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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꿈틀대는 노동의 시

  • 작성일 2005-05-13
  • 조회수 3,689



 

김수이(문학평론가)


1.

1990년에 발간된 시집 『개 같은 날들의 기록』에 실린 시에서 김신용은 자신과 현실에 대해 이렇게 노래했다.


나는 개였다.

빌딩이 허공의 엉덩이를 찌르는데

공장의 굴뚝들이 하늘의 턱에 주먹질을 하는 서울인데

시장에, 거리에 저렇게 物神들이 넘쳐흐르는데

허기의 끈에 목줄을 맨, 품삯의 뼈다귀에 침 질질 흘리는

오뉴월, 비루먹은 개였다.

어떤 밥을 먹어야 사나.

굶주려도, 차라리 서울역 남산공원에서 난장을 꿀려도

개밥은 먹지 않아야 하나

오늘도 구청의 댓빵들은 15,000원짜리 뼈다귀를 내밀며

양동의 개들을 홀리고 있다.

방세 하루치만 밀려도 마귀할멈으로 변하는 주인 뭉치

지하도에서 후리가리의 발길질에 넋의 척추뼈가 부러져도

눈썹 하나 까닥 않는 서울,

내 배고픔의 거리에 쓰러져 신음할 때

물 한 모금 부르튼 입술 적셔주는 이 없는 시멘트 벌판에서

아, 저 구수한 생선 뼈다귀 냄새 어이하나

냄새 코를 막고 뼈다귀 쥔 손을 물어뜯어야 하나

일일취업소의 철제문이 떨어지는 아침이면

목 잘려 거리에 뒹구는 이 하루,

감방의 철문도 너무 낯익어, 니 또 왔나? 와, 바깥에는 잘 데가 없드나?

부끄러워, 얼굴에 아무리 철판을 깔아도 철문 보기가 민망해

염치없이 가다밥 좀 씹자고 또 빈대 붙을 수도 없어

눈 먼 손에 쥐어주는 함마, 산비탈 판잣집을 내리치며

몸속에 무허가 건물을 짓고 있는 허망을 박살낼 때

이 개 같은 놈들아! 철거민의 울부짖음의 손톱에

가슴 갈갈이 찢겨도, 이 하루를 헐떡이는 개였다.

뼈를 다 뽑아서라도 이 판잣집 한 채 몸 짓고 싶은

아무거나와 흘레붙는 나는 개였다.

     ―「개 같은 날 2」 전문


1990년은 한국현대사와 문학사에서 1950년이나 1960년, 혹은 1980년에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연도이다. 전쟁이나 혁명이 일어난 해는 아니지만, 그에 필적하는 거대한 변화가 시작된 해이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그것은 현실사회주의의 몰락과 직결된 사회 전반의 신념체계와 행동양식의 일대 전환으로 요약된다. 자유, 평등, 정의, 인권, 노동 해방 등의 가치를 현실화하기 위한 집단적 실천운동이 소비사회의 개인주의 및 상업성과 조우하면서 급격한 변화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그후 15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생계형 범죄와 자살이 늘어나고, 사회 각계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수가 800만에 달하며, 이들의 생존이 여전히 재계와 입법권자에 의해 좌우되는 현실을 살고 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현실 전반의 민주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변화의 효력이 사회의 이면과 구조 자체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부익부 빈익빈의 모순은 갈수록 심화되고, 부정?부패의 고리 역시 더 깊고 은밀하게 내재화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불안감을 갖게 된다.  

 

이런 현실을 생각할 때, 비명과 신음으로 점철된 김신용의 시 「개 같은 날 2」는 지나간 연대의 한시적인 기록으로 읽히지 않는다. 특히 시의 첫 행에 놓인 “나는 개였다”는, 처절한 포효에 다름 아닌 자기비하적인 규정은 지금까지 많은 시인들이 내놓은 어떤 자술서보다 불편하고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이 시대에는 부당한 현실과 그 현실에 굴복하는 자신을 가차없이 폭로하면서 “나는 개였다”고 노래하는(이런 참혹한 전언도 ‘노래’일 수 있다면) 시인을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외형만 바뀌었을 뿐 본체는 그대로임에도, 현실을 반영하(여야 하)는 시의 담론과 화법이 이처럼 달라진 것은 사실 놀라운 일이다. 그에 따라, 이제 우리는 195,60년대에 씌어진 김수영의 시보다 197,80년대에 씌어진 김지하, 박노해, 백무산, 김해화, 김기홍 등의 시에 대해 더 큰 시간적?심리적?미학적 거리감을 가지게 된 듯하다. 불합리한 노동 현실이 현재진행형의 급박한 사안임에도 노동시와 노동자 시인을 빛바랜 시대의 낡은 유물쯤으로 간주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노동자 시인 김신용의 시를 기억과 재조명의 차원에서 호출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신용의 시를 논할 때, 노동자라는 그의 사회적?물적 조건을 빼놓고 이야기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김신용의 시는 노동자로서의 참혹한 경험과 그에 따른 비애, 절망, 의지 등의 총합이자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노동자 중에서도 김신용은 지게꾼과 건설 현장 잡부 등을 전전하며 현실의 가파른 절벽으로 치달았던 일용직 노동자였다. 이 점에서 김신용의 노동 경험이나 삶의 감각은 공장이나 기업의 임노동자였던 박노해나 백무산의 그것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위의 시에서 보듯, 김신용은 날마다 새벽 인력시장에 나가 일당 15,000원에 자신을 팔아야만 먹고살 수 있었다. 이러한 생계 조건이 김신용의 노동시가 다른 시인들의 노동시와 변별성을 갖는 요인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노동자는 아니지만 노동 현실에 대한 뿌리 깊은 각성을 보여준 김지하나, 노동자의 부당한 현실을 체험적으로 시화한 박노해, 백무산, 김해화 등의 시가 ‘노동 해방과 사회 변혁’이라는 목적의식에 복무한 바가 크다면, 김신용의 시는 상처투성이 노동자의 육체와 가슴에서 우러난 ‘피와 살의 언어’로 ‘인간과 삶의 조건’을 탐구하는 존재론적인 측면이 더 강했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김신용의 시는 선전선동적인 성격을 표출하지 않으며, 1980년대 노동시의 전형적인 어법에 침윤된 흔적 또한 적다. 월급통장이나 노조, 파업 등을 경험해보지 못한 김신용은 당대의 노동자 시인들 중에서도 최저의 생계 조건에서 고독한 사투를 벌이면서, 자신의 몸과 삶과 시가 남김없이 일치하는 삶의 시간을 살아냈던 것이다. 시의 텍스트에 한정해 볼 때도, 김신용의 시는 동시대의 노동시들 중 가장 뛰어난 완성도를 성취한 예의 하나로 부족함이 없다.(개인적으로 필자는 김신용의 시가 1980년대 노동시의 최고봉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며, 김신용의 시의 가치에 소홀했던 문단의 평가에 대해 아쉬움을 갖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문학사적 차원의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믿는다. 이 글은 그러한 시도의 일환이다.) 김신용은 시쓰기를 노동자의 원한과 분노를 표출하는 방법적 출구로 삼지 않으며, 직서적인 표현과 독특한 비유, 상징, 알레고리 등의 미학적 장치를 적절히 운용해 시의 밀도를 고도로 농축하고 있다. 이로 인해 김신용의 시는 한번에 쉽게 읽히는 듯싶으면서도, 읽을수록 내밀한 의미가 드러나는 중층적인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 글의 주목 대상인 「개 같은 날2」도 이러한 특징을 갖고 있다. 이 시는 김신용의 시 가운데 가장 직서적인 표현을 사용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에 깔린 자의식과 현실인식, 세계에 대한 해석력은 표피적이거나 단조롭지 않다. 또한 김신용의 다른 시들과 연관지어 읽으면 그 의미가 더욱 증폭된다. 시집 『개 같은 날들의 기록』의 주제의식을 대변하는 이 시는 김신용의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일용직 노동자들의 삶의 실상을 생생하게 서술하고 있다. 굶주림과 굴욕을 일상적으로 겪는 밑바닥 노동자들의 삶의 전모가 서사적 골격을 갖춘 근육질의 언어로 인각(印刻)되어 있는 것이다. 그 첫 문장인 “나는 개였다”라는 진술은 고백인 동시에 일종의 양심선언문이며, 양심선언인 동시에 선전포고문이다. 양심선언과 선전포고의 대상은 ‘나=개(인간/짐승)’들을 사육하는 현실 구조와 그 속에 꼼짝없이 결박되어 있는 ‘나=개’ 자신이다.


‘나=개’의 삶은 굴욕적인 생계와 노동의 사방연속 순환회로를 고통스럽게 공회전한다. “시장에, 거리에 저렇게 物神들이 넘쳐 흐르는데/허기의 끈에 목줄을 맨, 품삯의 뼈다귀에 침 질질 흘리는” ‘나=개’는 오직 하나의 문제에 전력해야 한다. “어떤 밥을 먹어야 사나”가 그것이다. 불행하게도, ‘나=개’에게 밥의 선택권은 없다. ‘나=개’는 “구청의 댓빵들”이 적선하듯 던지는 “15,000원짜리 뼈다귀” ‘개밥’에 목을 매면서, 월세도 아닌 일세방에 팍팍한 몸을 뉘어야만 한다. 그조차 허락되지 않을 때는 ‘가다밥(교도소에서 틀에 찍어 공평한 크기로 만들어주는 기계밥. 틀밥, 찍은밥이라고도 한다)’을 기웃거리고, ‘가다밥’마저 여의치 않을 때는 “산비탈 판잣집을 내리치며/몸속에 무허가 건물을 짓고 있는 허망을 박살”낸 대가로 얻은 쓰라린 ‘개밥’을 삼켜야 한다. ‘나’는 ‘밥’을 구하기 위해 현실의 폭력에 짓밟히고, ‘밥’을 구하기 위해 자신과 똑같은 굶주린 사람들을 향해 폭력을 휘둘러야 한다. 철거공사 현장에서 일하면서 ‘나’는 노동과 폭력, 폭력의 주체와 대상이 비극적으로 일치하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자신이 “철거민의 울부짖음의 손톱에/가슴 갈갈이 찢겨도, 이 하루를 헐떡이는 개”이자, 자신을 휘감고 있는 ‘밥’의 거대한 수레바퀴를 멈출 수 없는 비루한 ‘개’임을 자인(自認)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폭력(의 노동)과 노동(의 폭력)이 ‘밥’의 이름으로 난무하는 곳은 자본의 도시 ‘서울’이다. 이곳에는 ‘인간’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인간이 먹는 ‘밥’이다. 밥의 이름으로 쪽방의 주인은 “방세 하루치만 밀려도 마귀할멈으로 변하”고, 밥의 이름으로 그 방에서 쫓겨난 ‘나’는 “지하도에서 후리가리(일제 단속―인용자 주)의 발길질에 넋의 척추뼈가 부러진”다. ‘후리가리의 발길질’ 역시 밥의 이름으로 무자비하게 행해진다. 그러나 서울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굶주림과 폭력의 생산-소비 공장인 서울에서는, 이를테면 김신용이 다른 시에서 인용한 잭 런던의 『강철군화』에 나오는, “뱃속을 달래기 전에는 영혼을 진정시킬 수가 없어―.”(「그들은 더 이상 여기 살지 않는다3」)라는 말이 성경 구절보다 더 힘을 갖는다. 서울은 (한 줌) “뱃속을 달래기 전에는 영혼을 진정시킬 수가 없”는 굶주린 노동자들과, (무한 용량의) “뱃속을 달래기 전에는 영혼을 진정시킬 수가 없”는 권력자들의 아비규환의 난장판이다. 서울은 이 두 기형의 극히 상반되는 ‘괴물’, 즉 “몸보다 입이 더 큰 아구”(「그 겨울의 빈대」)와 “블랙홀의 소화기관을 가진 거미(「어두운 기억의 집1―먹방에서」)를 일방적인 살육의 먹이사슬로 묶어놓은 죽음의 장소이다.


블랙홀의 소화기관을 가진 거미, 당당히 진군해 오는

저 먹이사슬의 이빨, 엥겔계수 100의 거미줄의 구조

그 끈끈한 흡반력의 지배 앞에, 내 무기력의 圓舞

꿈틀거림의 삽질을 해야 한다. 이 무덤을 파헤쳐야 한다.

그러나 제자리에서 맴돌기만 하는 환상방황,

빈민굴 골방 같은 이 감옥 속의 감옥만 지어 놓고

나는 축 늘어진다.

이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

         ―「어두운 기억의 집1―먹방에서」 부분


“블랙홀의 소화기관을 가진 거미”의 “끈끈한 흡반력의 지배”에 떨며 “꿈틀거림의 삽질을 해야 하”는 이곳은 ‘무덤’ 혹은 ‘먹방’이다. ‘먹방’은 0.75평의 독감방보다 더 좁은 암실로, 두 주일만 갇혀 있으면 시력마저 잃게 되는 관속 같은 살인적인 독감방을 말한다. 안타깝게도, 김신용은 현실의 무덤/먹방에서 탈출하기 위한 자신의 필사적인 노동이 결국 “제자리에서 맴돌기만 하는 환상방황”일 뿐이었다는 깨달음에 이른다. 살과 피와, 때로 양심마저 바쳐야 했던 노동이 평생을 제자리에서 맴돈 ‘환상방황’에 불과하다면, 그렇다면 출구는 어디에도 없는 것일까? 단지 실체도 의미도 없는 ‘환상방황’에 자신을 소진하기 위해 김신용과 그와 같은 처지의 수많은 노동자들은 살인적인 노동과 고통을 견뎌야만 했던 것일까?


중요한 것은 평생의 노동을 ‘환상방황’으로 규정하는 김신용의 시각이 가혹한 노동의 삶을 산 그의 절실한 체험을 집약하고 있다는 점이다. ‘환상방황’이라는 결론은 패배의식의 소산이 아니라, 인간적인 감정과 판단의 자연스러운 결과물인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1980년대 노동시의 지향점이었던, 혹독한 삶의 모순 속에서 끊임없이 미래와 전망을 이끌어낸 작업은 인간적이기보다는 초인적이었다. 이런 점에서 「개 같은 날 2」의 끝부분을 장식한, “뼈를 다 뽑아서라도 이 판잣집 한 채 몸 짓고 싶은/아무거나와 흘레붙는 나는 개였”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인간적인 인간이었음이 드러난다. ‘개 같은 날들’로 뒤덮였던 시대에는, 스스로 ‘나는 개였다’고 말하는 자야말로 인간의 품격과 심성을 갖춘 진정한 의미의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인간’ 김신용은 평생의 노동이 ‘환상방황’에 그쳤다는 극심한 허탈감 속에서 자신이 살아왔던 방식 그대로 삶의 돌파구를 마련한다. 굳이 나눈다면, 이 돌파구는 미래의 희망보다는 차라리 끝나지 않을 절망을 향해 열려 있다. 김신용 자신의 삶의 돌파구는 더 나은 삶이 아니라, 악무한의 현실을 넘어서려는 의지 자체가 된다. 여기에 걸맞게, 그가 지닌 돌파의 자산은 ‘人皮저금통장’(「철거 이후」)이다. ‘인피저금통장’은 노동자들이 소유한 유일한 밑천인 몸뚱이의 은유로, 체험의 육질을 그대로 지닌 김신용만의 독특한 수사학을 단적으로 예시한다. 이제, 가진 것은 맨몸밖에 없는 이들이 그 ‘인피저금통장’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보라. 

   

탈출구는 없다. 그녀는 시멘트의 밭을 일구기로 했다. 뼈를 뽑아 農具를 만들고, 살점을 떼어 씨를 뿌리기로 했다. 손을 내밀 때마다 수몰촌, 놉의 아낙의 그 억척스런 몸짓이 보였다. 지하도에서, 꿈, 이 天刑의 거미줄을 뽑아 밀폐의 집을 만들었다. 누에고치 같은.

         ―「염낭거미 1」 3연


맨몸밖에 없는 ‘그녀’, 김신용의 대리적 자아는 “탈출구는 없다”는 절망을 도시의 “시멘트의 밭을 일구”는 도저한 행동으로 바꾼다. ‘그녀’는 자신의 “뼈를 뽑아 農具를 만들고, 살점을 떼어 씨를 뿌리”며, 자신이 몸을 파는 ‘지하도’에서 ‘꿈=천형’의 거미줄을 뽑아 ‘밀폐의 집’을 만든다. “누에고치 같은” 이 삶의 집을 짓느라 그녀의 몸은 조금씩 해체될 것이고, 마침내 죽음에 이를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몸으로 만든 집, 혹은 그녀의 몸=집은 새로운 생명을 위한 자궁의 역할을 한다. 그녀의 몸과 노동은 ‘무덤’의 서울을 “무덤 속 그 자궁을 베고 누운 태아”로 만들고, ‘시멘트 밭’을 생명의 땅으로 바꾸는, ‘뼈’와 ‘살점’으로 이루어진 ‘씨’인 것이다.    


무덤 속, 그 자궁을 베고 누운 태아일 때

서울이여

너의 불빛은 포근한 羊水가 되는구나

콘크리트의 가슴은 탄생의 집이 되는구나

         ―「悲歌」 부분


김신용은 섣불리 희망을 말하지 않으며, 발빠르게 변화와 개선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탄생’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탄생이 죽음의 순환회로 속의 한 부분이 될 가능성을 결코 잊지 않는다. 김신용은 희망이란 아직 인간이 살지 않는 ‘무인도’이며, 가진 자의 ‘도살의 손’에 칼질 당한 삶의 시간들은 희망과 절망, 완성과 폐허 사이에 놓인 ‘이감(移監)의 끝모를 순환회로’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그는 그 순환회로 위에 “아직 살아 꿈틀대는 각목, 판자쪽 주워 모아/가건물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삶의 집을” 짓는다. 삶의 집의 창밖으로는 저 멀리 희망의 무인도가 보이고, 그는 이렇게 외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아직 살아 있다고…….”


우리들의 얼굴이 지워진 세계의 뒤안길에서

땀의 몸뚱이 익숙하게 칼질하는 도살의 손도 보이지.

제 뼈다귀 지팡이 짚고 일어서는 뼈다귀들도 보이지.

다시 뼈다귀에 소금꽃을 피우기 위해 떠나는 이곳, 완성과

폐허 사이를 잇는 간이역에 서면, 철길은

의문이 산굽이를 돌아 지평선 위에 섬 하나를 떠올리지. 언제나

희망이라는 이름의 무인도를, 이 移監의

끝모를 순환회로, 뜯겨

흩어진 꿈의 잔해 속에서 다시 짓지.

아직 살아 꿈틀대는 각목, 판자쪽 주워 모아

가건물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삶의 집을

저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을 향해, 수없는 물음표로 누운

침목을 밟으며, 아직 살아 있다고

         ―「순환회로」 부분



2.

글쓰기는 노동이다. 글쓰기는 인간의 노동 가운데 기계와 기술의 힘으로 변형하고 단축할 수 없는 거의 유일한 것이다. 글을 인쇄하고 유통하는 일은 초고속과 대량으로 할 수 있지만, 글을 쓰는 일을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물론, 컴퓨터가 첨단의 능력을 발휘해 놀라운 속도로 엄청난 분량의 글을 쓰는 시대가 올 수는 있다. 그러나 그 글은 인간의 땀과 고뇌로 한 자 한 자 적어 나간 글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차원의 것일 터이다. 모르긴 해도, 글쓰기는 기계의 속도와 물량주의에 저항하는 인간의 마지막 보루가 될 가능성이 크다.


글쓰기가 인간에 의한 인간적인 노동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노동시’가 과거의 유산이 된 것을 안타까워하는 마음과 같은 선상에 있다. 1980년대의 노동시는 불합리한 노동 현실과 착취 구조에 저항하면서, 노동의 신성함과 인간의 존엄성이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증명했다. 다시 말하면, 노동시는 사회변혁운동의 일환이나 노동문학의 갈래적 측면에서만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글쓰기의 본질이 인간의 신성한 노동일진대, 노동의 경험과 노동에 대한 성찰이 문학의 중요한 주제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말은 1980년대의 노동시를 그대로 계승해 오늘의 현실에 생착(生着)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의 시대에는 이 시대에 맞는 노동시가 씌어져야 하며, 오늘의 노동 현실에 대한 반성과 저항이 계속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의 현실이 그 필요성을 끊임없이 요구하기 때문이다.


김신용은 그 요구에 가장 치열하게 응답해온 시인의 한 사람이다. 그가 평생을 고통스러운 노동의 현장에서 써온 시들은 우리 시의 가장 아프고 정직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그가 쓴 시들을 다시 읽으며, 최근의 우리 시에 결여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 점에서, 김신용이 21세기에 들어서도 노동의 경험과 사유를 계속 심화해 나가면서 변함없이 한 사람의 노동자로서 시를 쓰는 것은 근래의 우리 문학을 위해서도 다행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문장 웹진/2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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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30
시 쓰고 자빠졌네

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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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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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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