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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인터넷과 만나다

  • 작성일 2009-10-13
  • 조회수 3,645


[좌담]  한국문학, 인터넷과 만나다

 

 

사회 / 소영현(평론가)

참가 / 강정(시인), 고봉준(평론가), 백영옥(소설가), 손택수(시인)

 

 

 

문학장의 변화, 웹진의 모색

 

 

소영현 / 인터넷 공간은 문학의 의미와 존재 방식에 커다란 변화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문장〉을 비롯한 〈나비〉, 〈뿔〉 등 다양한 웹진이 독자와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고요. 웹진을 통한 소통의 가능성은 문단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인터넷 공간을 활용하는 작가군의 편중 현상이 두드러진 것도 사실입니다. 인터넷 공간과 문학의 만남은 무엇을 의미하고 또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의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는데요, 문학장이 직면한 변화의 의미를 검토해보기에 앞서, 웹진 2차 열풍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선생님들의 생각을 간단하게 이야기해보는 것으로 오늘의 토론회를 열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봉준 / 어차피 새로운 것이란 기존의 익숙한 것이 어느 정도 한계에 도달할 때에 나오는 거잖아요. 그렇게 보면 웹진이라는 형식은 한국의 근대문학 백년을 이끌어왔던 잡지라는 지배적인 형식이 어느 정도 한계에 봉착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 같아요. 특히 최근에는 웹진이 ‘잡지’를 대신하는 게 아니라 소설을 연재하고 묶는 방식으로 기능하고 있는데요, 이것 역시 작가와 출판사가 계약을 맺고 거래하는 문학출판의 시스템에 한계가 왔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처럼 보여요. 그렇게 봤을 때 웹진이라는 것은 시대적인 환경의 변화에 따른 적응이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설정할 수 있는 방향 정도라고 저는 보고 있어요. 그것이 대안적인가하는 것은 다른 문제겠지요. 문학장의 환경 변화가 웹을 통해 미약한 출구를 모색하고 있다고 보는 게 솔직한 저의 느낌이에요.

 

강정 / 저는 예전에 웹진 일을 한 적이 있었어요. 인터넷 서점에 딸려있는 웹진이었는데요. 신간 서평, 음반 리뷰, 작가 인터뷰 등 여러 가지 일을 소수 정예(?) 인원들이 일당백으로 해치워야 했죠. 문학 전문 웹진이라기보다는 문화 전반에 대해서 다뤘구요. 한 2년 반 정도 일했는데 그 일도 하다보니까 거창하게 패러다임의 변화, 소통양식의 변화라고 하면서 종이책이랑 모니터상에서 읽는 글이랑 감각적인 차이도 있고 읽는 방식이 다르니까 유저들이 책을 대하는 태도도 많이 변할 것이라는 둥의 이야기가 나오게 되더라구요. 그게 2000년대 초반이었는데 당시 그런 형식의 웹진이 몇몇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문학을 전문으로 하는 웹진 ‘인스워즈’가 만들어졌다가 얼마 안 갔던 것도 같고. 아무튼 그 일을 하면서 매체의 변화에 따라 문학을 전달하는 양식도 많이 변할 것 같다는 막연한 인식들이 생기긴 했었죠. 여러 가지 복잡 미묘한 부분이 있었을 텐데 어떤 것을 하면 사람들이 새로워하면서 좋아할까 라는 고민도 있었지만 결국엔 흐지부지 되고 말았어요. 제가 했었던 그 웹진도 처음에는 새로운 맛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또다른 양식을 고민하게 되면서 방향을 잘 잡지 못했었던 셈이죠. 그 직후에 블로그 같은 것들이 유행하면서 일방향적인 웹진 방식에 스스로도 싫증이 나더라구요. 기사 쓰기도 지겨워지고요. 그러다가 결국 회사 차원에서 접어버렸죠. 이유는 물론 수익성이 없다는 거였죠. 팀원들도 오너 눈밖에 났었고요. 팀장인 저부터 맨날 지각하고 그랬으니까. (웃음) 요즘에 나오는 웹진들, 주로 인터넷 서점과 연계해서 많이 나오던데 제가 봤을 때는 그때 하던 거랑 큰 차이가 없어 보여요. 솔직히 ‘뭐 이런 걸 또 해?’ 이런 느낌이었어요. 형식적인 면에서도 별 차이가 없고. 오히려 수익성을 내고자 하는 욕망을 굉장히 전시적으로 드러내는, 가령 팔릴만한 작가들 위주로 일방적으로 콘텐츠를 제공하면서 더 속이 뻔히 보이게 되는 거죠. 제가 그 일을 할 때만 해도 기존 필자들, 이른바 문명(文名)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내부에서 글을 소화하면서 다른 형태로는 볼 수 없었던 필자들을 발견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어요. 실제로 그러기도 했었고요. 문학의 저변이 정해진 통로 안에서 유통되는 것 말고 이렇게 숨어서 알려지지 않는 채로 쓸 수 있는 사람들의 공간이 생겨날 수 있겠다는 가능성은 봤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그 때보다 더 기존에 만들어진 작가들의 네임밸류 등에 기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 그것을 새롭다고 말하는 것은 아전인수일 것 같고요, 마케팅의 새로움인지는 몰라도 문학의 새로움은 아닌 것 같아요. 시장에서 장삿거리가 될 만한 것이 뭐가 있을까하면서 눈짓 한 번 주는 것이란 생각이 기본적으로 들었고요. 그것이 매체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대변해 준다기보다 오히려 반대로 사람들이 문학을 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더 협소해지고 맹목적으로 편향되어졌는지를 환기시켜주는 것이 더 큰 것 같아요.

 

소영현 / 2000년대 전후로 웹진 1차 열풍이라는 게 있었다고 한다면, 상대적으로 이즈음의 웹진 열풍에는 오히려 퇴보한 측면이 있다는 것인데요. 상업성 문제는 논의를 진행하면서 본격적으로 다시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두 분의 말씀을 들으면서 든 생각인데요, 〈문장〉 웹진의 경우에 사실 나름대로 새로운 시도를 많이 보여주었는데요. 2차 웹진 열풍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명성이 있을 뿐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작가를 중심으로 확산되는 추세인 것이 사실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웹진에 관한 이러저러한 생각들을 간단하게 말씀해주시면서, 〈문장〉 등 이전의 웹진과 현재의 웹진의 경향성에 대한 비교도 함께 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손택수 / 〈문장〉은 표 나지 않게 실천적 국면에서 문학행위를 하는 부문이 있고, 지금 불고 있는 웹진열풍은 전시효과를 노리는 조금 과장된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이게 어떤 욕망과 관계되어 있는가 생각해보면 이렇죠. 제일 처음에 인터넷에 소설 연재한 것이 박범신 선생의 『촐라체』잖아요. 그게 굉장히 인기가 있었죠. 백만 조회라는. 그 다음에 황석영 선생의 『개밥바라기별』로 이어지죠. 이게 되는 구나라는 판단을 한 것 같아요. 상업자본 출판사들이. 그래서 그런 욕망들이 결합하면서 과장된 면이 있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근본적으로 생산과 수용이 역동적으로 드러나는 그런 부분은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희망적으로 잘 활용해 나가야겠죠.

 

백영옥 / 저는 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데요. 제가 생각할 때 일단 기본적으로 문학을 하고 싶어 하는 출판사들이 굉장히 많이 있어요. 기존에 〈문학동네〉, 〈문학과 사회〉, 〈창작과 비평〉 이외에 말이죠. 그런데 문학 쪽에 진입을 하고 싶어 하는 출판사들이 있는데 그런 출판사들이 계간지를 만드는데 필요한 비용과 시간이 굉장히 많잖아요. 편집위원을 모집해야 하고, 잡지 하나를 만들어야 되고. 그런데 웹진은 진입장벽이 굉장히 낮거든요. 그냥 작가만 섭외해서 지면을 준다는 기가 막힌 명목이 있기 때문에 작가를 흡수할 수 있는 강력한 툴이 되거든요. 지금 ‘나비’(http://nabeeya.yes24.com) 같은 경우에도 보면 〈생각의나무〉나 〈위즈덤하우스〉 같은 문학 외에 상업 출판을 주로 했던 출판사들이 많아요. 실질적으로 알라딘의 창작블로그 같은 경우에는 상업출판을 하지 않더라도 자체적으로 네티즌들이 자기 소설을 연재할 수 있게끔 판을 벌여 놓았고, 알라딘 같은 경우에는 웅진이 들어가 있거든요. 작가 확보의 어려움을 겪는 출판사의 구조적인 문제와 지면이 부족한 작가들, 또는 지면이 필요한 작가들이 맞아떨어진 점이 있는 것 같아요. 요즘에 출판자본이 많이 생각하는 부분이 ‘원소스 멀티유즈’(One Source Muti-use, 하나의 상품 또는 미디어 소스를 여러 미디어 형태로 확장하여 판매 및 판촉하는 것을 일컫는 말) 하나의 원 텍스트로써의 소설을 가공해서 만드는 드라마, 영화, 뮤지컬이든. 기본적으로 웹진에서 연재하는 소설의 80~90% 이상이 장편소설이잖아요. 단편이 아니고. 제 경우에 세계문학 추세가 장편으로 가고 있는데 계간지의 툴 안에서는, 혁신적인 변화를 가지고 가는 계간지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단편과 장편의 비중이라는 것이 장편을 많이 연재할 수 없는 구조잖아요. 제가 생각할 때는 장편 수용을 많이 하게 되는 구조는 상업적으로 그리고 또 여러 가지 자본주의 논리 하에서 소설 콘텐트로서의 원형이 필요한데 그런 것들을 계간지에서 많이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외국에서 많은 돈을 주고, 이를 테면 아쿠다카와나 나오키 상 같은 일본 쪽의 판권료가 엄청나게 높아졌잖아요. 한국작가를 좀 더 발굴해야 한다는 측면이 있었던 것 같아요. 〈김영사〉라든가, 〈웅진〉이라든가 국내 문학 쪽을 하고 싶어 하는데 실패했던 그런 출판사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 느낌은, 장편으로 세계 문학 추세를 쫒아가면서 패러다임이 장편위주로 바뀌고 또 그런 출판자본의 그런 것이 맞아 떨어진 것이죠. 웹진이 적당한 역할의 공간을 해줬던 것 같아요. 이런 것들이 많은 형태로 좀 더 커질 것 같거든요. 문제는 포털 사이트의 연재 형태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것이죠. 그것 또한 상업 논리라고 볼 수 있는데 『촐라체』나 『개밥바리기별』이. 왜냐하면 백만이라는 조회 수는 실제 어마어마하지만 소위 말해서 네이버나 다음의 파워블로거들, 어떠한 비용도 지불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3~4만 명이 들어오는 파워블로거들이 있단 말이에요. 그리고 만화콘텐트를 게재했을 때 문학의 텍스트를 보러오는 블로거들이 너무나 현격히 낮은 거예요. 문제는 각종 웹진에 게재되고 있는 소설들의 원고료들을 거의 100% 출판사가 대고 있어요. 문제는 리스크를 점점 줄여야 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가게 되면 다양성의 측면에서 굉장히 마이너스인 것 같아요. 알라딘에서 배명훈씨가 『타워』 연재할 때 어떤 가능성 같은 것을 봤었거든요. 이제 그런 것들이 희박해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에, 원고료를 깎거나 안 주거나 하는 게 우려가 되는데. 판이 넓어지면서 지면이 많아진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것 같아요.

 

소영현 / 웹진의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다 짚어주신 것 같은데요, 다른 생각을 가진 선생님들이 할 얘기가 있으실 것 같아요.

 

고봉준 / 세 분 선생님이 얘기에 근본적으로 동의해요. 문제는 이런 변화가 실제로 무엇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가를 따져보는 일이겠지요. 저는 문학과 인터넷의 결합이 문학의 파이를 확장시키고 있다는 진단에는 동의해요. 그렇지만 백영옥 선생님의 지적처럼, 그 파이가 한정된 작가들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 역시 사실이죠. 작가들에게도 이른바 몸값이라는 게 있고, 지금의 웹진들은 그 사람들을 중심으로 움직이잖아요. 스타시스템 같은 거라고 볼 수도 있고, 가끔은 작가들이 연예인에 근접하고 있다는 느낌도 받아요. 그런 점에서 봤을 때 웹진이나 인터넷 연재를 문학적인 마인드에서 출발한 거라고 순진하게 평가할 수만은 없죠. 어쩌면 그게 웹진이나 인터넷 연재소설의 맨얼굴일지도 모르죠. 문학인들이 까발려서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문학의 ‘생얼’이요. 이런 걸 간과하고 보면 웹진이나 소설을 인터넷에 연재하는 현상이 마치 문학의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처럼 볼 수도 있겠지만, 제가 볼 때에는 잡지라는 형식이 이미 상업적인 면에서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에 불과한 것처럼 보여요. 알다시피, 사실상 이제 잡지의 가격은 무의미해요. 잡지로는 손익분기점을 계산하기도 어렵고, 어떤 가격을 붙여도 손해 보는 건 마찬가지거든요. 잡지가 많이 늘어나서 그렇게 됐다는 분들도 계시지만, 전체적으로 사람들이 예전보다 잡지를 많이 안 보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 같아요. 여전히 잡지를 창간하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있지만, 상업적인 고려를 조금이라도 한다면 잡지를 통해서 문단에 울타리를 치기에는 늦은 것 같죠? 웹진은 그런 면에서의 방향 전환이라고 봐요. 단행본도 마찬가지죠. 웹진에 장편을 연재하는 건 작가들에게 계약금을 주고 원고를 받아 책을 내는 전통적인 방식이 끝나가고 있다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원고가 집필되는 과정에 출판사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입소문을 내거나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해서 관심(?)을 끌려는 상업적인 고려이죠. 여기까지는 어렵지만, 동의를 못할 건 아니죠. 그런데 이것이 문학의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있는가라고 물으면,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들이 이런 문제에 대해서 모른 척 하거나 말하려 하지 않고, 또는 혼동하죠. 웹진과 인터넷에 장편소설을 연재하는 건 무언가 새로운 실험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건 이미 능동적인 의미에서 실험이 아니라 한계에 도달한 낡은 것이 어쩔 수 없이 취하게 마련인 방편이죠.  

 

 

거대한 자본의 힘이 웹진을 움직인다?

 

소영현 / 웹진으로의 이동이 문학장이 직면한 문제에 대한 전환적 계기라는 점에 대해서는 모두 동의하시는 것 같은데요. 논의가 자연스럽게 상업성 문제로 넘어가게 되네요. 웹진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인터넷 매체에 한정해야 하겠지만, 현재의 웹진은 아시다시피 연재 이전부터 종이책 출간을 예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상당수의 웹진 연재 작품들이 문학동네 등의 출판사에서 작가에게 연재를 제안하고 인터넷을 통한 광고 효과를 노리면서 작품을 연재하고 종이책을 출간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진행되는 웹진 연재 형식에 관해서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거 같은데요.  

 

고봉준 / ‘상업적이다’라는 비판은 정당하죠. 그렇다고 출판사들이 상업적인 행위를 하면 안 된다고 말하기도 어렵잖아요. 제가 문학출판이 위기고 존폐의 기로에 서 있다는 협박성(?) 발언에 민감해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제가 볼 때는 상업성 그 자체보다 심각한 건 그것을 문학의 변화나 실험 같은 언어로 포장하는 게 더 큰 문제처럼 보여요. 오랫동안 문예지들이 상업적인 고려와는 별개로 작가들에게 지면을 제공한 측면이 있어요. 이념이나 신념이라고 볼 수도 있고, 문화적 헤게모니나 상징권력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지점이죠. 출판이나 잡지의 운영 과정에서 상업적인 것‘만’을 고려한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더 중요한 것을 추구하기 위해 적자를 감수해 온 부분도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시대는 아무래도 그런 미덕이 통용되기 어려운 시대인가봐요. 그 부분을 줄이겠다는 것이 느껴지거든요. 인터넷 웹진은 그 자체만 놓고 보면 기본적으로 상업적일 수가 없어요. 우리가 이메일을 쓰는 조건으로 아주 적은 비용을 내라고 하면 쓰지 않으려고 하는 것처럼, 웹진 역시 원칙적으로 무료로 운영되니까 일정한 기능을 하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웹진들은 주요 출판사와 연계가 되어 있고, 실제 작가들에게 지불해야 하는 고료 역시 출판사가 부담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러니까 묘한 시스템이죠. 표면적으로는 상업적일 수가 없는데 궁극적으로는 상업적인 고려에서 나온 것이고, 웹진에 참여한다고 해서 기존의 잡지를 폐간하지 않는 건 잡지를 통해서 행사하는 영향력을 포기하기보다는 웹진을 통해서 그것을 더 강화하겠다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이건 잡지에서 웹진으로의 이동이 아니라 기존의 잡지와 출판을 강화하는 방식, 그러니까 잡지에서 웹진으로,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가는 게 아니라 웹진과 온라인을 통해서 잡지와 오프라인을 강화하는 방식이에요. 그러니까 상업적이라는 비판에 그친다면 약간 무책임한 측면도 있어요. 이런 걸 문학의 변화라고 본다면 ‘오버’ 아닐까요?   

 

손택수 / 저는 상업의 윤리성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데요. 제가 적어왔어요. ‘나비’ 창간사, ‘이 웹진의 모든 참여자들은 공공성의 원칙을 지키고 공공의 가치를 함양하는 것이 운영원칙이라는 데 모두 동의한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언제든지 참여할 수 있도록 문을 개방하겠다’라고 했거든요. 참여하는 출판사들이 일곱 개인데, 〈문학동네〉, 〈생각의 나무〉, 〈세계사〉, 〈위즈덤하우스〉, 〈자음과 모음〉, 〈창작과비평〉, 〈한겨레출판〉이예요. 내부 규약에 의하면 일곱 개 출판사 중에 하나의 출판사라도 공석이 생겨야 다른 출판사가 들어올 수 있어요. 이것은 배제의 논리죠. 그리고 이 출판사들이 추천한 자기 출판사의 작가나 편집위원들이 대표적으로 편집위원이 되어 있죠. 처음부터 이렇게 출판하는 것이 과연 맞는가 이런 생각이 들고요. 결국은 그렇게 해서 연재했던 책들이 그 출판사에 의해서 서로 나눠먹기식으로 갈릴 텐데, 그런 시스템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하는 의문도 갖고 되고요. 제가 또 거기 오늘 처음 들어가 봤습니다. 신간 추천 부분에 가봤어요. 신간추천의 스물한권 중에 다섯 권이 회원사 책들이더라고요. 〈창비〉, 〈한겨레출판〉, 〈위즈덤〉, 〈문학동네〉 이렇게 돼 있어요. 나머지 출판사들 세 개가 더 들어온다면 신간 추천의 3분의 1이 회원사 책들이죠. 그 다음에 ‘예스24’ 유통 업체가 나름대로 관리하는 게 있을 거예요. 그런 것까지 생각하면 기본적인 상업 윤리를 생각할 수밖에 없고. 신간소개란에 보니까 회원사들 책만 소개돼 있어요. 과연 이게 공공적인 기구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죠. 벌써 초반부터 이렇거든요.

 

소영현 / 상업성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출판 윤리 혹은 상업의 윤리성이 요청된다는 말씀이신데요, 웹진과 공공성이라, 문제가 더 어려워지는데요. 그러면 윤리성과도 연관되어 있는, 웹진의 공공성에 대해서는 어떤 논의가 가능할까요.

 

강정 / 저는 출판시장의 상업화 이런 문제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할 얘기가 없어요. 하루 이틀의 문제도 아니고, 제가 아무리 무슨 생각을 하고 문제를 제기해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거든요. 여러 가지 문제를 짚어낼 수 있을 테지만 단지, 글을 쓰는 입장에서 누군가가 ‘내 꺼는 왜 광고 안 해줘?’라거나 ‘나는 왜 지면 안줘?’ 이런 식으로 찌질하게 화를 내는 상황 정도야 있을 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진 않을 테니까요. 물론 그게 본질적 문제도 아니고 정당한 반응도 아니겠지만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출판사가 이윤을 추구하는 것을 뭐라 그러고 싶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다고 생각해요. 다만 문학 자체만 놓고 생각을 했을 때 문학이라는 게 작가 아닌 누군가에 의해서, 또는 어떤 자의적인 카테고리로 설정된 ‘대중’이라는 허구적 대상을 향해서 굉장히 일방적으로 소구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것이 좋은 작품인가 하는 판단은 문학판 내부에서도 분분할 테지만 외부에 또는 흔히 말하는 대중들에게 보여졌을 때는 몇몇 예만 살아남게 되는 거고 그게 문학의 전부인 양 오도되는 거죠. 아주 잘 나가는 누구, 아주 유명한 누구. 책을 많이 판 누구 등등이 정말 문학적으로 뛰어난 작가인 양 오인되거나 일방적으로 홍보되는 거죠. 사정을 알고 보면 그런 작가들 역시 정말 유명해질만해서 유명해진 게 아니라 유명하게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는데 말이죠. 이것이 좋은 문학이다 라고 선전되는, 아주 편협하면서도 쉽게 교정될 수 없는 논리가 그 밑바닥에 조장되어 있는 것 같아요. 사실 문학하는 사람들 내부에서의 평가가 그것과 다를 가능성도 많잖아요. 누군가 어떤 분명한 문학적 입장을 가지고  ‘그 작가는 정말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그런데 가령 인터넷 매체라고 했을 때는 굉장히 광범위하면서도 지나치게 편협하고 소외된 매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어느 소수의 문학공동체 같은 게 있어서 ‘우리는 이런 문학을 하고 싶다’라고 주장을 할 수 있는 장이기도 한 동시에 그러는 순간 스스로 소외되는 공간이기도 하죠. 마음만 있다면 웹진 하나 만드는 거 정말 어려운 일 아니에요. 자체적으로 좋은 원고를 소화할 수 있다면 원고료 등도 세이브될 수 있으니까 돈도 얼마 안 들어요. 그런 식의 분파적인 활동들이 활발해지면 인터넷 매체를 통해 우리나라 문화산업 시스템에서 굉장히 일방적으로 권력화 돼서 소구되고 있는 문학에 다른 활로를 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랬을 때 어쩌면 문학 자체의 또다른 가능성이 생기는 걸 기대할 수도 있을 것 같고요. 백영옥 씨 얘기처럼 다른 저변, 이른바 종이 문예지가 하지 못했던 지면이나 이런 것들을 제공하는 것에서 좀 더 나아가 문학 자체의 체질개선이 일어날 수도 있는 거겠죠. 문학이 더 좁은 데로 들어가면서 더 넓어질 수 있다, 뭐 그런 생각이 드네요. 그런데 문학을 굳이 왜 알려야 할 필요가 있냐 하는 생각도 동시에 있어요. 무슨 동계올림픽 유치 홍보하는 것도 아니고 (웃음) 이 얘긴 우리나라 작가들이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서 자기에 대해서나 다른 작가에 대해서 여러 가지 복잡 미묘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전제로 한 겁니다. 어쩌면 그 인식을 문학화 하는 것 자체가 문학을 하는 태도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생각도 들거든요.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그런 것들을 실천하는 한 매개가 될 수 있다면 좋겠어요. 인터넷은 멀티가 가능한 것이니까 여러 가지 다른 형식적인 신선함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고. 저는 근본적으로는 그런 것부터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상업성을 비판하고 그러는 것은 우리가 할 수도 있는데 해봤자 결론도 안 나오는 얘기고. 오히려 질문 자체를 조금 비틀고 비껴가면서 다른 형식을 모색하는 게 더 중요하고 필요할 것 같아요.

 

손택수 / 저는 방금 강정 시인이 말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한 것인데, 상업성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업의 윤리성이 있느냐 없느냐를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하면 그 공간을 통해서 비판적 독서대중이 형성되고 있느냐 없느냐와 관계되는 것이거든요. 단순히 그 공간을 통해서 소비독자로 끝나버린다면 그야말로 상업의 논리에 끌려가버리는 것이거든요. 그 문제 때문에 얘기를 한 것입니다.

 

고봉준 / 덧붙여서 말하면, 웹이라는 것이 지면의 연장이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해요. 이제까지 문학이 만들어지고 소비되어 왔던 양식과는 다른 방식, 기성의 구조에서 발생한 제한과 한계를 돌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터넷을 사용한다면 저는 새로운 실험이 가능하다고 봐요. 그런데 지금 인터넷에 소설을 연재하는 건 지면의 연장밖에 안 돼요. 그러니까 이런 게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고, 상업적인 이유로, 홍보수단으로 일환으로, 상징권력의 재생산을 위해…… 같은 이유 말고는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죠. 생각해 보세요. 많은 기사들과 논문들은 댓글이 가능하고 작가들이 그걸 실시간으로 본다는 점을 강조해서 쌍방향적인 특징을 주장하지만, 실제로 그 댓글들이 소설을 바꿀까요? 설령 그런 일이 생긴다고 해도, 그것이 구현되는 방식, 그러니까 작가가 쓴 원고를 파일 형태로 편집자에게 보내고, 편집자가 그걸 다시 html로  편집을 해서 올리는 방식을 서사의 변화나 확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것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고봉준 / 손택수 시인이 말처럼 상업성에도 나름의 윤리가 있죠. 잡지를 중심에 두고 보면, 한국의 근대문학이 항상 상업적인 고려만 한 건 아니에요. 상업성보다는 특정한 이념이나 미학적인 취향을 강조한 경우도 많죠. 그런데 잡지다운 ‘잡(雜)’스러움, 그러니까 특정한 커넥션만이 아니라 그것들과 무관한 이질성이나 혼종성 같은 것에, 그리고 상업적인 경쟁력이 없는 작가들에게 지면을 할애하려는 경향이 현재의 웹진에는 없어요. 물론, 잡지들도 그렇지만요. 그래서 철저하게 그것을 운영하는 주체들과 같은 종류의 것들만을 재생산하고 있고, 그러다보니 커다란 건 더 커지고 그렇지 못한 건 소멸되고 마는 현실이죠. 다소 회의적으로 느껴지지만, 문예지에 공공성이라는 게 있다면, 또 그런 게 가능하다면, 그런 것들을 보듬고 활성화시켜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문제에는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오직 단행본으로 출판했을 때 잘 팔릴만한 작가들에게만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현실이 암울하게 느껴져요. 상업성 자체를 비판할 마음은 별로 없지만, 그것이 무엇을 외면하고 있는가는 두고두고 생각해볼 문제인 것 같아요. 만일 그런 현상이 독자를 한 방향으로만 몰아간다면 끔찍할 것 같은데요.

 

백영옥 / 제가 갑자기 든 생각인데요. 제가 그냥 독자의 입장에 있을 때요. 잡지사에 일을 했었거든요. 근데 우리나라 출판, 소설가들의 형태가 계간지에 단편을 연재하고 그것을 긴 시간을 모아서 소설집을 내는 형태로 출판이 되잖아요. 사실은 말하면 묵은 밥이거든요. 따끈따끈한 밥을 먹고 싶은데. 계간지를 돈 주고 사서 보는 사람들은 문창과 학생들이거나 아주 극소수 사람들인데. 저는 사실 패션지 <바자>를 다녔어요. 미국, 일본 경우만 해도 〈보그〉, 〈엘르〉, 〈바자〉에 연재를 하거나 단편을 발표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왜냐하면 계  간지보다는 진입장벽이 굉장히 많이 낮아요. 미용실이든, 편이점이든 아무데서나 볼 수 있기 때문에. 제가 패션지에 있을 때는 청탁을 많이 했었어요. 김훈 선생님 단편도 싣고, 박민규 선배의 단편도 싣고. 제가 다닐 때만 하더라도 작가분들 인식이 ‘아, 무슨 패션지에 단편?’ 너무 답답했죠. 레이먼드 카버나 스티븐 킹도 아마 〈에스콰이어〉 10주년 기념호에 연재하거나 단편 전편을 다 싣거나 하는 식입니다. 이번에 요시다 슈이치씨가 오셨었잖아요. 그 때 대담을 했었는데, 요시다 슈이치 본인도 〈보그〉나 〈바자〉에 많이 연재를 많이 한다고 해요. 계간지에 작품 발표하는 것처럼. 말하자면 웹진이라는 게 '문장'도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보는데요. 독자가 보고 싶어서 볼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에요. 막 나온 신선한 단편을. 작가들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제 경우에는 당대적인 것에 관심이 많아요. 이를 테면 제가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단편을 썼었는데요. 그 당시에는 그 말이 유행했었어요. 댓글에는 어떤 배우가 대마초나 마약을 맞다가 걸렸다고 하면 댓글에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고 하기도 했는데요. 어찌 보면 너무나 황당하고 기괴한 현실을 정치 패러디로 풍자한 것인데, 그것을 만약 2009년에 보게 된다면, 더군다나 국가적 불행을 겪고 난 이후라면 정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꽤 뒤틀려 보일 수 있거든요 말하자면 유통구조 자체가 독자에게 그다지 썩 유리한 구조가 아니에요. 저는 그게 불만이었어요. 독자의 입장으로서는. 단편을 발표하는 지면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제가 어렸을 적만 하더라도 〈여성동아〉나 〈주부생활〉이나 장정일 선생님 연재하기도 했었어요. 그래서 〈주부생활〉 장편연제를 보기도 했었던 기억이 있는데요. 제가 기회가 닿아서 잡지 관계자분들을 만날 때마다 굉장히 얘기를 많이 했어요. 박완서 선생님도, 장정일 선생님도 연재하셨고. 뭔가 다양한 루트를 통해서 소설이 다가가고, 저변이 넓어지려면 독자층이 넓어져야 하는데 진입장벽이 너무 높기 때문에 들어갈 수 있는 통로가 너무 작은 거예요. 그런 것들을 시도하려고 하다가 저는 실패했어요. 작가들이 원하지 않아요. 굉장히 낮선 지면이기 때문에. 그게 굉장히 쉽지가 않더라고요. 웹진이 그런 통로로써 굉장히 책을 많이 읽고, 텍스트가 종이 지면으로 연결될 수 있는 통로밖에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물론. 그런 측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책 자체를 안 보는 사람도 많이 있거든요. 그런 사람들이 인터넷 환경에 굉장히 익숙한 네티즌이라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읽는단 말이에요. 일종의 독자로서 들어오기 쉬운 구조를 만들어줘요. 그게 그런 측면이 있어요. 종이 출판이 되면 사서 보지 않을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보던 글들을 종이로 읽고 싶다는 욕망이 생겨서 사서 보는 경우도 생길 수 있고. 인터넷에서 연재했던 소설들이 그만큼 많이 팔린다는 것은 새로운 독자층이 만들어졌다는 의미일 수도 있거든요. 기존에 책을 안 보던 사람들이. 역으로 유입이 된 거죠. 웹에서 종이지면으로. 저는 그런 측면에서 생각해볼 거리가 있지 않나 생각해요.

 

고봉준 /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저는 웹진의 형태를 분별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저도 '문장' 웹진에 자주 들어오는데, 여기는 상업적인 고려가 없어요. 유명한 작가들보다 신인들에게 지면을 많이 할애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죠.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문장’ 웹진은 종이로 된 잡지의 연장이면서도 일정한 순기능을 갖고 있어요. 그 외의 웹진들, 알라딘, 교보, 예스24, 다음(Daum) 등은 그렇지 않죠. 그러니까 구분이 필요하죠. 웹진 ‘나비’도 그런 맥락에서 순기능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고, 웹으로서의 가능성이 분명히 있어요. 그렇지만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웹진들 대부분은 그렇지 못한 측면이 더 많다는 점을 말씀 드리고 싶어요.

 

 

인터넷 문학은 있다? 없다?

 

소영현 / 웹진의 상업성과 공공성을 두고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어봤는데요, 웹진으로부터 논의 영역을 좀 넓혀보겠습니다. 웹진과 연관해서 인터넷 문학에 대해 논의해보려고 하는데요, 논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용어 정리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인터넷 소설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또 듣곤 하지만, 사실 인터넷 시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지는 않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 말고도 인터넷 문학이라는 말의 쓰임과 관련해서도 논의가 필요한데요, 최근 언론에서 웹진을 통해 소개된 소설들을 인터넷 문학으로 규정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요, 아시다시피 그간 인터넷 문학이라는 용어는 다른 범주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었죠. 분명히 범주적 차이가 있는데요, 이러한 사정과 연관해서 인터넷 문학의 범주, 용어 사용의 타당성 문제에 대해 한번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고봉준 / 가끔 인터넷 문학에 대한 신문기사들을 접하는데, 언론들은 그걸 고려하지 않는 것 같아요. 어쩌면 일부러 외면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구요. 소설이나 시가 인터넷을 통해 유포되고 게재되는 것을 그냥 뭉뚱그려서 인터넷 문학이라고 하고, 마치 지금의 웹진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거든요.

 

손택수 / 제가 알고 있는 인터넷 문학 개념은 피시통신, 하이텔 동호회와 같이 문단문학에 의해서 한 마디로 저급하고 삼류라고 매도되던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공동체를 이루어서 나름대로 운동성을 가지고 발전해 나가는 것을 인터넷 문학이라고 이해하고 있거든요. 지금 언론에서 쓰이는 인터넷 문학하고 다른 것 같아요.

 

강정 / 그 당시에 피시통신에서 활동을 하다가 ‘제도권’으로 픽업된 사람도 있잖아요. 저는 그들이 발표양식에서의 새로움뿐만 아니라 독특한 문학적 감수성도 분명히 보여줬었다고 생각해요. 경계가 하나씩 흐물흐물해지는 역할도 했었는데 지금은 그 사람들이 흐물흐물 사라지는 느낌도 드는데요. 인터넷 문학이라는 것 자체가 그런 의미를 섬세하게 가질 수도 있는데 개념 정의가 안 되는 상태에서 언론은 말 만들기를 좋아하니까 ‘인터넷 문학’이니 하는 용어들이 요즘 막 떠도는 것 같아요. 사실 그게 뭔지 아무도 규정할 수 없고 그런 게 정말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기능하고 있는지 조차 가물가물한 상태에서 말이죠. 독자들은 또 그런 말을 듣고 이런 게 정말 있나보다 하면서 살짝 흘겨보고는 다시 자기들이 정말 재밌어 하는 어떤 것으로 옮아가게 되지요. 인터넷이란 손택수 시인이 말한 것처럼 하나의 운동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한 매체 기능뿐 아니라 거기서 새로운 인간의 개념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건 저급과 고급을 따지기 전에 인간의 생태가 변하는 것일 수 있으니까요. 변화의 과정에 있으니까 이런 저런 얘기들이 나오는 거라고 생각해요. 문학은 또 무엇이냐고 생각했을 때 문학도 변했을 거잖아요. 여러 가지 전달 양식과 소통 양식이. 그리고 이런 순간에 옛날의 형식만 고집하는 것도 스스로 체증에 걸리는 것일 수도 있고요. 우리가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아주 가까운 과거나 미래를 통틀어 봤을 때 문학이 어떻게 존재 할 수 있느냐를 고민하는 일이라고 봐요. 때문에 저는 여기 모인 분들의 입장이 서로 다른 듯하면서도 근본적으로는 똑같은 사정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무슨 이야기를 하든 그게 뭐 상업논리에서 벌어질 수밖에 없는 사건들 안에 늘 있는 것이고, 그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느냐 생각해 보면 말은 많아지겠지만 결론은 요원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있을 것 같아요. 갈라지면서 생기는 미세한 접점이 있는 것 같은데요. 기존의 문학제도에서 소외됐던 어떤 것들을 그 안에서 살릴 수 있다, 하는 정도로요. 저도 옛날에 웹진을 하면서 그런 것들을 해보고 싶었거든요. 우리나라만의 빡빡한 등단 절차가 있잖아요. 그러나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면 그 과정을 거치지 못한 ‘선수’들이 굉장히 많다고 느꼈거든요. 제가 웹진을 하면서 ‘이 선수들 한 번 끌어 모으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기도 했었어요. 비슷한 시도를 해서 거기서 몇 명을 뽑았어요. 실제로 몇 년 후에 데뷔해서 책도 내고 그러더군요. 뭐 내가 그들에게 어떤 절차상의 도움을 준 건 없지만, 그런 식으로 알게 돼서 활동하는 걸 보니까 왠지 뿌듯한 기분은 들었어요. 아무튼 그런 식의 연계가능성도 분명히 존재하는 거죠. 한국의 문학을 30~40년만 따져도 굉장히 일방적인 체계로 권력화 되어 있다는 건 새삼스러운 얘기가 아닐 겁니다. 그 눈에 들지 않으면 활동하기도 힘들어지는 거고. 그것을 옆구리 콕콕 찔러주면서 다른 것을 모색할 수 있는 요소들이 분명히 인터넷에 존재하거든요. 그런데 요즘 웹진을 보면서 신물이 나는 것은 그 오래된 방식이 어떤 새로운 반성이나 검증절차 없이 적용되고 있다는 점이죠. 수십 년 신물나게 봐온 행태들이 똑같이 적용되는 거죠. 막말로 그 바닥에서 날렸던 사람들이 그대로 옮겨오는 거죠. 저 땅 다 먹었으니 이 땅 한번 또 접수하러 옮겨온다는 느낌? 그런 걸 보면 저 사람들 여기서까지 이래야 돼? 저기서 그냥 놀지 하는 생각도 들고. (웃음)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우리에게 조그만 자유가 있다면 그 안에서 놀 수 있는 자유마저 그들이 뺏어가는 건가하는 약간의 피해의식도 들기도 하고요. 물론 여기서 말하는 ‘우리’나 ‘그들’은 상당 부분 겹치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하는데, 그런 구분이 왠지 선험적으로 작용하는 느낌이 들어서 때로는 불쾌하기도 해요.

 

고봉준 / 인터넷은 대중적인 접근성과 실험적인 것, 두 가지 측면에서 논의되어야 하는데, 지금 인터넷 문학이나 웹진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계속 접근성만 강조해요. 그런데 인터넷은 접근성 못지않게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는데, 오히려 그 가능성을 고려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답답한 측면도 있어요.  

 

손택수 / 그러고 보니까 인터넷 문학이라는 개념이 이제 좀 서는 것 같습니다. 맞네요. 그런 바깥의 목소리들, 다성적인 실험과 울림들이 끊임없이 제도 문학에 저항을 해 온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때로는 젖줄이 되기도 하고. 가능성으로서의 그런 공간마저 함락시켜서 제도화하는 논리가 통하는 건 아닌가 생각해요.

 

소영현 / 인터넷 문학의 범주를 재설정하는 자리가 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사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창작 주체에 대해서도 따로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실제로 여기 참석하신 분들은 모두 문인이시죠. 문인들 사이에는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문학 개념이이 있기도 하고요. 우리가 인터넷 문학을 두고 접근성의 확대, 저변 확대를 이야기하고, 가령 백만 조회수를 자랑하는 「촐라체」 등을 떠올리고 있기도 합니다만, 인터넷 매체를 통해 익명의 무수한 작가들에 의해 창작된 인터넷 문학이 있고, 인터넷 문학의 생산과 소통의 통로가 되고 있는 인터넷 사이트가 상당수 존재합니다. 대개의 사이트들이 백만 명 이상의 회원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고요. 웹진을 두고 종종 문인의 범주 안에 들어오는 작가와 독자만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은데요, 인터넷 문학의 가능성과 관련해서, 우리 자신의 문학 개념을 바꿀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 변화의 국면을 성찰의 기회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인터넷 매체가 창작주체나 등단절차 등에 변화를 가져오고 문제제기한 측면이 있는데, 이러한 점들을 인터넷 매체가 문학 제도에 가져온 순기능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고봉준 / 만약 제가 출판사를 운영하는 주체라면 당연히 많은 독자를 거느리고, 대중들에게 더 폭넓게 어필할 수 있는 것을 고려할 거예요. 그렇지만 문인이나 평론가의 한 사람으로 본다면 아무리 후하게 평가를 해도 문학의 가치나 의미를 판매량이나 접속량으로만 환산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잘 팔리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나 대중적이라는 것, 잘 읽힌다 것,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많이 팔린다는 것만 가지고 작품을 평가할 수 있는 없어요. 물론 그것도 문학의 중요한 덕목이겠지만, 지금 사람들이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고 문학의 파이가 많이 줄어들고 있다고 실감하고 있잖아요. 그건 문학에 특별한 잘못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시대적인 변화 때문이에요. 명작들이 대중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았거나, 판매량에서 엄청난 기록을 갱신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셨나요? 문학의 가치나 의미를 대중적인, 상업적인 것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논리는 이 시대가 추구하려는 논리지, 문학의 논리는 아니에요. 그런 점에서 대중성이라는 말은 좋은 의미일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딜레마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출판사의 상업주의를 비판한다고 달라질 건 별로 없어요. 먹고 사는 게 최우선인 이 시대인데, 출판을 담당하는 사람들만을 탓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 볼 여지는 있어요. 실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장편이 아니라 ‘좋은’ 장편이니까요.

 

소영현 / 우리 모두가 문학의 가치와 상업성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도 드는데요, 출판사 쪽에서 보면 어떠할까요.

 

손택수 / 저는 출판사에서 일하니까 드리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출판사는 상업자본이면서도 다른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일반 기업들이 무조건 이윤만 추구하는 것이라면, 출판사는 무조건 이윤만 추구하는 것이 맞느냐, 아닌 부분이 있지 않느냐. 그게 일종의 문화잖아요. 5백부가 팔리는 책이지만, 반드시 내어야 하는 책이 있잖아요. 그 역도 마찬가지지요. 일백만부가 팔릴 것 같다 하더라도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해 쉽게 결정을 할 수 없는 맥락이 있지요. 적어도 그런 양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출판쟁이’들이 아닐까요. 출판사가 상업성을 추구하는 것만은 아니죠.

 

고봉준 / 제가 만약 출판업자라면 그걸 크게 고려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예전에는 문예지나 문학 출판사들이 이념이나 미학적 성향의 차이가 있었어요. 어떤 사람들은 지금도 그게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믿는 것 같더군요. 그래서 소위 어떤 잡지, 어떤 출판사의 작가, 시인, 평론가라는 딱지도 있었지요. 하지만 90년대 중반 이후로 매체를 움직이는 비평의 경우를 제외하곤, 그런 건 사실상 없어졌어요. 문턱이 사라진 거지요. 그러니까 유명세를 타는 작가나 가능성이 돋보이는 작가들은 여러 출판사에 동시에 계약이 되어 있거나, 순차적으로 작품집을 계약하잖아요. 이른바 문단의 그랜드 슬램이 그런 거 아닌가요? 일반화하긴 어렵지만, 이게 출판에 불어 닥친 위기감 때문인지, 문학이 이념에서 이완되면서 생긴 것인지 따져볼 가치는 있죠.

 

손택수 / 안 그런 출판사들도 많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1인 출판 하는 사람도 얼마나 많습니까. 하여튼, 그 얘기 들으니깐 좀 안타깝네요.

 

 

인터넷 문학, 다르다면 무엇이? : 댓글에서 공동창작까지

 

소영현 / 인문학의 위기, 비평의 위기, 문학의 위기 등 위기담론이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어찌 보면 인문학이나 문학은 위기담론을 먹고산다고도 할 수 있는데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위기담론이 근본적인 성찰을 불가능하게 하는 보호장벽을 세우고 있는 측면도 있다고 생각됩니다만,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논의해보는 것으로 하고요. 여기서는 실제로 인터넷 문학이 문학 자체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창작 당사자에게 어떤 경험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서 시작해볼까요. 가장 커다란 변화로는 댓글의 형식성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평론가들의 경우에는 특별한 영향이 없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만, 좌담을 시작하기 전에 말씀을 나누는 동안 백영옥 선생님은 그렇지 않다, 여기에는 세대차이 문제도 있다고 하셨는데요, 말씀을 좀 들어봐야 할 것 같아요.

 

백영옥 / 인터넷 연재가 종이연재하고는 많이 다른데요. 아까 말씀을 드린 것은 텍스트의 물성(物性) 자체가 다르죠. 책장을 넘기는 단행본의 리듬과 스크롤바를 내리면서 클릭하는 인터넷 연재의 리듬이 많이 달라요. 저는 인터넷 연재라는 것은 어쩌면 댓글까지가 소설 텍스트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원래의 텍스트 이외에 수많은 댓글까지도 텍스트의 하나의 형태인거죠. 저는 댓글을 일일이 다 달았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요. 실시간으로 댓글이 달리면 텍스트에 영향을 받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질문을 많이 하시는데, 물론 근본적으로 바뀌지는 않아요. 연재를 할 때 기본적으로 초고(草稿)를 써놓고 하잖아요. 기본적인 시놉시스 형태의 초고를 쓰고 또 여러 가지 캐릭터를 만들어 놓은 상태에서 쓰기 때문에 독자들의 댓글에 의해서 내용이 크게 바뀌고 이런 것은 아닌데요. 저는 인터넷의 환경에 따라서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조선일보, 한겨레의 논조가 다른 것처럼 인터넷 서점에서 하는 연재와 대형 포털에서 하는 연재, 웹진에서 하는 연재의 형식이 다 달라질 수 있어요. 대형포털 같은 경우에는 그 글을 읽는 사람들이 불특정 다수죠.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와서 보고, 실질적으로 텍스트를 안 읽는 독자들이 더 많을 거예요. 광고 클릭하고 왔다가 바로 나가는. 그것을 왜 알 수 있냐하면 대형포탈에 연재하는 댓글이 조회수에 비해서 그렇게 많지 않아요. 실제적으로 안 읽는다는 얘기예요. 인터넷 서점에서 하는 경우는 다른 것 같아요. 알라딘이나, 예스24나 인터파크에서 하는 경우를 예로 들자면 인터넷 서점이 보유하고 있는 고객의 성향에 따라서 다른 것 같아요. 인터파크 같은 경우에는 유독 조회수가 나오지 않거든요. 사이트가 갖는 영향력에 비하면 정말 충격적일 정도의 조회수예요. 그게 텍스트의 퀼리티가 낮아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고, 기본적으로 인터파크에서 책을 사는 사람들의 성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를테면 인터파크 쇼핑몰에 들어왔다가 ‘아, 나도 베스트셀러’ 한 번 읽어볼까 하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주요 고객인 것 같아요. 문학에 대해 욕구가 많은 분들은 아닌 거예요. 알라딘은 매니악(maniac)한 고객층을 갖고 있잖아요. 알라딘 서재 등을 보면서도 알 수 있듯이 매니악한 독서를 하는 고객이 많고, 예스 24는 굉장히 직장인들이 많고요. 제 소설은 점심시간 때 조회수가 많이 올라가고, 댓글이 폭발적으로 늘어요. 밥을 먹고 와서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독자들의 패턴을 알 수 있어요. 밥 먹고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읽는구나. 정말 그 시간대 접속이 안돼요. 그 시간대에 많이 들어오기 때문에. 저는 예스24에서 연재를 했는데요. 기본적으로 인터넷 서점은 책을 사서 보는, 책에 관심이 많아서 보는 사람들은 거예요. 댓글의 수준이 높다, 낮다고 말할 순 없지만 적어도 ‘짱, 재밌음’ 이런 건 안 붙거든요. (웃음). ‘님아, 짱 먹으삼’ 그런 건 안 붙어요. 전문적이죠, 굉장히. 책을 많이 읽는 분들이 읽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기억에 악플이 하나도 없었어요. 비판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캐릭터나 비유에 대해서 자기 생각은 이런데 작가분은 어떠세요, 이렇게 묻는 분들은 계셨는데, 그게 악의적인 형태는 없었어요. 저는 그래서 악플러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할 수 있었거든요. 독자의 피드백이라는 게 아주 패턴이 많이 달라지더라고요. 이를테면 제 소설을 예를 들면, 작품 초반에는 소설의 주인공 정연두에 대해서 굉장히 많은 것들을 연구를 해요. 이 분들이. 정연두의 모습이 묘사되면 ‘자기가 정연두에 대해서 한번 생각을 해봤는데 개그우먼 이영자의 프로필을 쳐 봤다. 그 정도의 사이즈일 것 같다’고 하면 사람들이 ‘맞다’라면서 답글을 단다거나. 소설에서 페리스 힐튼의 발 사이즈가 매우 중요한 모티브예요. 그러면 인터넷은 280이라고 바로 달려요. 인터넷 특징 때문에 소설에 매커핀처럼 사용돼야 하는 것들이 팡팡 터지는 것들이 있는 거예요. 내지는 최담비라는 인물이 남성형 탈모의 대표격인 M자형 탈모가 이루어지는 것이 소설에서 중요한 반전인데요. 굉장히 열심히 읽으신 분이 ‘혹시 대머리’ 첫 댓글에 그렇게 다신 거예요. 거기에 몇 십 개의 댓글이 ‘낄낄낄’ 달렸어요. 작가인 제 입장에서는 김새잖아요. 내일 충격적인 진실이 밝혀져야 하는데 이미 중요한 사실을 발설돼버렸으니 말이죠 무척 황당한 경우도 많았어요. 이건 저와 함께 연재했던 박민규 선배님도 그렇게 느끼신 것 같은데요. 독자의 반응을 많이 경청하게 돼요. 긍정적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해요. 단행본에서는 그 부분을 고쳤는데요.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에 있었던 모티브를 제가 앞쪽에 썼었어요. 본인 생각에는 이 비유가 굉장히 적절하지 않는 것 같다는 의견을 개진하셨어요. 저는 그 부분을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캐릭터의 일관성이 부족한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연두라면 이렇게 하지 않을 것 같아요’라고 한다던가. 연재를 7개월 동안 했거든요. 중간쯤 가면 정연두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연두’가 어쩌고저쩌고, 그러다가 중반부를 넘어가면 ‘우리 연두’가 하는 식으로. 거의 감정이입이 돼서 드라마에 보면 ‘누구랑 누구랑 연결시켜 주세요’라든가, ‘누구를 죽이지 마세요’라고 한다든가 독자들이 반응하는 패턴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피드백이 금방금방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있어서 반응이라든가 내지는 댓글에서 작가들이 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하는 부분들이 저에게는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제가 못 보는 부분을 보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 작가는 자기글에 빠져서 쓰기 때문에 못 보는 경우가 많잖아요. 박민규 선배는 아예 주인공 이름 자체를 예스24에서 공모를 했었거든. ‘이름을 지어주세요’라고 해서 자기 소설의 댓글을 단 네티즌들에게 이름을 받으셨어요. 그래서 표를 가장 많이 얻은 이름을 직접 쓰셨거든요.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공동창작’이라고 해야 하나요? 거칠게 말하면 공동창작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들이 조금 있는 것 같아요. 지금 초창기인 것 같아요.

 

소영현 / 댓글 문제에 대해서 다른 분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신문연재 형식과 비교가 필요하기도 하고요.  

 

강정 / 저는 영옥씨와는 딱 반대로 생각하게 되네요. 친목 까페 같은 데에다가 글을 쓸 때도 가장 무서운 게 ‘무플’이잖아요. 악플이 붙든, 좋은 말이 붙든 반응이 없을 때 사람들이 우울해지죠. 인터넷에 글을 쓴다는 건 독자의 직접적인 반응을 미리 예상하게 만드는 속성이 있어요. 때문에 작가가 그것을 크든 적든 의식하게 만들죠. 그럼 반응하게 되고. 그럼 작가가 애초에 의도했던 구상은 분명하게 영향을 받게 되고요. 그런데 그 흐름을 따라가게 되면서 하나의 새로운 문학적인 형식이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들어요. 문학이 그렇게 흘러간다고 해서 굳이 비판적일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생각도 하게 되는데, 하지만 바로 그 점을 거꾸로 뒤집어버리면, 만약에 그렇지 않았을 때, 이를테면 독자의 리플 등이 작가의 창작행위에 치명적인 위해로 작용하게 될 때는 상황이 전혀 다를 수도 있다는 거죠. 가령 〈현대문학〉과 다음이 제휴해서 시인들의 시를 연재했을 때 아주 가관이었거든요. (웃음) 시와 소설의 차이도 있겠지만, 이런 식으로 모멸감을 느끼면서 시를 써야 하나 싶을 정도의 그런 글들이 붙었어요. 장르상의 차이를 분명히 인정하지만, 그런 일은 소설 안에서도 충분히 있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내가 문학을 하는 태도 자체가 하나의 정신인데, 그것을 어떤 다른 것에 의해서, 쓰레기일 수도 있는 것에 의해서 침해를 받는 거잖아요. 그만한 폭력도 없는 거고. 아까 영옥씨 말로는 내가 모르고, 놓쳤던 사이드를 발견한다고 하셨는데, 안 봐도 될 것을 보게 되는 거고, 남의 똥을 보게 되는 거라면 사정이 달라지잖아요. 어떤 게 옳다라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순기능화해서 작가 스스로가 즐기고 창작의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새로운 하나의 문학적 형식이라고도 생각은 해요.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당연히 각도가 다를 수밖에 없는 여러 사람들의 입장이 실시간으로 맞붙으면서 문학 자체가 일그러지게 되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그닥 단순하게 파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누군가의 문학이 어떤 절대적인 원칙을 가질 수는 없겠지만, 그런데 절대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업으로 삼는 누군가에겐 삶의 가장 중요한 문제일 수 있는데, 그것이 그런 식으로 훼손당할 때의 폭력성에 대해선 숙고가 필요할 듯싶어요.

 

손택수 / 저는 댓글을 다는 독자들을 출판사들이 관리하는 측면도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책이 출간된 후에 댓글을 즐겨 단 독자들과 함께 이벤트 여행을 간다든지 그리고 그 출판사의 내부자들이 알바들을 활용해서 댓글을 단다든지 그런 것을 웬만한 곳은 상례적으로 다 하고 있죠. 댓글 독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책을 홍보하는 전위부대들입니다. 오죽하면 파워블로그를 영입하기 위해 금전까지 쥐어주겠습니까. 과연 댓글의 순기능만 생각할 수 있느냐, 아닌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체험적으로 느끼는 부분입니다.

 

고봉준 / 과거에도 신문 연재를 할 경우 독자들의 반응이 어떤 식으로든 들어갔어요. 어떤 작가들은 독자들의 의견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경우고 있었을 테고, 또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겠죠. 그건 순전히 작가 개인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글을 쓰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 속에 한 명의 독자를 거느리고 있어요. 이 독자는 고분고분하지 않죠. 그래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독자를 속이기는 쉽지가 않아요. 자기 마음에 흡족하지 않은 글에 마침표를 찍는 일처럼 어려운 일도 없잖아요. 진부한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저는 이 싸움에서 타인의 영향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끝장은 여기에서 시작되고 끝난다고 봐요. 독자의 개입이 뭔가를 바꾼다는 것은 강정 시인의 말처럼 양면성을 가지고 있어요. 예를 들면, 그 정도의 준비나 자신감 없이 시작했냐라는 비판도 가능하고, 반대로는 고집불통인 줄 알았는데 개방적인 미덕도 갖고 있군이라는 평가도 가능하죠. 그건 구체적인 사건을 놓고 얘기를 해야 하니까 일반화시키는 건 무리이구요, 솔직히 저는 자신과의 싸움에 몰두하는 사람에게 높은 점수를 주는 편이에요. 그래서 댓글이 문학을 크게 바꿀 수 있다는 기대는 별로 하지 않아요.

 

백영옥 / 저는 연재와 전작의 차이인 것 같아요. 연재는 사실 소통하는 것이거든요. 독자들과 실시간으로. 만약에 자기와의 싸움에 이겨서 완벽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욕구가 있다면 연재가 적합한 방식이 될 순 없을 것 같아요 전작으로 내안에 파묻혀서 쓰는 형태죠. 그런데 인터넷으로 댓글이 달리고 조회수가 3천회라면 3천명의 각기 다른 사람들이 뭔가 발언은 하는 것이거든요. 물론 그들이 모두 다 발언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쓰고 있는 소통 통로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작정 내 스타일만 고집한다면, 그건 연재소설의 특성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생각돼요. 물론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수하면서 능동적으로 독자들의 독서패턴을 자신의 방식으로 유도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저의 경우에는 지면의 특별한 성격을 활용해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건 역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소통의 의미에서는 적극적으로 소통을 했던 경우이기 때문에 강정 시인이 말씀하신대로 안 좋은 면이 있어요. 그것이 포털과 인터넷 서점과 같은 매체의 차이일 수도 있고, 장르의 차이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원인일 수도 있겠지만요. 그러나 텍스트라는 것은, 같은 물을 종지에 담느냐 그릇의 형태에 따라 물의 모양이 달라지듯이 매체나 환경에 따라서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문제는 인터넷 연재는 그렇게 하고 단행본으로 냈을 때는 작가의 의지를 발현할 수 있죠. 저는 인터넷 연재와 단행본이 많이 다르거든요. 인터넷 연재는 호흡과 맥박에 따라 10부까지만 썼고, 단행본은 더 고려해서 1부를 더 썼었어요. 인터넷 연재는 나름대로 호흡과 독자들이 읽어나가는 방향을 고려했던 것이고, 단행본은 작가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질문들을 좀 더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서 에피소드나 캐릭터들을 바꾸고 다른 장을 첨부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다른 전략을 쓸 수 있다. 인터넷 연재가 단순히 지면으로 옮겨진다고 할 수 없는 것은 저는 다르게 썼습니다.

 

고봉준 / 예전에 하이텔 동호회 같은 곳에서 소설 이어쓰기를 했던 사례가 있잖아요. 한 단락씩, 혹은 일정한 분량을 번갈아 쓴 경우도 있는데, 이 정도는 되어야 공동창작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거 같아요. 작가들이 글을 쓸 때 독자와 댓글이 영향을 끼치니까 넓은 의미에서 독자의 영향력이 개입하는 경우를 공동창작이라고 말하시는 분도 계시지만, 그렇게 되면 독자를 의식하는 모든 글쓰기가 공동창작일 수 있다는 논리도 가능해지니까 조금 이상하죠.

 

소영현 / 논의를 정리하자면, 인터넷 연재소설에 달린 댓글이 소설의 방향 전체를 바꾸지는 않는다고 해도, 독자와의 거리를 좁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은데요, 여러 선생님들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것이 인터넷 매체의 속성이라기보다 연재라는 형식성과 창작자 개인의 기질과도 무관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현재까지는 창작의 속성이랄까, 방식 자체에 대한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장르간의 차이도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인터넷 매체의 특성과 함께 장르간의 차이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도록 할까요.  

 

 

인터넷+문학은 장르 차별적이다?

 

소영현 / 인터넷의 가장 새로운 속성 가운데 하나는 소통, 쌍방향성이라고 해야 하는데요. 인터넷 문학에서 소통이나 쌍방향성이 효과적으로 실현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논의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장르간의 차이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강정 / 장르 차이를 말씀드리려 하니, 고봉준 씨와 생각이 비슷하면서도 굉장히 다른 면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시인 한 분이 이런 얘기를 하던데요. 자기는 컴퓨터도 잘 모르고, 자기가 죽을 때까지 서예는 있을 거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것이 고고해 보일 수도 있고, ‘꼴통’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요. 그 시인의 의견에 어느 정도 동의하면서 반발도 한 적이 있어요. 저는 제가 스스로 매력적이다라고 느낄 때가 마구마구 흔들릴 때거든요. 문학적인 부분이나 사람관계도 그렇고요. 거기서 나온 긴장이 있으니까. 제가 알지 못했던 모습들이 나오고 그래요. 그런데 시를 쓰면서 그런 것이 가능했던 것 같아요. 내 안에서 그런 변화들이 있었고, 그것을 육체적으로 느꼈기 때문에. 시라는 것은 매우 민감하잖아요. 우리나라는 정통 서정시니 뭐니 이런 얘기들 하면서 정형화 된 것들을 얘기하는데, 저는 시가 문자로 고착화되는 순간 그 안에서 가치와 의미와 생기가 고정되어버리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한 편 한 편의 시는 하나의 감각의 끝, 정치적인 것을 포함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순간적인 감각의 끝이고, 다른 감각과 판단으로 이끌려가는 노정에서의 잠정적인 쉼표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결코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것도 확정적이지 않은 것이죠. 그런 점에서 인터넷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물성 자체가 시와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어요. 다만 그것을 문학적인 자의식이 못 따라간다는 생각은 분명히 들거든요. 소설 같은 경우는 영옥 씨가 얘기한 부분을 긍정적으로 인정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소설은 늘 그래왔기 때문이죠. 유럽에서도 그렇고 소설이 대중들이 읽을 만한 꺼리가 된 것은 산업혁명과 결부가 된 측면이 있잖아요. 그만큼 당대의 경제적 원칙이나 정치, 그리고 그런 것들로 인해 변화하는 삶의 양상들을 추적하는 일이니까요. 그것이 상업성을 가지게 되고 거기에 끌려가더라도 그것은 소설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필연적인 운명이라고 생각하면서 인정할 수는 있을 것 같아요. 폄훼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사람들은 아주 옛날부터 이야기 만들어내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야기의 양식이 변해가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정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이든 시든 근본적으로 고수될 만한 문학적인 입장 같은 건 분명히 존재한다고 보고, 그것을 붙들면서 계속 변하는 것도 있을 것이고요.

 

고봉준 / 고고한 태도를 이야기하려고 한 건 아니고, 문학에서의 변화라는 건 어떤 경우에든 내부에서 와야 한다고 믿는다는 말이에요. 유행과 구분해서 한 말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듯한데, 저에게 문학의 변화는 내적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강정 / 똑같은 얘기예요. 저는 순수하게 내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든요. 내가 내 안에서 어떤 외부와 만나 흔들릴 때, 그 긴장 자체가 문학이 아닐까 생각도 들고요.

 

소영현 / 매체와 문학이 아니라, 문학론에 대한 논의로 집중되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아동문학의 경우는 어떠할까요. 최근에 아동문학이 출판시장의 상당부분을 석권하고 있잖아요. 아동문학이 인터넷 매체와 행복하게 만날 수 있을지, 연관해서 시나 장르문학 등의 경우는 어떠할까요.

 

고봉준 / 아이들의 문학에서는 순기능과 가능성이 더 많겠죠. ‘읽는다는 것’과 ‘본다는 것’은 같은 게 아니니까요. 아이들에게 정색하고 글만 읽어주면 별로 효과가 없잖아요. 분위기를 연상시킬 수 있는 효과가 있어야죠. 인쇄물에서는 삽화 말고는 그걸 시도할 별다른 방도가 없지만, 인터넷에선 그런 것들을 가능하게 하지 않을까요. 그렇지만 그 경우에도 저는 동화의 구현의 방식이나 읽는 법이 바뀌는 거지, 본질인 변화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소영현 / 동화 독자를 염두에 두고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강정 / 출판시장이라는 것이 어린이 책이 제일 잘 팔리잖아요. 그런데 당연하면서도 조금 납득이 안가는 건 동화를 고르는 주체가 어린이가 아니라 엄마라는 사실이죠. 아이들이 먼저 좋아서 고를 수는 없을까 라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가끔 할 때가 있는데, 정말 말도 안되는 생각에 불과할까요?  

 

소영현 / 클릭하는 독자 문제로 보면 다를 것도 같네요. 그런데 게임을 안하고 인터넷 동화를 읽을까요.

 

강정 / 제가 아이가 없어 잘 모르겠는데….(웃음)

 

강정 / 게임만큼 경쟁력을 가지면 충분히 동화를 읽지 않을까요? 조카들을 봐도 우리세대와 감각체계가 워낙 다른 아이들이라 그네들은 맛있는 설탕이 발라져 있으면 그게 본래 뭐든 상관없이 주워 먹듯이 예상 못한 반응들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네요.

 

강정 / 이건 좀 다른 얘긴데, 제게 은근히 동화를 써보고 싶은 꿈이 있거든요. 제가 생각할 때 동화라는 것 자체는 잔혹한 거예요. 거기엔 아무 논리도 존재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여섯 살짜리가 막무가내로 울어 봐요. 세상에 그런 악마가 없잖아요. 그러면서 어떨 땐 세상에서 그렇게 예쁜 놈도 없어 보이기도 하고. 그게 아이의 본질이기도 하고 인간의 본질일 수도 있는데. 그런 점에서 동화야 말로 진짜 문학의 본령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어요. 물론 제가 동화를 쓰면 엄마들이 절대 사가지는 않겠지만(웃음) 아무튼 아이는 모든 걸 신기해하면서 빠르게 받아들이죠. 인터넷처럼 건드리면 바로 움직이고 적응속도나 폭도 예상 밖이고. 그런 점에서 아이들이랑 인터넷이랑 참 비슷한 것 같기도 하네요.

 

소영현 / 인터넷 매체와 아동문학의 만남에 대해서 말하기 쉽지 않은 측면들이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러면 시 장르의 경우는 어떨까요.  

 

손택수 / 강정 시인은 다음 거기 시 했어요?

 

강정 / 안했어요.

 

손택수 / 저는 했어요. 진흙탕에 처참하게 패대기쳐졌는데 그게 첫 경험이었거든요. 그 모멸감이라니! 복잡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내가 실수한 부분이 있구나, 부족한 부분이 있구나. 인터넷이라고 하는 공간에 어울릴만한 시를 준다고 줬는데도 말이죠. 저는 인터넷 공간의 특징은 구술성과 문자성이 적절하게 결합된 문체가 잘 읽히는 곳이라고 생각했어요. 묘사체와 입말투가 잘 섞여있는. 그런 시를 준다고 줬는데 ‘아 이게 선입견을 가지고 잘못 접근했구나’. 고봉준 선생 말대로, 자기 내부에서 드러낸 그대로 했어야 하는데 그런 반성의 시간이 되기도 했지요. 그리고 또 모니터 화면 앞에서의 동경과 절망이 같이 있더라고요. 저 유리 너머의 수많은 선들과 이어지고 싶은 욕망이 있고, ‘어 뭘 안다고’ 하면서 단절하고 싶은. 그 두 가지가 같이 가더라고요. 그 모순 자체가 매혹이라면 매혹이겠지요. 왜냐면 모순투성이 존재로서 자신의 모순을 관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만은 분명하거든요. 매체가 변화하면 감각, 사유방식, 상상력이 그대로 바뀌지는 않겠지만 뭔가 영향을 받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거기에 대해서 모른 척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계속 주의는 기울이고 있어야겠어요. 시 장르는 특히.

 

소영현 / 말씀을 듣고 보니, 인터넷 매체와 문학의 만남이라고 해도 장르간의 차이가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여러 인터넷 매체의 영향을 장르별로 두루 둘러보았는데요 마지막으로 평론에 대해서도 얘기를 해봐야겠죠? 인터넷 매체는 평론의 존재 자체를 위협한다고 할 수 있는데요, 평론에는 어떤 변화가 야기되었다고 해야 할까요.

 

고봉준 / 인터넷이 평론에는 불리한 조건이죠. 인터넷은 작가와 독자가 매개 없이 만나는 게 가능한 공간이잖아요. 평론은 그 중간에 끼어있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평론가의 몫이나 역할은 줄어들겠죠. 한때 영화와 문화연구가 유행이었을 때 꽤 많은 문학평론가들이 그쪽으로 넘어갔어요. 그렇지만 그들 대부분은 지금 활발한 활동은 하지 않고 있죠. 문학평론가들이 쓴 영화평론을 보고 영화를 전문적으로 공부한 영화평론가들이 하나같이 하는 이야기는 짜증난다는 거예요. 영화의 메커니즘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죠. 그저 스토리 중심의 분석이 있고, 좀 더 나가면 거기에 대한 철학적인 설명만 있다는 거예요. 소위 영화의 소설화 내지 철학화죠. 이건 영화를 소설을 읽듯이 본다는 건데요,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그건 평론의 확장이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실험적이기보다는 익숙한 방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반복 같은 거 아닐까요? 사실 이건 장르문학이나 대중문학을 순수문학적인 독법으로 읽는 것과 마찬가지죠. 그 장르의 문법을 이해하지 못하면 자신이 갖고 있는 ‘익숙한 방식’을 강제하기 마련이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평론의 변화라는 게 대단한 것 같지는 않아요. 그냥 대중문화적인 취향과 감수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문학보다는 거기에서 더 보람을 느끼니까 그쪽으로 나아가는 거겠죠. 하지만 문학평론이 오랫동안 갖고 있었던 특유의 건조함과 딱딱함, 비대중적인 요소들은 급속하게 사라질 것 같아요. 그리고 생각해보면 이제 한국의 문단은 평론가가 많이 필요한 상황은 아니에요. 문예지의 편집위원들이 잡지에 필요한 대부분의 원고를 도맡아 쓰는 동인지 형태를 취하고 있고, 또 그들이 해설이나 심사, 각종 매체의 잡문들을 다 쓰고 있고, 이런 현상이 보편적인 모습으로 보이는 건 평론가의 역할이나 숫자가 많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죠. 특히 문학의 대중성이 증가되면 작품에 대한 해석에서는 독자와 평론가 사이에 큰 차별성이 없게 되잖아요. 그런 경우라면 평론이 참견하는 건 사족처럼 느껴지잖아요.

 

소영현 / 인터넷 시대는 평론의 위상 변화를 요청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고봉준 / 변화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외부적인 압박 때문에 바뀌고 있다는 게 정확하겠죠. 이 외적인 압박에 대한 개별적인 해답이 우리가 흔히 변화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한때 포스트모더니즘이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을 때, 어떤 책에서는 그 변화가 서사의 본질을 바꿔놓는다고 썼었지요. 독자가 소설을 읽다가 갑자기 “여기까지 읽은 내용이 마음에 드십니까, 안 드십니까?” 같은 엉뚱한 질문에 맞닥뜨리게 되고, “예, 아니오”라는 대답의 선택에 따라 엉뚱한 곳에서 독서가 새로 진행되는 경우들이 가능했지요. 소설이란 어떤 측면에서는 시작과 끝, 특히 끝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인데, 한 편의 소설을 100여 개의 카드로 만들어서 그때그때 마음대로 뒤섞어 읽게 만들기도 했구요. 이건 장난처럼 보이지만, 이 장난에서 저자와 독자의 위상, 소설의 유기적 인과성, 시작과 끝이라는 전통적인 관념들은 모두 해체되잖아요. 이런 실험이 인터넷에서 실현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시의 경우도 마찬가지죠. 시는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달라지잖아요. 그러니까 인터넷에선 배경음악이나 텍스트의 물질성 등을 구현하기가 쉽고, 또 그런 실험이 용이한 곳이 인터넷이죠. 그런 의미에서 장르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어요. 그런 것이 실험이 된다면 인터넷과 문학의 결합은 다시 논의되어야 겠죠.

 

 

자발적으로 실험하는

 

소영현 / 실험을 말씀하시니, 기존의 장르에만 한정할 것이 아니라 새롭게 만들어지는 영역에 대해서도 논의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인터넷 매체와 가장 행복하게 만나고 있는 분야는 ‘스크롤의 혁명’으로도 명명되고 있는 만화 장르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삽화를 배치하는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하기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터넷 매체가 표현형식의 변화를 이끌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문학 장르에서는 그와 같은 혁신적 변화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은데요, 한유주씨의 ‘토이+스토리’(문학웹진 뿔)와 같은 실험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강정 / 한유주씨 하는 것을 봤는데요. 문학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그런 규정 자체가 부질없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게 만약 문학이라 불린다면 그 이유는 단지 그걸 소설가가 했기 때문인 거겠죠. 어쨌거나 기본적으로는 개인의 놀이에서 시작하는 것이고. 그런 형식, 인형을 가지고 사진으로 말풍선 넣고 하는 형식들이 좀 더 세밀하게 구조화, 형식화된다면 재밌는 양식이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었어요.

 

소영현 /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강정 / 문학의 본질적인 의미가 자기를 표현하는 양식에 있다면 시청각을 동시에 자극하면서 이야기를 푸는 것도 가능하고 기분 좋은 변화일 수 있다고 봐요. 다른 매개들, 가령 그림이나 사진 음악 등을 이용해서 자유롭게 풀어놓는다면 그것들 자체가 또다른 언어가 되는 것이고요. 문학이냐 아니냐 따지기 전에 관건은 물론 얼마나 재밌게 잘하느냐겠죠. 하지만 기존 서사양식에 양념처럼 그림 넣고 사진 넣고 그러는 건 좀 아니라고 봐요. 인형에겐 인형만의 이야기 방식이 있지 않을까요?

 

손택수 / 저는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는 서사의 순결성을 깨뜨리는 유희충동들, 그런 것들이 강정씨 말대로 좀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어중간한 타협이 아니고. 서사가 단순히 이미지의 노예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이미지와 교섭하고 대화하면서 어떤 서사의 형식을 새롭게 열어가는 모험들이 힘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소영현 / 지금까지 문학의 다양한 장르들과 인터넷 매체의 만남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해보았는데요. 방향성과 문제적 지점들에 대한 지적이 얼마간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문학적 실험의 가능성을 둘러싸고 인터넷 매체의 속성과 연관해서 자발성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해보았으면 합니다. 인터넷 공간이 소통의 장이라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자발성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현재 우리가 접하고 있는 이른바 ‘인터넷 문학’은 창작자의 자발성과 무관하다고 해야 하는데, 이 문제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고봉준 / 인터넷의 최대강점은 자발성이에요. 그렇지만 자발성이 제도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그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떠들 수 있는 권리에 불과하죠. 아무런 권리도 아닌 권리. 그게 문제에요. 인터넷에서 행해지는 많은 실험들은 제도화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거나, 제도화로 들어오기 위한 중간과정처럼 보여요. 물론, 그런 걸 평가하는 잣대가 제도적인 것이라는 것도 문제죠. 이것들이 어떻게 해결될 수 있을까, 저는 자신이 없어요. 그렇지만 그게 해결되지 않는다면 인터넷과 문학의 결합이 가져올 파급력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블로거들은 쓰고 싶은 욕망에서 글을 쓰고 올려요. 그렇지만 유명작가들의 창작 블로그는 연재가 끝나면 끝이 나는 것처럼, 창작연재를 위한 공간에 불과해요. 뒤늦게 사람들은 그게 연재를 위한 공간이었다는 걸 알게 되죠.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싶다면 물질적인 뒷받침 없이도 작가들이 실제로 블로그 공간을 운영해보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요?

 

백영옥 / 실제로 있어요. 예스24 블로그에서 누구라고 말씀은 못 드리겠지만 계속 연재하는 분이 있어요. 문단 작가분들 중에서. 정확한 얘기는 아닌데요. 알라딘에서 창작블로그를 열었잖아요. 제도에서 인정을 안 해준다는 문제점이 있기는 하지만, 많은 알라딘의 서재를 운영하는 블로거들이 올리고 있어요. 그래서 몇 천개들이 연재가 되고 있다고 하거든요. 들어가 보지 않아서. 장이 마련이 됐는데 그것들이 얼마나 문학적인 실험성이든 완결성이든 구조를 가지고 가는지는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강정 / 조금 뜬금없는 이야기인데요. 90년대 중·후반 소위 말해서 홍대씬이 막 활성화 될 무렵 크라잉넛 같은 친구들이 막 나와서 까불고 설쳐댈 때 뭔가 새로운 것처럼 받아들여졌는데, 그들이 제도권으로 접수되는 데 채 5년도 안 걸렸어요. 지금 홍대에 가면 온갖 날라리들이 부비부비하러 오는 데지 예전처럼 독립적인 문화권이 아니에요. 그냥 물 좋고 강남보다는 물가 적당한 유흥상권이 돼버렸어요. 지금도 크라잉넛에게는 이런 딱지가 붙어 있잖아요. 인디 출신, 펑크, 언더 뭐 이런 설정들이 붙는데 월드컵 같은 거 열리면 윤도현 등이랑 같이 관제 행사에 나와서 응원가 불러제끼는 그들이 지금 무슨 인디예요? 그건 물론 그들 자신의 문제가 아니고 어쩌면 나 같은 사람이 문제 삼을 필요도 없는지 몰라요. 중요한 건 마인드 자체를 변하게 만드는 시스템의 문제죠. 또 뜬금없는 얘기지만, 월드컵을 예로 들자면 우리나라 사람들, 특히 여자들 축구 잘 안 봐요. 그런데 2002년엔 왜 그랬을까요? 그때 거리에 몰려 나와서 ‘빨갱이짓’(웃음) 하던 사람들도 지금은 아마 ‘내가 왜 그랬었지 그 때?' 할지도 몰라요. 까먹어요, 금방. 월드컵 끝나고 나면 경기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 썰렁해지고 축구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냥 자기들끼리 구경다니면서 소수집단화돼버리죠. 차라리 애초부터 난리를 치지나 말든가. 어쩌면 월드컵 4강보다 축구를 언제든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기본환경이 더 중요한 건지 몰라요. 언제까지 히딩크나 그리워하고 맨유 박지성 출장 여부에 따라 주말 밤의 기분이 좌지우지 되어야 하죠? 저는 그게 비단 축구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봐요. 어느 한쪽으로 급속히 몰렸다가 금세 전반적인 무관심이 팽배해지죠. 그것을 비약하자면 국민성 같은 것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가령 일본은 로컬의 시스템들이 잘 발달돼 있어요. 센터를 바라 볼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 안에서 자족적으로 이뤄지는 것들이 많고, 그것들이 보장돼 있으니까요. 우리는 그렇지가 않잖아요.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소리가 아니라 뭔가 하나 나오면 가운데서 싹 쓸어가는 모양새가 어떤 자연스러운 흐름들을 가로막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는 거죠. 사실, 음악을 한다고 문학을 한다고 굳이 중심에서 인정받아야만 할까요? 게다가 그 중심이 인정하고 싶지도 끼고 싶지도 않은 중심일 경우라면 그냥 자기들끼리 조용히 하고, 자기 나름대로 재밌게 살면 되는 거 아닌가요? 하지만 그러고 싶어도 그럴 만한 여건이 제공 안되니까, 그럼에도 음악이든 문학이든 하고는 싶으니까 괜히 비장해지면서 중심을 기웃거리게 되죠. 그러다가 괜히 받지 않아도 될 상처 받게 되고 결국에는 상업논리에 휘둘리게 되고 그러면 또 괜히 소외된 사람들은 열 받고 세상에 대해서 한탄하다가 집단적인 냉소에도 빠지고 간수치만 높아지고 통장 잔고는 줄고…(웃음) 자발성이라는 것이 자기는 애초에 센터를 지향하지 않았다고 해도 어쩌다가 ‘뜨게’ 되는 놈은 거기에 먹혀 버리는 상황이 되죠. 제가 문학을 하면서 늘 스스로를 견제하게 될 때도 그런 유혹들, 내가 원하지 않았음에도 신경 쓰게 되고 속박 받게 되는 여러 제반 시스템들이에요. 내가 뭘 하든 나는 중심에서 흐르는 것을 안 하고 싶어요. 그러다보면 자꾸 스스로에게 거짓말하고 있다는 느낌, 가짜 표정을 짓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경험적으로 많았거든요. 괜한 삐딱선이 아니라 거기서 흘러가는 일들에 개인적으로 별 관심도 없고 때로는 짜증나기도 하고 신경 쓰고 싶지 않은 것들이 더 많기 때문이죠. 때로는 아주 ‘개무시’하고 싶을 때도 있고요. 그래봤자 결국 ‘개무시’되는 건 나 자신이겠지만, 솔직히 제 태도가 그래요. 좋다고 훌륭하다고 떠들어대는 것들이 뭐가 잘났는지도 모르겠고 내가 원하는 것이랑 분명히 다르고, 가끔은 욕지기가 나올 때도 있고. 이것도 나라는 개인의 자발성이겠지만, 그리고 대다수 사람들이 저랑 같지는 않겠지만 어떤 무엇인가를 그들 나름으로 진지하게 하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많아요. 그러나 아무도 보장해주지 않죠. 혼자 절치부심하다가 지쳐서 나가떨어지는 경우가 태반이에요. 예전에 홍대 앞에서 크라잉넛이랑 같이 놀던 친구들 지금 어디 가서 장사하고 있어요. 바로 바로 좌절시키는 거죠. 그것 하나는 굉장히 잘하는 것 같아요, 대한민국이. 환상조차도 없애버리고 바닥까지 기어가게 만들고. 이것은 총체적인 문제라고 생각하거든요. 인터넷이 대세가 되니까 이런 좌담도 하고 있는 것이지만, 이 좌담의 근본적인 지점엔 결국 문화전반이 가지고 있는 여러 악재와 폭력들이 전제되어 있는 것 같아요. 누군가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에 대해서 무시하면서 태클을 거는 거죠. 또는, 관심 있는 척 하면서 무시하는 거죠. 쓸만한 놈 있으면 빼갔다가 버리는 늘 그런 악순환들. 이런 자리에서 결론 날 문제는 아니지만, 사람들을 울분에 쌓이게 만드는, 그 울분마저 못하게 만드는 갑갑한 분위기가 늘 있는 것 같고요. 이런 얘기를 하다보면 괜히 화만 나게 되고. ‘맨날 왜 이 따위야. 맨날 나오는 쟤 언제까지 봐야 돼?‘ 이런 분위기가 늘 이어지니까 가끔은 원색적으로 분노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요. 돈 못 벌어도 좋고 안 유명해져도 좋고 단지 스스로 즐기면서 자기 자존심 지키려고 하는 것일 수 있는데 그것마저 제도가 까뭉개버리는 거니까.

 

손택수 / 저는 인터넷을 잘 몰라요. 제 경험만 얘기하면 이래요. 저는 인터넷 안에서는 작가이기보다는 독자에 가까워요. 독자로서의 관음증이 굉장히 강해요. 독자이면서 작가일 수 있을까 생각하면 굉장히 힘들어져요, 접근하는 것이. 모순 속에 있는 것 같다. 이 시대 작가들이 인터넷 매체를 바라보는 지점이. 이 모순을 잘 알아내야 할 텐데…… 현실적으로 저는 그것이 다급한 문제처럼 다가오지는 않아요.

 

 

인터넷+문학의 미래

 

소영현 / 자발성의 문제를 독자의 측면에서도 살펴보아야 할텐데, 쉽지 않은 문제인 것 같네요. 지금까지 인터넷과 문학의 만남을 둘러싼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셨는데요, 자 이제 마지막으로 인터넷 문학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총괄적 정리를 하면서 논의를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봉준 / 얼마 전에 ‘인터넷 문학은 없다’라는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어요. 그게 솔직한 제 생각이죠. 종이 잡지는 이미 한계상황에 도달했다고 생각해요.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건, 한계에 왔다는 게 곧 사라진다는 것은 아니에요. 이미 한계선을 돌파했지만 죽지 않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들은 얼마든지 있죠. 잡지가 한계에 이르렀으니 웹진이라는 새로운 형태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예요. 반대로 인터넷을 역이용해서 잡지의 영향력을 확장하거나 유지하려는 사람들도 있죠. 아무래도 중요한 건 ‘잡지냐 인터넷이냐’라는 양자택일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일 테니까요. 그래서 평론가의 입장에서는 인터넷과 문학의 결합을 보는 시선들에 대한 평가예요. 인터넷 문학이다, 대중성이 있다 등의 이야기들이 묻고 있지 않은 게 무엇인지 되물어야 할 테고, 그럴 때에만 그것의 존재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겠지요. 사람들은 ‘소설’에 주목하지만 인테넷과 결합하는 데에는 ‘시’가 더 가능성이 많아요. 시가 가지고 있는 물성을 발휘할 수 있는 잠재성이 인터넷에 있다고 생각해요. 시 장르가 갖고 있는 특징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한국에서 인터넷이 사용되는 방식이기도 하구요. 자본의 회수를 생각하지 않고 실험할 수 있다면 시에서 이 가능성이 넓어질 테고, 그럴 때 인터넷 문학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희망을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강정 / 저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안 찾았으면 좋겠어요. 사실 ‘새로움’이란 말처럼 고루해진 말도 없는 것 같아요. 아무리 새로운 거라도 딱 두 번 만지면 익숙한 것이 되잖아요. 속도가 너무 빠르니까 낯선 것이 낯설지 않은 것이 되는 순간이 너무 빨리 오니까 오히려 거기에 휘말리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것을 전체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없는 것 같은데, 통제하는 척 하는 것들 관리하는 것들은 굉장히 발달된 것 같고. 그런 의미에서 굉장히 전근대 파놉티콘 같은 느낌도 들고. 경제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제도라는 게 본래 계속 앞만 보게 만드는 것이 있는데, 앞만 보니까 앞이 안 보이는 것 같아요. 뒤를 돌아다보면 앞이 환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추상적인 얘기도 생각이 나고. 역설적인 건데 자기 원칙과 고집을 가지고 뭔가를 하는 사람들이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잖아요. 한국문학사만 뒤져봐도 그렇게 묻혀간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의 작품이나 삶을 돌이켜보는 게 나로선 더 새롭고 충격적일 때가 많아요. 소리 없이 빠져나간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뒷문을 늘 봤으면 좋겠어요.

 

손택수 / 인터넷 공간 속에 있는 수많은 방언적인 개성들이라고 할까. 다른 목소리들, 변방들, 사실 인터넷 안에 수많은 변방들이 있잖아요. 이런 변방들이 제도화된 틀 속에서 조명될 수 있는 방향을 웹진이 설정해줬으면 좋겠어요. 가령 환상문학이라든지 제도에서 잘 수용 못하는 장르들이 틀을 잡을 수 있는 장치들. 그리고 무엇보다 비평가들 역할이 중요하다 고 생각해요. 인터넷 공간 안에는 걸러내는 필터 역할을 하는 부분들이 약한 것 같아요. 웹진에 기획을 해서 담론을 생산하는 것들도 찾아보기 어렵고. 그것은 비평가들의 역할이죠. 사실 작가들이 자기 안의 비평가가 있기는 하지만 자기 안의 비평가는 자기 주위의 비평가이기도 하거든요. 그런 비평가들 활동이 그 안에서 목소리를 내줘야 댓글의 수준도 많이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댓글을 다는 독자들도 그렇고, 작가들도 그렇고. 비평가라는 아주 고급 거울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볼 줄도 알아야겠지요. 비평가가 인터넷 공간 안에 부재한다는 것을 매체의 특징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어딘가 궁색해 보입니다.   

 

백영옥 / 저도 말씀하신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하는데요. 저는 장르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한국문학이 장르문학을 너무나 많이 외면해왔다고 말씀 드리고 싶고, 판타스틱 같은 잡지가 허덕허덕 하는 것도 너무 안타깝고. 아까 배명호씨 「타워」 언급한 것도 그런 맥락인데요. 저는 〈황금가지〉, 〈비채〉에서 나오는 장르물들 말고 이제는 우리나라 사람이 쓴 완성도 높은 장르물을 읽고 싶어요. 제가 생각하는 인터넷의 가능성이라고 하면 저는 다양성이라고 생각해요. 한국문학이 다양성의 측면에서 부족하다는 걸, 독자였던 시절부터 많이 느꼈거든요. 장르를 예로 들자면, 일본 소설만 하더라도, 미스터리물만 해도 추리부터해서 학원물, 호러물, 뱀파이어물 굉장히 많거든요. 미국 같은 경우에도 칙릿만 해도 월스트리트 칙릿부터 시작해서 장르가 세분화되고 다양해요. 굉장히 많은 작가들이 다양한 장르를, 21세기적으로 해석하든 정통적으로 받아들여서 자기화시키든 해체시키든 간에 장르적인 실험들을 하고 결과발표를 하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그런 시장이 분명이 존재하는데 비평의 입장에서 너무 외면해 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그런 흐름들이 있지만 평가가 되지 않기 때문에 혼자서 고군분투하거나, 재야의 고수처럼 인터넷상의 스타로만 남는 안타까운 경우가 많아요. 제도권으로 흡입돼 진화하지 못하는 일종의 문학적 누수 현상이 일어나는 거죠.  제가 볼 때는 다양한 장르적 실험이든, 다양한 목소리들. 우리문학에서 순문학은 당연히 지켜져야 하는 것이고. 웹진 〈문장〉에서도  묻혀있는 작가들을 발굴해서 많이 소개하시잖아요. 제가 봤을 때는 오히려 역으로 그런 장르가 너무나 많이 외면 받았다. 이런 인터넷 연재가 단편보다는 장편 위주이기 때문에 서사 동력의 하나로써 장르가 많이 유입되기도 하거든요. 실제로 장르 쪽의 발전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매체의 메카니즘이 바뀌면서 서사의 동력도 서서히 바뀌고 장르물이 좋다, 나쁘다는 측면을 떠나서 아예 언급이 잘 안 되었던 측면이기 때문에 이제 좀 그런 부분에서는 인터넷 매체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해요.

 

소영현 / 인터넷과 문학의 만남에 대해서 네 분이 입장이 비슷한 듯하면서도 약간씩 다른 것 같습니다. 문학이나 인터넷 공간을 바라보는 입장과 태도의 차이에서 연유한 듯한데요. 저로서는 다양한 인터넷 공간과 문학의 상관성에 대해 다각도로 바라볼 수 있는 흥미로운 시간이었습니다. 늦은 시간까지 진지한 논의를 해주신 참석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여기서 토론회를 마치고자 합니다.  

 

고봉준 / 제게 그런 권리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문제에 대한 사회자의 의견을 듣고 싶은데요. 밝히실 수 있으세요?

 

소영현 / 제 의견이요? 소설 평론가로서 말씀드리자면, 소설이 인터넷 공간에서 점차 내러티브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 건 사실이죠. 단편에서 장편으로, 내러티브 중심으로. 그런데 인터넷 소설이 당장의 클릭수 때문에 흡인력 있는 흥미 위주의 이야기로 나아간다면 소설 형식의 획일화라는 점에서도 문제가 발생하겠죠. 물론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이러한 경향이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인 건 분명한데요. 소설에 관한 한 이런 문제들을 지속적으로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토론회를 시작하면서 강정 선생님이 ‘퇴보’를 이야기하셨는데요, 미디어연구사적 관점에서 보면 1차 열풍과 2차 열풍 현상을 미디어의 ‘재매개’ 방식에 의거해 정리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미디어의 발전사에서 보면, 새로운 미디어가 처음에 등장했을 때는 다양한 실험이 이루어지는데 그러다가 실제로 일반화될 때에는 매우 익숙했던 이전의 미디어적 속성을 보여주면서 정착되는 경향이 있거든요. 이를 재매개라고 하는데요, 어찌 보면 인터넷 공간을 중심으로 90년대 말, 2000년대 초에 새로운 서사나 문학적 실험들이 다양하게 이루어졌고 문학의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많이 이루어졌었는데, 그러한 실험성이 상당 부분 소거된 채로 현재에는 ‘신문 미디어와 문학’의 만남과 유사한 방식으로 정착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일단, 이것이 미디어 발전사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을 것 같고요, 이로부터 유산으로 남겨진 과거의 실험들을 활용하면서 또 다른 실험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 문학을 둘러싼 새로운 가능성들을 탐색해보는 쪽으로 나아가야 할 것 같아요.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정리하면서 오늘의 토론회를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너무 힘드신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박수라도 한 번 치고 끝낼까요? 모두 수고하셨습니다.(모두 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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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육지에서 쓴 일기 최진영 20240528 4박 5일 동안 육지에서 여러 일정이 있어 오늘 제주에서 서울로 왔다. 앞으로 며칠간 약속과 약속 사이, 출발지와 도착지 사이 시간이 날 때마다 이 창을 열고 단상을 써보려고 한다. Are you checking in? pm04:45. 여긴 충무로의 호텔. 3년 전 제주로 이사 간 뒤 처음으로 서울에 일이 있어 올라왔을 때 숙박한 후 매번 이 호텔만 이용하고 있다. 경기, 인천 지역에서 저녁 행사를 해도 근방 호텔을 잡지 않고 여기로 온다. 새로운 호텔을 검색하고 선택하는 게 번거로워서. 합리적인 위치나 가격을 따지려다가 검색 지옥에 빠져서 몇 시간을 고민한 뒤 결국 이 호텔을 예약했던 경험으로 깨달은 바가 있다. 시간이 돈이다. 더 저렴한 호텔을 찾으려 애쓰지 말고 검색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줄이자. 점심시간 무렵 충무로 일대 분위기는 조금 묘하다.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거리를 걷는 외국인들과 점심 먹으러 나온 직장인들이 뒤섞이는 거리. 라디오 주파수를 돌리듯 여러 나라의 언어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서울역, 명동, 한옥마을, 남산, 종로가 가까운 곳이어서 외국인 관광객이 정말 많다. 올 때마다 느끼지만 호텔 투숙객 중 한국인은 나뿐인 것 같다. 한 달에 두어 번은 와서 2박 이상 하니까 나름 단골이랄 수도 있는데 프런트 직원들은 매번 나를 처음 본 손님처럼 대한다(호텔의 특성이겠지?). 체크인할 때도 내게 영어로 말을 건넨다. “give me your passport.” 그럼 나는 “제 이름은 최진영입니다”라고 한국어로 대답한다. 성공한 인생 오늘 아침 9시쯤 택배 문제 때문에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는 전화를 받자마자 놀란 목소리로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느냐”고 물었다. 내 용건에 개의치 않고 엄마는 거듭 물었다. 전화를 끊고 뿌듯해서 신나게 웃었다. 내 나이 이제 마흔이 넘었는데 아침 9시에 엄마에게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느냐”는 말을 들을 수 있다니, 이번 생은 성공한 것 같아서. 그건 바로 내 투쟁의 결과다. 거의 20년을 프리랜서로 살면서 남들 다 출근하는 시간에도 ‘성인 평균 적정 수면시간’을 사수하며 꾸준히 늦게 일어나는 생활양식을 차곡차곡 쌓아 온 결과 마침내 엄마도 나의 생활 패턴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아침 9시에 전화하면 깜짝 놀라는 것이다. 나는 이런 게 진정한 성공 같다. 긴장감 저녁에 북토크를 할 예정이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거나 낭독할 때는 별로 긴장하지 않는 편이다. 내가 긴장하는 순간은 따로 있다. 예를 들면 비행기 탈 때. 기내 짐칸에 캐리어를 올리다가 무거워서 또는 실수로 떨어트려서 누군가를 다치게 할까 봐 매번 긴장한다.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걸 알지만 식은땀이 난다. 캐리어를 끌고 에스컬레이터 탈 때도 마찬가지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넘어지거나 캐리어를 놓치는 구체적 상상에 시

  • 관리자
  • 2024-07-01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에세이]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제이크 레빈 소개 거의 12년 동안 나는 한국 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지난해부터 강의하는 교사의 내면적 생활과 관련된 일기와 같은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외국인 교수로서 처음 강의를 시작했을 때 모든 것이 낯설고 이방인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한국 문화에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교수의 삶은 익숙하지 않다고 믿는다. 학생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고 다른 교수의 마음도 이해하기 어렵다. 다른 강의실에 들어갈 때마다 새로운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이전에 만나지 못했던 민족을 만나는 것 같이 나는 죽을 때까지 방랑자처럼 매일 새로운 것을 경험한다. 학교에서는 현실에 경험한 것이 꿈꾸는 것 같고 꿈꾸는 것이 더 현실처럼 느껴지듯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가끔은 사라진다. 이 산문은 시나 소설이 아니고 현실의 기록도 아닌 교사로서의 삶의 내면적 반응이다. 교사는 인간이다. 가끔 사회가 인문대 교사의 인간중심주의를 억압한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의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계산하지만 인문학과 시의 영향력은 계산될 수 없는 가치다. 인간중심주의 가치를 점점 찾기 힘든 사회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문화를 배워야 한다. 이 모순적인 긴장의 환경에 존재해야 한다. 학교의 목적은 타인의 인간성을 인정하는 것에 있다. 이 산문은 한 인간의 존재하는 기록이다.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이라는 제목은 완전한 이해가 불가한 타인의 인간성을 발견하는 것에서 왔다. 이 기록은 내 개인적 경험과 전해 들은 동료 교사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하였으며 영어로 작성한 문장을 나의 소중한 학생 김혜인이 나와 함께 번역하였다. 지우개 머리 어떤 날 나는 대답하기 위해 여기 있고, 어떤 날 나는 오직 듣기 위해 여기 있다. “질문 있어?” 많은 학생들이 질문의 형태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그다지 어려울 것 없는 예술을 배웠다. 그런 질문에 대답하는 유일한 방법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질문자가 자신의 질문에 답변하는 동안 사용감 있는 지우개처럼 커피를 홀짝이며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것을 느껴 보라. 학생들의 목소리는 배경소리가 되어 가다가, 불현듯 보이스 오버. 지우개는 부러지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얼룩을 견딜 수 있을까? 숭고한 느낌 지난 몇 주간, 를 듣는 학생들은 책상 아래 숨어 있었다. “교수님, 저희는 불확실성에 머물고 있어요.” 그들은 말한다. 일정 기간 동안 불확실성에 머문 뒤, 한 학생이 책상 아래서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저는 숭고한 느낌을 얻었어요.” 그들이 말한다. “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압도당해 죽음이 무섭고 두려워요.” “이제 제 핸드폰 돌려주시겠어요?” 정적. 학생이 나를 응시한다. 정적. 나는 천천히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학생을 응시한다. 흰 두루미 “주말 잘 보냈니?&r

  • 관리자
  • 2024-07-01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에세이]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김용언 미스터리 장르를 좋아하고, 열심히 읽고, 그에 관한 잡지를 만들고, 또 가끔은 관련 공모전 심사를 보면서 언제나 느끼는 바가 있다. 한국에서 미스터리 장르에 대한 이해도는 여전히 심각하게 척박하다는 점이다. 가장 모순되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은 ‘장르 문학’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다. ‘(그냥) 문학’1)의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소설들은 굳이 ‘장르 문학’이라고 불린다. SF, 판타지, 미스터리/스릴러, 로맨스, 공포, 무협 등의 꼬리표가 붙고 낱낱이 분류되며 ‘문학은 문학이지만 그냥 문학이라고 부르기보단 그 안의 장르로 명명되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장르 문학에 속하지 않는 작품은 그냥 문학이 아니라 ‘비장르 문학’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아니면 순문학 역시 일종의 장르임을 인정하면서 모든 작품을 ‘장르 문학’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 아닐까? 예전 한국 문단에서는 ‘순(純)’이라는 단어가 참여 문학/민중 문학 등의 대립항처럼 불렸다고 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참여 문학/민중 문학도 ‘그냥’ 문학에 포함된 것 같다. 아무튼 거칠게 말해서 ‘장르’를 사용하지 않고 인간과 현실 자체에 집중하는 소설을 ‘그냥’ 문학으로 호명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장르’로 호명되는 특정한 이야기들에는 그 장르가 만들어지게 된 역사가 있고 또 그 안에서 통용되는 특정한 규칙이 존재한다. 그런 약속된 구조와 규칙을 이용해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고 해서, 그 결과물이 ‘그냥’ 문학으로 불릴 수 없고 장르 문학으로만 불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장르 문학도 문학임을 인정하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그건 너무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굳이 받아들여 달라고 애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 장르 문학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불편해지는 순간들이 자꾸 찾아온다. 이를테면 한국 작가의 소설이 해외로 번역되었을 때 현지 리뷰들을 찾아보면, 스릴러/미스터리/공포 등의 명칭을 명확하게 부여하면서 소개한다. 한국에서는 기존 등단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할 때 ‘추리적 기법을 활용한’ 또는 ‘경계를 넘어선 상상력을 발휘한’ 등의 애매모호한 문구로 시작할 때가 많은데, 해외에서는 자신들에게는 낯선 작가의 번역 작품의 특성을 단번에 설명하기 위해 ‘이것은 스릴러다’ 또는 ‘이것은 공포소설이다’라고 알려준 다음 그 작품의 특성이 어떤 점에서 새롭고 멋진지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장르 문학과 장르 아닌 ‘그냥&r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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