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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작가의 樂취미들] 영화감상

  • 작성일 2016-01-05
  • 조회수 1,773

 

[젊은작가의 樂취미들]

 

 


영화감상

 

 

 

백은선

 

 

 

 

    많은 취미가 있었던 것 같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렇다. 남은 건 거의 없다. 자전거를 타지 못하고 만화책도 거의 읽지 못한다. 요가도 일 년 전에 그만뒀고 사람도 많이 만날 수 없다. 베이킹은 최근 일 년 동안 딱 한 번뿐이었다. 내게 대체 무슨 취미가 있을까? 한동안 고민했다. 다행히 일과 무관하게 열심히 하는 게 한 가지 있었다. 바로 영화보기. 이게 무슨 취미냐고 누가 물을 수도 있다. 매번 취미 칸에 독서나 영화감상 같은 걸 적는 그런 고리타분한 느낌이니까. 죄송합니다. 그런 취미밖에 즐길 수 없는 상황이라서.
    생각해 보면 근래에도 나는 꽤 열심히 영화를 봤다. <007>도 봤고 <베테랑>도 봤다. <마션>, <크림슨 피크>도 봤고. 개봉하는 영화들은 다운로드를 해서 보거나 어떻게든 기를 쓰고 영화관에 가서 봤다. 왜 나는 영화를 좋아하는 걸까. 영화감상도 정말 취미가 될 수 있을까요? 음, 아마 될 수 있을 거예요. 어쩌면 나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사람이 잠시라도 다른 것에 옮겨가고 몰두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니까.
    사실 나는 이 글에 앞서 두 번 취미에 대한 글을 썼다. 벌써 세 번째 취미에 대한 글을 적고 있다. 처음에는 ‘취미는 악취미’로 썼고 두 번째는 ‘망상’에 대해 썼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쓴 취미에 대한 글들도 살펴봤다. 마음이 위축됐다. 나쁜 얘기들, 무시무시한 얘기들만 잔뜩 적어 놨는데 사람들은 스스로의 취미에서 행복과 일상의 소소한 기쁨 그리고 발전하는 모습과 자신의 개성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해서 죽고 싶은지 등을 상상한다거나 세계의 멸망을 그린다고 썼다. 도저히 안 될 거 같았다. 다시 스스로를 탐색했다. 거짓을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근사한 취미를 꾸며내는 일은 기만인 것 같아. 동요 부르기와 영화감상 이렇게 두 가지를 겨우 생각해 냈다. 가만, 동요 부르기는 노동이지 취미는 아니야. 결국 영화감상뿐이군요.
    때문에 몇 가지 영화에 대한 짧은 감상을 이야기해 보겠다. 깊이 없고 단순한 소감일 뿐인.
    요즘에 본 기분 좋았던 영화는 <마션>이다. 데이비드 보위의 스타맨을 배경으로 유쾌한 성격의 주인공이 화성을 탈출하는 장면을 보니 가슴이 벅차올랐다(화성 얘기인데도 라이프 온 마스가 아닌). 설령 스토리가 과학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할지라도. 기분이 좋았다. 커다란 음악 속에 있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아주 뻔한 구조를 가진 영화라는 점도 좋았다. 주인공이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고,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분투하고, 아슬아슬 손에 땀을 쥐게 하지만 결국은 위기를 멋지게 타파한다. 덧붙은 후일담까지. 종종 그런 영화를 보면 쾌감이, 안도감이 든다. 좋은 기운을 전해 받는 것 같다. 눈앞에 닥친 위험을 하나하나 처리해 나가는 것.
    가장 슬픈 영화는 <크림슨 피크>와 <비우티풀>이다.
    나는 장난으로 이렇게 말했다. <크림슨 피크>는 육아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영화라고. 다락방에 갇혀 제대로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랄 수 없었던 아이들은 악마가 된다. 아빠는 엄마를 폭행하고 엄마는 그 폭행을 남매에게 전해 준다. 그 비극은 토마스와 루실이 올바르게(올바르다는 말이 얼마나 이상한지!) 남을 사랑할 수 없도록 만든다. 이 영화는 여러 각이 있어 다른 편에서 보면 가슴 아픈 사랑 얘기가 된다. 친동생을 사랑한 루실이라는 여자가 겪어야만 했던 어그러진 사랑. 나는 그 사랑이 너무 슬펐다. 루실은 토마스에게 어머니이고 누나이며 연인이 되어 주고자 했다. 그것은 루실이 토마스가 동생이며 남편이고 아버지가 되어 주기를 원했던 것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 오직 둘만이 세계가 되어 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토마스는 달랐다. 토마스는 나약하고 줏대도 없는 주제에 진짜 세계를 동경했다. 토마스의 나약함은 모두를 비탄에 빠지게 한다. 이 영화는 유령 이야기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의 경계를 지움으로 비극을 증폭시키는 이야기다. 눈 내린 크림슨 피크의 모습과 작은 소품, 의상까지 볼거리 또한 시각적 즐거움을 준다. 역시 여자의 사랑은 위험하다.
    <비우티풀>은 보다가 잠들었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보지 못했어요. 다만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은 이토록 지난하구나!(농담) 그런 생각이 들었지요. 결코 영화가 별로라서 잠든 건 아닙니다. 너무 피곤했기 때문입니다. 아모레스 페로스를 좋아했기 때문에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영화를 보고 싶었고요. 아, 그는 <버드맨>의 감독이기도 하고. <버드맨>도 무척 좋았습니다. 마지막 장면이 제일 좋았고요. 무언가 다른 존재를 너무 사랑하면 아파질 수밖에 없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죽은 자의 목소리에 둘러싸인 산 사람이 천천히 죽음 쪽으로 기울어 갑니다. 무간도에 사랑은 가져갈 수 없습니다.
    이제 무슨 얘길 해야 할까. 가장 별로였던 영화라면 <사도>. 이건 아닌 것 같다. 뒤로 갈수록 과도하게 스토리를 봉합하려고 안간힘 쓰는 것. 차라리 모두 벌어져 있었다면 조금 나았을지도 모른다.
    취미를 통해서 어떤 다른 영역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나는 2013년에 스페이스셀에서 실험영화 워크숍을 들은 적이 있다. 지금 이야기한 영화들과는 다른 영역이지만. 그때 필름을 만지고 암실에 들어가서 현상을 하고, 필름을 말려 감고 영사기에 필름을 걸고 하면서 지낸 시간들은 내게 새로운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영화가 가진 물성을 이해하게 되었다. 카메라를 들고 촬영을 다니고 몇 번이고 같은 장면을 반복해 찍고 필름들을 편집하여 장면을 재배치하고. 그런 작업을 언젠가 다시 해볼 수 있을까? 요즘은 디지털 카메라로 작업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나 같은 아마추어도 영화를 만들어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언젠가. 좋은 시나리오를 쓰게 된다면. 나는 이미지를 좋아하기 때문에 영화를 좋아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방금 들었다. 3분짜리 시나리오를 써본 적이 있는데, 물론 영화가 되지는 않았지만.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대한, 그 둘이 얼마나 내밀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영화였다. 지금 시나리오를 쓴다면 어떻게 쓰게 될까? 무엇을 쓸 수 있을까?
    다른 것은 잘 모르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미친 듯이 시끄러운 영화를 만들고 싶다. 세계의 모든 소음을 끌어다가 뒤섞어 놓은 것 같은. 사람을 죽이는 내용은 쓰지 않을 것이다. 잃어버린 것을 찾아 헤매는 내용도. 단 한 사람이 모든 것을 하는 그런 것을 써볼 수 있다면 좋을지 몰라. 그래. 이제 <비우티풀>을 마저 보러 가야겠다.

 

 

작가소개 / 백은선 (시인)

- 1987년 서울 출생. 2012년 《문학과 사회》 등단.

 

   《문장웹진 2016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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