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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신간 리뷰]이것은 누구의 이야기입니까

  • 작성일 2015-07-14
  • 조회수 1,854

 

[문학 신간 리뷰]

 

 


이것은 누구의 이야기입니까?

- 이장욱, 『기린이 아닌 모든 것』(문학과지성사, 2015)

 

 

 

박인성(문학평론가)

 

 

 

 

book-kilin    이장욱의 소설 텍스트는 매우 당파적이다. 도발적인 첫 문장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사실 문학에 있어서 지극히 일반론에 가까운 이야기다. 일차적으로 내가 여기서 말하는 당파적인 텍스트란 누군가는 읽어낼 수 있지만 누군가는 읽어낼 수 없다는 의미다. 물론 단순히 텍스트의 (비)가독성의 문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독자가 소설을 읽으면서 순전히 타인의 이야기를 읽고 있다는 거리(distance)를 취할 때는 절대로 읽히지 않는 맹점(盲點)을 겨냥한다는 점에서 이장욱의 이야기는 당파적이다. 기존의 소설들보다도 소설집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수록된 이야기들은 한층 독자의 서사적 감각을 자극하고 고취시키기는 방식으로 쓰인 것 같다, 따라서 이 소설집을 읽는 독자는 지금 자신이 읽고 있는 이야기가 과연 누구의 이야기인가에 대하여 예민하게 되물을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더 많은 것들을 읽어낼 수 있게 된다.
    언뜻 보았을 때 『기린이 아닌 모든 것』의 소설적 기획은 인물에 대한 전기적 기록의 형식처럼 보일 수도 있다. 「절반 이상의 하루오」, 「우리 모두의 정귀보」,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에서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인물의 이름이고, 그 이름과 결합된 수식어들에 소설을 읽어내는 비밀들이 감추어져 있으리라는 예감까지도 든다. 그러나 저 이름들이 대변하는 것은 과연 누구의 운명일까? 예를 들어 「절반 이상의 하루오」에서 서술자인 ‘나’가 알고 있는 하루오는 다카하시 하루오라는 인격적 존재의 전부가 아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서술자가 하루오의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는 앎의 한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여기 있는 하루오 본인이 다카하시 하루오라는 존재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절반 이상의 하루오는 어딘지 다른 하루오이다.”(p. 21) 미국인과 오키나와 태생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혈연적인 복잡성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한국에 ‘자살여행’을 온 겨울 부산 남포동에서 하루오의 일부가 죽었기 때문이다. 상징적으로든 실제적으로든 만약 그 순간 하루오의 일부가 죽었다면, 여전히 살아남아서 세계 각국을 여행하다가 ‘나’와 만난 하루오는 누구일까? 절반 이상의 죽음 이후에도 다카하시 하루오라는 여분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존재는 누구일까? 「절반 이상의 하루오」는 이러한 방식으로 이야기될 수 없는 부분적인 방식으로 삶에 드리워진 맹점을 겨냥하는 텍스트다.
    하루오의 존재는 그 누구도 자기 삶의 전부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삶 자체의 부분성을 환기시킨다. 그 여분의 삶이 누구의 것인지는 명료하지 않다. 흥미롭게도 마치 이를 의식하듯이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수록된 소설들에서는 지속적으로 누군가를 호명하는 문장들이 존재한다.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에서 “이것은 누구의 악몽인가?”(p. 285)라는 질문을 변주하듯, 과연 이것은 누구의 이야기인 것일까를 되풀이하여 묻는 것이다. 이 ‘누구’는 아직 인칭이 부여되지 않은 것뿐만이 아니라, 이야기 내부에 한정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이장욱의 질문은 ‘나는 이야기의 외부에 있는 순수한 관찰자야’라고 이야기 내부의 존재에 대하여 안전거리를 확보하려는 독자의 태도를 불온하게 뒤흔든다. 그의 서술적 태도가 겨냥하고 있는 것은 작가, 서술자, 캐릭터, 독자 사이에서 결정되지 않고 미분화된 영역인 탓이다. 이야기를 읽고 있는 지금 이 순간 텍스트에서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잔여’는 누구의 것인가? 소설가 이장욱이 염두에 둔 ‘독서의 윤리’가 존재한다면, 그 윤리는 이야기를 읽는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존재 누구나가 자신의 몫 이상의 책무를 떠안을 수 있으며, 자신의 것 이상의 운명에 연루될 수 있음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우리 모두의 정귀보」에서 정귀보에 대한 평전을 쓰기 위해 그의 삶을 복기하고 있는 서술자는 독자의 알레고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후에야 천재 미술가로 평가받게 된 정귀보의 삶을 취재하면 취재할수록 서술자는 오히려 평전을 쓸 수 없다는 어려움을 호소하게 된다. 무엇 하나 대단할 것 없는 정귀보라는 보편적 인간과, 그에 대한 미술계의 과도한 해석적 가능성 사이에서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서술자로 하여금 새롭게 평전을 쓰고자 마음먹게 한 계기는 역설적이게도 정귀보의 죽음에 대한 수수께끼였다. 백 일이 넘는 시간 동안 바다 아래 가라앉아 있음에도 상한 곳 하나 없는 정귀보의 시신은 감당할 수 없는 해석적 대상이기 때문에, 오히려 서술자로 하여금 정귀보의 삶에 대한 글쓰기를 감당하게끔 한다.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사건 앞에서 삶의 당파성은 구체화된다. 그리고 그러한 당파성을 통해서만 비로소 삶은 스스로를 낯설게 이야기할 준비를 마치는 것이다.
    따라서 표제작인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하여」에서 기린불의 진위 여부는 단순한 해석상의 입장 차이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서술자가 자신의 해석에 대하여 취하는 주관적이기 짝이 없는 편협함 때문에, 거꾸로 그의 이야기는 생기를 얻는다. 기린불의 진실성?영원성에 매료되어 박물관 관리인으로 취직하기까지 한 서술자는 기린불의 진위 여부가 학계의 쟁점에 오르자, 스스로 기린불을 불에 태워버린다. 기린불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만의 진실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다시금 기린을 상상의 세계에 돌려보내는 것이다. 그의 행위는 ‘기린이 아닌 모든 것’이라는 표현 자체의 역설에 기대고 있다. 순수한 상상의 동물인 기린의 불상에는 그 육체가 보여주는 것 이상의 비가시성이 함께 드러난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통해 지시되는 것이다. 화해되지도 극복되지도 않는 존재의 부분성만이 언제나 나머지의 것, 혹은 그 이상의 것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하여」의 서술자에게 중요한 것은 육체에 깃든 비가시적인 부분으로서의 기린의 ‘눈빛’이다. 눈빛은 단순히 육체의 일부가 아니라 육체 이상의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가시성은 언제나 비가시성을 포괄하고 있으며, 비가시성 또한 가시성을 포괄한다. 표면적으로는 서로가 서로를 부정하는 이항대립적인 부분들이 사실은 불가피한 방식으로 맞물려 가까스로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존재라기보다는 언제나 절반 이상인 존재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는 것은 극도로 위태로운 작업이다. 말하는 자, 말해지는 자, 듣는 자 모두의 운명을 한데 묶어 분리될 수 없게끔 서로에게 책임 지우는 치명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장욱은 작가 스스로를 포함하여 이야기에 개입하는 모든 종류의 의식들을 문제 삼고 있다. 거기에는 안전거리도, 외부적인 권위도 인정되지 않기에, 이야기하는 자는 어떤 객관성도 보편성도 주장할 수 없는 지점에서 스스로의 윤리를 되새김질할 수밖에 없다.
    앞서의 이야기를 종합할 때, 『기린이 아닌 모든 것 』의 이야기들은 내게 있어 몹시도 낮은 지점에서 서서 불안하게 증언하는 주체의 기록들로 읽힌다. 1) 이야기하는 주체들은 스스로도 제어하거나 의미화하지 못하는 여러 의식들ㆍ감정들 사이에서 연루됨으로써만, 언제나 절반 이상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자기 삶과 마주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말할 수 없는 영역을 제한적인 방식으로나마 이야기하는 당파적인 이야기, 스스로의 당파성을 알면서도 예민하게 타인의 운명을 자신에게 개입시키는 이야기만이 진정으로 보편적인 이야기의 가능성을 지닌다. 나의 처음 입장을 번복해야 할 것 같다. 사실 모든 텍스트는 당파적인 텍스트다. 그러나 이장욱 소설의 남다른 점은 이러한 당파성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작가와 독자까지도 참여적인 독서 과정 속에서의 스스로의 맹점과 마주하게끔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누구의 이야기입니까?” 『기린이 아닌 모든 것 』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된 질문 앞에, “이제 당신이 대답할 차례”(p. 144) 다.

 

 

작가소개 / 박인성(문학평론가)

-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 과정 수료. 201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평론으로 당선되어 등단. 현재 계간 《자음과 모음》 편집위원으로 활동.

 

 

   《문장웹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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