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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모임 - 한국 소설의 새로운 생태계

  • 작성일 2017-12-01
  • 조회수 2,061

[기획]

 

 

독자모임

- 한국 소설의 새로운 생태계

 

 

참여 : 정홍수(사회, 문학평론가), 장수라, 이영순, 김보배, 김지윤

 

 

 

[caption id="attachment_139820" align="aligncenter" width="230"]여성민 「하루」
《문장웹진》 2017년 11월호
[/caption]
[caption id="attachment_139821" align="aligncenter" width="230"]김태용 「안개와 잡담-사운드에세이0」
《문장웹진》 2017년 11월호
[/caption]
[caption id="attachment_139821" align="aligncenter" width="230"]구병모 「어느 피씨주의자의 종생기」
《창작과비평》 2017년 여름호[/caption]

 

정홍수 : 오늘 다룰 작품은 여성민 씨의 「하루」(『문장웹진』 11월호), 김태용 씨의 「안개와 잡담ㅡ사운드 에세이0」(『문장웹진』 11월호), 구병모 씨의 「어느 피씨주의자의 종생기」(『창작과비평』 2017년 여름호)입니다. 먼저 구병모 씨의 작품부터 이야기해볼까요? 이 작품은 최근 한국문학을 둘러싸고 SNS라는 새로운 매체 환경에서 벌어지는 여러 현상들을 흥미롭게 포착하면서 문학, 혹은 글쓰기의 장에 도착한 변화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들죠. 자기 풍자의 아이러니가 착잡하면서도 만만찮은 깊이를 얻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김지윤 : 맞아요. 한참 동안 SNS 상에서 이슈가 되었던 현상들을 잘 포착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느 피씨주의자의 종생기」 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피씨주의자’라는 명칭이 다양한 함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P씨’라는 주인공의 이름이 될 수도 있고, PC라는 컴퓨터 혹은 넷상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고, 또 ‘Political Correctness’라는 ‘정치적 올바름’의 약자가 될 수도 있고요.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이야기로 잘 구축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특히나 문학을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하나의 ‘윤리’로 재단하는 것이 집단주의, 전체주의의 분위기를 타면서 ‘혐오’로까지 변모하게 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인상적이었어요.

 

정홍수 : 제목에 ‘종생기’라는 단어가 들어 있는데, 바로 떠오르는 작품이 있죠. 이상의 단편 「종생기」 말이죠. 고백체나 ‘나’라는 인물의 분열 양상 등에서 선행 텍스트를 염두에 두고 쓰여진 작품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SNS 특유의 혼잣말 하기에 맞는 소설의 문체를 찾아내려고 한 점에 작가의 고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김보배 : 예, SNS에서 사용하는 문체가 가감 없이 드러나서 좋았어요. 진짜로 댓글을 보고 있는 것처럼 생생했어요. P씨의 작품에 대한 해명이 어떤 식으로든 변명으로 재구성되어 네티즌에게 받아들여지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 리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문체가 큰 몫을 한 것 같아요.

 

이영순 : 긴 문장들이 많은데도 선명하면서도 생생하게 느껴졌어요. 리듬감이 있어서 읽기도 수월했고요. 그러면서 날카로운 지점도 있었어요. 정말 이 작품에 꼭 맞는 문체라고 할까요. “사람들은 생각보다 날카로운 면도날들을 저마다 혀 밑에 숨기거나 손끝에 꽂고 있어서, 종합순위 근처에도 가지 못한 이 농구 이야기 역시 서사의 포가 떠지는 걸 피해갈 수 없었다.” 이런 대목은 생생하면서도 날카로워서 살아 있는 문장이라고 느꼈어요.

 

장수라 : 문장이 길고 집요하게 물고 파헤치는 면에서 독특했어요. 제 개인적으로는 만연체를 좋아하진 않지만 소설 특성상 의도적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SNS상의 문제점과 명료하게 드러나는 특유의 아이러니들이 재미있게 표현되었다고 봐요.

 

김지윤 : 저 역시 앞에서 말씀하신 것들에 동의해요. 화자가 발화하는 방식이 독특하다고 생각했는데요. 문장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지만, 오히려 읽기 힘들다거나 버겁다는 느낌보다는 가독성 있게 잘 읽혔던 것 같아요. 그게 이 소설의 분위기와도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SNS 공간을 직접 보는 것처럼 리얼하고 생생하다고 느꼈어요. 사람들이 올리는 짤막한 글들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맞아, 나도 SNS를 할 때 저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곤 했었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요.

 

정홍수 : 이 소설을 보면 P씨가 쓴 작품에 대해 네티즌들이 상당히 공격적인 반응을 보이잖아요. 외국인 노동자나 결혼 이주 여성을 부정적으로 다룬 것, 장애인을 다룬 것, 여성을 수동적인 인물로 그린 것 등에 대해 집요한 공격을 퍼붓습니다. 작가로서야 당연히 억울한 측면도 있겠고요. 이즈음 SNS에서 많이 목도하는 일이기도 한데, 이런 현상에 대해 어떻게들 생각하세요?

 

김보배 : 댓글을 다는 사람들의 경우 문학 작품을 문학 작품으로 볼 줄 아는 안목이 어느 정도 필요하고, 글을 쓰는 사람의 경우 댓글을 댓글로 봐줄 줄 아는 관대함이 또 얼마큼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무조건 받아들여지거나 무시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에요. 아무래도 1대 다수의 문제에서 1이 양보하는 게 빨라 보여요. 그렇지만 무조건적으로 댓글 의견을 따르기보다, 선택적으로 양보할 부분을 추려내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만 폭력적이고 무분별한 인신공격에는 강력한 제재가 필요해 보여요. P씨는 댓글 의견에 대응해가는 과정에서 결국 스스로를 아예 삭제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안타까웠어요.

 

장수라 : SNS가 활성화된 이후로는 독자와 화자가 바로 맞닿는 경우가 많지요. 저자와 동일시하는 기대감이 많아졌고, 걸러지는 망이 없이 작가의 일상과 가치관이 많이 노출되기도 하잖아요. 저는 이 소설 보고 최근 김광석 사건이 생각났어요. 어떤 기사에서 이런 말을 하더군요. 소크라테스의 악처나 로댕의 처 이야기를 예를 들었는데, 법적 근거 없이 막연한 사회적인 윤리를 내세워서 한 사람에게 집중적인 분노를 드러낸 경우라고요. 집단적이고 대중적인 심리가 작동한 것 같다는 이야기죠. 이 소설을 읽으면서 피씨가 안됐다는 생각을 했어요. SNS 안의 관계에 대한 회의감도 들었고요. 쉽게 인격살인 등의 폭력성이 난무한 현실에서 사람들이 친밀하게 다가오지만 진짜 친밀한 것인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유명 작가라면 독자들의 궁금증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줄 의무는 있지만, 다양한 사람들의 반응에 일일이 대응하기엔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요.

 

김지윤 : 개개인마다 판단하는 도덕적, 윤리적 기준이 다르잖아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고 어떻게 쉽게 말할 수 있겠어요. 물론 P씨가 쓴 작품 안에서 소수자를 다루는 방식은 충분히 공격받을 수도 있겠지만, 네티즌의 반응은 자신의 기준과 다르다는 이유로 타인의 생각을 무시하고 짓밟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나는 옳고 너는 틀렸어, 너는 왜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거야?’라는 생각을 언어로써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느낌이었거든요. 의견을 표출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니까 제재할 수는 없겠죠. 사실 SNS라는 공간이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공간이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서로를 존중하는 자세도 필요하죠. 쉽진 않겠지만요.

 

이영순 : 저는 사회적인 어떤 것, 즉 살인, 성폭행 등은 분명히 옳고 그르다고 할 수 있는 지점이 있지만, 문학이라는 건 맞고 틀리다, 옳고 그르다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어떤 음악에 대해 맞고 틀리다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요. 작품에 대해 일부 악플러들은 개인적인 의견을 내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견과 다르면 무조건 틀리다고 보기 때문에 그게 문제라고 생각해요. 이 소설에서도 문학 작품을 두고 틀렸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문제가 생기는 거고. 물론 ‘의견’과 ‘맞고 틀리다는 가치판단’ 사이의 구분이 모호하긴 하지만, 지켜져야 할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이 마구 뒤섞여 작품 활동을 간섭하고 좌지우지하려는 건 독자들에게도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하면, 이래서 문제라고 하고, 저렇게 하면 저래서 문제라고 한다면, 사실 작가는 완벽한 사람이 아닌 건데, 뭔가 완벽성을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지면서 한 작가의 창작 활동을 원천적으로 불가하게 하는 것 같아 거친 악플 행위가 불편했어요.

 

정홍수 : 댓글의 익명성은 비판의 공간을 넓히기도 하지만 부정적인 측면도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일단 말에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거죠. 또 길게 타래를 만들어서 상당히 전문적으로 비판의 댓글을 다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그냥 툭툭 말꼬리 잡는 식의 비판들이죠. 작품의 맥락을 살피는 차분한 비판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윤리의식의 확장에 대응하는 새로운 비판이 문학 작품에 가해질 수 있겠고, 그런 면에서 지금의 SNS가 어떤 과도기적 기능을 하는 측면도 분명 있겠죠. 그러나 문학 작품에 대한 비판은 기본적으로 이해와 공감을 포함하지 않을 때 공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SNS가 문학 작품을 두고 제대로 된 토론이 전개될 수 있는 장인가 하는 질문이 남는데, 저는 회의적입니다. 그렇지만, 이 소설이 SNS의 그런 부정적인 측면에만 주목하는 소설은 아닌 것 같았어요. 다른 차원의 의미 있는 이야기도 담겨 있는 것 같아요.

 

이영순 : 저는 작가가 하는 질문이 느껴졌어요. P씨의 마지막 작품이 ‘개과천선한 문제아들의 농구대회 출전 우승기’거든요. 거기에 대해서 또 악플러들이 말하길, 소년원 출신 애들이 우승하는 게 모순이지 않느냐? 그런 비판을 쏟아내는데, 저는 그걸 보면서 그럼 한 번 실수한 사람은 평생 용서받지 말아야 한다는 거냐는 질문이 들더라고요

 

정홍수 : 그런 게 문제의 한 면만 보는 거죠.

 

이영순 : 그런 아이들이라고 하더라고 뉘우치고 변화하고자 한다면 새로운 기회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선 안 된다고 하는 악플러들을 보니 화가 났어요. 작가가 P씨의 마지막 작품으로 농구대회 출전 우승 이야기를 넣은 건 그런 질문도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왜냐하면 이 작품에서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독자들이 한 면만 보고서 쉽게 판단하고 이야기해 버리는 부분들이 많은데, 작가는 다면적으로 이어지는 궤적을 그리고 싶었다고 생각해요.

 

정홍수 : “그리 오래지 않은 경험에 따르면 그곳의 말들은 전기포트 속 물방울이었다.” “포르르 끓다가 부서지는 거품이 수면에서 다시 합류했다. 일부는 증발해 공기 중을 떠돌았다. 그대로 두자 물은 또 식었다.” 소설에 이런 표현이 나오죠. SNS의 행태를 두고 나온 전기포트의 비유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때를 또 보아 스위치를 누르면 다시 끓어서 방울진 거품을 피워 올렸다. 그 과정을 반복하면 거품의 토대가 되는 수면의 높이만큼은 어느새 눈에 띄게 낮아졌다.” 결국 문제의 토대가 되는 심각한 지점은 제대로 검토되지도 않은 채 또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곳으로 넘어가죠. 이게 지금 SNS에서 떠돌고 있는 담론의 작동 양상 아닌가 싶은데, 작가가 아주 적절하게 포착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응되는 표현이 소설 마지막에 나오죠. “펜 끝에서 한 번 번져나가기 시작한 말들이 그리는 궤적을 바라보는 일은 나름대로 의미 있었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해온 일들은 흘러가는 말들을 포착하여 언제 부셔져도 이상하지 않을 물방울의 표면에 새겨나가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문학에 대한 자조 같은 것. 만약 이런 게 문학이라면, 이제 그만하겠다는 의미 같죠. 씁쓸한 대목입니다. “그리하여 지금은 원래의 가장 올바른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그리고 말의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가장 적절한 시기이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비장하기까지 한데, 이 소설이 전반적으로 풍자적인 톤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더 울림을 낳는 것 같습니다. 문학이라는 게 이렇게 소진될 수 있는 것이냐는 질문도 있는 것 같고. 또 다르게는 문학 엄숙주의에 대한 어떤 회의, 환멸도 없지는 않은 것 같고요. 복합적인 울림이죠.

 

이영순 : 생각해보면 문학이라는 건 문학 자체일 뿐인 건데, 문학은 이런 것이어야 한다고, 독자들에게 주입시켜온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걸 보는 독자들은 문학에 대해서도 너무 과도하게 이상적인 것을 요구하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문학이라는 건 자유로워야 하는데, 자유롭지 못하게끔 주입된 측면으로 인해 엄숙주의에 대한 환멸을 가져온 지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막상 많은 작품들을 읽다보면 작가들이 꽤 집요하게 다양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도 발견하게 돼요.

 

김보배 : 네. P씨의 작품에도 그렇고 현실 문학 작품에도 그렇고 때로는 정도가 지나칠 정도로 엄한 잣대를 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설명될 수 있는 부분만 이야기한다면 그건 소설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김지윤 : 맞아요.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이 문학을 대하는 태도와 이슈를 대하는 방식을 함께 비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소설이라는 것은 무릇 이래야지, 소설을 쓰는 작가라면 응당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야지. 너는 작품에서 이런 식으로 인물들을 다루고 있으니 필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어’라는 태도가 P씨에게 가해가 될 수 있을 거고, 이런 것들이 앞에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문학 엄숙주의’를 초래하고 있는 거고요. 또 지금은 이렇게 한 사람을 비난하고 손가락질 하고 있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면 다 잊힐 일들이잖아요. 사실 SNS 같은 인터넷 공간이라는 게 다 그렇죠. 어떤 현상에 대해 한참 뜨겁게 끓어올랐다가, 시간이 지나면 스르르 사그라지면서 자연스럽게 잊혀지고, 그때 그런 일이 있었지, 그런 일이 있었나? 하고 생각하잖아요. 그걸 ‘전기포트 속의 물주전자’로 잘 표현한 것 같아요.

 

정홍수 : 실 SNS는 상당한 정도로 유희의 공간이기도 한데, 다들 너무 정색하고 도덕 선생이 되어 있는 거잖아요. 거기에 대한 씁쓸한 자조와 성찰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문학이 일종의 도덕관념과 일대일로 환치되고 마는 것은 아니겠죠. 현실이라는 지점으로 일방적으로 환원되거나 소진될 수 없는 측면도 분명 있는 거고요. P씨가 결국 소설 화자 자신이기도 했다는 반전도 SNS의 다중 캐릭터를 반영한 참신한 착상이었다는 점도 빠뜨릴 수 없는 대목 같네요. 이제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볼까요. 여성민 씨의 「하루」는 의미나 서사로 환원되는 소설에 대한 반발 같은 걸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구병모 씨의 작품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한국 소설의 바깥을 사유할 계기를 줍니다.

 

장수라 : 영감을 받았던 소설이었어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나 『야간 비행』 같은 소설처럼 명상을 하게 되는 느낌이었죠. 이 소설은 상징으로 읽어야 하는 소설 같았어요. 전체적인 스토리가 ‘사랑이 시작되고 사랑이 끝나는 과정’을 그린 게 아닌가 생각했어요. 군데군데 반복되는 말이 많고 사실인 것과 사실적인 것을 확인하려는 말들 속에서 리듬이나 음악성이 느껴졌어요. ‘마가렛’의 꽃말을 찾아보니까 진실한 사랑인가, 그렇더라고요. 그걸 상상하고 읽어서 그런지, 마가렛을 든 남자, 총 등을 제 안에서 상상, 해석하며 읽는 기쁨이 컸어요.

 

이영순 : 저는 누구나 한때는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고, 오래전에 소중하게 간직했지만, 그것을 상실한 이야기라고 읽었어요. 또 그걸 추억하고 기억하고자 하는 이야기요. 오래전에 소중하게 간직했던 것은 사랑일 수도 있겠고, 다른 무엇일 수도 있겠죠. 첫 부분 “따뜻한 해변, 그 해변엔 무척 행복한 사람들이 있고, 우리도 그중 하나라는” 문구를 읽으면서 누구나 소중한 것을 간직하던 한때라는 정서가 좀 아프게 다가왔어요. 이후 해변에서 레드 제플린의 음악이 나오는 부분을 읽으니 지나간 걸 추억하고자 하는 슬픔 같은 게 느껴졌고요.

 

김보배 : 마가렛을 들고 있는 사람은 반드시 총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두 명의 밥이 반복해서 말하잖아요. 마가렛의 꽃말을 찾아보니 ‘진실한 사랑’, ‘예언’, ‘비밀을 밝힌다’, ‘사랑을 점친다’더라고요. 마가렛과 총을 놓고 보니 ‘사랑은 죽음’이 아닐까, 하는 질문이 남더라고요.

 

여성민 시집, 『에로틱한 찰리』, 민음사, 2015년.

 

김지윤 : 제게 여성민 작가는 시집 『에로틱한 찰리』에 대한 이미지가 강렬하게 남아 있었거든요. 시인의 말이 “톰과 찰리와 스티븐에게. 우리 이제 서로를 증오했으면 해. 고맙고 사랑하고 지겨우니까”였는데, 이게 무척이나 인상적이었거든요. 그 시집의 느낌을 소설에서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소설이 주는 이국적인 느낌과 분위기가 ‘낭만적이다’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는데요. ‘밥’ 이라는 이름, 뜨거운 모래와 따뜻한 해변, 마가렛 꽃을 들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남자, 총, 멸치를 구워먹었다는 것, 당근 밭 등등 우리가 현실에서 쉽게 마주할 수 없는 것들이 등장하는데 그런 공간이나 인물, 행동을 상상하게 만드는 점들도 좋았어요. 그리고 제 상상 속에서는 이 모든 것들이 아름답고 예쁘게 그려졌었거든요.

 

장수라 : 저는 마가렛, 유부녀, 총, 마가렛을 든 남자의 구도 속에서 ‘총’이 성적 상징으로 읽혔어요. 남녀의 관계가 시작되기 전 유혹의 과정으로 읽히더라고요.

 

정홍수 : 아, 그렇게까지요. 통상 총에 그런 이미지가 있긴 하죠. 이 소설에서 특히 좋았던 건 무엇인가요?

 

장수라 : 보들레르의 시가 녹아 있는 것 같았습니다. 감동적으로 느꼈던 장면이 7쪽에서 8쪽에 “보들레르의 아버지는 보들레르에게 선의 아름다움에 관한 얘기를 많이 해주셨어. 선이라는 것은 그런 거잖아. 형태를 버리면 무너지는 거잖아. 그녀의 육체가 어땠는지 그녀의 영혼이 무엇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던 거야. 그녀를 하나의 선으로 이해했으니까. 사랑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어. 무너지면 무너지는 대로 아름답다고 느꼈지. 종교라든지 법이라든지 하는 것들은 형태잖아. 보들레르는 버렸지. 시도 그래. 리듬이라든지 각운이라든지 버렸지. 저무는 순간과 같은 거야. 여기 해변이 있잖아. 우린 저물기를 기다리고 있지. (…) 저물면 색이 사라지고 형태와 선만 남아”라는 내용이었어요. 아름다운 것을 기다리는 이유 같더군요.

 

이영순 : 우선 그 자체로 아름다운 작품이었어요. 하나의 해석에 갇히지 않고 많은 것을 상상하게 한다는 지점도 좋았고요. 작품 구석구석에 멸치를 구워먹고 있었어, 라는 문장이 많이 나오는데, 멸치는 작고 약한 존재잖아요. 저는 멸치라는 이미지가 아이들과 겹쳐지면서, 현실 세계에 있어서의 세월호 참사와 유사한 상징을 문학적으로 풀어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왜냐하면 소설에는 많은 이들이 복합적으로 걸려 있고, 느껴지는 정서도 여러 결이 있어서 그런 현실의 상징을 시적으로 문학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읽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다가오는 것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일 것 같아요. 저는 아래 문장들이 마음에 많이 남아요. 내 곁에 있던 모든 것들은 결국 언젠가는 나를 지나 어디론가 가게 되는 거잖아요. 나조차도 그렇고요.
 
“사랑은 어떻게 끝나는 걸까.
어떻게든. 끝나겠지.
 
해변의 흔한 것들이 함께 어두워지고 함께 무너지고 함께 사라졌다. 한무더기로 사라졌다. 최후의 해안선처럼.
 
밥과 밥이 해변에 앉아 울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 아름다운 일이 없었다.“

 

장수라 : 저는 멸치를 이렇게 이해했어요. ‘사실이라는 것과 사실적인 것이 다르다’고 했잖아요. 여기에서 사실은 멸치를 구워먹는 거예요. 일상생활에서의 삶과 죽음의 경계를 멸치를 구워먹었다는 것으로 해석했어요. ‘앉아서 멸치를 먹었을 뿐이야’--이건 현실인 거예요. 어쩌면 영순씨가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의 해석일 수도 있겠어요.

 

김지윤 : 저는 작품을 해석하기보다는 즐거운 마음으로 느끼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소설 속에서 어떤 리듬감을 느낄 수 있었던 점이 좋았어요. 특히 인물들이 대화를 나누는 방식에서 그렇게 느꼈는데요. 두 명의 ‘밥’이 이야기하는 것을 잘 살펴보면 단어들을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어요. 예컨대, ‘죽은 불가사리는 죽은 거야. 다른 밥이 말했다. 하지만 . 우리 여기에 왜 온 거야?/총을 사려고 왔지./총을? 해변에? 그래서 샀어?/샀지. 조금 전. 여긴 이 아주 많아. 해변이니까. 파라솔도. 모래도. 바람도. 파도도. 불가사리도. 호텔도. 캘리포니아 호텔. 캘리포니아도. 시카고도. 금붕어도. 구름도. 여긴 사람이 아주 많군./해변이니까. 그리고 이 말했다. 다행이야. 모든 게. /그래. 정말 다행이야.’ 이 부분만 읽어보아도 같은 단어를 한 대화에서 다시 사용하고 또 변주해서 다른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전개하고 있거든요. 그렇지만 흐름이 깨지지 않고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이런 것들이 일종의 리듬감을 느낄 수 있게 만든 것 같아요. 꼭 시처럼요. 그래서 다 읽고 난 다음에는 한 편의 긴 시를 읽은 것 같은 느낌도 들었고요. 일부러 두 주인공에게 같은 이름을 부여한 것도 이러한 효과를 노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

 

장수라 : 저는 이 글이 낭만적인 분위기로 씌어졌지만, 낭만적인 것만은 아닌 거 같아요. 냉혹한 것까지 명상의 언어로 돌려 표현한 것 같아요. 그래서 사랑이 끝나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고, 사랑과 죽음이 같은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중간에 ‘시계’ 얘기가 나오잖아요. 마가렛을 든 사람이 밥에게 시계를 줬잖아요. 시계는 기다리는 사람에게 필요한데, 밥이라는 사람들에게 이 기다림을 양도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기다림의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이영순 : 저는 마가렛이라는 게 한순간에 소비되는 느낌이 아니라, 오랫동안 소중하게 간직해왔던 어떤 것의 느낌이 들어 인내심을 가지고서 소중한 것을 기다리는 사람들에 대한 상징 같기도 했어요. 또 시계도 ‘인내’라는 이미지로 다가오면서 마가렛을 든 사람은 인내하는 사람들이므로 기다림을 양도한다기보다는 함께 기다린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정홍수 : 다양한 해석들이 가능할 것 같고, 그런 가능성을 열어둔 게 이 소설의 미덕이겠죠. 이 소설은 말 그 자체, 반복과 변주를 통해 생성되는 말의 이미지를 그저 따라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그런 소설도 가능하지 않느냐고 작가가 제안하고 있는 거죠. 서사에 갇히고, 현실에 꼭 일대일로 의미를 대응시키는 그런 방식 말고도 어떤 느낌과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소설도 가능하다는 거죠. 그걸 그것대로 즐기면 될 것 같아요. 서사의 인과에서 해방되는 즐거움이 있죠. 그런 가운데 멸치, 여수, 부산 같은 우리 현실의 고유명이 낯설게 하기의 방식으로 산포되면서 현실의 무언가를 환기하기도 합니다. 그 점이 인상적입니다. 여기서 세월호를 읽는 독법도 가능한 거죠. 나른한 해변의 풍경 속에서 아름다움의 역설을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고요. 다음으로 넘어가볼까요. 김태용 씨의 「안개와 잡담ㅡ사운드 에세이0」은 통상적 소설 문법의 해체라는 측면에서 조금 더 과격한 느낌을 주죠. 사유를 소설로 대체하고 있다고 할까. 여기는 테마가 음악이에요. 그렇다고 음악에 관해 진술하기보다는 소설이 어떻게 음악 그 자체가 될 수 있는지 질문하고 실험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 질문을 전개시키기 위해서 소설의 시공간을 10만년 뒤로 보내고 있죠. SF적인 상상력은 그 질문을 위한 시공간을 열죠. 물론 소설이 음악과 일치될 수 없는 것이고 보면, 그 실패의 흔적, 그런 가운데 열리는 어떤 틈새 같은 걸 겨냥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죠. 어떠셨어요?

 

이영순 : 저는 이 작품이 소설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서사평형 상태를 유지할 것, 서사평형 상태를 무너뜨릴 것... 이런 작가의 질문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을 것 같아요.

 

정홍수 : 소설 앞뒤를 바로 그 두 문장이 받치고 있죠. 서사평형이 통상의 안정적 서사 구조라고 한다면 그 유지와 파괴의 긴장 사이에서 이 소설이 씌어지고 있다는 자기 언급적 진술로도 볼 수 있겠네요.

 

이영순 : 네. 이 작품은 굉장히 다양하고 낯선 상상력의 원천이 될 수 있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소설에서 찾고 있는 ‘흐느끼는무늬속삭임’이란 우리가 그냥 넘겨버리는 자연 그대로의 본래적인 소리 같았습니다. 더불어 우리는 지구의 존속을 전제로 현재만을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그 현재를 뛰어넘어 소리와 음악의 존재방식을 상상하게 해주는 작품이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장수라 : 「하루」라는 소설하고 이 「안개와 잡담ㅡ사운드 에세이0」이라는 작품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소설의 서사나 구성을 잊어버리고 읽어야 할 소설이라고 생각했어요. 언어가 음악과 같아지는 것처럼, 음표를 받아쓰듯이 그렇게 서술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어떤 파동을 언어로 받아쓰고 있다는 느낌. 인상적이었던 게 “조약돌은 웃고 있네”’라는 부분이었는데. 프란시스 퐁주라는 시인이 『테이블』이라고 사물 하나를 가지고 시집 한 권을 썼었죠. 퐁주의 사물시를 대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이 소설에서도 우리의 귀를 나타낼 때 “우주의 기압과 음파와 적응하기 위해 수세기에 걸쳐 얼굴의 표피 안으로 두루마리 악보처럼 조금씩 말려들어간 귀는 보이지 않는 내부 기관이 되었을 수도 있다”--이렇게 말하면서 토성의 고리로 표현하는데 사물을 정말 깊이 있게 관찰하고 있는 소설 같아요.

 

김지윤 : ‘음악 같은 이야기란 과연 뭘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던 것 같아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다양한 감정이나 이야기들을 떠올리기도 했고요. 소설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어쩌면 우리가 하고 있는 이야기가 음악이 될 수도, 혹은 음악과 같아지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음악’을 ‘이야기’로 치환했을 때, “음악 이후의 음악, 음악을 유혹하는 음악, 음악을 증오하는 음악, 음악을 마주보는 음악, 음악을 깨뜨리는 음악, 음악 이전의 음악”--이런 서술도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 감을 잡을 수 있겠더라고요.

 

김보배 : 소설이 음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서사의 평형을 깨뜨리고자 한 시도가 재미있었어요. 서사평형이 깨지니 결국 소설에 남은 건 소리의 잔해라고 생각하니 뭔가 그럴싸하더라고요. 부스러기처럼 떨어지는 의미들과 조약돌, 토성의 고리의 이미지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장수라 : 조약돌을 상상할 때, 이 조약돌도 수많은 파도로 인해서 받은 파장이 새겨지고, 이게 오랜 시간 동안 구르며 그 자체로 음악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어요. 그 조약돌 안에 토성의 고리가 새겨지고요. 여기서 이런 말도 하죠. “고통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얼굴에 주름이 잡힌 거란다.” 인간의 고통이 주름으로 잡힌다는 말이 철학적으로 느껴졌어요. 음파와 파동이 나오는데, 그 조약돌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요. “인간은 과거로 돌아갈 수 있지만, 돌아간 과거는 이미 지나온 과거가 아니다. 이건 나의 과거가 아니야. 시간의 반복이란 없다.” 이 말에서도 느낌이 크게 왔어요. 우리는 보통 살아가면서 회상을 자주 하지요. 현재는 순간의 모임이잖아요. 회상은 결국 현재에서 다시 재구성되는 것일 텐데, 그런 측면이 잘 표현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영순 : 저도 이 사유가 좋았는데요.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소설 『싱글맨』의 ‘지난 지금’이라는 시간에 대한 상상력이 생각났어요. 『싱글맨』 도입부에 이런 문구가 있거든요. “지금은 단순히 지금이 아니다. 지금은 잔인한 암시다. 어제에서 하루가 지난 때, 작년에서 한해가 지난 때. 지금에는 모두 날짜가 붙어, 지난 지금을 모두 쓸모없게 만든다.” 김태용 작가의 “돌아간 과거는 이미 지나온 과거가 아니다. 시간의 반복이란 없다”라는 시간의 내면을 꿰뚫는 사유와 싱글맨의 사유가 통한다는 느낌이 들어요. 물론 김태용 작가의 시간의 사유는 무척 오랜 미래에까지 나아가고 있지만요.

 

이름 : 언어로 재현하기 불가능한 음악, 소리에 소설을 부딪쳐본 건데요. 특별히 인상적인 건 시간의 상상력을 도입했다는 거죠. 십만 년이라는 시간의 상상력이 있고, 그 대응물로 조약돌이 나옵니다. 그 시간, 소리를 감각하고 읽어내려고 하는 안간힘이 소설의 밀도고 긴장입니다. 그런 가운데 철학적 사유의 계기도 마련되고요. 난해하긴 하지만 서사가 아예 없진 않고, 따라갈 순 있죠. 그 수고를 지불하고 나면 얻는 게 적지 않은 소설 같았어요.

 

이영순 : 처음 읽었을 때 서사가 잘 들어오진 않았어요. 두번째 읽으니 그때야 비로소 알게 되더라고요. 이 소설에는 ‘부네’와 부네의 조수이자 뇌파애인인 ‘파스칼’과 소멸한 부네의 다른 모습인 ‘전기 올빼미 장존삽’ 그리고 ‘퐁주의 조약돌’이 존재하잖아요. “우주의 눈꺼풀에 달라붙어 있는 먼지 같았던 아이인 부네”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버려진 행성인 지구를 찾아가서 어느 날 밤부터 ‘흐느끼는무늬속삭임’을 듣게 되고 그 소리의 정체를 찾고자 해요. 끝내 소멸한 부네가 남긴 웃음소리 입자는 ‘흐느끼는무늬속삭임주파수’를 만들어 다른 은하계에 멈춰 있는 지구의 리듬을 만들어내고요. 그리고 그 소리와 리듬은 음악이 되어 우리가 걸어가는 오솔길까지 들려오겠죠. 음악의 서툰 날갯짓 사이로 ‘다른 음악’이 들려오는데, 이는 ‘다른 음악’ ‘음악 이후의 음악’이기도 하고, ‘음악 이전의 음악’이기도 하면서 ‘전기 올빼비 장존삽을 위한 반응 빠른 장송곡’이라고도 하잖아요. 또한 ‘가까운 곳에서 점점 멀어지고 멀어져서 다시 가까워지는 음악의 반대편’을 이야기하는데, 저는 결국 ‘다른 음악’과 ‘음악의 반대편’과 ‘흐느끼는무늬속삭임’ 그리고 ‘조약돌이 굴러가면서 웃는 소리’ 는 통하는 의미라 생각했어요. 어렵기는 했지만 소리와 음악을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의미로, 또 상상해보지 못했던 깊이와 너비로 떠올려보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여러 정서가 남아요. 스스로 대단하다고 착각하기도 하는 ‘나’라는 존재가 우주의 먼지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우주의 광활함이 새삼 와닿기도 했어요. 또 음악 이전의 음악이라고도 할 수 있는 ‘흐느끼는무늬속삭임’, ‘조약돌이 굴러가면서 웃는 소리’ 는 우리 삶의 근원적인 것과 맞닿아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요. “우리가 무엇을 읽을 때 무엇을 읽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작가의 질문은 예술의 존재이유를 한참 생각하게 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이 소설을 읽는 데 들인 수고가 아깝지 않았어요.

 

김보배 : 이 소설에 나오는 이미지로 귀와 토성이 있는데, 귀를 생각하니 토성의 고리가 자연스럽게 연상됐어요. 토성의 고리는 토성의 중력을 못 이겨 조각난 암석들이 빠르게 돌아가면서 생기는 거라고 알고 있는데, 그게 귀의 모습과도 닮았고 한편으로는 조약돌이라는 시가 떠오르기도 했어요. 재미있었어요.

 

장수라 : 소설을 읽는 동안 음악 용어를 찾아보는 등 어려운 대목도 많았지만 시간의 상상력 안에서 철학적인 사유를 할 수 있었던 작품이었어요.

 

김태용 소설집 『풀밭 위의 돼지』, 문학과지성사, 2007년
제2회 웹진문지문학상 수상작품집_수상작 「머리 없이 허리 없이」_김태용, 문학과지성사, 2012년

 

김지윤 : 솔직히 말하자면, 독해하기가 쉬운 소설은 아니었어요. 처음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때 굉장히 난감하기도 했고요. 예전에 김태용 작가의 「풀밭 위의 돼지」, 「머리 없이 허리 없이」를 읽은 적이 있어서, 이번 소설도 어떤 느낌일지 대략적으로 예상은 하고 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읽는 내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가장 지배적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더 여러 번 읽기도 했고요.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흥미로웠는데요. SF적 상상력을 가지고 왔다는 점, 음악과 소설을 연결시켰다는 점들을 생각해보았을 때 그 시도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게다가 이런 소설의 서사는 전부 다 작가가 상상하고 만들고 조합해야 하는 것들이잖아요. ‘흐느끼는무늬속삭임’ 이라든지 ‘메가탄소하리보젤리’ 같은 명칭들은 귀엽기도 하고 재밌기도 했어요.

 

정홍수 : 예, 오늘 이야기 나눈 소설 세 편은 어떤 식으로든 한국 소설의 외부, 바깥을 향한 새로운 화법과 상상력을 구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생각거리를 주는 것 같습니다. 구병모 씨의 작품은 한국 소설을 둘러싼 새로운 윤리 의식, 새로운 매체 환경에 대한 질문을 통해 그 외부를 이야기하고 있고, 여성민 씨와 김태용 씨의 작품은 소설의 화법이나 언어에서 한국 소설의 상상적 영토를 재정의하려 하고 있습니다. 오늘 수고들 많았습니다.

 

 

 

 

   《문장웹진 2017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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