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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마당 연간 최우수상 수상작]산문_나는 유쾌한 구두닦이

  • 작성일 2014-04-01
  • 조회수 1,095

 

[2013년 공모마당 연간 최우수상] 산문

 

 

나는 유쾌한 구두닦이

 

 

남궁용

 

 

 

 

 

    1

 

    내가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오랜만에 늦잠을 잤는데, 밖에서 사람들 두런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는 출타 중이었는데, 함께 잠자리에 들었던 어머니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 후에 밖에서 들어오신 어머니가 아직 잠자리에 들어 있던 우리 4남매를 흔들어 깨웠다. 빨리들 일어나서 밖으로 비켜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밖으로 나가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인부들이 집 안으로 몰려 들어가 가재도구를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몇 가지 있지도 않은 방 안 가구며 이불, 옷가지, 부엌살림이 순식간에 밖으로 옮겨졌다. 인부 중 일부가 지붕 위로 올라가더니 용마름과 삭아서 푸석거리는 짚으로 된 마름들을 걷어내고, 앙상한 갈비뼈처럼 드러난 서까래를 뜯고, 마룻대를 들어냈다. 순식간에 살고 있던 집이 철거되고 있었다. 영문도 모르는 채 떨고 있는 나와 세 동생을 데리고 어머니는 산 너머 마을로 옮겨갔다. 우리가 남에게 빚진 게 있었는데, 빚 대신 집을 뜯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우리는 살던 산골짜기 외딴집에서 외가가 있는 읍 소재지로 옮겨 갔는데, 가지고 나온 것은 양은솥과 이불 한 채밖에 없었다. 출타하신 아버지가 돌아오셨지만 우리는 남의 집 작은방 하나를 겨우 얻어서 여섯 식구가 한 방에서 지내게 되었다. 방이 어떻게나 작았던지, 어른들이 반듯하게 누우면 머리와 발이 벽에 닿았다. 그래도 아직 키가 덜 자란 나는 그런대로 발을 뻗을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게 된 나는 온종일 좁은 방에서 할 일이 없었다. 외가에서 식량을 조금 얻어 왔지만, 살림살이를 다 빼앗긴 처지라, 밥을 해먹고 싶어도 밥과 반찬을 담아 먹을 그릇이 없었다. 우리는 주인집과 같은 부엌을 사용했는데, 딱한 사정을 알게 된 주인집에서 당분간 식기들을 사용하게 해주었다. 가져온 양은솥에 밥을 해두었다가, 주인집이 먼저 밥을 해먹고 나면, 주인집 식기를 설거지한 후 밥과 반찬을 담아 먹었다. 그런데 주인집도 어지간히 가난했던지 투박한 사기그릇들은 금이 가고 이가 빠져서 성한 그릇이 제대로 없었다. 그래도 자기네 한 벌밖에 없는 그릇을 사용하게 해주는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 보내 주신 천사들 같았다.

 

    어렵사리 아침을 먹고 좁은 방에서 뒹굴뒹굴하던 나는 밖으로 나와서 거리를 무작정 걸었다. 조그만 시가지는 끝에서 끝까지 걸어서 10여 분도 채 안 걸리는 거리였다. 몇 번 왔다 갔다 하다가 갈 곳이 없게 된 나는 버스정류장으로 가서 벤치에 앉아 있었는데, 바로 맞은편 벤치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구두를 닦고 있는 소년의 등이 눈에 들어왔다. 무심히 보고 있는데, 그 구두닦이가 상당히 낯익어 보였다. 구두를 다 닦아 주고 난 구두닦이가 구두 통을 챙겨 들고 대합실 밖으로 나가는가 하더니 내 앞으로 와서 머뭇거리다가 딱 멈춰 섰다. 구두도 안 신은 내 앞에 구두닦이가 웬일로 하는데, 눈이 마주치자 우리는 동시에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반가운 표정으로 구두 통을 들지 않은 손을 내밀었는데, 막상 손바닥을 펼치니 구두약으로 새카맣게 물들어 있었다. 그가 차마 내 손을 잡아 쥐지 못하고 망설이듯 거두어들이려는데, 내가 손을 뻗어 그의 구두약 묻은 손을 덥석 움켜쥐었다. 아침 세수도 못 하고 나온 내 손도 그의 손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그는 나를 근처에 있는 붕어빵 파는 포장마차로 데려갔다. 나는 포장마차 옆으로 마련된 걸상에 걸터앉아서, 그가 사주는 붕어빵을 굶주린 악귀처럼 먹어댔다. 그는 내 몰골이며 먹는 모양을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너희 외숙, 지금은 읍장님 아니신가?” 나는 마지막 남은 붕어빵을 집어 들어 입안에 쑤셔 넣으며 대답했다. “왜? 지금도 읍장님이시지.” “……?” 그는 뭔가를 더 묻고 싶은 모양인데, 선뜻 다음 질문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 몰골이 왜 그 모양이고, 학교에서 공부해야 할 시간에 돌아다니고 있느냐는 뜻인 것 같았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을 때 우리 아버지가 폭력에 의한 기물파손으로 교도소에 들어앉게 되어서 잠시 식구들이 흩어지게 되었는데, 그때 나는 읍 소재지에 있는 외가에서 기거하며 읍내 학교로 전학해서 한 학기 동안 학교에 다닌 적이 있었다. 그는 그때 한 반에서 공부한 친구였다. 성씨가 같아서 금방 알아보고 친한 사이가 되었다. 학교가 끝나거나 휴일에는 그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고 놀았는데, 그는 엄마가 없었다. 그는 나이 든 아빠와 단둘이 살았는데, 아빠는 매일 시장에서 일하는 지게꾼이었다. 나이가 든 데다 허리가 굽어서 무거운 짐을 져 나를 수 없어서 수입이 적은 탓인지, 그의 집은 항상 궁기에 찌들어 있었다. 학교가 끝나고 함께 그의 집에 가면 땟국이 말라붙고 우글쭈글 찌그러진 양재기에 조밥이 가득 담겨 있었는데, 나와 같이 나누어 먹으려 물을 많이 부어 밥을 한 탓인지, 낱알이 으깨진 밥이 우무처럼 덩어리로 굳어 있었다. 그래도 둘이 고춧가루도 없이 소금물에만 절였다가 건져낸 무짠지를 걸쳐 가며 맛있게 나누어 먹었다. 가끔 그도 나를 따라서 읍장인 외숙의 집에 왔는데, 그는 절대로 대문 안으로는 들어서려 하지 않았다. 그는 대문 밖에서 고래가 엎드린 듯 웅장한 자태의 기와집과 휘늘어진 용마루며, 불어오는 바람결을 따라 풍경이 딸랑거리는 앞마루, 석류나무와 목련과 향나무가 어우러진 정원, 지붕이 있고 두레박이 걸쳐져 있는 우물 등을 바라보며, 저런 집에서 살고 잠을 잘 수 있는 너는 참 좋겠다며 부러워했었다. 하지만 그 집은 우리 집이 아닌 우리 엄마 큰오빠 집이었다. 나는 외숙의 저택보다는 문간채에 있는 좁은 방인 친구의 집이 좋았다.

 

    친구는 재주가 참 많은 듯했다. 그의 집에 갈 때마다 판지를 접거나 이용해서 장난감들을 만들었는데, 특히 흥미를 끄는 장난감은 환등기였다. 판지를 접어서 조그만 상자 갑을 만들고, 그 한쪽에 네모난 구멍을 뚫어 놓았다. 그다음에는 담뱃갑에서 벗겨낸 셀로판지를 모아서, 연필로 사람 얼굴, 동물, 곤충을 그리는가 하면 풍경화도 그렸다. 그리고 상자 안에 촛불을 켜서 세우고, 창구멍에 그림이 그려진 셀로판지를 가져다 대면, 확대된 그림이 벽 위로 어른거렸다. 이리저리 촛불을 움직여 가며 영사막처럼 벽 위로 상을 비추는데, 정말 영화관에 앉아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 내가 간단한 이야기를 만들고, 그가 이야기를 조각내어 그에 맞는 그림을 그렸는데, 정말 환상적이었다. 더욱 크고 튼튼한 상자 갑을 만들고 셀로판지를 충분히 확보하게 되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연결된 그림으로 그려서 학급의 친구들을 유료 손님으로 맞을 계획까지 세웠다. 그런데 갑자기 나의 아버지가 교도소에서 집행유예로 출소하시는 바람에 우리의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나는 그 당시 집행유예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아버지는 교도소에서 나오실 수 있었고, 아버지는 우리 가족에게 다시 돌아오셨다. 하지만 고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실 수 없었다. 아버지가 부순 집이 교장 사택이었는데, 교장은 국회의원 나갔다가 떨어져서 다시 학교로 돌아온 사람이라고 했다.

 

 

    2

 

    붕어빵을 먹은 다음 우리는 우체국 돌계단에 앉아서 서로 만나지 못한 동안의 일들을 이야기했다. 친구는 나이 든 아버지가 등짐 지는 일을 나가지 못하는 날이 많게 되자, 중학교를 중퇴하고 구두닦이가 되었다고 했다. 구두닦이 일은 열심히만 하면 수입이 괜찮아서, 오히려 제 아버지 수입보다 많을 때도 있다고 했다. 구두 닦는 일이 그렇게 힘든 작업도 아니고, 또 구두를 광나게 닦아 주면, 손님들이 아주 즐거워해서 같이 즐거워질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갑자기 나도 구두닦이가 되고 싶어졌다. 내가 친구에게 구두닦이가 되겠다고 말하자 그는 깜짝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너같이 공부 잘하는 아이는 꼭 진학해서 공부로 성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학생도 아니었고, 당장에 천 원짜리 한 장이 아쉬운 입장이었다. 친구가 내 처지를 이해하고 구두 통을 하나 만들어주었다. 어시장에 가서 생선을 담았던 나무 상자를 얻어다가 톱으로 자르고 망치질해 못을 박더니 제 것 못지않은 쓸 만한 구두 통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너무 새것을 들고 다니면 풋내기라고 손님들이 꺼릴 테니, 구두 통이 조금이라도 낡아 보여야 한다면서, 흑색 구두약을 바른 다음 시멘트 바닥에 슬금슬금 문지르고, 다시 구두 염색약을 군데군데 덧바른 다음 천으로 문질러서 손때가 묻은 것처럼 보이게 해주었다. 그리고 가게에 가서 색깔별 구두약과 구두 염색약, 구둣솔, 라이터 등을 사서 통 속에 넣고, 구두를 광낼 때 쓰는 끈이며 천들을 별도로 준비해 주었다. 그리고 예전에 함께 놀았던 그 문간방의 토방으로 데리고 가서 구두 닦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구두가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어쩔 수 없이 이론으로만 설명해 주었다. 친구는 구두 통을 만들고 구두 닦는 법을 가르쳐주느라고 오후 한 나절을 몽땅 다 썼다. 친구는 읍 소재지에는 다른 구두닦이들이 있는데 솜씨가 서툰 내가 바로 일을 시작하기는 어려우니, 근처 면 소재지에서 일을 시작해 보는 게 좋겠다고 했다. 다음날 버스정류장에서 만나기로 하고 어스름이 깔릴 무렵 우리는 헤어졌다. 구두 통은 친구가 보관했다가 가지고 나오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약속대로 우리는 버스정류장에서 만났다. 마침 구두닦이를 찾는 손님이 있어서 친구가 시범을 한번 보여주겠다고 했다. 손님은 벤치에 앉아서 친구가 들이민 구두 통 위에 한쪽 발을 얹었다. 친구는 큰 솔로 구두에 묻은 먼지와 흙을 가볍게 털어낸 다음, 구두 굽 부분은 따로 준비해 둔 칫솔을 써서 절어 붙은 흙까지 털어냈다. 다음은 솔에 구두약을 발라 구두 굽에 바른 다음, 구두에는 또 다른 솔을 써서 가볍게 구두약을 발랐다. 다음에는 두 손가락에 탄력포를 팽팽하게 당겨서 말아 쥔 다음, 구두 가죽 위를 가볍게 문질렀다. 그리고 다시 반들반들 빛나는 긴 끈을 끄집어내더니 양손으로 당겨 쥐고 구두 콧등에서부터 옆으로 뒤로 옮겨 가며 “치륵치륵” 문질렀다. 다음에 다시 구두약을 손에 쥐더니 이번에는 맨손가락으로 구두약을 살짝살짝 찍어 가며 구두 표면에 발랐다. 그런데 바로 그 부분이 내 눈에는 신기에 가깝게 보였다. “쿵딱쿵딱” 박자에 맞춰서 리드미컬하게, 간간이 침을 “칙칙” 뱉어 가며, 손끝으로 드럼을 두드리듯이, 구두와 구두약 갑을 오가며 약을 찍어 발랐다. 때때로 바르는 부위를 옮길 때는 구두약 갑을 슬쩍 돌려 밑을 “틱” 치고 한 템포 쉰 다음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바르기가 다 끝나자 이번에는 기리라고 하는 낭창낭창하고 긴 천으로, 가볍게 천의 끝에서 끝까지 비벼지도록 “싸악싸악” 문질렀다. 천이 지나갈 때마다 광채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맨 마지막에는 기지라고 하는 모직포로 마무리했다. 얼굴이 비칠 정도로 광택이 났다. 그가 구둣솔로 구두 통을 탕탕 두드리자 손님이 알아듣고 구두를 내려 디뎠다. 손님은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구두를 이리저리 비춰 보더니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서 주었다. 하지만 곰곰이 더듬어 생각하니 그렇다는 것이지, 그 당시는 순서가 뒤섞이어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제일 걱정되는 일은 구두에 침을 뱉는 일인데, 친구는 숙달되기 전까지는 구두약 뚜껑에 물을 담아서 사용하라고 일러주었다.

 

    나는 친구의 배웅을 받고 면 소재지로 나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아침 시간이라 버스 안에 손님은 많지 않았지만, 모두가 나를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나는 버스 뒤쪽으로 가서 자리에 앉은 다음 주머니 속에 넣어온 책보를 꺼내서 구두 통을 쌌다. 버스가 10여 분 남짓 달리자, 친구가 작업 장소로 일러준 면 소재지에 도착했다. 나는 책보로 싼 구두 통을 들고 버스에서 내렸다. 시가지가 원체 작아서 버스정거장도 따로 건물이 없었고, 도로 옆으로 조그마한 공터가 간이 정거장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나는 보자기로 싼 구두 통을 길바닥에 내려놓고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책보를 끄르고 구두 통을 꺼낸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 왠지 창피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보자기로 싼 구두 통을 들고 거리를 따라서 걸어갔다. 따로 갈 곳이 있는 사람처럼 앞만 보고 걸었다. 거리를 끝까지 걸어가자 오일장이 설 수 있도록 양철 지붕의 간이 건물들이 지어져 있었다. 시장통을 지나자 논밭을 가로지르는 신작로였는데, 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초등학교 건물과 운동장이 보였다. 3월 말, 일요일의 텅 빈 학교 운동장은 잎사귀를 떨군 채, 앙상한 가지의 플라타너스들만 쓸쓸하게 햇볕을 받고 있었다. 나는 운동장 가의 돌층계에 구두 통을 내려놓고 걸터앉았다. 나는 그 돌층계에 앉아서 오전 시간을 다 보내고, 점심은 거른 채 오후까지 보냈다.

 

    해가 약간 기울어진 후에야 나는 돌층계에서 일어나서 보자기에 싼 구두 통을 들고 걸어왔던 거리를 다시 거슬러 올라가서 간이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가 탔다. 읍내 정류장으로 다시 돌아와 버스에서 내렸다. 대합실로 들어서자 친구가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알아보고 다가왔다. 반갑지만 궁금해 하는 표정으로 다가왔던 친구는 보자기로 싼 구두 통을 들고 서 있는 나를 보자 금세 실망스러운 표정이 되는가 하더니 바로 평온을 되찾은 듯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쉽지 않지?” 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는 나를 대합실 구석진 곳으로 데려가서 나란히 벤치에 앉았다. 그가 제 주머니 속을 뒤져 부스럭부스럭 뭔가를 꺼냈는데, 구겨진 천 원짜리 지폐들이었다. 그는 그 지폐들을 하나하나 펴서 가지런하게 모아서 세어 본 다음, 절반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열 장은 넘는 것 같았다. 그때는 구두 한 켤레 닦는 삯이 천 원이었다. 하루 동안 번 돈의 절반을 나에게 넘겨준 듯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돈을 받아 들고 친구와 헤어져 대합실을 나왔다.

 

 

    3

 

    다음날 아침에도, 나는 보자기로 싼 구두 통을 들고 정거장으로 나갔다. 나는 친구를 만나고 싶지 않아 대합실 밖 건물 모퉁이에 서 있다가 면 소재지로 가는 버스가 오자 바로 올라탔다. 시가지를 벗어난 버스가 들판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추수를 끝내고 비어 있는 들판 위로 한가롭게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돌고 있는 차창 밖 들판 풍경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세상을 살아가며 남을 속이거나 훔치지 않는다면 부끄러울 일은 없는 것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심호흡을 몇 번 하자 마음이 평온해졌다. 오늘따라 버스는 지나가는 마을마다 멈춰 서더니 광주리나 함지박에 보따리를 담은 시골 아줌마들이 많이 탔다. 알고 보니 오일장이 서는 날이었다. 버스 안은 이내 활기를 띠고 복작거렸다. 사람으로 가득 찬 버스 안에서 아무도 나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나는 과감하게 구두 통을 싸고 있는 보자기를 풀었다.

 

    버스가 면 소재지 간이 정거장에 도착하자 구두 통을 들고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자꾸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길 건너편 철물점 앞에서 한 아저씨가 나를 손짓으로 부르고 있었다. 핫바지 발목을 대님으로 묶고 구두를 받쳐 신은 시골 아저씨였다. 시골 아저씨는 철물점 앞 평상에 걸터앉아서 나에게 구두를 닦도록 했다. 막상 손님이 구두 통 위에 구두 신은 발을 얹어 놓자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느낌이었다. 도대체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얼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바쁘니까 대충 털고 닦아!” 시골 아저씨 재촉하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지, 털기부터 시작하는 거야. 나는 가장 큰 구둣솔을 꺼내서 먼지와 흙을 털어내고, 구두 굽에 달라붙은 진흙은 칫솔을 꺼내서 문질렀다. 그다음부터는 생각이 술술 풀렸다. 작고 털이 빳빳한 솔로 구두약을 찍어 굽도리 먼저 바르고, 다음은 구두 전체에 싹싹 비벼 가며 구두약을 고르게 발랐다. 열심히 공부한 다음에 학교 교실 책상 앞에서 시험 문제를 풀고 앉아 있는 기분마저 들었다. 순서를 제대로 지켜 가며 닦았는지 딱히 자신은 없었지만, 나는 모직포로 마지막 손질까지 했다. 구두는 제법 깨끗해졌는데 이상하게 광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시골 아저씨는 별 불평 없이 구두 닦은 삯을 치렀다.

 

    구두 통을 들고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 또 구두닦이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바쁜 와중에 갑자기 현진건 님의 ‘운수 좋은 날’이 생각나는 것은 웬일? 갑자기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부르는 곳으로 밀창을 열고 들어가니 당구장이었다. 비교적 젊게 보이는 청년들 서넛이 어울려서 당구를 치고 있었는데, 벽에 기대어 놓은 소파에 걸터앉은 신사가 나를 턱짓으로 불렀다. 신사는 내가 가져다 놓은 구두 통에 발을 얹었는데, 구두가 너무 깨끗해서 왜 닦아야 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눈앞에 보이는 바짓가랑이는 주름이 칼날처럼 섰는데 보드레한 모직 천은 뽀얗게 잔털을 세우고 있었다. 시선을 조금 들자 꺾어 세운 무릎 위로 팔을 걸치고 있었는데, 하얀 와이셔츠 소매가 눈부시게 보였다. 구두 상태가 어떻게 되었든, 순서는 제대로 밟아서 닦아야 할 것이다. 나는 큰 솔을 꺼내어 먼지를 털고 작은 솔로 구두 굽을 닦을 때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구두약을 한 덤벵이 찍어서 구두코에 쓰윽 문지르자 신사가 깜짝 놀라며 구둣발을 뒤로 뽑아냈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당구를 치던 사람들까지 모두 동작을 멈추고 내 구둣솔을 바라보았다. 나는 뒤로 뽑아내 엉거주춤 딛고 있는 신사의 구두 위에 과감하게 구두약을 처바르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구두약을 처바르냐니까?”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저는 양심적인 사람입니다.” 불쑥 튀어나온 너무 뜻밖의 대답에 나 자신도 놀랐다. 잠시 침묵, 그리고 당구봉을 들고 있는 누군가가 갑자기 폭소를 터트렸다. 이왕 엎질러진 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뜻밖에 마음이 편해지고 긴장이 풀렸다. 웃음소리와 함께 당구를 치던 사람들은 구두 통 위에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당구를 치기 시작했고, 평정심을 되찾은 듯 신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얘, 너 구두 처음 닦아 보는 거지?” 나는 동작을 멈추고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구둣솔 이리 주어 봐!” 신사는 내 손에서 구둣솔을 넘겨받은 다음 직접 쓰윽쓰윽 문질렀다. 구두 통에서 천 조각을 하나 꺼내어 구두코를 문질러 광택을 살린 다음, 구두 통에서 발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자, 됐다. 얼마지?” 구두 닦은 삯을 묻는 모양이었다. “괜찮습니다. 구두도 닦지 않았는데요, 뭐.” 나는 대답했다. 그러자 신사는 주머니에서 2천 원을 꺼내서 주었다. 나는 그 돈을 차마 받지 못하고 망설이는데, 그가 내 손아귀에 돈을 쥐어주었다. “열심히 사는 거야 학생!” 그가 웃음 띤 표정으로 내가 입고 있는 윗옷의 단추들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나는 당구장을 나오며 그가 왜 나에게 학생이라 부르며 친절하게 대해 주었는지 문득 깨달았다. 나는 중학교 때 입던 옷이 다 해어져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촌형의 교복을 얻어 입었는데, 그 교복 단추에 학교 표지가 찍혀 있었다. 그 학교는 도내 이름 있는 명문 고등학교였다. 하지만 나는 그 정도의 학교 이름으로 사람들의 대우가 달라지는 것에 놀랐다. 그런데 나는 그 학교보다도 더 유명한, 도내 제일의 명문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했었지 않는가? 하지만 무슨 소용 있겠는가? 나는 이제 더는 학생이 아니었다.

 

    그 날은 온종일 찾는 손님이 많았다. 이발관에서도 부르고, 요릿집에서도 불렀다. 오일장 터에서도 몇 켤레 닦았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나는 제법 두둑해진 주머니로 버스에 올라탈 수 있었다. 읍내로 들어와 버스에서 내리는데, 맞은편 잡화 가게에서 구두닦이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부르는 곳으로 가보니, 나보다 서너 살쯤 더 먹어 보이는 아가씨가 혼자 가게를 보고 있었다. 얼굴이 둥그스름하고 갈래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상앗빛 스웨터를 입고 있는 아가씨의 얼굴이 달빛처럼 하얗게 보였다. 아가씨는 나에게 백구두도 닦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닦을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아가씨는 내가 입고 있는 교복과 단추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방긋 웃었다. 오늘은 이미 날이 저물었으니 다음에 한번 들러 달라고 했다. 진열장 위에 펼쳐 놓은 책이 보였다. 꽤 두꺼워 보이는데 한자와 영어가 섞여 인쇄되어 있었다. 그녀가 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는 이미 어둠이 깔렸는데, 검푸르게 엎드린 산 위로 둥실 보름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마알간 얼굴이 금방 가게에서 만나고 온 아가씨를 닮았다는 생각만 들었다.

 

    구두닦이도 꽤 괜찮은 직업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두 통 하나만 들고 나가면 하루 벌이가 쏠쏠할 것 같았다. 이제 친구처럼 솜씨 있게 구두만 닦을 수 있다면 거칠 것이 무엇 있겠는가? 당구장에 가서 신사 구두도 반짝반짝 광나게 닦아 주고, 달님 같은 아가씨 백구두도 닦아 주고, 그리고 밤에는 공부를 하는 거다. 까짓것 학교에 가서 책상 앞에 앉아야만 공부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공부는 혼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남들은 돈을 가져다 바치고 공부하는데, 나는 돈을 벌어 가면서 공부하는 것이다. 구두 통 속에 책을 넣어 가지고 다니면, 손님을 기다리는 사이에도 지루하지 않게 공부도 할 수 있고, 이거 세상에 구두닦이만큼 실속 있는 직업도 몇 안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구두 닦는 기술만 습득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 열심히 배우고 닦아서 훌륭한 구두닦이가 되어 보는 것이다. 며칠만 열심히 벌면 친구에게 신세 진 돈도 갚아 줄 수 있을 것이다. 내 하늘에도 비둘기 떼가 날아오르고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금세 꽃봉오리들이 터지고 있는 소리가 들려올 것 같은 이른 봄밤이었다.

 

 

 

< 수상소감 >

   ‘나는 유쾌한 구두닦이’는 제 소년 시절의 아팠지만 행복했던 기억을 쓴 글입니다. 역경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일어서서 희망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던 이야기입니다. 그때는 너나없이 어렵던 시절이었는데도 기꺼이 힘이 되어 주던 이웃들이 있었습니다. 끼니마다 사용하는 제 식구의 소중한 밥그릇을 빌려 주던 아주머니, 구두통을 만들어 주고 하루 번 돈의 절반을 뚝 떼어 건네주던 친구, 내 서툰 솜씨 탓으로 짝짝이가 된 구두를 신고도 흔쾌히 두 배의 구두 닦은 삯을 지급하던 당구장의 멋쟁이 신사,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 내 젊은 시절 추억 속의 고마운 분들입니다.
   ‘문장’에서도 훌륭한 작가님들을 만난 덕분에, 새롭게 힘을 충전할 수 있었습니다. 창작광장에 올린 제 글들을 읽고 정성껏 지도 조언해 주시며 분에 넘치는 격려의 말씀까지 남겨 주시던 심사 위원 김태형 시인님, 심사 위원 오창은 문학평론가님, 사이버문학광장 정대훈 담당자님, 감사합니다.
   고마움 잊지 않고 마음에 새겨, 더욱 좋아진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남궁용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글이 쓰고 싶어서 정년보다 11년이나 빨리 명예퇴직했습니다. 그런데 손주들이 같이 놀아 달라고 하네요. 요새는 손주들을 돌보면서 그들과 함께 보내는 일상을 소재로 산문과 시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조금만 더 자라서 시간이 허락하게 되면, 본격적으로 글쓰기에 몰두하고 싶습니다.

 

 

 

   《문장웹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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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에서 쓴 일기

[에세이] 육지에서 쓴 일기 최진영 20240528 4박 5일 동안 육지에서 여러 일정이 있어 오늘 제주에서 서울로 왔다. 앞으로 며칠간 약속과 약속 사이, 출발지와 도착지 사이 시간이 날 때마다 이 창을 열고 단상을 써보려고 한다. Are you checking in? pm04:45. 여긴 충무로의 호텔. 3년 전 제주로 이사 간 뒤 처음으로 서울에 일이 있어 올라왔을 때 숙박한 후 매번 이 호텔만 이용하고 있다. 경기, 인천 지역에서 저녁 행사를 해도 근방 호텔을 잡지 않고 여기로 온다. 새로운 호텔을 검색하고 선택하는 게 번거로워서. 합리적인 위치나 가격을 따지려다가 검색 지옥에 빠져서 몇 시간을 고민한 뒤 결국 이 호텔을 예약했던 경험으로 깨달은 바가 있다. 시간이 돈이다. 더 저렴한 호텔을 찾으려 애쓰지 말고 검색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줄이자. 점심시간 무렵 충무로 일대 분위기는 조금 묘하다.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거리를 걷는 외국인들과 점심 먹으러 나온 직장인들이 뒤섞이는 거리. 라디오 주파수를 돌리듯 여러 나라의 언어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서울역, 명동, 한옥마을, 남산, 종로가 가까운 곳이어서 외국인 관광객이 정말 많다. 올 때마다 느끼지만 호텔 투숙객 중 한국인은 나뿐인 것 같다. 한 달에 두어 번은 와서 2박 이상 하니까 나름 단골이랄 수도 있는데 프런트 직원들은 매번 나를 처음 본 손님처럼 대한다(호텔의 특성이겠지?). 체크인할 때도 내게 영어로 말을 건넨다. “give me your passport.” 그럼 나는 “제 이름은 최진영입니다”라고 한국어로 대답한다. 성공한 인생 오늘 아침 9시쯤 택배 문제 때문에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는 전화를 받자마자 놀란 목소리로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느냐”고 물었다. 내 용건에 개의치 않고 엄마는 거듭 물었다. 전화를 끊고 뿌듯해서 신나게 웃었다. 내 나이 이제 마흔이 넘었는데 아침 9시에 엄마에게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느냐”는 말을 들을 수 있다니, 이번 생은 성공한 것 같아서. 그건 바로 내 투쟁의 결과다. 거의 20년을 프리랜서로 살면서 남들 다 출근하는 시간에도 ‘성인 평균 적정 수면시간’을 사수하며 꾸준히 늦게 일어나는 생활양식을 차곡차곡 쌓아 온 결과 마침내 엄마도 나의 생활 패턴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아침 9시에 전화하면 깜짝 놀라는 것이다. 나는 이런 게 진정한 성공 같다. 긴장감 저녁에 북토크를 할 예정이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거나 낭독할 때는 별로 긴장하지 않는 편이다. 내가 긴장하는 순간은 따로 있다. 예를 들면 비행기 탈 때. 기내 짐칸에 캐리어를 올리다가 무거워서 또는 실수로 떨어트려서 누군가를 다치게 할까 봐 매번 긴장한다.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걸 알지만 식은땀이 난다. 캐리어를 끌고 에스컬레이터 탈 때도 마찬가지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넘어지거나 캐리어를 놓치는 구체적 상상에 시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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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제이크 레빈 소개 거의 12년 동안 나는 한국 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지난해부터 강의하는 교사의 내면적 생활과 관련된 일기와 같은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외국인 교수로서 처음 강의를 시작했을 때 모든 것이 낯설고 이방인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한국 문화에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교수의 삶은 익숙하지 않다고 믿는다. 학생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고 다른 교수의 마음도 이해하기 어렵다. 다른 강의실에 들어갈 때마다 새로운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이전에 만나지 못했던 민족을 만나는 것 같이 나는 죽을 때까지 방랑자처럼 매일 새로운 것을 경험한다. 학교에서는 현실에 경험한 것이 꿈꾸는 것 같고 꿈꾸는 것이 더 현실처럼 느껴지듯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가끔은 사라진다. 이 산문은 시나 소설이 아니고 현실의 기록도 아닌 교사로서의 삶의 내면적 반응이다. 교사는 인간이다. 가끔 사회가 인문대 교사의 인간중심주의를 억압한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의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계산하지만 인문학과 시의 영향력은 계산될 수 없는 가치다. 인간중심주의 가치를 점점 찾기 힘든 사회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문화를 배워야 한다. 이 모순적인 긴장의 환경에 존재해야 한다. 학교의 목적은 타인의 인간성을 인정하는 것에 있다. 이 산문은 한 인간의 존재하는 기록이다.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이라는 제목은 완전한 이해가 불가한 타인의 인간성을 발견하는 것에서 왔다. 이 기록은 내 개인적 경험과 전해 들은 동료 교사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하였으며 영어로 작성한 문장을 나의 소중한 학생 김혜인이 나와 함께 번역하였다. 지우개 머리 어떤 날 나는 대답하기 위해 여기 있고, 어떤 날 나는 오직 듣기 위해 여기 있다. “질문 있어?” 많은 학생들이 질문의 형태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그다지 어려울 것 없는 예술을 배웠다. 그런 질문에 대답하는 유일한 방법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질문자가 자신의 질문에 답변하는 동안 사용감 있는 지우개처럼 커피를 홀짝이며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것을 느껴 보라. 학생들의 목소리는 배경소리가 되어 가다가, 불현듯 보이스 오버. 지우개는 부러지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얼룩을 견딜 수 있을까? 숭고한 느낌 지난 몇 주간, 를 듣는 학생들은 책상 아래 숨어 있었다. “교수님, 저희는 불확실성에 머물고 있어요.” 그들은 말한다. 일정 기간 동안 불확실성에 머문 뒤, 한 학생이 책상 아래서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저는 숭고한 느낌을 얻었어요.” 그들이 말한다. “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압도당해 죽음이 무섭고 두려워요.” “이제 제 핸드폰 돌려주시겠어요?” 정적. 학생이 나를 응시한다. 정적. 나는 천천히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학생을 응시한다. 흰 두루미 “주말 잘 보냈니?&r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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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김용언 미스터리 장르를 좋아하고, 열심히 읽고, 그에 관한 잡지를 만들고, 또 가끔은 관련 공모전 심사를 보면서 언제나 느끼는 바가 있다. 한국에서 미스터리 장르에 대한 이해도는 여전히 심각하게 척박하다는 점이다. 가장 모순되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은 ‘장르 문학’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다. ‘(그냥) 문학’1)의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소설들은 굳이 ‘장르 문학’이라고 불린다. SF, 판타지, 미스터리/스릴러, 로맨스, 공포, 무협 등의 꼬리표가 붙고 낱낱이 분류되며 ‘문학은 문학이지만 그냥 문학이라고 부르기보단 그 안의 장르로 명명되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장르 문학에 속하지 않는 작품은 그냥 문학이 아니라 ‘비장르 문학’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아니면 순문학 역시 일종의 장르임을 인정하면서 모든 작품을 ‘장르 문학’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 아닐까? 예전 한국 문단에서는 ‘순(純)’이라는 단어가 참여 문학/민중 문학 등의 대립항처럼 불렸다고 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참여 문학/민중 문학도 ‘그냥’ 문학에 포함된 것 같다. 아무튼 거칠게 말해서 ‘장르’를 사용하지 않고 인간과 현실 자체에 집중하는 소설을 ‘그냥’ 문학으로 호명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장르’로 호명되는 특정한 이야기들에는 그 장르가 만들어지게 된 역사가 있고 또 그 안에서 통용되는 특정한 규칙이 존재한다. 그런 약속된 구조와 규칙을 이용해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고 해서, 그 결과물이 ‘그냥’ 문학으로 불릴 수 없고 장르 문학으로만 불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장르 문학도 문학임을 인정하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그건 너무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굳이 받아들여 달라고 애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 장르 문학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불편해지는 순간들이 자꾸 찾아온다. 이를테면 한국 작가의 소설이 해외로 번역되었을 때 현지 리뷰들을 찾아보면, 스릴러/미스터리/공포 등의 명칭을 명확하게 부여하면서 소개한다. 한국에서는 기존 등단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할 때 ‘추리적 기법을 활용한’ 또는 ‘경계를 넘어선 상상력을 발휘한’ 등의 애매모호한 문구로 시작할 때가 많은데, 해외에서는 자신들에게는 낯선 작가의 번역 작품의 특성을 단번에 설명하기 위해 ‘이것은 스릴러다’ 또는 ‘이것은 공포소설이다’라고 알려준 다음 그 작품의 특성이 어떤 점에서 새롭고 멋진지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장르 문학과 장르 아닌 ‘그냥&r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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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짠하면서도 마음이 따뜻해지네요...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2014-04-08 16:2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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