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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세계의 고통과 공명하는 작가

  • 작성일 2012-08-26
  • 조회수 2,197

 

   기획특집 인터뷰

 

 

세계의 고통과 공명하는 작가

─ 전성태 소설가

 

2012-08-09 PM 02:00

인문까페 창비

 

  

 

   지구를 통째로 삶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운 날씨였다. 최근 들어 유난히 몸이 안 좋다던 전성태 작가는 약간 절룩이며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우리를 발견하자 수줍은 시골 소년 같은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은 작가 자신의 탄탄하고 밀도 있는 소설과도, 그 소설 속 걸판진 농군들과도 조금 닮아 있어서 긴장하고 있던 인터뷰어들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 어려운 질문이 많으면 어떻게 하냐는 내 농담에, 어려운 질문에도 대답 잘한다고 웃으며 대답해 주셨고, 정말 어떤 질문에도 다정하면서도 현명한 대답을 들려주셨다. 2012년 여름, 리얼리즘 문학의 적통을 잇는 작가로 꼽히는 전성태 작가를 만났다.

  


 

   ▶ 이서영_  최근에 작품을 쓰고 계세요? 아니면 어떻게 지내세요?

 

   ▶ 전성태_ 옛말에 ‘마흔 고개’라는 말이 있어요. ‘아홉수’ 이런 말처럼. 마흔을 넘기는 작가들이 그런 테마로 작품을 많이 썼어요. ‘마흔 넘어가면 뭐가 그렇게 달라질까?’ 이런 생각을 했는데, 마침 제가 작년 올해 몸이 안 좋았어요. 여러 가지로 경고를 받았다고 할까. 그전까지는 청년의 몸으로 작업을 했는데, 일테면 밤샘작업을 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몇 년 새 밤새는 일이 안 되고, 그러자니 스스로 게을러져서 그런가 보다 탓을 했지요. 나이가 들어 가는데 내가 받아들이질 않았던 거 같아요. 이번에 앓으면서 받아들였지요. ‘이제 내가 나이가 좀 든 거야. 옛날 같은 기분으로 밤새서 글 쓰는 건 힘들어. 인정해야 해.’

   몸을 추슬러 점차 작품 쓰는 양을 늘리고 있고, 또 요즘엔 문학집배원으로 취직해 〈문장배달〉을 하고 있는데, 다른 때보다 책을 더 읽게 돼요. 신간들도 많이 찾아 읽고요. 전체적인 느낌으로는 작년, 올해는 조금 쉰 느낌, 그리고 올 여름은 폐업. 여름더위 가시면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요.

 

   ▶ 이서영_  어떤 계기로 글을 쓰겠다고 결심했나요?

 

   ▶ 전성태_ 저는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했죠. 고등학교 때 진로를 선택한 셈입니다. 힘든 입시생활을 극복해 가는 데 힘이 되었던 건 글쓰기였어요. 자취방에서 혼자 소설을 많이 썼어요. 소설 쓰고 일기 쓰는 일이 고등학생 시절 제가 유일하게 숨 쉬는 통로였어요. 3학년 1학기 때까지만 해도 문예창작과를 갈 생각은 없었어요. 내가 장차 문학을 할 듯싶은데, 다른 일들을 하면서 문학을 병행하지 않을까,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지요. 문학이라는 게 올인해도 될까 말까 하다는 걸 그땐 몰랐지요. 대입원서 쓰는 시즌이 되니까 자연스레 하고 싶은 분야를 찾아가게 되더라고요. 내가 제일 잘할 것 같고, 그 일을 하면 아주 즐겁고 행복할 것 같단 생각.

 

   ▶ 이서영_  습작기를 어떻게 통과하셨어요?

 

   ▶ 전성태_ 대학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습작기가 시작된 건데, 고등학생 때까지 생각하는 문학과 이제 문학을 맘껏 할 여건이 마련되어서 만난 문학, 즉 성인이 돼서 만나는 문학이 아주 다르더군요. 힘들었죠. 입학해 한 해 동안 소설은 한 문장도 못 쓰고 1학년 마치자마자 군 입대를 선택했죠. 심정이 아주 복잡했어요. 전역하고 복학할 때가 됐을 때도 문학을 계속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문창과로 돌아오고 그렇지 않다면 다른 진로를 찾아보려는 생각을 하고 군대에 갔어요. 그런데 막상 학교와 문학을 벗어나 지내다 보니까, 다시 문학이라는 걸 맨얼굴처럼 대면하게 되었어요. 문학은 무엇인가? 내가 쓰고 싶은 소설은 어떤 것인가? 그런 질문이 곁에 와 있던 거지요. 이전에는 자기 삶과 문학을 별개로 생각했어요. 문학이라는 과실이 있는데, 과실을 발견하고 따는 것, 혹은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이제 어렴풋이 깨달았지요. 내가 살아가는 방식에서 문학의 형식이 마련되고, 문학에서 내 삶의 내용이 채워지는 거라고 말이죠. 문학으로 호흡하는 인간이 곧 작가라는 자각이 들었다고 할까요. 학교로 돌아와서 습작기를 열심히 보냈죠. 3학년 때 등단했어요. 빨리 했죠. 그래서 고생했어요. 발가벗겨져서 어디 길거리에 서 있는 느낌, 내가 내 이름으로 세상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는 거,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내가 말을 건다는 건 굉장한 두려움이었어요. 등단하고 나서 첫 창작집 묶기까지 6여 년간이 실질적인 습작기였어요. 문학을 다시 생각하고, 문장도 다시 자각하고, 또 문학에 대해서 더 절실해지고요. 이런 시간이 힘들기는 했지만 스스로 단련되는 시간이었어요.

 

   ▶ 이서영_  만약 습작기로 다시 돌아가신다면 꼭 해보고 싶은 것이 있나요?

 

   ▶ 전성태_ 등단을 조금 더 뒤에 하지 않았을까. 매년 소설가로 등단하는 이들의 연령을 통계내면 아마 서른이 조금 넘을 거예요. 그렇죠? 나도 그 나이쯤 작가가 되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곤 해요. 물론 이십대에 쓸 수 있는 글이 있어요. 그런데 이십대 때는 조금 더 다양한 방식의 글쓰기를 시도해 보기도 하고, 여러 선택지를 두고 살아 보기도 하면 좋겠어요. 저 같은 경우는 이르게 스타일이 굳어진 감이 없지 않아요. 어린 나이에는 이게 마치 내 주 특기다, 라고 맹신하게 되죠. 아이러니하게 신인으로서 다양한 도전의 시간을 맞았다기보다 잔뜩 겁먹고 실패하지 않는 길을 좇게 되었다고 할까요. 그때 등단하지 않았다면 영영 못 했을까? 대학교 재학 중 등단하고 나서 졸업한 뒤 특별히 직장생활을 해야겠단 생각도 없어서 직장생활을 한 경험도 딱히 없어요.

   대학 졸업 전후까지, 더 나아가 결혼까지 어떻게 보면 자기 인생 스케줄이라는 게 실상 제도가 마련해 놓은 스케줄이란 말예요. 입학과 졸업, 구직과 결혼. 사회가 요구하는 빠듯한 연령대가 마련되어 있죠. 그뿐인가요?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이런 식의 스케줄에 포박당해 살죠. 문학은, 문학의 나이는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죠. 물론 저도 이십대 때는 그런 점이 안 보였어요. 우리가 재수를 하는 친구들을 보면 한 1년 늦었는데 굉장히 많은 손해를 본 것처럼 피해의식을 가지잖아요. 문학도들은 어떤가요? 대학을 다니면서 ‘독서량이 많지 않은데 대학 졸업할 때까지 동서양 고전들을 다 섭렵해 봐야지.’ 하고 계획하는데 그게 가능한가요? 적어도 고전들을 섭렵할 계획이라면, 한 35세, 40세까지 해보자, 이렇게 잡아야 한다는 거지요. 내 생각에 33세, 35세까지 자유롭게 많은 가능성들을 실험해 볼 거야, 이런 생각이 오히려 더 건강한 문학도답지 빨리 등단해야 하는데, 대학원 다니면서 등단해야 하는데, 대학교 졸업반인데 큰일났네, 어떡하지, 이건 아니란 거지요. 습작기 스케줄은 자기 인생을 걸고 길게 잡아야지요. 사회가 마련해 놓은 스케줄을 따를 필요가 없단 말이에요.

   작가가 된다는 건 개인적으로도 필생의 직업을 갖는 일이에요. 말 그대로 등단이라는 건 자격증을 따는 것과 같아요. 운전면허증 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때부터 운전을 안정적으로 하는 게 중요하잖아요. 문학도 어떤 글을 평생 쓸 것인가, 자기가 어떤 문학적 삶을 살 것인가가 관건이죠. 자기를 충분히 단련하고 성장시키고, 자기 확신을 가지면서 꾸준히 해나가야 해요. 꾸준히 활동하는 작가들은 운이 좋아서, 혹은 다른 사람들보다 문학적으로 뛰어나서라기보다 자기 암시가 잘 되어 있고, 작가로서 긴 호흡을 몸에 익히며 사는 사람들 같아요. 신인 작가들은 고료로 생활하기 힘듭니다. 그럼 직장 다녀야 하지요. 직장 다니면서 소설 쓰기는 아주 힘들잖아요. 직장을 다니지 않고 몇 년 고생해 보면서 문학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시간을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는데 그게 쉽지가 않죠. 부모님 설득하기도 쉽지 않고, 스스로 강박에서 벗어나기도 힘들죠. 친구들은 직장 다니고, 결혼하고 착실히 인생을 꾸려 가는데 자신은 작가이긴 하나 왠지 낙오되는 게 아닌가 하는 강박. 결국 그 시기를 때로는 바보처럼 헤쳐 나가야 해요.

 



   ▶
이서영_ 
이제 소설 이야기로 넘어가 볼게요. 이번에 현대문학상을 받은 「낚시하는 소녀」에서 가난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선생님께선 가난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세요?

 

   ▶ 전성태_ 그런가요? 가난에 대해서 쓰겠다는 생각은 못해 봤는데요. 글쎄, 내가 가난하니까 그런 거 아닐까요. 다달이 살아가야 하는 입장으로 생활하다 보면 굉장히 존재론적인 인간이 되거든요. 어떻게 보면 이 사회에 자기가 붙어사는 것 같은 참담한 심정이 될 때도 많아요. 밀려나지 않고 버티는 자신이 대견하게 느껴질 때도 있고요. 요즘에 88만원 세대니, 하우스푸어니 하는 말도 있지만, 상대적 빈곤도 있을 거고 실재적 빈곤도 있을 거예요. 빈곤 문제는 지금 우리 체제의 최고 모순이죠. 소통보다도 오히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장 실질적이고 절박한 문제죠. 빈곤과 박탈감은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누릴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는 반증이죠. 난 그런 제약들을 스스로 극복해 가는 사람들의 연대하는 방식, 연대의식을 잘 다루고 싶지요.

 



   ▶
이서영_ 
선생님 창작집을 보면, 초기 소설 중에 그림 등을 소재로 실천적인 예술을 다룬 작품이 꽤 있는데, 그런 소재를 선택하신 이유는? 

 

   ▶ 전성태_ 걸개그림에 대해서 쓴 적이 있어요. 두 번째 소설집 『국경을 넘는 일』에 「한국의 그림」이라는 단편이 있어요. 우리의 저항운동에서 나온 독특한 미술 장르인 걸개그림을 소재로 한 소설이지요. 저는 89학번이에요. 1980년대 말에 대학을 다니면서 선배 세대의 학생운동을 목격하고 90년대 넘어가면서 학생운동, 변혁운동이 쇠퇴하는 현장을 목격한 세대죠. 저는 대학 다니면서 집단창작을 하는 문예집단에서 활동했어요. 그 일이 제 청춘이었고, 또 정체성이었어요. 그런데 이제 사회가 변했어요. 운동은 뚜렷하게 저물고,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회의감이 짙어지고, 동구권이 몰락하고, 교정에서도 대열이 흩어졌지요. 이런 변화의 와중에 작가가 됐어요. 저뿐 아니라 그 당시 작가들이 느끼기에 전혀 다른 세계로 전환된 거죠. 180도 전혀 다른 세계로 넘어간 느낌이었어요. 나는 나름대로 그걸 이해하고 납득해야 하는 시간이 필요했어요. 1980년대란 시대가 우리 역사에 어떤 시대였을까? 내 나름대로 정리하고 성찰해야 했죠. 그 고민의 일환으로 「한국의 그림」을 쓰게 되었어요. 목수였던 사내가 어느 날 최루탄에 쓰러진 한 청년의 죽음을 목격하고 화가가 된다, 화가와 목수의 절묘한 조합이 걸개그림이라는 독특한 미술 양식을 탄생시킨다. 이게 80년대의 어떤 상징 같았어요, 개인적 지평과 사회적 지평이 극적으로 만나는 풍경이었어요. 아마도 내가 문학을 통해서 사회적 관심을 담고 있다면 대학에서 틔운 고민이 계속되고 있는 거죠.

 

   ▶ 이서영_  저는 소설을 읽으면서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를 대사들 때문에 종종 당혹스러웠어요. 계속 도시에서 살아서 그런 향토적 어휘들에 익숙지 않은 거죠. 선생님께서는 전남 고흥 출신에다가 형제자매가 육남매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구사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특별히 사투리 공부를 하시는 건가요? 

 

   ▶ 전성태_ 언어적 감수성, 문학적 감수성이 형성되는 시기는 보통 유소년기죠. 저의 경우 고향에서 중학교까지 다녔고, 고등학교라고 해봤자 인근 도시 순천으로 나왔으니 제 언어의 뼈와 살은 다 그쪽에서 만들어진 거죠. 그래서 등단하면서부터 고향의 언어로, 또 고향을 배경으로 소설을 쓰는 것은 자연스러웠어요. 또 제가 오랫동안 할머니와 지내면서 그이의 다채로운 언어의 세계, 즉 방언과 농경적 상상력이 깃든 속담과 비유들, 기담들과 수다들을 풍성하게 겪었어요. 고향 방언은 직접적이지 않고 에두르는 언어인데 그 쓰임새가 문학적이죠. 이런 언어세계에 대해서 전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어요. 혀에 비유하자면, 저는 단어에 대해서 감식이 뛰어난 혀를 가진 느낌. 어떤 단어를 만나면 저 단어의 색깔과 맛은 어때, 하고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고, 어떤 말을 들으면 문학적 쓰임새가 있다는 걸 빨리 잡아챘죠.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사전을 두고 방언과 표준어를 비교해 보고, 또 방언사전을 두고 확인하곤 했어요.

   방언도 표준방언이 있어요. 방언이라는 것도 맥락 없이 형성된 언어가 아니죠. 뿌리를 두고 규칙에 따라 발전한 언어죠. 그것을 벗어난 어느 방언이 더 변화된 것인지 오용한 것인지 표준방언에 빗대어 검토해 보면 알 수 있죠. 또한 이게 어느 지역에서만 한정돼 쓰이는지, 널리 보편적으로 쓰이는지 언어지도가 그려지지요. 예를 들면, 방언 지도를 보면 ‘가위’의 방언은 가새, 가시개, 라고 되어 있어요. 고흥에서는 가시개라고 쓰는데, 아주 가까운 고을 장흥에서는 가새라고 써요. 그런데 오히려 우리 동네에서 먼 경상도에 가면 또 가시개라고 써요. 경상도는 더 먼데 오히려 더 유사하게 써요. 사람의 이동경로에 따라서 언어 유사성이 발견되는 거지요. 방언의 쓰임새를 표준화하기도 하고, 더 적확하게 쓰려고 사전에서 찾는 작업을 했어요. 또 낯선 말을 만나면 용례까지 꼭 찾아보았어요. 말뜻을 아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말이 어떻게 활용되는지가 참 중요하지요. 뜻만 앉혀 놓는다고 말이 되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순우리말, 방언을 압도적으로 입은 문장은 요즘 문장하고 달라요. 어문 구조가 다르지요. 그것 역시 언어감각으로 포착할 수 있어요. 구어체의 감각이랄까요. 내가 의식적으로 했다기보다는 습작기 때부터 문장 하나를 고칠 때도, 또 문장 하나를 쓸 때도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거기에 매달려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 쓴 단어보다 더 적합한 단어가 세상 어딘가에 있다는 생각이 들면 잠이 안 오죠. 이 단어보다 더 맞는 단어가 어디 있을 거야, 지금 이 상황을 더 잘 담는, 내가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세상 어딘가에 있을 거야, 절망감이 들었지요. 그거 때문에 습작기 때 자다가도 다시 일어나고 그랬죠. 그런 과정에서 세부적인 자기 세계, 문체, 스타일 들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또한 계속 변화했어요, 언어가 변하듯이. 제가 방언의 세계, 고향의 세계에서 오랫동안 떨어져 지냈으니까요. 새로운 언어 세계에 몸담고 있으니까요. 작가의 사전은 계속 변하는 거죠.

 

   ▶ 이서영_  제일 주목받았던 작품집이 『늑대』고, 이 작품집은 몽골에서 살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썼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때의 에피소드들이 궁금합니다.

 

   ▶ 전성태_ 소재 측면에서는 당장 몽골이 무대가 되고 그러니까 굉장히 세계가 많이 변한 것 같지만 실상 변한 건 없어요. 다루고 있는 문제의식은 비슷해요. 전작 『국경을 넘는 일』의 연장. 그런 고민을 가지고 몽골을 갔으니까 몽골에서 그런 이야기들이 발견됐던 거죠. 몽골 연작의 변화는 피상적인 거예요.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거나 새로운 작품을 쓰려고 몽골을 간 건 아니었죠. 말 그대로 놀러 간 거고, 쉬러 간 거예요. 쉬러 갔다는 말은 내가 좀 지쳐 있었다, 작가로서 지쳐 있었다는 의미예요. 작가가 지치는 이유는 동어반복 때문이에요. 자기가 계속 같은 말을 한다는 자각은 고통스럽죠. 그게 슬럼프죠. 내가 그 무렵 그런 게 왔었어요. 그런데 몽골에 갔더니, 내가 찾고 있었던 것들이 눈에 보이는 거야. 머리에 구상하는 것과 쓴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거잖아요? 쓴다는 것은, 구체성을 가져야 되죠. 에피소드가 있어야 하고, 에피소드를 발견해야 하고, 에피소드를 만들어야 하죠.

  몽골에 갔을 때 선명한 에피소드들이 많이 발견되었어요. 「코리안 솔저」처럼 몸소 겪은 일도 있고요. 시장에 갔다가 날치기를 당했다든가, PC방에서 부랑자들한테 포위당했다든가, 열쇠를 두고 집을 나와서 슬리퍼 차림으로 고생을 했다든가. 그런 에피소드를 겪으면서 한때 군인으로서 정체성을 호출하는 형국을 맞았죠. 내가 끊임없이 부정하고 싶었던, 한국에서는 부정하고 싶었던 나의 또 다른 정체성이 다른 공간에서는 마치 망령처럼 살아나 그것으로 나를 설명할 수 없는 상황, 그렇게밖에 내 존재를 세울 수 없는 상황. 그런 심리적 국면을 겪으면서 다시 내 존재에 대해서 각성을 하는 거지. 내가 이런 정체성을 가지고 있구나. 한국에서는 발견하지 못했던 정체성을 거기에서는 발견하기도 하고요.

 

   김미주_ 「늑대」는 배경도 많이 주목받았지만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얘기가 많았잖아요. 다인칭 시점이라든가…….

 

   ▶ 전성태_ 소설집 『늑대』에는 여러 단편이 있지만 단편 「늑대」가 제가 제일 쓰고 싶었던 소설이었어요. 몽골에 가서 내가 받은 영감. 몽골이라는 땅, 대지를 보면서 내 나름대로 몽골에 대해 받은 두 가지 이미지가 있었어요. 하나는 자연으로서의 몽골. 사람까지 포함해서 신화적이고 영적인 세계와 삶 자체가 유리되지 않고 밀착되어 있는 느낌. 유목문화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었고요. 뭐랄까요, 몽골 대지는 태초의 시간이 막 열리고 아직 인간과 신이 분리되지 않은 느낌, 자연과 인간이 분리되지 않은 느낌은 몽골의 자연이 주는 경이로움이었어요. 또 하나는 이제 몽골은 사회주의 체제를 팔십 년 동안 유지하다가 시장경제로 옮겨 앉죠. 그리고 이십여 년 동안 근대화가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어요. 그 속도는 우리나라 근대화를 능가하죠. 우리 근대화도 몽골에서 보면 긴 근대화예요. 목자들이 초원에서 말 타고 도시로 들어와 대형 쇼핑몰에서 물건을 사가지고 나갈 때, 한쪽에서는 고층 빌딩이 세워지거나 스마트폰 개통식을 하고 있죠. 그러면서 이 몽골 초원에 지금 와 있는 체제는 엄밀히 말해 신자유주의경제체제죠. 몽골 사회에 진군해 있는 신자유주의라는 풍경. 자본에 의해 끊임없이 재편되는 초원. 이 두 개의 풍경이 강렬했어요. 근데 이건 이미지잖아요. 소설로 담고 싶지만 어떻게 담을 길이 없었어요. 그래서 「늑대」는 돌아와서 썼어요. 오랫동안 그 두 가지 이미지를 담을 길이 없나 찾다가, 제가 발견한 것이 늑대라는 존재였어요. 몽골 인들에게 늑대는 뭐랄까, 양가적인 측면이 있어요. 추악한 동물. 경멸하고, 죽이려고 하고, 추방해 없애려는 동물. 그러나 한편으로는 굉장히 경배하고, 경이롭게 생각하는 동물. 늑대는 몽골 인들에게 이처럼 애증이 교차하는 동물이죠. 야누스 같은 존재죠. 그 늑대라는 이미지에 내가 생각하는 앞선 그 두 가지 몽골 풍경이 포섭되겠다, 그런 생각들이 들었어요. 방금 말한 그런 이미지들을 소설에 앉히다 보니까, 종래의 시점 가지고는 소설 쓰기가 힘들었어요. 1인칭이지만 다중시점을 사용하게 된 거죠.

 

   ▶ 이서영_  말씀하신 대로 몽골은 전자본주의적 사회로 보이지만, 「늑대」에서 보면 실제로 그들은 상당히 신자유주의적 삶의 일부로 살아가고 있잖아요. 자주 쓰시는 탈북민의 경우에도 비슷한 맥락이 읽히는데. 어떤 체제에서 경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 특별한 문학적 관심이 있으신가요?

 

   ▶ 전성태_ 물리적이고 실존적으로 경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추궁 받으며 사는 사람들이 있어요.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다문화가정 2세대들, 탈북자들, 혹은 송두율 교수 같은 지식인들이죠. 그들에게 어느 한 체제를 선택하라는 것은 폭력이죠. 저는 민족이라는 카테고리, 국가라는 카테고리, 작게는 가족이라는 카테고리, 이런 카테고리들은 끊임없이 성찰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카테고리가 견고할수록 소통, 연대, 평화와 충돌을 일으켜요. 나는 매사에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경계인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좀 더 나은 사회를 꿈꾼다면, 모든 문제에 대해 자기 스스로 경계인의 자의식을 기를 필요가 있어요. 완전히 타인이 될 순 없지만, 경계인으로서 스스로를 자각하고 살아갈 순 있어요. 이건 현대적 윤리라고 생각해요. 물리적으로 경계에 서 있는 자들에 대한 관심과 성찰부터 문학적으로는 경계적인 언어 같은 것들까지 추구되어야지요. 배수아 씨나 황정은 씨의 소설쓰기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
이서영_ 
소설이 전반적으로 페이소스가 강하기는 한데, 그런데도 웃을 만한 코드를 하나씩 집어넣으시는 것 같아요.

 

   ▶ 전성태_ 우리가 세계를 발견할 때 가장 어린 나이에 처음 발견하는 건 비극의 세계예요. 그 다음에 발견하는 게 광기. 그 다음에서야 발견하는 게 희극의 세계라고 생각해요. 내 부모 세대들이나 우리의 이웃들이 살아가는 걸 보면 그 사람들의 처지와 상황은 웃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도 그들은 끊임없이 웃으면서 살아가요. 이게 바로 생명성이죠. 그 생명성이 나한테는 언어의 희극적 요소, 낙관적인 세계, 인물의 낙천성으로 옮겨온 것 같아요. 적어도 생명력을 보여주려면 미·추가 같이 들어가야 해요. 생명은 운동이니까요. 운동을 하려면 두 가지 속성이 있어야죠. 저는 여전히 도저한 비극성에 붙들려 있고, 그 위에서 가까스로 희극성을 찾아보려고 하죠.

 

   ▶ 이서영_  인권위에서 낸 『길에서 만난 세상』이라는 르포집 집필에도 참여하셨는데요, 쓰신 꼭지들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어떤 것인가요?

 

   ▶ 전성태_ 일본인 처 꼭지요. 우리에게는 방어적 민족주의가 있습니다. 그게 과해져서, 타 문화에 대해서 과도한 차별적인 시선을 갖곤 해요. 성찰적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어느 부분이 폭력이 되는지 우리가 계속 들여다봐야죠. 그런 측면에서 우리가 놓쳤던 존재가 있다는 게 인상 깊었어요. 징용 간 할아버지가 일본인 여자와 결혼을 해서, 해방 이후 아내들이 따라 들어왔어요. 가해국 국민으로 민족주의가 강한 피해국 나라에 와서 살아가는 피해자이기도 합니다. 민족주의는 사회적 맥락을 추려 가면서 이야기하기 굉장히 어려운 주제지만 한 개인사에 투영하기도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르포작업을 하면서, 함께한 작가 세 사람이 공통적으로 무력증을 느꼈어요. 만나는 분들이 다들 벼랑에 선 분들인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글쓰기밖에 없다’는 안타까움이었죠.

 

   ▶ 이서영_  사회적으로 참여하는 활동도 꽤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작가가 어느 정도까지 사회적 참여를 할 것인가, 정치적 목소리를 낼 것인가에 대한 시선이 다양한데, 스스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주변에선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 전성태_ 저는 학생운동을 하고 있던 시기에 작가가 되었어요. 저는 전위적인 운동가로 살아가는 꿈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작가로서 운동을 하고 싶었고, 문학이 뭔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걸 믿고 싶었어요. 그러면서 문학적으로 운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작가가 됐어요. 작가가 되고 나서는 의문사당한 학생회장의 추모사업회에서 간사로 일하고, 작가회의에서 실무 일을 하는 등 작가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했지요. 난 분노는 많지만 목소리 내는 일을 쑥스러워하는 사람이에요. 정치적 목소리들은 문학적으로 승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스타일이에요. 나는 전위적으로 문학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존경하지만. 또 문학을 지나치게 정치적인 수단으로 활용해선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존중합니다. 자기 존재를 들여다보게 되면 사회를 만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작가란 사회적 고민을 안 할 수가 없어요. 사회에 대해서 발언하는 건 자기를 똑 떼어 놓고 사회를 비판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도 함께 수행하는 거지요. 자기 실존, 자기모순까지도 함께 이야기하는 거죠.

 



   ▶
이서영_ 
최근에 특별히 매력적이라고 느낀 작가가 있으세요?

 

   ▶ 전성태_ 최근 〈문장배달〉과 여러 심사에 참여하면서 많은 소설을 읽을 기회를 가졌어요. 최근 읽은 작품들 중에 황정은 작가가 매력적이었어요. 장편 중에서는 김형수의 『조드』와 은희경의 『태연한 인생』이 독서의 맛을 선사했어요. 서효인 시인하고 김중일 시인 작품도 참 재밌었어요. 최진영, 조해진, 김숨, 권여선의 최근작들도 훌륭했고요.

 

   ▶ 이서영_  작가로서 지향점이 있다면?

 

   ▶ 전성태_ 저는 문학의 포부가 커요. (웃음) 젊었을 때는 짧고 굵게 한 작품이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에는 글을 쓰면서 성장하는 사람이 작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개별 작품들이 성공하든 안 하든 꾸준히 글 쓰는 몸으로 살아가죠. 그 과정들을 착실히 밟아 가면서 스스로 글 쓰는 자로서 경지를 발견하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작가는 글을 쓰면서 한 인간으로서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직업이 아닐까, 그런 가능성을 믿고 싶어요. 작은 책상 위에 이 세계를 올려놓고 같이 아파할 수 있는 사람이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세계의 고통과 공명하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작가라는 직업은 자기를 성장시키기엔 더없이 좋은 직업이죠.

 

   ▶ 이서영_  집필계획을 간단하게 들려주세요.

 

   ▶ 전성태_ 장편을 써야 할 시기가 온 것 같아요. 오래 전부터 장편 3부작을 기획한 게 있어요. 구체적 내용은 영업비밀. 

 

  

   ▶ 이서영_  문장을 읽는, 문장을 배달받아 보실, 읽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해주세요.

 

   ▶ 전성태_ 가능하면 새로 나온 작품들 중에 좀 같이 나누어 봤으면 하는 것들, 특히 힘이 되고 위로할 수 있는 문장들을 찾으려고 해요. 또 문학도의 길을 걷는 사람들은 작가의 입장에서 같이 볼 수 있는 문장들을 찾아서 배달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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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과 가을의 일

[에세이] 산책과 가을의 일 박주영 오랜만에 동네 산책을 했다. 여름이 시작되고는 햇빛이 사라진 밤 산책을 하다가 그나마도 열대야 때문에 멈춘 지 오래되었다. 오늘은 해가 뜨기 전 일어났고 스탠드를 켠 책상에 앉아 소설을 썼다. 어느새 창밖이 밝아지는 걸 보다가 해가 완전히 뜨기 전에 바깥으로 나가 걷기로 했다. 산책은 어슬렁거리며 그냥 걷는 것이지만 소설가의 산책에는 생각이 없을 수 없다.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목적이었다면 달리기를 했을 것이다. 나는 산책과 걷기를 구분해서 다이어리에 기록한다. 산책이 바라보고 생각하며 이동하는 것이라면 걷기는 건강이라는 목적을 가장 염두에 둔 움직임이다. 여름이 아니라면 산책은 주로 오후나 해질 무렵에 한다. 늦게 자고 오전에만 일어나도 뿌듯한 사람이라 일어나자마자 소설을 쓰고 쉴 즈음이 대개 그 시간이기 때문이다. 산책을 하면서 내가 지금까지 쓴 것을 생각하다가 빈틈을 메울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고 다음 장면을 생각하기도 하고 이 소설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고심하기도 한다. 여름 해가 뜨기 전 오래간만에 소설을 생각하며 산책을 한다. 나는 문학 전공도 아니고 소설 쓰기를 배운 적도 없고 주변에 글 쓰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소설가가 된 후 소설가를 만날 기회가 생기면 알고 싶은 것들을 질문하곤 했다. 글쓰기가 잘 안 될 때는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2개의 대답을 기억한다. 한 분은 그냥 걷는다, 라고 답했고 한 분은 안 되어도 앉아서 써야지 어떡해, 라고 했다. 두 분 다 그때 20년 가까이 소설을 거뜬히 써온 분이었다. 나는 2개의 답을 지금껏 생각하고 있고 그게 지금의 나에게는 정답이 되었다. 하지만 정답을 안다고 정답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는 자주 책상 앞에서 벗어나고 걷는 것이 아니라 누워 있는다. 그냥 진짜 누워만 있는데, 요즘은 소설 쓰는 일에 자주 지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또 한 분의 조언이 생각난다. 건강을 챙기고 운동을 해라, 그러지 않으면 장편소설을 쓸 수 없다. 여기의 조건은 ‘나이 들수록’이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등단했고 처음부터 장편소설을 썼던 나는 그 조언이 그때는 크게 와 닿지 않았다. 나는 이미 젊지도 않고 약해 빠졌는데 장편소설을 쓰는 데 그리 힘이 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조언의 참 의미는 어떤 고비마다 왔다. 나이는 한 살씩 먹는 게 아니라 쌓여 있다가 한꺼번에 온다는 걸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부터 손목이 아프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허리가 아프기 시작하고 이제 어깨가 아프다. 남들은 여름휴가를 가는 시기 나는 병원을 다녔다. 의사는 어깨 인대가 손상되었다고 했다. 특정 자세를 취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자세는 하필 내가 반평생을 취해 온 자세이다. 지금도 나는 그 자세이다. 자판을 치고 노트에 글을 쓰려면 취할 수밖에 없는 자세. 그리고 의사는 옆으로 눕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나는 그렇게 누운 자세로 책을 읽었다. 너무 크고 두껍고 무거운 책만 그 자세로 읽을

  • 관리자
  • 2024-10-01
다시 서정을 위해

[에세이] 다시 서정을 위해 권상진 스무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서른이 되기 전에 시인이 되겠다고 주변에 떠들고 다녔던 기억이 아슴하다. 「홀로서기」를 외웠고 「지란지교를 꿈꾸며」를 외웠다. 이생진을 읽고 백창우를 읽고 박노해를 읽었다. 잔잔하게 때로는 웅장하게 가슴을 밀고 들어오는 시편들이 심장을 가로세로로 뛰게 만들었다. 백석과 김수영과 기형도의 이름은 몰랐지만 굳이 그들이 아니어도 충만한 시간들이었다. 시집이 이천 원에서 삼천 원 정도 할 때여서 큰 부담 없이 고를 수 있었고 외출할 때 시집 한 권을 들고 밖을 나서도 아무도 이상하게 쳐다보는 이도 없었다. 오히려 뭇 여성들의 시선이 슬쩍슬쩍 내 턱선을 지나 책장에 닿는 기분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생일이나 기념일에는 으레 서점에 들러 시집을 골랐다.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원태연),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류시화), 『친구가 화장실에 갔을 때』(신진호) 같은 시집을 골라 슬쩍 건네던 날들이 아련하다. 스물이라는, 가라앉을 것 하나 없는 맑은 감정에서 속살거리는 말들을 시인들은 대신 말해 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십 대는 가고 이십 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하고 대학을 쫓겨나 군대를 다녀오고 나니 어느새 아무데도 기댈 수 없는 성인이 되어 있었다. 오래된 가난이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그때부터 가난은 나를 가만히 두지를 않았다. 공장 일을 시작했는데 처음 해보는 노동이란 게 미치도록 좋았다. 종일 몸을 쓰고 땀을 흘리는 일이 알 수 없는 쾌감을 안겨 주었고 월급이라는 보상까지 덤으로 안겨 주었다. 시를 읽고 쓰는 일만큼 일이 재미있었고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도 살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더없이 좋았다. 지쳐 잠들기 전 문득 돌아본 시의 한때는 짧은 여행지의 추억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나의 스물은 급류처럼 흘러갔고 시는 둑 너머에 있어 쉽게 손이 닿지 않았다. 하지만 일과 돈, 그리고 자립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노동은 즐겁고 땀은 향기로웠지만 갑자기 내가 꿈꾸던 삶이 이런 것이었던가 하는 질문이 나를 툭 한 번 치고 갔다. 해지는 풍경만 봐도 맥박이 난동을 부리고 꽃과 낙엽의 표정을 살피면 왠지 모를 눈물이 맺히던 한 시절의 기억이 불현듯 피곤에 지친 등을 흔들어 깨웠다. 시인이 되겠다던 꿈을 무참히 짓밟고 나를 공장 노동자로 내몰았던 대학교 재단 이사장의 말이 떠올랐다. ‘약속은 지키면 좋은 것이고 못 지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던 그의 말. 그가 지키지 않은 약속 때문에 학교에서 쫓겨난 나는 궤도를 이탈해 버린 행성처럼 어둠 속으로 무작정 떠밀려가고 있었다. 막막한 혼돈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던 약속이란 단어가 다시 나를 수습하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서른을 지나갔고 아무도 내게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물어 보는 이는 없었지만 스스로와의 약속은 끝내 지켜주고 싶었다. 그렇게 시가 다시 내게로 왔다. 세월도 변했고 시도 변해

  • 관리자
  • 2024-10-01
과거를 보는 미래 SF

[에세이] 과거를 보는 미래 SF 곽재식 며칠 전 나는 한 행사에서 SF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소개하는 발표를 하나 맡게 되었다. 발표가 다 끝나고 질문 답변 시간이 되었는데 청중 중 한 분이 “SF라면 미래를 생각해 봐야 하는데, 왜 옛날 SF를 소개했느냐?”라고 질문했다. 그날 행사 중에는 답변을 짧게 드렸지만 이 내용은 한번 깊게 따져 볼 만한 재미난 주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한번 해보려고 한다. 명작 SF로 자주 손꼽히는 1970년대 영화로 <>이라는 할리우드 영화가 있다. 찰턴 헤스턴이 주연을 맡아 대형 영화사에서 배급한 그야말로 정통 할리우드 영화인데 그러면서도 비참한 미래의 모습을 예상해서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 결말도 뻔한 할리우드 영화의 행복한 결말이라고 말하기는 매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가기에 눈에 뜨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맨 마지막에 주인공이 외치는 대사는 SF 영화사에서 유명한 대사 순위를 꼽으면 상위권에 자주 오를 만큼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미래는 인구가 너무나 빠르게 늘어났기 때문에 멸망해 가고 있는 세상이다. 인구가 너무나 많은 데 비해 식량과 자원은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굶주리고 모든 물자가 부족해 다들 비참하게 살고 있다. 영화 제목인 “소일렌트 그린”이란 식량이 부족한 세상에서 특별히 개발해 보급 중인 신형 인공 식품을 말한다. 그러므로 <>은 19세기 맬서스의 등장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미래 인류의 멸망 시나리오라고 철석같이 밀었던, 맬서스 함정을 정통으로 다룬 영화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성장한다.”라는 말은 어지간하면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지구는 망한다, 그러니 사람이 많은 것은 해악이다,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은 곧 “사람이 곧 모든 파괴의 근원이며, 사람이 없어져야 지구가 살아난다.”는 생각으로도 자주 이어지기도 한다. 재미난 사실은 이 영화에서 다루는 멸망해 가는 미래가 2022년이라는 점이다. <>은 1973년에 개봉된 영화이므로 이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이란 영화가 제작되던 1972년으로부터 50년 후를 말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이 SF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의 미래라는 시간은, 2024년을 사는 현대의 우리에게는 2년 전의 과거가 되었다. 나는 영화를 보는 과정에서 이렇게 시간의 꼬임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신비롭다. 게다가 요즘 이 영화의 내용을 보다 보면 더욱 중요한 사실도 깨달을 수 있다. 실제 2022년이 인구가 너무 많아 식량 부족으로 멸망하는 시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2020년대는 인구가 너무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구 감소와 초고령화가 문제인 시대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 겪고 있는 문제도 아니다. 한국에서 인구 문제가 워낙 극심하게 나타나

  • 관리자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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