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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인터뷰 나는 왜_황정은 소설가편]나는 왜 서사에 리듬을 입히는가?

  • 작성일 2014-12-08
  • 조회수 9,150

 

연속기획 공개인터뷰 _ 나는 왜?(제8회)

 

 

나는 왜 서사에 리듬을 입히는가?

- 소설가 황정은 편

 

 

정리 : 강지혜(시인)

 

 

 

    한 번 손을 대면 좀처럼 끊을 수 없는 소설이 있습니다. 길이는 별로 중요치 않습니다. 짧거나, 길거나 일단 첫 페이지를 펼치는 순간. 기묘하지만 아름답고, 그리고 힘찬. 그 리듬에 우리는 몸을 맡기게 됩니다.
    리듬은 억지로 만든다고 해서 쉽게 생성되는 것이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딘가에서, 누군가로부터 퍼진 박동 같은 것이 우리의 어떤 부위를 톡톡톡 건들이면서부터, 아주 자연스럽게 시작되는 것이죠. 오늘은 최근 『계속해보겠습니다』라는 장편소설을 출간한 황정은 작가와 함께 소설의 리듬을 타볼까 합니다. 자 그럼, 시작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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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하고 싶은 게 소설쓰기였으니까

 

    ▶ 오창은(이하 오) : 원래 이 인터뷰는 딱 10명만 모시는 행사인데요. 오늘은 10명보다 훨씬 많은 분들이 참가해주셨습니다. 그만큼 황정은 작가에 대한 여러분의 관심이 대단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네요. 황정은 작가님 인사 부탁드립니다.

 

    ▶ 황정은(이하 황) : 반갑습니다.

 

    ▶ 오 : ‘나는 왜’ 공개인터뷰는 여기 앉아계신 분들과 작가와 매우 밀착된 대화의 시간을 갖는 프로그램입니다. 그래서 참여 독자가 10명이라는 것을 강조했는데요. 오늘 거의 30여명이 오셨습니다. 보다 많은 대화의 기회가 더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황 작가님, 2005년 등단하셨는데요. 일반적으로 등단하기가 쉽지 않다고 얘기하잖아요. 등단 즈음에 상황을 기억하시나요? 당시에는 어떤 마음이었나요?

 

    ▶ 황 : 저는 등단하기 전에 ‘소설을 쓰겠다’고 생각한 기간이 그다지 길지 않았고요. 건강이 좋지 않아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는데 건강해지고 나니 뭐든 배우고 싶더라고요. 내신 성적이 좋지 않아서 실기 비율이 높은 과목을 찾아보았고 그게 글쓰기였어요. 등단한 해엔 어떤 회사에서 1년째 일하고 있었는데 1년 내내 읽지도 쓰지도 못하고 지냈어요. 이러다가는 아무것도 못 쓰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고 신춘문예 마감을 40일 정도 앞둔 때 회사를 그만두고 단편을 썼어요.

 

    ▶ 오 : 그렇다면 왜 ‘소설을 쓰지 못하면 안 되겠다’ 생각하셨고, 왜 ‘소설’을 선택해야 했는지 궁금해지는데요. 40일 동안 집중적인 시간을 투자했을 만큼 절박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 황 : 가장 하고 싶은 게 소설쓰기였으니까. 저는 출퇴근하며 소설 쓰는 게 잘 되지 않더라고요. 쓰고 싶은데 쓸 수 없으니까 바쁘지 않을 때는 근무 중에 멍하니 키보드를 두드렸어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문장을 엄청나게 빠른 타수로. 나중에 들으니까 “쟤는 매일 뭘 저렇게 열심히 쓰고 있는 거야? 타자할 게 그렇게 많아?” 그런 불평이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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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풉풉풉풉, 천진난만하게 쓴다는 것

 

    ▶ 오 : 등단작인 「마더」는 상당히 그로테스크하고 폭력적인 형태가 표현된 작품입니다. 내면의 폭력성이기도 하고, 외부적인 폭력성이기도 하고, 자기파괴적인 형태이기도 하죠. 그런 것이 황 작가님의 일종의 문학적 에너지기도 합니다. 이런 에너지가 어디서 나오나 생각했었는데요. 등단소감에 이런 말을 하셨더라고요. “고민은 있되 소통은 없는 적막한 공간에 서로의 눈이 멋쩍게나마 마주치는 순간 하나 만들고 싶었다” 라고요. 그래서 그런지 대단히 폭력적인 상태 속에서 나타나는 조그만 연대감 또는 위로감이 더 의미 있게 꽃피워지는 느낌입니다. 초창기 작품인 「마더」, 「소년」 등이 이런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들인데요. 「마더」와 「소년」은 어떻게 구상된 소설인가요?

 

    ▶ 황 : 등단작으로 발표된 소설이 「마더」이고 그 다음해 현대문학 4월호에 발표된 소설이 「소년」인데요. 사실 「소년」이 먼저 집필된 소설이에요. 두 작품은 합평 수업에 참가할 당시 제가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소설의 꼴’대로 써본 소설이고요. 이 두 작품을 집필할 때 좁은 집에서 가족들과 살았는데요. 항상 새벽에 등 뒤를 의식하면서 썼던 기억이 나요. 그러다보니 신경이 곤두선 상태로 소설을 썼고요.

 

    ▶ 오 : 소설에 대한 합평을 하셨지만, 황 작가님은 문창과나 국문과, 외국문학 전공, 문학 관련 대학원 등과 같은 어떤 제도적인 트레이닝을 받지 않고 등단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황정은 작가는 일종의 제도로부터 자유롭게 등단을 했다는 거죠. 그래서 훨씬 더 자기 문학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지지 않았나 생각 해봤는데요.

 

    ▶ 황 : 저는 제가 제도 바깥에 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여기가 바깥이구나, 안이구나’ 이런 생각을 해본 적도 없고요. 천진난만하게 내가 쓰고 싶은 거, 쓸 수 있는 소설을 그때 그때 써왔고요.

 

    ▶ 오 : 별로 의식하지 않을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도 용기에요. 그런 부분에선 황 작가님은 용기 있는 선택을 해 오신 거죠. 별로 의식하지 않고 글을 쓴다는 것, 생각보다 어려워요. 등단하는 과정 속에서도 어렵지만, 등단해서 문단 내에서 활동했을 때도 대단히 어려운데요. 대학이나 선생들과의 관계, 문학적 경향과의 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 좋은 작품을 쓰는데 큰 힘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 황 : 저는 그냥 제 천진난만함에 만족하고요,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지만 그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백지 앞에서는 물론 용기가 필요하죠.

 

    ▶ 오 : 「마더」와 「소년」 다음에 발표된 작품이 「문」과 「모자」인데요. 「문」과 「모자」에서 일종에 비약적인 전환이 보여 지는데요. 특히 「모자」는 이야기가 많이 되었었죠?

 

    ▶ 황 : 네, 이상하다고. (웃음) ‘아버지가 왜 모자가 되지? 해석할 수 없다’ 이런 얘기 들었던 것 같네요.

 

    ▶ 오 : 그 때 평단에서는 ‘환상성’을 다시 의미화하면서 소설에서의 환상성이 무엇인가 하는 부분에서 이야기가 많이 됐었죠. 새로운 형태의 전환을 가진 작품으로 「모자」를 이야기하는데요. 「마더」와 「소년」과 같은 작품에서 「문」, 「모자」로 넘어오는 동안 어떤 전환이 있었나요?

 

    ▶ 황 : 사실 「모자」부터 달라진 건 아니고요. 그 사이에 제가 「무지개풀」이라는 단편을 썼어요. 작품에 ‘풉’이라는 글자가 계속해서 등장해요. 쉼표도 없이 계속 등장을 하는데 그 단편을 쓰면서 제가 계속 웃고 있더라고요. 그게 너무 신선한 경험이었어요. 소설을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하고 생각했죠. 그 뒤부터 쓰고 싶은 대로 써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문」도 쓰고, 「모자」도 쓰고…… 그랬죠. 어렸을 때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서 이런 저런 공상을 할 때가 많았고, 그래서 본래 체질에 가깝게 쓰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 오 : 어렸을 때 했던 공상에는 어떤 게 있어요?

 

    ▶ 황 : 민망해서 말할 수가 없는 공상들? 다들 하지 않나요? 이상한 공상? (웃음)

 

    ▶ 오 : 혼자 있는 경우가 많았나요?

 

    ▶ 황 : 네, 저는 혼자 많이 놀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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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우리의 일상인 ‘보이지 않는 세계’

 

    ▶ 오 : 이야기를 들으니까 「무지개풀」을 쓰면서 웃었다는 게 뭔지 느낌이 오네요. ‘풉풉풉’하고 웃었다는 게 글 쓰는 태도의 전환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 재미있어요. 「마더」와 「소년」, 「문」과 「모자」사이의 전환과 더불어 『백의 그림자』에서도 또 다른 전환이 느껴지는데요. 이 작품이 의미가 있는 이유는 앞의 작품들이 갖고 있던 세계와는 또 다른 도약이고 관심의 영역에 확장이라는 측면입니다. 거기에는 ‘용산참사’라는 사건이 자리하고 있죠. 저도 개인적으로 황정은 작가를 만났던 것이 남일당 현장에서였는데요. 오로지 황정은 작가뿐만이 아니라 젊은 많은 문학인들에게 우리 시대에 현실에 대해서 이제까지와는 다른 관심을 갖게 해준 사건이었습니다. 그때를 돌이켜 보시면 어떠세요?

 

    ▶ 황 : 용산참사는…… 용산참사에 관련된 재판이 서울지법에서 열렸을 때 거의 매번 찾아가서 내용을 기록했어요. 필기로 노트에…… 용산참사에 관련된 증언을 받아 적었는데 그게 아홉 권 분량으로 집에 있어요. 그걸 아직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어요. 끓어오르는 뭔가가 있고. 잘 말할 수 없어요.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말로 하기가 힘드네요.

 

    ▶ 오 : 이처럼 사회적 경험에서 오는 어떤 충격 때문에 문학 작품이 변하기도 하죠. 황 작가님은 끓어오르는 어떤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학적으로 세련된 방식을 만드는 데 성공한 작가이기도 합니다. 사회적인 것이 문학적으로 쓰여진다는 것. 그것을 객관화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 황 : 잘 모르겠어요. 저는 그냥 제 나름의 리듬을 탈 뿐.

 

    ▶ 오 : 제 직업이 평론가이다 보니 황 작가님에 대해 어떤 특징을 찾을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요. 황 작가님 작품을 보면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 형상화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게 중요한 문학적 개성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그림자처럼 치부되는 사람들, 존재하지만 존재를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불편해지는 사람이라든지 그와 같은 사물, 또는 그런 상황에 대한 관심이 있는 것 같아요. 이 부분에 대해 어느 정도 의식하시나요?

 

    ▶ 황 : 질문이 너무 어렵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 라는 것이 뭔가요?

 

    ▶ 오 : 예를 들면 비정규직 알바생이라던지, 사랑하고 있는데 의식하지 못하다가 드러나게 된다던지, 죽음의 세계와 같은 것들이죠.

 

    ▶ 황 : 비정규직 많은데.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명확하게 의식하지 못하는 일도 많은 것 같고 죽음도.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것이라기보다 이미 너무나 세계의 일상인 것 같아요.

 

    ▶ 오 : 또 황정은 소설의 특징은 ‘내성적 화법이다’라고 말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봤어요. 일반적으로 대화라는 것은 상대와 주고받는 것인데요. 황 작가님의 대화는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있어요. 이 내성적 화법의 중요한 특징은 리듬이 있다는 거죠. 엇갈리는 대화 속에서는 이 리듬을 찾기가 쉽지 않은데, 내성적 화법에서는 마치 시의 내재율과 같은 리듬이 느껴진다는 거죠. 어떤 ‘서사의 리듬’이라고 생각하는데요.

 

    ▶ 황 : 내성적이라고 하셨지만 저는 제 소설이 나름 상당히 공격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리듬에 관해서는 잘은 모르겠으나, 저는 대화보다 독백하는 데 더 익숙한 사람이었고요, 혼자 자문자답할 때가 상당히 많았어요.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주변 사람들하고 대화가 부쩍 늘었어요. 실제 나눈 대화가 소설에 상당히 반영되는 편이에요. 이렇게 대화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는데, 저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하고 그렇게 대화하는 일이 많아요. 서로의 말을 곱씹어보고, 놀이처럼 서로 말을 주고받기도 하고, 엉뚱하게 말이 틀어지면 같이 즐겁고 골똘하게 생각해보기도 하고.

 

    ▶ 오 : 일반적으로 갈등이나 관계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생각하지만 황 작가님의 작품은 그것을 깨고 있는데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이야기가 아닌 것을 밀도 있게 연결시키면서 이야기가 되게끔 하는 방식들, 저는 거기에서 리듬감이 발생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작가님이 생각하는 이야기, 또는 소설은 무엇인가요?

 

    ▶ 황 : 잡스러워야 하지 않을까. 잡스럽게 표현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고요. 가급적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뭐든. 그게 소설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소설이란 이런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소설 쓰는 데 가장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 오 : 황 작가님 작품에서는 대단히 폭력적인 세계와 위안의 서사가 엇갈리는 형태를 자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잔한 서사와 더불어서 어떤 폭력으로부터 상처받은 세상에 대한 거부가 동시에 공존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는데요. 그 과정 속에서 『백의 그림자』, 『야만적인 앨리스씨』, 『계속해보겠습니다』와 같은 작품들이 나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최근작인 『계속해보겠습니다』에 대해 듣고 싶은데요. 어떻게 구상하게 되었고, 어떤 방식으로 작업하셨는지요?

 

    ▶ 황 : 『계속해보겠습니다』는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연재하고 바로 그 다음 계절부터 연재한 소설인데요. 구상할 당시에 아주 폭력적인 세계에 담기듯 자란 화자가 등장하는 소설 3편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소설들을 구상할 당시에 제가 가지고 있던 질문이 하나 있었는데요. 폭력이라는 방에 갇힌 한 인간이 과연 그 방의 바깥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바깥과 만날 가능성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어요. 그 질문을 어떻게든 소설로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 오 : 세 번째 이야기를 쓰실 계획인가요?

 

    ▶ 황 : 네. 언제고.

 

    ▶ 오 : 이제 막 새로운 장편을 내신 분께 조금 이른 질문이겠지만, 어떤 플랜을 갖고 있나요?

 

    ▶ 황 : 마지막 질문인 거죠? (웃음) 계속 쓰는 거죠. 쓸 것이 계속 있고, 쓰고 싶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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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남은 이야기

 

    ▶ 오 : 그럼 이제 저와 황정은 작가와의 인터뷰는 이것으로 마치고요. 황정은 작가의 무엇이 여러분을 이 자리에 있게 했는지 자유롭게 이야기 해볼까요?

 

    ▶ 독자 : 저는 질문이 두 가지인데요. 팟캐스트에서 작가 제발트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셨는데, 작가님만의 애독 리스트가 있으신가요? 또 하나는 작가님의 소설을 많은 평론가들이 ‘황정은 풍’이라고 이름 붙여서 설명하는데요. 다른 평론가나 독자가 생각하는 것 말고 본인이 생각하는 황정은풍은 무엇인가요?

 

    ▶ 황 : 제가 팟캐스트에서 제발트에 대한 애정을 어필한 적이 있죠. 하지만 메모지를 붙여가면서까지 읽는 작가는 사실 비밀로 하고 싶죠, 나만 알고 싶은 작가. (웃음) 제발트가 일단 그렇고요. 책을 고르는 단계에서 매우 신중하게 고르기 때문에 집에 가져와서 읽는 책은 기본적으로 너무나 푹 빠져서 읽는 책이에요. 그래서 몇 권만 꼽아서 말하기가 어렵네요…… 이렇게 말하면서 그 리스트를 숨기는……(웃음) 지금 떠오르는 책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김태우 박사의『폭격』이라는 책이 있어요. 최근에는 생떽쥐페리의『인간의 대지』를 아껴서 읽었고요. 엘리자베스 토마 베일리의 『달팽이안단테』라는 책 좋아합니다. 이 책은 추천해달라는 부탁을 받으면 항상 이야기하는 책이에요.
    ‘황정은풍’은 첫 단편집 표사에 있던 말인데요. 제 이름에 ‘ㅇ’이 많이 들어가므로 ‘풍’과 붙으니 이상한 느낌도 있고, ‘무슨 풍이다’하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음, 제가 느끼는 제 소설은 쓰면서 느끼는 거라서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리듬이 있어요. 결론은, 잘 모르겠습니다.

 

    ▶ 독자 : 프로필 사진을 보면서 잘 안 웃으시는 분인가 했는데 실제로 보니 잘 웃으시네요. 왜 이런 사진을 프로필로 하셨어요? (웃음)

 

    ▶ 황 : 제일 좋아하는 사진인데 많이 이상한가요? (웃음) 본래 성격이 내성적이고 잘 안 웃고 그런 건 아닌데요, 낯가림이 심해서 초면에는 뚱해보이나 봐요. 최근엔 초면에도 상당히 웃습니다.

 

    ▶ 독자 : 저도 질문이 두 개인데요. 저만 느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무지개풀」의 등장인물들이 동성애자가 아닌가 생각했고요. 「뼈 도둑」에서도 동성애자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그렇다면 여성 동성애자에 대한 작품을 쓸 계획이 있는지 궁금하고요. 『계속해보겠습니다』에 ‘모세 씨’의 이름은 어떤 의미인가요?

 

    ▶ 오 : 나나의 남자친구를 생각할 때 그 이름이 떠오르더라고요.
    그리고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남성 동성애자를 더러 등장시켰으니 다음엔 여성 동성애자를 등장시켜야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진 않아요. 「무지개풀」뿐만 아니라 「오뚜기와 지빠귀」도 그렇게 읽는 분이 계세요. 제가 작품 속에서 이 사람은 남자고, 이 사람은 여자다라는 것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읽는 사람마다 달라지더라고요. 「무지개풀」의 그들이 ‘동성이다, 동성이 아니다’ 이야기할 마음이 없어요. 성별구분이 필요한 이야기가 있고, 필요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는데 제가 써온 단편은 성별구분이 별로 필요하지 않은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여성 동성애자에 관한 소설이 궁금하시다면 이미 그런 인물이 등장하는 단편을 쓴 적은 있어요. 아마 내년에 나오게 될 단편집에 묶이게 될 텐데요, 저는 그 이야기가 여성간의 동성애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보편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인간이 인간에게 사랑을 느끼고 상실에 괴로워하고 그리워하는.

 

    ▶ 독자 : 『계속해보겠습니다』에서 도시락, 만두, 나기의 요리, 제사음식 등 음식이 의미 있는 소품으로 등장하는데요. 작가님의 식습관이 궁금합니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시나요? 싫어하는 음식이 앞에 있다면 어떻게 하실 건지? 글 쓸 때 식습관은 무엇인가요?

 

    ▶ 황 : 특별히 가리는 건 없는데 날 것은 잘 못 먹는 편이고요. 싫어하는 건 안 먹습니다. (웃음) 식습관은 조금 독특한 편. 1년 내내 떡볶이를 먹은 적이 있고, 다시 1년 내내 감자볶음 반찬으로만 밥을 먹은 적도 있고…… 그리고 어묵을 되게 좋아하는데, 그래서 제 주변 사람들은 그 세 가지 음식을 좋아하지 않아요. 물렸다고 하더라고요. 저 때문에. 그리고 꼬막 못 먹습니다. 간장에 무친 것이든 고춧가루에 버무린 것이든 꼬막 못 먹어요. 집필할 때는 일부러 안 먹는 편이고요. 몸이 무거워지면 작업이 힘들어져요. 커피만 열심히 마셔요.

 

    ▶ 독자 : 『야만적인 앨리스씨』의 배경이 되는 지역이름이 ‘고모리’잖아요. 왠지 소돔과 고모라의 고모라가 생각이 났어요. 연관성이 있는 건지 궁금하고요. 앨리시어가 왜 여장 부랑자가 되었는지도 궁금하고요. 또 소설 속 등장하는 ‘네꼬 이야기’는 무엇이고 그 속의 고래가 뭔지 궁금해요.

 

    ▶ 황 : 고모라를 의식하고 쓴 건 아니고요. 고모리라는 지명이 실제 지명이라는 걸 작품을 쓰던 후반부에 알았어요. 고모리를 생각했던 것은 오래된 무덤이 있는 마을을 생각했었고, ‘고묘’잖아요. 세월이 흐르면서 ‘고묘’가 ‘고모’로…… 그렇게 생각하고 쓴 거죠.
    그리고 앨리시어는 여장 부랑자여야만 했죠. 왜냐하면 이 앨리시어가 작품 안에서 대립하고 있는 대상이 ‘씨발년’인데요. 너무 미워하게 되면 계속해서 유심히 보게 되잖아요. 게다가 어머니와 자식이라는 압도적인 관계와 폭력 속에서 자라면서 그 세계를 계속 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닮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했어요. 가장 끔찍해 하고 혐오하고 벗어나고 싶은 모습인데, 자기도 모르게 그걸 골똘히 보고 있다가 그걸 닮아 버린 화자. 그래서 이 소년은 여장을 할 수밖에 없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리고 네꼬라는 말에는 그다지 의미가 없습니다. 네꼬는 그냥 네꼬. 고래도 그냥 고래고요. 네꼬는 일본어로 고양이라는 뜻인데요. 네꼬라는 말의 의미가 중요한 게 아니고 그 이야기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계속해서 들려오는 끔찍한 소리 폭력을 중화시키고 그 폭력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할 수 있는 방법이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 그 이야기가 그 공간과 그 순간에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해요.

 

    ▶ 독자 :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보면 들여쓰기를 안 하셨잖아요. 평소에 쓰실 때 들여쓰기를 안 하고 쓰셔서 그렇게 쓰신다는 인터뷰를 봤는데요. 이에 대해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 황 : 들여쓰기를 하지 않은 것이 자연스럽지 않다고 하셨지만, 그럼 들여쓰기를 하는 것은 왜 자연스러운가요? 라는 질문이 가능한 거죠. 원고 작업을 할 때 그렇게 쓰기도 하지만『야만적인 앨리스씨』 같은 경우는 특히 그래야 하는 텍스트라고 생각했어요. 이야기 자체가 갑자기 쏟아지는 것처럼, 방심할 틈 없이, 매번 문단이 시작될 때마다, 그렇게 시작되어야 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 원고는 반드시 들여쓰기 없는 원고여야 한다고 담당자에게 얘기했던 기억이 나네요.

 

    ▶ 독자 : 앨리시어가 추구하는 세계가 ‘복숭아술 마을’이라고 생각합니다. 앨리시어가 추구하는 상태는 무엇일까요?

 

    ▶ 황 : 그야 ‘씨발년’ 없는 세상이겠죠. (웃음) 자기가 ‘씨발년’ 보다 힘센 초인이거나. 복숭아술 마을은 앨리시어가 이상향으로 삼기에는 너무나 잔인하죠. 오히려 현실세계와 아주 유사한 마을이라고 생각해요. 그 마을에서 아이들이 실종되지만 장수를 축원하는 축제가 이뤄지는 마을이니까.

 

    ▶ 독자 : 글을 쓸 때 두려움을 느끼실 때는 어떻게 극복하시는지요?

 

    ▶ 황 : 일단 쓰기 시작하면 두려움이고 뭐고 없어요. 쓸 때는 지금 쓰고 있는 원고와 저 밖에 없으니까…… 다만 원고 시작하기 전에는 그걸 느끼죠. 다시 그 백지 앞으로 돌아가야 하는 순간. 의자를 끌어당겨서 앉아야 하는 순간. 그리고 이렇게 외출할 때도 두려운 게 있죠. 쓰고 있는 원고가 집에 있는데 ‘혹시나 일이 생겨서 그 원고를 다 완성하지 못하고 죽으면 어쩌지’ 뭐 이런. (웃음)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쓰는 것밖에 없는 것 같아요.

 

    ▶ 독자 : 작가님에게도 ‘귀인’이 있나요?

 

    ▶ 황 : 있습니다. 소설을 써야겠다고 결심하게 만들어준 친구가 있어요.

 

    ▶ 독자 : 「디디의 우산」이라는 단편을 좋아하는데요. 그 단편을 읽고 ‘혁명’이라는 건 친구를 위해 아주 작은 것을 준비해주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혁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 황 : 저는 혁명의 아주 본질적인 부분에 인간애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없는 혁명은 이미 혁명 아닌 다른 무언가겠죠. 혁명에서 인간애가 사라졌을 때 처참한 죽음들이 있었죠. 그건 인간의 역사에서 자주 확인할 수 있는 이야기이고요.

 

    ▶ 독자 : 혹시 중고등학생들하고 작품에 대해 이야기해 보신 적이 있나요? 작가님 작품 중에 중고생들이 읽었으면 좋겠다는 작품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 황 : 독자와의 대화 행사를 하면 고등학교 문창과 학생들이 상당히 오는 편이에요. 소설 좋아요, 하면 좋군요, 하고 애잔해지는 뭔가가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소개할 수 있는 작품은……「양의 미래」라는 단편이 있어요. 지금 고등학생들은 그 소설을 어떻게 읽을까, 궁금하기도 하네요.

 

    ▶ 독자 : 많은 작품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 어떤 건지 궁금하고요. 『야만적인 앨리스씨』, 그리고 「누가」에도 ‘씨발년’이 나오잖아요. 그 욕을 많이 쓰시는 이유가 있나요? 그리고 작가님 얼굴을 보거나 접하기가 힘들어서 친구들끼리 신비주의 작가라고 얘기한 적이 있는데, 혹시 신비주의를 의도하신 건지 궁금해요.

 

    ▶ 황 : 신비주의 아니고요. (웃음) 팟캐스트에서도 이런저런 이야기 많이 해서 전혀 신비주의 아닌데…… 욕을 쓰는 특별한 이유는, 욕이 나와야 하니까.『야만적인 앨리스씨』에는 욕이 많이 등장하지 않아요. 빈도가 높을 뿐, 욕의 종류가 많지 않아요. 씨발, 그거 하나. 저는 이런 욕보다도 욕 한마디 나오지 않는 어떤 이야기들이 『야만적인 앨리스씨』에서는 더 무섭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가장 최근에 쓴 작품. 그렇지만 재작년부터는 「양의 미래」. 애착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그 화자가 걱정이 되어서, 현재는 그 작품을 조금 자주 생각하는 것 같아요.

 

    ▶ 독자 : 작품에 영감을 주는 미디어나 인물이 있나요?

 

    ▶ 황 : 그냥 일상? 직간접적으로 만나게 되는 이야기들로 자극받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죠.

 

    ▶ 오 :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폭력으로 차여 져 있을지언정 그 폭력을 견디게 하는 것은 폭력에 버금가는 어떤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위로, 따뜻한 마음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어떻게 보면 소설도 이 폭력이 가득한 세계에서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것이 아닐까요? 함께해주신 여러분과 황정은 작가님에게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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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속해보겠습니다』 표지에는 동그란 달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달은 방금 차오른 달일까요? 아니면 곧 쇠락할 달일까요? 한 장의 그림으로는 어떤 것도 분명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다시 보름달의 밤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것만은 영원히 분명하지요.
    이 세계를 견딘다는 것은 무엇인가의 덧없음을 끊임없이 확인해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소중하지 않다고 누가 말하던가요?
    이번 대담을 들으며 생각했습니다. 누군가에게 간절히 속삭이는 소리가 있고, 그 소리가 작은 바람을 만들고, 그 바람이 움직임을 만들어 그것이 결국 어떤 리듬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닐까요? 그 리듬에 맞춰 춤을 추거나, 단잠에 빠지거나, 조금 우는 것은 우리의 몫이겠죠. 즐거운 마음으로 다음 작품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제가 할 수 있는 나름으로, 계속해보겠습니다.

 

 

   《문장웹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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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에서 쓴 일기

[에세이] 육지에서 쓴 일기 최진영 20240528 4박 5일 동안 육지에서 여러 일정이 있어 오늘 제주에서 서울로 왔다. 앞으로 며칠간 약속과 약속 사이, 출발지와 도착지 사이 시간이 날 때마다 이 창을 열고 단상을 써보려고 한다. Are you checking in? pm04:45. 여긴 충무로의 호텔. 3년 전 제주로 이사 간 뒤 처음으로 서울에 일이 있어 올라왔을 때 숙박한 후 매번 이 호텔만 이용하고 있다. 경기, 인천 지역에서 저녁 행사를 해도 근방 호텔을 잡지 않고 여기로 온다. 새로운 호텔을 검색하고 선택하는 게 번거로워서. 합리적인 위치나 가격을 따지려다가 검색 지옥에 빠져서 몇 시간을 고민한 뒤 결국 이 호텔을 예약했던 경험으로 깨달은 바가 있다. 시간이 돈이다. 더 저렴한 호텔을 찾으려 애쓰지 말고 검색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줄이자. 점심시간 무렵 충무로 일대 분위기는 조금 묘하다.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거리를 걷는 외국인들과 점심 먹으러 나온 직장인들이 뒤섞이는 거리. 라디오 주파수를 돌리듯 여러 나라의 언어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서울역, 명동, 한옥마을, 남산, 종로가 가까운 곳이어서 외국인 관광객이 정말 많다. 올 때마다 느끼지만 호텔 투숙객 중 한국인은 나뿐인 것 같다. 한 달에 두어 번은 와서 2박 이상 하니까 나름 단골이랄 수도 있는데 프런트 직원들은 매번 나를 처음 본 손님처럼 대한다(호텔의 특성이겠지?). 체크인할 때도 내게 영어로 말을 건넨다. “give me your passport.” 그럼 나는 “제 이름은 최진영입니다”라고 한국어로 대답한다. 성공한 인생 오늘 아침 9시쯤 택배 문제 때문에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는 전화를 받자마자 놀란 목소리로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느냐”고 물었다. 내 용건에 개의치 않고 엄마는 거듭 물었다. 전화를 끊고 뿌듯해서 신나게 웃었다. 내 나이 이제 마흔이 넘었는데 아침 9시에 엄마에게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느냐”는 말을 들을 수 있다니, 이번 생은 성공한 것 같아서. 그건 바로 내 투쟁의 결과다. 거의 20년을 프리랜서로 살면서 남들 다 출근하는 시간에도 ‘성인 평균 적정 수면시간’을 사수하며 꾸준히 늦게 일어나는 생활양식을 차곡차곡 쌓아 온 결과 마침내 엄마도 나의 생활 패턴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아침 9시에 전화하면 깜짝 놀라는 것이다. 나는 이런 게 진정한 성공 같다. 긴장감 저녁에 북토크를 할 예정이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거나 낭독할 때는 별로 긴장하지 않는 편이다. 내가 긴장하는 순간은 따로 있다. 예를 들면 비행기 탈 때. 기내 짐칸에 캐리어를 올리다가 무거워서 또는 실수로 떨어트려서 누군가를 다치게 할까 봐 매번 긴장한다.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걸 알지만 식은땀이 난다. 캐리어를 끌고 에스컬레이터 탈 때도 마찬가지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넘어지거나 캐리어를 놓치는 구체적 상상에 시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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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제이크 레빈 소개 거의 12년 동안 나는 한국 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지난해부터 강의하는 교사의 내면적 생활과 관련된 일기와 같은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외국인 교수로서 처음 강의를 시작했을 때 모든 것이 낯설고 이방인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한국 문화에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교수의 삶은 익숙하지 않다고 믿는다. 학생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고 다른 교수의 마음도 이해하기 어렵다. 다른 강의실에 들어갈 때마다 새로운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이전에 만나지 못했던 민족을 만나는 것 같이 나는 죽을 때까지 방랑자처럼 매일 새로운 것을 경험한다. 학교에서는 현실에 경험한 것이 꿈꾸는 것 같고 꿈꾸는 것이 더 현실처럼 느껴지듯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가끔은 사라진다. 이 산문은 시나 소설이 아니고 현실의 기록도 아닌 교사로서의 삶의 내면적 반응이다. 교사는 인간이다. 가끔 사회가 인문대 교사의 인간중심주의를 억압한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의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계산하지만 인문학과 시의 영향력은 계산될 수 없는 가치다. 인간중심주의 가치를 점점 찾기 힘든 사회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문화를 배워야 한다. 이 모순적인 긴장의 환경에 존재해야 한다. 학교의 목적은 타인의 인간성을 인정하는 것에 있다. 이 산문은 한 인간의 존재하는 기록이다.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이라는 제목은 완전한 이해가 불가한 타인의 인간성을 발견하는 것에서 왔다. 이 기록은 내 개인적 경험과 전해 들은 동료 교사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하였으며 영어로 작성한 문장을 나의 소중한 학생 김혜인이 나와 함께 번역하였다. 지우개 머리 어떤 날 나는 대답하기 위해 여기 있고, 어떤 날 나는 오직 듣기 위해 여기 있다. “질문 있어?” 많은 학생들이 질문의 형태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그다지 어려울 것 없는 예술을 배웠다. 그런 질문에 대답하는 유일한 방법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질문자가 자신의 질문에 답변하는 동안 사용감 있는 지우개처럼 커피를 홀짝이며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것을 느껴 보라. 학생들의 목소리는 배경소리가 되어 가다가, 불현듯 보이스 오버. 지우개는 부러지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얼룩을 견딜 수 있을까? 숭고한 느낌 지난 몇 주간, 를 듣는 학생들은 책상 아래 숨어 있었다. “교수님, 저희는 불확실성에 머물고 있어요.” 그들은 말한다. 일정 기간 동안 불확실성에 머문 뒤, 한 학생이 책상 아래서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저는 숭고한 느낌을 얻었어요.” 그들이 말한다. “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압도당해 죽음이 무섭고 두려워요.” “이제 제 핸드폰 돌려주시겠어요?” 정적. 학생이 나를 응시한다. 정적. 나는 천천히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학생을 응시한다. 흰 두루미 “주말 잘 보냈니?&r

  • 관리자
  • 2024-07-01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에세이]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김용언 미스터리 장르를 좋아하고, 열심히 읽고, 그에 관한 잡지를 만들고, 또 가끔은 관련 공모전 심사를 보면서 언제나 느끼는 바가 있다. 한국에서 미스터리 장르에 대한 이해도는 여전히 심각하게 척박하다는 점이다. 가장 모순되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은 ‘장르 문학’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다. ‘(그냥) 문학’1)의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소설들은 굳이 ‘장르 문학’이라고 불린다. SF, 판타지, 미스터리/스릴러, 로맨스, 공포, 무협 등의 꼬리표가 붙고 낱낱이 분류되며 ‘문학은 문학이지만 그냥 문학이라고 부르기보단 그 안의 장르로 명명되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장르 문학에 속하지 않는 작품은 그냥 문학이 아니라 ‘비장르 문학’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아니면 순문학 역시 일종의 장르임을 인정하면서 모든 작품을 ‘장르 문학’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 아닐까? 예전 한국 문단에서는 ‘순(純)’이라는 단어가 참여 문학/민중 문학 등의 대립항처럼 불렸다고 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참여 문학/민중 문학도 ‘그냥’ 문학에 포함된 것 같다. 아무튼 거칠게 말해서 ‘장르’를 사용하지 않고 인간과 현실 자체에 집중하는 소설을 ‘그냥’ 문학으로 호명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장르’로 호명되는 특정한 이야기들에는 그 장르가 만들어지게 된 역사가 있고 또 그 안에서 통용되는 특정한 규칙이 존재한다. 그런 약속된 구조와 규칙을 이용해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고 해서, 그 결과물이 ‘그냥’ 문학으로 불릴 수 없고 장르 문학으로만 불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장르 문학도 문학임을 인정하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그건 너무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굳이 받아들여 달라고 애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 장르 문학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불편해지는 순간들이 자꾸 찾아온다. 이를테면 한국 작가의 소설이 해외로 번역되었을 때 현지 리뷰들을 찾아보면, 스릴러/미스터리/공포 등의 명칭을 명확하게 부여하면서 소개한다. 한국에서는 기존 등단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할 때 ‘추리적 기법을 활용한’ 또는 ‘경계를 넘어선 상상력을 발휘한’ 등의 애매모호한 문구로 시작할 때가 많은데, 해외에서는 자신들에게는 낯선 작가의 번역 작품의 특성을 단번에 설명하기 위해 ‘이것은 스릴러다’ 또는 ‘이것은 공포소설이다’라고 알려준 다음 그 작품의 특성이 어떤 점에서 새롭고 멋진지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장르 문학과 장르 아닌 ‘그냥&r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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