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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모임-언제나 다층적인 읽기를 위한 좌담 4

  • 작성일 2018-05-01
  • 조회수 1,344

[기획 - 문장웹진 독자모임]

 

 

언제나 다층적인 읽기를 위한 좌담 4
기획: 제도권 바깥과 안의 초단편소설 - 『회색 인간』, 『우리는 날마다』

 

 

참여 : 김주선(사회, 문학평론가), 김영삼, 송민우, 이다희, 이서영

 

 

 

[caption id="attachment_139820" align="aligncenter" width="230"]
김동식, 『회색인간』
(서울: 요다, 2017)
[/caption]
[caption id="attachment_139820" align="aligncenter" width="230"]
강화길 외, 『우리는 날마다』
(고양: 걷는사람, 2018)
[/caption]

 

 

 

김주선 : 네 번째 《문장 웹진》 좌담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이번 좌담회는 기획 특집으로, 제도권 바깥과 안의 초단편소설을 대상으로 합니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김동식의 『회색 인간』과 초단편소설이 기획으로 묶여 나온 근작 『우리는 날마다』를 다루겠습니다. 먼저 김동식 작가의 『회색 인간』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제가 알기로 이 소설집에 실린 작품은 ‘오늘의 유머’라는 사이트에서 연재됐던 글입니다. 그곳에서 매우 많은 독자들에게 호응을 얻었고 그 힘이 출간으로 이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등단 제도 바깥에서 쓴 소설이 독자들의 요구에 의해 책으로 나온 거죠. 글을 쓰고 책을 내는 루트가 소위 말하는 본격 문학과는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작가의 이력만 가지고도 여러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이서영 : 저는 무엇보다 독자의 요구에 의해 책이 출간되었다는 점이 신기했고 또 축하해야 할 일 같았어요. 스스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고, 그것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낼 역량이 있다면 누구든지 책을 낼 수 있다고 봐요. 결국에 책이 하는 제일 큰 역할이 독자에게 읽히는 거잖아요.

 

이다희 : 등단이나 비등단을 생각하다 보면 결국 ‘쓴다는 게 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넘어가는 것 같아요. 이분은 누군가 시켜서 쓴 것도 아니고 교육을 받아서 쓴 것도 아니잖아요. 그저 쓰고 싶었고, 그래서 글 쓰는 법을 찾아보기도 했고, 특정 사이트에 글을 올려서 그곳의 독자들에게 피드백을 받기도 해서 더 좋은 글을 쓰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쓰기에 자신의 자발성이 강하게 들어가 있는데, 이런 분에게는 등단이니 비등단이니 하는 분할선이 무의미한 것 같아요.
    그런데 이와 같은 흐름이 아주 새로운 건 아니에요. 자신들이 원하는 글을 쓰고 피드백을 주고받는 경우는 꽤 된다고 알고 있어요. 실제로 제 친구도 등단을 하진 않았지만 글을 쓰고 있고 그 글을 기다리는 독자들이 있거든요. 마켓이 형성되어 있어요. 다만 이분의 책은 그런 자비 출판의 수준을 넘어서 있다고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송민우 :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인터넷이 발달한 이후 생산된 판타지나 무협소설, 또 웹 소설이 출간되는 구조나 이 책이 출간되는 구조가 크게 다르진 않은 것 같아요. 결국에는 독자들의 반응을 보기도 해야 하고요. 그런 차원에서 읽고 소비하는 문학을 좋아하는 독자가 있고, 다른 걸 기대하고 싶은 독자가 있다고 한다면, 등단 비등단의 프레임은 필요 없는 것 같아요. 독자의 선택이나 취향의 문제로 옮겨 간다는 생각이에요.

 

김영삼 : 우리가 등단을 놓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등단이라는 제도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문학권력의 문제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실제로 글을 쓴다는 본질적 행위에는 등단 여부가 동기로 작동하지는 않으니까요. 그러면 문학권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생각해 보면, 저는 그게 출판 권력인 것 같아요. 이 문제를 말하는 것이 등단 문제보다 더 생산적일 것 같아요. 우리나라에 몇 개의 메이저 출판사가 있고, 이들이 갖는 시장지배력과 선도적 역할 때문에 자연스럽게 힘을 갖게 되거든요. 소비자들에게는 자본이 투자되는 마케팅이 영향을 미치는 거고,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는 문학잡지를 출간하는 출판사들의 영향이 아무래도 크겠죠. 지면을 갖고 있는 곳이니까. 그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저는 김동식의 소설이 출판되는 과정에 자연스럽게 주목하게 됐습니다. 출판 과정이 재밌었어요. ‘지방시’라는 글로 시간강사들의 처지를 알렸던 ‘김민섭’ 씨가 문학 제도 바깥에 있는 김동식의 글쓰기를 발견했죠. 두 사람 모두 ‘바깥’이라는 의미에서 통하는 바가 있어 보입니다. 출판사도 메이저가 아니구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글을 쓰고 싶어서 쓴 이야기들이 독자들의 호응을 얻어 출간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아주 자연스럽다는 점입니다. 자본이나 권력이 개입되기 전에 일어난 일이라는 점이 좋아요.

 

이서영 : 저는 ‘등단이 왜 하고 싶지?’ 이렇게 스스로 물었을 때, 그것이 거대한 시스템으로부터 승인 받고 싶은 욕망이고, 가족과 친구들에게 보여줄 명패를 갖고자 하는 마음이 아닌 걸까 싶어요. 그러면 제 기준에 등단은 공준 된 집단으로부터 작가라는 지위를 인정받는 과정이 아닌 걸까 싶고요. 이에 대해서 저는 솔직히 말해 양가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모종의 시스템으로부터 승인 받아 어떤 안심을 얻고자 하면서도,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 내가 하고 싶은 말과 미학적으로 탄탄한 고집을 만들어 가며 살고 싶다는 마음도 있어요. 지금은 후자의 마음이 더 커요. 이렇게 시스템-승인에 대한 상상력과 강박이 계속되면, 등단이라는 것은 그저 ‘문학장’이라는 회사에 입사하는 것과 다름없는 관례가 될 뿐이겠구나 싶어요. 가끔은 문단이라는 틀 자체의 붕괴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정확히는 기형적으로 뭉쳐 있는 힘이 으깨져야 할 필요성인 것 같아요. 그런데 이 힘이라는 게 마치 안개를 뭉쳐 놓은 것처럼 허황되었다는 생각도 들어요. 물론 지금의 한국에서 문학이 목소리를 갖고 살아남으려면 어느 정도의 결합과 권위가 필요하다고 여기지만, 권위를 가져야 하는 게 과연 문학인가 사람인가 그들을 엮어 두는 모종의 틀인 걸까 했을 때 여러 가지 생각이 듭니다.

 

김주선 : 인정이라는 측면을 쏙 빼고 나면 ‘등단이라는 게 꼭 필요한가?’, ‘등단 제도에 문제가 많은 게 아닌가?’라는 이야기도 다른 차원에서 이야기될 수 있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내 글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게 다양한 형태로 이미 이루어지고 있잖아요. 독립출판도 그렇고요. 물론 이미 형성되어 굴러가는 제도가 갖는 모종의 영향력에 관해서도 계속 생각해야겠지만.

 

이서영 : 승인 받고 싶은 욕망이라는 게, 결국 내 안의 규범적 타자로 존재하고 있는 누군가들에게 권력을 주는 건데 그런 검증 절차에 욕심을 내지 않고 글을 쓴다면 무언가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다희 : 제가 글을 쓴 이유도 인정에 있는 건 아니었어요. 인정은 제가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한 어떤 우연한 보상의 차원이에요. 글을 쓴다는 것과 인정받는 것을 분리하지 못한다면 사람이 망가질 수 있는 것 같아요. 그건 그렇고 저는 일단 출판사가 자신이 유지하려는 성질을 계속 유지하면서 책을 출판하는 건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특정한 출판사에 “너희는 왜 A라는 글을 출판하지 않고 B라는 글은 출판하니?”라고 묻는 건 비생산적인 것 같아요. 등단이라는 제도는 한 공동체에서 일종의 공공성을 만들어내는 행위와도 연결되잖아요. 여기서 권위도 발생하고 인정도 발생하는데, 자본과 공공성이라는 이 지점에 관해 더 세심하게 이야기를 해봐야 할 것 같아요.

 

 

김영삼 : 이제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게요. 김동식 작가는 노동자예요. 그래서 1980년대가 생각났어요. 1987년 6월 항쟁 이후 노동자 문학이 등장했어요. 민중민족문학 담론 측에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했죠. 그 이전의 민중문학, 노동자-농민의 문학은 사실 지식인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박노해를 비롯한 노동자 시인들이 등장한 거죠. 진짜 현장의 노동자가 현장의 이야기를 쓴 거죠. 대단한 환영을 받았죠. 당시 민중민족문학 담론에는 명확한 지향점이 있었어요. 첫째, 새로운 민중민족문학은 노동자에 의해서 탄생한 노동자 문학이어야 할 것. 둘째, 구체적인 노동현장과 생활현장의 매개가 있어야 할 것. 셋째, 의식의 각성이 있어야 할 것. 거칠게 정리하자면 이런 거였죠. 하지만 훗날 민중민족문학담론은 박노해를 비판합니다. 이 기준에 미치지 못했거든요. 그 시대의 강박이었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80년대 민중민족문학담론이 이야기하는 노동자가 기층민중의 차원을 대변하는 노동자라면, 이 시대의 노동자인 김동식 작가는 그런 이데올로기나 강박에서 자유로워요. 김동식 작가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고 제도권에서 글쓰기를 배워 본 적도 없는, 몫을 가져 보지 못한 자로서의 노동자예요. 작품에 등장하는 노동자도 이전의 민중민족문학이 생각했던 그런 노동자가 아닙니다. 제 생각에 이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글을 쓰는 행위 그 자체라고 생각해요. 아까 등단 이야기를 했는데, 등단 이전에야 등단이 중요하겠지만 그 이후에는 다시 본질적인 문제로 돌아오게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결국 ‘내가 뭘 써야 하지?’, ‘내게 글을 쓴다는 건 무슨 의미지?’라는 문제로요. 김동식 작가가 정확히 그 자리에 서 있어요. 쓰고 싶은 글이 있고, 그걸 쓰는 게 재밌다는 거죠. 여기에 제가 의미 부여를 좀 해보자면 이게 랑시에르가 말하는 문학의 정치인 것 같아요. 글을 쓴다는 행위, 문학이라는 행위 그 자체를 통해서 자기가 서 있는 위치를 벗어나는 것, 계쟁이라고 하죠. 그럼으로써 자신이 부여받은 사회 속의 자리를 재분할하는 것. 저한테는 이런 지점이 흥미로웠어요.

 

이서영 : 저도 작년에 친구들과 독립 잡지를 만들었어요. ISBN을 만들진 않았지만 책을 팔기도 했고요. 수익은 다시 사회에 환원하고요. 여러모로 서툰 점이 많았지만 이 작업은 저희 나름대로 승인 받고자 하는 욕망에서 자유로워지려 했던 시도였던 것 같아요.

 

이다희 : 이야기를 듣다 보니 영화 ‘패터슨’이 떠올라요. 패터슨이라는 주인공이 자신의 일상을 유지하면서 계속 글을 쓰잖아요. 출판도 안 하고.

 

송민우 : 패터슨은 글쓰기가 곧 자기 삶의 근거가 된 사람으로 보여요. 글쓰기를 정말 즐기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제도권 내부로 들어가겠다는 강박이 없기 때문에 글쓰기에 즐거움을 느끼는 게 가능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생각해 보니, 저는 글쓰기가 주는 즐거움을 잊고 살아온 것 같아요. 등단 준비하면서 이렇게 된 게 아닌가 싶어서 살짝 씁쓸해지네요.

 

이다희 : 이야기를 하다 보니 떠오른 건데 인정 욕망을 꼭 포기해야 할까요. 인정 욕망은 너무 자연스럽고 펜을 잡게 하는 에너지인데. 한 사람이 펜을 들고 펜을 내려놓게 되는 이유를 명확하게 외부적 요인, 내부적 요인으로 명확히 가를 수 없는 것 같아요. 오히려 그게 더 부자연스럽지 않나요? 문제는 순환이죠. 선순환이 되는 상태로 자신의 환경이나 마인드를 유지하는 게 좋은 것 같습니다.

 

이서영 : 사람과 체질에 따라 좀 다르지 않을까 싶어요. 저 역시 분명 칭찬 받는 데서 오는 버프라는 것이 있고, 누군가에게 이해 받고 싶기에 뜨겁게 말해지는 것들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제 경우에는 목적과 수단이 심하게 전도되는 것을 막는 고삐는 필요할 것 같아요.

 

김주선 : 이제 작품 이야기로 넘어갈게요. 책에 대해 전체적인 인상을 먼저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일단 정말 재밌게 후루룩 읽었습니다.

 

김영삼 : 제게 짧은 소설이 낯선 형식은 아니었어요. 김영하의 소설 중에도 있고,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중에도 짧은 소설이 있잖아요. 어쨌거나 짧고 특별한 제약 없이 자유롭게 쓰인 소설이어서 읽을 때도 편하게 널브러져서 읽었습니다. 재밌었어요.

 

송민우 : 저도 재미있게 읽었어요. 다만 소설 결말이 좀 비슷하다는 문제는 지적하고 싶어요. 이 소설집에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가져야 할 일관된 이상향이 반영되어 있는 듯해요. 그 이상향 자체는 동의할 수 있는데, 한편으론 너무 이상적이어서 의심스럽다고 할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문제들은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 그 복잡함을 너무 단순하게 해결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서영 : 저도 이 소설집의 가장 큰 특장은 가독성이라고 생각해요. 언제 어디서나 펼쳐서 읽어 볼 수 있는 편리함이 있어요. 물론 그게 순기능도 있고 역기능도 있을 텐데 어쨌든 만화책 보는 것처럼 재밌게 읽었어요.

 

이다희 : 짧으니까 일상생활 하면서 틈새 시간에 읽기 좋았어요. 마음먹고 책을 펼쳐야만 하는 시간을 요구하는 게 아니고 휴대폰으로 쉽게 읽을 수 있으니까요. 제 생활 속에 읽기가 쉽게 스며들 수 있는 작품들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미 지적하신 것처럼 작가의 상상력의 힘이 강한 동시에 거칠다는 느낌이에요. 순간적인 통쾌함이나 자유로움을 느끼지만 바로 그 거침 때문에 상상력에서 끝난다는 위험도 있겠다 싶어요. 책이 너무 재미있다 보니까 읽고 소비되기 쉬울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는 날마다』와는 달리 한 작가의 작품을 모아 놨기 때문에 한 사람의 상상력이 좀 보이는데요. 작품마다 예상되는 전개 구조 같은 게 있어요. 가령 반전 같은 거요.

 

김영삼 : 소설의 구조 혹은 형식에 대해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볼게요. 저는 작가의 소설 형식을 네 단계로 나눠 봤어요. 첫 번째는 예상치 못한 상황의 전개예요. 지하에 떨어진다거나 무인도에 가게 된다거나 하는 식의. 두 번째는 인간들이 비인간적 상태로 떨어져요. 세 번째로 인간 존재에 대한 의문을 갖게 돼요. 여기서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이 나옵니다. 마지막으로 아까 이다희 시인이 이야기한 반전처럼 음모나 감춰진 비밀이 노출되면서 끝나요. 이게 『회색 인간』에 실린 작품들의 구조적 유사성이 아닌가 해요.

 

김주선 : 개개의 소설들은 어떻게 읽으셨나요? 작품이 많으니까 한정해 볼까요? 「무인도의 부자 노인」에 관해 이야기해 보죠.

 

송민우 : 저는 처음에 노인 혐오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뒤로 갈수록 표제작인 「회색 인간」과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이 소설도 결국 좋은 공동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는 것 같았거든요. 작중 인물인 노인이 무인도를 탈출하면 돈을 주겠다고 하는데 이게 의도가 있는 거짓이잖아요. 노인이 돈을 주겠다고 함으로써 무인도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이 애초에 등장하질 않거든요. 그리고 나중에 무인도에서 탈출했을 때 사람들이 자기가 받을 돈을 적어 놓은 장부를 모두 놔두고 와요. 이런 결말이 좋긴 한데요. 좀 나이브하다고 해야 할까요. 사람들이 좋은 공동체를 만드는 방법을 몰라서 좋은 공동체를 만들지 못하는 건 아니잖아요. 낙관적인 태도는 좋은데 낙관이 너무 손쉽게 소비되는 것 같아요.

 

김영삼 : 우화적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일종의 ‘휴먼 우화’랄까요. 범위를 좀 넓혀서 이야기해 볼게요. 질문 하나 해볼게요.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뭘까요?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첫째는 ‘인간’이에요. ‘인류’ 이런 것 포함해서요. 두 번째는 ‘국가’, ‘정부’, ‘사회’ 같은 낱말이고 세 번째는, 이건 반 농담인데요. ‘김남우’예요. 시그니처 배우죠. 저는 이 셋을 가지고 생각을 해봤어요. 김동식의 소설이 대상으로 하는 것은 인간 그 자체예요. 인간이 논제 그 자체가 됩니다. 그러려면 인간 바깥의 무엇인가가 필요하죠. 외계인, 지하인간, 무인도처럼요. 다시 말해 현생인류가 사회를 구성하기 이전의 눈 또는 그 바깥의 눈이 필요해요. 그래서 첫 번째 재미는 인간을 사고하게 한다는 점이에요. 두 번째 재미는 한국이라는 땅, 사회, 정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는 점에 있어요. 사회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김동식류의 우화죠. 이를 바탕으로 「무인도의 부자 노인」을 볼게요. 공리주의적인 사고로 생각해 보면 무인도에서 가장 먼저 사라져도 괜찮을 사람이 노인인데 이건 인간의 잔혹성과 이기심을 그대로 보여주죠. 그런데 기이하게도 가상의 돈이 노동에 대한 보상을 해줌으로써 희망이 생기고 무인도의 질서가 잡히거든요. 표제작인 「회색 인간」도 그렇죠. 가혹한 노동 환경 속에서 예술이 탄생하잖아요. 필요성을 느끼게 되잖아요. 그런 식으로 호모사피엔스라는 인간과 그들이 만드는 사회의 조건들을 묻게 만들어요.

 

이서영 : 무인도라는 일종의 아포칼립소 같은 곳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모습이 김동식 작가의 주된 소재인 것 같은데요. 그런데 그 모습 속으로 아주 깊게 들어가지는 않는 것 같아요. 이 이야기들의 캐릭터는 편의상 만들어진 인물로서 기꺼이 활용될 뿐이지, 오롯한 고유성을 획득하려고 하진 않아요. 이야기가 재밌어서 빠르게 읽게 되었어요.

 

김영삼 : 소설이 소비되는 장에 어울리는 정도의 문제의식과 문법이 있는 것 같아요. 인터넷 게시판에 어울리는 작품이랄까요. 하지만 어렵지 않게 손쉬운 방법으로 철학적 사유를 하게 하는 거죠.

 

이다희 : 저도 동의하는데, 이 소설들은 근원적인 질문을 계속 하거든요. ‘인간이란 무엇이지?’, ‘포스트 휴먼은 어떤 존재지?’ 이런 질문이요. 그래서 저는 작가의 문제의식이 너무 좋으니까 조금만 더 섬세한 결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에요.

 

송민우 : 저도 거의 같은 생각인데, 예를 들어 「디지털 고려장」을 보면 아이디어가 정말 신선해요. 노인 부양이라는 문제를 가상 지구를 통해 해결하려 하잖아요. 분명히 좋은 소재인데, 딱 거기서 멈춘 느낌이에요. 가독성과 재미에만 너무 치중하지 않았나 싶어요.

 

김영삼 : 동네에서 아주 맛있는 짬뽕이 있다면, 그것을 꼭 미슐랭이 와서 평가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김주선 : 마지막으로 『회색 인간』에서 가장 재밌게 읽었던 작품을 꼽아 주세요.

 

송민우 : 저는 표제작이 좋았어요. 예술이 처음에는 쓸모가 없다가, 나중에는 지옥 같은 세계를 증언하기 위해 필요해지잖아요. 공동체가 위기에 빠졌을 때 예술이 그 공동체에서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소설이었어요.

 

이서영 : 저는 「아웃팅」이 좋았어요. 작가의 특장이 잘 발휘된 것 같아요.

 

이다희 : 저는 두 개인데요. 하나는 표제작인 「회색 인간」이에요. 송민우 평론가랑 비슷한 이유에서 좋았어요. 또 하나는 「영원히 늙지 않는 인간들」이에요. 소설 속 상황이 굉장히 진지한데 저는 씁쓸하면서 너무 웃겼어요.

 

김영삼 : 한국인들의 집단 문화를 가장 잘 골탕 먹이는 소설이 재밌었어요. 「돈독 오른 예언가」하고 「공 박사의 좀비 바이러스」요.

 

김주선 : 저는 「스크류지의 뱀파이어 가게」가 제일 재밌었어요. 작가 특유의 비판의식과 유머 코드가 변증법적 반전을 통해 드러나더라고요. 이제 걷는 사람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우리는 날마다』에 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이 책은 기성 작가들이 낸 초단편소설 모음집입니다. 이번에도 전체적인 인상을 먼저 이야기해 주세요.

 

이다희 : 한 작가가 쓴 『회색 인간』의 경우 전체적으로 구도가 확실한 것에 반해 『우리는 날마다』는 작가들마다 서로 완전히 다른 스타일을 갖고 있어서 읽을 때마다 새롭게 읽어야만 해서 오히려 읽기가 좀 어렵기도 했어요. 또 전체적으로 소설이 짧다 보니까 내면에 대한 깊은 천착이나 회상 같은 걸 넣기 어려운 것 같기도 했는데요. 대신 현재적인 사건들이 착착착착 진행돼서 스피디한 느낌이었어요. 작가들마다 본인의 특기가 다를 텐데 한정된 분량을 써야만 하니까 본인의 스타일이 짧은 글 속에 녹여지는 것도 흥미로웠습니다.

 

이서영 : 제가 읽기에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은 소설이 하는 가장 단순한 작업으로 돌아간 것 같았어요. 일상의 결을 감지할 수 있는 정도의 스케치랄까요. 스케치이기 때문에 어디선가 떼어온 삶의 풍경 같다는 느낌도 있고 많은 치장들이 생략되었다는 느낌도 있었어요. 물론 그걸 의도한 모음집이라고 생각했어요.

 

송민우 : 저는 좀 당황스러웠어요. 기성 작가들이 쓴 것을 모아 놓은 거잖아요. 그런데 기존의 작가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과 동떨어진 느낌이 드는 작품들이 꽤 있었어요. 저는 이 소설집에 카프카나 체호프의 짧은 소설처럼 굉장히 응축된 소설들이 실려 있을 줄 알았는데, 그 생각 때문인지 몰라도 더 당황스러웠던 것 같아요.

 

김영삼 : 저는 세 가지를 이야기해 볼게요. 첫째, 김동식 작가의 『회색 인간』과 비교를 해보면 자연발생적으로 출간된 소설과 출판시장의 요구에 맞게 기획된 것의 차이가 분명히 드러났다고 말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김동식 작가의 소설은 딱 그만큼의 분량이 필요했어요. 하지만 이 소설은 변화하는 독자에 맞춰 일부러 기획한 거잖아요. 구성된 기획이 갖는 한계가 있다는 거죠. 둘째, 저는 이 소설집에서 작가들의 습작노트를 구경한 것 같아요. 달리 말해 완결성이 떨어져요. 초단편소설이라는 형식에 대한 고민이 좀 부족한 것 같아요. 공선옥 작가의 이야기는 너무 낯간지러웠어요. 김종광 작가의 이야기도 제 특징을 잃어버린, 목적이 불분명한 소설이었어요. 박민정의 소설도 인물의 인상은 뚜렷한데 그냥 서로 헐뜯는 루저들의 이야기 토막인 것 같고요. 우다영의 소설도 작가의 특징만 드러났지 서사는 없어 보여요. 세 번째, 딱 어울리는 소설도 있었어요. 제 생각에 이렇게 짧은 소설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두 가지를 짚어 볼 수 있는데요. 하나는 한 단면을 정말 철저하게 잘 보여주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시적인 문장들을 통해 긴 이야기를 담아내는 거죠. 박상의 「운 나쁜 똥구멍」과 박생강의 「나의 첫 번째 몬스터 S」는 전자의 방식을, 김선영의 「물난리」와 유응오의 「mercy」는 후자의 방식을 잘 보여준 것 같아요.

 

김주선 : 짧은 분량의 소설이 가져야 할 미학적 완결성에 관해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는 말로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김동식 작가의 소설은 인터넷이라는 공간의 특성, 시대적 변화에 따른 독자들의 감수성에 맞는 글을 썼지만 기성작가들의 소설집에 실린 글들은 그렇게 짧은 글이 존재해야 하는 특별한 필연성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는 거죠. 이런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송민우 : 시도는 좋지만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난 몇 년간 짧은 분량의 소설들이 많이 늘어났는데요. 이제는 의문을 던져 봐도 좋지 않을까 싶어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제시된 짧은 소설 쓰기가 과연 좋은 방법일까요. 일단은 다수의 독자들에게 ‘읽혀야 한다’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짧은 소설이라는 형식을 등장시켰을 텐데, 당연한 얘기지만, 짧은 글이 곧 쉬운 글은 아니거든요. 짧은 글에는 짧은 글만의 논리가 있고 호흡이 있는데, 준비되지 않은 글쓰기는 오히려 작가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싶어요. 한국 문학을 꾸준히 좋아해 왔던 사람들에게는 이 소설집에 수록된 작가들의 이름이 낯익겠지만, 이 소설집을 통해서 이 작가들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독자 분들도 분명 있을 거예요. 어쨌든, 새로운 시도일수록 더 섬세하게 고민하고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영삼 : 이런 시도는 좋은데 방식이 문제인 것 같아요. 이렇게 쉽게 다가간다면 독자를 무시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마치 “짧은 소설 좋아하지요? 이거 읽으세요.” 이렇게 툭 던지는 느낌이랄까요. 이 분량에 어울리는 이야기의 완결성을 갖추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과도기니까요.

 

이다희 : 저는 형식이 다양해지자는 취지로 읽었어요. 청탁을 받으면 원고지 매수가 정해져 있잖아요. 그런 특정한 틀에서 생각할 수 있는 한계가 있는데, 이렇게 짧은 매수의 글을 쓰면 형식에 대한 고민을 깊게 하게 되거든요. 그래서 다양한 차원의 접근은 좋아요. 쓰기에 본질은 없으니까요.

 

이서영 : 저도 동감입니다.

 

김주선 : 그러면 아직 첫 소설집이 나오지 않은 작가를 중심으로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게요. 우다영 작가는 이전에 다루었으니까 넘어가고요. 다른 분들의 작품을 간단간단하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먼저 다룰 작품은 박상영 작가의 「햄릿은 어떠세요」입니다.

 

송민우 : 아이돌이 주인공인 소설은 거의 처음 보는 것 같아서 신선했어요. 햄릿과 오필리아가 기억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서 존재하는데, 그 쓰임이 좋았어요. 그리고 마지막은 좀 뭉클하더라고요.

 

김영삼 : 저도 이 작품 좋았어요. 다른 작품에 비해 분량이 조금 더 있어서 그런지 작품의 완결성이 있어요. 실패에 관한 통속적인 이야기를 다루지만 바로 그 통속적인 이야기가 평범한 우리 삶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잘 읽었습니다.

 

김주선 : 덧붙일 말이 없으면 넘어가겠습니다. 다음 작품은 이경석 작가의 「그게 뭐가 재미있다고」입니다.

 

이다희 : 저는 이 작품 재밌었어요. 작품 속 상황이 어이없어서 웃겼어요. 남자 캐릭터가 정말 있을 법하잖아요. 신춘문예로 등단한 남자가 여자의 등짝을 때리고 “나 잡아 봐라” 하면서 도망가는데, 여자가 빡치잖아요. 저도 같이 빡쳤는데 하여튼 그런 게 웃겼어요. (웃음)

 

이서영 : 되게 재밌었어요. (웃음)

 

송민우 : 가볍게 보기 좋은 로맨스 코미디였어요. 남자 주인공이 되게 찌질한데 한편으론 능청스럽더라고요. 적어도 소설적으로는 매력이 있었어요. 남자가 여자의 등을 치고 도망가니까 여자가 그 뒤를 쫓아가는 와중에 이 남자와 좀 더 만나도 좋겠다고 결심하게 되잖아요. 어떻게 될지 모를 불확실한 관계가 조금은 선명해지는 그 지점을 잘 포착한 것 같아요.

 

김영삼 : 마지막에 생뚱맞은 골 때림이 제목과 딱 어울려서 재밌었어요. 주혜가 속물의 측면이 있는데 주혜라는 인물의 속물성을 유쾌하게 깨트리는 인물이 남성 주인공의 유아성이 아니었나 싶어요.

 

 

김주선 : 다음은 정지향 작가의 「교대」로 넘어가 볼게요. 『초록 가죽 소파 표류기』로 문학동네 대학소설상을 받으면서 등단했어요. 아직 소설집이 나오진 않았습니다.

 

송민우 : 전 인상 깊게 읽었어요. 청년들의 취업 문제와 연애 문제를 최소한의 문장으로 세심하게 그려서 좋았고, 그러한 현실적인 이야기를 차분한 방식으로 풀어낸 점도 좋았어요.

 

이서영 : 깔끔하게 잘 짜여 있는 이야기인데 소설 현장에 이입이 잘 돼서 재밌었어요.

 

김영삼 : 젊은 ‘을’들의 이야기인데 그걸 잘 형상화했다는 생각이에요. ‘을’들은 편의점의 잘 팔리지 않는 손톱깎이처럼 별 쓸모없이 존재하는데, ‘나에게도 언젠가는 기회가 올 수 있다’라는 것을 기다리고 사는 청년들의 인생을 보여준다고 읽었어요. 이런저런 설정이 좋았습니다.

 

김주선 : 저희 처음에 했던 이야기에 비해 조금은 더 긍정적인 것 같네요.

 

김영삼 : 이들이 다른 작가들보다 더 고민했던 것 같아요.

 

김주선 : 그럼 여기서도 각자의 마음에 들었던 작품을 꼽아 볼까요.

 

이다희 : 저는 「그게 뭐가 재미있다고」가 제일 재밌었어요. 재미의 관념이 다른 남녀가 만나서 펼쳐지는 이야기인데, 그 둘의 묘한 케미가 재밌었어요.

 

이서영 : 저는 정지향의 「교대」요. 충실하게 잘 써진 느낌이에요. 강화길의 「황녀」도 좋았는데요. 이렇게 짧은 이야기를 들려줄 때도 자신만의 형식과 리듬을 가지고 있는 게 좋다고 생각했어요.

 

송민우 : 저도 정지향 작가의 「교대」요. 재희와 미의 관성적이고 일회적인 만남에 대한 포착이 이 소설을 그저 단순한 청춘물이 아니라 좀 더 깊은 마음에 대한 탐구가 반영된 소설로 만든 것 같아요.

 

김영삼 : 저는 앞서 말했던 소설이 좋았습니다. 문체와 이야기가 초단편이라는 기획에 어울려요.

 

김주선 : 저도 정지향 작가의 「교대」가 좋았어요. 담담한 문채가 제 취향이었습니다.

 

김주선 : 그럼 이것으로 4회 좌담회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어요.

 

일동 : 수고하셨습니다.

 

 

 

 

 

 

 

 

참여자 소개 / 김주선

전남 화순 출생. 2015년 문학과사회 평론부문 등단. 조선대학교 강사

 

참여자 소개 / 김영삼

전남대학교 국문과 강사

 

참여자 소개 / 송민우

201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등단. 조선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재학

 

참여자 소개 / 이다희

대전 출생. 광주 거주. 201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등단.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석사 수료

 

참여자 소개 / 이서영

조선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재학

 

 

   《문장웹진 2018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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