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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에 새겨진 물결무늬 자국

  • 작성일 2007-09-28
  • 조회수 2,976



 


 

신(神)이 흙으로 아담을 짓고 난 후에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무엇을 했을까? 수많은 동식물로 가득한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각각의 사물을 분별하기 위해 제일 먼저 사물의 이름을 지었을 것이다. 사과와 사슴과 사자. 강과 바람과 구름 등의 모든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명명(命名) 행위를 통해 아담은 언어를 탄생시켰을 것이다. 사물에 이름을 붙인 다음에 아담은 그 사물의 움직임과 상태에 대해 다시 명명했을 것이다. 곧 아담의 최초 언어는 명사이며 뒤이어 명사의 움직임과 상태를 표현하는 동사와 형용사가 탄생했을 것이다. 아담으로부터 기원한 이브는 아담의 언어를 배우면서 아담과 사랑의 밀어를 나누었을 것이다. 최초의 언어를 명명하고 그 체계를 구축하고 언어의 사용법을 타인에게 가르쳐 주었다는 점에서 아담은, 시인(詩人)이다. 시인은 아담의 언어처럼 최초로 1인(人) 언어의 발화법과 체계를 창조하고 자신이 속한 세계의 구성원에게 새로운 언어를 제시하는 사람인 것이다.

시인은 견자(見者, voyant)가 되어야 한다고 랭보는 말한 바 있다. 사람들이 보지 못한 사물과 세계를 누구보다도 먼저 발견하고 그 사물과 세계의 이름을 명명하여 사람들에게 사물과 세계의 새로운 언어를 제시하고 가르쳐 준다는 의미에서 견자는, 아담이다. 그러나 아담의 언어는, 바벨탑의 붕괴 이후 세계의 여러 민족 언어로 분열되었다. 분열된 언어는 최초의 시적 의미를 상실하고 다시 관습적인 일상어가 되었다. 이제 우리 시대의 시인은, 매번 일상어의 관습적 의미를 전복하고 일상어를 다시 시적 언어로 되살려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과 새로운 삶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언어를 창조해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고 있다. 그 임무의 첫 출발점은 사물의 이름을 새롭게 호명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물을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 우리는, 그 사물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우리가 어떤 사물의 이름을 호명하면 호명할수록 그 사물은 모호하고 아주 낯선 사물처럼 느껴지게 된다. 우리는 그 사물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는 것이다. 사물의 이름은 사물을 지시하면서도 사물의 본질과 아무런 연관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물의 이름은 사물로 통하는 문(門)의 역할을 한다.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첫 관문은 무엇보다도 그 이름을 호명하는 것이다.


물도마뱀의 이름이 노랑무늬영원이라니요

물결무늬라는 고둥이 있다니요

풍뎅이 이름이 아침깜짝물결무늬라니요

금강입술대고둥이라는 달팽이가 있다니요

나비의 이름이 수풀떠들썩팔랑나비라니요

많첩홍매실이라는 나무가 있다니요

풀의 이름이 꽃며느리밥풀이라니요

흰눈썹울새라는 새가 있다니요


나는 그 이름 하나씩 불러봅니다


노랑무늬영원 물결무늬고둥 아침깜짝물결무늬

금강입술대고둥 수풀떠들썩팔랑나비 많첩홍매실

꽃며느리밥풀 흰눈썹울새


누구도 그 이름 끊지 못하리

그 이름에 새겨진 물결무늬자국

―「이름」전문


물도마뱀과 고둥과 풍뎅이, 달팽이와 나비와 나무, 풀과 새에 붙여진 기묘한 이름들은 본래의 사물과 아무런 연관이 없지만 그 이름이 붙여짐으로써 본래의 사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고둥의 어떤 하위 개체 이름이 “물결무늬”로 명명됨으로써 우리는 “물결무늬” 자체의 의미와 “고둥”이라는 사물의 지시적 의미의 결합이 화학적 작용을 일으키는 것을 체감하게 된다. 파도가 갯벌에 자신의 흔적을 새기고 떠났을 때 남는 것이 “물결무늬”인 것처럼 “물결무늬”가 지닌 비유적 의미는 사랑의 흔적이며 상처의 흔적이며 동시에 삶과 죽음의 흔적이다. 흔적은 흘러간 시간의 기록이자 회상의 매개체이다. “고둥”은 “물결무늬”가 지닌 함축적 의미와 결합함으로써 그저 “고둥”에 그치지 않고 특별한 그 무엇의 의미를 지닌 사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잔물결 속에 고둥이 굴러다닌다/ 들어보니/ 속이 텅 비었다(물결무늬고둥)”라는 시인의 관찰은, 고둥 역시 삶을 살다가 떠난 흔적이며 삶은, 곧 고둥 껍질뿐임을 깨닫게 한다. “물결무늬고둥”은 “고둥”이면서 “고둥”이 아닌, 껍질만 남기고 사라져야 하는 삶을 환기시키는 이름인 것이다. 이와 같이 고둥을 비롯한 물도마뱀과 풍뎅이, 달팽이와 나비와 나무, 풀과 새에 붙여진 기묘한 이름들은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에 새로움을 안겨 주면서 동시에 삶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그 계기는 사물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보는 행위 속에서 마련된다. 그런 이유로 “누구도 그 이름 끊지 못”한다. 그 이름에는 사랑과 상처, 삶과 죽음의 물결무늬 자국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사물들에게로 다시 눈을 낮추고(마치 사물들을 합당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말들로 다시 눈을 낮추어야 하듯이), 사물들이 가지고 있는 새로운 면을 보지 못하게 방해하는 선입관을 버리고 자신의 눈과 이성, 직관에 대한 믿음으로?아울러 사물들의 세부적인 것들과 마찬가지로 본질적인 것도 함께 고려해 가면서?사물들을 연구하고 표현하는 데 전념한다면, 우리는 경이로운 진보를 이룰 수 있을 것이며, 인간은 놀라운 발전을 보게 되리라. 하지만 이와 동시에 사물의 새로운 면들을 로고스의 질료들, 다시 말해 말을 바탕으로 하여 이성 속에서 재구성해야만 한다. 바로 그때에만이, 인간의 지식과 발견들이 순간적이거나 덧없는 것이 아닌 굳건한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물들이 인간의 유일한 표현 방식인 논리적인 말로 표현될 때라야만이 인간의 것이 되어, 인간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단지 자신의 지식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 대한 영향력도 증대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비단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기쁨과 행복을 향하여 나아가게 되리라”고 프랑시스 퐁주는 예견했다. 사물의 새로운 면들은 퐁주의 언급처럼 “말”을 바탕으로 삼는 것에서 시작하여 살펴볼 수 있는 것인데, 그 “말”의 최초는 “이름”인 것이다. 「이름」의 부제로 “왜 나뭇잎의 이름이 보석의 이름처럼 소중히 지어져 있지 않은지 알 수 없다”고 시인이 의문을 품은 것처럼 사물의 이름이 지닌 각각의 가치는, 보석의 화폐가치로 교환될 수 없는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사물의 이름은 사물의 본성을 불러일으키고 삶에 대한 성찰의 매개체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색깔 잘 바꾼다고 사람들이 나에게 붙여준 이름인데

나는 이 이름에 엄청 만족하오 변신한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거요 변질하고는 관계가 없소 나는 부지런히

내 색깔을 바꾸었소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변신의

명수라 하오 변신 잘하는 나를 변질 잘하는 놈이라

착각은 마오 색깔을 바꾼다고 얼빠진 건 아니오

색깔 잘 바꾸는 내가 나는 좋소 색깔 바꾸니 새롭기

그지없소 색깔 없는 사람이 나는 더 무섭소 사람들은

왜 변신과 변질을 구별 못하는지 모르겠소 그때마다

나는 내 본색을 드러내고 싶었소 변신은 변화이며

변모라오 시인들은 변모하는 나를 무척 좋아하오 자기들을

닮았다나 뭐라나? 색깔을 바꾸니 얼마나 달라지는지

모른다오 색깔이 달라진다고 참으로 본질을 잃는 건

아니오 변신하고 사는 내가 나는 대견하오 색깔 바꾸고도

나는 잘 살 수 있소 나는 평생 변신하고 변모하면서 살려 하오

―「카멜레온」전문


본성을 바꾸지 않는 카멜레온은 “변신”의 대명사이다. 카멜레온은 환경의 변화에 따라 몸의 색깔을 바꾸고 천적 관계에 있는 동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몸의 색깔을 바꾼다. 하지만 자신의 본성은 바꾸지 않는다. 사람들은 카멜레온의 변신과 변하지 않는 카멜레온의 본성을 구별하려 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본성을 바라보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몸의 변신만을 보고서 변신을 변질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본성이 변하지 않는 변신처럼 어떤 사물의 본성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한국어로 호명되는 책상은 영어와 독어와 불어로는 모두 다른 이름으로 호명된다. 다른 이름으로 호명되지만 여전히 책상의 본성은 책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변하지 않는 사물의 본성을 호명하는 방식을 매번 다르게 변신시키고자 한다. 왜냐하면 사물을 호명하는 언어의 어감에 따라 사물의 본성은 미묘하게 다른 느낌과 다른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시인은 카멜레온처럼 자신의 본성을 변질시키지 않으면서 사물에 새로운 이름을 명명하고 그 이름으로 자신만의 사전을 매번 변신시키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칠레의 시인 니카노르 파라가 언급했듯 시인은, 자신만의 사전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처음 명명한 사물의 이름으로 만든 사전을 지니지 못한 시인은, 자신의 고유한 시세계를 지니지 못한 시인이다. 더불어 매번 다른 색깔의 카멜레온이 되지 못한 시인은, 자신의 시세계를 갱신하지 못하고 단 한 권의 사전만으로 동일한 색깔의 페이지만 늘려 가는 시인이다. 예술가로서 시인은,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배반하고 변모하는 시인이어야 하기에 “이름에 새겨진 물결무늬자국”의 고유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다.

“당신의 이야기에는 매우 어린 면이 있습니다. 당신은 사건이나 대상 그 자체보다는 그 사물이 당신의 마음 속에서 불러일으키는 인상에 대해서 훨씬 더 많은 것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서정시입니다. 당신은 세계를 파악하는 대신에 세계를 어루만지고 있습니다. 이 자그마한 당신의 글들은 분명히 당신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쓰여진 모든 글들은 개인적인 기록입니다. 그러나 예술이란 기록이 아니지요. 인상과 감정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실로 세계를 두려워하거나 더듬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프란츠 카프카의 말은 경청할 만하다. 시인은 개인의 신파를 넘어서서 나와 너,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와 우주의 언어로 확장될 수 있는 사물의 이름을 명명하고 소통시키는 임무를 부여받고 있기 때문이다.《문장 웹진/2007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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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30
시 쓰고 자빠졌네

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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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 wikisoft
  • 201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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