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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작가의 樂취미들] 황진이와 원더걸스

  • 작성일 2015-12-02
  • 조회수 1,191

 

[젊은작가의 樂취미들]

 

 


황진이와 원더걸스

 

 

 

조희애(동화작가)

 

 

 

 

    1.
    내 나이 여섯 살 때 엄마는 나를 데리고 한의원으로 갔다. 밤마다 열이 오르는 허약한 나를 위해 보약을 지어 먹이기로 결심하신 것이다. 당시 우리 집 형편을 생각해 보면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그런 엄마에게 감동했던 것일까. 진단을 마친 한의사는 갑자기 사주를 봐주겠다며 내 생년월일과 얼굴을 찬찬히 뜯어봤다.
    “이 아이는 무용을 해야 돼. 한국 무용으로 나가면 세계적인 무용수가 될 거야.”
    당시 한의사의 표정이 꽤 진지했던 모양인지,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고민에 빠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벌컥벌컥 보약을 들이마셨다.

p갑순이
(유치원 재롱잔치 때 ‘갑돌이와 갑순이’)

 

    2.
    그날 마신 보약 때문인지 뭔지, 여하튼 큰 병치레 없이 초등학교 오학년이 되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내겐 딱히 그럴듯한 취미가 없었다. 이런 밋밋한 유형의 녀석을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대한민국 초등학교에는 ‘방과 후 수업’이란 게 있다.
    그리하여 일주일에 두 번. 나는 등나무 지붕 아래 앉아 북을 두드렸다.
    둥, 둥, 둥, 둥!
    두둥, 두둥, 두둥, 두둥!
    그래서 즐거웠냐 하면, 초반에는 꽤 재밌게 하다가 이내 시들해지고 말았다. 북이 시시했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어려웠다. 끄덕끄덕 리듬을 타다가 북채를 내리쳐야 하는 딱 그 찰나에 북을 쳐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왜인지, 북을 칠 때마다 자꾸 숨을 참게 돼서 호흡하기가 어려웠다.
    날이 갈수록 내 얼굴은 점점 창백해져 갔다. 내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집에 돌아오면 엄마는 “역시 무용을 시켜야 했는데……”라며 중얼중얼 미안해했다.
    왜죠? 방과 후 수업에 한국 무용은 없었는데.

 

    3.
    한국 무용도 못 추고, 북 치는 일도 도중에 관뒀지만 나는 여전히 춤과 노래가 좋았다. 거울 앞에서 갖은 쇼를 하며 그냥 마냥 까불던 어느 날, TV 오디션 프로그램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야 말았다.
    “왔네. 이거네.”
    옛날 옛적에 노승 포스를 풍기던 한의사 할아버지도 내가 ‘세계적인 무용수’가 될 거라 예언하지 않았던가. 물론 그게 한국 무용이라고 말씀하시긴 했지만, 뭐 크게 다를 게 있나? 한국에서 춤추면 그게 한국 무용이지.
    대망의 오디션 날. 끼 좀 부린다는 청소년들이 무려(당시엔 대단한 숫자였다. 지금은 더 큰 규모의 오디션도 많지만) 3,000명이 넘게 서울 잠실 올림픽경기장에 모였다.
    길고 지루한 기다림 끝에 겨우 내 이름이 호명됐다. 나는 담당 요원의 안내를 받아 오디션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럴 수가! 내 앞에 박진영이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수십 개의 부스 중에서 그가 하필, 여기에 있었다.
    두둥, 두둥, 두둥, 두둥.
    가슴 속 북소리가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예, 시작하세요.”
    그래서 시작했다. 그의 앞에서 울기 시작했다. 정말, 너무 긴장했던 탓인지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데……. 아아, 자세한 얘긴 창피니까 관두자.
    어쨌든 나는 1차에 합격해 방송국 오디션까지 보고 왔지만 결과는 탈락이었다.

 

    4.
    대학생 땐 욕심이 많아 동아리를 2개나 가입했다. 하나는 영화제작 동아리였고, 다른 하나는 나를 포함해 신입생이 딱 두 명뿐인(그것도 상대방이 남자여서 군 입대를 하면 나밖에 남지 않는) 사물놀이 동아리였다. 그래서 어느 동아리를 더 좋아했냐고 물으신다면 글쎄, 세계는 하나라고 대답하는 수밖에. 큼큼. 뭐지, 이 죄책감은.
    아무튼 다시 국악에 빠진 나는 ‘국악감상의 이해와 실제’, ‘춤과 전통문화’, ‘우리 춤 배우기’ 등의 교양 수업을 들으러 다녔다. 오후에는 학교 잔디밭에 앉아 “덩덩 쿵따쿵, 따쿠쿵따 쿵따쿵” 장구를 치고, 밤에는 막걸리에 취해 불콰해진 선배들이 다 때려 부술 기세로 신나게 연주하는 걸 가만히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원더걸스가 데뷔했다.

 

    5.
    만약 내가 최종 오디션에 합격했더라면 나도 원더걸스가 됐을지 모른다, 하는 생각은 터무니없지만 요즘 문화원에서 판소리를 열창하는 건 그때 한이 맺혀서일지도……. 아뇨, 농담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내 취미는 국악과 관련된 뭐시기들이다.
    내가 판소리를 배운다고 하니까 어느 지인이 “너 그거 술 맛 좋으라고 배우는 거 아니냐”며 농담처럼 물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술 맛이 좋아지긴 하지만 내 술 맛이 아니라 남의 술 맛이 좋아지는 거니까. 이런 걸 재능기부라고 하나?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문우들을 초대해 ‘백 투 더 조선’이란 콘셉트로 파티 아니, 잔치를 열고 싶다. 드레스 코드는 당연히 한복. 과거시험처럼 시제가 떨어지는 백일장(필기도구는 먹, 붓, 한지)도 하고, 조선 역모 버전의 ‘마피아 게임’도 하고.
    나는? 조선의 아이돌 황진이가 되어 못 이룬 꿈을 텔미 텔…… 으음, 그만 하자.

 

 

작가소개 / 조희애(동화작가)

- 서울 출생. 2010년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200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

 

   《문장웹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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