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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세계화되는 몸의 현장

  • 작성일 2008-06-30
  • 조회수 3,334

 

식탁, 세계화되는 몸의 현장




김수이




2008년 현재, ‘나폴리Napoli’와 ‘토트네스Totness’는 정확히 반대말이다. 나폴리는 오랜 역사를 지닌 세계 제일의 미항에서 악취 나는 거대한 쓰레기장으로 전락했다. 토트네스는 산업혁명의 한 발상지에서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자연주의 마을로 거듭났다. 나폴리는 맹독성 폐기물을 마구 버린 마피아의 쓰레기 사업이 철퇴를 맞으면서 시스템이 마비돼 도시 가득 쓰레기가 쌓여 방화가 잇따르고 있다. 토트네스는 대량 기계와 화학물을 쓰지 않고 자급자족하면서 평화로운 자연의 천국을 이룩하고 있다. 세계적 명성의 나폴리 치즈는 다이옥신이 검출돼 수출길이 막혔고, 나폴리의 관광객은 10분의 1로 줄었다. 토트네스는 빵과 맥주, 옷과 신발 등 유기농 수제(手製) 생산물이 세계인의 사랑을 받으면서 관광객이 갈수록 늘고 있다. 나폴리의 아이들은 몹쓸 환경병을 앓고, 토트네스의 아이들은 길가의 채소를 아무 걱정 없이 뜯어 먹으며 건강하게 자란다. 나폴리에는 오염과 공포와 폭력이 난무하고, 토트네스에는 욕심 없는 농부들과 자연주의 철학을 연구하고 실천하는 대학과 세계 경제의 영향을 받지 않는 지역 화폐가 있다. 나폴리는 빠르게 피폐해 가고, 토트네스는 이미 충분히 풍요롭다.

토트네스에 중세의 나병환자들을 낫게 했다는 ‘치유의 샘’이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21세기의 토트네스는 사람들과 마을 전체가 현대 문명의 독소를 제거하는 ‘치유의 샘’으로 진화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 진화는 ‘오래된 미래’를 향해 (되돌아)가는 방향을 택한다. 하지만 깨끗하고 살기 좋은 자연은 토트네스로 대표되는 자연주의와 생태운동만이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현대 문명 역시 같은 방향을 탐욕에 찬 시선으로 흘낏거린다. 무한 생산과 첨단 기술로 무장한 현대 문명이 제조 불가능한 초고가의 재화로 최종 평가한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오염되지 않은 ‘천연 그대로의 자연’이다. ‘인위’가 개입되지 않은 곳?것일수록 귀해지고 비싸지는 현실은 현대 문명이 처한 자가당착의 진풍경을 여실히 보여 준다. 마치 자승자박하듯이 현대 문명은 자연의 자질과 산물들을 최고의 상품 가치로 판정한다. 유기농, 무공해, 자연산, 수제, 소량생산, 첨가물 없음, 자연 숙성, 자연 전망, 내추럴, 자연에 가까운 것, 그리하여 자연 자체!

이 ‘자연 자체’는 현대 문명이 발견한 최후의 강력한 상품 전략이자, 현대 자본주의의 상품 회로가 끊임없이 재생산해 내는 자연의 매트릭스이다. 슈퍼마켓의 진열대 위에 깔끔하게 정렬된 유기농, 무공해, 내추럴, 자연 들! 빤한 술수이거나 빈약한 기표에 불과한 저 ‘자연 표’ 상품들의 호소 방식은 요란할 뿐 아니라 거의 선정적이기까지 하다. 문명을 벗고 자연을 육화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상품들의 노골적인 발언과 표정, 얄팍하고 허술한 무대화의 미장센을 보라. 그렇게 하여 자연은 슈퍼마켓의 상품으로 부활하고, 지구는 슈퍼마켓의 진열대 위에 간단히 압축되고 재구성 된다. 초월적인 훌륭한 시장, '슈퍼마켓Super-Market'은 전 세계 곳곳의 자연을 자본의 회로를 통해 간단히 수합하고 유통시키고 판매하는 것이다.

실제로 세계 도처에서 온 포도, 오렌지, 키위, 치즈, 와인, 호도, 홍어, 킹크랩 등을 슈퍼마켓에서 사는 것은 별안간에 그리 이상할 것 없는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이런 속도대로라면, 아마존의 산소와 남극의 빙하수를 슈퍼마켓에서 1+1(원 플러스 원)의 특별 기회로 구매하게 될 날도 머지않을 것이다. 다른 각도로 말하면, 현대인의 쇼핑이 원시인의 수렵 채취의 변주라는 말은 단지 행위와 목적의 유사성만을 뜻하지 않는다. 문명에 중독된 현대인과 문명을 모르는 원시인은 정말이지 같은 대상을 욕망하고 구(매)한다. 다만, 그것이 자연의 실재/실체인가, 이데올로기와 이미지와 상품성과 범벅된 자연(?)의 실재/실체인가의 차이가 있을 뿐. 

현대 문명에 대해 토트네스가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자본의 세계화 논리와 자연의 매트릭스이다. 토트네스 사람들은 삶의 반경을 자신들이 사는 지역/자연의 영토와 일치시키며, 지역적?가족적?소규모적?수공업적?자연(친화)적이 되고자 한다. 이들은 세계 시민이나 영국 국민의 관념적?이데올로기적 차원이 아닌, 토트네스 사람이라는 구체적?실물적 정체성의 소유자로 살아간다. 삶의 방식 또한 그러하다. 먹거리에 관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토트네스 사람들은 자신과 이웃이 직접 기르고 수확하고 가공하고 요리한 것을 먹는다. 자연의 성찬(盛饌)이자 성찬(聖餐)인 토트네스의 식탁에는 다른 나라에서 비행기와 배로 운송된 세계화의 경쟁 상품들이 끼어들 틈이 없다. 광우병이나 광우병에 대한 강박적인 공포가 스며들 여지 또한 없다. 바꾸어 말하면, 토트네스는 고유 지역이고, 고유 자연이며, 고유문화이고, 고유한 삶의 터전이다. 사실 자연의 모든 것들은 본래 저마다 고유하다. 자연의 방식을 따르는 삶의 문화 또한 그 자연에 걸맞게 고유한 특성을 지닌다. 그것을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가를 설명하는 브랜드나 품질 인증서가 필요 없이 스스로 그러하다[自然].

이 일련의 이야기를 최근 한국 사회의 현실과 미래의 희망에 관한 판본으로 쓰면 다음과 같은 형태가 된다. 글쓴이는 시인 이문재다.  


식탁은 지구다


중국서 자란 고추

미국 농부가 키운 콩

이란 땅에서 영근 석류

포르투갈에서 선적한 토마토

적도를 넘어온 호주산 쇠고기

식탁은 지구다


어머니 아버지

아직 젊으셨을 때

고추며 콩

석류와 토마토

모두 어디에서

나는 줄 알고 있었다

닭과 돼지도 앞마당서 잡았다

삼십여 년 전

우리 집 둥근 밥상은

우리 마을이었다


이 음식 어디서 오셨는가

식탁 위에 문명의 전부가 올라오는 지금

나는 식구들과 기도 올리지 못한다

이 먹을거리들

누가 어디서 어떻게 키웠는지

누가 어디서 어떻게 만들었는지

누가 어디서 어떻게 보냈는지

누가 어디서 어떻게 보냈는지

도무지 알 수 없기 탓이다


뭇 생명들 올라와 있는 아침이다

문명 전부가 개입해 있는 식탁이다


식탁이 미래다

식탁에서 안심할 수 있다면

식탁에서 감사할 수 있다면

그날이 새날이다

그날부터 새날이다


― 「식탁은 지구다」(『제국호텔』) 전문


이문재는 우리 시에서 자연과 문명의 고유성(/지역성)의 문제를 유기적으로 인식하고, 그 둘의 연쇄적인 파괴 실태와 해결 방안을 본격적으로 거론한 최초의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본의 획일적인 법으로 전 세계를 폭력적으로 통폐합하는 현대 문명을 탄핵하는 것, 인간과 자연과 문명의 고유성을 기억하고 수호하는 것, 현대 문명의 반자연적이며 반인간적인 지배에 저항하며 온전한 ‘개인=시인=지역인’으로 살아가는 것, 이문재의 시 쓰기는 이 문명사적 책임과 임무를 향해 수렴되어 왔다. 첫 시집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1988)에서 ‘도보고행’의 행장을 꾸린 후 『산책시편』(1993)과 『마음의 오지』(1999)를 거치며 ‘고독한 산책자’의 지극한 이력이 붙은 이문재의 생태 인식은 『제국호텔』(2004)에 이르러 세계화된 자본-제국의 구조에 대한 비판적 성찰로 심화된다. 이 여정은 도시 한복판에서 쓰이는 생태시, 현대 문명의 체계와 생리를 거시적인 동시에 미시적으로 해부하는 문명사적 조망력을 지닌 생태시가 우리 시에 보태어진 과정과 같다. 

『제국호텔』에 실려 있는 작품 「식탁은 지구다」에서 이문재는 현대 문명의 구조와 작동 시스템을 우리가 매일 대하는 ‘식탁’의 풍경으로 스케치한다. 그러나 이 풍경을 빚어낸 것은 시인 이문재가 아니라, 현대 문명의 구조와 작동 시스템 자체이다. 식탁의 풍경은 비유나 상상의 산물이 아닌, 지구상의 현대 문명사회에서 매일 일어나는 실제의 사건인 것이다. 세계화의 기치를 높이 들고 점점 더 먼 곳에서, 점점 더 많은 먹거리를 수입해 오는 현대 사회는 급기야 “식탁은 지구다”라는 명제를 하나의 사실로 성립시킨다. “중국서 자란 고추/미국 농부가 키운 콩/이란 땅에서 영근 석류/포르투갈에서 선적한 토마토/적도를 넘어온 호주산 쇠고기”가 실시간으로 함께 차려지는 식탁, “식탁은 지구다”라는 정의는 조금도 과장되지 않은 신생의 사실 명제이다. 

“식탁은 지구다”라는 21세기형 사실 명제는 “우리 집 둥근 밥상은/우리 마을이었다”라는 “삼십여 년 전”의 사실명제와 정면으로 어긋난다. 먹거리들이 “모두 어디에서/나는 줄 알고 있었”고, “닭과 돼지도 앞마당서 잡았”던, 불과 ‘삼십여 년 전’의 음식문화는 실상 수천 년에 걸쳐 유지되어 온 우리의 삶의 방식이자 고유한 전통이었다. 그 심원한 문화? 전통은 자연에 대한 깊은 경의와, 자연과 인간의 화합 및 공생의 관계에 기초했다. 그러나 “식탁 위에 문명의 전부가 올라오는 지금”, 우리는 “누가 어디서 어떻게 키웠는지/누가 어디서 어떻게 만들었는지/누가 어디서 어떻게 보냈는지/누가 어디서 어떻게 보냈는지/도무지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음식-상품을 먹으며 소외와 익명의 감각에 길들여진 채 현대적 삶modern life을 영위한다.

단언하건대, 매끼 지구적 규모의 식탁에서 밥을 먹는 세상에서는 정체불명의 음식-상품의 운명은 그것을 먹고 살아가는 인간-주체의 운명과 점차 구별될 수 없게 될 것이다. 더불어 그러한 세계에서 “도무지 알 수 없”는 가장 곤혹스러운 대상은 바로 ‘나’ 자신이 될 것이다. 방부 처리된 세계화의 먹거리들은 몸을 오염시키고, 자연(의 생태감각)을 오염시키며, 고유한 삶의 전통과 문화를 오염시키며, 인간-주체를 오염시킨다. 이문재가 단순히 환경오염을 고발하고 생명 존중을 촉구하는 생태시를 쓰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단순한 주장을 관철하는 듯이 보이는 이문재의 시가 단순하게 이해될 수 없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오늘날 생태는 현상을 동반한 본질의 문제이고, 부분을 동반한 전체의 문제이며, 인식을 동반한 실존의 문제이다. 그것은 환경의 국지전이 아닌, 존재와 삶의 전면전이다.   

“식탁은 지구다”와 “우리 집 둥근 밥상은/우리 마을이었다”의 두 명제에는 자연 인식과 인간의 삶의 문화적 차이만이 새겨져 있는 것은 아니다. ‘식탁’과 ‘우리 집 둥근 밥상’의 사물-주체의 차이도 선명히 각인되어 있다. ‘식탁’은 서구적 근대화, 비인간적인 사물, 획일적인 보편, 익명성, 격음의 어감이 주는 물질적 차가움과 삭막함 등을 내포한다. 반면에, ‘우리 집 둥근 밥상’은 지역적 전통, 인간적인 혹은 인간의 삶의 일부가 된 사물, 제각기 다른 구체성, 고유성, ‘둥근’의 형태와 유음의 울림이 주는 정겨움과 가족 공동체의 따뜻한 친밀감 등을 함의한다. ‘식탁’과 ‘우리 집 둥근 밥상’이라는 이질적인 사물-주체는 ‘지구’와 ‘우리 마을’이라는 삶의 공간과 그 지속 원리의 차이를 뚜렷하게 반영하는 것이다. 이 차이는 규모와 양의 차원이 질적인 차원과 역전되는 지점에서 격렬하게 발생한다. “우리 마을”로 한정된 “우리 집 둥근 밥상”의 소박한 규모는 “문명 전부가 개입해 있는 식탁”의 거대한 규모에 대해 비교할 수 없는 질적 우위를 갖는다. 대부분의 경우, 인간의 삶의 질은 삶의 소박한 규모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행복한 삶은 대체로 소박하게 먹고 마시고 일하고 욕망하고 누리고 꾸려나가는 데서 비롯된다. 충만함의 역설을 지닌 ‘소박한 삶’의 현장은 인간 존재와 삶의 고유성과 구체성, 삶의 생생한 경험과 감각이 현존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식탁은 지구다」는 ‘식탁은 지구다’라는 현황 진단의 사실 명제에서 시작해 ‘식탁이 미래다’라는 정언명령의 가치명제로 마무리된다. 일찍이 이문재는, “만일 지금 예수가 오신다면/십자가가 아니라 똥짐을 지실 것이라는/권정생 선생의 글을 읽”으며, “농업박물관에 전시된 우리 밀/우리 밀, 내가 지나온 시절/똥짐 지던 그 시절이 미래가 되고 말았다/우리 밀, 아 오래 된 미래”(「농업박물관 소식 - 우리 밀 어린싹」, 『마음의 오지』)라고 통렬히 간파한 바 있다. “우리 밀, 아 오래 된 미래”의 감탄형 진술은 실상은 진술이 아닌 명제였던 바, 그 명제의 사실성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냉혹하게 확인되고 있다. “똥짐 지던 그 시절”과 “우리 밀”이 ‘오래된 미래’가 된(/되어야 하는) 한국의 현재는 가격이 폭등한 수입 밀가루와 또 다른 종류의 엄청난 수입 곡물과 미국산?호주산?뉴질랜드산 등 다양한 국적의 쇠고기에 포위되어 있다. 먹거리의 문제는 이제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입체적으로 관통하는 총체적인 현안이 되었다. 첨단 유전공학과 디지털의 시대에 먹거리는, 과거의 배고픈 시대의 역사를 재연하듯, 세계 곳곳에서 시위와 분쟁의 뇌관이 되고 있다.

그러나 현대의 제국은 ‘문명 전부’를 동원한 ‘식탁’으로 우리의 몸을 세포 하나하나까지 세계화하는 행군을 멈추지 않는다. 동시에 그에 대한 개인-지역-국가의 각성과 자의식을 교묘히 희석한다. 이문재가 수행하는 현대 사회와 자연/인간의 실상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 자연 상태의 몸과 감각의 보존, 모호한 이미지의 명료한 메시지화, 간명한 명제 창출 등은 현대 문명의 체계와 전략에 대응하는 그의 시적 체계이자 전략이다. 이 전략이 두드러질 때, “식탁이 미래다/식탁에서 안심할 수 있다면/식탁에서 감사할 수 있다면/그날이 새날이다/그날부터 새날이다”와 같은 직설적인 선언형의 진술이 텍스트에 도드라지게 된다.

메시지의 전면화는 이문재의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선택이자, 그의 시적 신념의 실천 방법이다. 이문재의 심중을 읽어내자면, 시는 갈수록 정교해지는 자본-제국의 고도 전략에 맞서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간결하고 강렬한 메시지를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송출해야 한다. 이문재의 시는 제국의 표준 주파수에 대한 방해 전파이자, 때로는 아예 제국의 전원을 끄는power off 동력 차단기가 되고자 한다. 자본-제국의 횡포에 대한 ‘방해’와 ‘차단’은 제국의 상품들이 “거쳐 온 길들을 묻”는 ‘질문법’을 통해 결행된다.「식탁은 지구다」의 전작(前作)인 「농업박물관 소식」 연작 중 한 편은 ‘식탁이 미래’라는 메시지를 ‘『토지』가 키운 달고 매운 풋고추’를 오브제로 하여 그려낸다. 


『토지』가 완성되던 해 여름, 박경리 선생 댁에서 풋고추 한줌 얻어왔더랬는데요, 원주 시계를 벗어나기도 전에 그 고추가 먹고 싶어 안달이 났더랬습니다, (…)

나는 식탁에 앉아 가끔 식탁에 올라 있는 것들이 내 앞에 오기까지 거쳐 온 길들을 묻곤 합니다, 식탁에 올라와 있는 동식물들의 고향의 사정을 넘겨짚어 보곤 합니다, 살을 빼야 한다는 딸애에게 이 질문법은 가르쳐주지 않고 있습니다, 나처럼 식탁에서 중얼거리다 보면 다이어트가 아니라 아예 단식이 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이지요

아, 언제 『토지』 풋고추 같은 아름다운 음식을 반길 수 있을까요, 언제 먹을거리들의 고향과 그것이 지나온 길이 투명해질까요


― 「농업박물관 소식 - 식탁에서 길을 묻다」(『마음의 오지』) 부분


박경리 선생이 직접 기른, 『토지』를 키운 토지에서 땡볕을 받고 자란 ‘풋고추’는 ‘식탁이 미래’인 녹색 세상의 열쇠이자 지도이다. 이문재가 ‘아름다운 음식’이라고 부르는 이 풋고추는 그것이 지나온 투명한 길의 총합이다. 그로 인해 더없이 청정하고 달고 맵다. “먹고 싶어 안달이 나”게 하는, 그토록 “반가”운 자연-음식은 그러나 지금은 지나간 과거이거나 대단히 희귀한 현재일 따름이다. 이문재의 통찰에 의하면, 우리가 식탁에서 매일 대하는 음식은 안달과 반가움이 아닌, 불편한 질문과 단식을 유발하는 위험한 타자들이다. 이 위험한 타자들은 우리 몸에 들어와 몸과 생명 자체를 위협한다. 더욱이 우리는 그 타자들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공격해 올지 알지 못한다. 환히 들여다보이는 풋고추의 투명한 길과 혼탁한 문명의 미로 사이의 거리는 이렇게 무한하리만큼 멀다. 

“식탁에 올라와 있는 동식물들의 고향의 사정”과 “거쳐 온 길들”에 관한 이문재의 질문법은 현대 문명의 반자연적이며 반생태적인 경제지리학을 폭로하기 위한 것이다. 이 질문법의 마지막 문장은 “언제 먹을거리들의 고향과 그것이 지나온 길이 투명해질까요”로 정리된다. ‘식탁’이 자본에 초토화된 ‘지구’에서 인간의 희망적인 ‘미래’가 되는 방법은 이 질문 안에 담겨 있다. 질문이라기보다는 정언명령에 가까운 이 문장은 먹을거리들의 고향과 지나온 길을 투명하게 만드는 것이 해답임을 피력한다. 그것은 ‘우리 집 둥근 밥상’이 지구화?세계화된 식탁을 대체하고 재전유하는, 오래된 대안의 길임에 분명하다.

아마도 이문재가 제국의 시스템에 맞세우는 자연?인간의 고유성?지역성?개별성은 그가 ‘우리 집 둥근 밥상’을 통해 체현한 것일 터이다. 이문재의 시는 ‘우리 집 둥근 밥상’이 ‘지구화된 식탁’으로 바뀐 길을 되돌리고 투명하게 만들기 위해 분투한다. 그것은 가능할까? 토트네스의 사례를 보건대, 크게 불가능한 일은 아닐 듯싶다. 이문재는 제국 태생의 시가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최대한의 일은 ‘식탁이 미래’가 되게 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그 믿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전 세계로부터 온 의혹에 찬 음식들이다.

오늘날 생태혁명이 전 지구적으로 일어난다면, 그 전진기지는 ‘식탁’이 되어야 한다. 이문재는 생태시의 소임이 자연과 인간과 문명의 생태를 함께 기술하는 것이며, 왜곡된 자연과 인간과 문명의 생태계를 바로잡는 일이 거창하고 요원한 일이 아님을 일깨워 준다. 그가 주장하는 바는 분명하다. 그리고 옳다. 그의 말대로, “식탁에서 안심할 수 있다면/식탁에서 감사할 수 있다면/그날이 새날이다/그날부터 새날이다”. ‘새날’을 향해 던지는 이문재의 메시지와 질문이 ‘새날’을 앞당기는 데 기여할 수 있는가의 여부는 그것을 읽는 우리에게 있다. 시와 현실, 시인과 독자, 먹거리와 먹는 주체-인간이 이처럼 하나의 운명이었던 예는 없었다. 그것을 일러 우리는 ‘생태시’라 부른다.《문장 웹진/2008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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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30
시 쓰고 자빠졌네

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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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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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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