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죄와 피의 보편성-편혜영, 『재와 빨강』(창비, 2010)

  • 작성일 2010-10-31
  • 조회수 1,102


[기획/특집] 시와 소설로 보는 2010년 명장면들

죄와 피의 보편성


- 편혜영의 『재와 빨강』(창비, 2010)

조형래


『재와 빨강』의 주인공은 불운했다. 그는 본래 전염병과 지진이 내습한 C국에 있지 않아도 될 인간이었다. 그가 C국에서의 재앙과 직면하게 된 데는 그 어떤 합리적인 이유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파견은 남들보다 쥐를 잘 잡는다는, 말도 안 되는 근거에서 결정된 것이었으며 후에 밝혀지듯이 그의 파견 자체 역시 전적으로 본사 담당자의 실수에 의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C국에서 그가 막다른 처지에 내몰리게 되는 것 또한 예기치 않은 불운의 연속 탓이다. 이를테면 그는 감염 여부가 불분명한데도 억류되어 본사에 정상적으로 출근하지 못할뿐더러 또 잠깐의 실수로 트렁크를 잃어버려 물품 상당수를 분실하게 된다. 또한 그의 파견 자체가 착오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예정에 없던 휴가로 무위의 나날을 보내게 되며, 무엇보다도 방문을 두드리는 자들이 그를 체포하러 온 형사라는 그 어떠한 확증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그의 이름을 정확히 발음했다는 데서 연유한 불안에 찬 심증만으로 쓰레기 더미에 투신한다.
알다시피 그것은 이후 그의 운명을 가름하는 결정적인 분기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처럼 그러한 연이은 불운이 꼭 그 자신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진정한 아이러니가 있다. 쓰레기 그리고 그 쓰레기와 같은 삶은 도처에 널려 있으며 공원 내에 거주하는 다른 사람들을 좀처럼 구별할 수 없었던 것처럼 그 자신 또한 그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존재가 되고 있다. 이와 같은 쓰레기적 삶의 익명성이란 비단 그 자신만의 전유물 내지는 운명적인 것이 아닌 것이다. 쓰레기로 전락한다는 사실에는 그 어떤 필연성도 작용하지 않으며 대상을 특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불편부당하고 무차별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쓰레기의 식별 불가능성으로부터 근본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이는 그 어디에도 없다고 해도 좋다. 마치 제아무리 방역복을 착용하고 위생에 신경을 쓴다고 해도 전염병에 감염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쓰레기의 존재를 간과하거나 신경 쓰고 있지 않다고 해도 사람들이 여전히 쓰레기를 배출하고 있는 이상 그 누군가가 쓰레기로 전락할 잠재적인 가능성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바꾸어 말하면 이러한 불운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도래할 수 있는 불특정 다수의 것이다. 누구나 이러한 불운의 대상으로 간택될 수 있다는 것만이 유일무이한 필연성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가 희생자가 된 것이 도리어 우연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를 절박하게 실감하고 있는 이는 오직 그 자신뿐, 이외의 모든 이들은 그러한 궁지에 처한 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완전히 무심하거나 무감각하다. 쓰레기로 전락하기 이전의 그처럼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그러한 불운이 자신을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공평무사한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리고 소독약과 방역복, 아파트나 회사 등의 건물 그리고 쓰레기를 태운 재 등은 그것을 (마치 효율적으로 관리되고 있는 것처럼) 불투명한 것으로 은폐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위안에 지나지 않는다. 불운이 나를 포함한 누군가를 급습할 가능성은 어디에나 있다. 마치 자신이 배출한 쓰레기 및 그것을 태운 재처럼, 도처에 퍼져 있으나 아직은 자신의 문제가 아닌 한에서 항상 잠재적인 위험인 채로 남아 있는 전염병의 존재처럼.
그렇다면 그는 잘못해서 쓰레기가 된 것이 아니다. 도리어 쓰레기가 되었다는 것이 잘못된 것으로 오직 그 자신에게만 실감된다는 사태가 문제적인 것은 아닐까. 이러한 질문과 대면한 우리는 이 모든 파국의 원인이 그가 다름 아닌 살인자로 판명된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 주목하게 되겠지만, 그것보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다름 아닌 그와 같은 우연적 계기란 자신의 내부에도 잠복하고 있었다는 진실 말이다. 말하자면 그 자신의 예측 불가능한 리비도 역시도 그러한 불운의 엄연한 일부를 이룬다. 이를테면 그는 C국에서의 새로운 생활에 대해 (그것이 순탄할 리 만무함에도 불구하고) 근거 없는 기대를 품었던 적이 있었다. 트렁크에 들었던 물건들은 분실 후 돌이켜 보니 그리 요긴한 것들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굳이 그것들을 챙겨왔으며 또 트렁크를 필사적으로 끌고 다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감기약을 구하러 약국을 찾았다가 정작 충동적으로 살충제와 쥐약을 손에 넣게 되며 그 결과 강도를 만나게 된다. 결정적으로 그는 자신의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채 유진에게 전화하고 쓰레기 더미에 투신하거나 병에 걸린 동료 부랑자를 보디백에 담아 소각로에 던져 버리거나 하는 것이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쥐를 잡고 있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그는 자기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또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도 언제나 돌발적인 계기에 의해 앞서 열거한 뭔가를 하고 있으며 그것은 대개 예측하지 못했던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그가 애초 의식했던 목표들은 대개 그 표적을 잃어버리고 도중에 지리멸렬해지기 일쑤다. 도리어 파국의 잠재적인 가능성은 그 자신의 불가해한 행위에 의해 구체적으로 현행화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그는 매 순간 자발적으로 (외부적 계기인 동시에 자기의 일부이기도 한) 그러한 우연적 계기들에 스스로를 의탁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셈이다. 요컨대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하는" 자다.
다만 예기치 않은 파국에 직면할 때마다 그는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어떤 목적이나 이유가 있어서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그 사실 하나로 인해 한사코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것이다. 요컨대 생존 그 자체만이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될 유일한 이유가 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그로 하여금 이미 결정되어 버린 모든 사태를 사후적으로 정당화하도록 하며 그것에 장애가 되는 모든 것을 망각하게끔 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그 어떤 극한 상황에도 적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부랑자, 지하생활자, 방역원 등으로서의 모든 삶을 기꺼이 수긍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리비도 역시 어디를 향할지 전혀 예측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다분히 돌발적인 계기로서 작용한다. 이 살아남고자 하는 순수한 충동 앞에서 일체는 무효다. 이 점에서 그는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살아남는 쥐와 같은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그 '살고자 하는 바'가 쥐를 잡아 죽이고자 하는 부단한 살의로 전도된다는 것은 지극히 역설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존이 유일하게 지향하는 바는 바로 이것이며 쥐에 대한 살의 및 그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는 C국의 폐허 이후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야말로 그를 다른 이들과 구별하는 결정적인 지표다. 부랑자로 그리고 방역원으로 살아가면서 그는 쥐를 잡고 있다. 알다시피 그것은 쓰레기로 전락한 그에게 살아 있다는 사실에 관한 원초적인 실감을 선사하는 유일무이한 행위였을 뿐 아니라 방역원으로서의 삶을 가능하게 했던 그 자신만의 온전한 재능이었다. 그러나 그가 쥐를 잡지 않을 수 없었던 일차적인 원인은 어디까지나 자신을 그와 같은 궁지로 내몬 세계의 모든 불가사의한 적의(敵意)에 대한 분노와 원한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마치 정글 속에서 원숭이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있던 바로 그 순간 한 원숭이의 꼬리를 잡아 물어뜯지 않을 수 없었던 충동적인 행위처럼 외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바로 이 쥐를 잡는 행위로부터 이 모든 것은 근본적인 차원에서 전도된다. 예를 들어 불시에 자신을 급습하는 원숭이와도 같은 세계의 적의란 (앞서 언급한 바처럼, 그리고 그 자신도 명확히 시인하고 있다시피) 실상 그 자신의 방향을 상실한 리비도에 의해 초래된 것이라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그의 신체에 증상으로 깊이 아로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그가 모든 사태의 원인을 연이은 불운으로 돌리고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뭔가를 결행하지 않았다면, 또한 막연히 자신의 죄를 의식하면서도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계속해서 쥐를 잡지 않았다면, 그는 칼자루의 익숙한 감촉, 즉 그 자신이 전처의 부정을 알고 격분한 나머지 그녀를 살해했다는 진실과 필연적으로 대면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자기기만은 알다시피 정작 그가 본국에서의 삶 전반에서 일상적으로 반복해 왔던 것이었으며, 그 결과 그는 동료들과 불화해 왔고 원숭이에게 모든 것을 빼앗겼으며 결정적으로 아내와 이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C국에서 경험하는 파국이란 사실상 본국에서의 삶 그것 자체의 연장(延長)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도리어 보편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진실과 마주하여 더 이상 회피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바로 그 순간 그는 (자신이 느끼기에는 엉겁결에 우발적으로 그리고 마지못해)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다. 실제로 전처가 과거 유진과 부정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또는 우연히 만나게 된 여성이 그가 잡은 쥐의 숫자를 속여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을 그에게 확인시킬 때 그는 마치 쥐를 잡거나 원숭이의 꼬리를 물어뜯을 때처럼 그 누군가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C국에 오게 된 것은 본국에서 자신의 실책으로 말미암아 이미 수습하기 어렵게 된 삶 그리고 무엇보다도 살인이라는 죄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그 스스로 원했던 결과일 터이다. 바꾸어 말해서 이미 C국으로 출국하는 것을 기꺼워하기 시작했던 그 어떤 순간부터 사실 그는 이미 이 모든 사태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초래되었다는 사실을 절실히 체감하고 오히려 그 파국적 현실로부터 애써 눈을 돌리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잘못된 삶을 수습하기 위한 이 모든 알리바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금 살인이라는 자신의 본성적 측면으로부터 결코 도망치지 못한다. 오히려 전처를 죽였다는 사실은 한사코 쥐를 잡고자 했던 살의로 잔존하며 끝내 여자를 살해하는 결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 회피할 수 없는 사실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었던 그 자신의 애초의 소망을 결코 이루지 못할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오직 그 자신만의 불운이며 고독일까. 실상 자기 것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원숭이의 꼬리를 물어뜯는 그와 같은 존재란 도처에 상존하고 있지 않은가. 이를테면 그의 파견을 질시하는 동료들, 아내를 빼앗아갔던 유진, 그의 호소를 외면하는 경비원이라는 이름의 존재들, 그를 습격하여 살충제와 쥐약을 약탈했던 그 누군가, 감염된 부랑자를 보디백에 넣어 불태우고자 했던 다수의 부랑자들, 몇 푼의 돈을 탐해 그를 밀고했던 노인, 그 누구보다도 그의 이름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몰과 관련되어 있는 존재임을 부인했던 사내, 그리고 이러한 파국이 자기와는 전적으로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그 모두들. 이들 모두가 그와 구별될 수 있는 것은 예컨대 소독약 또는 방역복이라든가 보디백, 아파트나 건물의 벽 같은 차단막을 사이에 두고 그의 처지나 상황이 자신과는 다를 뿐 아니라 완전히 무관함을 주장하면서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다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전염병, 그리고 쓰레기를 태운 재는 알다시피 공기 속에 섞여 어디에나 침투할 수 있다. 또한 모든 생필품은 쓰레기로 전락하지 않을 수 없을뿐더러 그것을 태운 연기와 재는 흩어질 뿐 (그리고 태울 수 없는 것은 어딘가에 매립되어) 결코 사라지지 않은 채로 어딘가에 잔존한다. 따라서 그 속에 거주하는 쥐와 바이러스, 그리고 전염병이 불시에 그들을 덮칠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의 죄 역시 언제든 피로서 현행화될 수 있는 것이다. 즉 피(빨강)라는 기회원인에 의해 죄(재)의 예정조화가 발동할 가능성은 언제 어디서든 상존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그들 모두 역시 그러한 가능성을 한사코 회피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그와 다르지 않은 존재가 아닐까. 또한 이러한 파국을 전적으로 타자의 것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 역시 이와 같은 위안의 카타르시스에 한없이 자족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이를테면 인도네시아를 덮친 쓰나미, 플로리다의 카트리나, 쓰촨이나 칠레, 아이티의 대지진 등의 자연재해로 인한 죽음, 그리고 9·11 테러,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벌어진 전쟁이라든가 용산 참사 등의 비극적인 사건의 희생자들, 삼성전자와 한국타이어 노동자들의 돌연사 등등, 죽음이 창궐하고 있는 이 참혹한 시대에 그와 같은 사태가 여기가 아니라 저기를 습격했던 것, 또한 우리가 그 때 거기에 있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운이 좋았던 것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태를 한사코 타자의 것으로만 여기며 오로지 살아남았다는 사실로서 우리의 삶을 필연적인 것으로 정당화하기에 급급한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검 위에 살아 있다는 사실만큼은 엄연하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죄다. 이러한 섬뜩한 죄와 피의 보편성을 이처럼 도저하게 구현하고 있는 한국소설을 나는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문장웹진 11월호》

 

추천 콘텐츠

산책과 가을의 일

[에세이] 산책과 가을의 일 박주영 오랜만에 동네 산책을 했다. 여름이 시작되고는 햇빛이 사라진 밤 산책을 하다가 그나마도 열대야 때문에 멈춘 지 오래되었다. 오늘은 해가 뜨기 전 일어났고 스탠드를 켠 책상에 앉아 소설을 썼다. 어느새 창밖이 밝아지는 걸 보다가 해가 완전히 뜨기 전에 바깥으로 나가 걷기로 했다. 산책은 어슬렁거리며 그냥 걷는 것이지만 소설가의 산책에는 생각이 없을 수 없다.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목적이었다면 달리기를 했을 것이다. 나는 산책과 걷기를 구분해서 다이어리에 기록한다. 산책이 바라보고 생각하며 이동하는 것이라면 걷기는 건강이라는 목적을 가장 염두에 둔 움직임이다. 여름이 아니라면 산책은 주로 오후나 해질 무렵에 한다. 늦게 자고 오전에만 일어나도 뿌듯한 사람이라 일어나자마자 소설을 쓰고 쉴 즈음이 대개 그 시간이기 때문이다. 산책을 하면서 내가 지금까지 쓴 것을 생각하다가 빈틈을 메울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고 다음 장면을 생각하기도 하고 이 소설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고심하기도 한다. 여름 해가 뜨기 전 오래간만에 소설을 생각하며 산책을 한다. 나는 문학 전공도 아니고 소설 쓰기를 배운 적도 없고 주변에 글 쓰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소설가가 된 후 소설가를 만날 기회가 생기면 알고 싶은 것들을 질문하곤 했다. 글쓰기가 잘 안 될 때는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2개의 대답을 기억한다. 한 분은 그냥 걷는다, 라고 답했고 한 분은 안 되어도 앉아서 써야지 어떡해, 라고 했다. 두 분 다 그때 20년 가까이 소설을 거뜬히 써온 분이었다. 나는 2개의 답을 지금껏 생각하고 있고 그게 지금의 나에게는 정답이 되었다. 하지만 정답을 안다고 정답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는 자주 책상 앞에서 벗어나고 걷는 것이 아니라 누워 있는다. 그냥 진짜 누워만 있는데, 요즘은 소설 쓰는 일에 자주 지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또 한 분의 조언이 생각난다. 건강을 챙기고 운동을 해라, 그러지 않으면 장편소설을 쓸 수 없다. 여기의 조건은 ‘나이 들수록’이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등단했고 처음부터 장편소설을 썼던 나는 그 조언이 그때는 크게 와 닿지 않았다. 나는 이미 젊지도 않고 약해 빠졌는데 장편소설을 쓰는 데 그리 힘이 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조언의 참 의미는 어떤 고비마다 왔다. 나이는 한 살씩 먹는 게 아니라 쌓여 있다가 한꺼번에 온다는 걸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부터 손목이 아프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허리가 아프기 시작하고 이제 어깨가 아프다. 남들은 여름휴가를 가는 시기 나는 병원을 다녔다. 의사는 어깨 인대가 손상되었다고 했다. 특정 자세를 취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자세는 하필 내가 반평생을 취해 온 자세이다. 지금도 나는 그 자세이다. 자판을 치고 노트에 글을 쓰려면 취할 수밖에 없는 자세. 그리고 의사는 옆으로 눕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나는 그렇게 누운 자세로 책을 읽었다. 너무 크고 두껍고 무거운 책만 그 자세로 읽을

  • 관리자
  • 2024-10-01
다시 서정을 위해

[에세이] 다시 서정을 위해 권상진 스무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서른이 되기 전에 시인이 되겠다고 주변에 떠들고 다녔던 기억이 아슴하다. 「홀로서기」를 외웠고 「지란지교를 꿈꾸며」를 외웠다. 이생진을 읽고 백창우를 읽고 박노해를 읽었다. 잔잔하게 때로는 웅장하게 가슴을 밀고 들어오는 시편들이 심장을 가로세로로 뛰게 만들었다. 백석과 김수영과 기형도의 이름은 몰랐지만 굳이 그들이 아니어도 충만한 시간들이었다. 시집이 이천 원에서 삼천 원 정도 할 때여서 큰 부담 없이 고를 수 있었고 외출할 때 시집 한 권을 들고 밖을 나서도 아무도 이상하게 쳐다보는 이도 없었다. 오히려 뭇 여성들의 시선이 슬쩍슬쩍 내 턱선을 지나 책장에 닿는 기분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생일이나 기념일에는 으레 서점에 들러 시집을 골랐다.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원태연),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류시화), 『친구가 화장실에 갔을 때』(신진호) 같은 시집을 골라 슬쩍 건네던 날들이 아련하다. 스물이라는, 가라앉을 것 하나 없는 맑은 감정에서 속살거리는 말들을 시인들은 대신 말해 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십 대는 가고 이십 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하고 대학을 쫓겨나 군대를 다녀오고 나니 어느새 아무데도 기댈 수 없는 성인이 되어 있었다. 오래된 가난이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그때부터 가난은 나를 가만히 두지를 않았다. 공장 일을 시작했는데 처음 해보는 노동이란 게 미치도록 좋았다. 종일 몸을 쓰고 땀을 흘리는 일이 알 수 없는 쾌감을 안겨 주었고 월급이라는 보상까지 덤으로 안겨 주었다. 시를 읽고 쓰는 일만큼 일이 재미있었고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도 살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더없이 좋았다. 지쳐 잠들기 전 문득 돌아본 시의 한때는 짧은 여행지의 추억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나의 스물은 급류처럼 흘러갔고 시는 둑 너머에 있어 쉽게 손이 닿지 않았다. 하지만 일과 돈, 그리고 자립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노동은 즐겁고 땀은 향기로웠지만 갑자기 내가 꿈꾸던 삶이 이런 것이었던가 하는 질문이 나를 툭 한 번 치고 갔다. 해지는 풍경만 봐도 맥박이 난동을 부리고 꽃과 낙엽의 표정을 살피면 왠지 모를 눈물이 맺히던 한 시절의 기억이 불현듯 피곤에 지친 등을 흔들어 깨웠다. 시인이 되겠다던 꿈을 무참히 짓밟고 나를 공장 노동자로 내몰았던 대학교 재단 이사장의 말이 떠올랐다. ‘약속은 지키면 좋은 것이고 못 지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던 그의 말. 그가 지키지 않은 약속 때문에 학교에서 쫓겨난 나는 궤도를 이탈해 버린 행성처럼 어둠 속으로 무작정 떠밀려가고 있었다. 막막한 혼돈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던 약속이란 단어가 다시 나를 수습하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서른을 지나갔고 아무도 내게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물어 보는 이는 없었지만 스스로와의 약속은 끝내 지켜주고 싶었다. 그렇게 시가 다시 내게로 왔다. 세월도 변했고 시도 변해

  • 관리자
  • 2024-10-01
과거를 보는 미래 SF

[에세이] 과거를 보는 미래 SF 곽재식 며칠 전 나는 한 행사에서 SF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소개하는 발표를 하나 맡게 되었다. 발표가 다 끝나고 질문 답변 시간이 되었는데 청중 중 한 분이 “SF라면 미래를 생각해 봐야 하는데, 왜 옛날 SF를 소개했느냐?”라고 질문했다. 그날 행사 중에는 답변을 짧게 드렸지만 이 내용은 한번 깊게 따져 볼 만한 재미난 주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한번 해보려고 한다. 명작 SF로 자주 손꼽히는 1970년대 영화로 <>이라는 할리우드 영화가 있다. 찰턴 헤스턴이 주연을 맡아 대형 영화사에서 배급한 그야말로 정통 할리우드 영화인데 그러면서도 비참한 미래의 모습을 예상해서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 결말도 뻔한 할리우드 영화의 행복한 결말이라고 말하기는 매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가기에 눈에 뜨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맨 마지막에 주인공이 외치는 대사는 SF 영화사에서 유명한 대사 순위를 꼽으면 상위권에 자주 오를 만큼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미래는 인구가 너무나 빠르게 늘어났기 때문에 멸망해 가고 있는 세상이다. 인구가 너무나 많은 데 비해 식량과 자원은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굶주리고 모든 물자가 부족해 다들 비참하게 살고 있다. 영화 제목인 “소일렌트 그린”이란 식량이 부족한 세상에서 특별히 개발해 보급 중인 신형 인공 식품을 말한다. 그러므로 <>은 19세기 맬서스의 등장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미래 인류의 멸망 시나리오라고 철석같이 밀었던, 맬서스 함정을 정통으로 다룬 영화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성장한다.”라는 말은 어지간하면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지구는 망한다, 그러니 사람이 많은 것은 해악이다,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은 곧 “사람이 곧 모든 파괴의 근원이며, 사람이 없어져야 지구가 살아난다.”는 생각으로도 자주 이어지기도 한다. 재미난 사실은 이 영화에서 다루는 멸망해 가는 미래가 2022년이라는 점이다. <>은 1973년에 개봉된 영화이므로 이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이란 영화가 제작되던 1972년으로부터 50년 후를 말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이 SF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의 미래라는 시간은, 2024년을 사는 현대의 우리에게는 2년 전의 과거가 되었다. 나는 영화를 보는 과정에서 이렇게 시간의 꼬임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신비롭다. 게다가 요즘 이 영화의 내용을 보다 보면 더욱 중요한 사실도 깨달을 수 있다. 실제 2022년이 인구가 너무 많아 식량 부족으로 멸망하는 시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2020년대는 인구가 너무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구 감소와 초고령화가 문제인 시대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 겪고 있는 문제도 아니다. 한국에서 인구 문제가 워낙 극심하게 나타나

  • 관리자
  • 2024-10-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