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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올해의 소설

  • 작성일 2018-12-01
  • 조회수 6,760

 

2018 올해의 소설

 

 

 


기획의 말

    문장 웹진에서는 2018년 연말 기획으로 한 해를 정리하면서 어떤 작품들이 뛰어난 성취를 거두었는지 함께 되돌아보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시와 소설 부문 각 10명의 평론가들에게 올해 발표되었던 시·소설 중 가장 좋았던 작품 3편씩을 선택해 달라는 요청을 드렸습니다. 2018년 1월부터 현재까지, 온/오프라인 문예지에 발표된 모든 시와 소설을 대상으로 하고, 시는 분량에 관계없이 개별 작품을, 소설의 경우 300매 이하의 중·단·엽편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저희는 이 선택의 결과를 활짝 펼쳐 놓고자 합니다. 작품의 순위를 매겨서 우열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흥미로운 리스트로 자유롭게 공유되어 더 많은 독자에게 가 닿는 것만이 저희의 바람입니다. 모쪼록 이 선택의 결과를 즐겁게 지켜 봐 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2018 올해의 소설]

 

 

강동호

 

 

 

1. 최은영 단편소설 「몫」, 《한국문학》, 2018 하반기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최은영, 「몫」,
《한국문학》, 307호(2018 하반기)[/caption]

 

    최은영의 「몫」은 1990년대를 회고하는 새로운 세대의 후일담 소설처럼 읽힌다. 여기서 후일담이 과거에 대한 역사적 애도 위에서 쓰일 수 있다는 세대론적 서사라는 사실, 다시 말해 현재적 지평에서 발생하고 있는 변화들을 예민하게 포착한 끝에 가능한 글쓰기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몫」에서 최은영은 한국 사회의 '여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정치적 고민과 내적 갈등들을 주변화 시켰던 과거의 풍경들을 다시 복원시킴으로써, 남은 자들로서의 그 이후 세대가 적극적으로 감당해야 할 윤리적 몫들이 무엇인지를 명료하게 부각시킨다. 「몫」은 최은영의 소설이 윤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더욱 깊어지고 있다는 우리의 믿음과 신뢰를 분명하게 재확인시켜 주는 수작이다.

 

 

2. 정영수 단편소설 「우리들」, 《21세기문학》, 2018 가을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정영수, 「우리들」,
《21세기문학》, 82호(2018 가을)[/caption]

 

 

    「우리들」에서 정영수는 소설 쓰기가 근본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타인의 이야기를 함께 쓰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매력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야기 속에 개입되어 있는 타자들의 흔적은 온전한 내 이야기의 불가능성을 환기하는 요소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하는 원동력으로도 작용할 수 있다. 과거를 재해석하고 재창조하는 일이 타자와 함께하는 대화의 현장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설득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들」은 정영수의 소설관을 가장 분명하게 담고 있는 작품일 것이다. 특유의 담백하고도 위트 넘치는 문장들을 통해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 가는 주체로서의 '우리들'에 주목하는 정영수의 소설은 우리 시대의 소설이 성찰해야 할 기본적이면서 근본적인 윤리가 무엇인지를 흥미롭게 제시하고 있다.

 

 

3. 정지돈 단편소설 「빛은 어디에서나 온다(Light from Anywhere)」, 《창작과비평》, 2018 여름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정지돈, 「빛은 어디에서나 온다(Light from Anywhere)」,
《창작과비평》, 181호(2018 여름)[/caption]

 

    정지돈의 「빛은 어디에서나 온다(Light from Anywhere)」는 1960년대 후반의 시점에 상상되던 동아시아적 미래와 관련하여 역사적 성찰을 시도하는 흥미로운 소설이다. 그의 소설은 주류 시간대의 자장 안에 속해 있지만 사실상 은폐되어 있던 시간들, 미래라는 말에 밀려 충분히 밝혀지거나 인식되지 않았지만 현재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파편적 연속성을 소설적으로 '복원'한다. 과거의 '미래'를 통해 지금 우리의 '미래'를 되돌아보게 하는 정지돈의 이러한 서사적 실천은 '미래'라는 유령에 감염되지 않을 수 없는 근대 이후의 시간, 즉 근대성의 원리에 대한 근본적이고도 비판적인 문제의식으로도 확장된다. 정지돈의 소설은 통상적인 역사 쓰기와는 다른 차원에서의 소설적 역사 쓰기가 가능하다는 것을 매력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작가소개 / 강동호

문학평론가. 《문학과사회》 편집 동인. 한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2018 올해의 소설]

 

 

강지희

 

 

1. 김봉곤 「데이 포 나이트」(《자음과모음》, 2018 여름)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김봉곤, 「데이 포 나이트」,
《자음과모음》, 37호(2018, 여름)[/caption]

 

    김봉곤의 소설은 언제나 한 시절의 기억을 열렬히 읊어 내려가다 꽉 끌어안듯 쓰였고, 그래서 그 슬픔에는 얼마쯤 감미가 섞여 있었다. 그러나 이 소설은 고요히 흐느끼다 짧은 비명과 함께 기억을 끊어내듯 쓰였다. 흔히 말하듯 소설이란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겪게 되는 것일까. 그러나 이 소설 속 화자는 인생에 찾아오는 변화들을 유의미한 것으로 이해하는 행위에 대해 처음으로 의아해진 것처럼 보인다. 이미 오래전 자신에게 스며들어 떼어 놓을 수 없게 된 가장 아름다운 기억 속에 진절머리 날 만큼 끔찍한 것도 함께 있다는 진실에 대해서, 그 모든 것을 유의미하다고 스스로에게 각인시키는 것을 이제는 단호하게 거부하기 위해 이 소설은 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순간 부서지듯 땅에서 흔들리는 긴 그림자를 어떻게 말해야 할까. 한낮의 촬영 장면을 한밤으로 바꿔버리는 '데이 포 나이트'는 환영을 만들어내는 기법이지만, 그 장면이 만들어내던 완벽한 아름다움과 비밀과 희열까지 환영일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랑의 기억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버려져야 하지만, 아름다운 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탈색시키는 동안 떠나지 않는 또 다른 슬픔을 화자는 환한 빛 속에서 가만히 응시한다. 김봉곤이 데려다 놓는 이런 슬픔들에 대해서라면 난 지치지 않고 영원히 쓸 수도 있을 것 같다.

 

 

   

 

2. 권여선 「하늘 높이 아름답게」(《Littor》, 14호)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권여선, 「하늘 높이 아름답게」,
《Littor》, 14호(2018, 10-11월호)[/caption]

 

    소설에 관한 한 권여선은 이제 어떤 경지에 이른 것 같다. 그가 근래 발표한 어떤 소설도 이 자리에 놓일 수 있겠지만, 가장 마음을 흔들어 놓은 단편은 이것이었다. 소설은 주인공 마리아가 죽은 이후에 성당의 자매님들이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마리아를 회상해 내는 조각들로 구성되어 있다. 마리아는 가난한 집안에서 존재감 없는 딸로 자라다가 파독 간호사를 지원해 독일로 떠났고, 독일에서 사랑했던 남자가 돌연한 과로사로 죽자 아이를 입양 보내고 한국으로 송환되었다. 그 이후의 삶은 성당 자매님들의 가사도우미를 하면서, 버려진 아이들 몇몇을 장기 위탁 보호로 돌보면서 흘러간 것처럼 보인다. 아들을 입양 보낸 것을 치부로 여기고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죽기 직전까지 누군가의 비위를 맞추며 끝없는 노동 속에 살아야 했던 마리아를 소설은 끝내 '성녀'로 만들지 않는다. 대신에 태극기를 팔러 다니며 은밀한 기쁨을 느끼던 그의 취미를 통해 아이러니의 정점으로 밀어 놓는다.
    태극기 부대를 포함하여 이 무의미한 기표에 집착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현실에서도, 이 소설 속에서도 "하늘 높이 아름답게" 펄럭이는 태극기에 감격하는 이들은 역설적이게도 국가로부터 가장 소외되고 박탈된 존재들이다. 가족 중 유일하게 이주노동자가 되어 독일로 떠나야 했던,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돌아와야 했던, 돌아온 후에도 성당 내에서 또다시 보이지 않는 노동의 자리에 놓여 있던 마리아는 정말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국민일 수 있는가? 소설은 과연 이 시대에 누가 '난민'인지, 국가 안에서 여성의 온전한 자리가 있는지 묻는다. 그러면서도 성당 자매님들 사이에서조차 '가사도우미'와 '사모님'으로 나뉘는 격차는 태극기를 함께 팔러 다녀오던 그날까지도 끝내 넘어설 수 없는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난민이자 비(非)국민으로서의 여성에 대해, 그럼에도 자매애로 쉬이 통합될 수 없는 차이에 대해 짚어내는 이 소설은 지금 한국이 당면한 문제들과 관련해 가장 날렵한 통찰에 가닿고 있다.

 

 

3. 최은영 「몫」
(미메시스 테이크아웃 시리즈로 출간)

 

최은영, 「몫」, 『미메시스 테이크아웃 시리즈 : 몫』(2018)


 

    1996년과 1997년에 걸쳐 대학에서 교지 활동을 했던 세 여자의 이야기가 어째서 지금의 이야기로 들리는가. 최은영의 「몫」에서 화자인 해진과 함께 교지 동아리에 들어온 동기 희영은 B대학교 교수 성희롱 사건에 이어 아내에 대한 폭력 문제를, 기지촌 여성 문제 등을 다루고자 하지만, 그때마다 내부의 반대에 부딪친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여성 문제가 언제나 주변적이고 사소한 문제로 치부되었으며, 그 자체만으로 중요하게 발화되지 못하고 사회 구조의 문제로서 에둘러 말해져 온 정황이다. 최은영은 여성주의가 가장 활발하게 개진되었다고 기억되는 1990년대 중반에도 민족주의를 위해서나 '훼손당한 조국의 누이'로 대상화된 채 앞세워지던 여성 문제, 때로는 협의의 당사자성으로 여성 간의 연대가 가로막히던 순간들을 섬세하게 짚어낸다. 교지를 만드는 대학생들이 여성 문제에 어떻게 접근할지 메타화 된 자리에서 고민하게 함으로써 그리고 그 안에서 여성들 간의 입장차와 균열을 다룸으로써 「몫」은 자연스럽게 '순수한' 피해자라든가 '완벽한' 자매애를 둘러싼 환상을 피해 간다. 인물들은 진정성을 입증하는 감정을 내세우기보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자리에서 문제에 접근하며, 세 여성 모두 나름대로 자신의 '몫'에 충실했으나 누구도 결국에는 이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며 비난 없이 서로를 껴안는다.
    하지만 여성주의가 또다시 부차적인 것으로 미루어진다면, 그 어떤 여성에게라도 승리의 그날이 올 수 있을까. 이때로부터 20여 년이 흘렀지만 소설 속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이 여전히 고스란히 동시대에 감당해야 하는 문제라는 사실을 지각할 때의 충격은, 여성주의가 쉽게 끝나지 않는 지난한 싸움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소설은 '당신'이라는 2인칭 시점을 고수함으로써 지금 이 시대의 '당신'을 책임과 연대 속으로 끌어들이고자 한다. 이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가 우리에게 남은 '몫'일 것이다.

 

 

 

 

 

작가소개 / 강지희

문학평론가

 

 

 

 

 

 

 

 

 

 

 

 

 

 

 

 

[2018 올해의 소설]

 

 

을의 숨가쁨과 서글픔

 

노대원

 

 

    2018년은 갑의 횡포, 이른바 '갑질'의 폭력성이 사회적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던 한 해였다. 그만큼 우리 사회의 권력과 위계에 의한 폭력과 악행이 오랜 병폐였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한편, 반갑기로는 그 병폐가, 늦었지만, 비로소 진단과 척결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이다. 바야흐로 세상은 변하고 있는 중이다. 이 혼란의 풍경을 우리 작가들은 함께 앓으며 함께 바꿔 나가고 있다. 물론, 현대문학은 줄곧 차별과 폭력에 대항하는 서사를 구축해 왔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을'로 여긴 독자들에게 열렬한 공감을 얻은 소설들이, 올해는 더욱 눈에 띈다. 그렇게, 소설은 작가가 아니라 사회 속의 독자들로부터 의미를 얻는다.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장류진, 「일의 기쁨과 슬픔」,
《창작과비평》, 181호(2018 가을)[/caption]

 

    신인 소설가 장류진의 등단작 「일의 기쁨과 슬픔」은 회사 소설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마침 근래 들어 '모큐멘터리(Mockumentary)'를 표방한 다큐-드라마 <회사 가기 싫어> 역시 큰 화제를 모았다. 직장인들의 애환을 생생하게 재현하고 보고한 까닭에 숱한 '미생'들의 공감을 얻었다. 신형철은 알랭 드 보통의 텍스트를, 노스럽 프라이의 산문 분류 체계를 인용해, '아나토미(anatomy)'에 대응시킨 적 있다. <회사 가기 싫어> 또한, 적확하게, 회사 생활을 철저히 해부한 텍스트다. 보통의 에세이에서 표제를 착안한 「일의 기쁨과 슬픔」은 갑과 을의 해부학인 동시에 '웃픈' 감정의 도화선이자 위로책이다.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배상민, 「남은 그림자」,
《문장 웹진》, 153호(2018, 1월호)[/caption]

 

    우리 사회의 약자들의 목소리를 '웃프게' 들려줄 수 있는 작가. 그 일이라면 배상민은 이미 달인의 경지에 올라 있다. 그의 「남은 그림자」는, 예전보다 웃음기를 빼고 더 진지하게 질문한다. '미투' 운동이 한창일 때 발표된 이 소설은 '촛불집회'가 촉발한 사회적 변화의 분위기 속에서, 을로서 직장인들의 서글픔과 성적 폭력의 문제를 함께 다룬다.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인물이 사적이고 성적인 영역에서 타락할 수 있다는 점은, 우리 시대의 세태풍자로 읽힌다. 또한 지그문트 바우만이 진단한 것처럼 '연대'가 불가능해진 개인들의 사회에서 연대의 (불)가능성을 묻는다. 그것이 '남은 그림자'의 의미일 것이다.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권여선, 「너머」,
《문학동네》, 94호(2018 봄)[/caption]

 

    권여선의 「너머」는 기간제 교사 N의 내면을 쫓는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사회적 경계 문제를 다루면서, 동시에 그 '너머'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이기심을 미묘하고도 예리하게 포착한다. 게다가, 경계인으로서 N은 와병 중인 노모(老母)를 모시며 생/사의 기로에 함께 서 있다. N은 사회적 존재로서 '계약 기간 연장'을 두고 울고 웃으며, 그의 어머니는 생물학적 존재로서 죽음을 지연해 나간다. "무기의 죽음을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N의 머릿속에 소름끼치도록 확연하게 각인되었다."(293쪽) 죽거나 살도록, 우리의 생사를 결정하는 이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작가소개 / 노대원

문학평론가. 제주대 국어교육과 조교수. 제6회 대산대학문학상 평론 부문 수상. 201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2018 올해의 소설]

 

 

집 나간 재미가 돌아왔다

 

박인성

 

 

    돌이켜보니 올 한 해 나는 몇몇 한국 소설을 제법 재미있게 읽었다. 때로는 지루하더라도 극복해야만 하는 '엄근진'한 평론가의 직업병적 스트레스마저 극복하고 '재미' 자체를 대하여 논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고맙기까지 하다. 이 글은 해석에 대한 강박마저 넘어서 새삼스럽게 이야기를 읽는 재미와 몰입하는 즐거움에 대하여 새삼 일깨워 준 소설들의 짧은 목록이다.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박상영, 「재희」,
《자음과모음》, 38호(2018, 가을)[/caption]

 

    첫 번째 작품은 박상영 「재희」(《자음과모음》, 2018 가을)다. 박상영의 경우는 올해 발표한 다른 소설들도 편차 없는 재미를 제공했으나, 그중에서도 「재희」는 단연 뛰어난 재미와 몰입감을 선사했다. 박상영은 굳이 진지하게 많은 말을 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서사적 굴곡과 역동성이야말로 축약적인 삶의 주름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작가다. 나는 박상영 소설의 역동적이기까지 한 욕망과 인물들이 자아내는 성적 긴장감, 속물적인 자기 인식과 얄팍함 모두를 사랑한다. 어떤 비평적 판단 없이도, 앞으로 이 작가의 이야기가 더 많은 독자들을 즐겁게 해줄 수 있으리라 확신하기란 어렵지 않다.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최은영, 「상우」,
《Axt》, 18호(2018, 5-6월호)[/caption]

 

    두 번째는 최은영의 「상우」(《Axt》, 2018, 5-6월호)다. 나는 흔히 언급되는 최은영 소설의 말랑말랑함, 혹은 센티멘털리즘을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감성적 돌파구가 오늘날 한국 소설에 더욱 요구되는 것일뿐더러, 사실 최은영 작가는 그저 말랑말랑한 감성이 아니라 끈끈한 이야기적 구성과 몰입하기 용이한 인물들에의 설득을 수행하는 견고한 밀도를 지닌 작가다. 「상우」와 같은 텍스트에서 가족이자 혈연에 대한 이야기를 빤한 것과 빤하지 않은 것 사이로 왕복하면서, 서술적 시선과 인물에 대한 이해 사이에 완충지대를 구성하는 방식, 소수자로서의 동생에 대한 친밀함과 낯섦 사이를 보다 보편적으로 들려주는 이야기 능력이야말로 2018년의 한국 소설을 긍정적으로 대변한다.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권여선, 「너머」,
《문학동네》, 94호(2018 봄)[/caption]

 

    마지막은 권여선의 「너머」(《문학동네》, 2018 봄)다. 권여선 정도 경력의 작가가 여전히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선 놀라움을 준다. 그러나 그런 놀라움 이상으로 사회적 구조와 갈등에 놓인 구체적 인간에 대한 치밀한 응시, 현실과 소설 사이를 겹치게 하는 핍진한 재현, 읽는 사람을 저도 모르게 울컥하게 만드는 보편적 감수성까지, 권여선의 소설은 어떤 비평적 입장보다도 우선하는 문학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 더욱 큰 영향력을 기대할 수 있는 지속적인 변화 속에 있다. 소설적 재미와 삶의 실감이 구분되지 않을 만큼 밀도 있게 제공된다는 점에서, 「너머」와 같은 텍스트를 읽는 일은 지금 동시대의 한국 문학을 읽는 일이다.
    위에 언급한 작가들은 단지 소설가로서가 아니라, 더 넓은 현실을 살아가는 동시대인으로서 누구나가 몰입 가능한 이야기들을 오늘날 문학에게 다시 되돌려 주는 중이다. 이들을 통해서 나는 아직도 한국 소설들이 더 많은 재미를, 몰입을, 감동을 주는 일이 가능하다 믿는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자연스럽게 문학적 의미와 해석의 자장 또한 풍성하게 할 것이다.

 

 

 

 

 

작가소개 / 박인성

문학평론가.

 

 

 

 

 

 

 

 

 

 

 

 

 

 

 

 

 

 

[2018 올해의 소설]

 

 

백지은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박상영, 「#부산국제영화제」,
《현대문학》, 761호(2018 , 5월호)[/caption]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이주란, 「넌 쉽게 말했지만」,
《21세기문학》(2018, 가을호) [/caption]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김중혁, 「심심풀이로 앨버트로스」,
《현대문학》, 767호(2018, 11월호)[/caption]

 

    이 시대 우리의 경험은 어떻게 이야기가 되는가? 손바닥 위의 스마트폰이 한시도 꺼지지 않는 시대, 손가락으로 톡 치면 낯익은 시공간의 가장 친근한 일상으로부터 같은 시간 지구 반대편의 외딴 섬에 조난당했다 살아나온 사연까지 줄줄이 이어져 나오는 시대, 세상 모든 삶들은 오직 거기에만 있고 거기서만 보일 것 같은 시대, 우리의 모든 경험은 기록되고 업뎃되어 그곳에서 연결되고 전해지는 시대... 1. 박상영의 「#부산국제영화제」(작품집에는 제목에서 #가 떼어져 수록되었다)는 가난도 불행도 사랑도 환멸도 다만 해시태그(#)로서 기록되고 전해지는 경험들의 세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야기다. 놀라운 것은, 그런 기록과 등록이 우리 삶을 피상적으로 분리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그 분리로부터 우리가 삶을, 그러니까 가난과 불행과 사랑을 우리 자신에게 기입하는 양상, 그 방식과 의미가 이전과 달라졌음을 똑똑히 느끼게 한다는 것. 2.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는 삶의 경험들이 다 # 뒤로 붙어 데이터로 연결된 세상이라... 고 말했던 건 역시 너무 억지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도 #를 붙이기는 이상한 경험들만 이야기하는 이주란의 「넌 쉽게 말했지만」을 읽으면, 우리가 듣고, 울고, 만나고, 얘기하고, 되새기는 매 순간들이 결국 생의 유일무이한 목적임을 잔잔히 알아차리게 된 것만 같다. 3. 어쨌거나 이야기가 궁금하면 검색하라, 이야기를 만들고 싶으면 자료를 모으고 기록하라, 는 이 시대 소설의 중요한 원리다. 소설가들은 다 그렇게 할까? 그런 일을 제일 잘 하는 친구가 옆에 있으면 소설가들은 어떤 소설을 쓰게 될까? 김중혁의 「심심풀이로 앨버트로스」를 읽어보시라. 아직 김중혁 옆에 그런 친구가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작가소개 / 백지은

문학평론가.

 

 

 

 

 

 

 

 

 

 

 

 

 

 

 

 

 

[2018 올해의 소설]

 

 

거두절미할 수 없는, '올해의' 소설들

 

소영현(문학평론가)

 

 

권여선, 「너머」(《문학동네》, 2018 봄)
박민정, 「모르그 디오라마」(《릿터》, 2018, 2-3월호)
김봉곤, 「데이 포 나이트」(《자음과모음》, 2018 여름)

 

    거두절미하고 올해의 소설 3편을 꼽고 싶지만,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비평적 엄밀성에 비춰보자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한 작품으로 완결된 세계를 보여주는 좋은 소설이 있고, 전작 소설들과 나란히 놓일 때 더 빛나는 소설이 있다. 형식적 완미함을 통해 미적 쾌감을 선사하는 소설이 있고, 심장을 움켜쥐고 뒤흔들며 나와 우리 그리고 삶 전체를 돌아보게 하는 소설이 있다. 깊은 내면으로 침잠하게 하는 소설이 있고, 지식과 정보를 활용해 우리에게 새로운 통찰의 시선을 제공하는 소설이 있다.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 있고 우리를 문득 다른 세계로 데려가는 소설도 있다.
    가치에 대한 판단 기준이 있다는 말과 각기 다른 좋은 소설들이 하나의 기준으로 비교될 수는 없다는 말이 함께 사용될 수 없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좋은 소설은 언제나 변치 않는 외적 기준에 의해 이미 선재하며 우연히 부상하는 게 아니다. 좋은 소설은 발견되며 만들어지고 탄생한다. '올해의'라는 말은 그러한 탄생의 과정에서 중요한 요소로서 작동한다. 쉽게 폐기될 수 없는 그 거두절미야말로 '올해의'라는 말이 지칭하는 바이기도 한 것이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미투 해시태그 운동 이후로, 한국 문학의 변화를 견인한 어떤 흐름이 뚜렷한 성과로 가시화되고 있다. '페미니즘'과 '퀴어'와 함께 한국 문학은 삶에 좀 더 다가가고 있으며 미시적인 것에서 거시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억압과 폭력과 사회구조적 문제에 한 발 더 깊이 개입하고 있다. 시야를 좀 더 확장하면 세월호 이후 한국 문학의 향배가 이제야 비로소 뚜렷해지고 있다.

 

*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권여선, 「너머」,
《문학동네》(2018 봄)[/caption]

 

    '세월호 이후 문학'에 대한 고민이 만들어낸 성취에 대해서는 권여선 작가를 두고 말해야 한다. 권여선 작가는 지난 십여 년 동안 내내, 그리고 최근 더 뚜렷하게 한국 문학의 질적 성장을 이끈 대표적 작가 가운데 하나다. 권여선의 '올해의' 소설 「너머」(《문학동네》, 2018 봄)에서 접하게 되는 인간과 현실에 대한 복합적이고 거시적인 통찰의 깊이는 압도적이다. 악랄한 쪼개기 계약에 내몰린 기간제 교사의 흔들리는 일상의 균열을 파고드는 「너머」에서는 인간에 대한 가장 세심한 돌봄(노동)이 이루어져야 하는 학교나 요양병원이라는 공간과 현재 한국 사회의 가장 집약적 모순을 체현하는 비정규직을 프리즘 삼아, 이 시대의 리얼리스트답게 신자유주의가 변형한 우리의 삶의 표정과, 합리성을 가장한 억압과 끝없이 자가-분할되는 공동체 내의 위계를 통해 민주주의의 마비된 기능까지를 날카롭게 사유한다. 내내 유머를 잃지 않고 한국 사회의 복합적 면모를 정확하고도 섬세하게 한 겹씩 들춰내고 끝내 위안의 가능성을 건넨다.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박민정, 「모르그 디오라마」,
《릿터》(2018, 2-3월호)[/caption]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한국 문학의 변화를 가장 실감하게 하는 소설적 성취는 박민정 작가의 작업을 두고 짚고 싶다. 성범죄는 문학적으로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는가. "나는 죽었던 적이 있어요. (나는 발가벗겨진 채 사진을 찍혔고) 그때 죽었어요." 박민정의 '올해의' 소설 「모르그 디오라마」에서 화자가 어릴 적 겪은 성범죄는 임사체험으로 기억(/가공)된다.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피해자의 기억은 어떻게 복원될 수 있는가. 「모르그 디오라마」에서 일시적으로 눈이 멀었고 잠깐 죽었던 그 순간의 기억은, 그보다 20년쯤 지난 후 모자이크 처리조차 되어 있지 않은 채 여자 성기가 드러나 있는 몰래카메라 영상이 업로드 되는 사건과, 그보다 100년쯤 이전에 시체공시소에 전시된 시체를 보러 구경꾼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던 그로테스크한 파리의 풍경과 함께 병치될 때 몽타주처럼 불현듯 떠오른다. 노골적으로 전시하지 않으며 직접적으로 선동하지 않으면서도 「모르그 디오라마」는 현재 한창 논란 중인 사회 문제에 단도직입적으로 개입하여 이미 '죽은 세상'인 이곳에 대한 전면적 질문과 성찰을 요청한다.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김봉곤, 「데이 포 나이트」,
《자음과모음》(2018 여름)[/caption]

 

    김봉곤 작가의 소설을 빼고 2018년 새롭게 펼쳐진 한국 문학의 풍경을 말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알 수 없는 어딘가에서 지구로 날아든 낯선 물체처럼 김봉곤의 퀴어 서사는 그렇게 한국 문학에 등장했고, 한국 문학을 새로운 자리로 문득 옮겨 놓았다. 반추할수록 상처만 남는 실패한 로맨스이자 세련된 퀴어 서사로서의 매력이 반짝이는 김봉곤의 '올해의' 소설 「데이 포 나이트」(《자음과모음》, 2018 여름)가 독자를 매혹한다. 단언컨대 한국 문학의 퀴어 서사는 김봉곤 작가의 등장 전후로 나뉜다. 무릇 소설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야말로 읽는 나를 잊고 다른 세계로 내던져지는 이화의 경험, 문득 세계와 내가 낯설어지는 그 마술적 순간이 아닌가. ASMR처럼 집중력을 부르는 내레이션, 회한의 시간 뒤편에 펼쳐진 멜랑콜리한 컬리지 포크의 세계로 누군들 무심결에 빨려 들어가지 않을 수 있을까. 회한의 시간들 뒤로 펼쳐질 무언가에 대한 기대가 한껏 부풀려지는 계절이다.

 

 

 

 

 

작가소개 / 소영현

2003년 『작가세계』에 「낯설고 불편한, 새로운 유희의 시작―최윤론」을 발표하면서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지은 책으로 『문학청년의 탄생』, 『부랑청년 전성시대』, 『분열하는 감각들』, 『프랑켄슈타인 프로젝트』, 『하위의 시간』, 『감정의 인문학』(공저), 『문학사 이후의 문학사』(공저), 『감성사회』(공저) 등이 있다.

 

 

 

 

 

 

 

 

 

 

 

 

 

 

 

 

 

[2018 올해의 소설]

 

 

탁한 불안의 시대, 그래도 숨 쉬듯 쓰기

 

이소연

 

 

    북서풍이 불면 어김없이 매캐하게 하늘을 뒤덮는 미세먼지는 이제 피할 수 없는 일상이 되어버렸다.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기분이나 느낌을 자연 현상에 투영하곤 하는 자연스러운 심리적 현상일까. 저 미세하게 오염된 공기는 정신의 개인의 노력 혹은 선의가 아무리 간절해도, 피할 수 없는 불행이 만연하다는 느낌을 더해 주고 있다. 그래도, 별수 없다. 숨 쉬는 일을 멈출 수는 없는 노릇. 오늘의 밥과 음료의 몫을 벌기 위해 문을 열고 매캐한 대기 안으로 뛰어드는 이들이 대한민국에는 얼마든지 있다. 이들은 매일 살기 위해 조금씩 자신을 죽여야 한다는 것, 그래야 간신히 이 땅에서 생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체득한 것이 아닐까.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강영숙, 「곡부」,
『한국문학』, 306호(2018 상반기)[/caption]

 

    이러한 현실을 더듬기 위해 올해 발표된 세 편의 소설을 읽는다. 강영숙은 무언가 상실한 대상을 찾기 위해 낯선 땅에 도착한 이방인들을 주인공으로 한 테마를 끊임없이 다뤄 온 작가다. 그가 올해 발표한 「곡부」(한국문학 2018 상반기)는 넓디넓은 중국 땅에 던져져 실종된 직장 동료를 찾는 한 회사원의 여정을 따라가고 있다. 강영숙의 소설은 강렬한 혼돈의 한가운데로 독자를 끌고 들어가 내면에 자리 잡은 불안의 바닥을 마주하게 하는 힘이 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우리에게 닥친 불운이 계속되리라는 것, 우리가 할 일은 그저 이를 온몸으로 견뎌낼 따름이라는 두려운 사실을 전하고 있다. 강영숙은 단편집 『회색 문헌』을 비롯해서 최근 작품에서 계속 이러한 서늘한 메시지를 자기 방식대로 변주하고 있다. 그저 묵묵히, 이 괴로운 '바닥'이 얼마만큼 낮은 단계까지 내려갈지 지켜보고 싶다.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장류진, 「일의 기쁨과 슬픔」,
『창작과비평』, 181호(2018 가을)[/caption]

 

    단연코 올해 한국 문학의 이슈메이커를 꼽으라면 장류진의 이름을 빠뜨릴 수 없다. 그는 신인당선작 「일의 기쁨과 슬픔」(창작과비평 2018 가을호)으로 독자는 물론 평론가, 미디어의 주목을 받는 행운을 누린 드문 작가다. 그의 소설이 지닌 미덕이자 매력은 지금, 이곳, 한국 청년들이 처한 불행과 아픔을 정면으로 묘파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다운 경쾌함, 대책 없는 낙관주의, 디지털 플랫폼에서 읽어도 어울릴 듯한 신선하고 가독성 높은 문체가 (최근 거의 잊고 있었던) 소설 읽기의 '재미'를 상기하게 만든다. 2018년 현실을 잘 집약해 주는 '웃프다'라는 신조어가 이렇게 잘 어울리는 소설이 있을까.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김혜진, 「동네 사람」,
『창작과비평』, 180호(2018 여름)[/caption]

 

    김혜진 「동네 사람」(창작과비평 여름호)은 최근 한국 문학에서 중요한 이슈인 퀴어/젠더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한편 이 소설은 '퀴어'라는 소재가 아니어도, 소수자들이 공동체 속에서 어떻게 소외되며 마침내 궁지에 몰리게 되는가를 섬세하게 드러낸, 보편적인 차원의 사회 소설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주로 인용부호 없는 대화들로 속도감 있게 이어지는 본문을 읽다 보면 한편의 부조리극 대본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소수자, 특히 퀴어와 여성들을 향한 사회의 편견과 선의의 가면을 쓴 폭력을 직접적으로 추체험하기에 가장 최적의 형식이 아닌가 싶다. 나는 최근 소설들이 소수자에 대한 윤리나 '올바른' 감수성을 직설적으로, 충분히 상황과 인물을 통해 육화되지 않은 생경한 격문으로 나열하는 방식에 지루함을 느꼈음을 고백한다. 김혜진의 단편은, 비록 다소 클리셰에 가까운 장면과 대화가 종종 등장하긴 하지만 작가의 윤리의식과 인간관을 충분히 극적인 상황과 장면으로 구체화 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앞에서 거론한 세 작품은 불안과 폭력이 미세먼지처럼 일상을 뒤덮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는 데 머물지 않고, 이 과정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왜 이야기를 만들고, 쓰는지, 그리고 계속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소설의 본령을 다시금 상기하게 하는 수작들이다. 질 나쁜 공기인 줄 알면서 어쩔 수 없이 숨 쉬듯이, 더 이상 현실을 실감 나게 반영할 공통감각이나 지성의 공유지가 존재하지 않는 줄 알면서도 계속해서 쓰는 작가들의 분투와 기쁨이 전달된다고나 할까. 이들은 전망이라곤 보이지 않는 탁한 시대 속에서도 없어도 그저 살아가는 것만이 답임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동시대에 반복되는 이야기들의 실마리가 어디에서 연원한 것인지 추정하게 한다. 그것은 바닥없는 절망, 증발된 선의, 외부 없는 먼지 구덩이에서 계속되는 삶을 투명하게 인식하는 데서 온다. 이제 인정하려고 한다. 2018년에도 숨 쉬듯 쓰기를 멈추지 않는 인생들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작가소개 / 이소연

문학평론가. 공역서로 『서사학 강의: 이야기에 관한 모든 것』, 저서로 『응시하는 겹눈』이 있다.

 

 

 

 

 

 

 

 

 

 

 

 

 

 

 

 

 

[2018 올해의 소설]

 

 

 

이은지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권여선, 「너머」,
《문학동네》, 94호(2018 봄)[/caption]

 

    권여선의 「너머」(《문학동네》, 2018 봄)에는 디테일을 위한 디테일이 아닌,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 너머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를 드러내기 위한 냉철한 객관의 요체로서의 디테일들이 치밀하게 제시되어 있다. 이 작품으로부터 독자가 확보할 수 있는 것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대립 등이 선악구도나 갑을관계처럼 명쾌하게 정의될 수 없음을 재확인하는 시간, 통계와 담론과 실증의 언어로 규정된 세계 너머의 세계를 여과하고 추출해 내는 시간이다. 오로지 이문을 추구하기 위해서만 무섭게 굴러가는 자본의 관성을 떨쳐내지 못한다면 그 관성에 붙들린 구성원들이 제아무리 민주적 자치의 사명을 다한다 한들 그들의 몫은 공정하게 '분배'되기보다 정교하게 '분할'되고 말 것이라는, 이 시대의 물리적 진실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작품이다.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이승우, 「소돔의 하룻밤」,
《문학과사회》, 122호(2018 여름)[/caption]

 

    이승우의 「소돔의 하룻밤」(《문학과사회》, 2018 여름)은 대다수 사람들에게 사은유가 되다시피 한 성경 텍스트를 축자적으로 깊이 탐문함으로써 다시금 시대와 공명하도록 하는 역설적 전위가 인상적인 작품이다. 오랜 세월 마모되어 온 구절들이 추상에서 실제로 변모하며 지극히 입체적으로 읽히는 한편으로, 그 입체성이 다시금 관념적으로 되읽히는 교호 작용 속에서 텍스트가 간직하고 전수하는 가치 또한 반성적으로 되짚어 보게 된다. 무엇보다 한국 기독교 근본주의 진영이 동성애 혐오의 근거로 오랫동안 왜곡하고 오독해 온 텍스트를 순수하게 텍스트로 직면한 끝에 전혀 상반되는 가치를 증류해 내고 있기에 그 의미가 각별하다.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최진영, 「어느 날(feat. 돌멩이)」,
《웹진 비유》(2018, 1월호)[/caption]

 

    최진영의 「어느 날(feat. 돌멩이)」(《웹진 비유》, 2018, 1월호)은 묵시적 서사에서 기대할 수 있는 희망의 최대치를 정돈된 수사로 담담하면서도 호소력 있게 전달한다. 운석의 등장으로 임박한 지구 종말은 부채사회에 예속된 금융주체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히 무화시킨다. 돈의 금액이 곧 마음의 크기를 결정짓는 왜곡된 현실을 적극적으로 부정했을 때 마음은 어떤 양상으로 변모하는지를 작가는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현실의 물질적 조건에서 놓여난 마음은 자본에의 예속도 세대적 단절도 뛰어넘어 오로지 사람과 사람 간의 인력만으로 움직이게 된다. 인간과 세계를 향한 관심을 묵시적이고 우화적인 형식 속에 단정하게 담아내는 작가 고유의 장점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작가소개 / 이은지

문학평론가. 2014년 《창작과비평》을 통해 평론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2018 올해의 소설]

 

 

한영인

 

 

 

1. 이현석, 「라이파이」 《현대문학》, 2018년 4월호.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이현석, 「라이파이」,
《현대문학》(2018 4월)[/caption]

 

    아버지의 초상을 통해 공동체의 역사를 재구(再構)하려는 충동은 한국 근대문학에 있어 오래된 것이다. 그 시작엔 아비의 부정, 혹은 아비의 살해가 자리하고 있었으나 호기롭게 자신의 아비를 죽인 존재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또 다른 아비가 되어 부정과 극복, 혹은 경멸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 근대문학은 이렇게 '아버지의 이름'을 정립하고 무너뜨리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특유의 남성성을 체현했다는 비판이 거세게 제기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다시 아버지를 소환해 지나간 역사의 상흔을 되살리려는 시도는 자칫 퇴행적인 것으로 치부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현석의 이 작품은 그런 위험을 정면으로 마주하면서도 성공적으로 돌파해 낸다. 이현석은 아버지를 이성적이고 합법칙적인 존재로 정립함으로써가 아니라 무의식의 공포에 떨고 있는 충동 덩어리로 '퇴행'시킴으로써 아버지의 자리를 비워내고 그 탈구된 빈자리에 비로소 공동체의 아픈 역사가 개별화 된 기억을 매개로 내려앉게 된다.

 

 

2. 한정현, 「괴수 아키코」, 《문학과사회》, 2018년 가을호.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한정현, 「괴수 아키코」,
《문학과사회》, 123호(2018 가을)[/caption]

 

 

    한정현은 이 작품에서 아버지-어머니의 존재(혹은 부재)를 후뢰시맨과 빠다 볼 코코낫, 어니언스와 김추자 같은 당대 (하위) 문화의 기표들과 함께 뒤섞는 한편 오키나와의 비극과 연루시키면서 일견 협소해 보이는 혈연의 의미망과 관계망을 동아시아 지역사의 차원으로 확산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 작품은 지나간 과거를 문화적 기표의 연쇄를 통해 회고적으로 직조하면서도 그 문화에 깊이 배태되어 있는 당대의 정치적 억압의 실체를 세련되게 드러낸다. 이 '세련됨'은 무엇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러 이름들과 인물들이 철저하게 기호화 되어 있기 때문에 획득되는 것이다. 역사학이 엄밀한 사적 증거를 통해 과거를 구성해 낸다면 소설은 어쩌면 이러한 '기호의 왕국'을 통해 새로운 역사의 이해에 가닿을 상상력을 제공해 주는 것은 아닐까.

 

 

3. 정지돈, 「빛은 어디서나 온다(Light From Anywhere)」, 《창작과비평》, 2018년 여름호.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정지돈, 「빛은 어디서나 온다(Light From Anywhere)」,
《창작과비평》, 180호(2018 여름)[/caption]

 

    정지돈은 한국 문학을 일종의 도면으로 삼고 그 위에 '기호의 왕국'을 건설하느라 여념이 없는 독보적인 건축가다. 1970년에 열린 오사카 만국박람회를 배경으로 이른바 '근대화 시기'를 통과했던 인물들의 회고를 서사화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 정지돈은 오사카 만국박람회에 '안내양'으로 선발되어 근무했던 태순이라는 인물의 진술 속에 그녀가 만났던 양코와 김수근을 비롯한 다양한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분열하는 세포들처럼 내삽함으로써 미래라는 소실점을 향해 질주했던 한 시대의 풍경을 인상적으로 그려낸다. 하지만 미래는 우리가 마침내 가닿을 수 있는 어떤 목표가 아니라 결코 도달할 수 없기에 끊임없이 되돌아오고야 마는 지난한 과업 같은 것이 아닐까. 그 낙차를 오가는 분주한 운동을 더없이 피로한 것으로 감각하는 예민한 의식을 '근대적인 정신'의 한 특징이라고 할 때, 이 작품은 '우리식 모더니즘'에 서린 꿈과 피로의 정체를 거듭 심문하게 만든다.

 

 

 

 

 

작가소개 / 한영인

문학평론가. 계간 《창작과비평》 편집위원.

 

 

 

 

 

 

 

 

 

 

 

 

[2018 올해의 소설]

 

 

황현경

 

 

 

권여선, 「희박한 마음」, 《자음과모음》, 2018 여름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권여선, 「희박한 마음」,
《자음과모음》, 37호(2018 여름)[/caption]

 

    과거 누군가 담배를 끄라며 연인의 뺨을 때리는 곁에서 무력했던 이가 지금 옆집 수도계량기 소음을 졸린 목으로 피 넘어가는 소리로 듣고 겁을 낸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이야기다. 한데 그 낯모르는 남자의 명령이 데런에게 영혼과 사랑을 끄라고 들린 것을 시작으로, 여성을 사랑하는 여성이 아니었다면 겪지 않았을 그런 일들의 집요한 반복이 디엔과 나눈 삶과 꿈에 대한 기억을 엉망으로 뒤엉키게 하였음을 이만큼 보여주면 그럴 수밖에 없겠다 싶은 이야기가 된다. 소설이라는 복잡하고 아름다운 형식을 고작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읊어 주는 데 쓰는 건 너무 아깝다고 나는 여전히 생각한다. 그게 '그에게' 무슨 일이었는지를 이 반의 반만이라도 보여 달라는 말이다.

 

 

김봉곤, 「시절과 기분」, 《21세기문학》, 2018 봄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김봉곤, 「시절과 기분」,
《21세기문학》, 80호(2018 봄)[/caption]

 

 

    소설가가 된 '나'는 게이임을 커밍아웃하러 혜인이 있는 부산으로 향하지만, 어쩌면 이미 그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를 그녀와의 하루는 별일 없이 지나간다. 거의 이국인 듯 공기부터 다르게 느껴지는 그곳으로 돌아가자 되살아난 함께였던 시절의 기분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귄 이성이었던 그녀와 재회하는 지금의 기분과 뒤섞인 결과이겠고, 그것은 한 팔십 매는 있어야 한번 이야기해 볼 수나 있을 만큼 복잡한 기분일 테니, 이만하면 소설이어야 할 이유로 충분하다. 누군가를 사랑했던 '시절'의 '기분'에 관한 것이기에 참으로 김봉곤의 소설이고, 게이로서의 '(성)정체화' 과정 이전에서부터 시작해 흔들리며 나아갈 앞날을 열어 둔 채 끝맺기에 참으로 긴 봉곤의 소설이다.

 

 

김지연, 「작정기」, 《문학동네》, 2018 가을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김지연, 「작정기」,
《문학동네》, 96호(2018 가을)[/caption]

 

    원진을 향한 '나'의 마음은 사랑이고 '나'를 향한 원진의 마음은 우정이다. 이런 마음들은 서로 오갈 수 없어 서로 아프다. 「작정기」는 몰라주니 고맙다가도 때로는 미웠기에 나중에는 그립다가도 자책하게 된 '나'의 마음은 드러내 보여주고, 몰라서가 아니라 너무 잘 알아서 받을 수 없었기에 조심스레 돌려주고 싶었을 원진의 마음은 감추어 짐작게 한다. 쓴 걸 쓴 만큼 읽게 하는 것도 쉽지는 않은 일이지만, 안 쓴 것까지 기어이 읽게 하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먼 길 돌아 '나'에게 오고서도 아련하기만 한 원진의 그 마음을 상상하려니 우리의 마음도 분주해지는바, 그렇듯 읽으며 마음이 많이 움직인다는 의미에서 이 소설은 문자 그대로 '감동(感動)'적이다.

 

 

 

 

 

작가소개 / 황현경

문학평론가. 2012년 문학동네 신인상에 「반격, 김사과!」로 등단.

 

   《문장웹진 2018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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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1
다시 서정을 위해

[에세이] 다시 서정을 위해 권상진 스무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서른이 되기 전에 시인이 되겠다고 주변에 떠들고 다녔던 기억이 아슴하다. 「홀로서기」를 외웠고 「지란지교를 꿈꾸며」를 외웠다. 이생진을 읽고 백창우를 읽고 박노해를 읽었다. 잔잔하게 때로는 웅장하게 가슴을 밀고 들어오는 시편들이 심장을 가로세로로 뛰게 만들었다. 백석과 김수영과 기형도의 이름은 몰랐지만 굳이 그들이 아니어도 충만한 시간들이었다. 시집이 이천 원에서 삼천 원 정도 할 때여서 큰 부담 없이 고를 수 있었고 외출할 때 시집 한 권을 들고 밖을 나서도 아무도 이상하게 쳐다보는 이도 없었다. 오히려 뭇 여성들의 시선이 슬쩍슬쩍 내 턱선을 지나 책장에 닿는 기분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생일이나 기념일에는 으레 서점에 들러 시집을 골랐다.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원태연),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류시화), 『친구가 화장실에 갔을 때』(신진호) 같은 시집을 골라 슬쩍 건네던 날들이 아련하다. 스물이라는, 가라앉을 것 하나 없는 맑은 감정에서 속살거리는 말들을 시인들은 대신 말해 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십 대는 가고 이십 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하고 대학을 쫓겨나 군대를 다녀오고 나니 어느새 아무데도 기댈 수 없는 성인이 되어 있었다. 오래된 가난이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그때부터 가난은 나를 가만히 두지를 않았다. 공장 일을 시작했는데 처음 해보는 노동이란 게 미치도록 좋았다. 종일 몸을 쓰고 땀을 흘리는 일이 알 수 없는 쾌감을 안겨 주었고 월급이라는 보상까지 덤으로 안겨 주었다. 시를 읽고 쓰는 일만큼 일이 재미있었고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도 살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더없이 좋았다. 지쳐 잠들기 전 문득 돌아본 시의 한때는 짧은 여행지의 추억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나의 스물은 급류처럼 흘러갔고 시는 둑 너머에 있어 쉽게 손이 닿지 않았다. 하지만 일과 돈, 그리고 자립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노동은 즐겁고 땀은 향기로웠지만 갑자기 내가 꿈꾸던 삶이 이런 것이었던가 하는 질문이 나를 툭 한 번 치고 갔다. 해지는 풍경만 봐도 맥박이 난동을 부리고 꽃과 낙엽의 표정을 살피면 왠지 모를 눈물이 맺히던 한 시절의 기억이 불현듯 피곤에 지친 등을 흔들어 깨웠다. 시인이 되겠다던 꿈을 무참히 짓밟고 나를 공장 노동자로 내몰았던 대학교 재단 이사장의 말이 떠올랐다. ‘약속은 지키면 좋은 것이고 못 지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던 그의 말. 그가 지키지 않은 약속 때문에 학교에서 쫓겨난 나는 궤도를 이탈해 버린 행성처럼 어둠 속으로 무작정 떠밀려가고 있었다. 막막한 혼돈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던 약속이란 단어가 다시 나를 수습하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서른을 지나갔고 아무도 내게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물어 보는 이는 없었지만 스스로와의 약속은 끝내 지켜주고 싶었다. 그렇게 시가 다시 내게로 왔다. 세월도 변했고 시도 변해

  • 관리자
  • 2024-10-01
과거를 보는 미래 SF

[에세이] 과거를 보는 미래 SF 곽재식 며칠 전 나는 한 행사에서 SF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소개하는 발표를 하나 맡게 되었다. 발표가 다 끝나고 질문 답변 시간이 되었는데 청중 중 한 분이 “SF라면 미래를 생각해 봐야 하는데, 왜 옛날 SF를 소개했느냐?”라고 질문했다. 그날 행사 중에는 답변을 짧게 드렸지만 이 내용은 한번 깊게 따져 볼 만한 재미난 주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한번 해보려고 한다. 명작 SF로 자주 손꼽히는 1970년대 영화로 <>이라는 할리우드 영화가 있다. 찰턴 헤스턴이 주연을 맡아 대형 영화사에서 배급한 그야말로 정통 할리우드 영화인데 그러면서도 비참한 미래의 모습을 예상해서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 결말도 뻔한 할리우드 영화의 행복한 결말이라고 말하기는 매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가기에 눈에 뜨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맨 마지막에 주인공이 외치는 대사는 SF 영화사에서 유명한 대사 순위를 꼽으면 상위권에 자주 오를 만큼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미래는 인구가 너무나 빠르게 늘어났기 때문에 멸망해 가고 있는 세상이다. 인구가 너무나 많은 데 비해 식량과 자원은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굶주리고 모든 물자가 부족해 다들 비참하게 살고 있다. 영화 제목인 “소일렌트 그린”이란 식량이 부족한 세상에서 특별히 개발해 보급 중인 신형 인공 식품을 말한다. 그러므로 <>은 19세기 맬서스의 등장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미래 인류의 멸망 시나리오라고 철석같이 밀었던, 맬서스 함정을 정통으로 다룬 영화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성장한다.”라는 말은 어지간하면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지구는 망한다, 그러니 사람이 많은 것은 해악이다,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은 곧 “사람이 곧 모든 파괴의 근원이며, 사람이 없어져야 지구가 살아난다.”는 생각으로도 자주 이어지기도 한다. 재미난 사실은 이 영화에서 다루는 멸망해 가는 미래가 2022년이라는 점이다. <>은 1973년에 개봉된 영화이므로 이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이란 영화가 제작되던 1972년으로부터 50년 후를 말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이 SF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의 미래라는 시간은, 2024년을 사는 현대의 우리에게는 2년 전의 과거가 되었다. 나는 영화를 보는 과정에서 이렇게 시간의 꼬임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신비롭다. 게다가 요즘 이 영화의 내용을 보다 보면 더욱 중요한 사실도 깨달을 수 있다. 실제 2022년이 인구가 너무 많아 식량 부족으로 멸망하는 시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2020년대는 인구가 너무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구 감소와 초고령화가 문제인 시대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 겪고 있는 문제도 아니다. 한국에서 인구 문제가 워낙 극심하게 나타나

  • 관리자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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