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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모임 - 언제나 다층적인 읽기를 위한 좌담 9

  • 작성일 2018-10-01
  • 조회수 1,499

[기획 - 독자모임]

 

 

언제나 다층적인 읽기를 위한 좌담 9
- 작가의 글쓰기, 작가와 글쓰기

 

 

참여 : 김주선(사회, 문학평론가), 강소희, 김영삼, 송민우, 차유진

 

 

 

[caption id="attachment_139820" align="aligncenter" width="230"]정지향,「한나」,
≪문장웹진≫ 2018. 9월호
[/caption]
[caption id="attachment_139821" align="aligncenter" width="230"]강화길, 「화이트 호스」,
≪창작과 비평≫ 2018. 가을호
[/caption]
[caption id="attachment_139821" align="aligncenter" width="230"]염승숙, 「작가와 그의 문제들」,
≪현대문학≫ 2018. 8월호[/caption]

 

 

 

김주선 : 제9회 《문장 웹진》 좌담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이번 좌담회부터 멤버 변화가 있습니다. 예전에 함께 좌담회를 했던 이서영, 이다희 두 분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빠졌고 새롭게 두 분이 오셨습니다. 간단히 자기소개 해주시겠어요?

 

 

강소희 : 저는 강소희입니다. 대학원 졸업하고 전대와 동신대에서 강의하고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차유진 : 안녕하세요. 광주대 문창과를 졸업해 소설 쓰고 있는 차유진입니다.

 

김주선 : 반갑습니다. 새로운 분이 오셨으니까 이전과는 다른 논의가 생성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됩니다. 이번에 다룰 작품은 정지향의 「한나」(《문장 웹진》 9월호), 강화길의 「화이트 호스」(《창작과비평》 2018 가을), 염승숙의 「작가와 그의 문제들」(《현대문학》 2018 8월)입니다. 세 작품은 모두 작가가 화자로 등장합니다. 아마도 작가 본인이 화자이거나 작중 화자가 작가이거나 그도 아니면 알 듯 모를 듯 작가와 화자가 섞여 있거나 하겠죠? 작가가 저 스스로를 드러내는 소설은 예전에도 있었지만 요즘만큼 '나'의 자리에 대한 객관적 진단이나 나라는 존재의 주관성에 대한 표현을 많이 했던 시기가 있었나 싶어요. 비평 담론에서도 '나'가 서슴없이 등장하고요. 무튼 세 작품을 통해 글 쓰는 '나'를 의식하는 양상을 알아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정지향의 「한나」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정지향 작가는 우리가 한번 다룬 적이 있죠? 초단편소설을 다루는 좌담에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때 청년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잘 풀어 갔다는 평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이번 소설에도 청년이 등장합니다. 두 명의 여학생인데요, 그중 한 명의 이름이 한나입니다. 또 다른 인물의 이름은 진아고요. 둘 모두 습작을 합니다. 각기 다른 스타일의 글쓰기 방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 초반부에 중요하게 제시되고요. 다들 어떻게 읽으셨나요?

 

송민우 : 저는 소설가 습작생이 등장하는 기존 소설의 어떤 전형을 답습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 소설에서 한나라는 여성은 부정적인 모습으로 재현되는데요. '습작생이라면 으레 이런 자기 파괴적인 면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게 과연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물론, 이 지점에서 한나의 삶을 둘러싼 불행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겠지만요. 다만 이러한 부정적 재현을 통해서 소설가 습작생 이미지가 관습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다는 건 분명해 보여요.

 

강소희 : 먼저 이 작품에 소설가 소설이라는 명명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 단지 작품의 주인공이 소설을 쓰고자 하는 인물로 등장한다는 것, 딱 그만큼의 배경으로만 '소설'이 다뤄진 느낌이에요. 작품의 초반에 한나와 진아의 글쓰기 방식이 갖는 차이를 밝히는 장면은 꽤 흥미로워서, 두 사람의 글쓰기 과정이 혹은 그들의 소설이 어떻게 전개되고 탄생할지 기대하게 돼요. 하지만 이어지는 서사에서 비중 있게 다뤄지는 것은 소설 쓰기의 문제라기보다는 한나와 진아의 관계, 혹은 한나를 향한 진아의 사랑 어쩌면 어긋나는 마음들이에요. 그래서 저는 젊은 문청의 실패한 사랑담으로 읽었어요.

 

차유진 : 하지만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보기에도 좀 무리가 있다고 생각돼요. 진아가 마지막에 다다라 한나를 사랑했다 고백하지만, 저는 전혀 몰랐던 이야기라 깜짝 놀랐어요. 앞서 아무런 징조랄 게 없었기 때문에 진아의 고백에 정말 많이 놀랐거든요. 왜 이렇게 되나? 한나와 진아 같은 위치의 인물이 있고, 그 사이에 오가는 감정이란 게 꼭 그 사랑이 아니고서도, 그러니까 연애 감정이 아니라도 우정이나 다른 여타 감정으로 표현되기에 충분한데, 왜 연애의 감정으로 표현해야 했을까. 의문이었습니다.

 

김영삼 : 소설 초반부의 분위기를 보면 작가와 그 대리인물로 보이는 한나의 인정욕망을 느낄 수 있어요. 문청 특유의 특별한 존재이면서 해석 불가능한 존재이고 싶은 인정욕망이 강해 보여요. 문예창작학과 학생들이 공유하는 분위기를 소설이 배경으로 선택했을 때부터, 어쩌면 이야기의 한계를 내포하고 있어 보입니다. 작가가 어떤 배경을 선택하고 어떤 인물을 창조했는지가 그 작가의 세계관을 보여준다고 할 때, 정지향 작가의 세계관의 크기가 특정 공간에 한정되어 있다는 느낌이 강해요. 그러다 보니 창작하는 학생들의 고민이 일반 독자들에게 잘 전달되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저는 이 작품이 잘 빚어졌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레 두 가지의 질문 또는 의문이 생겼어요. 첫 번째는 한나라는 인물의 말과 행동을 진실성 있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것이구요, 두 번째는 한나에 대한 진아의 갑작스런 감정 표현이 어떤 개연성을 확보하고 있는가, 예요. 이 두 물음은 소설 속에서 해명되지 않아요. 다만 저는 이 소설을 글쓰기에 대한 메타포로 독해했을 때, 해석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싶긴 했습니다. 한나라는 인물에게 연애나 글쓰기는 항상 실패의 서사로 그려져요. 무언가를 잉태하는 데 언제나 실패해요. 고등학교 시절의 사랑과 중절 수술이 그러하고 문창과 첫 수업에서도 정작 완성된 작품을 보여주지는 못하니까요. 그런 점에서 한나의 글쓰기는 그녀의 사랑이 성공할 때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한나가 워홀을 떠나는 게 일견 당연해 보이기도 해요. 같은 맥락에서 진아가 한나를 갑작스럽게 사랑하게 되는 것 또한 진아의 글쓰기가 시작되는 지점으로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사랑하는 사람은 떠났지만 그 사랑을 회상하면서 진아의 글쓰기가 이 소설로 나타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강소희 : 한나와 진아 그리고 그들의 관계를 글쓰기에 대한 메타포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에는 공감이 가지 않아요. 설령 그것이 작품의 틈을 메우기 위한 독법이라고 하더라도, 작품 속에서 글쓰기 자체에 대한 고민이나 경험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해석이지 않을까요. 만약 작품의 생산과 생명의 잉태를 연결 짓는 것이 작가가 의도한 메타포라면 정말 고루한 방식이라 느껴지고요.

 

차유진 : 이건 약간 다른 이야기인데요. 제목이 한나잖아요. 하지만 작가가 좀 더 주목하고 낱낱이 설명해 줘야 할 인물은 진아였지 않나 싶어요. 한나를 바라보는 진아요. 초반부에 나온 합평 수업의 분위기나 진아와 한나의 글쓰기 방식의 차이, 선배의 죽음을 두고 한나가 하는 말 같은 게 뒤의 내용을 어느 정도 짐작하게 했고, 저는 그 짐작에 기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하고는 다른 방향으로만 진행이 되어서, 아 이게 아닌데…… 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어요. 앞서 포석한 이야기에 대한 저의 기대가, 작가의 의지가 아니었다 하더라도요. 마지막에서의 고백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진아에 대한 이야기가 더 필요한 거 같아요.

 

송민우 : 선배의 부고에 관한 에피소드, K를 둘러싼 소문에 관한 에피소드, 그리고 몇몇 다른 에피소드 등, 이 많은 에피소드들이 이 짧은 단편소설의 형식에 다 담아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여요. 물론 각각의 에피소드들이 암시하고 있는 것은 지금 시대에 필요한 내용들로 보였지만요. 소설 마지막에 등장하는, 서로 매니큐어 발라 주는 장면에 대해서도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해 보이고요. 차유진 선생님 말씀대로 진아에 대한 이야기도 더 있어야 하지 않나 싶어요.

 

김영삼 : 소설의 여러 대목에서 한나의 글쓰기 스타일과 삶의 방식이 함께 간다는 걸 암시하고 있잖아요. 자신의 불확실한 삶에서 오는 글을 계속 쓰는 게 한나인데 실제로 한나의 삶이 그렇죠. 그래서 소설의 마지막 부분도 저는 이해가 되었습니다. 한나는 한국에서는 글쓰기도 사랑도 실패할 수밖에 없으니 워홀을 가는 것이죠.

 

김주선 : 네. 정지향 작가의 소설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제 강화길 작가의 「화이트 호스」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이 소설은 슬럼프에 빠진 소설가가 등장하는데요. 고택에 들어가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 반성을 합니다. 와중 여러 사건이 벌어지죠. 어떻게 읽으셨는지 자유롭게 말씀해 주세요.

 

김영삼 : 소설 쓰기에 대한 소설로 읽었는데요. 저는 이 작가가 공간에 집중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집이라는 공간 속에서 삶과 글쓰기가 공명하면서 소설이 직조되었다는 느낌이에요. 화이트 호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주인공은 아니지만 세계의 유명한 여러 예술가들이 저마다의 화이트 호스를 찾았잖아요. 하지만 그 방황 끝에 화자가 깨닫는 건 화이트 호스라는 영감이나 뮤즈가 와야만 글을 쓰는 게 아니라는 것이죠.

 

강소희 : 저도 김영삼 선생님의 해석과 큰 틀에선 유사해요. 슬럼프에 빠진 소설가가 그를 구원할 화이트 호스를 찾으려는 과정이 서사의 가장 큰 줄기를 이루고 있어요. 먼저 주인공은 다시 글을 쓰기 위해 지난날 자신의 화이트 호스였던 이선화를 따라가고, 그 과정에서 이선화의 화이트 호스라 추정되는 체스터턴과 밥 딜런을 지나 마지막 테일러 스위프트의 노래에서 화이트 호스를 듣게 됩니다. 하지만 그 여정의 끝에서 주인공이 마주하게 되는 것은 "나는 너의 화이트 호스가 필요 없단다."라는 인식이고, 결과적으로 그 실패한 여정이 한 편의 소설로 탄생한다는 점에서 구조가 잘 짜인 작품이라 생각해요. 하지만 작품 속에 소소한 에피소드와 소재들을 배치하는 방식에 있어서 저는 어지럽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특히 소설의 배경을 추리소설의 느낌으로 구성할 때 등장하는 것들, 가령 주인공만 듣게 되는 인터폰의 노랫소리나, 벨을 누르고 도망간 아이들이 목격되지 않는 것, 욕실에 난 검고 흉측한 구멍과 숲의 송진 덩어리와 같은 소재들이 서사의 큰 줄기와 연결되지 않은 채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요. 아마도 어지럽다는 느낌은 이 작품의 중심에 놓인 소설 쓰기의 문제와 더불어 직조되지 않은 채 너무 많은 소재들이 그려지기 때문이겠죠.

 

송민우 : 저는 이 소설의 서사에 충돌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소설 속에서 긴장감을 일으키는 요소들이 있잖아요. 강소희 선생님이 말씀하신 그런 요소들이요. 한데 이 요소들이 서스펜스를 노린 것이라면 실패한 것 같아요. 긴장감은 안 느껴졌거든요. 또 소설 속 화자를 통해 외부 평가에 대한 자의식이 드러나는데요. 여기서 화자의 목소리와 작가의 목소리가 잘 구분되지 않았어요. 화자의 외부 평가에 대한 자의식이 서사의 매끄러운 진행을 방해하는 것 같다고 할까요. 예컨대 자신이 만든 케이크 가치를 타인이 고평하는 부분이 있잖아요. 자신은 컵케이크를 만들었을 뿐인데, 타인이 그것을 10단 대형 케이크로 해석했다는 부분요. 특히 이 부분이 작가의 목소리와 화자의 목소리가 충돌하는 지점 같아요. 이 소설의 메시지는 한마디로 '당신들이 뭐라 하건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걸 쓸 거야'로 느껴져요. "나는 네가 이끌어 줄 사람이 아니야. 나는 공주가 아니고, 이건 동화도 아니란다. 나는 너의 화이트 호스가 필요 없단다."(183쪽) 결론부의 문장들을 통해서 '화이트 호스'가 다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장치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여요. 다만 이런 장치의 의식적인 사용이 오히려 서사의 긴장을 낮추게 된 것 같아요.

 

차유진 : 저는 「화이트 호스」를, 남들이 나를 화이트 호스로 보고 있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읽었어요. 그래서 저는 남들의 평가가 핵심이라 생각했어요. 자신이 생각하는 소설의 수준과 바깥에서 보는 소설의 수준이 엇갈리면서 발생하는 착오도 재밌었고, 어떤 독자들이 화자의 소설을 읽고 기뻐하는 에피소드는 그 독자의 화이트 호스가 된 화자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 같아서 그것도 재밌었어요. 말씀하셨던 어수선한 느낌은, 이 화자라면 이런 생활이 가능하지, 라는 느낌으로 받아들였어요.

 

김영삼 : 저는 이 작품의 여러 에피소드가 소설 쓰기에 대한 은유로서 잘 조직되었다고 생각해요. 몇 가지 가설을 제기해 볼게요. 첫째, 초인종 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가 실재한다는 걸 증명하려고 집주인에게 얘기하려고 하는데 그때마다 증명에 실패합니다. 이 집이라는 공간을 글쓰기의 공간이라고 가정했을 때, 외부에서 누르는 초인종은 아무나의 방문이에요. 글을 쓸 때 불현듯 찾아오는 어떤 영감처럼 초인종은 실재하지 않지만 실재하는 것과 같아요. 하지만 영감을 받았다고 해서 무조건 글을 잘 쓰는 건 아니잖아요. 마치 집주인에게 외부의 방문을 알리려고 할 때마다 집주인이 사라져서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둘째, 그러면 어떻게 해야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따라와요. 그건 집의 내부에서 답을 찾을 수 있어요. 이 집에는 계속 누수가 발생해요. 그러니까 집 자체가 문제예요. 달리 말해 글쓰기 자체, 또는 글 쓰는 자의 내면에 어떤 구멍이 존재한다는 거죠. 결국 이 집 공간은 수많은 화이트 호스가 존재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글쓰기의 불능에 가까운 공간으로 보여요. 그래서 보이는 것이 세 번째예요. 소설의 후반부에서 주인공이 유일하게 집을 벗어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어느 소나무 숲에 도착하고 소나무는 껍질이 벗겨져 있고 구멍이 뚫려서 하얀 액이 계속 나오는 중이에요. 피 흘리는 소나무들. 그의 손에는 송진이 잔뜩 묻어요. 저는 이 장면이 강화길 작가의 탈출과 관련된다고 생각해요. 온갖 평에 시달리던 문단에서 벗어나 바라본 '나'는 껍질이 벗겨지고 구멍이 뚫린 다소 충격적인 모습으로 등장하구요. 이게 구체적으로 어떤 상징을 의도하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아 보여요. 잘 직조된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애매한 지점이에요. 워낙 상징적인데 이걸 의미화 하는 작업이 실패했거나 제가 그걸 읽는 데 서투르거나. 하지만 이어지는 서술이 자신만의 글을 쓰겠다는 깨달음인 것으로 보아 소나무 숲의 풍경이 깨달음에 일조했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어요. 이게 저의 가설이에요.

 

강소희 : 저도 소설의 구조가 큰 틀에서는 잘 짜여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에피소드들에 대한 김영삼 선생님의 해석을 들으니 어지러움이 약간 정리된 듯도 합니다. 하지만 아쉬운 부분에 대한 논의를 좀 더 밀고 나가면, 소설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화이트 호스가 차이로 변주되면 어땠을까 생각해요. 화이트 호스의 의미는 분명하게 그려지는데, 이선화, 체스터턴, 밥 딜런, 테일러 스위프트의 화이트 호스가 왜 그 순서로 각각 그려지는지는 모호한 것 같아요.

 

김영삼 : 소설 속의 화이트 호스는 다를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각각의 사람들마다 자신의 화이트 호스가 다를 테니까요.

 

차유진 : 저도 조금 변호해 보고 싶어요. 여기 와서 다른 감상들 들으며, 나의 영감이랄지 나의 화이트 호스라고도 읽을 수 있구나, 참으로 그렇구나, 라는 생각을 했어요. 동시에 화이트 호스라는 게 연쇄적이라는 생각도 드는데요. 예컨대 나의 작품을 바라보는 이들 중에는 그것에 감동하고 나를 화이트 호스로 보는 이들이 있을 것이고, 그런 내가 그 작품을 만드는 동안 영향을 받은 화이트 호스 또한 있다는 거죠. 그런 연쇄성을 보이기 위해 각기 다른 화이트 호스들을 등장시켰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강소희 : 저도 각각의 예술가들에게 화이트 호스의 의미가 개별적일 거라고 생각해요. 단지 그 개별성이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은 것이 아쉽습니다. 다른 질문을 던져 보고 싶은데, 집주인 그녀는 어떻게 읽으셨나요? 그녀는 누구일까요?

 

김영삼 : 제 독해에 따르면 그 집주인은 글 쓰는 자아예요. 묵묵히 집 내부의 누수를 고치고 있잖아요. 주변의 평가에 신경 쓰지 않고 묵묵히 자신을 단련해 가는 작가들의 내면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여요. 또 다른 측면에서 볼 수도 있는데, 이 집이 마치 작가들의 게스트하우스처럼 한 명의 작가만을 받아 주는 공간이잖아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고 한 명만이 입주해서 작품을 만들어 가는 공간이라면, 그런 집의 집주인은 어쩌면 모든 작가들이 한 번씩은 거쳐 가게 되는 어떤 공정처럼 보이기도 해요. 그렇게 보면 이 집주인이야말로 화이트 호스라고도 할 수 있죠.

 

차유진 : 하지만 화이트 호스라는 이름으로 불리진 않고요. 왜냐하면 메시아가 되어버리니까.

 

김영삼 : 그렇죠.

 

김주선 : 더 덧붙일 말씀 있나요?

 

송민우 : 이 소설은 강화길 소설의 전환점으로 이해해 볼 여지가 있을 것 같아요. 물론 소설가 소설이라는 틀로 본다면 이 소설은 소설가에 대한 소설이라고 충분히 말할 수도 있겠고요.

 

차유진 : 저는 이야기가 산만하다고 느껴지는 게, 화이트 호스가 아무래도 여러 차원에서 등장하는 것을 타당하게 만들려 시도했기 때문이라 봐요. 또 소설이란 게 여러 즐거운 이유가 많잖아요. 그중 하나가 타인의 속내를 시선에 대한 걱정 없이 맘껏 엿볼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데요. 때문에 작가가 더 궁금해지기도 하고. 한데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며 강화길이라는 작가를 추측하고 떠올리기보다 그냥 이 소설 속 작가의 삶이 먼저 들어와서, 비소설이라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재밌었어요.

 

 

김주선 : 이제 마지막 소설로 넘어가 볼까요? 염승숙의 「작가와 그의 문제들」입니다. 회사원이 주인공이에요. 회사에서 강요하는 워라밸에 부응하기 위해 취미생활로 어쩔 수 없이 소설 창작 수업을 듣게 됩니다. 이때부터 많은 일들이 일어나죠. 마치 작가의 삶을 회사원의 삶으로 등치시킨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떻게 읽으셨나요?

 

차유진 : 한번 쓰기 시작한 사람이 다시 안 쓸 수는 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세상에 대한 어떤 의심을 하기 시작했는데 어떻게 그것을 모른 척 내버릴 수 있느냐는 차원에서요. 그런데 이러한 마음은 글을 쓰는 사람이 특별하기 때문은 아닌 것 같아요. 호재가 실제로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 겪게 되는 여러 일이 있잖아요. 자리가 옴폭 파이고, 남들은 알아채 주지 않고. 그렇다 해도 내 자리가 남들보다 조금은 내려앉은 게 내게는 사실이라, 당황스러워 해요. 저는 호재가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재밌었어요. 자기 의지대로 간 것만은 아니지만 끝내 쓰기를 선택한 건 자신이고, 일상에 대한 의심이 생겼으니까요. 쓰는 자의 삶이 보인다는 느낌이에요.

 

강소희 : 저도 재밌게 읽었어요. 어딘지 모를 곳으로 구르다시피 떨어지는 장면이 소설의 처음과 끝에 배치되어 있잖아요. 아마도 작가의 삶에 대한 메타포 같은데, 소설의 시작에는 꿈이었던 것이 소설의 마지막에 현실로 전환되는 구조도 좋았고, 그 중간에 고단한 삶과 소설 쓰기 사이에서 고민하고 흔들리는 주인공의 모습도 리얼하게 그려졌다고 생각해요.

 

송민우 : 이 소설에 대해선 세 가지 지점을 말해 보고 싶어요. 첫째, 이 소설은 유머러스해요. 유머를 발생시킬 만한 코드들이 소설 속에 배치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는데요. 그 코드들이란, 여러 인물들이 같거나 비슷한 대사를 반복하는 일, 몇몇 삽화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일 등이에요. 둘째, 호재는 직장에서건 가정에서건 의무를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을 살고 있어요. 그래서 좋건 싫건 무작정 행동해야 할 수밖에 없고요. 그래서 호재는 초조함 속에서 살고 있는 인물로 보여요. 셋째, 방금 말한 지점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이 소설 자체가 기이한 분위기를 품고 있는 것 같아요.

 

김주선 : 그 기이함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송민우 : "오후 내내 이상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채로 호재는 근무했다. 점심을 건너뛰었는데도 배고프지 않았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지만 무엇이 이상한지 전혀 알지 못하는 소설 속 주인공이라도 된 듯 그는 일하다가도 갸웃거리고 갸웃거리다가도 또 황급히 업무에 몰두했다."(59쪽) 이 부분을 보면 호재는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껴요. 그런데 뭐가 이상한 건지 전혀 알지 못해요. 회사 동료들의 말 역시 휘발되고 말아요. 회사 동료들의 말이 어떤 의미망을 정확하게 지시하진 않는 듯해요. 말하자면, 호재는 자신의 삶을 둘러싼 모든 요소들이 단지 이상하다고 감각할 뿐이에요. 이 지점에서 기이함이라는 느낌이 생산되는 것 같아요. 호재는 물론이고 소설 속 인물들은 일종의 불가지론자 같아요. 자신의 삶이 그리 좋지만은 않은데, 이 좋지 않은 상황을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알지 못한다는 무력함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이고요.

 

김영삼 : 소설에 두 개의 구멍이 나와요. 하나는 반복된 일상의 늪과 같은 구멍. 그렇다면 이곳은 벗어나야 할 곳인데, 여기서 벗어나 만나게 되는 게 소설을 창작하는 공간이죠. 그런데 재밌는 건 그게 또 다른 구멍처럼 보인다는 거예요. 소설에도 어떤 동굴 같은 구멍으로 빠져 들어간다는 묘사가 등장하는데요, 마치 이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토끼를 따라 빠진 그 구멍과도 유사해요.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떨어진다는 묘사가 여러 군데서 등장하거든요. 그곳이 바로 글쓰기라는 새로운 구멍인데, 이게 구원인지 또 다른 반복일지는 모르겠어요.

 

강소희 : 분명 작가가 기이한 분위기를 만들려고 시도했던 것 같아요. 읽으면서 회사를 배경으로 한 <오피스>라는 공포영화가 떠오르기도 했는데, 그런 분위기를 구성하는 것 중에 하나가 회사라는 한 공간에 있지만 단절되어 있는 듯한 인물들의 관계라고 생각해요. 인물들에게 이름이 아닌 알파벳을 부여한 것도 그렇고, 그들의 대화가 단답형으로 반복되며 이어지지 않는 것도 그렇고. 그래서 글을 쓰기 위해 가던 호재가 정류장에서 했던 반성, 더 질문해야 했는데 질문하지 않았다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오고요.

 

차유진 : 이야기를 만드는 대화가 아닌 거죠. 저는 사람들의 대화가 그냥 다 혼잣말 하는 것 같기도 하다고 생각했어요. 호재는 소설을 쓰고 다른 회사원들은 수영, 오카리나, 수화를 배우잖아요. 수영, 오카리나, 수화 그리고 소설 쓰기는 다 혼자 하는 거고요. 인물들의 캐릭터성과 관련지어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여기서 끝까지 의아해하고 세상에 대해 의심하는 존재는 소설 쓰는 호재 하나예요. 이런 설정이 재밌었어요. 왜 O, P, Q인지는 모르겠어요. 왜 이런 기호일까 궁금해요.

 

김주선 : 기호는 잘 모르겠어요. 저는 강사가 소설 쓰는 법을 알려주는 게 호재에게 억압이 된다는 게 재밌었어요. 글쓰기는 대개 자유와 관계하잖아요. 자기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표현하니까요. 그런데 소설 쓰기도 이렇게 억지로, 마감 압박에 시달리면서 하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고 이야기하니까, 소설 쓰기의 어려움에 관해 작가가 말하고 싶은 걸까? 소설 쓰기라는 작업이 갖는 어려움에 대해 회사원을 빌려와서 대신 이야기하고 있나? 싶더라고요.

 

차유진 : 맞아요. 강사가 소설 쓰는 것을 가르친다기보다는 어화둥둥 하는 느낌으로 기운을 북돋아주는데 그게 다 억압이 되잖아요. 재밌어요.

 

강소희 : 인상 깊었던 것 중의 하나가 예컨대 '글쓰기는 나의 구원'과 같은 신화가 있잖아요. 여러 작품에서 삶에 묶인 존재를 구원하는 길로 글쓰기를 다루는데, 이 소설은 그와 같은 도식으로 흘러가지 않아서 좋았어요. 한 발은 삶의 문제에 묶이고, 또 한 발은 쓰기의 문제에 묶여서 살아갈 수밖에 없고, 또 그것이 환상을 제거한 작가의 삶이라는 것을 건조하게 풀어내는 방식도 좋았고요.

 

김영삼 : 저도 소설 쓰기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요. 수영이나 오카리나나 수화나 같은 것 같아요. 강사도 마찬가지인 것 같고요.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강의하는 게 아니잖아요. 게다가 여기서 글쓰기는 워라밸의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기 구원 같은 긍정적인 차원과는 거리를 두는 것 같아요. 삶에 대한 성찰과는 거리가 있다는 느낌이에요. 이 사람이 소설을 계속 쓸지도 저는 모르겠어요.

 

차유진 : 저도 이 소설이 글쓰기와 삶이 어떻게 함께 가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했어요. 호재가 소설을 쓰며 겪게 되는 작은 변화가 있잖아요. 힘들기도 하지만 자신의 과거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돼요. 그래서 궁극적으로 쓰는 삶이 나쁘진 않다. 좋은지는 몰라도 확실히 나쁘진 않아, 라는 말을 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송민우 : 호재는 숭고나 천재와는 거리가 먼 예술가에 대한 메타포로 느껴져요. 필립 로스의 소설에서 본 문장이 문득 생각나는데요.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필립 로스, 『에브리맨』, 정영목 옮김, 문학동네, 2009, 86쪽.) 오늘날까지 소설 쓰기라는 행위를 숭고한 것으로 보거나, 소설가 혹은 예술가 일반을 천재의 개념으로 보는 것은 낡고 무효한 것이겠죠. 문학이건 삶이건 어떤 루틴 속에서 이뤄지는 것 같아요. 회사원이 규칙적으로 출퇴근을 하듯 예술가도 그러한 규칙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김주선 : 네, 여러모로 많은 이야기를 했네요. 특별히 더 할 얘기가 없다면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새로 오신 두 분 선생님 고생하셨어요. 수고하셨습니다.

 

일동 : 수고하셨습니다.

 

 

 

 

 

 

 

 

 

참여자 소개 / 김주선

전남 화순 출생. 2015년 문학과사회 평론부문 등단. 조선대학교 강사

 

참여자 소개 / 김영삼

전남대학교 국문과 강사

 

참여자 소개 / 송민우

201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등단. 조선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재학

 

신규멤버 / 강소희

대학원을 졸업하고 전대와 동신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신규멤버 / 차유진

광주대 문창과를 졸업해 소설을 쓰고 있다.

 

 

   《문장웹진 2018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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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과거를 보는 미래 SF 곽재식 며칠 전 나는 한 행사에서 SF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소개하는 발표를 하나 맡게 되었다. 발표가 다 끝나고 질문 답변 시간이 되었는데 청중 중 한 분이 “SF라면 미래를 생각해 봐야 하는데, 왜 옛날 SF를 소개했느냐?”라고 질문했다. 그날 행사 중에는 답변을 짧게 드렸지만 이 내용은 한번 깊게 따져 볼 만한 재미난 주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한번 해보려고 한다. 명작 SF로 자주 손꼽히는 1970년대 영화로 <>이라는 할리우드 영화가 있다. 찰턴 헤스턴이 주연을 맡아 대형 영화사에서 배급한 그야말로 정통 할리우드 영화인데 그러면서도 비참한 미래의 모습을 예상해서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 결말도 뻔한 할리우드 영화의 행복한 결말이라고 말하기는 매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가기에 눈에 뜨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맨 마지막에 주인공이 외치는 대사는 SF 영화사에서 유명한 대사 순위를 꼽으면 상위권에 자주 오를 만큼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미래는 인구가 너무나 빠르게 늘어났기 때문에 멸망해 가고 있는 세상이다. 인구가 너무나 많은 데 비해 식량과 자원은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굶주리고 모든 물자가 부족해 다들 비참하게 살고 있다. 영화 제목인 “소일렌트 그린”이란 식량이 부족한 세상에서 특별히 개발해 보급 중인 신형 인공 식품을 말한다. 그러므로 <>은 19세기 맬서스의 등장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미래 인류의 멸망 시나리오라고 철석같이 밀었던, 맬서스 함정을 정통으로 다룬 영화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성장한다.”라는 말은 어지간하면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지구는 망한다, 그러니 사람이 많은 것은 해악이다,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은 곧 “사람이 곧 모든 파괴의 근원이며, 사람이 없어져야 지구가 살아난다.”는 생각으로도 자주 이어지기도 한다. 재미난 사실은 이 영화에서 다루는 멸망해 가는 미래가 2022년이라는 점이다. <>은 1973년에 개봉된 영화이므로 이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이란 영화가 제작되던 1972년으로부터 50년 후를 말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이 SF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의 미래라는 시간은, 2024년을 사는 현대의 우리에게는 2년 전의 과거가 되었다. 나는 영화를 보는 과정에서 이렇게 시간의 꼬임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신비롭다. 게다가 요즘 이 영화의 내용을 보다 보면 더욱 중요한 사실도 깨달을 수 있다. 실제 2022년이 인구가 너무 많아 식량 부족으로 멸망하는 시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2020년대는 인구가 너무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구 감소와 초고령화가 문제인 시대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 겪고 있는 문제도 아니다. 한국에서 인구 문제가 워낙 극심하게 나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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