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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신간 리뷰] 시선의 윤리

  • 작성일 2016-04-01
  • 조회수 1,320


[문학 신간 리뷰]

 

 


시선의 윤리

– 최정화, 『지극히 내성적인』(창비, 2016) 리뷰

 

 

김태선(문학평론가)

 

 


    최정화 소설가는 섬세한 눈을 지녔다. 일상의 평범한 것들에서 그의 눈은 작은 기미를 포착하며, 그 배후에 숨어 있는 것들에 손을 뻗는다. 작은 기미들, 이를 틈이나 균열이라 이를 수도 있겠다. 이들은 인물화에 그려진 작은 얼룩과 같기에, 쉽게 보이진 않는다. 그런 것들이 무엇인지 볼 수 있기 위해선, 시선을 비스듬히 하는 것처럼, 관점을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나 단순히 다르게 보는 일에 그쳐서는 안 된다. 이를 평소의 시선과 만나게 함으로써 충돌을 일으켜야 한다. 그때 일상 속에서 얼룩의 모습으로 은폐되었던 것들이 제 모습을 희미하게나마 드러낼 것이다. 「팜비치」의 도입부에서 그 한 예를 살펴보자.

 


    그는 텐트 안에서 반소매 티와 칠부 카고팬츠를 차례대로 벗고 이월상품이라 60퍼센트 할인된 가격으로 구매한 야외용 수영팬츠를 입었다. 수영팬츠에는 주먹만 한 크기의 기하학적 무늬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형광색으로 프린트되어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건 해골 모양이었다. 아내가 어째서 그런 디자인을 선택한 건지 의아했지만 그는 옷의 스타일에 그리 민감한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촌스러운 무늬에 대해서는 금세 잊어버렸다.(「팜비치」, 28면)



 

    인용한 부분은 ‘그’라는 인물이 평상복에서 수영복으로 갈아입는 장면을 그린 대목이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움직임처럼 보인다. 그러나 작가는 옷의 모양에서부터 그것의 가격 정보에 이르기까지의 세목을 하나하나 열거하고 묘사한다. “그는 옷의 스타일에 그리 민감한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라는 대목에서 보이듯, 옷에 대한 세밀한 묘사는 ‘그’의 성격과는 다른 움직임을 그려낸다. ‘그’는 민감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술은 절반만 참이다. ‘그’가 알던 자신의 성격은 ‘민감하지 않은’ 것이다. 만일 그랬더라면 수영팬츠에 있는 ‘해골 모양’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해골 모양’을 발견하고 만다. ‘그’는 감각이 예민하게 변해 있음에도 미처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다. 여기서 ‘해골 모양’은 하나의 왜상(歪像)이다. ‘해골 모양’은 ‘그’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틀’이 흔들리고 있음을, 그 ‘틀’이 자신의 삶에 균열을 내고 있음을 미리 메시지로 전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민감해졌다는 사실을 어째서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는 그에게 드리워진 ‘틀’ 때문이다. 가령 “민감한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라는 수식어는 ‘그’를 둘러싼 하나의 ‘틀’로 등장한다. “그는 오 년째 승진에서 쓴 물을 마셨다. 하지만 그는 동료들처럼 퇴직 이후의 삶을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건 그의 장점이라면 장점이랄 수도 있었다.”(36면)라는 말처럼, 직장이라는 경쟁의 장에서도 ‘그’는 자신이 민감하지 않은 사람이라 여긴다. 퇴직 이후의 삶을 걱정하는 박 과장이 도리어 승진해 다른 곳으로 발령되어 ‘그’가 혼자 길을 걷게 되는 상황이 닥쳐와도, 오히려 ‘그’는 자유롭게 된 것이라 여긴다. 그러나 그런 ‘그’의 믿음과 다르게, 몸의 신경은 잔뜩 예민해져 있다. 살아남기 위해 더듬이를 곧추세운 곤충처럼. 그럼에도 ‘그’의 ‘틀’은 경쟁에서 밀려나 자신의 생존이 위험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은폐한다.
    경쟁은 우리 시대의 삶에 각인된 에토스처럼 작동한다. 특히 신자유주의 시대에선 불평등이라는 비대칭적 구도를 통해 개체 간의 경쟁을 가속화시키는데, 이는 경쟁을 통해서만 사회와 경제가 발전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부터 비롯한다. 더 나은 삶을 위하여 더 많은 경쟁이 요구되는 시대다. 경쟁의 원리는 시장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에 스며들어 이 시대의 아비투스를 형성한다. 모든 것은 경쟁에서 승리한 자에게 돌아가고, 경쟁에 밀려난 이들을 기다리는 건 생존에 대한 위협이거나 승자에 예속되는 일이다. 한 사람의 가치는 사회·경제·문화적 자본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로 결정된다. 이러한 삶의 구조는 소설 속 인물들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최정화 소설의 인물들을 살펴보면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사회·경제·문화적 측면에서 우위에 서 있는 비대칭 관계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가령 「틀니」에 등장하는 부부는 “그는 부유한 집 자식처럼 보였고 그녀는 어딘가 가난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80면)라는 대목처럼 전자가 후자에 비해 우위를 점유한 인물로 나타난다. 아이들마저 편지를 쓸 때 “아빠 엄마께”(81면)라 시작하며 모든 내용은 아빠를 향한 것이다. 아내는 남편을 완전무결한 존재로 여김으로써 그러한 관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홍로」에서도 ‘그’와 아내 역할을 하는 ‘그녀’가 등장하는데, 두 사람이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는 “그녀가 자신의 아내감은 되지 못한다는”(105면) ‘그’의 생각 때문이다. 이는 ‘그’가 ‘그녀’의 신체 습관에서 “촌스러움이라는 악덕”(107)을 느꼈기 때문인데, 이는 ‘그녀’의 중학교 졸업 학력, 경제적으로 낮은 계층에 속하는 등의 요소와 맞물려 있다. 이러한 관계 구도에 ‘그녀’ 역시 다른 생각을 갖지 않는다. 이들은 불균등한 관계를 암암리에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당연함으로 여겨지는 것들은 ‘틀’이 되어 사유와 행동의 방식을 관할한다. 가령 「구두」에서 중산층 가정의 주부라는 자리는 화자에게 그녀의 사유와 행동 나아가 그의 감각 방식마저 조직하는 ‘틀’이 된다. 때문에 가사도우미 면접을 보러 온 ‘여자’의 낡은 구두가 전해 주는 감각은 그이의 사회적 신분과 한계를 결정짓는 것으로 화자에게 여겨진다. 화자의 ‘틀’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녀’의 ‘틀’을 결정짓는 셈, 때문에 ‘그녀’가 그 ‘틀’을 벗어난 것으로 간주된 행동이 감지되면 이는 화자에게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신호로 해석된다. 이러한 흐름은 그녀의 ‘틀’이 단순히 ‘가정의 주부’라는 것으로 규정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중산층’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의 구조적인 측면과 맞닿아 있음을 일러준다. 즉 중산층과 하층의 계급투쟁이 감각의 차원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화자가 ‘그녀’를 두고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경쟁적 지망자로 여기는 순간, 이는 불안의 정념으로 화자를 엄습해 온다.
    사회·경제적 측면 외에도 ‘틀’은 여러 차원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가령 「타투」에서는 “지나는 그에게 무성(無性)에 가까웠는데”(166면)라는 표현이 아버지인 ‘그’의 ‘틀’을 규정한다. 모녀 관계에 있어 딸의 성적인 측면이 배제된 테두리 안에 있을 때 ‘그’는 불안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 이는 딸의 신체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서도 드러난다. 「오가닉 코튼 베이브」에서는 건강보조식품, 요가, 유기농이라는 요소들이 건강을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을 준다는 점에서 하나의 ‘틀’로 작동한다. 「내성적인 살인의 경우」에선 소설가 오난영이 화자인 미옥에게 ‘미옥씨’라 부르며 곁을 잘 주지 않으려는 태도 또한 하나의 ‘틀’이다. 「집이 넓어지고 있어」에서는 여섯 평이라는 오피스텔 크기와 부동산 임대차계약서가 ‘틀’로 제시된다. 집이 갑자기 넓어지게 되자 화자는 불안해하는데, 임대차계약서를 살펴본 후에야 안정을 되찾는다.
    이와 같이 최정화의 소설에서 발견할 수 있는 ‘틀’들은 인물들에게 자신의 자리와 정체성 혹은 신체를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을 준다. 이는 ‘틀’이라는 범주 안에서의 움직임들은 대개 앎의 영역에 속해 있는 것들이기에 언제나 통제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된다는 점에서 주체에게 안정적인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틀’은 주체의 사유와 움직임, 나아가 감각의 방식을 조직하고 제약한다는 점에서 그의 한계를 구성한다. 때문에 ‘틀’은 삶의 가능성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불가능성이 된다. 즉 자신의 삶을 가리는 안대와도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팜비치」의 ‘그’가 예민해진 자신의 감각에 대해 잘 알아차리지 못했던 까닭은, 그가 ‘틀’이 만들어준 안대로 눈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란 책」은 ‘타자의 시선’이 ‘틀’의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틀’이 지닌 독특함을 잘 드러낸다. 소설의 도입부에서 ‘그녀’는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인테리어에 열을 올린다. 이를 위해 인테리어 잡지들을 정기구독하고 “연습, 또 연습”(210면)을 거듭한다. 그렇게 유아용 책상을 책장으로 탈바꿈시키고 그에 어울릴 아이템으로 파란 책을 찾는데, 그게 『존재와 시간』이었다. 어느 날 집에 찾아온 남편의 직장 동료 중 한 사람에게 『존재와 시간』으로 인해 “당신이 주말 드라마에나 목을 매는 다른 여자들하곤 다르다는 걸.”(217)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이는 또다시 ‘그녀’가 행동할 방향을 지정하는 ‘틀’로 기능한다. ‘그녀’는 다른 여자들과는 다른 자신을 원하는 타인의 시선에 부응하기 위해 세미나에 참석하기 시작하면서 변하기에 이른다. 즉 인테리어에 열을 올리던 사람에서 ‘현존재’와 ‘죽음’을 사유하는 사람으로. 그런데 이와 같은 변화는 철저하게 타자의 욕망이 부과하는 명령에 부응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한다.
    ‘틀’은 안정감을 주는 한편 정신과 신체를 지도한다는 점에 있어 신경증적인 주체의 욕망, 즉 타자의 욕망에 대한 욕망이다. 「구두」의 화자가 안정을 되찾는 순간은 남편이라는 이름의 타자가 욕망하는 대상이 여전히 자신임을 알게 된 때다. 「오가닉 코튼 베이브」에 등장하는 요가와 유기농 등의 것들 역시 타인의 권유로 맹신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녀’의 ‘틀’ 역시 타자의 시선에 의해 구축되어 있음을 일러준다. 경쟁과 인정이라는 구도는 타자가 던지는 명령에 종속되어 있다. 「홍로」의 ‘그’ 역시 ‘그녀’를 자신의 아내가 될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거짓말을 하게 한 까닭 역시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다. “순전히 그의 자존심 문제였다.”고 ‘그’는 생각하지만, 실상은 “대진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다.”(107면)라는 말처럼 ‘그’ 또한 타자의 시선에 종속되어 있는 주체다.
    ‘틀’은 소설과 인물들에 따라 상이하게 나타나지만 하나의 원리에 충실하다. 타자의 인정을 받는 일, 즉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기. 이는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벌이는 개체들의 투쟁에서 법으로 군림한다. 『지극히 내성적인』의 특이점은 ‘틀’이 위협받으며 그 이면에 감추고 있던 것들이 드러나는 장면들에서 찾을 수 있다. 가령 「오가닉 코튼 베이브」에서는 후쿠시마에서 온 솜 인형으로 ‘틀’이 안겨 주었던 안전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는 장면이나, 「대머리」에서 사촌의 폭로로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는 이유를 ‘그’가 깨닫게 되는 장면 등이다. 이러한 장면들은 주체의 정체성을 지켜주던 ‘틀’이 더 이상 안정적인 성질의 것이 아닐 수 있음을 넌지시 일러준다.
    「타투」에서 나타난 틀의 붕괴는 주체와 틀의 관계가 어떠한 것인지 현시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딸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는 자신의 틀(딸을 ‘무성’으로 여기는 눈, 딸의 친구들에 대한 믿음, 그리고 홀로 딸을 잘 키워야 한다는 마음 등)이 깨지는 순간과 만난다.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그’는 딸의 몸에서 타투를 발견하는데, 그 모습은 “나뭇가지 위에 새가” 앉아 있는 것으로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나뭇가지가 아니라 뱀이었다. “뱀은 혀를 날름거리며 당장이라도 새를 잡아먹을 기세였다.”(181면)고 묘사되어 있다. 이는 틀에 대한 유비이기도 하다. 새가 앉아 있는 나뭇가지처럼 ‘틀’은 인간의 사유와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거처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사유와 행동을 억압하는 기능을 한다. 이처럼 최정화의 소설은 일상에 균열을 내면서 ‘틀’이 가리고 있던 실재를 수면 위로 솟구치게 한다.
    최정화의 소설들은 우리 삶의 원리로 보였던 것들이 실제로는 허상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하는 물음을 던지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자신이 딛고 있는 곳이 견고하지 않고 실상은 액체처럼 유동하고 있다는 점을 깨달을 때 인물들은 방황한다. 그러나 이로써 작가는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 이르지는 않는다. 다만 실재의 틈입을 마주하며 불안해하는 인물들이 벌이는 다양한 행동과 생각을 소묘할 뿐이다. 가령 「틀니」와 「홍로」에선 상대보다 열등한 위치에 놓였다고 생각한 이들이 어떤 계기로 자신의 또 다른 욕망에 눈을 뜨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는 비대칭적이었던 위계가 역전되는 결과를 온다. 「파란 책」에서는 삶의 세속적인 측면으로부터 존재의 본질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관심을 옮겨가는 이가 등장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변화는 근원적이지 않다. 단지 자리바꿈만이 일어났을 뿐이다. 「타투」에서 자신에게 부과된 틀의 실상이 무엇인지 일러주는 딸의 타투를 다시 카메라의 사각형 프레임에 다시 담는 것처럼, ‘틀’은 잠시 제 지위를 위협받더라도 그 견고한 자리를 잃지 않는다. 「오가닉 코튼 베이브」의 그녀가 자신의 안전을 위해 그 ‘틀’을 심리 상담으로 전이시키는 것처럼, 불안을 느끼는 주체들은 다시 자기 보존을 위해 ‘틀’을 원한다. 자기 보존에 충실하고자 하는 노력은 어쩌면 그들에게서 나타나는 윤리적 발현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자기 존재의 보존만 일삼는 태도는, 그것이 타자의 인정을 원하면서도, 타자와의 관계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어떤 어긋남을 보여준다. 이들에게 타자는 욕망의 대상이거나 경쟁자, 혹은 예속의 대상으로 머무를 뿐이다. 이러한 관계는 상호주체적이지 않고 위계적일 뿐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변화가 일어나더라도 이는 근원적인 변화를 수반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틀’이 만들어 놓은 범주 안에서 움직일 뿐이다. 이 지점에서 「팜비치」의 ‘매부리코’가 ‘그’에게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해주는 게 최선이라고 조언”하는 대목은 『지극히 내성적인』의 인물들에게 결여된 것이 무엇인지 일깨운다. 심지어 앞으로 자신의 행동이 어떻게 될지 책임을 상대자에게 떠넘기는 「지극히 내성적인 살인」의 미옥처럼 인물들이 보이는 행동은 자기 위안만 일삼는다는 점에서 어두운 미래를 현시한다.
    최정화의 눈은 이처럼 보이지 않는 ‘틀’에 구속되어 있던 사람들에게 그 보이지 않던 것이 현시될 때 좌충우돌하는 모습을 집요하게 따라간다. 시차적인 관점을 통해 인물이 알고 있는 것과 여전히 알지 못하는 것들을 계속 충돌시킨다. 특정한 길을 일러주기 위해 사건에 개입하기보다는, 사건 속에서 인물들이 겪는 감각의 흐름을 충실히 포착하여 전할 뿐이다. 그러나 소설 속의 인물들이 모든 윤리를 폐기한 것처럼 나아가는 경향을 보이더라도 소설가의 눈은 충돌 지점들에서 새로운 윤리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레비나스의 말처럼 “윤리는, 이미 그 자체로, ‘보는 것/관점’이다”. 이미 그가 바라보고 있는 관점은 지극히 윤리적인 것이다.
    ‘틀’을 흔들리게 하면서 그것이 은폐시켰던 측면이 드러나는 순간 벌어지는 인물들의 행동들을 제시함으로써 소설가의 눈은 독자들을 하나의 실험 무대로 인도하는 작용을 불러일으킨다. 소설가의 눈은 일상에 잠재해 있던 삶을 위협할지도 모를 낯선 기미를 독자들의 눈앞에 드러냄으로써 어떤 변화를 촉구한다. 익숙한 것들 안에 낯선 것들이 도사리고 있음을 일러주는 가운데, 독자에게도 익숙한 것들이 다르게 보일 수 있음을 전한다. 그저 일상에 묻은 평범한 얼룩으로 보였던 것이 실은 나의 존재를 통제하던 것으로 드러날 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할 것인가. 혹은 익숙한 것에 그대로 안주할 것인가. 이 지점에서 「지극히 내성적인 살인의 경우」의 마지막 대목은 인상적이다.

 

    이제 고개를 들어 나를 보세요. 당신의 얼굴이, 당신이 지은 표정이, 당신이 나를 보고 떠올리는 감정이, 그다음 장면을, 내가 할 행동을 결정할 것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책을 내밀게 될지 종이칼을 내밀게 될지는 오로지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160면)


   

   이는 소설 속의 인물 오난영을 향한 것이지만, 마치 독자에게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 “그다음 장면을, 내가 할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당신의 몫이다.

 

 





작가소개 / 김태선(문학평론가)

- 201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문장웹진 2016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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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1
과거를 보는 미래 SF

[에세이] 과거를 보는 미래 SF 곽재식 며칠 전 나는 한 행사에서 SF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소개하는 발표를 하나 맡게 되었다. 발표가 다 끝나고 질문 답변 시간이 되었는데 청중 중 한 분이 “SF라면 미래를 생각해 봐야 하는데, 왜 옛날 SF를 소개했느냐?”라고 질문했다. 그날 행사 중에는 답변을 짧게 드렸지만 이 내용은 한번 깊게 따져 볼 만한 재미난 주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한번 해보려고 한다. 명작 SF로 자주 손꼽히는 1970년대 영화로 <>이라는 할리우드 영화가 있다. 찰턴 헤스턴이 주연을 맡아 대형 영화사에서 배급한 그야말로 정통 할리우드 영화인데 그러면서도 비참한 미래의 모습을 예상해서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 결말도 뻔한 할리우드 영화의 행복한 결말이라고 말하기는 매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가기에 눈에 뜨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맨 마지막에 주인공이 외치는 대사는 SF 영화사에서 유명한 대사 순위를 꼽으면 상위권에 자주 오를 만큼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미래는 인구가 너무나 빠르게 늘어났기 때문에 멸망해 가고 있는 세상이다. 인구가 너무나 많은 데 비해 식량과 자원은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굶주리고 모든 물자가 부족해 다들 비참하게 살고 있다. 영화 제목인 “소일렌트 그린”이란 식량이 부족한 세상에서 특별히 개발해 보급 중인 신형 인공 식품을 말한다. 그러므로 <>은 19세기 맬서스의 등장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미래 인류의 멸망 시나리오라고 철석같이 밀었던, 맬서스 함정을 정통으로 다룬 영화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성장한다.”라는 말은 어지간하면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지구는 망한다, 그러니 사람이 많은 것은 해악이다,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은 곧 “사람이 곧 모든 파괴의 근원이며, 사람이 없어져야 지구가 살아난다.”는 생각으로도 자주 이어지기도 한다. 재미난 사실은 이 영화에서 다루는 멸망해 가는 미래가 2022년이라는 점이다. <>은 1973년에 개봉된 영화이므로 이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이란 영화가 제작되던 1972년으로부터 50년 후를 말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이 SF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의 미래라는 시간은, 2024년을 사는 현대의 우리에게는 2년 전의 과거가 되었다. 나는 영화를 보는 과정에서 이렇게 시간의 꼬임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신비롭다. 게다가 요즘 이 영화의 내용을 보다 보면 더욱 중요한 사실도 깨달을 수 있다. 실제 2022년이 인구가 너무 많아 식량 부족으로 멸망하는 시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2020년대는 인구가 너무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구 감소와 초고령화가 문제인 시대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 겪고 있는 문제도 아니다. 한국에서 인구 문제가 워낙 극심하게 나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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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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