으로 장편 연재를 하고 있어요. 올해 봄 호부터 3회를 연재했고, 겨울 호 한 회를 남겨 두고 있는데요. 이삼십 대의, 네 명의 각기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이고, 『아무도 보지 못한 숲』과 비슷한 느낌이에요. 저 스스로는 두 작품을 묶어서 청춘 2부작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웃음) 제가 이제 곧 마흔 살이 되거든요. 청춘이 끝나 간답니다. (웃음) 그러니 당분간은 겨울 호 마감을 해야 하고, 가능하면 내년에 책이 나오도록 해야겠죠. 앞으로 쓸 작품들은 제가 전에 쓴 작품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진 소설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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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남은 이야기

 

    ▶ 김 : 말씀을 듣다 보니 작품과 작가가 일치되는 작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이쯤에서 현장 질문을 좀 받아 볼까요?

 

    ▶ 독자 : 상상을 많이 하신다고 하셨는데 소설을 쓰기 전에 이야기가 먼저 나오는지, 아니면 말하고자 하는 관념이 먼저 있어서 그 관념을 형상화하기 위해 그에 맞는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지. 떠올랐을 때 바로 쓰시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을 하고 쓰시는지 궁금합니다.

 

    ▶ 조 : 관념이라는 건 주제와 상통하겠죠? 소설마다 차이는 있지만, 빌딩에서 보았던 보안요원과 안내원의 경우처럼 장면에서 많이 시작하는 것 같아요. 특정 장면을 상상하면서 이야기가 만들어지곤 해요. 사실 우리가 소설에서 표현할 수 있는 주제는 한정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마치 캐치프레이즈처럼 적나라하게 표현하기보다는 ‘정말 그런가? 이게 맞나?’라는 의문을 가질 정도면 작품의 역할은 다한 게 아닐까요.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살아도 인간인 건가?’라는 생각을 하게끔 하는 것이죠. 관념을 크게 생각하는 편은 아니고, 관념을 특정 장면에 국한해서 이미지화할 때가 더러 있긴 합니다.
    그리고 소설을 쓸 때는 철저하게 계획을 하고 쓰는 편이에요. 하루 만에 단편소설을 완성하셨다는 작가분들도 계시지만 저는 그런 타입은 아니고요. 길게는 몇 개월이 걸릴 정도로 구성 시간이 무척 깁니다. 단편도 마찬가지고요.

 

    ▶ 독자 : 인상이 너무 단아해서 놀랐어요. (웃음) 저는 『로기완을 만났다』를 읽으며 궁금했는데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어떤 취재를 하셨나요? 상상의 힘으로만 쓰인 건지, 벨기에를 직접 가보셨는지 궁금합니다.

 

    ▶ 조 : 당시 제가 폴란드에 체류하고 있었어요. 폴란드에 있는 한 대학에 1년 동안 한국어 강사로 취업이 되어서요. 제가 그전까진 유럽 여행을 해본 적이 없는데, 폴란드에서 1년 동안 일하면서 유럽 여행을 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근데 막상 가보니 같은 유럽이라고 해도 서울 부산 오가듯이 갈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시간과 돈 모든 면을 고려했을 때 대여섯 개 나라 정도를 선택해서 여행해야 했죠. 그때부터 조사를 했어요. 당시 벨기에는 가고 싶은 나라에 포함은 안 됐었는데, 그때 우연히 탈북인과 관련된 기사를 보게 된 거예요. 특파원처럼 해외에 거주하면서 기사를 쓰는 분의 기사였는데 기사가 너무 좋더라고요. 그래서 용감하게 메일을 보냈어요. 당신이 취재한 두 명의 탈북인에 대해 더 알고 싶다고. 그런데 답장이 왔어요. 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벨기에에 가게 됐죠. 그 기자님께서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탈북인이 쓴 진술서 복사본도 주시고, 소설에서 ‘박윤철’ 역할을 하는 분도 만나게 해주셨고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만들어지더군요. 당시에는 줄거리도 없이, 막연히 기사가 인상적이라는 생각으로 갔던 건데, 벨기에를 여행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취재가 되더라고요. 거리 이름 같은 것도 한 번 더 보게 되고요.
    그리고 평소에 도서관에 자주 가요. 시간 날 때마다 국회도서관에 가서 관련 자료들을 읽었어요. 논문도 읽고, 학술지에 실린 ‘탈북인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런 것도 찾아 읽고요.

 

    ▶ 독자 : 『로기완을 만났다』가 영화화된다고 하셨는데요. 소설을 영화화하는 것도 일종의 번역이잖아요. 연출자가 작가님의 작품을 다르게 각색하는 것을 허용하시나요?

 

    ▶ 조 : 소설과 영화는 완전히 다른 장르이고, 제작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영화 시스템을 전혀 알지 못했어요. 그런데 이번에 보니 한 편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관련된 사람들만 해도 백여 명이더라고요. 각색에 관련해서는 허용해요. 작가가 판권을 팔았다면 작가의 손을 떠났다고 생각해야죠. 물론 너무 이상한 영화가 된다면 싫을 거예요.

 

    ▶ 독자 : 악을 통해 인간을 보여주는 작가가 있고 선을 통해 인간을 보여주는 작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님의 작품을 보면 인간은 선한 존재라는 느낌, 인간을 긍정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작가님은 인간을 믿으시나요?

 

    ▶ 조 : 인간을 늘 믿지는 않아요. 특히 요즘 같은 세상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너무나 많이 일어나고 그래서 인간에 대한 의심을 거둘 수가 없어요. 그래도 저는 근본적으로는 인간을 믿는 것 같아요. 제 작품 속 인물들은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 잘못했다고 비난 받고, 싸울 준비가 안 되어 있는데 싸우고 다쳐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선하게 보이는 게 아닐까 생각하고요. 악을 통해서 인간을 보여주고 의문을 던지는, 이를테면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작가도 너무 좋아하지만 저는 그런 쪽으로는 못 쓸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요. 자기가 쓸 수 있는 영역이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도 저는 진정성 있는 인물을 통해서 폭력적인 사회 폭력 시스템이나 부조리한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런 작가일 것 같습니다.

 

    ▶ 독자 : 취미가 어떻게 되나요? 자전적인 소설이 많은지요? 작가님의 습작기는 어떠했을지 궁금합니다.

 

    ▶ 조 : 저는 취미가 별로 없는데. 음…… 숨쉬기? (웃음) 밤 산책 좋아하고, 영화 좋아해요. 기타도 배우고 있고요. 자전소설에 관련해서는, 전에 김윤식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나네요. 선생님께서 ‘모든 소설은 자전소설이다’로 해석될 만한 말씀을 하셨다는데 그 말에 공감이 돼요. 자전소설을 안 썼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그간의 소설에 자전적인 요소가 조금씩은 들어가 있었더라고요. 최근에는 계간 『문학동네』 봄 호 젊은 작가 특집에 자전소설을 발표했어요. 처음 자전소설을 쓸 때는 누가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쓰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이걸 안 썼으면 어쩔 뻔했나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동안 뭘 그리 숨기고 살았을까 싶었어요. 쓸 땐 힘들었지만 쓰고 나니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등단을 쉽게 한 편이 아니에요. 문창과를 졸업한 것도 아니어서 친한 친구에게 가끔 보였을 뿐 강의실에서 하는 합평을 해보지 않았고요. 1년 정도 소설가 이순원 선생님께서 주관하는 합평 수업을 받은 적은 있어요. 작품의 함량은 작가가 만드는 거지만 객관적으로 누가 봐도 잘못된 부분을 자기 자신은 모를 때가 있거든요. 그런 점검은 필요한 것 같아요. 제 경우에는 10명이 읽으면 10명이 다 문장에 비유가 많다는 말을 하더라고요. 그때만 해도 화려하고 감각적인 문장이 옳다고 믿었거든요. 나중에 보니 비유가 많아서 작품의 서사가 처지더라고요. 자기 작품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봐주는 사람이 있는 건 큰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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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화가 모두 끝난 뒤에도 한동안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감당하기 힘들 만큼 슬플 때, 내 자신이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먼지만 묻히며 굴러다니는 실타래 같다는 말씀 때문이었어요. 소설과 작가가 이토록 한결같아도 되는 걸까, 내가 읽었던 작품들이, 나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는 그런 마음의 밑바닥에서 탄생된 것이었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며칠이 지나고 늦은 귀갓길에 문득 작가님 생각이 났습니다. 지금쯤 작가님은 밤 산책을 하고 계시지 않을까. 빈 상점을 들여다보거나, 운동장에서 들려오는 농구공 소리를 듣고 계시지 않을까. 그 시간들은 또 어떤 소설로 탄생하게 될까……. 저는 멀리서 응원을 보냈습니다. 작가님께 빛의 호위가 함께하기를 기도하고 기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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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장웹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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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황당한 청탁 손세실리아 몇 해 전 일이다. 모 공공기관의 잡지 외주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편집 담당 아무개라 자신을 소개하곤 산문 청탁 건으로 연락했단다. 마침 산문집 준비 중이었고, 써야 할 글감이 몇 있어 흔쾌히 수락하곤 착실하게도 마감 날짜를 지켜 넘겼다. 언제 끝날지 모를 팬데믹 상황에서의 거리 두기, 인원 제한, 방역 등 여러 규제와 제약으로 인해 경영난에 허덕이는 책방카페 운영자로서의 경험담을 담담하게 풀어냈던 것인데 담당자로부터 게재 불가 통보를 받았다. 두려움에 처한 자영업자와 소시민들로부터 공감을 받을 만한 내용인지라 어리둥절했더니, 자신도 당혹스럽다며 사과하고선 기획위원들의 반대라서 하는 수 없단다. 이유를 묻자 제목 때문이라며, 재난지원금은 정부에서 지급했는데 어째서 돌아가신 시부가 지급한 것으로 표현했느냐는. 혹여 불온한 내용은 아닌가 상상할 수도 있어 간추려 말하자면, 공간 오픈 10년이 지나도록 번듯한 영업용 커피 기계도 없이 꾸려 오던 중, 코비드19 장기화로 인해 한가해진 틈을 타 당근마켓에서 구입한 중고 기계를 설치하며 겪게 된 일이다. 하는 김에 서가 리모델링도 감행했던 건데 빠듯한 형편을 알고 있다는 듯 작고하신 후 팔리지 않아 오래 비워 둔 시부님의 시골집이 처분돼 자녀 넷이서 공평하게 나눴다는 사연을 유산이라는 상투적 표현 대신 재난지원금으로 비유했던 것. 실제로 그렇게 여겨지기도 했고. 생전에도 이과 성향이셨는데 여전하시구나 싶게 액수도 타이밍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나보다 처지가 더 어려운 이들에게 양도할까 하다가 유산이라기보다 어쩐지 시부님께서 보내 주신 재난지원금 같아 감사히 받기로 했다. 주위에 휴업과 폐업이 속출하고 있다. 그나마 문을 열고 있는 가게도 대부분 버티기 작전에 돌입한 듯한 분위기다. 나만 힘든 게 아니다 보니 ‘어렵다’는 푸념도 금기어다. 오죽하면 천국에서 보내 준 재난지원금을 넙죽 받았겠나. (중략) 각설하고, 팬데믹이 아니었음 앞만 보고 내달렸을 내 인생에 크고 작은 변화가 생긴 건 분명하다. 주위에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이 있는지 살피고, 미력하나마 챙기게 되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이런 내 모습이 저승에 계신 시부님의 마음까지 흔들었을지도. - 졸저 『섬에서 부르는 노래』 중 「천국에서 지급된 재난지원금」 일부 은유를 팩트로 읽고 내린 결정이 어처구니없었지만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게 구차해 입을 다물었다. 괜찮다며 실소하는 내가 이해심 많아 보였던 걸까? 최종 편집까지 열흘쯤 여유가 있으니 다른 글을 써준다면 기다리겠단다. 지면의 앞부분에 실리는 꼭지라서 비울 수 없다며. 담당자가 무슨 죄냐 싶어 수락했다. 비록 전화 통화와 이-메일로 나눈 대화였지만 내 글을 꼭 싣고 싶노란 그의 정중하고도 간곡함이 고맙기도 했고, 한편으론 어차피 책에 수록할 산문 한 꼭지가 더 생기는 거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으며, 무엇보다 손님 뜸한 가게의 며칠 매출 총액보다 원고료가 후했다. 이

  • 관리자
  • 2024-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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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아홉수는 레벨업 이나리 1. 한동안 웹소설을 많이 읽었다. 웹소설은 이천년대 초반에 유행했던 ‘인소’(인터넷소설)와 달리 핸드폰으로 보기 때문에 서사의 호흡이 색다르다. 일명 ‘회빙환’(회귀, 빙의, 환생)으로 불리는 특정 서사 조건이 강하게 작용한다. 물론 ‘회빙환’이 최근에 유행하는 웹소설의 고유한 특징은 아니다. 가령 ‘환생’은 불교와 힌두교의 종교적 교리에서 나온 윤회전생의 개념으로 이미 친숙한 서사적 요소다. ‘회귀’는 또 어떤가. 오래된 영화 중에 (1993)이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필은 계속해서 반복되는 하루를 겪는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 자살이라는 선택까지 시도하지만 반복되는 시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필이 반복된 하루 안에 갇혀서 깨달은 것은 삶의 태도를 바꿔야 한다는 점이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적절한 도움을 주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친절해지는 것. 그제야 필은 회귀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시간의 흐름을 누릴 수 있었다. 이렇게 보면 필에게 회귀는 일종의 저주와 같다. 회귀에 관한 이러한 관점은 이 영화뿐만이 아니다. 영화 (2004), (2017), (2018) 등은 타임루프물로 불리며, 반복되는 시간을 주인공이 겪는 형벌처럼 묘사한다. 그러나 웹소설에서 등장하는 회귀는 이와 다르다. 주인공이 겪는 ‘루프’는 형벌이라기보다는 인생의 기회이고 다른 선택지다. 말하자면, 이미 오답 노트를 모두 작성한 주인공에게 문제 풀 기회를 다시 준 셈이다. 주인공에게는 이미 모범답안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삶을 더 행복하게 끌고 나갈 수 있는 안전이 보장된다. 큰 맥락을 보자면 ‘빙의’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이 읽었던 책 속으로 들어가 해당 등장인물에 빙의하게 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은 안전할 수밖에 없다. 미래를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웹소설의 독자로서 나는 이 ‘안전한 불확실함’에 빠져들었다. 주인공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흥미진진하게 기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회빙환’의 요소들로 인해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안전장치를 믿었다. ‘안전한 불확실함’이라는 이 모순적인 요구를 충실히 지켜주는 서사라니. 서사의 본질은 불확실성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확실하게 안전하기를 바라는 모순은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내 현실이 팍팍할수록 그들의 안전한 모험은 더 재미있게 느껴졌다. 2. 미래를 안다는 것. 그건 인간사에서 항상 선망하는 능력이 아닐까. 누구나 미래를 알고자 한다. 알지 못한 상태로 미래를 기다리는 현재는 너무 불안하기 때문이다. 불안은 고통스럽다.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한다. 그중 하나는 선지자, 웹소설 방식으로 말하자면 예지자를 찾는다. 하늘이 내린 신통한 능력을 발휘해서 미래를 예지해 주는 존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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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의 시작과 끝

[에세이] 괴담의 시작과 끝 현찬양 나는 중학교 졸업식에서 귀신을 본 적이 있다. 운동장에서 사백여 명에 달하는 아이들과 그 두 배쯤 되는 부모들이 조회를 하듯이 서서 식순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지루해서 우리 반 교실 창문을 보고 있었는데 뭔가 희끄무레한 것이 보였다. 처음엔 얼룩인 줄 알았는데 점차 뚜렷해지면서 교실 창문 너머로 얼굴 같은 것으로 변했다. 얼굴 모양의 흰 얼룩인지 흰 얼룩 모양의 얼굴인지 알 수 없었다. 우리 반 누가 아직 나오지 않았나, 싶었지만 얼굴이 너무 하얘서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눈은 움푹 들어가서 보이지 않고 얼굴의 윤곽은 뚜렷한데 몸이 잘 보이지는 않았다. 교복을 입은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키를 보면 우리 또래인가 싶기도 한데······. 그런데 내가 보고 있는 게 정말 맞아? 나는 옆에 애를 손으로 쿡 찔러서 “저거 보이냐?”라고 물었다. 아니라고 하면 약간 충격을 받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히 그 애 눈에도 그것이 보였다. “으아 저게 뭐야.” 그 소리에 주변이 일순 소란해졌다. 학생들과 학부모 모두 그것을 보았다. “뭐야, 저게.” “누구 안 내려왔나 보네.” 같은 소리들로 시끄러워지자 단상 옆에 있던 담임선생님이 다가왔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아이들이 창문을 가리키자 담임은 우리 반 애들의 숫자를 세보고는 실장(우리 학교에선 반장을 그렇게 불렀다)더러 올라가 보라고 했다. 실장이 올라가서 귀신이 비치는 창문 너머에서 손을 엑스자로 그었다. 교실에는 아무도 없다는 뜻이었다. 실장은 다시 내려왔지만 여전히 귀신은 그곳에 있었다. 하얀 얼굴로 졸업하는 아이들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그제야 선생은 제법 당황했는지 실장에게 유리창을 닦아 보라고 했다. “애들이 창문 너머로 분필 지우개를 터니까 그게 묻어서 그렇게 보이는 거야. 그러니까 창문을 닦으면 돼.” 그 말은 꽤 그럴싸하게 들렸다. 실장은 걸레를 가지고 가서 창문을 닦았다. 그래도 사람 얼굴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처음엔 술렁였지만 졸업식이 진행되자 점차 귀신에게서 눈길을 돌렸다. 햇빛이 반사된 것일 거라는 둥, 잘 닦이지 않는 얼룩일 거라는 둥, 하는 소리도 들렸다. 합리적인 듯 보이는 가설들이 몇 가지 나왔으나 식이 진행되고 있었으니 무엇도 검증할 수는 없었다. 선생님과 친한 몇몇 아이들이 “우리 교실에서 사람 자살한 적 있어요?” 하고 직설적으로 물어 보았지만 물론 선생님들은 대답하지 않았는데 아니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찡그린 얼굴로 자기들끼리 소곤거렸을 뿐이다. 학생회장이 연설하고 동창회장이 연설하고 교장 선생님, 교감 선생님, 학년 부장 선생님까지 한마디씩 하고 나자 몇 명이 표창장을 받았다. 꽃다발을 수여하면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 그러는 동안

  • 관리자
  • 2024-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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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 Cho, Haejin and Kim Miwol, “Open Interview Conversations on Why Do I_Why Do I Lend My Ears to the Weak”, Munjang Webzine, October 1, […]

    • 2017-07-10 08:2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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