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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올해의 시

  • 작성일 2018-12-01
  • 조회수 4,211

 

2018 올해의 시

 

 

 


기획의 말

    문장 웹진에서는 2018년 연말 기획으로 한 해를 정리하면서 어떤 작품들이 뛰어난 성취를 거두었는지 함께 되돌아보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시와 소설 부문 각 10명의 평론가들에게 올해 발표되었던 시·소설 중 가장 좋았던 작품 3편씩을 선택해 달라는 요청을 드렸습니다. 2018년 1월부터 현재까지, 온/오프라인 문예지에 발표된 모든 시와 소설을 대상으로 하고, 시는 분량에 관계없이 개별 작품을, 소설의 경우 300매 이하의 중·단·엽편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저희는 이 선택의 결과를 활짝 펼쳐 놓고자 합니다. 작품의 순위를 매겨서 우열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흥미로운 리스트로 자유롭게 공유되어 더 많은 독자에게 가 닿는 것만이 저희의 바람입니다. 모쪼록 이 선택의 결과를 즐겁게 지켜 봐 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2018 올해의 시]

 

 

고봉준

 

 

 

김지녀, 「나무와 나 나무 나」, 《문장 웹진》, 156호(2018, 4월호)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이민하, 「누드비치」
《문학동네》, 96호(2018 가을)[/caption]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장혜령, 「번역자」,
《현대시》(2018, 11월호)[/caption]

 

    한 사람의 시인이 마주하는 컴퓨터의 빈 여백, 즉 백지는 사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다는 점에서 '백지'라고 말할 수 있지만, 어떤 것을 어떻게 써야 한다는 '시'에 대한 기성의 질서들이 지배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코 '백지'는 아니다. 모든 예술가는 이 기성의 질서를 지우면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창조하게 된다. 우리가 인간, 아니 생명의 특징이라고 주장하는 인식, 감각, 감정 등에도 기성의 질서는 존재한다. 모름지기 좋은 예술이란 우리의 감각과 감정을 지배하고 있는 이런 질서에서 벗어나 경험 자체를 드러내는 것, 그럼으로써 우리의 신체가 다른 가능성을 향해 개방되도록 만드는 자극을 포함한 작품이 아닐까.
    김지녀의 「나무와 나 나무 나」는 '나무'와 '나'라는 두 기호를 독특한 주문처럼 반복함으로써 '나무'와 '나'를 주체-대상이라는 익숙한 관계에서 끄집어내어 둘의 경계가 흐릿한 지점으로 데려간다. 시인은 '나무'라는 단어를 반복하는 행위가 "나무를 말하려고 한 건" 아니라고 고백한다. 시인의 "손끝에서 얇은 가지 하나가 쑥" 하고 돋아나는 마지막 장면에서 "나무와 나"라는 기존의 질서는 "나무 나"라는 새로운 질서로 재탄생한다. 이민하의 「누드비치」는 '비치'보다는 '누드'라는 단어에 주목해서 읽어야 할 듯하다. 누드, 즉 아무것도 걸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국경을 벗고, 난민의 옷을 벗고, 모국어를 벗고, 피부색을 벗고, 그리하여 "모든 걸 벗고 나면 새사람이 될까"라는 물음을 통해 시인은 '누드'라는 단어의 새로운 용법을 제안하고 있다. 장혜령의 「번역자」는 시인의 이러한 시 쓰기를 '번역' 행위라고 규정하고 화자에 따르면 시인은 창조가 아닌 번역하는 존재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번역'의 출발점이 '나'가 아니라 "내게 자꾸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시인이 말하는 '번역'이란 세계와 사물의 침묵을 목소리로 옮기는 행위일지도 모르겠다.

 

 

 

 

 

작가소개 / 고봉준

200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평론집 『반대자의 윤리』, 『다른 목소리들』, 『유령들』, 『비인칭적인 것』이 있음. 현재 월간 《시인동네》, 계간 《포지션》 편집위원.

 

 

 

 

 

 

 

 

 

 

 

 

 

 

 

 

 

 

 

 

 

 

 

 

 

 

 

 

 

 

[2018 올해의 시]

 

 

말이 되지 않는 말만이 할 수 있는 것

 

김나영

 

 

 

    좋은 시를 읽고 나서 그 좋음에 관해서 설명하는 일은 언제나 곤혹스럽다. 좋은 시는 그것이 왜 소설이 아니라 시여야만 하는가를 생각하게 하고, 그 이유는 대개 어떤 논리나 경험으로 해명되기 어려운 데에 있기 때문이다. 시는 이 세상의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어떻게든 말해 보기 위해 쓰이는 이야기다.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이장욱, 「누구의 토끼 뿔」,
《창작과비평》, 180호(2018, 여름)[/caption]

 

    이장욱의 「누구의 토끼 뿔」(《창작과비평》, 2018 여름)은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듯 알 수 없는 모양의 뿔을 가진, 알 수 없는 존재를 상상하게 한다. 토끼 뿔은 토끼의 뿔이거나 토끼처럼 생긴 뿔이거나 이도저도 아닌 그냥 평범한 뿔일 수도 있다. '누구'는 그처럼 명명할 수 없는 특징('토끼 뿔')을 제 속성으로 삼기 때문에 '누구'라는 익명으로 불린다기보다 오히려 '누구'를 대하는 이가 '누구의 토끼 뿔'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로도 '누구'를 '누구'라 부르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누구는 특정 대상을 향하는 애정 어린 물음이라기보다 모든 존재를 뭉뚱그려 이름 하는 질문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이 시를 통해 생각해 보게 된다.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문보영, 「배틀 그라운드」,
《문학동네》, 95호(2018, 여름)[/caption]

 

    문보영의 「배틀 그라운드」(《문학동네》, 2018 여름)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 만들어내는 온갖 종류의 불통과 불협화음에 주목해 온 시인의 관심을 게임 서사에 빗대어 쓴다. 여기서 게임의 장면은 꿈결처럼. 꿈은 다시 실제 삶의 축소판처럼 읽힌다. 시인은 게임과 꿈과 현실을 구분하고 그 각각의 세계가 어떤 룰을 갖고 있어서 서로 같고 다른가를 설명하려는 기왕의 논리를 벗어나 그 구분이 무의미해지는, 세 세계가 뒤섞인 난장판의 세계를 상상하게 한다.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박연준, 「탈피 중인 뱀의 노래」,
《현대시》(2018, 9월호) [/caption]

 

   박연준의 「탈피 중인 뱀의 노래」(《현대시》, 2018, 9월호)와 함께 실린 다른 시에서 화자는 모국어를, 자기에게 익숙한, 의식 없이도 능숙하게 쓸 수 있는 말을 잊어버리기로 한다. 그 잊음과 이 시의 벗음은 닮은 데가 있고 그것은 시가 생겨나는 방식이기도 하다. 나무 아래에서 나의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나는 모든 것이 된다. 한국어 한 글자 단어들이 뱀의 몸처럼 혹은 뱀이 벗어 놓은 허물의 형상으로 주루룩 이어지며 버려지듯 쓰일 때 말의 의미에 집중했던 긴장된 의식은 스르륵 풀어지고 의미상 아무것도 얻은 게 없지만 그 때문에 나무 아래에서 우주의 법칙을 깨우친 누군가처럼 우리는 한껏 고양된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 세 편의 시는 시가 왜 시여야만 하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칠판지우개가 칠판에 가득 적힌 글자를 지우는 동시에 무언가를 써나가듯, 시는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이미 적힌 말들을 거듭 의심하고 지움으로써 그 지워짐을 옹호하고 바라보는 자들에게 읽히는 투명한 문자로 쓰인다. 그것은 나와 너와 우리의 세상이 때로는 얼마나 두루뭉술한 이해를 바탕에 두고 쓰이는 말인지를 고발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 말이 무엇인지 다시 묻고, 묻는 자의 물음마저 거듭 확인하는 말이야말로 시의 언어가 된다. 그렇게 좋은 시는 저마다가 저마다로 살기를 기원하는 말이다.

 

 

 

 

 

작가소개 / 김나영

고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졸업. 2009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평론부문 당선 등단. 현재 《쓺》, 웹진 《비유》 편집위원.

 

 

 

 

 

 

 

 

 

 

 

 

 

 

 

 

 

 

 

 

 

 

 

 

 

 

 

 

 

 

[2018 올해의 시]

 

 

박상수

 

 

 

이원하, 「달을 찌는 소리가 나를 부르는 소리였다니」(《창작과비평》, 2018 가을)
박세랑, 「프랑켄슈타인의 인기는 날마다 치솟고 너희는 약 맛을 좀 아니?」(《문학동네》, 2018 가을)
최백규, 「불시착」(《문장 웹진》, 2018, 11월호)

 

이원하, 「달을 찌는 소리가 나를 부르는 소리였다니」, 《창작과비평》( 2018 가을)


 

    신인들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고 세 편을 골랐다. 먼저 올해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원하의 시. 그가 보여주는 유머러스하면서도 산뜻한 슬픔이 좋다. 때 묻지 않은 감수성으로 바다, 혼자, 미래, 슬픔에 대해 말하면서도 요모조모 너그럽다. "앞으로 나는 누굴 만날 수 있을까요?//찐 굴 같은 대답을 들었지만/역시 그럴싸하게 잘 모르겠어요"와 같은 구절에는 나이를 훨씬 더 먹은 여유와 능청도 들어 있어 신기하다. 세상과 동떨어진 느린 존재로서의 자신과 동류의 존재에 대한 이해가 깊어서 어떻게 이렇게 한적하고 고고하면서도 참신할까, 라는 마음으로 감탄하며 그의 시가 발표될 때마다 반갑게 읽어 나가는 중이다.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박세랑, 「프랑켄슈타인의 인기는 날마다 치솟고
너희는 약 맛을 좀 아니?」,
《문학동네》(2018 가을)[/caption]

 

    한편 올해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등단한 박세랑의 시는 빡빡하고 뾰족하고 치열하고 자학적이고 위태롭다. 고통과 불안에 시달리는 여성 화자가 '회복해서 또 살아야 하는 일의 무서움'에 대해 말하는데 여성시의 전통에 맞닿은 이 색깔이 더욱 흥미로워지는 것은 여기에 절대 지지 않을 생명력이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깨어나면 사람처럼 우스운 것들은 절대로 안 믿어야지! (…)난 아직 깨어날 줄 모르고 시체 냄새 나는 향수나 칙칙 뿌리고 놀러가야지 아무하고나 사랑할 땐 흥청망청 뒤로 해야지"라는 자멸의 언어는 묘한 자기 긍정의 열망과 맞닿아 있어서 기운이 센 완력으로 세상에 자기 존재를 고통의 증거로 제시하면서도 당당하다. 이 거침없는 행보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궁금해져서 앞으로도 이 시인의 작품을 계속 따라 읽어 나갈 것 같다.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최백규, 「불시착」,
《문장 웹진》(2018, 11월호) [/caption]

 

   마지막으로 2014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한 최백규의 작품을 골랐다. 그의 작품에는 성장기 소년의 성장통과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 그것을 좌절시키는 현실에 대한 불행한 감각이 마치 대만 청춘 영화의 비극적이고도 아름다운 클라이맥스를 박제해 놓은 것 같은 이미지 속에 동시에 존재한다. 정말로 아름답게 비극적이다, 라는 말이 가능하다면 최백규의 어떤 작품들이 바로 그에 해당한다고 말하고 싶다. "여름을 밟는 걸음이/곱다//이 순간을 위해서 그렇게도 많은 친구들의 무덤이 필요했던 거구나"라든지 "다시 사랑하자 했을 때 다음 생에도 이미 폐허라는 걸 알았다//꽃을 먹고 죽으면 나비로 태어난다는 미신을 믿었다"와 같은 낭만적이고도 비극적인 문장을 읽노라면 약에 취해 한없이 몽롱한 기분에 휩싸여 여름 바닷가의, 그러나 폐허의 백사장에 누워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영원히 여름이 지나가지 않을 것만 같은 이 기분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작가소개 / 박상수

1974년 서울 출생. 시인, 문학평론가. 시집으로 『후르츠 캔디 버스』, 『숙녀의 기분』, 『오늘 같이 있어』가 있고, 평론집으로는 『귀족 예절론』, 『너의 수만 가지 아름다운 이름을 불러줄게』가 있다.

 

 

 

 

 

 

 

 

 

 

 

 

 

 

 

[2018 올해의 시]

 

 

송종원

 

 

 

장수진, 「구오의 일기」, 《문학동네》, 2018 가을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장수진, 「구오의 일기」,
《문학동네》, 96호(2018 가을)[/caption]

 

    현실이 수용소라는 비유는 낡은 것이지만, 그 낡은 관념을 시대에 맞게 재조정함으로써 사유의 계기로 삼는 것 또한 문학의 역능일 것이다. 현실이 억압적 수용소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거죽의 몸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장수진의 시에는 "육신. 거죽"의 이미지가 늘 생생하게 자리하는 것을 물론이거니와 그를 넘어서며 질주하는 운동성을 보여준다. 시인의 표현대로 이 몸은 늘 어떤 '헝그리' 상태이다. 당연하게도 이 헝그리는 욕구의 차원을 넘어선 존재의 표현이다. 사막과도 같은 육체에 잠재한 욕망의 씨앗을 발아시켜 무수한 생명의 수풀과 바람을 불러오는 자유의 실험! 장수진은 이 실험에 늘 과감하게 그리고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시인이며, 나는 이 시인의 실험에 늘 응원을 보내고 싶다.

 

 

이장욱, 「누구의 토끼 풀」, 《창작과비평》, 2018 가을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이장욱, 「누구의 토끼 풀」,
《창작과비평》, 181호(2018 가을)[/caption]

 

    이장욱의 시를 읽고 나면 머릿속이 조용해지는 것은 물론 오싹해진다. 마치 누군가 내 머릿속의 악몽을 끄집어내 차가운 불로 태워 준 기분이랄까. 그의 시는 우리의 인식이란 것이 우리를 얼마나 자주 배반하는지를, 그 배반의 경험 속에 사람이 얼마나 고독해지는가를 냉정하게 그려낸다. 그런데 그 배반과 고독의 경험이 아플지라도 생각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그 생각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그 생각을 해체한다는 생각까지 해체하라고 우리에게 속삭이는 것 또한 그의 시이기도 하다. 나는 이장욱의 시의 언어가 펼쳐내는 저 차가운 의식의 형태와 뜨거운 감각의 형상에 자주 고개를 숙이게 된다. 그럴 때마다 왠지 졌다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문보영, 「지리상의 발견과 바닐라라떼에 관한 의견 차이 2화_미안해 널 미안해」, 《쓺》, 2018 하권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문보영, 「지리상의 발견과
바닐라라떼에 관한 의견 차이 2화」,
《쓺》, 7호(2018 하권) [/caption]

 

   말들에 활기라는 것이 있다면 최근의 한국 시 중에서 가장 많은 활기를 내장한 언어는 문보영이 아닐까 싶다. 이 활기는 말을 자유롭게 부린다. 말들의 무게와 그에 따른 평가에 휘둘리지 않은 채로 속된 말을 속되지 않게 구사하고 경건한 말을 경건에 사로잡히지 않게 활용한다. 그러다 보니 시의 언어가 매끄러운 표면을 지닌 물체가 아니라 요철이 심한 물질처럼 느껴질 때가 많은데, 이 요철이 이상하게 독자의 내면을 긁고 지나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선정작은 24시간 카페로 들어가 나올 때까지의 경험과 단상들을 펼쳐 놓는 세 편의 연작 중 하나인데, 조금은 시시껄렁한 경험의 풍경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만한 이 시는 의외로 이상한 공포감을 형성한다.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 우리의 일상 속에 유령과도 같은 그것이 숨어 있다고 문보영의 시는 말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시는 구체적으로 지목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것 안에 우리의 훼손된 삶의 일부가 자리하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다.

 

 

 

 

 

작가소개 / 송종원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텅 빈 자리의 주위에서」, 「21세기 오감도(烏瞰圖)」, 「21세기 소년 탄생기(誕生記)」 등이 있음.

 

 

 

 

 

 

 

 

 

 

 

 

 

 

 

[2018 올해의 시]

 

 

시의 한 발

 

안서현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문보영, 「배틀 그라운드」,
《문학동네》, 95호(2018 여름)[/caption]

 

    문보영 시인은 시에 대해, 또 시에 대한 기존의 관념에 대해 지치지 않고 질문한다. 엄숙주의를 버리고 한없이 경쾌한 태도로 시에 다가간다. 시인의 첫 시집은 이와 같은 '시 놀이'의 유희적 힘으로 가득 차 있었다. 특히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놀이 이미지가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배틀 그라운드」(《문학동네》, 2018 여름)를 읽었을 때 또 '문보영적인 것'에서 한 발 미끄러져 나가고 있는 시인을 발견했다. 그 유연함이란! 시가 게임이라는 또 다른 놀이의 세계를 만날 때, 그것은 비단 시에 대한 질문이나 '시 놀이'로만 그치지 않는다. 인간의 불안과 고독의 깊이를 보여주고 있다. "너는 뒤돌아본다. 무서워하지 마, 네가 말한다. 너와 나는 같은 편이지만 너는 나의 두려움을 증폭시킨다. (중략) ...가지 마, 가지 마, 거기 사람 있어, 라고 너는 말한다." 문보영은 여전히 경쾌한 발걸음으로 이렇게 또 한 발, 생에 대한 인식의 깊이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임솔아, 「바캉스」,
《창작과비평》, 181호(2018 가을)[/caption]

 

    임솔아 시인의 시는 정직하다. 과장하지 않는다. 「바캉스」(《창작과비평》, 2018 가을)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아무것도 보지 않고 있다는 것을 나는 똑똑히 보고 있다." 이것이 첫 문장이다. 정직에서 나온 역설이다. 자신이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 거기에서 출발하다 보니 이러한 역설의 문장이 쓰이는 것이다. 임솔아의 시는 성큼성큼 발을 내딛지 않는다. 주저하고, 머뭇거리고, 멀찌감치 머무른다. 그러다가 한 발씩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그러한 특징을 두고 "정적으로 태어나버린 목소리"라 일컬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시 속 '나'는, "온 힘을 다해 가만히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5연에서 '나'는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한다. 바닷가에서 젖은 채 잠들어 있는 사람에게 타월을 덮어 준다. 극적으로 연출되거나 과장된 행동이 아니다. 그저 담백한 몸짓이다. "가만히 가만히" 있던 화자가 이렇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은 지금이 바캉스의 시간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들 쉽게 윤리를 이야기할 때 시인은 이 간단한 행위마저도 천천히, 쉽지 않게 이어나간다. 그 주저와 거리와 유보의 태도가 오히려 지극히 윤리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그 어려움의 세계에, 쉽게 설득되었다.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백은선, 「비천의 형식」,
《문학과사회》, 123호(2018 가을) [/caption]

 

    다음은 백은선 시인의 「비천의 형식」(《문학과사회》, 2018 가을)이다.

 

    우주에 울려 퍼지는 교향곡을 생각해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그게 다 소용이라는 마음과
    모래 알갱이들
    모래 알갱이들

 

    '비천의 형식'이란 무엇일까. 슬픔에 관해 쓰는 과정, 그 형식화의 과정은 밑바닥을 치는 순간과 다시 건져 올려지는 순간을 포함한다. 쓰는 일마저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밑바닥의 슬픔, 그 비천이 어느 순간 기꺼이 쓰이는 일, 그것이 비천의 형식이다. 밑바닥에서 건져 올려지기. 시간의 알갱이들이 슬픔이 되어 흘러내리거나 손 안에서 빠져나가다가 다시 건져진다. 어둠만이 손에 검정으로 묻어나고 몸을 물들이는 가운데 흩어진 빛의 알갱이들 역시, 영화관의 어둠으로 들어가 빛무리를 바라본다는 눈부신 사랑의 형식에 의해 건져 올려 지기도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슬픔의 밑바닥까지 잠기면서, 또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비관에서 자신을 건져 올리면서 한 발씩 나아가는 이 시인. 그 건져 올림의 순간이 바로 비천이 형식을 입는 순간, 슬픔이 시의 손길에 기대는 순간이다.
    결국은, 자기가 나아온 자리에서 한 발 더 밀고 나아가는 시가 좋은 시가 아닐까. 그런 기준에서, 이 세 편이다.

 

 

 

 

 

작가소개 / 안서현

2010년 월간 《문학사상》 신인상(평론 부문)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 격월간 《현대시학》 편집위원.

 

 

 

 

 

 

 

 

 

 

 

 

 

 

 

 

[2018 올해의 시]

 

 

안지영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안미옥, 「도」,
웹진 《비유》 2018년 7월호[/caption]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안희연, 「비롯」,
《현대문학》2018년 9월호 [/caption]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백은선, 「비천의 형식」,
《문학과사회》123호 (2018년 가을) [/caption]

 

    올해 발표된 시 가운데 안미옥의 「도」(웹진 《비유》 2018년도 7월호), 안희연의 「비롯」(《현대문학》 2018년도 9월호) 그리고 백은선의 「비천의 형식」(《문학과사회》 2018년도 가을호)을 뽑았다. 우선 안미옥은 내면성의 문제에 천착하면서 '진짜 마음' 즉 진정성의 문제를 탐구해 왔다. 「도」에는 이러한 천착이 자칫 자폐적 나르시시즘으로 귀착될 수 있음을 경계하는 한편으로 세계의 고통에 무감하지 않으려는 주체의 결단이 드러나 있다. 자기 안으로 파고드는 대신 타자들과의 소통 및 연대를 통해 이 세계에 더 깊게 뿌리내리고자 하는 태도에는 단호한 환대라 명명할 수 있는 윤리적 태도가 깃들어 있다. 이는 모나드의 성채 안에 갇혀 무능하고 무기력한 주체의 모습이 나타나는 최근 한국 시단의 경향을 돌아보았을 때 특히 주목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안희연은 특유의 감각적 언어로 생의 비밀에 대한 오래된 물음에 답을 제출하고 있다. 안희연 시에서 발견되는 슬픔의 정동은 「비롯」에서 특유의 빛을 발하는데, 여기서 슬픔이란 오롯이 자신에게 배당되어 있는 고독의 결과물이자 동시에 '우리'를 하나의 존재로 묶어 주는 끈과 같은 것으로 그려진다. 시 전반에 배어 있는 유유한 슬픔은 탄생과 죽음의 장면을 하나의 문장으로 완성한다. 이 시는 생사의 진폭을 유려하게 통과하며 존재의 아름다움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백은선 시에는 정돈되지 않은 감정이 폭발 직전의 강렬한 에너지를 뿜으며 열 페이지가 넘는 긴 호흡으로 이어진다. 백은선의 시를 읽으면 2010년대를 지배하는 '마음의 레짐'(김홍중)이 그려진다. 미래를 기대할 수 없는 시대의 불안, 분노, 슬픔, 자책, 부정 등이 용광로처럼 끓어 넘친다. 그런데 「비천의 형식」에서 백은선의 시적 주체는 스스로의 삶을 비천하다고 자학하면서도 끝끝내 절박한 희망을 놓지 않는다. 더구나 격렬한 파토스에 전염되어 한 차례 격렬한 정동의 물결을 지나보낸 다음에는 묘한 위안을 얻게 된다. 백은선은 이러한 제의적 행위를 통해 '비천의 형식'으로 추락해 버린 시의 존재이유를 증명해 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작가소개 / 안지영

서울대 국문과 박사 과정 졸업. 201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되어 등단. 청주대 국어교육과 조교수로 재직 중.

 

 

 

 

 

 

 

 

 

 

 

 

 

 

 

[2018 올해의 시]

 

 

시의 입, 거듭 손과 발

 

양경언(문학평론가)

 

 

 

■ 이장욱, 「무기여 잘 있거라」, 《문학동네》, 96호(2018년 가을호)
■ 김현, 「사랑의 이목구비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 《문학동네》, 95호(2018년 여름호)
■ 안미옥, 「홈」, 《문학3》, 1호(2018년)

 

    거짓을 믿지 않기로 한 시대가 되었다고, 2018년에 대해 쓴다. 이 문장은 일견 묘한데, 왜냐하면 거짓이 진짜라고 믿었던 시기를 우리가 이미 거쳐 왔다는 말로 읽히기 때문이다. 혹은 거짓만이 전부라고 착각하기를 종용받았던 때가 있었다는 얘기로 들리거나. 촛불 이후의 현실을 살면서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무언가를 새로 시작할만한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다시 감별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이를 거짓과 진실에 대한 이해를 더욱 치열히, 촘촘히 진행하는 과정으로 여긴다면, '거짓을 믿지 않기로 한 시대'라는 표현이 단순하게 '순수한 진실의 세계로 입성한 오늘'로 의미화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가장자리라고 여겨지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가 세상의 무게중심을 바꾸는 작업, 이미 지나쳐버린 일들을 거듭 살피면서 감춰져있던 (이전에는 몰랐던) 운동 에너지를 감지하는 작업, 해서 세상과는 다른 기준으로 미래의 기억을 겨루는 작업은 시가 오랫동안 해왔던 일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작업이 올해와 같은 시기와 맞물렸을 때, 올 한해 씌어진 시들은 어쩐지 한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입으로 노력한 것으로 읽히기도 한다. 요컨대, 극단적으로 정직하려는 이들의 움직임이 거기에서 감지된다는 것이다. 시의 입은 정직하려 할수록 구체적으로 몸짓한다. 그것을 끝까지 하려는가, 끝까지 하려는 과정에서 생기는 긴장을 기꺼이 품는가, 어떤 방향을 향해 있는지를 분명히 인식한 언어가 땅에 제대로 발 디디려는가의 정도가 올해를 기억하기 위한 최종의 시 세편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만들었다.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이장욱, 「무기여 잘 있거라」,
《문학동네》, 96호(2018년 가을호)[/caption]

 

 

    이장욱의 시는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그 발생의 반대편에 서서 그 발생을 다시 비춰보는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반대라고 일컬은 그 편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염두에 둘 법한 위치가 아니다. 어디를 습관적으로 가리키려 들 때마다 '거기 말고'라는 폭탄 같은 질문을 던지고 그 다음을 찾아가는 일, 찾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일. 그런 일을 올해의 이장욱이 했다. "기적적인 세계"라는 표현이 은폐한 실질적인 풍경을 올해의 우리는 이장욱과 더불어 사색할 수 있었다.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김현, 사랑의 이목구비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
《문학동네》, 95호(2018년 여름호)[/caption]

 

    김현의 시는 우리가 찾아가려는 '그 다음'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라도 대면할 수 있는지를 심문한다. 이와 같은 심문은 낭만을 깨는 방식으로 드러나는 세상 한가운데에 독자인 우리를 한 순간에 세운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친숙한 줄 알았더니 낯설고, 낯선 줄 알았더니 이미 친숙한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는 세상에 대한 폭로에 거침없이 노출된다. 올해에도 역시나, 김현은 좀처럼 물러나지 않는다.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안미옥, 「홈」,
《문학3》, 1호(2018년)[/caption]

 

    안미옥의 시는 '이것 또는 저것'을 분별하기 위한 분할선을 '이것 그리고 저것', 혹은 '이것/저것'의 방식으로 재배치하는 작업에 관심을 두는 것 같다. 좀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빛이 분산하는 속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자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날 때, 그이가 서 있는 자리가 밑으로 꺼지지 않게 단단히 받치는 일을 보이지 않는 빛이 할 수도 있다고 강렬하게 발화하는 일은 그러한 관심 속에서 가능하다. 마치 어디서든 자랄 수 있는 알뿌리처럼, 올해의 안미옥은 이분법을 허물고 출발이 가능한 곳을 찾아 짚어냈다.
    거짓을 믿지 않기로 한 시대가 되었다고, 올해에 대해 앞서 썼다. 거짓을 판별하기 위해서 올해의 시들은 우리가 손과 발을 지금 어디에 두었는지 살필 필요가 있다고 거듭 말하는 것 같다. 섀도우복싱은 필요 없다고 여기면서, 불순한 구체성을 기꺼이 감당한 채로 바닥을 딛고 가려는 시들의 돌진은 참 멋이 있다. 거기서부터 우리는 언제라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거듭.

 

 

 

 

 

작가소개 / 양경언(梁景彦)

1985년 제주 출생. 2011년 《현대문학》문학평론 부문에 「참된 치욕의 서사 혹은 거짓된 영광의 시 : 김민정론」이 당선되어 등단.

 

 

 

 

 

 

 

 

 

 

 

 

 

 

 

[2018 올해의 시]

 

 

이성혁

 

 

 

    내가 제시한 세 편의 시는 '올해의 좋은 시'라기보다는 "평론가 이성혁이 올해 읽은 시 중 깊은 인상을 받은 시 세 편"이다. 뭔 동어반복이냐는 반문을 듣겠지만 굳이 이런 말을 덧붙이는 이유는, 우선 올해 발표된 시를 많이 읽지 못했다는 것을 밝히고 싶기 때문이다. (소위 '메이저 잡지'에서 시를 뽑게 된 것도 나의 한정된 독서에 따른 것이다. 시인과 독자들께 미안한 마음이다.) 내가 읽은 시보다는 안 읽은 시가 훨씬 많다는 것, 그 시편들 중에서도 '좋은 시'가 분명히 많이 있었을 것이다.
    또한 순전히 주관적인 이유를 달아 '좋은 시'를 선정했다는 점도 말해 두고 싶다. 신작시들을 읽으면서 정말 좋은 시라고 찬탄을 불러일으킨 시편들이 많았기에, 그중에서 좋은 시 세 편을 선정하는 일은 곤혹스러웠다. 고심 끝에, 나의 마음을 오래 움직인 시편들 중에서 지금 우리 시대에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시를 '좋은 시'로 제시하자고 마음먹었다. 이른바 '비평가로서의 책무'를 생각한 것인데, 그렇지만 감상자로서의 주관도 잃지 않으면서 선정에 임하고자 했다.
    그리고 '새로움'에 집착하지 않고 시를 고르고자 했다. '새로운 시'는 다른 분들이 조명해 주리라고 생각했고, 한편으로 새로움에 대한 추구 자체가 이젠 낡아버린 태도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특히 그 새로움이 표현의 새로움 ― 이젠 지겨워진 그 '낯설게 하기' ― 이라면 말이다. 새로움이 온전한 가치가 될 수 있으려면, 그것은 온몸으로 추구되어 어떤 사건을 가져오거나, 보들레르가 말했듯이 역설적으로 고전적인 것 ― 오래된 것 ― 을 확보하는 데 성공해야 한다. 이러한 성공은 쉬운 일이 아니다. 새로운 표현 자체가 시의 가치가 될 수는 없으며, 게다가 시의 가치를 새로움에'만' 두는 것은 시의 잠재성을 좁게 한정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조성웅, 「위험에 익숙해져갔다」,
《창작과비평》, 182호(2018 겨울)[/caption]

 

    내가 고른 이문재나 조성웅의 시를 '낡은 시'로 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직설적이며 쉽게 읽히면 좀 '떨어지는 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러한 생각은 시에 대한 '덜 여문' 생각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이들의 시는 깊은 '이미지-사유'를 보여주고 있는바, 현재 한국 시에는 이러한 사유의 수혈이 필요하다.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이문재, 「평화보다 먼저-기도하듯이 노래하듯이」,
《문학동네》, 96호(2018 가을)[/caption]

 

    이문재의 시는 '비현대적인' 잠언적인 문체로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평화에 대한 근본적인 사유 ― 생태학적 세계관에 따른 ― 로 이끈다. 평화보다 먼저 평화가 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시인의 전언은 현재 갖추어야 할 삶의 태도를 다시 생각하도록 만든다. 조성웅의 시는 직설과 진술, 이미지를 적절히 배합하면서 주류 미디어에 조명되지 않는 노동의 세계를 보여준다. 특히 H빔 위에 위태롭게 모로 누운 노동자의 이미지로부터 깊은 의미와 전망을 이끌어내는 시의 마지막 부분은 뜨거운 인상과 여운을 준다.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신영배, 「물버스 정류장」,
《창작과비평》, 180호(2018 여름)[/caption]

 

   신영배의 몽환적인 위의 시는 여성성 ― '물송이'의 이미지로 상징되는 ― 의 문제를 아름답게 제시하고 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여성주의는 하나의 시대정신이 되고 있는바, 어떠한 여성주의를 추구해야 하는지 다양하고 섬세한 모색이 절실하다. 위의 시가 바로 그러한 모색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시를 여성주의에 환원해서 읽을 필요는 없겠지만, 나는 이 시에서 전개되는 이미지로부터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어떠한 상황에 있는지 암시받을 수 있었으며, 여성성이 지니고 있는 힘 ― 물의 힘 ― 을 느낄 수 있었다.

 

 

 

 

 

작가소개 / 이성혁

서울 출생. 문학평론가. 2003년 《대한매일신문》(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불꽃과 트임』, 『불화의 상상력과 기억의 시학』, 『서정시와 실재』, 『미래의 시를 향하여』, 『모더니티에 대항하는 역린』 등.

 

 

 

 

 

 

 

 

 

 

 

 

 

 

 

[2018 올해의 시]

 

 

시-삶

 

장은정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김현, 「무덤」,
<빵과 장미> 하권, 《현장잡지》 2018년 5월 17일[/caption]

 

    올해의 시를 골라달라는 요청에 머뭇거림 없이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은 김현의 「무덤」이었다. 이 시는 궁중족발 사태의 후원을 위해 개최된 낭독회에서 시인이 직접 시를 읽으며 현장에서 발표되었다. 시가 낭독되는 내내 "현아누나"를 부르는 구절이 반복되는데, "여러분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세상은/ 보증금 3000만원을 1억원으로 300만원 월세를 1200만원으로 올리는 세상입니다"로 간명히 서술될 수 있는 현실 속에서 서로의 이름을 거듭 부르는 일만이 우리를 어떻게 겨우 살아남게 하는지를 직접 경험하게 해준다.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백은선, 「나는 잠든 네 눈 속에 어떤 장면이 있는지 몰라」,
재미공작소 특별전시, 〈시공간집〉[/caption]

 

    내게 2018년은 혼자 읽기가 아니라 함께 읽기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시들에 대해 거듭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시간이었고, 백은선의 「나는 잠든 네 눈 속에 어떤 장면이 있는지 몰라」 역시 함께 읽기 속에서 더욱 빛나는 시편이었다. 재미공작소에서 주최한 〈시공간집〉 전시에서 발표된 이 신작시는, 오로지 필사와 녹음으로만 독자들이 시를 소유할 수 있다는 원칙 속에서 진행되었다. 책이라는 종이 매체가 아니더라도 시적인 것이 발생할 수 있음을 경험하게 된 것은 이 전시의 기획력 덕분이지만, 한 기획 아래에서 같이 발표된 여러 시들은 그 시에 따라 독자-관람객에게 상이한 시적경험을 제공한다. 백은선의 시를 소리 내어 녹음하면서 읽어 내려가는 동안, 터질 듯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는 시적 긴장은 혼자서 눈으로 읽어오던 것보다 한결 더 입체적으로 경험되었다. 백은선의 시적 파토스는 둔감해지기 쉬운 분노와 고통의 감각을 가장 세밀한 부분까지도 속속들이 깨어나게 만든다.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이희형, 「예습」,
『현대문학』 2018년 6월호, p.282[/caption]

 

    마지막으로 고른 것은 이희형의 「예습」이다. 등단작이기도 한 신인의 시를 올해의 시 중 하나로 고른 것은, 시적인 것과 일상적인 것이 함부로 구분되지 않도록 애쓰는 이 시의 안간힘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시적 태도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가령 장례식 장에서 마침내 졸음이 몰려오는 순간은 어떤가.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몰려오는 이 졸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덤덤하게 흘러가고 마는 잔인한 일상의 어떤 단면이지만, 동시에 그 순간은 가장 깊은 외상의 영향을 겨우 버티는 이의 절박함이기도 하다. 잠든 이의 어깨를 흔들어 쉽게 깨우는 대신, 깨워도 될까를 거듭 고민하는 시를 읽으며 시와 생활을 함부로 분리하지 않는 시를 읽게 되어 기뻤다.

 

 

 

 

 

작가소개 / 장은정

문학평론가. 2008년 대산대학문학상 평론 부문 수상. 2017년 현대문학상 평론 부문 수상. 문학 웹진 《비유》 편집위원.

 

 

 

 

 

 

 

 

 

 

 

 

 

 

 

[2018 올해의 시]

 

 

전소영

 

 

 

* 선정기준

 

    여기에서 하나의 질문. 눈을 뜨고 있는데도 보기 힘든, 혀가 있는데도 좀처럼 말하기 어려운 이가 있다면 그의 심정이란 어떠할까. 실은 이것이야말로 2010년대 시인들이 공통적으로 처한 현실일 것이다. 파국의 인접어가 된 지 오래인 사회적 문제들, 생사를 장악한 도처의 위험들, 그럼에도 어딘가에 속해 보호받을 수 없게 된 존재들. 생활의 타성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 애써 자의식을 가누어 보아도 무엇에고 쉽게 입술을 뗄 수 없게 된 나날.
    그리하여 이즈음 시인들의 발화 맨 앞자리에는 '시인으로서의 정위(定位)'와 관련된 진술들이 자리 잡고 있다. '무엇에 대해 말할 것인지'에 앞서 '어떤 자리에서 말을 시작해야 하는지'를 묻는 것. 이 물음을 가장 아프게 담보한 시들에 기대어 시가 지나온 길과 나아갈 길을 더듬어 본다.

 

* 선정작 1 : 강성은, 「우리들의 마술적 리얼리즘」, 《포지션》, 2018 가을
* 선정 이유 : 누구도 안전하다고 단언하지 말 것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강성은, 「우리들의 마술적 리얼리즘」,
《포지션》(2018 가을)[/caption]

 

    마술을 보러 온 '나'는 객석에 있다. 여느 때와 같이 마술을 관람하려는데 마술사가 '나'의 예상을 끔찍한 방식으로 뛰어넘는다. 그의 보자기에서 흰 새 대신 두꺼비가 튀어나오고 그는 두꺼비를 씹어 삼켰다가 뱉는다. 가혹한 퍼포먼스가 사뭇 의심스럽다. 하지만 '나'도 관객들도, '그러려니' 하며 박수를 친다. 박수 친 관객들에게 마술사가 장미꽃을 나눠준다. 꽃을 거부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하이라이트인 상자 마술이 이어진다. 여인이 상자 안에 눕고 마술사가 상자를 칼로 찌른다. 더러는 흐느끼고 울기도 했지만 '그러려니' 하는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온다. 마술사가 사라지고 고요한 상자에서 피가 새어 나와 흥건해져도.
    관건은 '그러려니'이다. 박수는 마술의 관성. 단단하게 굳어져 버린 이 관성의 주박에서 풀려나는 일은 쉽지가 않다. 이 시가 말해 준다. 잔혹한 마술이 분명 어딘지 모르게 이상한데도 정작 마술사가 사라질 때까지 객석의 경계를 넘어선 이는 없다. 무지해서일까. 비겁해서일까. 누구도 무대로 난입해 사라지는 마술사를 붙잡고 멱살을 잡거나 상자 속 여인의 생사를 확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객석은 안전한가. 마지막 행이 짐짓 답을 건네준다. 객석에 남겨진 사람들은 마술사가 나눠준 장미 덩굴에, 말하자면 날카로운 가시에 끝내 포박당해 버린다. 이유는 분명하다. 고양이를, 두꺼비를, 상자 속 여인을 간과한 까닭이다.
    그러나 이 시가, 안전해 보이는 생활과 관성의 이 잔인함에 대해 멀리서 바라보거나 위에서 내려다보며 일침을 가하려 쓰인 것은 아닌 것 같다. 화자는 자신마저 '우리'라는 무리 중 한 명으로 스스로를 소속시키고 있지 않던가. 이렇게 적혔다. "나는 관중석에 앉아 있었다." 주변 사람들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내내 보고 있었다." 볼 뿐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박수를 치지 않았지만 박수를 치는 무리 속에 있었다." 그는 장미 가시 덩굴의 중앙에서 가장 아프게 찔리는 중인 것이다.

 

 

* 선정작 2 : 안태운, 「창문을 열어 놓을 때 곳에 따라 비」, 《현대문학》, 2018, 6월호
* 선정 이유 : 판단은 영원히 유보된다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안태운, 「창문을 열어 놓을 때 곳에 따라 비」,
《현대문학》, 762호(2018, 6월호)[/caption]

 

    무엇이 진실인지, 진심인지 쉬이 분간할 수 없게 되어버린 세계 안에서 눈 뜨고 있는 일은 무용할까, 그래도 일말의 유용함을 남길까. 그에 관해서라면 이 시를 참고하는 것이 좋겠다. 여기에는 거의 마지막까지 사실을 확정짓는 그 어떤 어미도 등장하지 않는다. 녹음이 흐르는지 여름이 흐르는지 알 수 없다. 화자가 제가 바라보고 있는 것들의 상태를 확신해 말 하지 않으니까. 대신 '~려나' 같은 추측 또는 혼잣말의 종결어미가 판단을 유보하거나 지연시키는 '나'의 의도를 돋을새김 한다. 물음의 종결어미로도 역접의 연결어미로도 읽히는 '~나'는 시적 현실의 불확실성과 유동성을 거듭해서 강조하고 있다.
    유일하게 확정적인 것이 있다면, '방'같이 존재가 정주할 만한 곳들이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 그로써 그곳의 주인이었거나 그랬어야 할 존재들이 갈 곳을 잃었다는 것. 상황이 이와 같다면 나름의 '창'―관점을 개폐해 가며 삶을 바라보려는 누군가가 있다 해도 그의 눈은 없는 셈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화자는 내내 '너'의 일이 그렇다고 썼으나 자신이라고 다르겠는가. 애초에 스스로 본 것을 믿지도 확정하지도 못하는 그였다. 그럼에도 그는 이 훼손된 세계에서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않은 상태로 창문 속에서 머"무르며 흐르는 바깥에 계속 눈길을 둔다. 이 '그럼에도'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희망의 기색일까, 절망의 기미일까.

 

 

 

 

* 선정작 3 : 정우신, 「지구」, 《시인수첩》, 2018 봄
* 선정 이유 : 우리는 아픔을 느끼지 않네, 이국의 하늘에서 우리의 혀를 잃었기에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정우신, 「지구」,
《시인수첩》, 56호(2018 봄)[/caption]

 

    이렇게 압축 가능하다. 우리는 아픔을 느끼지 않네, 이국의 하늘 아래에서 우리는 혀를 잃었기에(횔덜린). 왜 그런가. 화자는 명백히 지구인처럼 보이지만 지구를 "다른 행성"처럼 "관측"하는 중이다. "절단된 무릎"과 "뿌리 뽑힌 향나무"로 미루어보건대 지구는 이제 폐허인가 보다. "삶은 지속되지 않는데 이야기가 계속될 필요가 있"는지 되물어지는, 미메시스 자체가 거부되는 공간이랄까. 정황이 이러하다면 '나'는 자기 나라의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을 터.
    다만 '나'는 "관측"하기로 결정한다. '관측'이라는 단어는 주체와 대상 사이의 꽤 먼 거리를 담보한다. '나'는 기울어 가는 제 세상을 가감 없이 '바라보기' 위해 일정 거리를 두고 세계로부터 물러선 것이다. 그런데 그 처지를 원망하는지 기꺼워하는지 모르겠다. 도망치려는 것인지 견뎌내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오히려 그는 아픔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 느낀다 해도 말할 마음이 없어 보이는데 ― 그가 이방인이어서일 것이다. 이국에서 말할 혀를 잃어버린 존재.
    그리하여 '나'는 그저 "졸다가", "돌고래가 떠오르는 것을 지켜"보기로 한다. 엄숙함도 비장함도 없는 건조한 바라봄. 그래서 그렇게 압축했다. 이제 시인은 아픔을 말할 수 없네, 그를 이방인으로 만든 현실 안에서 혀를 봉인 당했기에.

 

    이렇듯 자기/시인에 대한 성찰로부터 시작하는 이 시들은 우리에게 어떤 강요도 하지 않는다. '아무려면 어떠한가.'라는 말 속에 흘려보내지는 일상을 가만히, 아주 가만히 흔들어 볼 뿐이다. 어떤 위안은 그저 합리화가 아니었는지, 사위를 돌아보지 않은 채로 안온해질 수 있는 생활이란 과연 있는지, 가장 먼저 스스로에게 물어보면서. 이것이 지금 우리가 시에 기댈 수 있는 최소한의, 그리고 최선의 마술적 리얼리즘은 아닐까.

 

 

 

 

 

 

 

작가소개 / 전소영

2011년 《문학사상》 평론 부문 신인상으로 등단.

 

   《문장웹진 2018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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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과 가을의 일

[에세이] 산책과 가을의 일 박주영 오랜만에 동네 산책을 했다. 여름이 시작되고는 햇빛이 사라진 밤 산책을 하다가 그나마도 열대야 때문에 멈춘 지 오래되었다. 오늘은 해가 뜨기 전 일어났고 스탠드를 켠 책상에 앉아 소설을 썼다. 어느새 창밖이 밝아지는 걸 보다가 해가 완전히 뜨기 전에 바깥으로 나가 걷기로 했다. 산책은 어슬렁거리며 그냥 걷는 것이지만 소설가의 산책에는 생각이 없을 수 없다.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목적이었다면 달리기를 했을 것이다. 나는 산책과 걷기를 구분해서 다이어리에 기록한다. 산책이 바라보고 생각하며 이동하는 것이라면 걷기는 건강이라는 목적을 가장 염두에 둔 움직임이다. 여름이 아니라면 산책은 주로 오후나 해질 무렵에 한다. 늦게 자고 오전에만 일어나도 뿌듯한 사람이라 일어나자마자 소설을 쓰고 쉴 즈음이 대개 그 시간이기 때문이다. 산책을 하면서 내가 지금까지 쓴 것을 생각하다가 빈틈을 메울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고 다음 장면을 생각하기도 하고 이 소설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고심하기도 한다. 여름 해가 뜨기 전 오래간만에 소설을 생각하며 산책을 한다. 나는 문학 전공도 아니고 소설 쓰기를 배운 적도 없고 주변에 글 쓰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소설가가 된 후 소설가를 만날 기회가 생기면 알고 싶은 것들을 질문하곤 했다. 글쓰기가 잘 안 될 때는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2개의 대답을 기억한다. 한 분은 그냥 걷는다, 라고 답했고 한 분은 안 되어도 앉아서 써야지 어떡해, 라고 했다. 두 분 다 그때 20년 가까이 소설을 거뜬히 써온 분이었다. 나는 2개의 답을 지금껏 생각하고 있고 그게 지금의 나에게는 정답이 되었다. 하지만 정답을 안다고 정답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는 자주 책상 앞에서 벗어나고 걷는 것이 아니라 누워 있는다. 그냥 진짜 누워만 있는데, 요즘은 소설 쓰는 일에 자주 지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또 한 분의 조언이 생각난다. 건강을 챙기고 운동을 해라, 그러지 않으면 장편소설을 쓸 수 없다. 여기의 조건은 ‘나이 들수록’이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등단했고 처음부터 장편소설을 썼던 나는 그 조언이 그때는 크게 와 닿지 않았다. 나는 이미 젊지도 않고 약해 빠졌는데 장편소설을 쓰는 데 그리 힘이 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조언의 참 의미는 어떤 고비마다 왔다. 나이는 한 살씩 먹는 게 아니라 쌓여 있다가 한꺼번에 온다는 걸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부터 손목이 아프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허리가 아프기 시작하고 이제 어깨가 아프다. 남들은 여름휴가를 가는 시기 나는 병원을 다녔다. 의사는 어깨 인대가 손상되었다고 했다. 특정 자세를 취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자세는 하필 내가 반평생을 취해 온 자세이다. 지금도 나는 그 자세이다. 자판을 치고 노트에 글을 쓰려면 취할 수밖에 없는 자세. 그리고 의사는 옆으로 눕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나는 그렇게 누운 자세로 책을 읽었다. 너무 크고 두껍고 무거운 책만 그 자세로 읽을

  • 관리자
  • 2024-10-01
다시 서정을 위해

[에세이] 다시 서정을 위해 권상진 스무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서른이 되기 전에 시인이 되겠다고 주변에 떠들고 다녔던 기억이 아슴하다. 「홀로서기」를 외웠고 「지란지교를 꿈꾸며」를 외웠다. 이생진을 읽고 백창우를 읽고 박노해를 읽었다. 잔잔하게 때로는 웅장하게 가슴을 밀고 들어오는 시편들이 심장을 가로세로로 뛰게 만들었다. 백석과 김수영과 기형도의 이름은 몰랐지만 굳이 그들이 아니어도 충만한 시간들이었다. 시집이 이천 원에서 삼천 원 정도 할 때여서 큰 부담 없이 고를 수 있었고 외출할 때 시집 한 권을 들고 밖을 나서도 아무도 이상하게 쳐다보는 이도 없었다. 오히려 뭇 여성들의 시선이 슬쩍슬쩍 내 턱선을 지나 책장에 닿는 기분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생일이나 기념일에는 으레 서점에 들러 시집을 골랐다.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원태연),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류시화), 『친구가 화장실에 갔을 때』(신진호) 같은 시집을 골라 슬쩍 건네던 날들이 아련하다. 스물이라는, 가라앉을 것 하나 없는 맑은 감정에서 속살거리는 말들을 시인들은 대신 말해 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십 대는 가고 이십 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하고 대학을 쫓겨나 군대를 다녀오고 나니 어느새 아무데도 기댈 수 없는 성인이 되어 있었다. 오래된 가난이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그때부터 가난은 나를 가만히 두지를 않았다. 공장 일을 시작했는데 처음 해보는 노동이란 게 미치도록 좋았다. 종일 몸을 쓰고 땀을 흘리는 일이 알 수 없는 쾌감을 안겨 주었고 월급이라는 보상까지 덤으로 안겨 주었다. 시를 읽고 쓰는 일만큼 일이 재미있었고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도 살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더없이 좋았다. 지쳐 잠들기 전 문득 돌아본 시의 한때는 짧은 여행지의 추억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나의 스물은 급류처럼 흘러갔고 시는 둑 너머에 있어 쉽게 손이 닿지 않았다. 하지만 일과 돈, 그리고 자립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노동은 즐겁고 땀은 향기로웠지만 갑자기 내가 꿈꾸던 삶이 이런 것이었던가 하는 질문이 나를 툭 한 번 치고 갔다. 해지는 풍경만 봐도 맥박이 난동을 부리고 꽃과 낙엽의 표정을 살피면 왠지 모를 눈물이 맺히던 한 시절의 기억이 불현듯 피곤에 지친 등을 흔들어 깨웠다. 시인이 되겠다던 꿈을 무참히 짓밟고 나를 공장 노동자로 내몰았던 대학교 재단 이사장의 말이 떠올랐다. ‘약속은 지키면 좋은 것이고 못 지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던 그의 말. 그가 지키지 않은 약속 때문에 학교에서 쫓겨난 나는 궤도를 이탈해 버린 행성처럼 어둠 속으로 무작정 떠밀려가고 있었다. 막막한 혼돈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던 약속이란 단어가 다시 나를 수습하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서른을 지나갔고 아무도 내게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물어 보는 이는 없었지만 스스로와의 약속은 끝내 지켜주고 싶었다. 그렇게 시가 다시 내게로 왔다. 세월도 변했고 시도 변해

  • 관리자
  • 2024-10-01
과거를 보는 미래 SF

[에세이] 과거를 보는 미래 SF 곽재식 며칠 전 나는 한 행사에서 SF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소개하는 발표를 하나 맡게 되었다. 발표가 다 끝나고 질문 답변 시간이 되었는데 청중 중 한 분이 “SF라면 미래를 생각해 봐야 하는데, 왜 옛날 SF를 소개했느냐?”라고 질문했다. 그날 행사 중에는 답변을 짧게 드렸지만 이 내용은 한번 깊게 따져 볼 만한 재미난 주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한번 해보려고 한다. 명작 SF로 자주 손꼽히는 1970년대 영화로 <>이라는 할리우드 영화가 있다. 찰턴 헤스턴이 주연을 맡아 대형 영화사에서 배급한 그야말로 정통 할리우드 영화인데 그러면서도 비참한 미래의 모습을 예상해서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 결말도 뻔한 할리우드 영화의 행복한 결말이라고 말하기는 매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가기에 눈에 뜨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맨 마지막에 주인공이 외치는 대사는 SF 영화사에서 유명한 대사 순위를 꼽으면 상위권에 자주 오를 만큼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미래는 인구가 너무나 빠르게 늘어났기 때문에 멸망해 가고 있는 세상이다. 인구가 너무나 많은 데 비해 식량과 자원은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굶주리고 모든 물자가 부족해 다들 비참하게 살고 있다. 영화 제목인 “소일렌트 그린”이란 식량이 부족한 세상에서 특별히 개발해 보급 중인 신형 인공 식품을 말한다. 그러므로 <>은 19세기 맬서스의 등장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미래 인류의 멸망 시나리오라고 철석같이 밀었던, 맬서스 함정을 정통으로 다룬 영화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성장한다.”라는 말은 어지간하면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지구는 망한다, 그러니 사람이 많은 것은 해악이다,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은 곧 “사람이 곧 모든 파괴의 근원이며, 사람이 없어져야 지구가 살아난다.”는 생각으로도 자주 이어지기도 한다. 재미난 사실은 이 영화에서 다루는 멸망해 가는 미래가 2022년이라는 점이다. <>은 1973년에 개봉된 영화이므로 이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이란 영화가 제작되던 1972년으로부터 50년 후를 말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이 SF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의 미래라는 시간은, 2024년을 사는 현대의 우리에게는 2년 전의 과거가 되었다. 나는 영화를 보는 과정에서 이렇게 시간의 꼬임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신비롭다. 게다가 요즘 이 영화의 내용을 보다 보면 더욱 중요한 사실도 깨달을 수 있다. 실제 2022년이 인구가 너무 많아 식량 부족으로 멸망하는 시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2020년대는 인구가 너무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구 감소와 초고령화가 문제인 시대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 겪고 있는 문제도 아니다. 한국에서 인구 문제가 워낙 극심하게 나타나

  • 관리자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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