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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작가의 樂취미들] 초여름, 눈

  • 작성일 2015-12-01
  • 조회수 1,151

 

[젊은작가의 樂취미들]

 

 


초여름, 눈.

 

 

 

김소형

 

 

 

 

    눈이 와. 싸락눈. 이걸 쓰면서 두 번 눈을 봤어. 그때 일어난 일을 말하면 넌 믿을까. 초여름에도 눈은 왔어. 싸락눈과 우박이 섞여 마치 깊은 가을 같았다고 해. 본 적은 없지만 일어난 일이겠지. 온실에 앉아 멍하니 있으면 그런 기분에 사로잡혀. 눈은 내리고 있지만 초여름 같고 푸른 매미의 허물이 어깨에 쏟아지고 아무리 기다려도 차갑게 떨어지는 건 없지만 분명 눈을 맞고 있는 기분. 사각거리는 소리가 나무를 깎는 것처럼 들리고 때로 작은 불이 내리는 것 같아. 차가운 불.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수천 개의 온실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내가 아는 모두에게 온실을 나눠 주고 그곳에서 각자 뜨거운 차를 마시고 식물의 이름을 맞히는 빙고 게임을 하다가 다들 언제 헤어졌는지 모르는 것. 약속 없이 만나고 헤어지는 비쩍 마른 고목들처럼 온전히 하루를 보내는 것. 언젠가 작은 온실을 만들어주겠다고 아무리 약속해도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 집 바질은 듬성듬성 꽃을 피우며 축 늘어져 겨울을 준비해. 그들은 도통 내 말을 듣는 법이 없어. 고집불통 영감 같으니라고, 혼자 떠들고 혼자 들으며 짙은 녹색 잎을 만지면 묘한 안도감이 들어. 모두에게 용서 받은 기분이 들어. 어디선가 머리를 쓰다듬으러 오는 사람이 있을 것만 같아.

 

    여름밤에는 율마를 오래 쓰다듬었어. 건드리면 톡 쏘는 레몬 향, 그 감촉이 이상한 기쁨을 주었지. 우리 집은 햇빛이 참 좋은데, 이런 빛을 쬐다가 죽고 주인의 기분에 따라 웃자라는 삶을 생각하며 그들처럼 지내고 싶었어.

 

    까라솔, 성미인, 부용, 우주목, 흑법사, 다육식물들. 허브딜, 레몬밤, 라벤더, 야로, 세이보리, 빛을 좋아하는 허브들. 스킨답서스, 글로브 바질, 로즈메리, 쉽게 삽목이 가능한 것들. 후마타, 오블리테라타, 귀여운 고사리들. 붉은 열매와 수형을 보고 반한 아로니아. 푸른색이 독특한 블루버드. 크리스마스트리가 떠오르는 화려한 포인세티아. 여행 갔을 때 가져온 도토리.

 

    사실 도토리가 발아할 줄은 몰랐어. 삼척 여행을 갔을 때 한 알 주워 온 것이고 삼척에서 살던 도토리가 우리 집에서 자라게 될 줄은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지. 긴 뿌리가 나와서 심었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 잎을 틔우고 있어. 도토리의 안부를 들으면 나는 잘 있다고 말해.

 

    "참나무가 되면 옥상이 무너질 텐데?"

 

    그 말에 나는 웃어. 참나무가 되려면 깊은 땅이 필요한데 난 없잖아.

 

    "어느 정도 자라면 폐가에 심고 와."

 

    그건 좋은 생각이라고 대답했어. 폐가에 심고 오면 집이 무너질 거라는데 그건 아직 일어난 일은 아니니까.

 

    화분이 늘어날수록 정말 갖고 싶은 건 나무 한 그루가 아닐까 생각해.

 

    "사실 큰 나무를 갖고 싶은데. 저런 것도 좋고."

 

    그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딱 잘라 말했지. 무엇보다 그건 오래 살아야 하니까. 그러면 그가 나보다 오래 살아서 잠시 키워 주면 되지 않을까.
    언젠가는 한 그루의 나무만 가꿀 수도 있겠어. 요즘에는 나무 전정에 대해 읽고 있거든.

 

    봄이 되면 옥상에 텃밭을 만들 거야. 바질과 루콜라는 쉽게 잘 자라고 어디에나 섞어 먹기 좋았어. 바질과 잣을 빻아 페스토를 만들고 파스타를 하고 허브와 꿀을 섞어 아이스티를 내리고 루콜라, 토마토, 발사믹 식초를 섞어 샐러드를 만들겠지. 누군가를 초대하고 싶어질 거고 마치 오래 전부터 이들의 이름을 알았다는 듯 알려줄 수도 있을 거야. 그들과 어울리는 LP를 찾을 수 있고 어울리는 커피 혹은 책을 말할 수도 있겠지. 투명하고 얇은 책을 만들어서 오는 사람들에게 나눠줄지도 몰라. 그건 어쩌면 가능한 일.

 

    이 글을 쓰는 동안 눈은 그쳤고 환해졌어. 곧 세 번째 눈이 짙게 내리겠지. 그때 넌 뭘 할까.

 

도토리(본문)

 

작가소개 / 김소형(시인)

- 1984년 서울 출생. 2010년 『작가세계』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ㅅㅜㅍ』이 있다. 현재 동인 ‘작란(作亂)’ 활동 중이다.

 

   《문장웹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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