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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현신들-이영광, 『아픈 천국』(창비, 2010)

  • 작성일 2010-11-03
  • 조회수 1,979


[기획/특집] 시와 소설로 보는 2010년 명장면들

죽음의 현신들

 

- 이영광, 『아픈 천국』(창비, 2010)

김영희


부음(訃音)



이영광의 『아픈 천국』은 ‘부음’(訃音) 같다. 그 곳은 온갖 ‘사색’(死色)의 현상들로 가득하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도 인정받지 못한 죽음(“죽은 사람은,/ 죽을 것처럼 哀悼해야 할 텐데” 「유령3」)에서부터, 첨단의 거리를 배회하며 쉼 없이 증식하는 유령(“지금은 유령과/ 유령이 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몸들의 거리” 「유령1」), 육체적인 황홀경과 교환경제(“슬픔을 팔아서 죽음을 사느라/ 죽음을 팔아 슬픔을 사느라” 「밤이 오면 산에 들에」), 몸의 감각으로 남아 있는 귀신의 경험(“죽음보다 먼저 당신이 오고” 「여행가」), 부조리한 현실을 가볍게 비트는 유머(“살 만한 자들 중에는 꼭 툭하면/ 죽고 싶다고 말하는 놈들이 있다” 「간밤」)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모두 죽음과 얼마간의 연관을 맺고 있는 사색의 현상들이다.
 
이영광에게 죽음이란 현실의 ‘정치학’과 연결되어 있기도 하고 개인의 ‘존재론’과 관련되어 있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든 시인은 “죽음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검은 젖」)고 신앙처럼 믿고 있다. 그는 ‘먼 곳’의 죽음을 지금-여기로 당겨와 죽음과 더불어 현재를 산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시간을 당겨 살아감으로써, 시인은 삶의 한가운데서 죽음과 함께 호흡한다. 죽음의 ‘젖무덤’에 얼굴을 묻고 죽음의 ‘검은 젖’을 깊이 빨고 있는 모습은 이 시집에서 가장 인상적인 이미지라 할 수 있다. 삶과 죽음이 함께 호흡하는 그 곳이 바로 시인의 ‘성지’다. 그가 “그래도 사는 것에는 사는 것 이상의 뭔가가 있어야 하지 않겠니”(「현기증」)라고 자문할 때, 우리는 ‘사는 것 이상의 뭔가’를 추동하는 원인이 다름 아닌 죽음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인간의 존재 바탕은 ‘무(無)’이며 죽음에 이르는 존재인 인간이 ‘무’의 터전에서 느끼는 근본 기분은 다름 아닌 ‘불안’이다. 이렇듯 ‘무’와 불안의 세계에 내던져 있는 인간에게, 죽음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수동적으로 주어진 것이지만, 미래의 죽음을 이 곳으로 당겨온 이들에게, 죽음은 새로운 가능성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죽음을 향한 자유’라는 이 불가능한 가능성은 현실의 삶을 열정과 불안과 확신 속에서 새롭게 개시한다. 그러므로 죽음이란 인간의 ‘한계’인 동시에 ‘가능성’이다. 후자를 ‘선택’한 이들은 죽음을 스스로 기획한다. 죽음으로 미리 달려가 현재를 종말론적으로 산다. 하이데거는 이를 ‘죽음에의 선구(先驅)’라고 말한 바 있지만, 이를 이영광식으로 말해 보면 ‘사선(死線)에 활로(活路)가 있다’는 정식이 된다.
 
‘사선’과 ‘활로’를 일치시키는 이 같은 사유는 삶의 허무와 현실의 폐허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에 수동적으로 머무르지 않고, 이를 오히려 자신의 것으로 적극적으로 결단하는 자세에서 기인한다. 예컨대, “죽음 무서운 줄 모르는” 한 인간이 필름 끊긴 몸으로 차도에 뛰어들어 ‘질주하는 죽음들’과 대치하고 있는 광경을 바라보며, 시인은 그 취한 죽음이 지금 ‘복음이 쏟아지는 빛 가운데 서 있는 건’ 아닌지, 저 ‘열렬한 사선에 활로가 있는 건’ 아닌지를 아프게 묻는다(「흔한 일」). 물론 “선지자처럼 자살특공대처럼” 저만이 받은 아픈 천국의 소명에 진저리치며 죽음과 대치 중인 사내의 ‘사선’에서 우리는 섣불리 ‘활로’를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사선에서 활로를 모색하는, 그리하여 죽음을 끊임없이 이 곳으로 불러들여 생의 계기로 인식하는 사유의 일단이다.
 
이 세계를 일컬어 “생사의 혼합림”(「고사목 지대」)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산 나무들과 죽은 나무들이 서로를 깊이 인정해 주면서 하나의 풍경을 이루는 풍경 말이다. 지워야 할 경계도, 감행해야 할 월경도 없는 이 곳에서는 ‘죽은’ 나무들마저 자신의 생을 조화롭게 ‘살아가고’ 있다. 이 같은 생사의 혼합림은 시인에게 무(無)와 공(空) 가운데 내던져진 삶의 흔적과, 폐허에 적극적으로 투신하여 현실을 치열하게 갱신하는 삶의 자세의 혼합일 터인데 이는 궁극적으로 ‘죽음을 향한 열렬한 자유’라는 생의 역설적인 의지를 발현한다. 그리하여 그 곳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 허무 속에서 ‘모든 걸 찾아다닌’ 정념을 지닌 사람(「밤이 깊으면」), 바로 시인의 거처다. 그러니 그 곳에서 생과 사의 물불은 가려서 무엇하겠는가. 시인의 거처에서 삶과 죽음은 “뜯어말릴 수 없는 한 몸”(「물불」)이 되어, 한사코 ‘찬란’하다.
 

그러나, 사랑을 사랑해

그렇다면 생사의 혼합림의 바탕이 되는 세계, 곧 시인의 거처 외부의 세계인 ‘현실’의 모습은 어떠한가. 시인에게 현실은 “온 세상이 상처”로 인식된다. 그 곳에서는 들판과 숲을 물들이는 녹색마저도 “핏방울처럼”(「녹색」) 돋아난다. 현실에서 희망이란 “쥐어 본 적 없는데도 놓을 수 없는” 모순적인 형식으로만 존재하며, 그에 대해 사람들은 “그냥 그만 우릴 지나쳐가도 괜찮아”(「구두」)라고 제 자신의 불우한 희망을 위로한다. 이영광은 이 세계를 일컬어 “너무도 많은 사랑이 살해당한 곳”(「춘화」)이라고 표현한다.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아픈 천국’은 여러 가지 함의를 지니고 있지만 이를 다름 아닌 사랑이 살해당한 현실을 비유하는 말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시인은 첨단과 폐허가 공존하는 이 도시에서 여전히 ‘사랑’과 ‘선함’의 가치를 믿는 사람이다. 이러한 믿음은 시집에서 무척이나 매력적인 문장들로 발산된다. 가령, “너무 멀고 어지러운 바깥”인 현실을 향해 “하지만 사랑을 사랑해”(「현기증」)라고 고백한다거나, 증오보다 더욱 근원적인 자리에 매설된 사랑에 대해 “증오는 참기 어렵다/ 사랑은 참을 수 없다”(「밤이 깊으면」)라고 고백하는 표현들이 그렇다. “나는 한사코 선량해질 것이다”(「사랑의 미안」)라는 순정한 다짐은 아픈 천국의 원주민들이 신봉하고 있는 사랑의 제1계명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무엇으로 이 사랑을 추진해 가는가. 우리는 사랑을 실현해 가는 시인의 방식에서 시의 정치를 실감(實感)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그것은 제 생에 쏟아진 불우한 소명을 증명하듯, 차도에 뛰어들어 질주하는 죽음과 대치하고 있는 한 사내를 바라보던 시인이, 슬픔도 안타까움도 아닌 “뜨거운 것이 젖은 구두 속에서 꿈틀, 했다”(「흔한 일」)고 고백하는 순간에 발화하는 감각이다. 세상에 대한 증오도 연민도 아닌, 다만 시인의 몸에서 뜨겁게 꿈틀되는 감각들. 그 ‘뜨거운 것’에서 시작(始作)되는 시작(詩作)은 윤리적이다. 세계의 폐허를 시인의 몸으로 실감하는 일에서 시인의 정치는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이런 면에서 우리는 “먼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다시 몸이 아프다”(「먼 곳에서부터」, 『김수영 전집1』)라는 김수영의 고백만큼 윤리적인 문장을 알지 못한다. 시인의 몸을 시대의 상처가 기입되는 장소로 개방하는 일, 그리하여 ‘시대의 아픔’을 ‘몸의 아픔’으로 경험하는 일에서 시인의 정치가 발원하는 것임을 김수영은 자신의 ‘아픈 몸’을 통해 실증하고 있다. 그렇게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아픈 몸이」, 같은 책), 무한한 ‘사랑의 연습’을 계속할 때 시인에게는 어느덧 “아무리 더러운 것도 만지고 빨고 껴안고 싶은 순간”(「현기증」)이 도래하는 것일지 모른다. 자신의 발밑에서 꿈틀되는 뜨거운 것을 감지하여 온갖 더러운 것을 ‘만지고 빨고 껴안는’ 순간으로 나아가는 사랑의 연습, 이영광의 현기증은 그렇게 진화하고 있다. 
 

몸뚱이와 몸부림

이영광에게는 마음보다 깊은 곳에 ‘몸’이 있고, 의지보다 우선하는 곳에 ‘감각’이 있다. 우리가 그의 시를 읽음으로 『아픈 천국』에 거주하게 될 때, 시인의 ‘몸’에 오래도록 머무르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또한 시인의 말은 ‘몸의 말’이라 할 수 있는데 시인의 몸에는 발설되지 못하고 웅성거리는 말들이 슬픔의 기원을 이룬 채 웅크리고 있다. 시집의 표제에서부터 등장해 여러 형태로 변주되는 ‘아픈’이라는 수사 또한 몸의 감각 작용으로, 이는 시집 전체를 지지해 주는 중요한 모티브가 되기도 한다. “아픈 생”(「극단적인 바람」)과 “슬픈 몸”(「여행가」)은 아픈 천국의 원주민들이 공유하고 있는 존재 조건에 가깝다. 김수영식의 ‘아픈 몸’을 이영광식으로는 “통증의 세계관”(「아픈 천국」)이라 부를 수 있을 텐데 ‘아픈 생’과 ‘슬픈 몸’이 바로 통증의 세계관의 근거다. 『아픈 천국』에 부유하는 몸들의 실체를 보다 가까이서 만나 보면 이렇다.
 
여기, ‘유령’의 몸이 있다. 자본주의라는 유령에 의해 유령의 유전자가 찍혀진 그들의 몸은 ‘대신(代身)’이라는 정체성을 얻게 되었다. 이는 자본과 권력에 의해 자신의 고유한 ‘인간됨’을 상실한 몸이다. ‘나가 사라져 버린 나’인 것이다. 대신의 몸은 세상에 의해 몸의 존엄을 인정받지 못한다. 국가제도와 공권력은 대신은 ‘사람’이 아니라고 여기고(「유령3」) ‘몸’이 아니라고 여겨(「유령2」), ‘사람의 몸’으로 대우하지 않은 채 ‘拉致’하고 ‘暴行’하고 ‘鎭壓’하였다. 대신에게는 애도라는 제의적 절차마저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니 유령의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하면 다시 나타날 수 있을까 하는”(「유령2」) 것, 사라진 몸을 찾아 ‘내가 나였던 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사회에 의해 낙인찍힌 대신을 벗어나기 위해 유령은 여전히 투신(投身) 중이다. 이영광에게 유령의 몸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상상력의 발현이다.
 
다음은, ‘혼(魂)의 처소’로서의 몸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혼과 몸을 분리시켜 사유하는, 아니 사유 이전에 이러한 분리를 경험한 자의 감각에 근거하고 있다. 이 같은 감각에서 이영광의 시를 읽다 보면 시인에게 몸이란 일종의 ‘장소’와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몸이란 “세상 끝의 은신처이거나 감옥”(「마흔다섯」) 같은 곳, 자신을 쉬게 하는 동시에 구속하는 ‘혼의 집’ 같은 곳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 몸에 “발버둥치는 짐승”(「극단적인 바람」)이 들어앉아 운다면 그것은 얼마간 파괴적이고 얼마간 애처로운 광기로 드러날 것이다. 또한 시인은 “저는 저를 들락거리며”(「향수」)에서와 같이 자신의 몸속을 들어갔다 나왔다 하기도 하는데, 이럴 때면 마치 시인의 혼이 자신의 몸 바깥의 어디 아득한 곳에 또 다른 자신의 거처를 마련하고 있거나 그 아득한 곳을 유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홀린 듯 생각하게 된다. 이영광에게 혼의 처소로서의 몸은 불교적이고 무속적인 세계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픈 천국에 거주하는 몸들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이며, 한편 불교적이고 무속적이다. 이는 비단 몸에 한정된 논의가 아니어도, 이영광 시에 침윤되어 있는 사유의 두 지평이기도 하다. 앞서 살펴본 바, 생에 대한 허무와 정념이라는 역설적인 아름다움으로 미만했던 죽음처럼, 아픈 천국의 몸은 정치적인 몸뚱이와 무속적인 몸부림이 공명하는 몸들의 거리를 펼쳐 보이고 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우리는 어느덧 처음으로 돌아와 있는 것만 같다. 다시, 이영광의 『아픈 천국』은 부음(訃音) 같다. 그 곳은 죽음을 육화한 몸들의 영토, ‘죽음의 현신들’이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아픈 천국이다. 그 곳에서 시인은 “뭔가를 믿고 있다는 사실 말고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시인의 말」) 광신도처럼 ‘종교적으로’ 산다. 이것을 ‘무위(無爲)를 향한 간절함’이라는 조금은 모순적인 말로 읽고 싶다. 시인에게는 “언제나 반드시 닿아야 할 곳이 없”(「향수」)기에, 그 자리에는 무위를 향해가는 과정, 그 이행만이 무한하다. 우리는 이 무한한 연습을 일러, 시인이 자기 나름으로 죽음을 완수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허무와 정념은, 몸뚱이와 몸부림은 그렇게 결합해 죽음의 현신들이 되었다. 


《문장웹진 11월호》

 

  

원주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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