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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한 세계 속의 구원

  • 작성일 2011-12-01
  • 조회수 1,469

 

무의미한 세계 속의 구원

─ 김성중 ?허공의 아이들? (『개그맨』, 문학과지성사, 2011)

 

강지희

 

 

 

 

 

  셸 마페솔리는 오늘날 우리 모두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떠다니는 영토’라고 말했다. 그곳에서 연약한 개인들은 온통 구멍투성이의 현실에 직면한다. 그가 김성중의 「허공의 아이들」을 읽는다면, 이 소설 속의 풍경이야말로 자신의 세계관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며 무릎을 칠지도 모르겠다. 신의 죽음으로 인해 인간은 ‘빈 공간의 한숨’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시사한 니체 역시 이 소설 속에 펼쳐진 재난의 광경을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성중의 「허공의 아이들」은 돌연한 파국의 현장에서 시작된다. 어느 날, 지상의 사물들은 땅 위로 점점 떠오르고, 그 자리에 구덩이들이 생기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투명해지며 사라진다. 소설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아 있는 존재는 열다섯 동갑내기 소녀와 소년 둘이다. 세상이 급작스럽게 어긋나버린 이유가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 우리는 전혀 알 수 없다. 세계는 그저 완전히 붕괴되어 버렸다. 그런데 “오지 않을 미래”를 강하게 예감하는 이 소설의 주 정조는 맹목적으로 내리꽂히는 절망과 공포 같은 것이 아니다. 김성중의 특장은 이 재난의 상상력을 희미한 빛을 받으며 둥둥 떠다니는 비눗방울처럼 가볍고 환상적인 색채와 리듬으로 그려내는 데 있다. 끝장나는 세계는 그의 손에서 기이한 아름다움을 띠며 현현한다. 떠오른 집들은 “허공의 금빛 무덤들”로 묘사되고, 소녀는 하얀 구름 위에서 내려다보며 “꼭 천국 같아.”라고 꿈꾸듯 중얼거린다. 소년과 소녀가 어마어마한 부패가 진행되고 있는 마트를 약탈하거나 빈집에 불을 지르고 다닐 때도, 이는 누구에게도 치명적인 해를 끼치지 않기에 폭력적이거나 위협적이지 않다. 사람들 역시 죽음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기보다는, 고요함 속에서 서서히 투명해지며 소멸되었을 뿐이다.

  는 동세대 젊은 작가들이 피비린내 속에서 자폭하는 인물을 그리거나(김사과), 이유를 알 수 없는 폭사를 그리며(김유진) 불안과 공포의 단단한 악무한 속으로 밀고 들어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느껴진다. 폭력적이기보다 아름답고 평온하고 부드러운 파국, “조금씩 사라지는 몸 대신 퍼즐 조각을 채워 넣”으며 소멸을 기다리는 천진난만과 체념이 뒤섞인 파국의 풍경은 기존의 어느 한국 소설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어떤 것이다. 이렇게 ‘순간적 폭발’이 아니라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고요한 소멸’로의 이행은 김성중에게 중요한 것이 “고통도 경험도 순환되는 이 세계”(「순환선」)의 지긋지긋한 권태를 내파시키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무의미한 삶을 어떻게 견뎌낼 것인지를 궁구하는 쪽에 있음을 보여준다. “사라지는 세계에서 성장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소녀의 질문은 여기서 강하게 부각된다. 우리를 정말 괴롭게 하는 삶의 비극성이란 파국으로 치달아 종결되는 쪽이 아니라,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데도 불구하고 그 삶이 지독하게 계속된다는 사실이 아닌가. 「허공의 아이들」에서 시간은 달리의 그림처럼 흘러내린 채 맥없이 지속되고, 대책 없이 소멸을 향한 기다림 속에 던져진 소녀는 퍼즐을 맞추거나 피츠제럴드의 소설을 꺼내 읽는다.

  

 

  거기에는 부유하고 아름다운 상류층 처녀들, 플란넬 양복, 깨진 꿈의 파편이 숨 쉬고 있었다. 소녀는 가질 수 없는 감정에 굶주려 지나간 시대들, 1920년대의 낭만을 빌려 공포를 밀어냈다. 풍요가 존재했다는 것. 그것이 중요했다. 소녀는 무릎에 책을 올려놓은 채 경험하지 않은 세계에 대한 우수에 젖었다. (「허공의 아이들」, p. 28.)

 


 

 

  험의 빈곤은 자연스럽게 감정의 빈곤과 결부되기 마련이다. “가질 수 없는 감정에 굶주려” 소설 속에서 풍요를 탐닉하는 소녀의 독서가 지금 몰락한 세계 속에서 단독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일차적으로는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는 공동체가 붕괴되었음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더 나아가 경험의 빈곤 자체를 깨닫게 한다. 벤야민은 사적인 경험만이 아니라 인류의 경험 전체가 빈곤해졌음을 이미 한참 전에 직시한 바 있다. 그때보다 더 많은 기술의 발달과 더 심화된 세계 경제 위기를 겪고 있는 우리에게 경험의 빈곤은 더 극심해졌으며, 더 파편화되었다. 여전히 역사는 계속되고 있지만 이는 단자화된 개인들 안에 녹아들어 공유되지 않는 무엇으로 남는다. 그렇다면 절멸의 위기에 부딪힌 채, 모든 것이 떠다니는 것을 보여주는 이 소설의 풍경은 빈곤한 경험 속에서 자기 존재 기반의 공허함에 맞닥뜨리고 있는 우리 현실의 알레고리가 아닌가. 조금 더 나아가, 모든 것이 삼켜지는 세계 속에서 소설을 읽는 것은 “경험하지 않은 세계에 대한 우수에 젖”는 것 이상의 무엇이 될 수 있는가. 소설이란 결국 “인간의 소리로 지어진 허공의 집”(「게발선인장」)과 같이 직조된 허구에 불과할 뿐인데, 소설이 세계의 무의미성, 삶의 의미 없음에 대한 자각과 뒤엉켜 무엇이 될 수 있는가.

  「공의 아이들」은 이에 대한 어떠한 답도 거부한다. 소설 속에 나타나는 재난은 애초부터 어떤 근본적인 의미 부여도 거부하고 있었다. 소녀에 말에 따르면, 지금 이 사라지는 세계의 시간이 ‘종말’인지,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는 ‘창세기’인지 알 수 없으며, 살아남은 소녀와 소년도 ‘선택된’ 것인지 ‘누락된’ 것인지 알 수 없다. 모든 것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흔들리며 떠 있다. 소설은 소녀가 사라지고 홀로 남은 소년이 남은 땅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자신의 뼈가 자라는 소리를 듣는 장면과 함께 끝난다. “뼈가 자라는 소리였다.”라는 마지막 문장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가. “사라지는 세계에서 성장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소녀의 질문은 결국 어떤 대답도 찾지 못하고 허공으로 증발한다. 사라진 것 뒤에 남은 것은 어떤 소리뿐이다. 우리가 단 한 번도 들어 본 바 없는 ‘뼈가 자라는 소리’. 이를 설명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만들어 소설 전체를 거대한 의미의 서사로 통합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해석은 근본적으로 의미가 없다. 지젝은 욥의 위대함을 그가 결백하다고 항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재난들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주장했던 것에서 찾는다. 재난이라는 잔혹한 현실을 뒤덮어 줄 수 있는 어떠한 ‘심층적 의미’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만 우리는 외상적 현실과 마주할 수 있다.

  성중은 「게발선인장」에서 ‘일주교’라는 사이비 종교를 만들어 한 노인을 섬기던 할머니가 배신당한 후 보여주었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그렸다. “꽃들이 떨어진 자리에서 그녀는 품위 있게, 노년 궁핍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궁핍하고 남루하며 이미 실패로 판명된 삶이 어떻게 품위를 획득하는가. 그것은 꽃들이 떨어진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입센은 「들오리」에서 인간들이란 대개 죽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방편으로서의 거짓말(life lie)’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상은 「실화(失花)」에서 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라고 말했다. 인간은 생활 속에서 발발하는 우연적 사건들을 그러모아 일관성 있고 의미 있는 삶의 서사를 허상으로 구축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입센이 말하는 ‘거짓말’이고, 이상이 말하는 ‘비밀’이겠다. 그러나 이것들을 완전히 걷어내 버리는 것, 그리하여 빈곤한 삶과 무의미한 세계를 직시하며 그대로 견뎌내려는 태도에서 예기치 않게 구원의 가능성은 열린다. 김성중의 「허공의 아이들」은 어떻게든 지속되는 삶의 본질로서의 공(空)에 대해서, 지독한 쓸쓸함으로 이와 대결하는 남겨진 아이들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냄으로써 오래 잊히지 않을 소설 속의 한 장면을 완성해 냈다.

 

《문장웹진 12월호》

 

 

강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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